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교

[스크랩] 도교(道敎) 이해

수호천사1 2012. 3. 2. 04:59

도교(道敎) 이해

 
중국의 3대종교(유교/불교/도교)의 하나. 도학이라고도 한다.
도교는 중국민족의 고유한 생활문화 속에서 생활신조, 종교적 신앙을 기초로 형성된 중국의 대표적인 민족종교이다. 이는 한(漢)시대 이전의 무속신앙과 신선사상, 민중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한대에 황로신앙(黃老信仰)이 가미되어 대체적으로 후한 말부터 육조시대에 걸쳐서 형성되었고, 현재까지도 타이완이나 홍콩 등지에서 신앙되고 있다.
초기의 도교적 신앙은 불로불사의 신선(神仙)을 희구(希求)한다든지 무술이나 도술에 의한 치병(治病)·재해 퇴치 등 현세의 행복추구에 그 중점을 두었으나, 유교나 불교와 경합(競合)하고 서로 영향을 받으면서 내적 수양과 민중적 도덕의식의 견지(堅持)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도 중요시하게끔 발전했다.
 
도교의 개념

도교란 사상(思想)·교리·기술(技術)·사회·교단(敎團)·신앙대상 및 신앙의례(信仰儀禮) 등 모든 요소를 함유하는 문화복합체이다. 그것은 중국의 역사와 풍토, 지역적 조건 안에서 정치와 사회·문화 등과 관련되면서 전개된 생활문화를 기초로 하여 발생한 것이다. 말하자면, 중국민족 고유의 종교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와 비슷한 유형으로 발전한 것에 유교가 있다. 그러나 양자의 차이는, 유교가 중국의 사회·국가의 질서, 그리고 학문·기술을 통치자의 입장에서 구명(究明)하고자 한 것과는 달리, 도교는 종교적 요소를 중심으로 하여 사회의 질서 및 학문·기술을 민중의 입장에서 밝히고자 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도교에서는, 유교에서 배격한 미신이나 온갖 도깨비·변괴귀물(變怪鬼物) 등 무축적 귀신신앙(巫祝的鬼神信仰)도 포함한다. 이 도교의 개념은 <민중도교>와 <교회도교>의 두 가지로 대별된다. 민중도교는 농민이나 민중 일반의 신앙과 생활신조, 그리고 그것에 의해 조직된 집단이나 결사를 말한다. 이는 후한 말에 태동하고 있었는데, 특히 송대 이후의 서민사회의 발전에 대응해서 유교나 불교 등과의 합일(合一)하에서 전개된 것이다. 한편, 교회도교는 국가나 왕조에 의하여 공인된 도교의 교단·교파이며, 5세기의 구겸지(寇謙之)의 <신천사도(新天師道)>가 그 최초이다. 천사도는 원래 <삼장인 장릉(張陵)·장형(張衡)·장노(張魯)의 오두미도(五斗米道)>라 불리었으며, 후한 말에 일어난 농민을 주체로 하는 초기의 민중도교였지만, 위(魏)·진(晉)의 정권밑에서 발전한 신오두미도(新五斗米道) 즉 신천사도는 북위(北魏)왕조의 공인(公認)에 의해서 교회도교가 되었다.


각종 도교의 용어

도교의 원뜻은 <도를 설명하는 가르침>이다. <도(道)>란, 유가(儒家)나 도가(道家)를 비롯하여 중국의 모든 사상과 철학을 설명하는 학설의 중심으로, 중국인의 의식의 기초에 존재하는 것이다. <도교>라는 말은 선진(先秦)시대부터 사용되어 왔으며, 처음에는 <성인(聖人)의 도의 가르침>이란 의미를 가지고 유교를 지칭(指稱)하고 있었다. 또, 불교 전래 뒤로는 불교를 의미했던 시대도 있었다. 즉, 이것들은 <선왕(先王)이나 성인의 도를 설명하는 가르침>이라는 의미인 것으로, 오늘날 일컬어지는 중국의 민족종교로서의 도교를 가리킨 것은 아니다. 이 <성인의 도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과 술(術)을 <도술(道術)>이라고 하였다. <도술>이란, 원래 <성인의 도의 술>, 치세치민(治世治民)을 위한 정치의 술이었다. 한편, 선인(仙人)이 되기 위한 방법, 또는 선인과 교감(交感)하기 위한 방법으로 <신선방술(神仙方術)>, 의료기술로서의 <의방술(醫方術)>, 그 밖에 과학적 기술과 주술 등 여러 가지의 방술이 존재해 있었다. 이 도술을 행하는 자가 도사(道士)이고, 방술을 행하는 자가 방사(方士)이다. 도술과 방술의 차이를 굳이 말한다면, 전자가 국가·정치에 관한 경세(經世)·치민(治民)의 술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개인적·종교적 성격을 가지는 일이다. 그렇지만 후한대로 들어서자 이 양자는 혼동되었다. 따라서 후한대에는 도술의 범위가 매우 넓어져, 정치술이나 과학적 기술에서 주술과 예언·복점(卜占) 등의 종교적 영력(靈力)을 포함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들을 행하는 자는 도술의 사(士), 즉 <도사>라고 불리었다. 이 경우의 도사는, 원래의 <성인의 도의 도술>의 사로서의 <도사>라기보다는 종교적 요소를 지닌 <도사>였다. 무의(巫醫)의 주술과 부적을 사용하는 종교집단은 <귀도>라고 불렸다. <태평도>나 삼장의 <오두미도> 등도 귀도를 중요한 요소로 삼은 초기의 도교적 집단이다. 또 귀도에 대하여 <신도>라는 성어(成語)가 다루어졌다.
 
<귀신(鬼神)>의 <귀(鬼)>에 연관되어서 <귀도>가 생겨났고, <신(神)>에 연관되어서 <신도>가 생겨났다. <신도>는 우선 신을 제사지내는 <단(壇)>과 통하는 도를 의미했으나, 점차로 신앙의 객체인 신 그 자체, 또는 신신앙(神信仰)에 기초하는 종교집단과 가르침도 뜻하게 되었다. <도가>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하나이지만, 전국시대에는 유가·법가(法家)·묵가(墨家) 및 방기(方技)·신선(神仙) 등과의 교류가 있었고, 진(秦)·전한대를 거쳐서, 후한대에는 <도가>의 개념 안에는 종교적 요소도 섞여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즉, 도가라는 개념은, 오늘날 말하는 노자(老子)·장자(莊子)의 사상·철학을 중심으로 한 철학적 도가뿐만 아니라, <도술> <방술>까지를 포함한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되었다.


도교의 원류(源流)

이상과 같은 도가와 도교의 개념의 변천은 그대로 도교 성립의 전사(前史)와 관계된다. BC 3세기 무렵의 전국시대에 연(燕)·제(齊;河北省·山東省) 지방에는 <방선도(方僊道)>라 불리는 신선방술(神仙方術)을 위주로 하는 종교집단이 존재했다. 일찍이 제나라에는 민간의 무축(주술사)에 의거하는 농작(農作)을 위한 산천제(山川祭)와, 그것을 토대로 하여 왕후(王侯)들이 풍작을 기원하는 팔신(天主·地主·陰主·陽主·月主·日主 등)에게 지내는 팔신제가 있었다. 이 팔신제에 그 당시 이미 발달되어 있었던 경락의경(鍼灸醫療學)이나 본초경방(漢方醫藥學)의 학문과 보인(步引)·안마·복이(服餌)·황야(黃冶;體操·食物·鍊金養生) 등의 신선술(神僊術)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 방선도이다. 방선도는 신선방사에 의한 종교집단으로, 그들 방사의 말을 믿고서 제나라나 연(燕)나라의 왕후귀족, 또는 진나라의 시황제(始皇帝) 등이 불로불사의 신선약을 얻기 위하여 신선이 산다는 발해만 위의 삼신산(三神山), 즉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에 사람을 보내기도 하고 방사에게 신선의 약, 특히 황금을 만들게 하여 그것을 먹음으로써 불사의 몸이 되려고 하였다. 연금술에 의해 만들어진 황금은 불사의 약 중에서 가장 효과가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진시황제는 이들 방사가 설명하는 봉선설(封禪說)에 의해서 팔신 가운데의 지주(地主)라 여겨지는 태산(泰山)과 그 지봉(支峰)인 양부(梁父)에서 천지의 신을 제사지내고, 천신과 교감하여 죽지 않는 몸이 되고자 했다. 전국시대의 제나라는 위왕(威王)·선왕(宣王) 때가 최성기였으며, 그 도읍인 임치(臨淄)에는 중국 각지에서 여러 학자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중국문화와 학술의 일대 중심지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제나라의 학자인 추연(鄒衍)은 음양오행설을 제창하여 당시 최고의 학자로 칭송되었다. 방사들은 이 음양오행설을 도입하여 신선설이나 봉선설에 교묘히 이용하였다. 방선도의 발흥은 연·제나라의 해류(海流)에 의한 해상교역과, 명산에서 약초나 황금을 구하는 방기(方技)의 무리들의 활약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며 한반도에서의 신선설의 형성이나 기타의 전설도 이러한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신화 속에서 중국의 조물주라 여겨지는 황제(黃帝)는 전국시대부터 방선도나 의방술과 연결되어 신선의 조상으로 여겨졌다. 신선이 된 황제와 도가의 노자가 결합되어서 <황로의 말씀>이 세상에 퍼져나갔다. 전국 말기부터 진대(秦代)·한초에 걸쳐서 <도가><법가> 일체의 정치가 행해졌는데, 도가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황로의 말씀>에 기초한 <황로의 술(術)>에 의한 정치였다. 황제와 더불어 노자의 신선화(神仙化), <황로>의 신선적 객체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후한대에 와서는 《하도낙서(河圖洛書)》의 예언서를 기초로 하여, 전한 말에는 이미 일어나 있었던 참위설(讖緯說)이 도교적 사상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참위설은 유가의 경(經)의 설을 음양오행설이나 <수술(數術)>계의 다른 학설에 의해서 보완하고, 주로 사회적·정치적 현상에 대한 예언을 그 내용으로 삼는 학설이다. 이 참위설에 불교의 영향도 덧붙여져 <황로도(黃老道)>가 일어났다. 불교와 중국문화의 상호 영향의 결과, <황로>는 부도(浮屠;佛陀의 옛 漢譯)와 같은 종류로 생각되어 노자의 신격화(神格化)가 횡행했고 신앙의 객체로서의 <태상노군(太上老君)>이 성립되었다. 후한 중기로부터 말기에 걸쳐 황로도나 주술을 위주로 하는 무축도(巫祝道;鬼道)가 모태가 되어서 농민·민중의 종교결사인 태평도(太平道)·오두미도가 생겨났다.


도교 각파의 성립

태평도는 후한 중기의 간길(干吉)이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부터 《태평청령서(大平淸領書)》, 즉 태평경을 전수받은 일에서 시작된다. 이 경전을 종교운동의 지주로 삼아 허베이〔河北〕의 장각(張角)이 태평도를 조직했다. 그러나 장각이 후에 반란을 일으켜서, 태평도는 멸망하고, 민간에 남은 잔당이 오두미도와 합류했다. 그 오두미도는 장릉(張陵)이 쓰촨〔四川〕의 청두〔成都〕지역에서 시작한 종교집단이다. 도가의 사상을 중심으로 주술적인 치병(治病)을 하고, 그 사례로 쌀 5두(한국의 약 5升)를 헌납케 했으므로, 이런 이름이 생겨났다. 병자를 조용한 방에 앉혀 놓고 과거의 죄를 반성케 하되 천(天)·지(地)·수(水)의 신, 즉 천관(天官)·지관(地官)·수관(水官)의 삼관에게 자기의 이름과 과거의 죄과를 써 넣은 서장(書狀) 3통을 바치고 속죄를 위한 공양물이나 노동력을 제공하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 이와 같이 과거의 죄과로 인해서 질병이 일어난다는 사고방식은 태평도에도 있었다. 오두미도가 종교 교단으로서의 조직을 확립한 것은 장릉의 아들인 장형(張衡)과 손자인 장로(張魯)의 시절에 이르러서부터였다. 특히 장로 때에는 처음에 익주(益州)의 장관의 보호를 받아 흥왕했으나, 후에 압박을 받게 되자 쓰촨 동부에서 산시〔陝西〕의 한중(漢中)에 걸친 땅으로 옮기고, 조조(曹操)에게 투항하여 그 제후가 되고 나서 관동(關柬)의 호족·귀족과 농민들 사이에서 그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 관동의 오두미도는 원시적인 주술을 중심으로 하는 교단에서 호족·귀족과 관계를 맺고 신선방술과 다른 도술을 위주로 하는 교단으로 변해 갔다. 이 계통의 오두미도는 강남(양쯔강 이남)에까지 퍼져 갔는데, 귀족형의 오두미도 신앙과 동진(東晉) 말기의 손은(孫恩)에게 인솔된 농민·민중형의 종교반란을 야기시켰다. 한편, 화북지방에 유포된 오두미도는 불교와 경합하기도 하고 유교적 질서를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구겸지(寇謙之)의 <신천사도(新天師道)>로 발전했다. 또 장쑤〔江蘇〕·강남의 호족층을 기반으로 하여 후한 말로부터 육조시대에 걸쳐, 신선도(神仙道)에다 제자(諸子)·황로의 사상과 여러 가지의 도술 및 참위사상 등을 복합화한 도술적 종교가 생겨났다. 한말의 전란을 피하여 강남으로 갔던 도사 좌자(左慈)에 의하여 정리되어서, 그의 가르침을 받은 갈현(葛玄) 일족에게 계승되었던 이 계통의 도술적인 종교는 <갈씨도>라고도 불리었다. 갈현이 종조부인 길홍(葛洪)은 《포박자(抱朴子)》를 저술하고, 이 계통에서 전해지는 연금술에 의한 신선방술을 집성했다. 또 갈씨 일족에 의하여 뒷날의 《영보경(靈寶經)》의 기본부분이 만들어졌다. 이 경전은 그 뒤 이 계통의 도교 경전류가 되어서 계승되었다. 오(吳)나라 재상의 자손으로 알려진 육수정(陸修靜)은 본래 천사도 계통의 도사였는데, 제국(諸國)을 순례하는 동안 《상청경(上淸經)》을 입수하여 그것을 정리했다. 그는 또 <갈씨도>에도 통하고 있었으므로 초기의 《영보경》도 정리하고, 뒤의 도교 경전의 집대성인 <도장(道藏)>의 분류체계 <삼동설(三洞說)>을 확립했다. 육수정의 뒤를 이어 경전을 정비한 사람이 도홍경(陶弘景)인데, 그는 모산(茅山)을 거점으로 《상청경》을 대성하여 이른바 <상청파>를 확립했다. 그의 사상은 과학적인 의경(醫經)·경방(經方)·신선의 학(學)을 기초로 한 것으로, 거기에 다시 불교와의 교류도 있었는데, 그는 처음으로 이론적인 도교 교학을 수립했다고 할 수 있다. 육조말에서 수대(隋代)까지 화베이〔華北〕에 신천사도, 강남지역에는 천사도와 상청파가 각각 전개되어 갔다. 당(唐)대로 들어오자, 상청파의 본거지인 모산을 중심으로 해서 남북 도교의 통합과 교류를 목표로 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도홍경의 교학을 받은 당(唐) 초의 상청파 도사 왕원지(王遠知)는 처음에 신천사도에 수행을 했으며, 제자인 반사정(潘師正)은 모산에서 신천사도의 거점인 쑹산(嵩山〕으로 옮겨 살았다. 이같은 상청파의 활약으로, 모산은 당대 도교의 중심적인 고장으로 되었고, 상청파는 천사도와 함께 도교의 2대 유파로 육성되었다.


도교와 불교의 교류

북위의 태무제(太武帝)는 재상 최호(崔浩)의 권유에 따라서 구겸지의 신천사도를 국교로 삼았으며, 연호도 태평진군(太平眞君)이라고 하였다. 도교를 믿는 한인 호족인 최호는 오랑캐의 가르침인 불교가 왕조의 재정을 좀먹자, 불교를 배제시키고자 태무제에게 권고해서 446년에 불교 탄압을 감행케 했다. 태무제 뒤에 불교는 다시 부흥하였으나, 북주(北周)의 무제(武帝) 때에는 다시 탄압당했다. 북주의 무제는 유교적 왕조체제에다가 불(佛)·도(道) 양교를 순응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572년의 법론에서 무제는, 삼교의 순위를 유·도·불로 하였지만, 574년의 도·불의 법론에서는 도사 장빈(張賓)이 불교측에 의해서 논파되었으므로 마침내 불(佛)·도(道) 양교를 함께 폐하고 승과 도사를 환속시켰다. 이어서 <현도관(玄都觀)>을 <통도관(通道觀)>으로 개칭하여 국립종교연구소로 만들었고, 3교의 스승 중 우수한 자를 통도관학사로 삼아 거기에서 불·도 2교의 유교화(儒敎化) 연구를 하게 했다. 송대의 진종(眞宗)은 도교 존중정책을 강화하고, 1015년에는 용호산 천사도(天師道)의 제24대 천사 장정수(張正隨)를 불러들여 왕조와 천사도의 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이 무렵부터 도관(도교의 사원)을 고급관료가 관리하는 제도가 생겨났다. 진종은 재상 왕흠약(王欽若)을 총재로 삼고, 도사들을 동원하여 도장(道藏)을 편찬시켜 《보문통록(寶文統錄)》을 편집하였다. 이어서 1013년에는 도사 장군방(張君房)에게 정비케한 도장 《대송천궁보장(大宋天宮寶藏)》을 완성하게 했다. 장군방은 그 정요(精要)를 뽑아 《운급칠첨》을 저술했다. 송은 국난(國難)을 당하자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행할 뿐만 아니라, 도교의 힘까지 빌리려고 했다. 불교의 중국 전래에 의하여 그때까지의 중국문화 안에서의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대립과 융합에 더하여서 유가·도가 대(對) 불가의 문화마찰이 격심하게 일어났다. 그 결과, 삼가(三家) 상호간의 경합이나 불가의 유가화(儒家化)로 인해서 유두도불양각형(儒頭道佛兩脚型)의 3교 관계가 생겨나게 되어 유가·도사·사문(沙門)의 삼교겸수(三敎兼修)가 확산되었다.


민중도교의 전개와 신도교

당실(唐室)의 도교신봉책 때문에 교회도교의 교역(敎域)은 확실하게 중국 전토로 퍼져갔다. 당말 이래 각지로 전파된 도교는 그 지역의 습속과 결합하여 삼교합일의 민간신앙(민중적 도교신앙)을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송대에 이르러서는, 서민사회의 발전을 배경으로 해서 삼교합일의 새로운 민중도교가 전개되었다. 송대의 민중도교의 특색은 유불도 3교의 합일·혼합적 형태를 취하고, 사서(士庶) 모두에게 통용되는 선(도덕)을 실천하였으며, 타인에게도 권장함으로써 생활문화 안에서 민중적 도교신앙을 깊게 하는 경향이 강했다. 민중도교에서는 민중의 주체성이 강한 민중적 도덕 실천을 강조하는 《공과격(功過格)》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민중사회에 밀착된 신도교 교단이 생기기도 하였다. 산둥〔山東〕의 유덕인(劉德仁)은 <진대도교(眞大道敎)>를 창시하였는데, 교단의 교법에서는 하늘에 대한 기념(祈念)을 통해서 훈주사음을 금했으며, 충효 등 일상윤리의 견지가 설파되었다. 뒤에 가장 유력한 도교 교단이 된 <전진교(全眞敎)>는 왕중양(王重陽)에 의해서 창시되었는데, 기본적으로는 유불도 삼교동원(儒佛道三敎同源)의 입장을 취하고, 《반야심경(般若心經)》 《효경(孝經)》 《도덕경》 《청정경(淸淨經)》 등을 경전으로 삼아 읽었으며, 부주(符呪) 등의 술을 물리치고,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신선설에 의하지 않는, 오직 내외 양면의 수행(自利利他의 眞功과 眞行의 실천)을 주장했다. 또 서민의 도덕의식의 고양(高揚)에 의해서, 일상 윤리의 실천이 종교화된 것으로 선서(善書)가 있다. 이는 권선(勸善)의 서(선행을 권고하는 책)이며, 서민적 도덕의 기초 위에 도교신앙과 불교사상에 의거해서 서민의 생활윤리를 설파하는 민중도덕서이다. 대표적인 선서인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이 강남의 하층 독서인에 의하여 만들어졌던 것도 이 무렵이다. 송대 이후의 신도교 교단은 용호산의 정일교(天師道가 正一敎로 불리게 된 것은 元代부터이다) 등 구(舊)도교 교단과 함께 명조 이후, 왕조에 따라서 보다 강하게 관리되었다. 원의 세조(世祖)는, 강남의 도교는 정일교에, 화베이의 도교는 전진교에 그 관리권을 주었으며, 도첩(度牒)의 발급과 지방의 도관(道官)의 임명권도 부여했다. 명조에서는 예부(禮部)에 도록사(道錄司)를 두고, 정일(正一)·전진(全眞)으로 나누어서 관리했다. 다시 용호산에다 정일진인 이하의 도관을 두었고, 모산·태화산(太和山) 등에도 도관을 두었다. 원말(元末)부터 정일교와 왕조의 결합이 강화되었고, 특히 명초에는 정일교의 부참(符讖)이 명조와 정일교의 연결을 밀접하게 했다. 이리해서 명조는 정일교 교단을 중심으로 도교계를 관리했다. 또 명의 영종(英宗)은 1445년 《정통도장(正統道藏)》을, 신종(神宗)은 1601년에 《만력속도장(萬曆續道藏)》을 편집케 했다. 이것이 현재 널리 행해지고 있는 도장(道藏)이다. 왕조의 관리하에서 불·도 교단은 그 활력을 잃었고, 그 위에 15세기 후반부터 재정 보전(補塡)을 위하여 승(僧)·도(道)의 매첩(賣牒)을 단행했으므로 승·도의 사회적 지위가 저하되었고, 민간의 종교 결사가 많이 생겨났다. 청조는 명조의 정책을 답습해서 불·도 양교 및 민간의 종교결사의 관리·단속을 엄중히 했으며, 정일천사(正一天師)의 관품(官品)을 낮추었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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