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신학과 바른 목회
서언
바른 목회는 바른 신학에서 시작된다. 신학은 교회의 뼈이며 목회의 뼈이다.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은 보수적 근본주의 교회를 만들었고 진보적 급진주의 신학은 진보적 급진주의 교회를 만들었다. 최근의 교회성장주의 신학은 교회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교회를 만들었다. 어떤 교회가 바른 교회이며 어떤 목회가 바른 목회일까? 바른 교회와 바른 목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한국 교회 내의 신학적 전통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신학적 전통이 어떤 면에서 교회를 긍정적으로 이끌었으며 또한 어떤 면에서 부정적이었는가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바른 목회를 만들고 바른 목회를 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의 현상을 분석하고 평가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평가의 틀 위에서 우리는 바른 교회를 위한 신학적 관점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바른 목회는 여기서 찾아진 바른 신학적 관점들을 실천하는 것일 것이다.
Ⅰ. 신학적 관점에서 본 한국 교회의 유형과 장단점
1993년 김종렬은 예장 바른 목회 실천협의회 주관 전국 목회자 수련회에서 행한 강연에서 한국 교회의 목회현상을 신학적 관점에서 크게 4가지 흐름으로 구분했다. 예장 바른 목회 실천 협의회(편), 『제3회 예장 전국 목회자 수련회 자료집』, pp. 146-149. 그 네 가지는 1.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목회 2. 진보적 급진주의(사회참여) 신학전통에 서 있는 목회 3.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목회 4. 실용주의(및 심리학)를 바탕으로 하는 교회 성장주의 적인 목회였다. 이 네 가지 흐름 가운데 3가지 흐름은 유동식이 『한국 신학의 광맥』이라는 책에서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 진보적 급진주의 신학전통,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전통이라는 세 가지 흐름으로 한국 신학을 구분했는데, 여기에다가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교회성장 신학적 흐름을 첨가한 것인데 이 첨가는 매우 적절하고 현재의 한국 교회의 목회와 신학을 이해하고 평가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늘의 상당수의 한국의 대형 교회와 대형 교회를 지향하면서 자신의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노력하는 많은 목회자들의 목회신학이 이 네 번째 흐름에 속하기 때문이고, 이런 흐름을 분석하고 평가하지 않고는 오늘의 전국 교회의 목회와 신학과의 관계를 바르게 분석,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네 가지 흐름 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흐름이 현재 한국 교회 내에 존재하는데, 이 흐름은 복음적 에큐메니칼적 신학전통이다. 이 복음적 에큐메니칼적 신학전통이 무엇인지는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목회를 설명하면서 밝히겠다. 왜냐하면 이 복음적 에큐메니칼적 신학전통은 과거에는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1.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목회 김종렬에 의하면 “이 신학전통은 오늘날 대부분의 예수교 장로회가 이어 받고 있는데, 이러한 신학전통을 세운 이는 길선주와 박형룡 두 사람이다. 이 신학전통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성이 강조되며 그의 말씀인 성경의 절대성이 또한 강조된다. 성경의 무오설이 이 신학사상의 대전제가 된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비판적 연구를 배격한다. 성서의 비판적 연구 위에 전개되는 진보적 신학이나 자유주의를 배격함으로써 배타적인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의 양상을 띠게 된다. 이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은 교회의 비정치화를 낳게 하였으며, 민족의 구원을 개인의 영적 구원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민족적으로 위기에 직면하고 개인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부흥집회를 통한 구령운동을 활발히 하였으며 정신적인 위로를 받으면서 위기와 고난을 극복해 나갔다. 이 같은 신학을 바탕으로 한 보수적인 목회가 한국 교회성장에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오늘날 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가진 고신 측과 합동 측과 통합 측이 대부분 이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 위에 서서 목회를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Ibid., p. 147.
그러나 이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은 최근에 와서는 상당한 변천을 겪고 있다. 우선 이 신학전통 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예수교 장로회의 통합 측의 현재의 신학적 상황은 이 신학전통에 속해 있다고 볼 수 없다. 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은 이종성, 박창환 같은 신학자들의 가르침이 영향을 미치면서 근본주의 신학전통과는 상당한 간격을 띠게 되었는데, 그 핵심은 종교개혁자와 정통주의의 복음적 신학의 유산을 이어받으면서도 오늘의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에 대해 개방성을 띤다는 점이다. 이 복음적 에큐메니칼적 신학은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에큐메니칼적 신학의 사회적 역사적 책임성과 이에 대한 공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신학이다. 이렇게 에큐메니칼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을 상당부분 수용하고 있는 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 신학은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은 예수교 장로회 고신 측과 합동 측이 주축이 되어 오늘날 그 신학전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을 예수교 장로회 고신 측과 합동 측이 주축이 되어 이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과거의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을 문자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교회와 신학자들은 많지 않다. 다수의 교회와 신학자들은 이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의 토양 위에 20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된 복음주의 신학의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근본주의 신학과 복음주의 신학은 신학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김의환, 『현대신학개설』(서울:개혁주의 신행협회, 1989), pp. 165-202. 부분적으로는 다른 특징을 갖고 있는 신학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개의 신학은 모두 반(反)에큐메니칼적인 신학이고 성서의 무오성을 강조하고 교회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반대하는 등 대단히 많은 영역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고, 상당수의 교회와 신학자들이 근본주의적 특징과 복음주의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하나의 범주 안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 오늘에 와서 상당부분 복음주의 옷을 덧입고 있는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교회는 어떤 장점과 단점을 갖고 있을까?
1) 장점 (1)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교회의 장점은 우선 이 교회는 성서를 사랑하고 성서의 권위에 복종하려 한다는 저이다. 종교 개혁자들의 위대한 사상 중 하나인 ‘오직 성서로(Sola Scriptura)'의 정신이 이 교회 속에 거의 그대로 살아 있다. (2) 성서의 권위가 살아 있는 것은 성서의 교훈을 지키고자 하는 생활과 분리되지 않는다.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교회 속에는 다른 신학적 흐름의 교회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세속화되어 있고 경건한 생활에 힘쓰는 흔적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3)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교회는 대체로 영혼구원을 교회의 지상 최고의 과제로 삼고 전도에 힘쓰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전도가 교회의 절대적인 사명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전도에 힘쓰는 것은 우선 긍정적인 장점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2) 단점 (1)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교회가 성서를 사랑하고 성서의 권위에 복종하려 하는 것은 장점이지만 그들의 성서에 대한 이해가 근본주의적 축자영감설이라는 점에 큰 문제가 있다. 이런 근본주의적 축자영감설은 오늘의 발전한 성서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경시할 위험이 있고 결국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실패한다는 것은 곧 바른 교회와 바른 목회에 결정적인 문제점을 야기할 수 있다. (2)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교회 속에서는 일반적으로 성속의 이원론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이분하는 이원론은 인간을 전인(The Whole Man)으로 보는 성서의 정신이나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 속에는 영적인 것과 세상 적인 것을 이분하는 성속의 이원론은 없다. (3)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교회는 교회의 역사적 책임에 실패하고 있는 결정적 문제점을 일반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정치적 문제에 있어서의 교회의 중립은 얼핏 보기에는 옳은 것 같지만 실상은 바른 신학적 결단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의한 세력이 약한 자를 폭압적으로 억누를 때 중립이라고 외치는 것은 결국 불의한 세력이 약한 자를 폭압적으로 완전히 죽이는데 기여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 때의 중립은 사악한 방조이고 결과적으로 불의한 세력에 결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문제에 있어서의 교회의 입장은 한편이 현저하게 악할 때에는 약한 자와 연대하는 당파성으로 나타나야 하지만, 상대적으로 선한 자와 악한 자가 있을 때는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2. 진보적 급진주의(사회참여) 신학전통에 서 있는 목회 김종렬에 의하면 “이 신학전통은 오늘날 기독교장로교회가 이어 받고 있으며, 감리교의 출신인 윤치호와 김재준 김재준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을 참고하라. 주재용 편,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서울:풍만출판사, 1986). 두 사람이 이 신학전통의 초석을 놓았다. 이 신학전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복음의 핵심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을 강조한다. 이들의 관심은 망해 가는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며 민족을 구하는데 있었고, 상실된 인권의 회복과 모든 사회악으로부터의 인간해방을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사회정의를 외치는 예언자적 참여의 신학을 전개시키게 되었다. 이 같은 신학전통의 정서 때문에 70년대의 정치 신학내지 해방 신학을 쉽게 수용하게 되었으며 서남동과 안병무가 중심이 되어 한국민중 신학을 창출해 내기도 하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장교회가 이 같은 진보적 급진주의 신학전통 위에 서서 목회를 수행하고 있다. 이들의 목회가 교회성장을 가져오는데는 크게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70년대부터 한국의 민주화와 사회정의와 인권회복을 위하여 투쟁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는데 큰 몫을 하였다.” 예장 바른 목회실천협의회 편, 『제3회 예장전국목회자수련회 자료집』, pp. 147-148. 그러면 이와 같은 신학 전통은 어떤 장점과 단점을 갖고 있을까?
1) 장점 (1) 진보적 급진주의(사회참여) 신학전통의 가장 큰 장점은 이 전통에 서 있는 교회를 역사 책임적 교회로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이 전통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인 김재준은 한국의 역사 책임적 신학의 아버지가 되었고, 이 신학전통은 개혁 교회의 신학전통의 중요한 정신인 역사 책임적인 신학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는 점에 대단한 장점이 있다. (2) 진보적 급진주의(사회참여) 신학전통은 한국 장로교회내에서 성서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본격적으로 열게 했다는 점에 또 하나의 간과할 수 없는 큰 장점이 있다. 이것은 근본주의적 축자영감설에 빠져서 성서를 이해하는데 큰 지장을 받고 있었던 한국 장로교회를 바르게 성서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점인데 이는 높이 평가할만한 일이다. (3) 진보적 급진주의(사회참여) 신학전통은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이라는데 장점이 있다. 이 신학전통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신학적 흐름에 가장 가깝게 존재하고 있고, 제 1세계와 제 3세계의 신학전통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대화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고, 교파 신학적인 폐쇄성을 극복하려는 경향을 나타내는 점에 장점이 있다.
2) 단점 (1) 진보적 급진주의(사회참여) 신학전통은 사회참여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복음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길 없다. 진보적 급진주의(사회참여) 신학전통의 또 하나의 대표적 신학자였던 안병무의 사상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 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인 성자도 아니고 그의 죽음이 만민의 죄를 속량하는 속죄의 죽음도 아니다. 그의 죽음은 민중운동을 하던 사람의 억울한 죽임이었고 그의 부활은 그의 정신이 갈릴리 민중들에게 부활한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전태일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않고, “전태일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라는 기도가 가능해질 위험이 있다. (2) 진보적 급진주의(사회참여) 신학전통은 사회참여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성서를 넘어서려고 하는 대단히 위험한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신학전통이 한 때는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70년대 이후에 와서는 탈성서화까지 등장하면서 성서의 권위를 상대화시키는 현상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탈성서화의 대표적 신학자는 서남동이었다. (3) 진보적 급진주의(사회참여) 신학전통은 사회참여에 있어서 방법론적 문제점을 많이 노출시켰다. 교회가 사회 책임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훌륭하지만, 사회 책임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 못지 않게 어떻게 사회 책임적인 교회가 되느냐는 방법론의 문제도 매우 중요하다. 전반적으로 좌파적인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나 사회학적 분석과 해답에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나 폭력의 허용 가능성과 역사 발전에 있어서의 민중주체이론 등은 주제에 따라서 논쟁의 여지는 있으나 한국 교회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목회 김종렬에 의하면 “이 신학전통은 오늘날 감리교회가 이어받고 있으며, 최병헌과 정경옥 이 두 사람이 이 신학전통을 수립하였다. 여기서는 기독교의 보수적 서구전통에 매이지 아니하고 한국의 전통사상과 기독교 전통사상과의 조화를 모색하려는 토착화 신학운동이 윤성범과 유동식에 의하여 시도되었다. 이들의 관심사는 수시로 변천하는 현실사회를 넘어선 민족적인 문화적 전통과 기독교의 진리와의 만남에 있다. 과감하게도 이들은 한국의 재래종교와 기독교와의 만남의 문제를 신학의 중요한 과제로 다룬다. 이 같은 신학전통 때문에 다른 교단에 비하여 감리교는 오늘날 기독교 신학계에서 많이 논의가 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에 대하여 자유롭게 - 변선환이 이 문제로 곤욕을 치루긴 했지만 - 논의할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어 있다. 오늘날 교회 성장학에 바탕을 둔 몇 개의 감리교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감리교회는 이 같은 신학전통 위에 서서 목회를 수행하고 있다.” Ibid., p. 148. 그러면 이와 같은 신학전통에는 어떤 장점과 단점이 있을까?
1) 장점 (1)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전통은, 진보적 급진주의(사회참여) 신학전통이 정의, 인권, 민주화 등 주로 정치적 측면에서의 교회의 책임을 강조한데 반해, 문화적 영역에서의 교회의 책임을 강조했다는 점에 장점이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오랫동안 강조해왔던 JPIC(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 속에도 문화적 영역은 결여되어 있다. 이에 반해 카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 이후 문화적 영역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지대했고 그 결과 큰 성과를 얻은 바 있다.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전통은 한국의 진보적 급진주의(사회참여) 신학전통이 크게 관심을 쓰지 않았던 문화적 영역에서의 교회의 책임을 인식했다는 점에 장점이 있다. (2)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전통은 토착화신학을 부르짖었고 이 영역에서의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는 점에 장점이 있다. 교회와 신학의 토착화는 매우 중요한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다수 교회는 근본주의적 보수주의에 매달려 서구 선교사가 전한 교리와 서양적 문화를 절대화한 우를 범했는데, 이를 비판하고 과감하게 토착화를 부르짖은 것은 명백한 장점이라고 볼 수 있다. (3)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전통은 타종교와의 대화의 문을 열었다는 점에도 장점이 있다. 타종교를 마귀시 해왔던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에는 큰 충격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종교와의 대화는 21세기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다원주의이고 이것이 종교적 영역과 결합하면 종교다원주의로 나타난다.
2) 단점 (1)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전통이 토착화신학을 부르짖은 장점은 있으나 카톨릭 교회가 토착화를 추진해서 성공한 것과 같은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거부감을 불러일으켰고 상당수의 교회가 토착화에 반감을 갖게되는 문제점을 남겼다. 이는 윤성범의 성(誠)의 신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설득력이 결여된 언어 유희적인 신학을 전개한 것이나 성찬식을 막걸리로 하는 것과 같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심성에 강한 불쾌감을 줄 수 있는 행위를 의도적으로 도발적으로 행한 방법론상의 문제점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2)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전통은 최근에는 종교다원주의와 결합하면서 한국에서 가장 강력하게 종교다원주의를 선전하는 신학흐름으로 변모하고 있다. 특히 변선환에게서 나타나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상대화시키는 문제점을 그 핵심에 품고 있다. 이는 과거 한국의 토착화신학의 선구자들에게 나타나는 복음이 문화를 변화시키는 의미에서의 씨앗과 토양과의 관계가 퇴조하고, 모든 문화와 종교를 같은 평면에서 이해하는 혼합주의 신학, 상대주의 신학이 그 자리를 대치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데 심각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토착화를 추진해서 상당한 성공을 거둔 카톨릭의 토착화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강조하는 터전 위에서 행해진 것이었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3)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전통의 종교다원주의 신학과의 결합은 교세 감소를 필연적으로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전도를 불필요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종교 다원주의 신학자들에게 전도는 기독교제국주의의 확산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종교다원주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미국의 감리교회의 급격한 교세감소도 우리는 유념해야 할 것이다.
4. 실용주의(및 심리학)를 바탕으로 하는 교회성장주의적인 목회 김종렬은 실용주의(및 심리학)를 바탕으로 하는 교회성장주의적인 목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해서 설명했다. Ibid., pp. 148-149.
지난 70년대부터 한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한국 교회성장의 열기는 대단하였다. 여기에 더욱 부채질한 것은, ‘하면된다’라는 내용을 담은 『적극적 사고방식』이란 책을 써서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킨 바 있는 노르만 빈센트 피일(Norman V. Peal), 그의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배워 미국에서 ‘수정교회’를 대형 교회로 성장시킨 로버트 슐러, 이 슐러의 영향을 받아 세계 제일의 교회로 성장시킨 서울의 순복음중앙교회의 조용기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교회성장학을 한국에 소개한 이는 서울의 광림교회 김선도이다. 그는 “교회성장세미나”를 개최하여 미국의 교회성장학자인 맥가브란(Donard A. McGavaran)과 와그너(C. Peter Wagner)와 헌터(George G., Hunter)의 교회성장학 이론을 한국에 소개하였다. 주의 몸인 교회는 성장해야 한다.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병이 들었거나 죽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교회는 성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떻게 성장하느냐가 문제이다. 교회답게 바르게 건강하게 아름답게 교회가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성장이 결코 교회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교회성장이 문제로 야기된 것은, 교회 성장이 우리 목회자들의 우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교회성장이 목회의 목표가 되고, 목회성공의 척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교회성장에 필요한 목회기술을 배우러 다니기에 분주하다. 교회성장에 효과가 있다면 어떤 방법이라도 목회에 적용시키는 일로 인하여, 교회의 순수성과 복음을 변질시키는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토록 지금 우리들의 현장에서는 목회의 ‘최고선’이 되어버린 ‘교회성장’이란, 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키고, 목회과정을 무시하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고 파행적이고 변칙적인 목회를 하게 한다.
그러면 이와 같은 실용주의(및 심리학)를 바탕으로 하는 교회성장주의적인 목회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일까?
1) 장점 (1) 이 흐름의 목회의 장점의 첫째는 설교자가 신자들의 영혼을 적극적으로 희망적으로 바꾼다는 점에 있다. 이는 신자들의 마음 속에 있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심리를 치료해서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인간으로 바꾸는 것인데, 복음이 근본적으로 희망을 의미한다는 점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복음은 절망적인 사회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적인 인간의 심리도 구원한다. 특히, 이 흐름의 교회 가운데 오순절주의 계통의 교회가 많이 있는데 오순절주의 운동이 20세기 초엽의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한 그늘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운동이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2) 이 흐름의 목회의 또 하나의 장점은 이 흐름이 지향하는 목적인 교회의 성장이 실재로 많은 곳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는 살아 있어야 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명제에서 볼 때 교회의 성장이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3) 이 흐름의 목회는 교회성장에 필요한 수많은 아이디어나 방법들을 과감하게 목회에 적용하고 있는데 또 하나의 장점이 있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교회가 예배의 조그마한 순서하나 바꾸지 못하는데 반해, 이 흐름의 교회는 시대가 요구하는 다양한 욕구들을 때로는 혁명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과감하게 흡수해서 현시대의 사람들의 종교적 갈증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예배나 교회의 환경과 조직을 바꾸고 있는데 장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교회음악과 새로운 예배형태는 대개 이 흐름의 교회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2) 단점 (1) 이 흐름의 목회의 가장 큰 장점은 교회의 성장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교회성장이 과연 바른 교회성장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있다. 물론 예배의 환경에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다든지 절망 속에 있는 인간의 영혼을 치료해서 새로운 인간으로 만든 다든지 절망 속에 있는 인간의 영혼을 치료해서 새로운 인간으로 만든 다든지 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교회성장에 기여하는 것 들 일 것이다. 그러나 이 흐름의 교회성장 가운데 샤머니즘적인 기복신앙을 설교해서 교회를 성장시킨 경우도 상당부분 존재하고 있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또한 상당수의 교회는 신비주의와 결탁하고 있다. 샤머니즘적인 기복신앙이나 신비주의는 바른 교회를 위해서는 척결해야 할 대상이다. (2) 이 흐름의 목회의 또 하나의 큰 문제점은 전체적으로 “제자의 길”에 대한 설교가 약하거나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값싼 은혜로 전락할 위험과 결부되어 있는데, 기독교 신학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고난의 신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이 흐름의 신학 속에는 발견하기 쉽지 않다. 고난과 실패와 죽음 속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는 차원 높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결여는 교회를 차원 높은 고귀한 교회로 만드는데 실패할 가능성과 결부된다. (3) 이 흐름의 교회 속에서 자주 눈에 띄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이 흐름의 교회 속에서는 특정 인물이 우상화되는 경향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그리고 교회가 이 특정 인물의 사유화되는 경향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특징들이 이 흐름의 교회 속에 일부 나타난다는 것인데, 이것은 매우 우려할만한 일이다. 이런 우상화를 막을 수 있는 신학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개혁 교회 신학의 핵심정신을 목회자에서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5. 복음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전통에 서 있는 목회 유동식의 『한국 신학의 광맥』에서 언급되고 있는 한국 교회의 신학 전통에 대한 설명에서 간과되고 있는 가장 큰 결점은 복음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전통에 대한 언급의 부재이다. 이는 『한국 신학의 광맥』이 쓰여졌던 시절에는 이 신학전통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인데, 오늘에 와서는 이 신학전통은 한국 교회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간과해서는 안 되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전통이 되고 있다. 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은 과거에는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속해 있었지만 1980년대부터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면서 독자적인 신학적 정체성을 구축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복음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이다.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과 복음적 에큐메니칼적 신학전통과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 김몀용, “한국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기독교학회 편, 『전환기에 선 한국 교회와 신학』(서울:양서각, 1988), pp. 103-111. 이 복음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은 1985년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회에서 발표한 신학성명 속에 그 구체적인 실체를 뚜렷이 드러냈는데 이 내용은 장로회신학대학교의 학술지 『교회와 신학』제17집(1985)에 실려있다. 그 핵심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개혁신학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오늘에 와서는 복음주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신학 양쪽의 신학적 장점을 이어받겠다는 것이다. 이를 뒤집어서 얘기하면 복음주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신학 모두를 비판하면서 참으로 복음적이고 참으로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을 가르치고, 참으로 복음적이고 참으로 에큐메니칼적인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1) 장점 (1) 복음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전통의 장점은 우선 신학적 폭이 넓기 때문에 다양한 신학정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신학 전통은 복음주의의 장점을 알고 있고, 에큐메니칼 신학의 장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세계신학과 교회를 양분하고 있는 양쪽 신학의 장점을 흡수해서 교회 내에서 신학적 실천을 할 수 있다는 점에 큰 장점이 있다. (2) 복음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전통은 신학정신의 다양성을 상당 부분까지 인정하기 때문에 신학적 이유로 인한 교회분열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다.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이 신학적 편협성과 획일성으로 인해 한국 교회 내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분열의 아픈 상처를 남기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새로운 신학전통은 교회의 하나됨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상당한 가치가 있다. 또한 복음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신학과 교회는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진영으로 양분된 한국 교회가 교회의 일치를 위해 가장 필요한 신학과 교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 큰 가치가 있다. (3) 복음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전통은 급진적이지 않고 온건하고 편파적이지 않고 공동의 선을 추구하고 시류에 급하게 흔들리지 않고 전통과 오늘의 상황을 가능한 한 잘 화합하고 조화시키려는 경향을 나타내는데, 이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우선 긍정적인 특징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특징 때문에 복음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전통 속에 있는 교회는 일반적으로 어느 특정계층의 사람이 우세한 교회가 아니고 만민이 특별한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드나들 수 있는 보편적인 교회의 특징을 가장 많이 나타내고 있다.
2) 단점 (1) 복음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전통은 복음적인 신학과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을 결합시켜 참으로 복음적이고 참으로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을 만들어 나가는 신학전통이지만 아직 이것이 완벽하게 성공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 큰 약점이 있다. 복음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전통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신학의 목소리가 결여된, 두 신학전통의 짜깁기가 될 위험이 많다. (2) 복음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전통은 언제나 뒷북치며 뒤따라가는 교회를 만들 가능성이 많이 있다. 예컨대 사회정의에 관한 문제는 진보적 급진주의 신학전통의 교회가 앞서서 외치고 난 후에 나중에 뒤따라서 외치고, 복음의 토착화는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전통의 교회가 선구적으로 일을 행한 후에 뒤따라서 행할 가능성이 많다. (3) 복음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전통의 교회는 신학이 교회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정치나 세상의 정치가 신학을 누르고 교회를 지배할 가능성이 상당 부분 존재한다. 그 이유는 이 신학적 가르침도 문제점이 있고 저 신학적 가르침도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를 지배하는 뚜렷한 신학이 결여되는 빈곳이 많이 생기게 된다. 교회에서 신학이 지배하고 있지 못하는 빈곳은 다른 어떤 것이 지배하기 마련인데, 곧 교회정치나 세상의 정치 같은 낯선 것이 교회를 지배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이는 복음적이고 에큐메니칼 신학전통이 아직 완전한 신학적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한 것이 연관이 있다.
Ⅱ. 바른 신학에 입각한 바른 목회
지금까지 우리는 신학적 관점에서 본 한국 목회의 유형과 그 장단점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언급한 네 가지 한국 목회의 유형은 그 나름대로의 장점도 있지만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은 그 유형의 목회를 그대로 반복할 수 없다는 사실과 연계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목회를 추구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장점이고 이것은 단점이다는 양시론과 양비론적 관점을 넘어서 바른 신학에 입각한 바른 목회란 어떤 것일까?
1. 신학과 목회의 표어로서의 “오직 하나님께 영광” (Soli Deo Gloria) 개혁 교회의 신학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지는 신학적 표어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표어이다. 이 표어 속에는 개혁 교회 신학의 위대한 신학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고, 개혁 교회를 참다운 개혁 교회로 만드는 결정적인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다. 사람의 제일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섬겨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께 존귀와 찬미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칼빈주의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들의 영혼구원보다 더 중요하다. 김명용, “개혁교회 신학의 역사적 조명” 『장신논단』제9집(1993), p. 361. 이것은 개인구원의 이기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차원 높은 목표를 가르치는 개혁 교회 신학의 위대한 정신을 나타내는 말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신학정신은 교회와 사회 속에서의 모든 우상을 거부하고 파괴하는 신학정신이다. 교회 속에서의 특정 인물이 우상화된다든지 교회가 사유화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개혁 교회의 정신과 심각하게 충돌된다.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라 할지라도 자신이 교회 내에서 우상화되는 것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찬탈하는 심각한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모든 목회자들은 자신의 일을 다하고는 “나는 무익한 종이라”(눅 17:10)는 고백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죄인이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일을 행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신학정신은 사회 속의 우상도 파괴하는 신학정신이다. 『바르멘 신학선언』의 주역인 칼 바르트(K. Barth)는 본(Bonn)대학에서 히틀러(A. Hitler)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수업할 것을 강요받았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뿐이다”라고 선언하고 경건주의자들의 기도문을 읽고 기도하고 수업했다가 결국 본대학의 교수직에서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는 히틀러를 따르는 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따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선언하면서 히틀러를 향한 신학적 투쟁을 계속했다. A. Burgmüler/ R. Weth (ed.), Die Barner Theologische Erklärung(Neukirchen:1983), pp. 34-40 참조 퍼시 경(Lord Eustace Percy)은 존 낙스(J. Knox)에 관한 전기에서 국가의 종들 가운데 최상의 종은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께 최고의 충성을 바치는 자라고 언급했다. 칼빈주의자들은 교회 앞에서 왕관을 벗고 교회의 발에 묻은 먼지를 터는 것이 왕들의 의무라고 선언했다. 교회가 교회 내적으로나 교회 외적으로 바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개혁 교회의 신학정신을 실천해야 한다. 이 신학정신은 제 1계명의 성실한 준수를 의미하는데, 부패한 교회나 부패한 사회일수록 이 신학정신과 거리가 멀다. 문선명을 우상화하는 통일교회나 김일성과 김정일을 우상화하는 북한의 정치체제는 모두 제 1계명과 충돌되고 있는 조직인데, 통일 교회와 북한의 정치체제는 제 1계명의 준수가 바른 교회, 바른 사회를 만드는 기둥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2. 성서중심의 신학과 목회 16세기의 종교개혁의 운동은 교회의 권위의 장소를 교황에게서 성서로 옮긴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자들에 의하면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지 교황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었다. 우리가 복종하고 따라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성서 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은 “오직 성서로”(Sola Scriptura)라는 표어로 요약할 수 있다. 성서를 교회의 절대권위로 삼는 것은 바른 교회를 만들기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서의 말씀을 기초로 해서 로마 교황청의 부패와 가톨릭 교회의 신학적 오류를 수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개혁 교회가 항상 개혁하는 교회라는 표어를 내걸고 교회를 개혁하고자 할 때에도 성서는 언제나 바른 개혁을 위한 정신적 표준이었다. 바른 목회는 성서를 사랑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성서가 가르치는 정신에 끊임없이 복종하면서 목회자 자신과 교회를 개혁할 때 바른 교회가 탄생하고 바른 목회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교회가 성서를 사랑하고 성서에 복종하고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다고 할 때, 그것이 근본주의자들이 했던 것과 같이 성서를 우상화하고 성서의 축자적 영감설을 주장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면 안 된다. 이와 같은 발전은 잘못된 발전인데 이런 발전은 17세기의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의 시기에 이미 나타났다. 17세기의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의 성서관과 종교개혁자들의 성서관의 차이는 양쪽 모두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했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성서의 기계적 영감론에 기인한 축자적 무오사상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교회의 권위의 중심을 교황에서 성서로 옮기는데 관심이 있었던데 반해, 17세기의 정통주의자들은 이미 확보된 성서의 권위를 더욱 극단화해서 문자적 무오에 관심을 집중시킨 것에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김명용, 『열린신학 바른 교회론』(서울:장신대출판부, 1997), pp. 200-209 참조. 종교개혁자 루터(M. Luther)와 칼빈(J. Calvin)은 모두 성서 속에 부분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문자적인 무오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전체로서의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했다. 특히 루터는 야고보서는 지푸라기서신이라고까지 말하면서 성서는 아기 예수가 누운 구유와 같은데, 성서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복음인데, 복음이 아닌 지푸라기도 성서 안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성서의 축자적 영감설은 18세기와 19세기의 계몽주의 시대와 자유주의 신학의 시대를 거치면서 붕괴되었고 성서연구의 핵심적인 방법론으로 성서의 역사 비평학이 도입되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를 거치면서 이 성서의 역사비평학은 성서연구에 꼭 필요한 방법론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고, 개신 교회에서도 세계의 권위 있는 대다수 신학교와 교회가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 성서의 역사 비평학을 인정하는 단계에 와 있다. 그러므로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고 성서중심의 신학과 목회를 행하고자 할 때 성서에 대한 역사비판학을 마귀시하거나 결코 사용할 수 없는 방법론으로 보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에 대한 역사비판학적 방법을 급진적으로 사용해서 성서의 권위를 훼손시키고 성서를 상대화시키는 것은 큰 오류이다. 이와 같은 오류는 자유주의를 선호하는 신학과 교회 속에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 역시 바른 신학과 바른 목회를 위해 바람직한 길이 아니다. 20세기의 대표적 개혁 교회의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성서비평학의 한계를 강조한 바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비평학은 성서가 갖고 있는 인간적인 측면을 밝히는데 있다. 그러나 성서비평학은 성서가 갖고 있는 계시적 측면(곧 신적 측면)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인 결정적인 이유는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bstoffenbarung Gottes)인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국의 상당수의 진보적인 신학대학에서 성서와 불경을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많은 신학생들을 만날 수 있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무조건 맞다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신학생들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오늘의 한국 교회의 신학과 목회에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전주곡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바른 신학과 바른 목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성서를 상대화시키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계시로 받고 순종하는 데 있을 것이다.
3. 하나님의 은총과 복음의 중요성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의 오류 가운데 특히 유대주의적 오류를 심각하게 비판했다. 왜냐하면 유대주의적 오류를 방치하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바른 신학과 바른 목회는 유대주의적 오류, 곧 율법주의와 결별하는데서 시작된다. 칼 바르트는 율법주의자들을 자신의 신학의 일생의 적으로 규정했다. 바르트는 경건주의 가운데서 자란 신학자였지만 경건주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바르트는 경건주의자들의 지옥이라는 혹독한 표현을 쓰면서, 경건주의자들이 스스로 의에 이르고자 하지만 이에 이르지 못해서 자책과 자괴상태에 빠지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 떠는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비판했다. 김명용, 『현대의 도전과 오늘의 조직신학』(서울:장신대출판부, 1997). pp.253-256 참조.
루터와 칼 바르트로 이어지는 개신교 신학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격에서 시작되는 신학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 곧 복음을 알리기 위해 그의 거대한 저술인 『교회 교의학』을 저술했다. 개신교 신학은 근본적으로 복음적인 신학이다. 또한 복음적인 교회만이 진정한 개신 교회라고 불리울 수 있다. 하나님의 은총, 곧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서 감격적으로 그 모습을 결정적으로 나타내었다. 이 십자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의 핵심은 대속의 죽음이었다. 그런데 최근의 한국 교회의 진보적 급진주의(사회참여) 신학전통을 대변하는 안병무와 서남동의 가르침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언급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이를 부정하는 신학이 전개되고 있는 것은 교회의 생존이 걸린 대단히 위험한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복음이 없는 신학은 죽은 신학이다. 복음이 없는 신학으로는 교회를 살려낼 수 없다. 복음이 없는 신학으로는 사회운동가는 만들 수 있지만 살아 있는 교회는 만들 수 없다. 바른 신학에 입각한 바른 목회는 복음적인 교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대한 감격이 없는 사람은 아직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격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의 시작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웃을 참으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른 신학은 고난의 신학과 제자의 길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고난의 신학과 제자의 길을 가르치기 전에 바른 신학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복음을 가르쳐야 한다. 또한 바른 목회 역시 복음을 전하는 데서 시작된다. 복음을 전하는데 실패하고 있는 목회는 어떤 경우이든 실패한 목회이고, 바른 목회는 아니다.
4.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나누지 않는 전인적인 신학과 전인적인 목회 우리는 위에서 한국의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이 영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을 구분하는 이원론적 경향이 있음을 비판한 바 있다. 성서의 근본적인 정신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양분시키지 않는다. 성서가 얘기하는 구원도 인간의 구원이지 영혼만의 구원이 아니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 소경과 절름발이, 문둥병자를 고치는 육체적 구원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병자를 고치시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세리나 창기를 부르셔서 그들의 참된 친구가 되셨다. 예수의 구원은 결코 이 세상의 삶과 유리된 영혼의 세계 속에서의 구원이 아니었다. 그리고 예수의 구원사역의 절정인 죽음을 깨뜨리는 부활도 육체의 부활이었다는 점도 깊이 유념해야 한다.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는 영혼의 불멸만을 가르친 헬라의 철학과 깊은 차이가 존재한다.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나누지 않는 전인적인 신학이 바른 신학이다. 영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은 바른 성서적 사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인으로서의 인간을 향하고 있고 교회도 전인으로서의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을 영혼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전체로서의 인간을 향한 구원을 전하는 신학이 바른 신학인 것과 바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을 인간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전체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인식하고 있는 신학 또한 바른 신학이다. 개혁 교회 신학자 몰트만(J. Moltmann)은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J. Moltmann. Gott in der Schöp fung (München : Kaiser, 1985). 『오시는 하나님』 J. Moltmann, Das Kommen Gottes (München : Kaiser, 1995). 등의 책을 출간시키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영역을 우주적으로 확대시킨 우주적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인간 중심적인 신학은 바른 신학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뿐만 아니라 전체 피조 세계로 향하고 있다. 오늘의 바른 신학과 바른 목회는 육체적인 세상을 버리고 영적인 세계로 도피하는 신학과 목회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전체 인간을 향하고 있고 동시에 전체 피조세계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바른 신학과 바른 목회는 이 하나님의 구원의지를 깊이 인식하고 있는 신학과 목회이다. 영혼을 위한 신학이 과거의 신학이었다면 인간과 전체 피조세계를 위한 신학이 오늘의 신학이다. 따라서 바른 목회도 인간과 전체 피조 세계를 위한 목회여야 한다.
5.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임성 오늘의 바른 신학은 역사 책임적 신학이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의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는 기도문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기도인데, 이 기도는 역사책임적 신학을 요청하는 기도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 땅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 위에서 이루기 위해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 속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정치, 하나님의 경제, 하나님의 사회, 하나님의 문화를 위한 요람이 되어야 한다. 한국의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을 대변하는 박형룡은 역사에 대한 비관주의적 신학을 가르쳤다. 그에 의하면 역사는 점차 파국을 향해 나아가고 종말이 가까울수록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악의 세력은 득세한다. 세상은 점차 캄캄해지고 비관적이 된다. 이와 같은 역사에 대한 비관주의적 역사관은 많은 부흥운동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오순절주의 교회와 신학적으로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는 세대주의 신학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휴거론이나 7년 대환란 이론을 가르치는 종말론은 거의 대부분 비관주의적 역사관에 채색되어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비관주의적 역사관은 바른 신학적 역사관도 아니고 바른 성서적 역사관도 아니다. 이와 같은 비관주의적 역사관을 교회가 받아들일 때 일어나는 가장 큰 위험은 역사 개혁 의지의 상실이다. 세상이 점점 약해지고 마귀의 세상이고 변하는 것이 정해져 있는 사실이라면 역사를 개혁하고 새롭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비관주의적 역사관을 교회가 받아들이면 교회는 역사 개혁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오직 영혼구원에만 치중하게 된다. 장차 망할 성인 이 세상에서 영혼을 구원해서 구원의 방주에 태워 천성에 보내는 것이 교회가 행해야 할 가장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은 한국의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 전통에 속해 있는 많은 교회에서 목격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바른 역사관은 어떤 역사관일까? 비관주의적 역사관과 반대되는 역사관은 낙관주의적 역사관이다. 이 낙관주의적 역사관은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가르쳤던 역사관인데 이 역사관도 잘못된 역사관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 역사는 결코 낙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 속에는 심각한 악이 존재하고 반신적 세력의 주동에 의한 파국의 가능성을 결코 배재할 수 없다. 낙관주의적 역사관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역사 속에 존재하는 심각한 악과 반신적 세력에 의한 파국의 가능성을 깊이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바른 역사관이 아니다. 그러면 바른 역사관은 무엇일까?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임적인 바른 역사관은 희망의 역사관이다. 희망의 역사관은 역사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비관주의적 역사관과는 다르다. 그러나 이 희망의 역사관은 역사에 대해 희망을 품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낙관주의적 역사관과 유사할지 모르나 낙관주의적 역사관과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이 희망의 역사관은 인간의 죄악성과 역사 속에 존재하는 깊은 악과 반신적 세력에 의한 파국의 가능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는 신학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희망을 갖는 것은 이 역사 속에 마귀가 준동하고 깊은 악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이 역사의 참된 통치자는 주님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악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리스도의 능력은 더욱 강하기 때문에 마침내 이 땅 위에 그리스도의 의의 통치가 수립되고 그리스도의 승리가 나타날 것을 믿는 역사관이 희망의 역사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희망의 역사관은 깊은 악과 어둠 속에서도 역사를 개혁하기 위해 고난의 역사 한복판으로 뛰어들게 한다. 사회와 역사에 대해 책임지는 교회는 이 희망의 역사관을 가르쳐야 한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J. Moltmann. Theologie der Hoffnung (München : Kaiser, 1964). 은 바로 이 희망의 역사관을 세계에 알린 개혁 교회가 낳은 불후의 저술이었다.
6. 고난의 신학과 제자의 길 고난의 신학가 제자의 길을 20세기에 가장 훌륭하게 가르친 신학자는 본회퍼(D. Bonhöeffer)이다. 그는 히틀러의 마귀적 통치 하에서 고난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그는 살해당한 사람들의 시신 속에 묻혀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면서 제자의 길이 무엇인가를 세계 교회에 가르쳤고, 스스로 이 제자의 길을 죽기까지 걸어갔던 신학자였다. 몰트만은 그의 책 『예수 그리스도의 길』 J. Moltmann, Der Weg Jesu Christ (München : Kaiser, 1989), pp. 223-224. 에서 이 본회퍼를 오늘의 순교자로 추앙했다. 바른 신학은 영광의 신학만을 가르치는 신학이 아니다. 샤머니즘적인 기복신앙으로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은 바르게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다. 사람만 많이 모이면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라는 편견도 고쳐져야 한다. 과거 전도관의 박태선 장로가 남산에서 집회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이비 종교집단의 집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열광하고 있는 현장을 우리가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해외에서 불러들인 연예인들의 집회에 올림픽 공원이 가득 차고 관중들이 울고 쓰러지는 광경도 우리가 목도했지 않았던가! 울고 쓰러지고 열광하는 것이 모두 성령의 역사는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제자들마저 모두 떠나버리고 홀로 끌려가시며 매맞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외로운 길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많은 순교자들의 길 위에 성령이 함께 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른 목회는 고난의 신학과 제자의 길을 가르치는 목회이다. 세상에서의 성공만을 희구하는 현세 기복적이고 주술적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는 아니다.
7. 신학의 토착화와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문화의 형성 동양의 정신 가운데 특히 도교의 정신 속에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 사상이 깊이 존재하고 있다. 동양화는 자연 속에 인간이 살고 또한 인간 속에 자연이 살고 있는 자연과 인간의 하모니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에 대한 사상은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했던 서양의 문화와 사상보다는 동양의 사상 속에서 더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창조신학은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하고 자연을 정복하고 착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오늘의 창조신학은 오히려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동체를 요구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문화의 사상은 동양의 것이 서양의 것보다 더욱 성서의 정신에 가깝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 근본주의적 보수신학의 전통은 동양의 정신과 문화를 이교적이고 마귀적인 것으로 빨리 결론을 짓는 경향을 나타내어 왔다. 그런데 동양의 정신과 문화를 이교적이고 마귀적이라고 규정하는 신학은 바른 신학이 아니다. 동양의 정신과 문화가 기독교 국가들이 주축을 이룬 서양의 정신과 문화보다 더욱 성서적이고 하나님의 뜻에 가까운 것들이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다. 바른 신학은 과감하게 신학의 토착화를 전개하는 신학이다. 그런데 신학의 토착화에서 중요한 것은 혼합주의적 토착화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바른 토착화의 방법은 긍정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부정적인 것을 제거하는 방향이다. 그런데 이때의 표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성서의 빛이다. 우리는 위에서 도교의 정신의 긍정적인 측면을 언급했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도교는 자연을 이해할 때 근본적으로 범신론적 시각에서 자연을 이해하고 있다. 이런 범신론적 시각은 삼위일체적 시각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토착화는 결코 무분별한 혼합주의 방식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나 성서의 정신을 상대화시키고 동양의 정신과 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21세기를 맞는 한국 교회는 토착화를 전개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의 문화를 건설하는 요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기독교 문화를 선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문화를 건설해야 한다는 점이다. 기독교 문화가 곧 하나님 나라의 문화라고 볼 가능서도 있겠지만 엄밀하게 표현하면 이 두 가지는 차이가 있다. 기독교 문화를 선전하고 확대하는 것은 잘못하면 서양의 문화를 선전하고 확대하는 것이 될 가능성이 많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성서의 빛이 동양의 문화와 사상을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양의 기독교 문화도 비판해야 한다. 신학의 토착화는 서양의 기독교 문화 속에서의 긍정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부정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의 문화는 서양적인 것은 옳고 동양적인 것은 그르다는 편견이 지배하는 문화가 아니라 오히려 이런 편견을 비판하고, 동양에서는 동양적인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서양에서는 서양적인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건설하는 것과 연계되어 있다. 바른 신학과 바른 목회는 바로 이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건설하는 신학과 목회이다.
8. 성령의 능력과 기도하는 교회 몰트만은 1975년 자신의 교회론을 출간시키면서 『성령의 능력 아래 있는 교회』(Kirche in der Kraft des Geistes)라고 제목을 붙였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 아래 있어야 한다. 오순절주의 교회의 하나의 큰 장점은 교회가 성령의 능력 아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점이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발전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된다. 바른 교회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는 교회이고 기도하는 교회이다. 성령의 능력에 힘입지 못하고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메마른 교회가 되고 성장하지 못하고 죽어갈 것이다. 1960년대에 그리스도인들과 맑스주의자들의 대화가 있었다. 이 대화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맑스주의자들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고, 맑스주의자들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자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고, 평등한 형제자매 공동체를 건설하기를 원하고 있고, 불의한 정치 경제 질서를 개혁하기를 원한다는 점에 대해 기뻐했고, 또한 이거시 성서의 근본 정신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대화에서 맑스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가지가 드러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너희들은 왜 기도하는냐”라는 맑스주의자들의 질문 속에 요약되어 있다. 맑스주의자들의 눈에는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의 책임을 신에게 넘기는 행위로 자신의 책임을 기피하는 행위로 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너희는 왜 기도하느냐”라는 맑스주의자들의 질문은 맑스주의 무신론과 그리스도교의 유신론의 서로 건널 수 없는 강이요 간격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믿었다. 왜냐하면 역사의 변혁과 새로운 세계의 건설은 성령의 능력과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칼 바르트(K. Barth)에 의하면 교회가 국가를 위해 행할 수 있는 가장 큰 공헌은 국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역사 속에 기도하는 교회가 있다는 것은 역사를 살리는 역사의 희망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바른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이고,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와 세상을 새롭게 하고 변화시키는 교회이다.
결언
교회는 바른 신학의 터전 위에 서 있어야 하고 목회자는 바른 신학에 입각해서 바른 목회를 해야 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신학적 전통과 목회의 유형들을 우리가 분석해 보았지만 그 어떤 유형의 신학과 목회도 바른 신학이고 바른 목회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나름대로의 장점들은 있지만 또한 간과할 수 없는 큰 문제점도 내포되어 있다. 바른 신학과 바른 목회를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오늘의 한국 교회의 신학적 전통과 목회의 유형들 속에 나타나고 있는 장점들은 흡수하고 단점들을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일차적인 작업 수행의 바탕 위에서 우리가 바른 신학과 바른 목회를 위해 뚜렷하게 강조하고자 한 것은 신학과 목회의 표어로서의 하나님께 영광, 성서중심의 신학과 목회, 하나님의 은총과 복음의 중요성,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나누지 않는 전인적 신학과 전인적 목회,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임성, 고난의 신학과 제자의 길, 신학의 토착화와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문화의 형성, 성령의 능력과 기도하는 교회 등 여덟 가지이다. 목회자가 이 여덟 가지의 신학적 시각을 잃지 않을 때 그는 바른 목회의 길 위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