선교학

[스크랩] 탈서구화 정책과 선교에 적절한 신학의 개발

수호천사1 2012. 8. 2. 10:52

탈서구화 정책과 선교에 적절한 신학의 개발


상황화에 대한 논고

본 내용은 2005년 11월 16-18일 강화도 성산예수마을에서 KWMA/KCC/USCWM/ISFM/IJFM, KFMN/KJFM 협력이 공동 주최한 '제5회 한국선교지도자포럼' 전체특강 및 토론회 포럼1에서 발표된 내용이다.

탈서구화 정책과 선교에 적절한 신학의 개발
DE-WESTERNIZING DOCTRINE AND DEVELOPING APPROPRIATE THEOLOGY IN MISSION


Mark Harlan

미국 전방개척선교학회(ISFM) 회장으로 섬기고 있는 Mark Harlan은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상황화 신학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집트와 요르단에서 오랫동안 무슬림 사역을 한 바 있으며, 현재 캘리포니아 지역의 여러 신학대학에서 교수직을 감당하며, USCWM/William Carey University에서 실무 리더로서 사역하고 있다.

잘 나가는 아랍 신학교의 교수로 일하게 된다는 흥분과 함께 학기가 시작되기 바로 전 선교지에 도착하였다. 처음 강의를 부탁 받은 과목은 구약 선지서였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에게 선지자들을 통하여 보여주신 약속의 불변함을 강조하였던 신학교 시절의 먼지 쌓인 강의 노트들을 찾아내었다. 노트에 적힌 내용들은 그 땅이 이스라엘의 영원한 상속이요, 폐기될 수 없는 무조건적인 언약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임을 교훈하는 것이었다. 친이스라엘적인 미국을 뒤로하고, 나는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팔레스틴(블레셋) 후손인 나라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땅에 대한 신학강의를 통하여 도대체 어떤 위로와 정의의 희망을 유대인 정착자들과 군인들의 총부리로 자신들의 조상들이 살던 땅을 떠나야 했던 이들 팔레스틴 크리스천 학생들에게 줄 수 있을 것인가? 수입산 신학은 이렇듯 언제나 적절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랍의 정체성과 관련된 민감한 사회적인 이슈에 직면하게 되었다. 아랍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육체적이며 영적인 유산을 이스마엘에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인 복음주의자들은 이스라엘 쪽으로 편향되어 있어서 창세기 16:12절에 등장하는 이스마엘에 대한 들나귀 표현으로부터 그가 모든 사람과 전쟁을 할 것이며 이삭의 후손들과 영원히 적대적일 것이라고 해석을 한다. 이와 같은 신학적인 관점은 아랍 사람들에게 거의 호소력이 없다.

 

더우기, 몇 년 동안 가르치면서 서구 신학의 번역으로는 아랍 사회의 또 다른 주요 관심사와 이슈들을 언급할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서구로부터 이식된 신학은 언제나 정확하고 설득력이 있으며 올바른 행동강령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서구 선교사역을 통하여 많은 아랍 복음주의 신학교들이 세워졌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거의 습관적으로 서구에서 배운 그대로, 동일한 교과 과정에 번역된 교과서, 노트를 사용한 강의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수입품들은 현장의 이야기, 예화, 가치, 사고 방식 및 표현 형식들을 사용하는데에는 실패하였다. 서구 신학은 토착적이지 않은 것이다!

 

놀랄 것도 없이, 아랍의 복음주의 교회들도 서구에 있는 모교회의 교단적 복제들로서, 동일한 교리, 정치구조, 예배형식을 그대로 따르며 단지 말만 다를 뿐이다. 이러한 교회에 들어오는 소수의 무슬림들은 문화적 배신을 이유로 무슬림 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받는다. 그들은 변절을 이유로 핍박을 받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반이슬람적인 태도와, 돼지고기를 먹는 일, 그리고 음주에다 성적인 문란함과 여러 신을 믿는다고 생각되는 서구의 크리스천을 따르는 것 때문이다. 서구의 신학은 서구화된 교회와 크리스천들을 만들어 낸다!


보다 적절한 신학교육을 위한 또 다른 필요가 무슬림과 크리스천간의 관계에 대한 영역에 있다. 아랍 크리스천들은 과거 천년여 기간동안 무슬림들과 대화하여 왔다. 그러나, 그 열매의 증거는 거의 찾기 힘들다. 언제나 동일한 오해, 거부, 논쟁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 가시적인 효과 없이 양자간에 앵무새 처럼 반복되고 있다. 불행하게도 어떤 기독교 용어나 교리적 의미들은 무슬림들이 이해하는 바로는 너무 불쾌하고 신성모독적이어서 자신들이 더렵혀지지 않도록 성경 읽기를 (심지어 만지기 조차도) 두려워 한다. 그들은 크리스천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에 경악한다.

 

 그것을 이교도의 신화와 같이 생각하며 신이 마리아와 성적 관계를 갖고 생물학적인 아들 예수를 낳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무슬림들은 크리스천들은 세 신, 즉 알라(Allah), 마리아(Mary) 그리고 예수가 하나가 된 “Trinity”를 섬긴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적인 신학 표현은 종종 무슬림들로 하여금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수입신학은 복음전도에 있어서 기껏해야 무능을 들어낼 뿐이다.


이상은 아랍 무슬림 문화 가운데 그에 적절한 신학이 왜 그토록 필요한지 설명하는 몇 가지 예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은 다른 선교상황에서도 동일하다. 따라서 정확하고, 호소력 있으며, 의미 있고 적절하며 동시에 토착적이고 변혁적인 새로운 신학적 사고를 개발하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것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신학의 상황화라고 한다. 이 글의 목적은 상황화 신학을(토착적이고, 지역적이며, 적절한 선교 신학과 동일한 의미의) 개발하기 위한 근본적인 원리를 제공하는데 있다.

신학의 접근과 목표

신학을 상황화한다는 것은 주어진 상황에 적절한 방법으로 성경적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딘 길리랜드(Dean Gilliland)는 신학을 “해당하는 공간과 시간에 참된 의미를 갖는 진리에 대한 사고, 가치 그리고 범례들을 사용하여, 교회생활을 위한 복음의 의미를 설명하고 해석할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 신앙에 의하여 제기된 질문들에 답변하기 위한 교회차원의 시도”라고 정의한다 (1989:10). 따라서 신학은 모든 사람들과 모든 시간 및 장소에 그대로 가져 갈 수 있는 완성된 작품이 아닌 것이다.


서구 신학은 다음과 같이 기초적인 세가지의 형태가 있는데:

(1) 철학 혹은 조직신학으로서 “실제에 대한 변하지 않는 전우주적 구조”에 관한 것,

(2) 성경신학으로서 성경을 “우주적으로 펼쳐지는 드라마”로서 연구하는 것,

(3) 선교신학으로서 “인간의 상황 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에 관련된 것이 바로 그것들이다.

 

티에누(Tiénou)와 히버트(Hiebert)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견지한다: “선교신학은 성경의 계시와 인간 상황에 대한 가교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통(Orthodoxy)와 정통적실천 (Orthopraxy)사이의 간격 즉, 진리, 사랑 및 순종 사이의 간격을 연결하는 시도이다” (2005).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를 인간 문화의 변혁을 위하여 그 문화 가운데 가져가기 위하여 신학은 학문적인 감금에서 벗어나올 필요가 있다. 선교신학은 추상적인 학문적 실습이 아니라 성경 진리를 실제 생활에 완전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통은 정통적 실천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신학이 상황화 될 때에만 일어나게 된다! 역사적으로, 신학의 상황화에 대한 노력은 대부분이 제안적 수준에 그쳤고 관계적, 감정적, 실험적, 그리고 실천적인 수준은 무시되었다 (Kraft 2002). 선교신학은 인간 생활의 모든 국면을 언급해야 한다. 그것은 머리와 가슴과 손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특별한 삶의 상황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의 언어와 문화 가운데 복음을 대화함으로써 그 복음이 그들 자신과 사회 그리고 문화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의도하신 그대로 되도록”하는(Tiénou and Heibert 2005) 선교신학을 개발하기 위한 필요와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신학의 상황화를 위한 성경적인 기초들

우리가 신학을 상황화 하려고 하는 그 주된 기초는 성경이다. 성경은 그 자체가 상황에 적절한 커뮤니케이션을 그토록 지속적으로 실천한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신학적으로 동일한 자세를 견지해야 하며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하여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모델을 신실하게 따라가야 할지 보여주는 명백한 실례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지역적으로 얼마나 급진적으로 적절하게 커뮤니케이션을 이루셨는지 민감하지 못한 것이 바로 서구에서 훈련 받은 신학자들이 비서구인들을 위하여 신학을 상황화 하는데에 궁극적으로 실패한 주요 요인이다.

1. 상황화는 성육신적 커뮤니케이션이다

구약과 신약에는 하나님의 상황화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수 많은 예들이 있다. 물론 그 결정적인 예가 바로 성육신이다.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구속된 상태와 한정된 대화의 위험성을 수용하셨고 그럼에도 인간과 타협을 이루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을 대화하셨다. 모든 타당한 상황화는 이 원리를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다 (Glasser 1989:49).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의미가 통하는 방법으로 대화하시기 위하여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하신 수용자 중심의 대화자이심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챠알즈 크래프트(Charles Kraft)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적절하고 중요게 이해되기 원하셨는데, 그 당시 사람들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예수 안에 자신을 상황화시키셨다. 하나님 그분은 너무나 인간의 모습이셨다 (1989:122).

하나님께서는 극단적으로 성육신 커뮤니케이션을 이루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도달하기 원하는 그 사람들의 언어, 그것은 심지어 갈릴리 지역의 아람어 및 코이네(koine) 헬라어와 같은 존경받지 못하는 언어도 말하신다. 그는 더우기 이교도 사회 가운데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메세지를 대화하시기 위하여 그 이교도 사회의 문화관습 조차도 사용하신다 (Kraft 1989:126).

선지자들도 종종 하나님의 상황화 유형을 보여준다. 영적으로 간음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분노를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로 하여금 “간음한 여인”과 결혼하라고 하셨다. 그 결혼을 통하여 세 자녀가 태어났는데, 호세아는 그들에게 그 나라의 임박한 심판을 나타내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종교적으로 창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백성을 사랑하심을 보여주기 위하여 호세아로 하여금 “간음하는 여인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제임즈 메이즈(James Mays)는 이를 호세아 가운데에 성육신적 상황화를 이루신 것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의 개인적인 삶 가운데에 당신(Yahweh)의 말씀을 성육신하셨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과 실제 그렇게 한 것은 자신을 하나님께 동일시한 증거이다. 그가 말한 것으로 판단하건데, 그의 그러한 동질화는 그로 하여금 심지어 ‘야훼 하나님의 감정’을 느끼고 경험하도록 하였다” (Mays 1969:3). 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그렇게 행동하라고 하는 극단적인 일을 하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믿는자들에게 (그리고 심지어 성경 학자들에게), 어떻게 공의를 따르고자 하는 한 의로운 선지자가 그러한 스켄들 조차도 떠나지 못한다고, 불신자들이 그 말씀의 기록을 공격할 정도로 호세아의 행위가 걸림돌이 될 것을 알지 못하셨을까? 그 대답은 우리 하나님께서 성육신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적절하고 능력있는 대화를 이루기 원하셨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또한 아모스 선지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그의 메세지가 이스라엘 문화 가운데에 창조적으로 성육신된 예를 보게 된다:


아모스는 자신이 말해야 할 것의 전달 수단으로서 다양한 표현양식을 적절하게 하는 기술을 알고 있었다. 그의 대사는 이스라엘 문화에 가능하였던 구전 문학의 모든 기구를 사용하는 현란한 기술을 보여준다. 그는 이스라엘의 파멸을 예측하는 장례식 애가를 불렀고 (5:1-2), 어떤 종류의 행동을 나타냄으로서 결국 그것이 죽음을 이끌어 낸다는 비통스러운 말들을 작성하였다 (5:18; 6:1; 5:7). 그는 그 나라의 우상숭배를 흉내내고 공격하기 위하여 제사장에 속한 형태의 여러가지 양식들을 사용하였다 (4:4f; 5:4, 21-24). 그는 특히 수수께끼, 비유 및 민속적 지혜가 담긴 대중의 격언에 사용되는 말의 형태를 사용하는데에 능숙하였다. 그는 격언들에 담긴 논리를 말하였으며 (3:3-6) 비유와 수수께끼들을 자신의 입장을 말하는데에 사용하였다 (2:9; 3:12; 5:2,7,19, 24; 6:12; 9:9) (1969:5-6).


이상의 것들은 선교상황 가운데에서 신학을 상황화해야 할 신학적 긴급성을 내포하는 예들이라 하겠다.

2. 상황화는 양식(Forms)을 적합하게 하지만 의미(Meanings)를 변화시킨다

어떤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상황화는 타협이나 혼합주의를 유도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상황화의 목적은 명확하고 적절하게 대화하는 것이다. 상황화와 도덕적 정직성은 모순되지 않는 것이다. 그 예로 바울이야말로 진정으로 정직한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가장 상황화된 사람이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고전 9:20-22).

더우기 혼합주의의 두려움이 있는데, 그것은 종종 그 반대 급부로서 촉진되기도 한다. 크래프트는 이렇게 그것을 표현한다:

 

“만일 하나님의 메세지가 상황화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것의 사실됨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 없으며 그로 말미암아 어느정도 이단적이 될 수도 있다” (1989:122). 혼합주의를 피하기 위한 우려로 비기독교도들이나 이교도들에 의하여 오염되었다고 생각하는 형식 사용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의 양식을 사용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제휴로서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이러한 종류의 거절이 나름대로 유익이 있어 보이는 반면, 우리가 알기에 그것이 성령께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되어온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고대 근동에서 엘(el)은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이름이었는데 그 이름은 가나안 다신교의 가장 뛰어난 신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 이름을 적절하게 하셨고,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으며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중 하나로 사용하였다. (단수 의미를 갖는 복수형인 엘로힘(elohim)의 사용은 이스라엘에게도 고유한 것은 아니었다) (Glasser 1989:36). 리챠드 롱에네커(Richard Longenecker)에 의하면,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사람들의 다신교와 대부분의 종교 관습들을 거부한 반면 그들이 늦은 아마라나(Amarana) 기간 동안 가졌던 야훼(Yahweh)에 대한 예배는 아마도 종종 가나안인들의 바알 숭배와 병행되었으며 그 스타일이나 표현에 있어서 공유하는 점이 많이 있다” (1999:157). 그들은 가나안에서 바알 숭배와 관련된 (“the Rider in the Clouds”와 같은) 개념과 용어 및 형상 등을 가져왔으며 그것들을 야훼에 적용하였다 (Ps. 68:5). 심지어 특별한 형상들이나 문양조차도 바알 숭배와 밀접하게 관련되었기 때문에 반대의 의미를 내포하지만, 그것들이 더욱 훌륭한 목적으로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이스라엘의 예배 가운데에 사용될 수 있도록 단지 “소독” 및 “재세례”된 것으로 보인다 (Longenecker 1999:157).


더우기 양식에 관련되어 부적합하거나 이교도적 개념으로 도무지 사용할 수 없는 것 조차도 사용된 것을 알게 될 때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예로서, 신약 기자들은 70인경의 유대 번역자들과 함께 야훼에 대한 지칭으로 데오스(theos)를 선택하는데, 이는 헬라 세계관과 관련된 용어이다. 데오스의 종교적 의미는 다신교적이었다. 헬라의 다신교 개념에는 신들에게 우위가 있는데, 가장 뛰어난 개념으로 제우스라는 인격에 표현되었다. 데오스는 또한 아폴로스, 에로스, 및 심지어 코스모스 등에도 사용되었고 영웅들과 뛰어난 지배자들에게도 사용되었다. 그들은 비록 영원하였지만, 동일한 어머니로부터 나와서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데오스는 세상을 무에서 창조하지 않았고 단지 질서와 형태를 준 것 뿐이다. 그 신들의 영향은 우주적인 것이 아니라 제한적이었고 공의롭지도 않았다. 헬라의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인 개념은 성경적이라고 하기가 너무 힘들다. 또한 그들은 철학적인 개념도 아니다. 헬라 철학적인 신은 인격적이지 않다. 오히려 “세계 이성”이라든가 “존재(being)”와 같은 개념에 의하여 신성한 양식들의 영적 의미가 대체되었다. 클라인크네흐트(H. Kleinknecht)에 의하면 (1965:67-69), “그 내적 에센스가 사랑으로서, 단순한 선택된 개인에 대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인간을 위한 사랑으로서의 신격”이라는 개념은 헬라인들 마음속에는 들아가지 못하였던 것이다”. 데오스와 관련된 이교도적 개념을 우리가 잘못 대화할 가장 높은 가능성은 그 용어를 구속할 수 없는 형태인 것 처럼 사용할 때로 보인다. 그러나  신약의 기자들은 그것을 선택하여 사용하였고 아더 글래서(Arthur Glasser)가 말한 것 처럼 “그것을 변혁시켰던 것이다 (즉, 이교도들이 신으로 인정하는 형태나 양식을 가지지 않은 채, 순수한 영적인 것으로 (요한 복음 4:24를 보라))” (1989:36).

 
마찬가지로 요한의 로고스에 대한 개념은 구약의 개념이나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의 개념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Pentecost 1981:29). 쉐퍼드(J.W. Shepard)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


그의 로고스라는 아이디어는 자연의 발생 원리를 말하는 마르쿠스 아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것도 아니요, 신적 이성 혹은 표현이라 할 수 있는 필로(Philo)의 것도 아니며, 또한 단순한 히브리의 ‘memra’ 즉, 하나님의 현현으로 여호와의 천사나 하나님의 지혜도 아니다. 그것은 신의 말씀으로서 창조, 계시, 그리고 구속하는 종교적인 아이디어인 것이다. 요한은 그 당시의 헬라 용어를 택하여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채운 것이다 (1947:15).

따라서 성경의 선례는 우리에게 익숙한 양식을 적절하게 해주지만, 그것을 교정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면 그가 복음의 진리를 대화하는 데에 신비 사이비 종교의 용어들도 찾도록 성령께서 영감을 주신 것을 알 수 있다. 딘 길리랜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방법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지역 종교에까지 들어간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에 대하여 지금까지도 그 견해가 어느정도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바울의 자세가 하나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가 되도록 선택한 확실한 이유의 일부일 것이다.”  바울이 사용한 단어들 가운데에, 로마서 15:16절의 “일군(minister: leitourgon), 빌립보서 2:17의 “관제(libation: thysia) 및  4:18의 “희생(sacrifice: leitourgia)과 같은 것들이 있다 (1989:56). 다른 예로서 “화해하다(reconcile: katallasso)”라든가 “화해(reconcilitation: katallage)와 같은 단어들이 있다. 이러한 용어들은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사람과 여러 신들 사이에 있는 갈등을 해결하는데에 관련된 친숙한 용어들이다. 반면에 유대인들의 상황에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설명하기에 더욱 적절한 용어로서 히브리서 2:17에 있는 바와 같이 “구속”(‘atonement’, ‘to propitiate’, 혹은 ‘make expiation’: hilaskesthai)이라는 단어가 쓰여지는데,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1989:55-56). 비록 어떤 신학자들은 이교도 사이비 종교 관습에 너무 밀접하게 관련된 표현들을 적용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겠지만, 이 이방인에 대한 사도는 그들을 수용, 적용, 변혁시켜서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되게 하였다. 바울은 진리를 전달하는데에 있어서 그 지역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언어와 표현들을 찾아내었다. 길리랜드는 바울이 그렇게 함으로서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복음은 각각의 문화가 제기하는 구체적인 가치들과 역동적인 이슈들을 심각하게 다룰 때에만 살아있는 믿음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순서와 용어를 재구성하는 것에 대하여 시비를 걸었다. 그들은 혼합주의가 될지 모른다고 하면서 이방인들을 너무 자유롭게 한 것이 아닌가 질색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케 하는 복음이 유대인 신앙과 관습 가운데에 갇혀 있었다면 그 결과는 유대교식 혼합주의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사실 이러한 일은 실제로 거의 일어났다. 바울은 최소한 두 차례에 걸쳐 이러한 문제에 대응함으로서 유대교식으로 왜곡된 것들과 싸워야 했다 (1989:58).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회의 요지는 비성경적인 문화, 사회, 종교적인 배경의 사람들도 그들이 속한 공동체 유산을 버리지 않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고, 믿고 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들에게 이러한 권리를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도 이방인들을 유대화시키려고 하였던 사람들 처럼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성경적으로 신성하다고 간주하는 양식들 조차도 바뀔수 있고 여전히 본래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신약 기자들이 히브리 구약을 유대식 헬라어로 번약한 것을 사용한 것으로부터 분명해진다. 그 새로운 양식 즉, 70인 경(Septuaginat)을 인용할 때에, 그들은 그것을 성령의 영감하에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여전히 언급한다. 이 사실은 새로운 양식일지라도 그 모든 부분이 본래와 같이 여전히 거룩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궁극적인 증거이다. 리챠드 롱에네커는(1999) 초대 신약교회의 신앙고백, 찬양 및 용어들은 바울이 자신의 다양한 서신서에 있는 상황에 적합하게 재구성한 핵심적인 신학적 주제들의 상황화를 보여준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더욱 많은 상황화의 예들이 있으나, 앞의 예로도 충분히 상황화의 정당성과 그 실례를 들었다고 생각한다.

상황화에 대한 역사적 기초

신학의 상황화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와 더불어 서구의 신학자들(그리고 그들에 의하여 영향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신학이 자신들의 신학적인 전통가운데에서 상황화 되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 브루스 니콜스는 “교회의 역사는 특별한 역사적 상황들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나타내는 상황화된 신학들의 역사이다”라고 주장한다 (1979:54). 그는 이점을 이해하는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선교사들이 자기 자신의 신학이 얼마나 문화적인 조건을 갖는지 이해하는데 실패함으로서 일종의 서구신학적 제국주의를 만들어 내었고 현장의 교회들이 자신들의 문화내에서 신학화를 이루고자 하는 숨통을 막음으로서 제3세계의 교회들을 황폐화 시키고 있다 (1979:25).

선교신학자들은 토착화된 신학의 성장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서구 신학의 문화적인 조건들을 이해해야 한다. 희망하기는 서구 교회역사 가운데 있는 그러한 몇몇 상황화 실례들을 통하여 이러한 점을 충분히 이해하기 바란다.

 

첫째로, 헬라식 교회는 그리스 문화의 관점과 용어로 성경적 진리를 표현하였는데, 그것은 철학적인 용어들과 관점 그리고 추상적, 기술적인 신학 체계를 구성하는 법칙을 사용한 것이다. 서구의 신학은 그러한 그리스 철학과 상호작용함으로서 형성되었다.

 

 비서구 신학자들은 멜바 마가이(Melba Maggay)가 통탄하는 바와 같이 비교적 쉽게 그 결과를 인지한다. “서구의 신학 양식이 지배함으로 말미암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사는 크리스천들은 주후 4세기에 헬라 소피스트들에 의하여 제기된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하는지를 배워서 자신이 사는 곳의 사람들에게 말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 내었다” (1989:55-57).

 

헬라의 영향은 데카르트의 회의론에 반응하여 지속하였고 그 이후 개화기의 이성의 지배로 이어졌다. 결국 신학은 무신론과 영지주의에 대응하기 위하여 지적인 확고한 체계를 추구하였다. 윌리암 다인네스(William Dyrness)도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통탄해 마지 않는다: “우리가 얻은 것이 무언가 확실한 것 같이 생각되지만…. 종종 직접적인 관계와 감정적인 깊이를 잃어버렸다. 즉, 우리가 얻어낸 신학적인 지식은 자주 일상생활과 거리가 있는 것이 되었다” (1992:22).

 

이점이 비서구권 세계의 실생활 가운데에 신학적인 반영이 그토록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문화적 조건에 대한 두번째 증거는 로빈 보이드(Robin Boyd)가 개신교 신학의 “라틴 포로”라고 부르는 것으로, 카톨릭이 전수한 것들이 개신교의 신학적, 교회론적 용어, 성경 번역, 신학에 접근하는 방법, 교회 구조 그리고 의례에 대한 형식 가운데에 명백하게 들어 있는 것이다 (1979:358-369).


세째로, 성경을 상대론적, 존재론적, 혹은 기계적 과학 세계관이라는 렌즈를 통하여 해석하는 비복음주의적 유럽 신학자들 가운데 나타나는 서구 문화의 영향력이다 (Nicholls 1979:42ff). 이는 마찬가지로 복음주의적인 성경 이해라고 할지라도 서구의 문화적 영향을 받을 가능성에 대하여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것이다.

 

네째로, 노르만 크라우스(C. Norman Krauss)가 아시아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통하여 발견한 바와 같이, 전통적인 서구 신학은 제자도에 있어서 교회의 생활과 사역을 지지하는데에 부적합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서구 신학이 이루어진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요소들 때문이다:


지난 300여년 동안 서구 신학은 이성적인 형이상학에서 경험주의로 변화하는 큰 철학적 소용돌이 가운데에 이루어져 왔다. 그것은 폭풍속을 지나오는 것과 같았다. 신학적 논의 가운데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급진적 발견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 (그 자체로도 충분히 어려운 과제임에 틀림없다) 이외에도 신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이성적 방법론을 따르는 중요한 이슈들에 너무나 몰두되어 있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만하며 피할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 결과로 신학은 대부분이 논증학이나 변증학으로 이루어져 대학의 학습주제가 되어버렸다 (1990:15).

서구 교회역사의 또 다른 상황화의 예는 서구 신학 전통에 칭의, 언약, 성령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과 같은 다른 합리적 주안점들이 출현한 것이다. 그 각각은 서구 신학의 지엽들 가운데에 독특한 역사적 상황화를 증거하는 것이다 (Nicholls 1979:54-55).


이러한 몇 가지의 예를 통하여 서구신학 자체가 믿음에 대한 일련의 역사적인 상황화인 것을 알 수 있다. 선교적 상황에 대한 신선한 신학화를 자극하기에 필요한 것이 이러한 역사적인 현실에 대한 인식인 것이다. 그러한 신학화가 일어나는 과정이 바로 선교학 영역에 속한다.


상황화에 대한 선교학적 기초들

신학의 상황화를 위하여 앞서 말한 바 성경적 그리고 역사적 이유가 분명하다면, 이제 신학의 상황화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몇 가지 기본적인 선교학적 원리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1. 모든 문화는 그 각각의 신학을 발전시키도록 갖추어질 필요가 있다

신학은 성경과 우리 문화 사이의 가교로서 그를 통하여 복음이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 하도록 하는 것이다 (Hiebert 1985:201-

202). 문화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 신학적인 가교들은 각 문화에 대하여 고유하게 구축되어야 한다. 신학화의 목적은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우리의 관점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을 발견하고 적절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학이 그 청취자들

에게 적절하며 강력한 영향을 끼치도록 하려면 지역적으로 구축되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신학 자체를 가르치기 이전에 어떻게 초대교회가 신학을 발전시켰는지에 대하여 지역 신자들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에게 토착화된 신학을 구축하는 도구를 주는 셈이 된다. 우리는 어떤 신학의 구축을 지배하는 힘들을 찾아내기 위하여 이미 개발된 신학을 신약의 신학이 여전히 활동하는 무대로 돌려 놓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시대적 신학을 만들어 낼 때에 우리 자신이 동일한 역동성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Allmen 1979:341).

선교신학자는 과도한 신학적인 짐을 지고 자신의 상황으로부터 선교대상 종족들의 상황으로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메세지가 외래의 것이 되지 않도록 가능한한 지역의 세계관과 그 관점에서 사역해야 한다. 한번 복음이 심기워지면, 그 현장의 신자들이 신학화에 있어서 점차적으로 더욱 큰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내부자의 관점을 가지고 그 일을 해 나갈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들의 첫번째 과업은 외국의 신학자가 할 수 없는 신학을 상황화하는 것이다. 이 때에 기술을 가진 외부자는 교사에서 촉진자로 그리고 마침내는 고문으로 그 역할이 바뀌는 것이다.

2. 신학들은 적절한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서구 신학자들에게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이슈중 하나가 자신들의 신학이 우주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선교상황에서 자신들의 신학이 상당하게 변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 초조해 한다. 그러나 다니엘 폰 알멘(Daniel von Allmen)은 다음과 같이 확언한다:


우리가 어리석어서는 안된다. 서구신학은 우주적인 신학이 아니다. 서구신학에 있어서 우주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시대와 장소를 통틀어서 고백되는 신앙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서구신학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적합한 항목들 내에서 그만큼 정확히 타당하고 “우주적”이 되도록 신앙을 표현할 가능성을 갖도록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1979:341).

이러한 관점은 서구 신학자들과 선교사들의 경우에만 사실이 아니라 서구 선교사들의 열매인 대부분의 교회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모든 신학이 상황적이고 그래서 그 상황의 절대성을 띄지만, 그렇다고 신학에서 성경적인 권위를 빼앗아 가는 것은 아니다. 윌리암 라킨(William Larkin)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이해와 표현은 물론 완전하지 못하고 부분적이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이해나 표현을 상대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비록 우리의 지식이 절대적이지 않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성과 신성하게 계시된 진리를 자신있게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1988:241).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모든 문화 가운데서 크래프트가 말한 바와 같이 “하나의 ‘타당한 것’(adquite)으로 비록 절대적이지 않지만 초문화적 진리를 이해하는” 것으로서(1979:129) 주어지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문화에 적절하게 전달되어 그 메세지의 꼭 필요한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3. 신학의 적법성에 대한 시험은 서구 신학에 맞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지역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가 개발한 것으로서 그것이 성경과 양립하는가의 문제이다

롱에네커는 예수의 한 제자가 자신의 “새것과 옛것을 곳간에서 내어”(마 13:52)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막 2:22) 상황화를 추구함 있어서 그가 따라 할 수 있는 규칙을 제공하는 반상의 선생이야말로 예수님이라고 표현한다 (1999:151).

 

더우기  신학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개발되어야 한다. 예루살렘 공회는 이방인 선교와 교회론에 대하여 신학화하는 일에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인식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인도는 신자들의 공동체를 통하여 확증되는 것이 가장 좋다 (Hiebert 1985:202-203).

4. 신학자들은 다른 문화의 신학들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개인적인 편견 그리고 문화적 짐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인 지식을 성취할 수는 없다. 이는 지역의 신학은 다른 신학들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스티븐 스트라우스는 다음과 같이 확언한다:


신학이 형성되어 표현되는 데 있어서 신학자들의 상황은 그토록 의미심장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각 문화에서 온 신학자들은 다른 문화권, 다른 사회교육 수준, 다른 신학적 전통 및 다른 역사적 시기의 신학자들로부터 배우고, 문화간 신학화에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2004:29).


그러나 본인은 다른 신학, 특히 서구의 신학을 배우는 것은 상황화 신학의 전개에 있어서 그 초기가 아니라 마쳐갈 무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5. 상황화 신학은 문화적 양식을 활용함에 성육신적이며 그 의미를 성화시켜감에 있어서 변혁적이다

그릇된 대화와 왜곡, 심지어 혼합주의에 대한 높은 잠재성과 부정적이고 비성경적인 지역의 양식들을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기자들이 우리가 놀랄만큼 광법위하게 사용하였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러한 친숙하고 적절한 지역의 양식들을 수용하는데에 거의 꺼리낌이 없음을 보여주었고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채움으로서 의미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그것들을 성화시켰음을 보았다. 반복된 가르침을 통하여 그 새로운 의미를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며 혼합주의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


길리랜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어느 곳에 있는 사람에게라도 좋은 소식이 되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상황가운데에서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말씀은 어느 곳이나 어느 사람에게나 계속해서 육신이 되어야 한다 (1989:52).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외래의 것이나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수용하라고 요구할 수 없는 것이다” (1989:58).

상황화 신학의 실례

지금까지 이 도전이 되는 주제의 이론적인 이해를 살펴보았는데, 상황화 신학의 예를 통하여 그 이해를 더욱 확실하게 해 보도록 하자. 이 글의 서두에 언급한 신학적인 도전들을 다시 염두에 두면서 아랍 무슬림들을 위한 적절한 신학을 개발하기 위한 몇 가지 제안사항들에 대한 개요를 여기 간략히 기술하도록 한다.

1. 땅에 대한 신학(A Theology of the Land)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택된 백성, 즉 이스라엘에게 창세기 12장과 15장에 있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과 맺은 폐기될 수 없고 무조건적인 약속을 통한 영원한 상속으로 그 땅을 주셨다. 그러나 그 땅에 살아가는 축복을 경험할 권리는 모세법 가운데에 요약된 바와 같이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에 달려 있다. 신명기 28-29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축복과 저주를 모두 약속하셨다. 만일 그들이 모세법 가운데에 규정된 공의의 요건들 – 예를 들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외국인을 공의롭게 다루는 것과 같은 규정을 충족시키는데에 실패하면 그들이 회개하기까지 그 땅을 차지할 약속된 권리를 상실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그들은 국가적으로 예수께서 메시아임을 거부한 이후에 또 다시 흩어지게 되었다. 그 국가가 이를 회개하기까지는 즉, 스가랴서에 있는 것 처럼, “그들이 찌른 자를 위하여 애통하기”(슥 12:10) 까지는 현재의 이스라엘 국가가 그 땅에 대하여 단지 인간적인 주장을 할 수 있을 뿐 성경적인 주장을 할 수 없는 것이다.

2. 아랍의 이스마엘에 대한 동일시(Arab identification with Ishmael)

이스마엘을 “성경에 등장하는 나쁜 사람들” 중 하나로 보는 미국 복음주의 개념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마엘에 대한 매우 설득력 있는 긍정적인 그림이 한 아랍 크리스천 학자에 의하여 제시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족으로부터 떨어져 여주인의 “손 아래” 있었던 그의 어머니 하갈과는 달리 이스마엘이 멋진 들나귀처럼 다른 이웃에게 정복되지 않고 그의 형제 이스라엘이 있는 곳(동편)에 거하여 이스라엘에 그 빛이 비추이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가장 처음의 국가를 이룰 수 있도록 그렇게 자유로운 상태가 되도록 그에게 언약적인 관심을 베푸셨다는 것이다.

3.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 (The “Son of God” as a Title of Jesus)

서구 신학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삼위의 두번째 인격을 나타내는데, 예수께 적용되어 예수의 신성에 대한 증명으로 인용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이스라엘과 그의 왕국에 대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통치자, 즉 메시아를 주로 의미심장하게 사용한다. 따라서 그것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 “메시아” 혹은 “주님”으로 번역될 수 있다.

4. 삼위일체(The Trinity)

무슬림들은 그들이 세 신이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는 트리니티에 대한 아랍어인 “thaluth” 가 이슬람 신학의 절대 기초인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타협하게 하는 것이라고 성을 낸다. 이를 위해 우리는 “tawhīd mu‘aqqad”(복합 유일성: complex unity)와 같은 용어를 대신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복합 유일성의 논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우리는 서구의 신학적인 형식들을 사용하지 말고 고대 아랍의 무슬림들에 대한 변증법학자요 동방의 크리스천인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이 사용한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요한은 무슬림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하나님, 그의 영 그리고 그의 말씀 가운데 누가 먼저 존재하였는가?” 비록 무슬림들이 거의 본능적으로 “하나님”이라고 대답하면, 요한은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과 영이 없던 때가 언제든 있었다면, 그는 불완전하며 따라서 하나님이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하나님의 영과 말씀은 처음부터 그와 함께 있었으며 영원히 그와 함께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분 하나님이시다. 코란에서 ‘이사’(Isa)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은 요한복음에(1:1) 있는 바와 같은 그의 영원성을 드러내는 자연적인 가교가 된다. 더우기 코란이 하나님의 영원한 창조되지 않은 말씀이라는 이슬람의 신앙을 활용할 수 있다. 즉, 그렇게 영원한 것이 지구상에 책으로 계시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1:1의 지음바 된 적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을(요 1:14) 논의할 수 있는 것이다.

5. 신학을 표현하는 방법들(Ways of Expressing Theology)

서구의 신학 방법은 토착적인 이야기, 예화, 가치 및 사고 양식 그리고 표현 양식들을 적용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우리의 조직적인 신학 체계를 번역하기 보다는, 주석, 설교, 격언, 이야기, 시, 노래, 시가, 예화, 비유, 드라마 및 수사학과 같은 곳에 더욱 적절한 방법으로 신학이 표현되어야 한다. 성경신학(성경에 기록된 이야기 및 주요 테에마들을 가르치는)이 신학에 대한 그 초기 접근이 되어야 한다. 역사신학적 접근이 차라리 조직신학적인 접근 보다 더욱 적절할 것이다. 게다가 신학은 심지어 프랑스의 동양학자 마시농(Massignon)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영감을 가져다 준 수피 신비주의자 알-할라즈(al-Hallaj)와 같은 무슬림 성자들을 포함한 성자들의 자서전을 통한 영적인 순례 및 변혁으로 표현될 수 있다.

신약과 더불어 출발하는 것 보다는, 구약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 처럼, 아랍 사람들은 단지 종족적으로만 아니라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셈족에 속한다. 구약에 기록된 바와 같은 히브리인들의 신학적인 사고를 분석함으로서, 아랍 상황에서 신학화하기 위한 실마리들을 얻을 수 있다. 잠언, 전도서, 욥기 등과 같은 구약의 지혜서들은 성경의 다른 위대한 설화문학 형식의 책들과 더불어 무슬림 신학 연구를 위한 입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핵심 메세지는 서신서들 보다는 사복음서 가운데에 있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되어야 한다. 야고보, 베드로, 유다와 같은 히브리 기자들이 헬라계 청중들을 지향하는 바울의 서신서들 보다도 우위에 둘 필요가 있다.


결론

이 글에서 선교에 있어서 상황화 신학의 필요성을 소개하였다. 상황화된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성경적, 역사적, 그리고 선교학적 기초를 점검한 이후, 아랍 무슬림 상황에 그것을 적절하게 하는 예를 들었다. 본인이 희망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들의 상황에서 그에 적절한 선교신학의 개발을 추구하는 것이다.


* 토의를 위한 질문


1. 서구의 선교사들이 복음을 한국으로 가져온 결과로서, 그들의 신학 가운데에 한국의 사회나 문화에 적절치 못하거나 의미가 부족한 적합하지 못한 것들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2. 오늘날 한국 사람들 가운데에 기독교가 그들에게 외래의 것이기 때문에 혹은 한국의 전통문화에 반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을 위하여 복음을 상황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3. 한국의 선교사들이 비한국적 선교상황 가운데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신학을 상황화하기 위하여 무엇이 필요한가?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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