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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약용과 형제들의 유배생활로 본 섬사람들의 의식변화

수호천사1 2012. 4. 25.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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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丁若鏞)은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실용지학(實用之學)·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주자 성리학의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시했다. 본관은 나주(羅州). 소자는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 자호는 다산(茶山)·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 당호(堂號)는 여유(與猶). 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 재원(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두서(斗緖)의 손녀이다. 경기도 광주시 초부면(草阜面) 마재[馬峴]에서 태어났다. 다산의 생애와 학문과정은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따른 유배를 전후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며 그의 사회개혁사상 역시 이에 대응되어 나타난다.

 

정약용은 점점 노론 벽파의 표적이 되어가는데......

 

선정을 펼치던 정조가 의문 속에 사망하고

어린 순조를 대신해 정순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면서

노론벽파와 합세하여 남인들을 제거하고자 한다.

이리하여 남인을 제거할 명분을 찾는데 그것이 바로 천주교였다.

 

서양학문과 서구문물에 개방적이었던 남인들을 중심으로 

천주교가 확산되어 있었는데 이를  이용한 것이다.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제사를 거부하는 천주교는 사단이라고 하며

단지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목으로 인간사냥을 시작하여

수백명의 천주교도들이 죽음에 이르렀다. 

 

남인 출신인 정약용 일가도 무사할 리 없었다.

형제들 중 가장 늦게 천주교를 접했지만  

가장 철저한 천주교도였던  형 정약종이 죽었다.

정약용과 정약전 역시 학문적인 관심에서 잠시 천주교에 빠졌지만

제사거부사건(진산사건) 이후 천주교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지에서 두 형제의 삶은 달랐다.

정약용은 마음을 가다듬고 학문에 정진하여 유명한 수권의 책을 남겼으며,

유배지에서도 편지를 통해 자녀들 교육에 소홀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 정약전은 절망하여 마을 어부와 어울려 술을 마시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며 학문에는 소홀하였고 결국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정약전은 유일하게 흑산도 인근바다의 물고기를 정리한 자산어보를 남겨 

생물학계의 좋은 교과서가 되고 있다.) 

 

정약용은 18년의 긴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후

18년을 더 살고 죽음을 맞이하는데 향년 75세였다.

 

의미있는 것은 최근 법정스님이

자신의 장례를 소박하게 하라고 해서 화제가 되었는데

정약용 역시 죽기 전의 유명첩에서

"좋은 자리를 물어보지 말고 집의 뒷동산에 매장하라"고 했으며

"석물을 지나치게 세우지 말라"고 하여 검소한 장례를 요구했다.

 

여기 유배생활에서 있었던 한 일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1814년 안개가 자욱하게 낀 어느밤.작은 어선 한 척이 남해안 흑산도에 조용히 닻을 내렸다

.흑산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정약전을 비밀리에 모셔 가려고 온 우이도 주민들의 배다.
작전은 성공하는 듯했는데 안개가 걷히자 그만 들통 나고 말았다.
흑산도 주민들은 재빨리 쫓아와 스승을 다시 모셔 갔다.
야밤에 이게 웬 소동일까.

조선 시대 섬에 유배돼는 형벌은 당사자에게는 한양을 떠나는 괴로움을 안겨 줬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일류 지식인에게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되었다.
그래서 한 스승을 놓고 우이도와 흑산도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은 복성재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유배지에서의 외로움을 달랬다.

같은 시기에 강진으로 유배된 아우 정약용과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그나마 큰 낙이었다.
어느날 아우의 유배가 곧 풀릴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정약전은 아우가 돌아오기 쉽게 육지에서 가까운 우이도로 이주하려 했던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1년 뒤 흑산도 주민들을 설득해 우이도로 이주했는데 아우는 그때까지도 풀려나지 못했다.
한편 정약용은 강진에서 무려 18년 동안이나 유배돼 있었다.

형 정약전처럼 시골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열다섯 살짜리 소년이 의기소침하여 말했다.
"선생님.저는 둔하고 꽉 막혔고 미련합니다.이런 저도 공부할수 있을까요?
정약용이 말했다."너는 공부하는 자가 갖기 쉬운 병통이 하나도 없구나.

기억력이 뛰어나면 소홀하기 쉽고 ,글짖기 재주가 많으면 들뜨기 쉽고,

깨우침이 재빠르면 거친것이 폐단이다.
비록 미욱하더라도 부지런히 애쓴 사람은 빛이 난다"
소년은 이 말을 늘 기억했다.손에 쟁기를 쥘 때도 결코 잊지 않았다.

그가 바로 뒷날 추사 김정희에게  "지금 세상에없는 작품" 이라 찬사를 받은 시의 작가 "황상"이다.
유배는 두 형재의 정치적 생명을 끊은 가혹한 형벌 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시간동안 눈 어두운 민초들에게 지식과 꿈을 가르쳤고,

개인적으로는 학문을 펼칠 기회로 삼기도 했다.

정약전은 십오년동안 흑산도에서 지내면서 그곳의 어류를 총 망라한 백과사전(자산어보)를 집필했고,

정약용은 (목민심서),(경세유포)를 비롯한 500여 권의 저서 대부분을 유배 생활 중에 완성했다.
우리에게 역량을 펼치지 못하는,고난의 시기가 닥쳤을 때 두 형재의 유배기를 기억할 일이다.

대체로 전라도의 섬 지방 또는 한적한 시골이 유배지였다.

그래서 지식인들에게 일찌기 깨달음을 배우고 머리가 틔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곳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나오고 유배생활의 지루함과 무언가에 기대고 싶은 심리에 종교에 귀의하고 불의에 항거하는 민주주의정신이 발달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독  소(獨 笑)"

                                           茶山 丁若鏞

 

유  속  무  인  식              양식 많은 집은

有粟無人食                   자식이 귀하고

다  남  필  환  기             아들 많은 집엔

多男必患飢                   굶주림이 있으며,

 

달  관  필  창  우             높은 벼슬아치는

達官必창愚                   꼭 멍청하고

 

재  자  무  소  시             재주 있는 인재는

才者無所施                   재주 펼 길 없다.

 

 

 

가  실  소  완  복             완전한 복을

家室少完福                   갖춘 집 드물고,

지  도  상  릉  지             지극한 도는

至道常陵遲                   늘상 쇠퇴하기 마련이며,

 

옹  색  자  매  탕             아비가 절약하면

翁嗇子每蕩                   아들은 방탕하고,

 

부  혜  랑  필  치             아내가 지혜로우면

婦慧郞必癡                   남편은 바보다.

 

월  만  빈  치  운             보름달이 뜨면

月滿頻値雲                   구름이 자주 끼고

 

화  개  풍  오  지             꽃이 활짝 피면

花開風誤之                   바람이 불어대지.

 

물  물  진  여  차             세상일이란

物物盡如此                   모두 이런 거야.

 

독  소  무  인  지             나 홀로 웃는 까닭

獨笑無人知                   아는 이 없을걸.

 

 



 
     내사랑 목련화 - 테너 엄정행


 

출처 : 퐁당퐁당 하늘여울
글쓴이 : 불나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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