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갈3:15~19)
율법에 대한 오해
성경에는 율법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율법만큼은 성도들이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 다양한 이해 속에서, 다양한 신앙의 유형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바로 율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율법이라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은 사실상 그 규범을 지키라고 제정된 것입니다. 즉, 율법에 대한 사람의 태도는 마땅히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어졌으므로 마땅히 지켜야 된다는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문제는 율법에 대한 성경의 많은 기록들이 이런 단순한 논리로 율법을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단순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주셨고, 우리는 율법을 지키면 된다.”라는 상식적인 개념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 가면 율법을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지켜야 된다는 의식과 이해와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성경에서 그런 신앙생활이 올바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문제가 단순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율법의 정확한 개념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고, 왜 주어졌으며, 율법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고, 율법에 대해서 어떤 이해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개념들을 잘 정리해야 율법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고, 율법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고정관념(1) - 율법은 처음부터 존재해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율법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잘못된 고정 관념 중에 하나가 “율법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이래로 지금까지 존재해왔다.”라는 관념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시자마자, 곧바로 인간들에게 마땅히 지켜야할 계명과 율법을 주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명과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야하는 존재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잘못된 고정관념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관념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관념이 잘못되었다고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잘못된 고정관념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사이에 율법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담아, 너는 이제 이 계명들을 지키면서 살아라. 네가 이 계명을 지키면 상을 줄 것이고, 어기면 벌을 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후, 사람에게 율법을 주셨다고 생각하며, 또 인간은 마땅히 그 계명들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되어져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오랫동안 관행처럼 이어져 왔을 뿐, 사실은 잘못된 고정관념이었습니다.
정말 충격적인 사실은 성경에서는 율법이 매우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은 아담이 창조된 이후로 무려 약 20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넘어서, 모세에 의해서 시내산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러니까 인류 역사 가운데 율법이라는 것이 항상 존재하고 있었고,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었다고 생각해왔던 고정관념은 분명히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으신 내용을 들어서 율법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이루시는 조건으로 율법을 언급하신 예가 없습니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네가 율법과 계명을 잘 지키면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겠다. 그러나 계명을 안 지키면 약속은 무효다.”라고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서 3장에서 그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갈 3:15)
그렇습니다. 언약은 이미 정해지고 세워졌으면, 그 언약을 함부로 폐하거나 더하거나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언약에서도 아주 당연한 이치인데,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언약은 바뀌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 3:16)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면서 하신 그 언약 안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민족이 구원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언약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17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갈 3: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구속사적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을 맺고 430년이 지난 이후에 생긴 모세의 율법이 아브라함의 언약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약과 율법은 애초부터 상관관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언약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로서 율법이 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나서, 430년이 지난 후에 시내산에서 제정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 때 까지를 약 2000년 역사로 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430년 후라고 했으니까, 결과적으로 아담 이후로 약 2500년이라는 세월 동안은 율법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렇게 비중 있게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매체로 여기는 율법이 본래는 굉장히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에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갈라디아서 뿐 만 아니라, 로마서에서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롬 5:12~14)
위의 말씀을 보면 율법이 없을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죄는 율법이 있기 전부터 있었는데, 그때는 율법이 없어서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죄는 실제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로 말미암아서 사망이 왕 노릇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14절을 보면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전체적인 문맥으로 살펴보면, 율법이 없을 때를 일컬어 이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은 출애굽 이후에 시내산에서 제정된 것입니다. 그 시내산에서 모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그때 생긴 것이지, 그 이전에는 율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이 인류역사 가운데 언제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방식이었을 것이다”라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고정관념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율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약 2500년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무엇을 수단으로 하셔서, 어떤 관계를 맺으셨을까요? 그리고 2500년 동안 다른 방법으로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던 하나님께서 왜 갑자기 율법을 제정하셨을까요? 다시 말해 왜 율법이 필요하게 되었을까요? 또 성경에 보면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때까지만 있을 것이라(갈 3:19, 3:24)고 이야기했는데, 그럼 예수님이 이미 오신 오늘날에는 율법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정말 끝없는 의문이 생겨납니다.
저는 이제부터 여러분과 이런 복잡한 문제들을 정리해가고자 합니다. 정말 복잡한 문제지만, 이 문제를 풀어야 우리 믿음의 방향이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우리는 율법이 인류역사 가운데 언제나 있었을 것이라는 잘못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믿음과 신앙 속에서 언제나 율법을 전제하고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보게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어떤 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이고,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율법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인가를 정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늘 우리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올바른 신앙생활이라 생각했던 율법 안에서의 생활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고정관념(2) - 율법의 개념문제
율법 문제가 참 복잡해서, 단순하게 풀 수 없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율법을 단순하게 풀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율법을 지킨다는 것과 못 지킨다는 것의 개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와 같이 말합니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 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빌 3:5~6)
이것은 바울 스스로 한 말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는 이 말을 살펴보면,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흠이 없다는 말은 율법을 다 지켰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 바리새인 생활을 할 때를 돌아보며,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고백하는 바울이 예수를 만난 이후의 자신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롬 7:8~10)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했던 바울이 이제는 그 계명들로 말미암아서 오히려 죽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계명이 오히려 자신 안에서 각양 탐심을 생기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롬 7:19~23)
그러면서 말하기를 마음으로는 선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르며 살기 원하는 자신이 도리어 원치 않는 죄를 범한다고 하면서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다.”라는 고백은 무엇이고, “원하는 선은 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한다.”는 고백은 또 무엇입니까? 바울의 이중성입니까? 어떤 사람들 앞에서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가식을 떨고, 뒤 돌아서서 고통의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요? 바울의 두개의 고백 사이에서 생기는 차이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필연적으로 이런 질문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율법문제를 단순하게 풀어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잘못된 고정관념(3) - 율법에 대한 성경의 태도
율법 문제를 단순하게 풀 수 없는 세 번째 이유는 “율법에 대한 성경의 태도”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마 5:17~18).라고 말씀하신데 반해서, 바울의 여러 서신과 히브리서에서는 끊임없이 “율법은 폐하여 졌다” (엡 2:15, 히 7:18, 7:28).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폐하여 진 것입니까? 폐하여 지지 않은 것입니까? 바로 이 논란으로 지금까지 많은 신학자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오늘날 율법이 폐하여 졌다고 보는 사람들과 폐하여 지지 않았다고 보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의 유형들이 너무도 다르게 형성되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율법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견해 차이가 아닙니다. 단순한 교리 논쟁이 아니라,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형태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는 이 두 가지의 극단적 신앙유형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율법이 폐하여 지지 않았다.”라는 믿음 때문에 율법 주의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가하면, 또 한편에서는 “율법은 폐하여 졌다.”라는 주장으로 인해 방종으로 빠지고 도덕률마저 폐기된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합니다. 이 극단적인 양자의 신앙형태가 오늘 한국교회에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폐하여 졌느냐? 그렇지 않느냐?”라는 문제와 더불어서, 율법과 은혜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과 은혜 중 하나를 선택해서 살아가는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율법과 은혜를 함께 수용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율법과 은혜는 서로 상호보완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율법과 은혜 문제에 있어서도 오늘날 이런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묻겠습니다. 율법과 은혜 중에 양자택일해야 합니까? 아니면 율법과 은혜는 서로 상호보완적인 것입니까?
이처럼 율법 문제는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단순한 문제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의견이 엇갈릴만한 표현들이 성경 속 여기저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율법 문제를 그냥 단순하게 지나갈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율법을 어떻게 볼 것이냐? 율법과 내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이냐? 이 문제를 분명히 해야만 올바른 신앙의 형태를 가지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바라시는 올바른 믿음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문제를 오늘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제대로 정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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