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스크랩] 종교로서의 불교 알기

수호천사1 2012. 3. 13. 10:11

종교로서의 불교 알기



1. 불교는 철학이냐 종교냐

불교는 철학이지 종교는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이는 주로 그리스도교 신학자들로부터 나오는 견해이다.  신에 대한 신앙을 핵심으로 하지 않고 그저 인간의 깨달음을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는 것이 그런 견해의 주된 근거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서구의 유일신 종교 문화를 준거로 해서 종교를 규정한 데 입각한 이야기일 뿐이다. 유태-그리스도교 전통의 유일신 신앙을 준거로 하는 종교 개념을 적용하면 그 전통 이외의 것은 모두 종교가 아닌 것이 된다.  특히 불교를 비롯해서 유교, 도교, 힌두교 등 동양의 주요 종교전통들을 모두 종교의 범주에서 제외하게 된다. 그것은 자기 문화 중심주의의 독단일 뿐이다.  마루 종(宗), 가르침 교(敎)자를 합쳐서 만든 종교라는 말은 아마도 서양의 religion이라는 단어의 번역으로 창안된 것이겠지만, 종(宗), 교(敎), 학(學) 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금 우리가 쓰는 종교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렇게 보면 불교, 유교, 도교 등을 종교가 아니라고 함은 어불성설이요 오히려 서양 종교를 종교가 아니라 religion이라고만 불러야 할 것이다.

어느 저명한 기독교 신학자는 기독교를 이제 더 이상 종교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기독교 이외의 온갖 잡다한 종교현상을 다 싸잡아 종교라고 불러대니 그 말을 더 이상 기독교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그런 잡다한 종교들과 같은 반열에서 취급될 수는 없으니, 종교라는 말을 이제는 주어버리고 기독교는 기독교라고만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religion이라는 말을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로 쓰고 싶어하는 문화적 독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종교와 철학을 근본적으로 구분하려는 시각 자체가 동양 종교 전통에는 걸맞지 않는다.  신에 대한 신앙을 종교라 하고 이성으로써 관찰하고 사유함으로써 지식을 얻는 것을 철학이라고 구분하는데, 동양 종교 전통에서는 워낙 그런 식의 구분이 의미가 없다.  세상과 인간의 궁극적인 진상[宗]을 체득하고 그것을 가르치며[敎] 배우는 데[學] 이성을 동원하느냐 신앙을 통하느냐 하는 선택이 있을 수 없다.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배움, 수행을 불퇴전이게 해주고 이성이니 감성이니 오성이니 하는 것을 다 동원한 전인적 체득으로써 믿음의 내용을 확인하며 그 구현을 위해 매진하는 것이니 종교와 철학이 한 묶음인 것이다.

앞에서 종교의 구성 요소들에 대해서 이야기한 데에서 드러났듯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에는 이미지적 탐구의 측면이 들어 있다.  그리고 아무리 세상과 인간에 대한 종교적 지식의 대전제를 초월적, 초경험적인 계시나 깨달음에서 찾는다 하더라도, 그 지식의 추구와 정리에는 내내 이성이, 철학적 사유가 작동하는 것이다.  다만, 철학은 철저히 이성만으로 지식을 추구하고 정리하며 이성이 가 닿을 수 있는 곳 너머는 인정치 않는 반면에, 종교는 처음부터 그 너머까지를 포함하는 점에서 다르다.  그리고 불교가 처음부터 이성 너머의 마당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깨달음이란 지적 활동이 아니다. 오히려, 이성으로 획득하는 지식의 족쇄를 벗어나는 데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불교가 철학만은 아닌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지식보다는 실천에 두는 비중이 크다는 데 있다.  철학에서 중시하는 실천이란 이성을 통해서 경험적으로 관찰한 것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즉 모순이 없이 정연하고 일관된 지식 체계로 정리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세상과 인간의 진상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따라가 보면, 어느 만큼까지는 대단히 논리정연하고 명증적이지만 결국에는 논리적으로 모순되고 역설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게 된다.  중도(中道)를 비롯해서 연기(緣起), 공(空), 3신불(三身佛)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핵심 개념들이 다 그렇다.  그런 대목에서 나오는 표현이 부사의(不思議)라든가 묘(妙)하다는 말이다.

논리적 모순 속에서도 그대로 가르침의 실천을 밀고 나갈 것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교의가 보살도(菩薩道)이다.  보살이라는 개념 자체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깨달은 중생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불교인의, 적어도 대승불교인이 당장의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실천하여 구현하려는 삶이 그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보살도이다.  보살도의 실천 항목인 6바라밀다(六波羅密多)을 보아도 그렇다. 그 중의 첫 번째인 보시(布施)만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주고 받는 물건, 이 3가지 상(相)에 매임이 없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하라고 한다.  그러니 모든 상을 여읜 각자(覺者), 붓다만이 완벽한 보시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보살은 붓다가 아니어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모순을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은 불교의 신행에서 별로 의미가 없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그 너머의 종교적 이상을 산다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는 모순이지만, 실제로 가장 현실적으로 벌어지는 종교적 신행은 그밖에 어디에선가 따로이 논리 정연하게 이루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불교도 여느 종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적 질병을 진단하고 그에 대한 처방을 내리는데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또 하나 불교가 철학만은 아닌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철학도 그에 관심을 둘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런 "실용적"인 관심이 철학의 우선적인 초점이 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철학은 세상과 인간에 대한 자비를 원동력으로 하지는 않는다. 지적 호기심이 철학의 일차적인 원동력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지적 호기심은 이른바 불도(佛道)에 이르는 방편적 통로는 될지언정 불도(佛道)를 걸어 가는 데에는 별무소용이다. 논리적으로 모순되므로 지적 호기심을 여지없이 좌절시키는 실천 항목들을, 모순이든 말든 온몸으로 이행해 나가는 것이 불도를 걷는 걸음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는 3귀의(三歸依)에서 불교의 종교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깨달은 이, 즉 붓다와, 그의 가르침과,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에 귀의한다는 것인데, 귀의라는 것이 이미 종교적인 행위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거기로 돌려 의탁하는 것이 귀의이다.  지적으로 아직 확인을 못했더라도 믿음으로써 거기에 자기를 전적으로 투여한다는 것이니 철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 불교의 특징


앞에서 이야기한 종교의 구성 요소들 가운데 불교라는 종교의 특징적인 점이 잘 나타나는 항목 몇 가지를 짚어보기로 하자.  우선 이론적 표상의 주제 가운데 궁극적인 존재, 원리 또는 경지에 관해서, 불교는 잘 알려졌다시피 신을 그 자리에 놓지 않는다.  석가모니(釋迦牟尼), 아미타불(阿彌陀佛), 약사여래(藥師如來),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등을 다분히 신으로 관념하고 숭배하는 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본령의 불교 교의에 입각한 신행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붓다, 보살이 아니더라도, 불교에도 신중(神衆)이 있고 그들을 신앙하는 행위도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그런 신들은 다 중생에 속한다.  궁극적 존재가 아닌 것이다.

불교에서는 세상의 궁극적인 진상으로서 연기법(緣起法)을 이야기한다.  이것이 유일신 신앙의 종교에서 이른바 신의 섭리라고 하는 것에 상응하는 불교의 궁극적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연기법은인격적 신이 그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섭리와는 달리 어느 누가 만든 것도, 시작된 때도 없어질 때도 없는 세상의 본래 진상을 가리킨다.  전자를 '인격적 실재'를 믿는 종교라 하고 후자는 '비인격적 실재'를 믿는 종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그 연기법을 깨달은 이가 궁극적 존재이고 그 깨달음의 세계가 궁극적인 경지이다. 그러니까 불교의 궁극적 존재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세상의 진상을 깨달으면 궁극적인 존재이다.  심지어, 누구나 사실은 이미 깨달아 있다고 하는 본각(本覺) 사상에 의하면, 모든 중생이 이미 다 궁극적인 존재이다.  불교가 유신론적 종교와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종교의 이론적인 면 가운데 우주론과 인간론을 보자면, 불교에는 창조신화가 없다.  이 세상과 인간이 언제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또 언제 어떻게 해서 멸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설명할 것도 관심을 둘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런 문제를 무기(無記)라고 일컫는다.  그런 의문은 무아(無我), 무상(無常), 연기(緣起) 등 세상의 진상을 모르는 어리석음[痴]과, 그 어리석음 때문에 일으키는 성냄[瞋] 및 탐냄[貪] 등 중생의 질병을 고치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장애가 된다. 그런 쓸 데 없는 문제에 매달리다가 정작 급한 병 고치기에 관심을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의 우주론을 대표하는 개념이 법계(法界)이다.  여기에서도 핵심이 되는 것은 역시 연기(緣起)이다. 삼라만상이 각자 개별자이면서도 동시에 연기적인 존재로서 한덩어리로 얽혀 있다.  하나이면서도 여럿인 것이다.  모든 것이 일자(一者)에서 나왔고 그리로 귀결된다는 교의는 여러 종교에서 볼 수 있지만, 불교에서처럼 무수한 개별자가 각자 개체인 동시에 그 개체성을 무화시키지 않는 채 모두 하나라는 극단적인 역설을 이야기하는 예는 찾기 힘들다.

불교 인간론의 특징은 앞에서도 시사했듯이 인간의 모든 문제가 인간에서 비롯되고 인간에 의해서만 해결된다고 하는 데 있다.  인간 밖의 어떤 존재나 힘이 거기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같은 강력한 존재가 주는 '밖으로부터의 도움'을 믿는 면도 있다.  그러나 교의만을 가지고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그들도 신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은 순전히 신의 절대적인 의지에 달린 은총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노력에 대한 인과응보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여느 주요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불교도 그 긴 역사 동안 장엄한 제의(祭儀)형식들을 다양하게 구축해 왔다. 붓다를 예배하는 예불의식, 설법이 중심이 되는 법회가 있는가 하면 천도제(薦度祭)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제의가 개발되었고, 경전의 음송(音誦)과 음악, 춤, 서화, 조각, 건축 등 모든 예술적 매체를 종교행위에 활용한다.  우리 나라 문화재의 절대적인 부분이 불교 문화재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은 불교가 한국 문화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그리고, 불교의 제의는 불교가 정착하는 곳에 따라 그 지역의 문화와 풍토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모양을 형성해 왔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물론 어느 종교의 제의나 지역에 따라 다소간 그 지역의 색깔을 입게 마련이다.  그러나 다른 세계 종교들과 견주어 보면, 불교의 제의에서는 다른 어떤 종교의 경우보다 지역적 특색이 뚜렷하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종교집단에서 특징적인 점으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출가 수행자 집단을 들 수 있다. 물론 가톨릭의 경우도 출가 수행자들의 집단이 중심이 된다.  그러나 그 외의 세계 종교들에서는 그것을 볼 수 없다. 그리고, 가톨릭과도 크게 다른 점이 있다. 가톨릭에서는 출가자 사이에서도 사제와 수사가 구분된다. 그러나 불교에서 출가자는 수행자이면서 동시에 사제의 역할을 담당한다.


3. 가피(加被), 깨달음, 제도(濟度)


종교적 신념의 유형을 기복(祈福), 구도(求道), 개벽(開闢)으로 나누어 보는 견해가 있다.  복을 받고 화는 피하는 것을 종교적 관심의 초점으로 삼고 그것을 위주로 해서 신행을 전개하는 것이 기복형이다.   여기에서는 주로 초월적인 힘을 지닌 존재의 의지에 따라 화복이 나뉜다는 관념이 바탕이 된다.  한편, 세상과 인생의 궁극적인 원리와 그것을 체득하는 경지에 관심을 두고 이를 위해 수행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 것이 구도형이다.  여기에서는 개인의 노력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된다.  그리고, 개인 단위로써가 아니라 이 세상 전체의 혁명적인 변화를 전망하면서 이에 대비하거나 그 변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개벽형이다. 세상 전체가 바뀌어 일거에 종교적 이상이 현세에서 이루어진다는 기대가 여기에서 작동한다. 어느 종교에나 이 3가지 요소는 다 있다.  교리의 차원에서는 뚜렷이 어느 하나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부인하거나 별로 강조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신행의 실제에 있어서는 어느 종교든 그 3가지 주제를 모두 다소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 3가지를 다 다룬다 해도, 종교에 따라서 3가지 가운데 가장 중시하는 것이 다르다.  그리스도교에서 거듭남을 위한 노력이 구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고, 사회 현실을 개조하여 이상 사회를 이루려는 활동이 개벽에의 기대와 연속선상에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관심이 결국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이 내리는 은총으로 수렴된다.  개념은 그다지 잘 부합하지 않지만, 위의 3가지 범주 가운데에서는 기복형에 해당한다.  초월적 존재의 의지에 맡겨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편, 불교는 흔히 구도의 종교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역시 구도가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이념에서나 실제에 있어서나 이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구도의 핵심은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한 자기 극복이다.  불교에서 인간의 병으로 진단하는 것이 바로 세상과 자기에 대해 스스로 가지고 있는 그릇된 생각과 그로 인한 각종의 그릇된 행태이다.  그러므로 치료 방법은 곧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내는 데 있어서 전적으로 관건을 쥐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 이외에 아무도 없다.  물론 밖으로부터의 영향이 전혀 작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결국 그 모두가 주변적인 것이고, 자신의 병을 치유할 이는 자기 자신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처럼 극기가 중심 주제인 만큼 구도 수행의 구체적인 방법도 고행 극기가 대종을 이룬다.  출가 수행생활 자체가 고행의 총화이다.  엄청나게 많고 엄격한 계율의 항목들, 특히 비폭력, 청빈, 금욕의 계율들이 모두 구체적인 고행의 처방들이다. 나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 없이 극복하는 데에 유일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길이 있다는 것이므로, 간파되는 모든 안일과 집착에 대항하여 온갖 고행의 항목이 개발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교에 기복이나 개벽의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없지 않은 정도가 아니고, 구도에 비해 덜 중요하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은 교리에서나 실제에서나 다 마찬가지이다. 기복이라는 것은 불교에서는 교리상으로 원래 권장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꼭 복을 비는 것이라는 뜻에 한정하지 않고, 논의를 좀더 넓은 마당에 가져가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개개 중생의 세간적인 삶은 온갖 제약된 실존의 조건에 얽혀 있다.  그런데 그런 조건이 해당되지 않는, 무한히 넓고 영원하고 자유로운 차원의 경지에서 발휘되는 조화(造化)의 힘을 감지하는 것이 종교적 인간의 특성이다. 그것은 꼭 인격적인 신 관념을 매개로 해서만이 감지되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나 조화주 같은 것은 꿈에도 믿지 않으면서도, 밤하늘 가득히, 또 깊숙히 인지를 압도하는 숫자로 박혀 있는 별들을 곰곰히 쳐다보고 있으면 흔히 무한이니 영원이니 오묘함이니 불가사의니 하는 개념으로 표현되는 그런 것을 감지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꼭 신적인 존재를 개입시키지 않더라도 감득할 수 있는 세상의 성스러운 차원은 이른바 자력 신앙에 철저히 충실한 종교인이라 해도 얼마든지 감지하게 되는 것이고, 자력 신앙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많은 불교인이 신격화된 붓다와 보살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성스러움을 감지하고 그 힘이 자기의 세간적 이익을 위해 작용하기를 비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튼 그러한 신행의 보다 깊숙한 원천에는 종교적 인간의 특징인 성스러움의 감지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며, 아주 간단하게 비불교적이라고 매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인들이 흔히 쓰는 불보살의 가피라는 말은 꼭 신격화된 불보살의 은총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법계라고 하는 탁 트인 무한의 마당에서 감지하는 성스러움, 신비한 힘을 표상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무리 불교가 개개인의 노력에 의한 자기 자신의 혁명적 변혁을 중심 주제로 한다고 해도, 세상전체를 단위로 한 변혁은 대망치 않으며 관심도 없다고 하면 그릇된 것이다.  특히 미래불인 미륵에 대한 대망은 불교의 역사 속에서 대단히 강력한 종교적 원동력으로 작용해 왔다.  그리고 지상에 불국토를 구현하겠다는 이상은 불교인들에게 사회적 관심과 활동을 위한 원동력을 무한히 제공할 수 있는 샘으로 역할을 할 수 있다.  다만, 전통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긴 세월 동안 불교의 사회적 역량이 단절된 곳이 특히 대승불교의 요람이었던 지역 대부분의 사정이다. 불교 스스로 선도하거나 깊숙히 참여치 못한 근대화의 과정 뒤에 갑자기 닥친 전혀 새로운 사회 환경 속에서, 불교가 과연 어떻게 그 엄청난 사회적 역할의 잠재력을 일깨울 것인지는 예의 주시해 볼 만하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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