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조선 백성에 악행을 했던 친일파에 대한 국민의 원성이 대단했다. 이에 부응하기 위해 이승만 정부는 1949년 1월 8일 반민특위를 만들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활동력이 뛰어난 빨갱이들이 대거 먼저 들어갔다. 이들 빨갱이들은 이승만 정권의 핵심 인사들을 물고 늘어졌다.
1949년 3월, 드디어 빨갱이들의 마수가 드러났다. “남로당국회프락치사건”이 터진 것이다. 1948년 5월 10일에 형성된 제헌국회에 빨갱이들이 대거 당선되어 국회에 프락치 조직을 만들어 놓고 ‘민족자결주의’의 이름 아래 ‘외국군대철수안’(김구안), ‘남북통일협상안’ 등 공산당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주장을 한 것이다.
이로 인해 당시 국회부의장 김약수 등 13명이 1949년 4월 말∼8월 중순까지 3차에 걸쳐 검거됐다. 수사결과 관련 의원들은 남로당 특수공작원인 이삼혁 ·이재남 ·김사필 ·정재한, 남로당 중앙간부 박시현 등과 접선을 하고 있었다. 검찰은 정재한이 월북한 박헌영에게 보내는 보고서인 국회 내 남로당 의원의 프락치 비밀공작보고가 담긴 암호문서를 증거로 제시했다.
같은 해 6월 19일부터는 헌병사령부에 국회프락치사건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되었고, 1950년 2월 10일, 13명 전원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최고 징역 12년형에서 최하 2년형까지 선고하였다. 1949.6·6. 경찰은 빨갱이 조직으로 되어 버린 반민특위를 습격하였고, 동년 9.22일, 반민특위의 폐기법안으로 완전폐지 되었다. 빨갱이들은 이를 근거 없는 뒤집어씌우기 공작이요 고문조작사건이라고 주장했다. 박원순 도 1989년 가을호에서 “국회프락치사건은 고문에 의해 날조, 조작된 것으로 국회 소장파 의원들이 이승만 정권과 국회 내의 반대세력인 한민당 세력의 합작에 의해 정치적으로 제거당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6.25남침으로 서용길 의원을 제외한 전원이 월북했다. 그리고 1997년 5월 26일자 로동신문은 국회프락치 사건을 간첩 성시백이 배후조종했다고 썼다.
“국회 안에서 민족적 감정과 반미의식을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들로 진지를 구축하고 여기에 다른 국회의원들까지 포섭하여 국회부의장과 수 십 명의 국회의원들을 쟁취 포섭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외군철퇴요청안’과 ‘남북화평통일안’을 발표케 함으로써 미제와 남조선괴뢰도당들을 수세와 궁지에 몰아넣고 남조선인민들에게 필승의 신념을 안겨주었다”
전 북한군 대좌로 전향한 거물간첩 김용규는 1999년 11월에 내놓은 그의 저서 “소리 없는 전쟁”에서 “남한에서 발생한 모든 소요사건에는 반드시 북의 조종이 있다”는 것은 의심 할 수 없는 필연“이라고 증언했다.
빨갱이 대법원장 이용훈이 뒤집은 22개 재심사건, 고문조작 사건 아닐 것
이용훈이 대법원장을 할 때 사법부는 완전히 빨갱이 판사들이 장악했다. 빨갱이 판사들이 인사권과 사건 배당권을 거머쥐었고, 시국사건을 배당받은 일반 판사들은 인사권을 쥔 빨갱이들의 노선을 부합하는 판결을 해야 보신을 할 수 있었다. 이용훈은 3-5공 시절에 있었던 큼직한 좌익사건 22개를 모두 재심에 회부했고, 이 재심 사건들은 모두 빨갱이 판사들에 배당됐다.
22개 사건 모두가 예외 없이 재심에서 승소했고, 판결을 맡은 판사들은 왕년의 간첩들에게 절을 하며 국가를 대신해 사과했다. 이들이 왕년의 판결을 뒤집은 이유는 하나 같이 다 “독재정권에 의한 고문조작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1인당 몇 억 원씩의 보상금이 주어졌다. 이런 돈으로 빨갱이들은 지금 떵떵거리며 기득권 행세를 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이런 판결을 반드시 다시 뒤집어야 할 것이다.
2012.6.25. 대한민국대청소 500백만야전군 의장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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