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감정론
저자 서문, 제1부
에드워즈는 인류에게 매우 중요하며 모든 개인이 확실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 문제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을 구별해 주는 특징은 무엇인가? 참된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미덕과 거룩함을 구별해 주는 표지는 무엇인가?"(133). 에드워즈는 신학 연구에 처음으로 입문한 이래로 오랫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열심과 관심을 기울이고 정확한 탐구를 시도하면서 이 문제들과 씨름해 왔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는 대단히 크게 나타났다. 당시 뉴잉글랜드는 1차 대각성 운동의 결과 이 문제에 대한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논쟁이 아주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공정하게 판단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공정하게 글을 쓰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고, 공정하게 에드워즈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고백한다. 에드워즈는 보스턴의 찰스 촌시(Charles Chauncy) 목사와 같은 반 부흥주의자들과 제임스 데이븐포트(James Davenport)와 같은 열광주의자들 사이에서 중도의 길을 걸어 가려고 한다. "최근의 특이한 현상 가운데 있는 긍정적이고 영광스러운 점을 진심으로 열렬히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동시에 부정적인 면의 악하고 해로운 경향을 진지하게 반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134).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교회에는 많은 선과 악이 함께 섞여 있으며, 아주 신령하고 귀중한 것을 가진 한 성도에게도 많은 부패와 위선과 죄악이 함께 섞여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는 참된 신앙이 크게 부흥하는 때에 많은 거짓 신앙이 창궐하고, 참된 성도 가운데 다수의 위선자들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성경 속에서 요시야 시절, 세례 요한의 시절,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시절, 사도 시대(렘3:10,4:3-4.여5:35,미24:10-13,갈3:1,4:11,15,빌2:21,3:18-19)등의 예를 든다. 그것은 마치 봄에 어떤 나무에 많은 꽃들이 피고, 꽃들은 모두 예쁘고 아름답게 보이며, 큰 열매로 자랄 것 같은 어린 열매들이 열렸으나, 그 대부분이 오래 가지 못하고 곧 떨어져 버려서 결코 익은 열매를 내지 못하게 되는 경우와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 안에 흔히 참 성도와 위선자가 혼합되어 있고, 가짜 신앙과 진짜 신앙이 섞여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해도, 에드워즈는 장차 하나님의 교회가 과거 보다 훨씬 더 순수해지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기대한다(135-6). 이것은 에드워즈의 저술에서 계속 반복되는 그의 종말론적 기대이다.
에드워즈는 마귀가 언제나 참된 믿음과 거짓 믿음을 섞어 놓고 구별이나 분별이 되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나라와 대의에 맞서서 큰 우세를 점한다고 말한다. 마귀는 주로 이 수단으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처음 세워진 이래로 있었던 모든 신앙 부흥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바로 이 수단으로 사도 시대와 그 이후에 걸쳐서, 유대인들과 이교도들의 핍박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크게 기독교의 진리를 해쳤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136). 에드워즈는 마귀가 이 수단으로 종교개혁의 진보를 방해하고 수치스럽게 했으며, 100년 전(前) 뉴잉글랜드 성도들의 사랑의 불을 꺼버리고 기쁨을 빼앗아 가버렸으며, 당시 너무도 복되고 전망이 밝게 시작된 신앙의 위대한 부흥(the late great revival of religion in New England, so happy and promising in its beginning)에 대항하여 승리 했다고 말한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시대에 일어난 신앙 부흥의 시기를 "뉴잉글랜드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누리는 낙원 상태에 대한 우리의 소망"이라고 표현하면서, 사단이 같은 방식으로 두 개의 큰 신앙 부흥을 대항하여 이긴 것을 보았다고 통탄을 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마귀는 원래 에덴 동산에서부터 동일한 수작을 부렸다. 즉 아담과 하와를 낙원에서 쫒겨 나게 하려고 유혹할 때에도 처음에는 복된 낙원 상태를 지켜 주는 친구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더욱 행복하게 해 주는 척 하면서 그들의 모든 행복과 영광을 앗아 가버렸다는 것이다. 간교하게 하와를 속였던 그 뱀이 뉴잉글랜드 성도들에 맞서 승리함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순수함에서 벗어나게 하였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에드워즈는 신앙이 놀라울 정도로 부흥하는 때에는 항상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을 잘 구별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감정과 체험을 다양한 모조품과 잘 구별할 수 있지만, 그러나 당시 뉴잉글랜드 교회들에는 마귀가 만들어낸 모조품의 화려한 겉모습에 속아 넘어가서 숱한 혼란상이 연출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거짓 신앙이 참된 신앙과 구별되지 않아서 나타나는 두려운 결과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은 믿음에 속한 일들에 대해 전체적으로 어지럽혀지고 혼란스러워져서, 어디에 그들의 발을 두어야 할지 또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신앙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의심하게 되고, 이단과 불신앙과 무신론이 크게 창궐하게 되는 것이다"(139).
에드워즈가 『신앙감정론』을 저술하는 목적은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참된 종교를 분명하게 분별하고, 참된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해결하고, 그것을 확립하기 위하여" 자신의 최선을 노력을 다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공헌하려는 것이다. 에드워즈가 이전에 출간한 저서들(『성령 역사 분별 방법』이나 『균형잡힌 부흥론』)이 성령의 일반적인 역사와 구원하는 역사를 포함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을 구별해 주는 표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면, 『신앙감정론』은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의 본질과 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제1부. 감정의 본질과 신앙에 있어서 감정의 중요성(143-187).
CONCERNING THE NATURE OF THE AFFECTIONS AND THEIR IMPORT!!!ANCE IN RELIGION
SECTION I - Introductory remarks respecting the affections
SECTION II - True religion, in great part, consists in the affections
SECTION III - Some inferences deduced from the doctrine
에드워즈는 『신앙감정론』의 본문으로서 벧전 1:8을 택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베드로의 편지를 받던 수신자들은 여러 가지 시험과 믿음의 시련을 당하고 있었다(1:6-7).
에드워즈는 그와 같은 시련이 주는 세 가지 신앙상 유익에 대해서 이렇게 지적한다.
1) 시련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참된 것이지 아닌지를 드러낸다. 믿음의 시련은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을 구별해 주는 역할을 한다. 마치 금처럼 보이는 물질이 불 속에서 단련되면 그것이 참된 금인지 아닌지 밝혀지는 것처럼, 시련은 신앙고백자의 믿음과 종교가 어떠한지를 시험하고 구별해 준다.
2) 시련이 주는 두 번째 유익은 신앙의 참된 아름다움과 고상함을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는 것이다. 참된 기독교의 영적 탁월성은 가장 큰 시련 가운데 있을 때 가장 잘 드러나게 된다.
3) 세 번째 유익은 신앙을 순화시키며 강하게 해 주는 것이다. 신앙이 성장하는데 장애물이 되고 방해가 되는 거짓되고 혼합된 요소를 제거해준다. 그리고 참된 믿음은 불 속에서 연단됨으로 더욱 귀중한 것이 되어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한다(7절).
베드로는 핍박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참된 신앙이 어떻게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했는가를 말씀하고 있다. 특히 신앙적 유익들이 나타나게 되는 고난을 당하는 중에도 그들이 보여 주었던 두 종류의 행동 즉 참된 신앙을 실천했다는 것에 주목한다.
1.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 "너희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그리스도인을 고난당하는 자리까지 이끌고, 고난을 견디도록 도우며, 여러 시련을 거치도록 한 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초자연적으로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 사람들도 보지 못했고, 육신의 눈으로 본 적이 없었지만, 영적인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안에 있는 기쁨 -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당하고 있는 외적인 고난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지만, 내적으로 느끼는 영적인 기쁨은 고난보다 훨씬 더 컸다. 바로 그 영적인 기쁨이 고난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힘을 주었고,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고난을 이겨낼 수 있게 해 주었다. 베드로는 이 기쁨을 두 가지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1) 보이지 아니하시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이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가에 주목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였느나 믿고 기뻐하니". 2) 이 기쁨의 성격에 대한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 즉 육체적인 기쁨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이 기쁨은 훨씬 순결하며 고상하고, 하늘에 속한 것으로서 초자연적이며 진실로 신적인 기쁨이었다. 이 기쁨의 탁월함과 고상함과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은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이러한 기쁨을 주시되 너무도 관대하고 흘러 넘치도록 주셨다. 이런 기쁨 속에서 즐거움을 누릴 때 그들의 마음은 영광스러운 빛으로 가득 찼고, 그들의 성품은 높이 고양되고 온전해졌다. 이런 기쁨은 영원한 하늘나라에 속한 기쁨의 전주곡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하늘의 축복으로 가득 차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빛으로 충만해졌으며, 그들의 빛나는 삶의 모습을 통해 그 영광스러움이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되었던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처럼 특별히 신앙감정인 사랑과 기쁨이 신자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주목하는데, 이는 이 사랑과 기쁨 속에서 그들의 믿음이 참되고, 순수하며, 영광스럽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상의 상술한 내용을 근거로 해서 에드워즈는 교리적 또는 신학적 명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교리: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147)
= DOCTRINE. True religion, in great part, consists in holy affections.
에드워즈는 이와 같은 교리적 명제를 가지고서 첫째 감정이 무엇인지, 둘째 참 신앙은 대체로 감정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하에서 해명하고자 한다.
1. 감정이란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감정(affection)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린다: "나는 감정이 한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고 있는 의지와 성향이 지닌 더 활기차고 감지할 수 있는 활동이라고 생각한다"(148). 에드워즈는 감정이 무엇인가를 해명하기 위하여서 몇 가지의 중요한 인간론적 해명을 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영혼(soul)에 두 가지 기능들(facuties)을 주셨다. 첫째는 인식과 사유할 수 있는 기능, 즉 사물을 분별하고 바라보며 판단할 수 있는 기능으로서 지성(understanding)이고, 둘째는 사물을 단순히 인식하고 지각하는 것을 넘어서, 인식하고 지각하는 사물에게 어떤 식으로든 끌리게 되는 기능이다. 이것은 사물에게 호감이 생기게 할 수도 있고, 반감이 생기게 할 수도 있는 기능을 말한다. 에드워즈는 이 기능이 때로는 성향(inclination)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때로는 그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고 지배하기 때문에 의지(will)라고 불리기도 하며, 이 기능의 행사와 관련하여서는 정신(mind)이나 마음(heart)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 기능은 두 가지 방향으로 움직인다. 첫째는 영혼이 바라보는 사물을 인정하고 기뻐하고 애착을 가지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으며, 둘째는 반대하고 인정하지 않고 싫어하며 반감을 가지고 거절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영혼의 성향과 의지가 다양하게 표현되고 행사되는 것처럼, 그 표현되는 정도는 훨씬 다양하다. 이 기능을 더 활력있게 느끼게 되는 것을 감정(affections)이라고 부른다.
의지와 감정은 두 개로 분리된 기능이 아니다. 감정은 본질적으로 의지와 구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의지나 성향의 단순한 활동과도 다르지 않고 단지 얼마나 생기있게 활동하는지, 얼마나 느낄 수 있는지에 따라서만 차이를 보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영혼의 감정은 의지와 성향과 전혀 다르지 않으며, 의지는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만큼만 행사된다. 의지는 완전한 무관심의 상태에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의지는 어떤 방식으로든 감정이 자극을 받는 만큼만 움직이고, 그 이상으로는 결코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모든 것은 의지와 성향의 활동이다. 즉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의 성향이다.
우리의 본성과 영혼과 육체의 연합 법칙 때문에 우리 영혼의 의지나 성향의 생생하고 왕성한 활동은 반드시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고 어느 정도 체액이나 특히 본능(animal spirits)을 움직인다. 또 한편으로는 영혼과 육체의 연합 법칙 때문에 몸의 구성 요소와 체액의 움직임이 감정의 활동을 촉진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감정의 거처는 육체가 아니라 오직 정신이다(but the mind only, that is the proper seat of the affections). 단지 영혼만이 관념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단지 영혼만이 그 관념을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다. 단지 영혼만이 사유할 수 있는 것처럼, 단지 영혼만이 사유하고 있는 대상을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 있으며, 그 대상을 즐거워 하거나 근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몸과 분리된 영혼도 몸과 결합된 영혼처럼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희망과 두려움 또는 다른 감정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에드워즈는 감정(affections)과 격정(passions)을 구별하여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감정은 격정이라는 말보다는 더 포괄적이다. 감정은 의지와 성향이 모두 왕성하고 생생하게 할동하는 것에 대해 사용하는 반면, 격정은 본능에 미치는 효과가 더 갑작스럽고 더 격렬하며 정신이 더 충동적인 상태가 되어 통제가 되지 않는 경우에 사용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의지와 성향의 모든 활동이 환영하고 좋아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지거나 부인하고 거절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듯이 감정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영혼이 어떤 대상으로 인도되거나 그 대상에게 끌리게 되거나 그 대상을 추구하게 되는 경우이고(사랑, 갈망, 희망 기쁨, 감사, 만족 등), 또 다른 하나는 영혼이 그 대상을 미워하거나 반대하는 경우이다(미움, 두려움, 분노, 슬픔 등). 그리고 어떤 감정들은 이 두 가지 의지의 활동이 결합하여 생기기도 한다. 동정(pity)이라는 감정에는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감정이 있는 반면에, 그 사람이 고통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슬퍼하는 감정이 공존하게 된다.
2. 감정은 참된 신앙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
이제 참된 신앙은 대체로 감정 안에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1.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받으시는 종교는 약하고 무감각하며 생기 없는 우유부단한 종교가 아니다.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진지하고 열정적인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과 우리의 마음이 생동감 있는 신앙 안에 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신10:12,Cf. 6:4-5,30:6).
만일 우리가 신앙에 아주 큰 열심을 내지 않는다면, 또한 우리 의지와 성향이 강하게 활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종교에 속한 일은 너무나 크고 중요하기 때문에 만일 우리 마음의 활동이 생동감도 없고 강력하지도 않는 다면 우리 마음의 활동은 신앙과 본질과 중요성에 부합될 수 없다. 종교만큼 우리 성향이 왕성하게 활동하기를 요구하는 것도 없다. 종교만큼 우리의 미지근함을 괴이하게 여기는 것도 없다. 참된 신앙은 언제나 강력한 것이다. 참된 신앙은 경건의 능력이라고 불린다(딤후3:5). 건강하고 견고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 안에 계신 성령은 강력하고도 거룩한 감정의 영으로 존재하신다("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딤후1:7). 신자가 성령의 영향력 안에 거할 때, 성경은 그들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 곧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일으키시는 능력과 열심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진다고 말한다(눅24:32).
모든 참된 은혜에도 다양한 정도가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도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어린 아이같은 사람 안에서는 하나님과 하늘에 속한 일들에 대한 의지와 성향이 비교적 약하게 활동한다. 그러나 마음에 경건의 능력을 가진 모든 사람의 마음과 성향은 하나님과 신적인 일들에 대해 강력하고 생동감 있게 활동한다. 그래서 이런 거룩한 활동들이 육욕적인 또는 본능적인 감정들을 눌러 이기고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게 한다. 따라서 참된 믿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하나님에 대한 성향과 의지가 왕성하게 활동한다. 다시 거듭 말하자면 감정이란 의지가 왕성하고 생동감 있고 감지될 수 있게 활동하는 것이다.
2. 인간의 본질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감정을 주셨을 뿐 아니라 감정이 그들의 행동의 발원지(the spring of actions)가 되게 하셨다. 사랑, 미움, 갈망, 희망, 두려움 같은 감정들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원천이며, 무엇인가를 추구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런 감정들은 인간이 앞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밀어주는 힘이며, 세상에 속한 모든 일들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다. 특별히 이런 감정들은 사람을 자극하고 사람에게 활력을 불어넣음으로써 모든 일을 진지하게 행하게 하며, 모든 일에서 열정적인 추구자가 되게 한다. 세속적인 일에서 세속적인 감정이 인간의 추구와 행동의 발원지인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의 문제에서도 종교적인 감정이 바로 종교적인 행동의 원천이다. 감정 없이 교리적 지식과 사변적 지식만을 가진 사람은 결코 신앙생활을 진지하게 영위해 나갈 수 없다. 참된 믿음은 감정 안에 존재한다.
3. 믿음에 속한 일들은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는데 그 일들이 사람들에게 감정적으로 영향을 주는 만큼만 그렇다. 에드워즈는 담대하게 주장하기를 어떤 사람이 믿음에 관계된 일을 읽고 듣고 보았다 하더라도 그의 감정이 움직이지 않았을 때에는 그 사람의 생각과 말에 큰 종교적 변화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신앙인도 그 사람의 심령이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차갑게 죽은 것 같은 생활에서 깨어날 수 없다. 그리고 믿음이 퇴보한 상태에서 회복될 수도 없고, 하나님을 떠난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요컨대 믿음에 속한 일들이 어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심령이 감정적으로 깊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성경은 도처에서 믿음을 두려움, 소망, 사랑, 미움, 갈망, 기쁨, 슬픔, 감사, 불쌍히 여김 그리고 열정과 같은 감정과 깊이 연관시킨다.
- 성경은 참된 믿음을 경건한 두려움과 연관시킨다. 참 신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린다.
- 또한 성도는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라고 불린다(시146:5,렘17:7,시31:24, 33:18, 147:11,롬8:24,살전5:8,히6:19,벧전1:3).
- 성경은 믿음을 사랑이라는 감정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인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죄에 대한 미움을 참된 믿음의 중요 부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잠8:13,시97:10, 101:2-3, 119:104,128,139:21).
- 마찬가지로 성경은 하나님과 거룩함에 대한 사모와 주림과 목마름으로 표현되는 거룩한 갈망을 참된 믿음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언급한다(사26:8,시27:4, 42:1-2,63:1-2,84:1-2,119:20, 73:25,143:6-7,130:6,마5:6,계21:6).
- 또한 거룩한 기쁨 역시 참된 믿음에서 큰 부분이라고 말씀한다(시37:4,97:12, 33:1,마5:12,빌3:1,살전5:16,시149:2,갈5:22,119:14).
- 종교적인 슬픔, 애통함, 그리고 상한 마음 역시 참된 믿음의 큰 요소로 자주 언급된다(마5:4,시34:18,사61:1-3). 이런 거룩한 슬픔과 상한 마음은 성도들을 구별해 주는 특성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시고 열납하시는 것이라고 자주 언급한다(시51:17,사57:15,사66:2).
- 참된 믿음이 역사하는 곳에서 자주 언급되는 다른 감정은 특히 하나님께 대한 고마움과 찬양으로 표현되는 감사다.
- 성경은 불쌍히 여김이나 자비를 참된 믿음의 크고도 본질적인 요소로 자주 말씀하신다(사57:1,시37:21,26,잠14:31,골3:12,마5:7,23:23,,미6:8,호6:6,마9:13,12:7).
- 열정 역시 참된 성도들에게 있는 믿음의 아주 본질적인 요소로 소개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2:14). 그리고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크게 요구되는 것이 열정이었다(계3:15-16,19).
5. 성경은 다른 모든 감정들의 원천이며, 또 감정 가운데 가장 고귀한 것인 사랑 안에 참된 믿음이 온전히 들어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마22:47-48).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롬13:8,10,갈5:14). 사도 바울은 사랑이 신앙 생활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자 참된 믿음의 생명력이고 본질이며 영혼과 같다고 말씀한다. 고전13장에서는 사랑은 모든 선한 것의 원천이라고 제시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여 인간의 영혼이 가지는 진실로 자애로운 경향성이다. 하지만 이런 경향성이 느낄 수 있도록 활력 있게 작용할 때에는 하나의 감정이 되며, 다름 아닌 바로 감정적 사랑이 된다. 예수님은 활력 있고 정열적인 사랑이야말로 모든 경건과 믿음의 요체라고 말씀하신 것임에 분명한다. 참된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의 성품인 거룩한 사랑에 있으며 이 하나님의 성품을 습관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의 총체는 이런 하나님의 성품의 토대가 되는 빛과 그 하나님의 성품을 열매 맺는 것을 말한다.
사랑은 여러 감정 가운데 하나만이 아니라 모든 감정 가운데 으뜸이며 동시에 모든 감정의 토대가 된다. 하나님께 대한 살아있고, 정열적인 사랑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신앙 감정들을 드러내는데 그 중에는 죄에 대한 강렬한 미움과 혐오, 죄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감사, 은혜롭게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때 얻게 되는 만족과 기쁨,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을 때 느끼는 슬픔, 장차 하나님을 누릴 것을 기대할 때 생기는 즐거운 소망,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강한 열정 등이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사람을 뜨겁게 사랑할 때 사람들을 향한 모든 덕스러운 감정들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과 경건이라는 요소는 감정에 내재한다는 것이 분명하고 확실해진다.
6. 성경에 나오는 가장 탁월한 성도들의 믿음과 경건은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 에드워즈는 탁월한 성도들인 다윗, 바울, 그리고 사도 요한에 주목한다.
1) 다윗이 남긴 거룩한 시들은 경건하고 거룩한 감정이 밖으로 내뿜어진 것이었고 또 표현된 것이었다. 다윗은 이 시들에서 하나님에 대한 겸허하고 뜨거운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완전성과 놀라운 사역을 찬탄하였으며, 하나님을 추구하는 영혼의 진지한 갈망과 목마름과 갈급함을 표현했고,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선하심을 달콤한 감사로 표현했다. 또 하나님의 은총과 충분하심과 신실하심 가운데 영혼이 누리는 거룩한 고양감과 승리감을 표현했고, 다른 성도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과 기쁨 그리고 이 땅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대한 자신의 큰 기쁨과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한 슬픔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뜨거운 열심을 노래했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원수들에 대한 불붙는 혐오를 표현했다. 모든 다윗의 시편들에 충만해 있는 거룩한 감정들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목적에 더욱 적합하다.
2) 바울에 대해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내용을 보면, 그는 감정이 충만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에서 표현하고 있는 믿음은 대부분 거룩한 감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자신에 대해서 말한 것을 종합하면 그는 모든 삶에서 자신의 영광스러운 주님을 매우 뜨겁게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행동했으며 완전히 그 사랑에 삼키운바 된 것 같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해로 여겼으며, 그리스도를 얻게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바울은 자신이 이 거룩한 감정에 압도된 것처럼 말하고, 그리스도의 강력한 사랑 때문에 모든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전진한다고 말한다(고후5:14-15). 그의 서신서들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한 자신의 애틋한 사랑을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다(고후12:19,빌4:1,딤후1:2). 바울이 회심한 이후 사도행전과 그의 서신서에서 나오는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그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셨듯이 교회의 유익과 번영에 대한 강한 열정이 그를 사로 잡았던 것 같다. 이 열정은 그의 마음 속에서 계속 불타올랐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며 경고하고 경책할 때 그리고 그들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할 때 지속적이고 위대한 힘의 근원이 되었다. 그가 얼마나 감정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던가 하는 것은 그의 풍성한 눈물로 입증되는 것 같다(고후2:4,행20:19,31). 만일 이 위대한 사도에 대한 성경의 기록들과 사도 자신의 증언들을 살펴 본 사람 가운데 사도 바울에게 있던 믿음 대부분이 감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눈이 이상해져서 자기 눈앞에 가득 차 있는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169).
3) 사도 요한의 경우 그가 기록한 책을 보면 그는 놀라울 정도로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의 서신들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정감이 넘치며, 가장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내뿜고 있다. 그는 마치 달콤하고 거룩한 감정으로 들어찬 사람처럼 보인다. 그 증거는 그가 쓴 모든 글들 속에 가득 차 있다.
7. 하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전체 교회의 머리로, 모든 사람이 본받아야 할 참된 믿음과 미덕의 완전한 모범으로, 그가 어디로 가든지 모든 양무리가 따라야 할 목자로 보내신 분인 주 예수 그리스도 역시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는 심령을 가진 분이셨다. 그리고 주님의 미덕은 거룩한 감정들로 많이 표현되었다. 주님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가장 강하고 생생하고 열렬하게 사랑하신, 가장 위대한 모본이셨다. 주님이 간절히 기도하시며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시고 눈물과 피를 흘리며 씨름하실 때, 극심한 갈등과 싸움에서 승리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거룩한 감정 때문이었다. 주님의 거룩한 사랑의 능력은 너무나 커서 죽음보다 더 강했으며, 주님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을 때에 두려움과 슬픔 같은 강력한 본성적인 감정들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바로 이런 거룩한 감정 때문이었다.
주님은 또한 자신의 삶의 과정에서도 감정으로 가득 차 분이셨던 것 같다(요2:17, 막3:5, 눅19:41-2, 13:34, 22:15).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의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심(마15:32,18:34, 눅7:13)을 읽게 되며 민망히 여기심(마9:36,14:14,막6:34)을 읽게 된다. 우리는 요11장을 통해서 주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면 그들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될 것을 알고 계셨지만, 주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픔을 느끼고 그들과 함께 우신 것을 확인하게 된다. 예수님의 고별설교는 말할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담고 있다. 요13장-16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당신의 사랑스러운 어린 자녀같이 위로하시고 격려하셨으며,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성령 안에서 평안과 위로와 기쁨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주님은 이 모든 말씀을 마치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언을 하시듯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요17장이 기록하고 있는 대로 제자들과 당신의 모든 교회를 위해 사랑이 넘치는 중보 기도를 하시면서 고별 설교를 마무리 하셨다. 사람이 기록하거나 입으로 전달한 설교 가운데 이 설교가 가장 애정이 넘치고 감정이 넘치는 설교인 것 같다.
8. 하늘에 속한 믿음과 경건은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 천국에는 의심할 바 없이 참된 믿음과 가장 순수하고 완벽한 경건이 있다. 성경을 보면 하늘에 속한 믿음과 경건 역시 주로 거룩하고 강렬한 사랑과 기쁨 그리고 이 사랑과 기쁨이 열정적으로 고양되도록 표현한 찬양 속에 있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의 경건도 지상에 있는 성도들의 경건과 똑같이 사랑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드러난다. 우리가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는 몸 밖에 있는 영혼 또는 영화된 몸 안에 있는 사랑과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적으로 알지 못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상에 있는 성도들은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천국에 있는 분리된 영혼 속에 있는 사랑과 기쁨이 같은 종류라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상의 성도들이 경험하는 사랑과 기쁨은 하늘에 속한 빛과 생명의 축복의 시작이요 여명이다. 그리고 지상의 성도들이 경험하는 사랑과 기쁨은 비록 그 정도와 환경은 다를지라도 천국에서 경험하는 사랑과 기쁨과 유사한 것이며 본질상 같은 것이다(잠4:18, 요4:14,6:40,47,50-54,58,요일3:15,고전13:8-12).
사랑하고 기뻐하는 마음의 감각이 있는데 이것은 체액에 미치는 어떤 영향보다도 선행한다. 따라서 이 마음의 감각은 몸 안에 있는 체액들의 움직임에 의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몸이 없는 영혼 속에도 존재한다. 그리고 사랑과 기쁨이 있는 곳이면 그것이 몸 안이든 밖이든 어디든지 바로 이 마음의 감각이 있게 된다. 바로 이런 내적 감각 또는 일종의 영적 감각 또는 느낌 그리고 영혼의 움직임 바로 이것을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영혼이 무엇인가를 느껴서 그에 따라 움직일 때 영혼은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에서 천국을 묘사한 것을 보면 천국의 성도들에게 있는 사랑과 기쁨은 넘치도록 크고 활기차서 가장 강하고 가장 생생한 감각작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이 달콤하게 심령을 움직이고 성도들을 강력하게 자극하며 활력을 주고 사로잡으며 그들을 뜨거운 불꽃과 같이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사랑과 기쁨 가운데 있는 천국의 경건과 믿음은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 참된 경건은 거의 감정에 내재한다. 어떤 사물의 참된 본질을 알려면 우리는 그 사물이 순수하고 완벽하게 나타나는 곳으로 가야 한다. 만일 우리가 참된 경건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어떤 결합과 혼합도 없이 최고로 완벽한 상태에서 오로지 참된 경건만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참으로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외인들이며 하늘에 속한 자들이다. 그들이 받은 은혜는 장차 그들이 받을 영광의 여명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영광스러운 세계에 적합한 존재로 만들어 가신다.
9.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참된 믿음과 경건의 표현 수단으로 제정하신 여러 원리와 의무와 본질 그리고 양식을 보면 분명해진다.
- 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를 통해 표현하는 것들이 우리의 심령을 적절하게 감정적으로 자극하게 하여 우리가 구하는 복들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준비하기를 원하신다.
- 2) 하나님께 노래로 찬양하는 것 역시 전적으로 신앙 감정을 고무시키고 표현하기 위해 만드신 것 같다. 이는 인간의 본성과 구조가 시와 음악을 들으며 감정적으로 움직이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
- 3) 하나님은 복음과 그리스도의 구속과 관련된 위대한 일들이 성례라는 시각적인 표상으로 우리 눈앞에 제시되도록 하셨다. 그것은 성례가 우리의 감정에 더욱 큰 영향을 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 4) 신적인 일들을 인간의 심령과 감정에 각인시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의 위대하고 중요한 목적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당신의 말씀이 설교를 통해 열려지고 적용되며 사람의 마음에 새겨지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단지 사람들이 훌륭한 성경 주석서나 강해서를 갖거나 훌륭한 경건 서적을 갖는 것만으로는 하나님께서 설교라는 제도를 세우실 때 마음 속에 품으셨던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설교뿐만 아니라 이런 서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적절하게 교리적으로 또한 철학적으로 이해시키는 것 같지만 그것들은 설교만큼 사람의 심령과 감정에 인상을 심어주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설교로 사람에게 특별히 생생하게 적용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설교야말로 믿음과 경건에 속한 중요한 사항들 즉 인간 자신의 비참함에 대해, 그 비참함을 치유하는 치료책의 필요성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그 치유책의 영광스러움과 충분함에 대해 죄인들을 감정적으로 깨우칠 수 있는 적절한 도구가 된다. 설교는 종종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거나 배운 바 있는(벧후1:12-13) 경건에 속한 위대한 일들을 성도들로 하여금 다시 기억하게 하고, 성도들에게 적절한 체계로 제시함으로써 성도들의 순수한 마음을 각성시키고 그들이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바 있는 사랑과 기쁨이라는 두 가지 감정을 고무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또는 사도로 또는 선지자로 또는 복음 전하는 자로 또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2)라고 말씀한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목회 사역을 가르치고 권면할 때 사도는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중요한 목적이 사랑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한다(딤전1:3-5). 하나님께서는 설교라는 수단으로 성도들에게 고양시키고자 하시는 또 하나의 감정은 기쁨이다. 그래서 사역자들을 성도들의 기쁨을 돕는 자라고 부른다(고후1:24)"(175-6).
10. 참된 믿음 또는 거룩한 심령이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는 사실은 성경이 죄를 마음의 완악함과 밀접하게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성경은 도처에서 죄와 마음의 완악함을 연결시킨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그들을 향해 근심하시고 노하셨다(막3:5). 사람들이 이런 완악한 마음 때문에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있다(롬2:5).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도 마음이 강퍅했기 때문이며(겔3:7), 광야에 있던 완악하고 반역적인 세대가 사악했던 이유 역시 그들 마음이 강퍅했기 때문이다(시95:7-10). 마음의 강퍅함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게 된다(사63:17).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기독교를 반대하는 것 역시 그들 마음의 강퍅함 때문이다(행19:9).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그 마음의 죄악과 부패함에 내버려 두시는 것은 종종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기 때문이라고 표현한다(롬9:18,요12:40). Cf. 히3:8,12-13. 사람을 죄의 권세에서 구원하며 그 부패함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회심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새 마음을 주시는 것으로 묘사한다(겔11:19,36:26).
여기서 굳은 마음(hard heart)이란 감정이 없는 마음 또는 덕스러운 감정들 때문에 쉽게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마음은 돌과 같이 무감각하고 무지하며 감동되지 않고 쉽게 인상을 주기 어려운 마음을 뜻한다. 그래서 굳은 마음을 돌과 같은 마음이라고 부르며, 감정이 있어서 쉽게 감동되는 마음과 상반된다. 부드러운 마음(tender heart)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정적으로 쉽게 영향을 받고 쉽게 인상을 받는 마음인가?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이 부드러웠기 때문에 요시야를 칭찬하셨다. 분명한 것은 그의 마음이 부드러웠다는 말은 그의 마음에 경건한 신앙 감정이 있어서 쉽게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왕하22:19).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드러운 마음이 있어야 한다. 부드러운 마음은 어린 아이들이 다른 일들로 쉽게 감동받는 것처럼 영적이고 신적인 일들로 쉽게 감정이 영향을 받고 감동되는 마음을 뜻한다.
분명한 것은 마음의 강퍅함과 마음의 부드러움은 감정들과 관련된 표현이고, 마음이 어떤 감정들에게서는 쉽게 영향을 받지만 어떤 감정들에게는 굳게 닫혀 있음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참된 믿음과 경건은 대부분 감정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결론적으로 말한다. 이 교리적 명제를 입증하기 위해서 그는 10가지의 증거를 제시했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참된 성도들의 마음 속에도 영적이지 않은 감정들이 존재하며, 성도들의 신앙 감정은 종종 혼합되어 있다고 한다. 즉 모든 감정들이 은혜의 산물은 아니며 대부분 본능적 감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감정은 습관적이기 때문에 믿음의 정도를 감정이 작용하는 습관의 정도와 강도에 따라서 판단해야지 감정의 작용 자체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앙은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한 감정이 없이는 참된 신앙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에 거룩한 감정으로 드러나지 않는 어떠한 진리의 빛도 선하지 않다. 그리고 마음속에 거룩한 감정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습관과 원리도 선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감정적 작용에서부터 나오지 않는 어떠한 외적인 열매도 선하지 않다.
3. 신앙에 있어서 감정의 중요성 적용
에드워즈는 자신의 교리적 명제에 대한 증거들을 제시하고 나서 이제는 몇 가지 추론적 결론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우리는 모든 신앙 감정을 믿을 수 없거나 실체가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사람들의 오류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에드워즈가 판단하기에 1746년경 당시에 뉴잉글랜드에는 이런 오류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와 같은 오류를 택하게 된 이유는 대각성기에 위대한 신앙 감정을 가졌던 것처럼 보였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올바른 성향을 보여 주지 못하였고, 그들이 감정적으로 뜨거운 열정을 가졌을 때에 많은 오류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체험한 높이 고양된 감정들이 너무나 빨리 사라져 버린 것 같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1차 대각성 기간 중에는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감정적으로 자극을 받아 종교적 대화에 몰두하고 뜨거움과 진지함으로 가득 차서 자신들을 표현하는 듯 했을 때는 별로 조사도 안 해보고 즉 분별도 안 해보고 그들의 신앙 감정을 성령의 체험이라고 평가했다가, 2, 3년 지나고 나서는 모든 신앙 감정들을 구분하지 아니하고 거부하는 경향이 만연하다고 세태를 비판한다. 에드워즈는 이와 같은 현상 이면에 사단의 교묘한 술수가 있음을 분별해낸다. 즉 뉴잉글랜드 사람들에게 신앙의 감정이 많이 유행하는 것을 보고 사단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와 가짜 감정들을 섞어 버리고 알곡 가운데 가라지를 뿌려 놓아서 자기 목적을 이루다가, 이제는 상황이 반전되니까 일의 방향을 바꾸어 종교적인 일에 관계된 모든 감정들이 결코 존중되어야 할 것들이 아니며 오히려 해로운 것이기에 피하고 주의 깊게 다루어야 한다는 거짓 믿음을 유포시키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귀는 이렇게 하는 것이 모든 신앙 생활을 생명 없는 단순한 형식으로 만드는 길이며, 경건의 능력과 모든 영적인 일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해 버리는 길이고, 참된 기독교를 완전히 말살해 버리는 길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참된 신앙에는 감정 이외에 다른 것들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참된 신앙은 대부분 감정에 내재하기 때문에 감정이 없이는 참된 믿음도 있을 수 없다.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고상한 감정들을 경멸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자기 안에 고상한 감정들이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신앙 감정이 풍부하지 못한 사람은 확실히 믿음이 약하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신앙 감정이 없다는 이유로 경멸하면서도 스스로는 그런 감정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물론 가짜 감정들이 있고, 진짜 감정들이 있다. 어떤 사람이 감정이 풍부하다는 것이 그가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에게 신앙 감정이 없다면, 그것은 그에게 참된 믿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올바른 길은 모든 감정들을 거부하거나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들을 구분하여 어떤 것은 승인하고, 그것과 다른 것은 거부하는 것이다. 밀과 밀의 껍질을 분리하는 것이고, 금과 이물질을 분리하는 것이며, 귀중한 것과 무가치한 것을 분리하는 것이다.
2. 만일 참된 신앙이 대부분 감정에 있다면 감정들을 자극하고 움직이게 하는 경향성을 지닌 수단들을 힘써 추구하고 사용해야 한다는 추론이 가능해 진다. 그런 책들, 그렇게 말씀을 설교하는 것, 그렇게 성례전을 집행하는 것, 기도와 찬양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사람들의 심령에 깊은 감정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는 수단이므로 힘써 추구해야 한다. 만일 믿음에 속한 일들을 바로 이해하고 판단하기 위해 그 방편들을 본성에 적합하고 참된 방식으로 사용한다면, 그 방편들이 은혜로 말미암는 감정을 더 많이 일으키게 되며 그럴수록 그 방편들은 더 나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3. 만일 참된 믿음의 대부분이 감정 안에 있다는 것이 옳다면, 우리가 믿음에 속한 위대한 일들 때문에 감정이 더 이상 자극받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당혹스러워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감정을 주신 목적은 그들에게 영혼의 모든 다른 기능들과 원리들을 주신 목적과 같다. 그 목적은 감정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큰 목적 즉 사람의 본분에 봉사하게 하시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과 신앙을 갖는 일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든 사용해야 한다면 그리고 만일 창조주께서 감정을 인간 본성의 일부로 만드실 때 헛되고 쓸모없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면, 감정은 감정의 작용이 가장 합당하게 쏟아야 할 대상을 향해 발휘되고 행사되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것들만큼 우리의 찬탄과 사랑의 대상으로서 합당하고 우리가 진지하게 바라는 갈망의 대상으로서 합당하고, 우리의 소망과 기쁨과 불타오르는 열정의 대상으로서 합당한 것을 하늘에서든 땅에서든 발견할 수 있는가?
복음에 속한 일들은 우리의 감정을 움직이기에 가장 적합하게 선포되었고 감정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키기에 가장 합당하게 제시되었다. 복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우리의 찬탄과 사랑의 대상이 될 충분한 가치가 있으며 성육신하시고, 무한한 사랑이 있으시며, 온유하시고 자비하시고 또 죄인을 위해 죽으신 구속주의 얼굴에서 가장 빛나고 가장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제시되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가지신 겸손, 인내, 온유, 복종, 순종, 사랑, 긍휼 같은 모든 미덕들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우리의 감정을 움직이기에 충분하다. 그런 미덕들은 구속주의 감정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상황에서 가장 큰 시련을 통과했고, 최고도로 실천되었고 가장 밝게 나타났다. 심지어 구속주께서 말로 다할 수 없고 비교할 수 없이 큰 마지막 고난 속에 있을 때에도 구속주께서는 우리를 향한 순전한 사랑과 긍휼로 그 모든 것을 견디어 내셨다. 또한 우리 죄의 혐오할 만한 본질이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구속주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죄를 위해 당하신 고난을 통해 우리 죄의 치명적인 결과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의로우심으로 나타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가 가장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이 되기도 했다. 우리는 당신께서 무한히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을 품고 계신 당신 아들에게 우리의 죄를 그렇게 처참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엄중한 두려움과 하나님의 정의의 엄격성과 엄밀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한 당신의 영광스러운 경륜과 우리를 구속하시는 사역을 통해 우리 심령의 가장 깊은 부분을 가장 크게 움직이고, 우리의 감정을 가장 자극적이며 강력하게 움직이도록 모든 일을 계획하면서 섭리하신 것이다. 이런 사실에서 더 이상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우리가 티끌같이 낮아지고 수치스럽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제2부. 신앙 감정이 진정으로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 근거가 될 수 없는 표지들
제2부. 신앙 감정이 진정으로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 근거가 될 수 없는 표지들(PART 2. SHOWING WHAT ARE NO CERTAIN SIGNS THAT RELIGIOUS AFFECTIONS ARE GRACIOUS, OR THAT THEY ARE NOT)
앞서 살펴 본 대로 에드워즈는 본서를 통하여 반 부흥으론(보스턴의 찰스 촌시를 대표)의 이성주의와 열광주의적 부흥론(존 데이븐포트가 대표적)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정로를 걸어가고자 한다. 그는 양쪽 입장을 다 비평하면서 성경적인 부흥론이 무엇인지를 개진하고자 한다. 특히 성령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참된 은혜의 체험과 그렇지 않은 유사 체험 사이에 분별할 수 있는 기준들을 확립하고자 한다. 『신앙감정론』이 절실하고 적실하게 필요한 까닭은 그의 심오한 성경적 표지론이 우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이한 청교도 영성 훈련 운동(전광훈 목사 주도)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잣대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에드워즈가 제2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신앙 감정이 진정으로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 근거가 될 수 없는 표지들(PART 2. SHOWING WHAT ARE NO CERTAIN SIGNS THAT RELIGIOUS AFFECTIONS ARE GRACIOUS, OR THAT THEY ARE NOT)에 대해서이다.
에드워즈는 이미 1741년 9월 10일 예일대학 졸업식에서 설교하면서 믿음을 평가하는 표지(sign)라는 사상을 도입했고, 소극적인 표지(negative signs)와 적극적인 표지(positive signs)로 양분하여 다루었다. 이와 같은 표지론이 더욱 더 세련되고 완숙하게 표현된 것이 바로 『신앙감정론』의 2부와 3부인 것이다. 그러면 2부에서 다루어지는 소극적인 표지란 무슨 뜻인가? 소극적인 표지는 부흥을 경험할 때 하나님이 손이 임재 하셨는가를 판단하는 참된 기준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사건이나 그 사건들의 특징을 의미한다. 그러면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에서 제시하는 바 소극적인 표지는 어떤 것들인가? 1741년 에드워즈는 9개의 소극적인 표지를 제시한다.
① 매우 일상적이지 않고 아주 비범하고 특별한 일어 일어난다고 해서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성령의 역사다 아니다고 말할 수가 없다.
② 우리는 인간의 신체에 나타나는 어떤 영향들, 즉 눈물, 전율, 신음, 큰 소리를 지름, 육체적 고뇌, 혹은 신체적 힘이 빠지는 것 등에 의해서 그 역사가 참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다.
③ 큰 소동과 종교에 대한 큰 잡음이 나타난다고 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나는 작용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④ 성령의 영향력 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상상(imaginations)에 커다란 인상들을 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나는 작용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⑤ 부흥을 반대하는 이들 중에는 부흥시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따라하여 동일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것은 참된 성령의 역사가 아니야라고 부정을 한다.
⑥ 성령의 역사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으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의 행동이 매우 신중하지 못하고 변칙적인 일들(irregularities)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역사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⑦ 판단에 있어서 많은 실수들이 있고 사단이 그 역사에 어떤 미혹들을 뒤섞어 놓았다고 해서, 그 역사 전체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⑧ 소위 성령의 영향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몇 몇 사람들이 심각한 실수를 범하거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하거나 또는 이단에 빠지는 일이 일어 난다고 해서 전체 부흥 운동을 거짓 영의 역사라고 매도할 수 없다.
⑨ 부흥의 시기에 목회자들이 율법설교나 지옥설교를 많이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에 잠기게 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에드워즈는 『신앙감정론』의 제2부를 시작하면서도 신앙 생활을 통해 생긴 감정을 가진 모든 사람이 참된 은혜를 받았고 성령이 행하시는 구원 역사의 영향을 받는 주체인 것인 양 모든 감정을 승인해서는 안 되며, 올바른 길은 신앙감정 가운데서 두 가지 종류를 구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소위 참됨 믿음과 관계된 은혜로운 감정인지 아닌지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는 소극적 표지 12개(2부)와 영적이고 은혜로운 감정과 그렇지 않은 감정을 구별해 내는 판단 근거가 될 수 있는 적극적 표지 12개(3부)를 에드워즈는 제시 한다. 2부에서는 소극적 표지 12개를 살펴보게 된다. 그런데 2부를 읽으면서 혼돈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에드워즈가 양 전선을 향해 싸우고 있다는 점을 늘 기억해야 한다. 즉 첫 번째 표지에서부터 이미 에드워즈는 '이러 이러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열광주의자로 정죄하는 사람들은 큰 잘못을 범하고 있는 사람이다'고 하고(이것은 반부흥론에 대한 반박), 또 이어서는 '한편으로는 이러 이러한 일을 일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이고 은혜로 말미암았을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열광주의의에 대한 반박)는 식으로 각 표지를 전개해 나간다.
1. 감정의 정도(193-198)
- 신앙 감정이 매우 크게 발휘되거나 아주 높이 고양되는 것 자체는 그 감정들이 은혜로운 것인지 또는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It is no sign one way or the other, that religious affections are very great, or raised very high).
1-1. 반부흥론에 대한 반박(193-7)
반부흥론자들은 도에 지나친 감정 모두를 쉽게 정죄하여 버린다. 이에 대해서 에드워즈는 참된 믿음이 신앙감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입증한 1부의 내용을 간략하게 재 진술함으로써 반박하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참된 믿음이 강하게 존재하는 곳에는, 신앙감정이 크게 발휘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사람들의 심령 속에 있는 참된 믿음이 높게 고양되면, 신령하고 거룩한 감정 역시 고양될 것이다"(193). 우리가 앞서 아주 자세하게 살펴 본 것(153-179)을 에드워즈는 간략하게 몇 장에 걸쳐(193-6) 요약적으로 재 진술한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그러므로 그들의 감정이 너무 고조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열광주의자로 정죄하는 사람들은 큰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197)
1-2. 열광주의에 대한 반박(197-8)
에드워즈는 두 번째 부분에서 열광주의에 대한 반박을 속개한다. 그에 의하면 신앙감정이 단지 크게 고양되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감정들이 반드시 영적이고 은혜로 말미암았을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에드워즈가 그렇게 주장하는 까닭은 영적인 일들을 판단할 때 확실하고도 무오한 기준이 되는 성경에 의하면, 매우 높이 고양되긴 했지만 영적이지도 않고 구원에 이르게 하지도 못하는 신앙 감정이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주장을 입장하기 위하여 세 가지의 성경적인 근거 내지는 예증을 제시한다: 바울을 천사처럼 환영했다가 믿음에서 이탈해간 갈라디아인들(갈4:15,11), 홍해에서 찬송을 부르고 시내 산에서 신 현현을 보고도 곧 바로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을 보고 호산나 찬송하며 환영하였다가 잠시 뒤에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하는 자들로 돌변한 이스라엘 백성들. 에드워즈는 "신앙감정이 매우 높게 고양된다 할지라도, 참된 신앙과 완전히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정통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198)라고 결론을 지으면서, 각주에는 일반적 감정이 때로는 구원에 이르는 신앙감정보다 더 강할 수 있다고 말한 외조부 스토다드의 책자만 인용한다.
2. 몸의 격렬한 반응(199-204)
- 감정이 몸에 큰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은 그 감정에 참된 믿음의 본질이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 주는 표지가 아니다(It is no sign that affections have the nature of true religion, or that they have not, that they have great effects on the body).
우리 인간의 본질과 영혼과 육체가 연합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생생하고 활력 있게 작용할 때에는 반드시 몸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된다. 몸은 심리적 영향에 작용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으며, 몸의 체액 특이 본능은 마음의 변화와 심리의 작용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감정이 작용할 때는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몸이 느낄 수 있는 어떤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이 보편적이다고 인정한다. 그렇다면 그 감정이 크면 클수록, 활력있게 발휘되면 될 수록, 몸에 더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이며, 매우 크고 강한 감정이 몸에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에 우리가 놀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일반적 감정과 영적 감정 모두 몸에 큰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몸에 미치는 영향들은 그 영향을 초래한 감정들이 영적 감정인지 일반적 감정인지를 판단해 주는 표지가 되지 못한다.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세상적인 일들에서도 몸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을 종종 보기 때문에, 우리는 몸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 만으로 그 감정이 영적인 것이라는 확실한 표지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열광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반면에 은혜로운 거룩한 감정들이 어떤 본성적 감정만큼 높이 고조되고 그만큼 강하고 생생하게 작용할 때에 몸에 큰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단정할 근거도 없다. 영적인 감정에는 강한 힘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역사하는 능력에 대해 읽게 된다(엡3:7).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능력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인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강한 힘으로 역사하심을 읽게 된다(딤후1:7,엡1:19). 하지만 인간의 본질(혈과 육)은 연약하여서 영적이며, 하늘에 속한 위대한 일들에 적합하지 않다(마26:41,고전15:43,50).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 인간의 연약한 육신이 받기에 너무나 크고 강력해서 그 몸을 짓누르거나 압박할 수 있음을 의심할 수가 없다. 성경은 만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지식과 비전을 하늘에서 가지게 되는 정도만큼 크게 가지게 될 때 연약한 체질로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자주 가르친다(201).
에드워즈는 강렬한 신앙 감정을 경험하게 될 때에 그 감정이 영혼 뿐 아니라 몸에도 미친다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다양한 성경적 증거를 제시한다(201-3). ". .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내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84:2),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63:1),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합3:16). 또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지식들이 몸을 억누르고 압도하는 경향이 있음은 성경적으로 분명하다. 즉 다니엘, 사도요한(단10:8,계1:17)의 예를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들은 크게 감화되었고, 그들의 영혼은 압도되었으며, 그들은 몸이 억눌러짐을 경험하였다.
에드워즈는 성경이 거룩한 영적 감정의 강도를 표현하기 위해 몸에 미치는 영향들을 분명히 자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였다. 떨림(시119: 120, 스9: 4, 사66: 2, 합3: 16), 탄식(롬8: 26), 병약해짐(아2:5,5:8), 부르짖음(시84:2), 헐떡임(시38:10,42:1,119:131), 피곤함과 쇠약함(시84:2,119:81). 감정이 얼마나 영적으로 고양되었는지를 하나님의 성령께서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신 적절하고 적합한 수사이다. 만일 그런 영적 감정이 몸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면 그런 표현들이 영적 감정의 강도를 표현하는 수사가 될 수는 없다.
3. 신앙과 신학에 대한 관심(205-208)
- 신앙 감정이 있는 사람들이 신앙적인 일들을 매우 유창하고 열정적으로 그리고 풍부하게 말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감정들이 은혜로운 것인지 또는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는 표지는 아니다(It is no sign that affections are truly gracious affections, or that they are not, that they cause those who have them to be fluent, fervent, and abundant, in talking of the things of religion).
어떤 사람이 신앙적인 일들을 매우 유창하고 열정적으로 그리고 풍부하게 말하는 것을 보게 되면 한편에서는 바리새인이나 잘난 체하는 위선자로 정죄하려고 하고, 다른 편에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참된 자녀이며 성령의 구원하시는 능력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무지하고 성급하게 단정해 버린다. 에드워즈는 사람들이 이런 실수는 하는 것은 사람들의 판단력이 흐리고 경험이 풍부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또한 성경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을 원칙으로 만들고 자신의 지혜와 분별력을 믿게 때문이라고 한다. 에드워즈는 성경에는 "신앙적인 일들을 매우 유창하고 열정적으로 그리고 풍부하게 말하는 것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건전한 영적 상태에 있다고 판단 내릴 수 있는 원리가 된다는 말씀은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206)고 말한다. 그것들은 단지 잎과 혀에 달린 믿음일 뿐이며, 나뭇잎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사람들이 신앙적인 일들을 매우 유창하고 풍부하게 말하는 것은 좋은 이유 때문일 수도 있고 나쁜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한다. 어떤 종류의 감정이든지, 어떤 대상에 대한 감정이든지, 사람들이 강한 감정이 생기면 사람들은 그들의 감정적인 체험을 많이 말하게 될 뿐 아니라 매우 진지하고도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게 되는데, 이것은 감정의 본질(the nature of the affections)이다. 사람들은 "마음에 쌓은 것을 입으로 말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이 신앙적인 일들을 풍부하고 매우 열정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단지 그들이 신앙적인 일들로 크게 감동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할 수는 있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것은 참된 은혜 때문에 생긴 감동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세례 요한이나 그리스도를 따랐던 무리들이 한 때는 그 빛에 거하기를 즐거워하고 관심을 크게 보이다가 결국에는 떠나가버린 것을 예로 들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체험에 대해서 지나치게 많이 말하는데, 이런 경우는 나쁜 징조인 경우가 많다. 잎이 지나치게 무성한 나무는 좀처럼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법이다. 삶의 열매없이 입으로만 열심히 믿는 사람들을 성령께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시곤했다: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같으니라"9잠25:14), "저희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유12),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벧후2:17). 그리고 거짓된 감정들은 만일 그 강도가 같다면 참된 감정들 보다 더 심하게 겉으로 드러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거짓 믿음이 바로 겉으로 드러내고 과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 이런 현상의 증거이다(에드워즈는 각주에서 "바리새인의 나팔 소리는 마을 끝에서도 들리지만, 순박한 사람은 걸어서 마을을 통과하는 것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로 시작하는 셰퍼드의 글을 인용한다).
4. 감정의 자가 생산 여부(209-215)
- 사람들이 스스로가 그런 감정들을 만들지 않았다거나 그들의 고안에 의해서 그리고 그들 자신의 힘에 의해서 흥분시킨 것이 아니다는 것 만으로는 그 감정들이 은혜로운 것인지 또는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는 표지는 아니다(It is no sign that affections are gracious, or that they are otherwise, that persons did not make them themselves, or excite them of their own contrivance and by their own strength).
반(反) 부흥론자들은 하나님의 영이 직접적인 능력과 작용을 내적으로 경험한다거나 감각적으로 인지한다는 가르침을 강하게 거부하고 비웃는다. 그들은 하나님은 조용하고, 비밀스럽고, 지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은혜의 방편들을 사용하시며 우리 자신의 노력과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의 영향들과 우리 마음에 있는 여러 가지 기능들의 자연적인 작용들은 서로 구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열광주의적 부흥주의자들은 지정된 은혜의 방편들을 부지런히 향상시키려고 노력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경험하고자 기대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시지 않은 채 사람들의 마음에 구원하는 역사를 일으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도 타당치 못한 교만이라고 에드워즈는 평가내린다.
만일 사람들의 마음속에 구원하는 은혜를 불어넣기 위해 필요한 자연의 힘, 모든 수단과 방편들의 힘 그리고 우리 자신들의 힘을 능가하며 그것들과 전적으로 다른 어떤 힘이 존재한다면, 그 힘이 분명하고, 가시적이며,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작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불합리하지 않다(210). 성경이 많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사람의 영혼에 임한 은혜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산물인 것이 분명하다면, 은혜를 어떤 행위자 자신의 힘과는 전혀 무관하게 일어나는 작용과 비교하는 것은 적합하다. 그런 작용들에는 발생 즉 출생과 부활 즉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남 그리고 창조 즉 무로부터 존재하게 됨과 같은 것이 포함되는데, 이런 작용들을 통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크게 영화롭게 되며, 하나님의 능력이 지극히 위대하시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211).
에드워즈는 구약 성경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여러 증거들(출애굽, 기드온과 300용사, 다윗의 물레돌등)을 제시한 후에, 또한 신약 성경에서 개인들의 회심 사건에서도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드러났다고 말한다. 즉 사도행전에서 증거되는 그런 회심들은 많은 이들이 잘못 주장하는 방식대로 조용하고, 비밀스럽고, 점진적이고, 감각적으로 느낄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능력이 분명하게 드러나서 놀랍고도 갑작스럽게 크게 변화된 것이었음이 분명한데, 에드워즈 당시의 반부흥론자들이 보기에는 속임수와 지나친 열광주의의 표지로 여겨진다고 따끔하게 비판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의 마음눈을 밝히셔서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엡1:18-19). 이와 같이 기도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만일 성도가 이 능력을 체험적으로 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 능력을 느끼고, 지각하며, 의식한다는 말과 같다. 즉 사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자연적인 작용과 구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감각으로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에드워즈는 이상의 논증 과정을 통하여서 다음의 반부흥론자들의 주장을 비평한다. 즉 감정들이 그 감정의 주체인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감정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로 된 것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며 비성경적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에드워즈는 다른 반대편의 입장 즉 극단적 열광주의자들을 겨냥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을 가한다. 감정의 주체인 사람이 일부러 불러일으키지 않았다거나, 사람이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감정이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감정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것이라는 표지가 될 수 없다.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내거나 흥분시킨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성령의 역사가 아닌 다른 영적 존재들에 의해서나 다른 요인들에 의해서 말미암을 수 있다. 성령 외에도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영적 존재들이 있다. 우리는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를 시험해야 한다. 많은 거짓 영들은 아주 바쁘게 움직이면서 종종 자신들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며, 간교하고도 강력하게 그리고 많은 놀라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모방한다. 사람들의 마음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과 뚜렷이 구별되는 사단의 수많은 역사가 있다. 사단은 많은 사람들을 따라다니면서 두렵고 공포에 찬 생각들을 심으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생각들을 주입한다. 사단은 또한 헛되고 열매 없는 공포심과 두려움들을 자아낸다. 또한 사단의 능력은 공포와 두려운 생각을 심는 일에서만큼 거짓된 기쁨과 위로를 주는 일에서도 즉각적이고 분명하게 나타난다. 독일의 재세례파들과 많은 다른 열광주의자들이 경험했던 황홀한 기쁨은 사람의 능력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하신 일이더라도 성령의 구원하시는 역사가 아닌 일반적인 역사(a common influence)에서 비롯된 것일 때도 있다(히6:4-5,9). 또한 어떤 영의 역사와 전혀 관계없이 신체가 약하거나 결함이 있는 사람들 또는 뇌가 약하거나 여러 가지 생각과 인상에 쉽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이상한 생각과 상상을 할 수 있다. 잠자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꿈을 꾸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은 깨어 있는 동안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러 인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5. 성경이 갑자기 떠오름(216-220)
- 신앙감정들이 성경 본문을 마음속에 기억나게 한다는 것 자체는 그 감정들이 진정으로 거룩하고 영적인 것인지 또는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It is no sign that religious affections are truly holy and spiritual, or that they are not, that they come with texts of Scripture, remarkably brought to the mind).
에드워즈 당시에 성경 말씀이 마음속에 떠올려짐으로써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은혜로 말미암은 감정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입장이 있고, 반대로 감정이 성경 말씀이 성경 말씀이 생각남과 동시에 일어날 때 그것이 그 감정을 구원하는 은혜로운 감정이라고 판단내리는 적합한 근거가 된다고 확신하는 자들이 있었다. 에드워즈가 보기에 전자의 입장을 고집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후자의 경우에도 무조건 그렇다고 긍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즉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라도 한 것처럼 성경 본문이 떠오르고(혹은 계속해서 말씀이 떠오르면서) 경탄하며 눈물을 흘리든지 아니면 기쁨으로 충만해진다고 할 때에 그런 감정이 확실히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고, 올바른 것이며, 그들의 영적 상태가 건전하다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확신하는 것은 그가 보기에는 어떠한 근거도 없는 맹신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신앙적인 일들에 대한 가장 높고 유일한 규범인 성경(the Bible, the great and only sure directory in things of this nature) 어디에도 그런 법칙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217).
이 문제에서 무지하고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잘 속아 넘어가는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안에 잘못된 것이 없고 순전하며 완전하기에 성경 말씀에서 비롯된 체험들은 반드시 옳다"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이 순전하고 완전하다는 사실에 기초해서 주장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체험은 옳고 또 옳지 않을 수 없다는 것뿐이지, 체험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생각난다고 해서 그 때 일어나는 감정이 반드시 옳다는 것은 아니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논지를 입증하기 위하여 성경적 증명을 시작한다. 성경에 보면 강한 능력을 소유한 마귀에게는 소리나 글자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떠오르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다. 사단에게는 그런 일을 하기에 충분한 전능에 가까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에드워즈는 강변한다. 심지어 마귀는 성경을 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성경을 악용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귀는 성경 말씀 이것저것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유혹하고 기만하려고 시도하였다(마4장). 만일 사정이 이와 같다면 무슨 근거로 우리는 사단이 악인들을 속이고 유혹하는 일에 악인들 스스로가 성경 말씀을 기억하도록 시도하지 않을 것이고 또 그렇게 허용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사단은 성경에서 아주 탁월한 위로를 주는 귀중한 약속의 본문일지라도 능숙하고 용감하게 악용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그가 위로의 말씀 하나를 떠올릴 수 있다면, 위로의 말씀 수천 가지를 생각나게 할 수도 있다.
사단의 도구인 타락한 이단의 교사들 역시도 성경 말씀을 악용할 수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벧후3:16). 그들은 성경 본문을 악용하도록 허용되고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영혼을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마귀가 사람들을 기만하고 멸망시키려고 성경을 악용할 수 있는 것처럼, 사단의 어리석음과 부패함 역시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한다. 사람 속에 있는 죄는 그 죄의 아비와 같이 행한다. 사람의 마음은 마귀처럼 기만적이며, 또 기만하기 위해 마귀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수단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요인들과 전혀 무관하고 오히려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영향 때문에 자극된 감정이지만, 그 감정 안에 참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본질을 전혀 담지하지 않는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에드워즈가 예로 든 것은 마13장에 나오는 돌밭과 같은 마음이다. 이는 말씀을 큰 기쁨으로 받았지만 시련의 기간이 지나고 그 결과가 나타났을 때 그런 감정들은 구원하는 믿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경우이다.
6. 사랑의 피상적 표현(221-223)
- 사람들이 체험하는 감정에서 사랑이 나타난다는 것 자체는 그 감정들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감정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It is no evidence that religious affections are saving, or that they are otherwise, that there is an appearance of love in them).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참된 사랑의 정신 보다 더 탁월하고, 천상적이며, 신적인 것이 없다. 사랑은 지식이나, 예언이나, 기적이나, 사람과 천사들의 방언보다도 더 귀한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 가운데 가장 숭고한 것이며, 참된 믿음의 생명이고 본질이며 요체다. 사랑으로 우리는 천국의 모습에 가장 근접하게 되며, 지옥과 마귀의 모습에 가장 반대가 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 탁월하면 탁월할수록, 그것의 모조품들은 더욱 많다는 것도 사실이다. 사단의 교묘함과 사람에게 있는 기만성은 최고의 영예를 누리는 이런 미덕들과 은혜를 모방하는데 주로 사용된다. 그래서 사랑과 겸손보다 더 많은 모조품을 가지고 있는 은혜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사랑과 겸손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이 특별하게 나타나는 미덕들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종교적인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사랑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로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많은 유대인들이 그런 경우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사랑이 끝까지 지속되지 못하고 식어지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마24:12-13).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불순하고 영적이지 않게 사랑하고 있음을 감지하고서 성도들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부패함없이 in incorruption)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엡6:24)라고 축원한다. 또한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 역시 모방이 가능하다. 사도 바울을 위해서는 눈이라도 빼어 주려고 했던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런 경우이다(갈4:11,15).
에드워즈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각주에서(p.223) 스토다드의 A Guide to Christ로부터 간접 인용을 한다. 스토다드는 어떤 죄인들은 강한 감정들을 체험한다고 말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마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총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이며 때로는 이런 감정들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감정들보다 더 강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그는 때때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거짓된 사랑을 너무나 강하게 체험한 나머지 자신들이 기꺼이 저주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한다.
7. 여러 가지 감정을 동시에 체험함(224-229)
- 사람들이 여러 신앙감정을 동시에 체험했다는 사실은 그 감정들이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데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다(Persons having religious affections of many kinds, accompanying one another, is not sufficient to determine whether they have any gracious affections or no)
에드워즈는 은혜로운 모든 감정에는 가짜가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면서 다양한 예를 든다. 앞에서 본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에도 모조품이 있듯이,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에도 가짜가 있고(출9:27,삼상24:16-17,26:21,왕상21:27,민14:39-40),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도 모조품이 있고(왕하17:32-33), 하나님의 능력에 굴복하는 것에도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데도 모조품이 있다. 영적인 기쁨에도 모조품이 있고(마13:20,요5:35), 열심에도 가짜가 있다(왕하10:16,행22:3,롬10:2). 발람의 경우처럼 진지한 종교적 갈망에도 모조품이 있다(민23:9-10). 바리새인들 같이 영원한 삶을 강하게 소망할 수도 있다.
이처럼 회심하기 전 상태에서 사람들이 신앙 감정과 유사한 모든 감정 가운데 하나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유사한 감정을 동시에 함께 체험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거짓된 감정이 높이 고양될 때 다른 많은 거짓된 감정들도 함께 체험하는 것 같다. 에드워즈는 어떤 감정이 매우 크게 고조될 때 왜 그것이 다른 감정들을 자극하는지는 자연의 원리와 감정의 본질에서 볼 때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호산나'라고 외쳤던 군중들에게처럼 고조되는 감정이 사랑의 모조품일 때 그 사랑은 다른 감정들을 자극하게 된다고 한다(Cf. 226-7). 하나님의 참된 사랑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참된 감정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사랑의 모조품에서 다른 거짓된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양자의 경우 모두 사랑은 감정의 원천이며 다른 감정들은 그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다. 사람에게 있는 다양한 기능과 원리와 감정들은 그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수많은 통로들과 같다고 한다. 에드워즈는 비유를 바꾸어서 사람의 본성은 한 뿌리에서 나온 수많은 가지를 가진 나무에 비교할 있다고한다. 만일 그 뿌리의 진액이 좋으면, 그 좋은 진액이 가지 전체로 전달될 것이고 맺히는 과실 역시 좋고 싱싱할 것이다. 하지만 뿌리와 나무 둥지의 진액이 썩어있다면, 가지에 전달되는 진액 역시 그러할 것이고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과실은 죽게 될 것이다. 두 경우 모두 나무 자체는 비슷하고 그 모양이 아주 닮아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열매를 먹어 보면 그 차이가 드러나게 된다. 적어도 어느 정도로는 성도와 위선자 사이에 종종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8. 감정의 체험 순서(230-244)
- 양심의 각성과 죄에 대한 깨달음이 있은 후에 어떤 일정한 순서를 따라 위로와 기쁨이 뒤따른다는 사실로는 그 감정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판단할 수 없다(Nothing can certainly be determined concerning the nature of the affections, by this, that comforts and joys seem to follow awakenings and convictions of conscience, in a certain order).
윌리엄 퍼킨스, 토마스 셰퍼드, 토마스 후커 같은 청교도 신학자들에 따르면 먼저 각성과 공포와 염려가 있고 이어서 전적인 죄악성과 무능이라는 의미의 율법적인 겸비가 있은 후 광명한 빛과 위로가 뒤따르는 순서로 회심의 순서가 진행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에드워즈 당시에는 이런 방식과 단계를 따라 회심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인위적인 고안일 뿐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에드워즈는 우선 그런 반대자들에 대항하여 성경적으로 재반박을 시도한다. 즉 사람들을 죄와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해 내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 스스로 그들이 처해 있는 죄의 상태와 멸망의 악함을 깊이 느끼고 인식하게 하는 것이 결코 불합리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받는 사람들은 먼저 정죄의 상태에 있고 다음에는 칭의와 축복의 상태에 있게 된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도록 이 두 상태를 체험하게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일치하며 또한 합당하다.
하나님은 위로의 말씀을 주시기 전에 먼저 광야로 인도하신다.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전에 먼저 좌절의 상태로 이끌고 가서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신32:36-7,출2:23,5:19,신8:2,16,눅8:43-4,마15:22ff,고후1:8- 10,마8:24-6,레13:45,렘3:23-5등). 또한 하나님께서 옛 성도들에게 자신을 특별히 나타내신 사건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먼저 자신을 두려운 분으로 나타내신 후에 위로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창15:12-3,왕상19장,단10장,계1장). 그러나 성경에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과 자신의 자비하심을 드러내는 일에서 그리고 죄인이 심령에 자신의 은혜를 베푸시는 일반적인 사역에서 이런 방식으로 일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임을 보여주는 예도 많다(마18장,눅15장,렘8:11)히6:18,사32:2). 그리고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는 말의 자연스러운 의미는 큰 두려움과 고통 이후에 얻은 구출과 구원의 소식인 듯 하다.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당신의 교회를 다루시는 것처럼 성도 개개인을 다루신다. 그것은 먼저 두려운 천둥과 번개 속에서 율법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교회를 몽학선생 아래 두어서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준비시키시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시온 산에서 나오는 기쁜 복음의 소리로 교회를 위로하시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세례요한의 사역을 생각할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의 죄와 비참에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전에 그들의 크고 두려운 죄악과 그것 때문에 자신들이 비참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하시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방식이라면, 사람들에게 종종 마음에 큰 고통과 근심이 생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성경에서는 사람들이 구원으로 말미암는 위로를 받기 전에 그런 죄를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극도의 번민속에 빠지게 되었던 많은 확실한 실례들을 분명히 보여준다.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의 설교 이후의 청중들의 반응과 16장에서 빌립보 간수의 반응을 생각해 보라. 이런 예를 통해 볼 때 믿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이 체험하는 위로와 기쁨의 감정이 아주 두려운 근심과 번민 후에 생겼다는 사실을 가지고서 그 감정들의 진실성과 영적 본질을 반대하는 이유를 내세우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것이다.
다른 한편, 기쁨과 위로가 커다란 공포와 지옥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 뒤에 따라온다고 해서 그 기쁨과 위로가 올바른 것이라는 증거도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회심의 전제 조건이 죄에 대한 깨달음(conviction)이라는 청교도들의 주장, 그리고 사람이 참으로 죄를 깨닫게 되면 대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과 형벌에 대한 심한 공포를 체험한다는 경험적 관찰은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형벌에 대한 공포가 죄에 대한 깨달음의 본질이라고 오해하게 했다. 그리하여 에드워즈는 여기서 그러한 오해를 시정하면서 회심론의 핵심들 중 하나를 지적한다. 즉 비록 양심이 죄를 깨닫는 단계가 회심의 전 경험으로 필요하며, 그러한 죄에 대한 양심적 확신이 종종 공포를 야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포가 죄에 대한 깨달음의 본질은 아니다. 공포는 종종 다른 요인들에 기인할 수 있다. 성령의 영향에 의한 죄의 확신의 본질은 다음 몇 가지에 대한 확신이다. 즉, 마음과 삶의 죄악됨, 가공할 엄위와 무한한 거룩한 하나님을 대항해 지은 죄의 무서움, 죄에 대한 증오,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벌하시는 것은 아주 정의롭다는 확신이 그것들이다.
에드워즈가 볼 때에는 죄에 대한 참된 깨달음이 없어도 그것이 있을 때 흔히 수반되는 감정들과 유사한 체험을 가지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자기들을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구덩이 지옥, 그들을 태우려고 기다리고 있는 불길들, 그들을 붙들 준비가 되어 있는 악마들에 대한 몸서리쳐지는 우려들을 가진 어떤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과 삶의 죄악 됨을 참으로 확신시켜주는 밝은 양심은 거의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마귀도 사람을 공포에 빠뜨릴 수는 있으므로 공포 후에 어떤 긍정적인 감정이 온다고 해서 그것이 다 참된 은혜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마귀는 은혜의 준비 단계 마저도 모조할 수 있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심지어 죄에 대한 커다란 확신과 그로 인해 겸비해진 마음도 모양만 모방할 수 있다. 또 마귀는 죄에 대한 깨달음 뒤에 위로가 따르는 그 순서도 흉내 낼 수 있다. 그러나 참된 회심자들에게 흔히 발견되는 그러한 순서와 방법을 따라 누군가가 죄에 대한 깨달음 뒤에 위로를 체험하는 순서를 밟았다고 해서 그것이 참 회심의 은혜를 받은 것이라는 증거는 전혀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에드워즈는 죄의 각성과 위로의 분명한 체험이 없다고 해서 회심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단계와 방법에 대한 이 명료성(distinctness as to steps and method)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어떤 사람이 회심했다는 분명한 표지는 아니듯이 그것이 없다고 해서 어떤 사람이 회심되지 않았다는 증거도 전혀 아니다고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에드워즈의 모순적인 주장을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에드워즈는 자기의 죄와 비참, 그리고 자기 자신의 공허함과 무력함, 또한 자신이 영원히 정죄되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죄인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영접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러한 확실한 깨달음이 어떤 식으로든 자기 영혼에 일어난 역사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한 성경적 원리로 증명될 수 있을지 모른다(might be made evident)라고 말한다. 다소 약화된 긍정의 어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깨달음이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영접을 위한 전제 조건이라는 사실을 고수하고 있다.
에드워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참된 회심자라 할지라도 그가 회심에 이르는 은혜를 받는 과정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행위에 포함된, 혹은 신앙의 행위에 전제된 그 요소들이 때로는 희미하게 나타나 마치 어떤 것들이 생략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여기서 앞선 청교도 신학자들이 회심의 단계를 그대로 밟지 않는 자는 참된 회심자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식으로 회심을 정형화, 획일화하는 것에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그는 참된 회심을 위해 깨달음 다음에 위로라는 두 단계는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지만 그 두 요소를 다시 세분해서 서너 가지 혹은 대여섯 단계, 혹은 심지어 그 이상의 많은 단계들로 구분하고 그 구분을 절대화하는 것에는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회심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는 신비하고 다양해서 인간이 측량하기 어렵다는 일반적 진리를 그는 다시금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 성도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그 첫 번째 역사에 있어서 혼란스러운 카오스와 같아서, 특별히 정형화된 도식의 단계대로(in the steps of a particular established scheme) 성령이 진행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것의 절반도 안 된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결국 누군가 정말 회심의 은혜를 체험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최종적 시금석은 열매, 즉 영혼에 일어난 결과의 성격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성경에서 열매의 성격에 의해서 자신을 시험해 보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생산하는 성령의 방법에 의해 그렇게 해보라는 권고는 아무데도 없다. 결국 한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그의 삶과 인격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는 말이다. "오직 사단이 할 수 없는 것 만을 은혜의 확실한 표지라고 믿어야 한다. 그 표지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다른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회심은 그 일어난 순서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일의 영적이고 신적인 본질에서 가장 분명한 일일 것이다.
9. 종교적 행위와 의무의 피상적 실천(245-248)
-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 감정이 그들로 하여금 신앙적인 일에 시간을 많이 사용하게 하고, 예배의 외부적인 의무들에 열심히 헌신하게 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감정에 참된 신앙의 본질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는 확실한 표지는 아니다(It is no certain sign that the religious affections which persons have are such as have in them the nature of true religion, or that they have not, that they dispose persons to spend much time in religion, and to be zealously engaged in the external duties of worship).
사람들이 성경읽기, 기도, 찬양, 설교듣기 등에 시간을 많이 사용하는 것을 보면 은혜 충만하다 해야 하는가 아니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해야 하는가? 이는 에드워즈 시대 뿐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들의 교회 현장에서도 자주 부닥치는 의문이다. 일단 에드워즈는 이런 신앙적인 일들에 열심을 내는 것을 보고 그 사람들에게 있는 신앙 감정을 부정하려는 반부흥론자들에 대하여 반론을 편다. 이는 참된 은혜 때문에 사람들이 그런 신앙적인 일들에서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은 성경에서도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나는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고(눅2:37), 초대 교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찬미하기를 힘썼다(행2:46-7). 다니엘이나 다윗은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일에 힘을 썼다(단6장,시55:17). 그리고 은혜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에 기쁨으로 힘썼다(시135:3,147:1). 은혜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을 듣는 일을 즐거워하게 하며, 주의 전에 머무는 것을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게 만든다(시27:4,84:1-7,10). 이것이 참된 은혜의 본질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런 신앙적인 일을 외적으로 많이 행하고 그 일들에 열심히 헌신하며 그 일들에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는 것이 확실하게 은혜가 임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성향은 은혜를 입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구약 백성들은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였고, 성회로 모이고, 손을 펴고 많이 기도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일이 되었다(사1:2-15). 바리새인도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고, 길게 기도했지만 주님 보시기에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는 거짓 경건이었다(눅18장). 영적이지 않으며 구원받지 못할 신앙도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적인 의무와 규례를 기뻐하게 만든다(사58:2). 그리고 설교 듣는 것을 즐거워할 수도 있다(겔33:31-3, 막6:230,요5:35). 경험상 우리는 거짓된 신앙의 사람들도 신앙적인 일들을 외적으로 많은 열심을 내며 행할 수 있음은 분명히 안다. (중세의 가톨릭 수도사들과 은자의 경우를 보더라도) 진정 그들은 그 일에 온전히 몰두하며, 자신들의 거의 모든 시간을 그 일에 바치는 것을 보게 된다.
10. 찬송을 열심히 부름(249-251)
-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 감정이 그들로 하여금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게 한다는 사실로는 그 감정의 본질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Nothing can be certainly known of the nature of religious affections by this, that they much dispose persons with their mouths to praise and glorify God).
이것은 방금 앞에서 다룬 항목에 포함된 것이지만 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다시 다루고자 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고 싶어하며 자신들의 입을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차게 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은혜롭다는 분명한 증거라고 여기는 것 같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성경 속에서 너무나 많이 증거를 보기 때문에 그와 같은 대세에 반론을 편다. 그리스도의 이적 기사를 보고서 얼마나 자주 군중들이 하나님을 찬양했는가?(막2:12,마15:31,눅7:16,4:15). 그리고 성령에 충만한 사도들의 행적을 보고서 찬송했던 이들(행4:21,13:48) 가운데도 참된 구원의 은혜를 받지 않은 자들이 많았다. 홍해의 기적을 체험하고 찬송을 불렀으나 배역의 죄를 거듭 지었던 이스라엘 백성이나 에스겔 선지자 시대의 유대인들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에드워즈는 소망과 위로 가운데 무가치한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자비하심 때문에 감화되어 이 값없는 은혜를 크게 높이며 찬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은혜로운 감정이 있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표지는 아니다고 주장한다. 여전히 교만하고 하나님께 적개심이 있는 자들도 그들이 하나님께 특별한 친절을 받았다고 생각할 때에는 자신들의 무가치함을 외치고 그들에게 값없이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높이는 경우가 성경에는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울(삼상24:16-19,26:21), 느부갓네살, 다리오(단3:28-30,4:1-3,34-35,6:25-27)등의 경우이다.
11. 자신의 구원 확신(252-270)
- 어떤 감정이 생긴 사람들 스스로 자신들의 체험이 신령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영적으로 건전한 상태에 있다고 크게 확신한다는 사실은 그 감정이 바른 것인지 또는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표지가 될 수 없다(It is no sign that affections are right, or that they are wrong, that they make persons that have them exceeding confident).
1. 성도는 참된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성경적이다.
에드워즈 당시의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가 좋은 상태라고 확신하는 듯하며 의심도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으면 그들이 망상에 사로잡힌 것(deluded)라고 주장하였다(대표적으로 로마 가톨릭). 그러나 이런 견해에 에드워즈는 강력하게 반대한다. 가장 탁월한 작가들이 주장해 온 개혁교회의 교리와 가장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성도들 또는 성경에서 특별하게 취급되는 성도들에게 확신이 있었다는 것은 보편적 일이었음이 분명하다"고 올바르게 주장한다(252). 욥(욥19:25-7),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이요, 분깃, 유업, 반석, 확신, 방패, 구원, 높은 망대라고 노래한 다윗(시18:1ff), 히스기야(왕하20:3)등 수많은 예들을 들 수 있다. 가장 유력한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별설교(요14-16장)와 대제사장적 기도이다(요17장). 예수님은 종종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용어로 그들을 향한 자신의 특별하고 영원한 사랑을 선언한다. 예수님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담대함과 평안을 약속하셨다(요16:31). 요17장의 기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충분하고 풍성하게 공급하시기 때문에 성도들이 미래에 누릴 영광을 온전히 확신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계획과 일치하며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 안에서 세우시는 질서와 배치에 합치한다는 것이다(254).
사도 바울 역시 모든 서신에서 자신의 주님이시자 왕이시며 구속주이신 그리스도와 자신은 특별한 관계라는 것을 언제나 확실하게 말하고 자신이 장차 받을 보상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자신 있게 말한다(갈2:20,빌1:21,딤후1:12,4:7-8). 우리는 이상의 성경적 증거를 통하여 은혜의 본질과 그 언약에 관련된 것들을 정하시고 세우신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은 하나님이 이 땅에 사는 성도들에게 풍성하게 공급하셔서 그들이 영생을 확실하게 소망하도록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 은혜 언약으로 만사가 준비되고 구비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모든 것은 확실하다. 그 언약은 모든 면에서 규모있게 준비되었고 확실하게 인쳐졌다. 그 은혜 언약으로 맺은 약속들은 자주 반복되었으며 가장 완전하고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그 약속들에는 많은 증거와 보증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들을 맹세로써 분명히 하셨다. 이 모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은 약속의 상속자들이 의심없이 소망하고 온전히 기뻐하면서 그들이 장차 누릴 영광을 확신하도록 하는 것이다(254-5/히6:17-18).
더욱이 확신은 어떤 비상한 경우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라는 권면을 받고, 또한 그들이 어떻게 그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말씀을 듣게 된다(벧후1:5-8). 그리고 그리스도가 신자 안에 계신지 아닌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신자에게 너무 어울리지 않는 일이며, 그들이 비난받을 이유가 된다고 성경은 말한다(고후13:5).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준비하신 상급을 확신하지 않고 신앙 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책망받아야 할 만큼 나태하다는 증거라고 성경은 암시한다(고전9:26). 고전2:12,요일2:3,5; 3:14,19,24; 4:13; 5:2,19등도 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구원을
12. 열두 번째 소극적 증거: 타인에 의한 구원의 확신
- 사람들이 밖으로 표현한 감정이 참된 성도들의 마음에 들고 호응을 얻을 만큼 크게 감화력이 있고 기쁨을 준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신앙감정의 본질이 어떠한지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Nothing can be certainly concluded concerning the nature of religious affections, that the relation persons give of them, are very affecting and pleasing to the truly godly).
참된 성도들에게는 누가 참되게 믿는 자들이고 누가 아닌지를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는 영이 없다. 스토다드의 말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회심한지는 알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회심한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다른 사람의 마음속을 알 수 없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역사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느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며, 단지 외적인 표현과 겉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불확실하며 속기 쉬운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한다(삼상16:7,사11:3)(271).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사람들의 사랑을 얻고,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아주 아름답고 밝아 보일 때에는, 제일 수준 높은 사람들도 속을 수 있다. 확실하게 신앙을 고백하여 탁월한 성도라고 인정받던 사람들이 신앙에서 떨어져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흔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272). 한 때는 그들도 그리스도인의 확신이 최고로 고양된 상태와 매우 비슷한 확신을 가지기 조차한 사람들이다. 에드워즈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성령의 일반적 사역이 사단의 속임수와 사람의 사악하고 기만적인 심령과 섞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외적인 표현들과 모습에서 위선자와 참된 성도가 얼마나 비슷한지, 양과 염소를 잘 구별해 낼 수 있는 것은 심령을 온전히 감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특권이다(274).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많은 개연적인 신앙의 모습을 발견할 때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형제로서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이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272,278-9). 그리고 에드워즈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신실함을 판단하는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원리, 즉 나무를 그 열매로 알리라는 원리만큼 명백한 원리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한다(276,281f). “하나님이 성령을 부으시는 때에 신앙을 고백하던 사람들을 봄에 꽃들에 비유할 수 있다. 나무에는 수많은 꽃들이 피어 있고, 그들은 모두 아름답고 탐스러운 과실을 맺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 중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잠시 있다가 시들어서 떨어져 나무 밑에서 썩을 꽃들도 대부분은 잠시 동안 다른 것들과 같이 아름답고 화려하게 보인다. 그 뿐 아니라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향기로운 냄새를 낸다. 그래서 안에 숨겨진 힘 때문에 얼마 후에 과실이 되고, 속이 튼튼하고 강해서 뜨거운 여름 태양으로 익은 열매가 될 꽃들과 말라서 비틀어질 꽃들을 우리 눈으로는 구별할 수가 없다. 우리는 꽃의 아름다운 색깔이나 향기가 아니라. 나중에 나오는 익은 열매로 판단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회심자들(스스로의 고백에 따라)이 믿음을 이야기할 때, 그들은 아름다워 보이고 매우 향기나 보일 수 있으며, 성도들은 그들이 감동적으로 이야기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성도들은 그 새로운 회심자들의 이야기를 즐길 수 있고, 그 이야기 속에서 신적인 향기와 맛을 느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끝나버릴 수도 있다”(275-6).
에드워즈 당시에 어떤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으로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에드워즈가 보기에 이런 주장은 이성이나 성경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반성경적이고 성경의 말씀들과 정반대가 되는 것이다. 오직 우리에게 주어진 원리는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열매들로 판단하라고 하는 것 밖에 없다. 결정적인 판단을 내리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고전4:3-5). 그렇지 아니하고 자신의 분별력을 너무 자신만만하게 믿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아주 대답하고 성급하게 순간적으로 판단해 버리는 사람들은 참된 믿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위선자들일 뿐이다(롬2:1-20).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그들의 생각은 얼마나 교만한 것인지 모른다.
제3부 진정으로 은혜로운 거룩한 감정을 뚜렷이 구별해 주는 표지들
1. 앞으로 살펴보게 될 12가지 표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참된 감정과 거짓된 감정을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게 하기에 충분한 표지들을 제시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서 에드워즈는 이웃 가운데 누가 참된 신앙 고백자이며, 누가 위선자인지를 결정하기에 충분한 표지들을 제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성경에 의하면 양과 염소를 완전하고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은 우리들의 특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취하시는 특권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이웃 가운데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를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만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안전에 필요한 차원에서, 그들이 거짓된 교사들과 거짓된 위선자들의 함정에 빠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그들이 신앙고백자자들을 판단할 수 있게 하는 원리들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것이 분명하고, 또한 자기에게 맡겨진 영혼들의 영적 상태와 영원한 상태에 대해 상담하거나 지도하는 목회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원리들이 성경에 가득하다는 것 역시 확실하다.
2. 에드워즈는 자신이 제시하는 기준들이 불신자는 아니지만 은혜로운 상태에 있지 않는 사람들, 즉 영적으로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미리 밝힌다. “은혜의 역사를 매우 낮은 수준에서 경험하거나, 하나님에게서 크게 벗어나서, 생명력이 없는, 육신에 속한, 비그리스도인적인 삶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자신들이 건전한 상태에 있음을 확실하게 인식시켜 줄 수 있는 표지들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286). 그런 사람들은 먼저 그들이 빠져있는 병적인 삶에서 빠져 나오는 것 외에는,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길을 예비하지 않으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기준들 자체는 확실하고 오류가 없지만, 표지들을 사용하는 이들의 이중적 결함 때문에 은혜의 역사를 매우 낮은 수준에서 경험하거나 육신적인 삶에 빠져있는 성도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1) 은혜가 너무 저조하게 역사하기 때문에 은혜를 확실하게 인식하거나 구별할 수가 없다. 즉 그들이 경험하는 은혜가 너무 많은 부패함과 섞여있기 때문에, 그 부패함이 은혜를 흐리게 하고 가려서 그 은혜를 확실하게 인식할 수 없게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적인 삶에 빠져 있을 때에는, 양심에 죄책의 안개가 끼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고 소망을 확신할 때 오는 평강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2) 그들에게 은혜가 적게 임하고 심하게 부패하면 시력이 약해져서 그 대상이 희미하게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부패한 육신적 삶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육신적인 감각은 너무 약해져 있기 때문에 영적인 일들을 판단하고 구별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표지들을 아무리 적절하고 오류가 없고 분명하게 설명해준다고 해도, 그것은 빛이 없는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에게 보이는 사물들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과 같을 뿐이다.
그들이 먼저 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삶 속에서 저주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 속에 있는 아간과 같은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하나님의 계획은 자신의 부패성을 죽이고, 은혜의 역사가 더 강해져서 은혜를 생생하게 맛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확신을 얻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자기 성찰에 의해서 보다는 바울이나(고전9:26,빌3:10이하) 베드로 사도가(벧후1:5-11)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방법에 의해서 확신을 추구하도록 권장된다.
3. 에드워즈는 자신이 제시하는 표지들이 구제불능의 위선자들, 즉 자기들이 가장 지혜롭다고 크게 자만하고, 자신들이 의롭다는 믿음으로 너무나 맹목적이 되고, 마음이 강퍅해져 있으며, 스스로를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일을 너무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위선자들은 어떠한 수단을 쓰더라도 죄를 깨닫게 되거나 회개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드워즈가 생각하기에 적절한 원리들을 제시하는 것은 이런 위선자들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많은 위선자들을 깨우치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약간 낙관적으로 말한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도 깨우칠 수 있다는 점을 전면 부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기준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은 참된 성도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섞여있는 참된 감정과 거짓된 감정을 구별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으며, 믿음이 더욱 순수해지고, 불 속에서 단련된 금과 같이 만드는 수단으로 표지들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자신이 “다른 수단들이 없이도 그 자체로 충분하여 모든 참된 성도들이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수단으로서 또는 성도들을 만족시키려는 주된 수단으로서 그런 원리들을 제시하는 척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290).
1. 첫 번째 적극적 표지: 성령의 내주(292-345)
-참으로 영적이고 은혜로운 감정은 영적인, 초자연적인, 신적인 영향과 작용들이 그들 마음에 역사할 때 생겨나게 된다(Affections that are truly spiritual and gracious, do arise from those influences and operations on the heart, which are spiritual, supernatural and divine).
에드워즈는 은혜롭고 신령한 감정의 원천이 인간의 마음에 가해진 영적, 초자연적, 신적인 영향과 작용, 즉 성령의 영향이야말로 은혜로운 신앙 감정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1. 영적인, 신적인 그리고 초자연적인(292-302)
참된 성도들 또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룩해진 사람을 영적인 사람들이라고 신약은 부른다. 이들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과 정반대되는 존재이다(고전2:14-15). 불신자는 육신에 속한 자이고 성령은 없는 자이다(유19).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은 둘 다 영혼에 그 좌소를 가지고 있다. 즉 영적이라는 형용사는 사람의 영적인 부분이 물질적인 부분인 사람의 몸과 상반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사람의 영이나 혼과 맺는 관계를 나타내려고 쓰는 말이 아니다. 신약에서 영적이라고 말할 때에는 성령이나 하나님의 영에 관련될 때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그들이 성령으로 거듭나며,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이 내주하셔서 거룩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294).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과 관련된 사물들 역시 영적이라고 불리운다(고전2:13,14,롬8:6,9). 바울이 말하는 영의 생각이란 마음속에 성령의 임재와 거룩한 영향을 가진 것을 뜻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사람이 영적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성령의 은사가 있기 때문이 아니고, 성령의 미덕이 있기 때문이다(갈6:1-신령한 너희=온유한 심령). 진정으로 은혜로 말미암고 거룩하며 성도들에게 독특하게 주어지는 그런 자질들을 신약 성경에서는 영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에드워즈는 육에 속한 사람도 하나님의 영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성경적인 의미로 영적인 사람인 것은 아니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미친 하나님의 영의 영향에서 비롯된 효과들, 일반적인 은사들, 자질이나 감정 또한 영적인 것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에드워즈는 양자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
1) 영적인 사람 즉 참된 성도 가운데는 성령님이 내주하시며, 새로운 본성의 원리로서 또는 생명과 행위의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원천으로서 성도들의 심령에 영향을 미친다. 성경은 성령을 움직이시며, 때로는 성도들에게 영향을 주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성전이며, 처소이며, 영구적인 거주지인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고전3:16,고후6:16,요14:16-17). 성도 가운데는 그리스도가 거하신다고도 표현한다(갈2:20). 성도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영이 성도 안에 있는 생명의 원리로서 성도와 연합하기 때문이다. 성도는 생명수를 마실 뿐 아니라, 이 생명수가 그들의 영혼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요4:14). 이 생명수가 바로 성령이시다(요7:38-9). 하나님의 영은 이처럼 성도들에게 전달되고 그들과 연합하게 되며, 성도들은 성령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게 되어 영적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성령의 일반적인 영향을 입을수는 있지만, 성령이 내주하지 않기 때문에 육적이라, 성령이 없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2) 참된 성도들과 그들에게 있는 미덕을 영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성도들의 영혼 속에 생명의 원리로서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자신의 고유한 본성으로서 역사하시고 자신을 전달함으로써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성령의 고유한 본성은 거룩함이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하나님의 영은 성도의 마음 속에 내주하시며, 거기에서 생명의 씨 또는 원천으로서 일하시고 자신을 전달하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의 달콤하고, 신적인 본성을 통해 영혼을 하나님의 거룩한 아름다우심과 그리스도의 기쁨에 참예하는 자로 만드시고, 그 성도가 성령과 교통하며 성령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참된 교제를 누리게 하신다. 성도들의 심령 속에 있는 은혜는 그 정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것보다는 무한히 적지만, 그 성질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같은 것이다”(298).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한다. 즉 성도들의 심령 속에 잉태되는 은혜는 그 성령의 본성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영적인 본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이런 방식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마음에는 역사하지 않으신다. 창1:2에서처럼 성령은 당신에 본성에 맞게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역사하시면서도, 그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과 작용에는 당신의 고유한 본성을 전달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성령은 성도 안에 내주하심으로써 영원히 그 안에서 역사하시지만, 죄인에게는 그런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신다. 뿐만 아니라 영향과 역사 자체도 다르며 생기는 효과도 크게 다르다. 성도는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아 “신의 성품에 참예 하는 자”가 된다(벧후1:4). 성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하고(히12:10),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하며(요17:26), 그의 기쁨을 충만히 가지며(요17:13), 하나님의 광명 중에 광명을 보며, 하나님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게 되며(시36:8-9), 하나님과 사귐이 있고 교통을 하게 된다(요일1:3). 성도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데(엡3:17-19,요1:16), 이는 神化(deification)의 뜻이 아니고 피조물의 능력과 한계를 따라 하나님의 영적인 아름다움과 복되심에 참예하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성도들의 심령 속에 있는 은혜는 하나님의 가장 영광스러운 사역이며, 그 은혜로 하나님은 당신의 본성에 있는 선하심을 전달하신다. 하나님의 영의 영향은 하나님께 특유한 것이며, 그 영향들을 통해 아주 고상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전달하시고, 피조물을 하나님의 본성에 참예하는 자로 만드신다. 이것이 에드워즈가 신적인(Divine) 영향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이다(300).
한편 성도들이 받는 그런 은혜로운 영향들과 그들이 체험하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들은 완전히 자연을 초월해 있으며, 사람들 안에 있는 자연적인 본성이나 자연적인 원리와는 전혀 질적으로 다른 것이 분명하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연적인 것과 다르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그 정도와 상황을 전혀 경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본질과 종류도 다르며 훨씬 더 탁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에드워즈가 참으로 은혜로운 감정은 초자연적(super- natural)인 영향 때문이라고 할 때 초자연적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이다(302).
2. 새로운 영적 감각, 본성적인 새 원리(302-309)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는 구원 사역을 통해 성도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역사와 은혜로운 감정 속에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 내적인 지각이나 감각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한 능력으로 정도나 정황만이 아니라 그 전체적인 성질에서 새로운 어떤 것을 창출하신다.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것을 영혼이 의식하게 된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마음에 전적으로 새로운 지각이나 감각이 생겼기 때문이다. 참 성도들은 새로운 영적 감각 또는 새로운 영적 지각과 감각의 원리가 그들의 마음에 생겨남으로서 영적이고 신령한 것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은 성경에서 종종 새로운 감각을 주는 것과 볼 수 있는 눈을 주는 것과 들을 수 있는 귀를 주는 것과 귀머거리의 귀를 낫게 하는 것과 나면서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는 것과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비유된다. 또한 사람의 영혼에 이 새로운 감각을 주는 것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것과 새로운 창조의 역사로 비유되기도 한다(303).
에드워즈는 이 새로운 영적 감각과 동반되는 새로운 성향들은 새로운 감각 기능(new faculties)이 아니라 본성적인 새 원리라고 부른다(This new spiritual sense, and the new dispositions that attend it, are no new faculties, but are new principles of nature). 그가 본성의 원리라고 할 때 의미하는 바는 “어떤 특별한 방식이나 종류에 따라 영혼의 감각 기능들이 작용할 수 있게 해주는, 본성 안에 있는 토대를 말한다. 또는 사람의 감각 기능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이나 성향을 사람에게 주는 본성의 습성(habit) 또는 행동을 위한 토대를 말한다. 그래서 사람의 감각기관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그 사람의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304). 따라서 에드워즈에 의하면 이 새로운 영적 감각은 지성에 속한 새로운 감각 기능이 아니라, 지성이라는 같은 기능이 새로운 작용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영혼의 본성 안에 있는 새로운 기초이며, 이 새로운 감각에 동반되는 마음의 새롭고 거룩한 성향은 새로운 의지 기능이 아니라, 의지라는 같은 기능이 새로운ㄴ 작용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영혼의 본성 안에 있는 새로운 토대이다.
에드워즈는 성령께서 비중생자의 자연적인 본성의 원리에 역사하시고 그 원리를 도우시며 움직이게 하시는 많은 방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에드워즈는 발람, 브살렐과 오홀리압, 칠십장로등의 예에 주목한다), 결국 이것들은 본성이 움직여지고, 작용을 받고, 향상되는 것일 뿐이라고 평가한다. 여기에는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이 당신의 성도들의 마음에 영적인 영향을 주실 때에는 새롭고, 신령하며, 초자연적인 원리들을 주시거나 작동하게 하셔서 역사하신다. 이 원리들은 본질상 새롭고 영적이며,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있는 모든 것들 보다 훨씬 더 고상하고 탁월하다. 모든 영적이고 은혜로운 감정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 안에 있거나 있을 수 잇는 모든 것과 본질상 전혀 다른 어떤 이해나 관념이 마음의 감각에 생기는 것이며, 그것들을 동반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두 가지의 보충을 가한다.
1) 영적인 감정에 속하는 모든 것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생각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것과 비교해서 모든 면에서 완전히 새롭고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다. 예컨대 중생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비중생자의 친구에 대한 본성적인 사랑 간에는 유사점들이 있다. 그러나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에게 색깔에 대한 개념이 없듯이, 영적인 감정에는 비중생자가 알수 없는 핵심이나 진수가 들어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다만 영적인 사람에게도 신령하고 가장 독특한 탁월함을 인식하는 영적 감각이나 미각이 처음에는 아주 작고 매우 불완전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2) 비중생자들도 본성의 특이한 작용에 의해서 이전에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신앙적인 깨달음과 감정이 생겨날 수 있다. 그것은 본성적인 원리들이 아주 새롭고 특이하게 움직이고 수 많은 새로운 정황들이 발생하고 본성적인 감정이 새롭게 결함 됨으로써 그리고 관념들이 새롭게 조합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지 새로운 감각이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탄의 강력한 영향력에서 우러나온 것일 수 있을 뿐이다.
3. 상상력에 바탕한 체험은 자연적이고 일반적이다(309-318)
자연인이 느낄 수 있는 종교적 감정의 예로 에드워즈는 인간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는 경우를 상술하면서 그것은 자연적이고 일반적인 것이지 영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신적인 것이 아니라고 논박한다. 한국 신자들 중에도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고, 그런 이들의 체험 간증에 넋을 놓고 듣는 이들이 많은데 에드워즈의 해설은 상당히 도움이 된다. 환상들이 과연 다 참된 영적 체험인가 아니면 단지 공상 내지 망상과 관련된 것인가를 구별할 수 있는 지침을 그가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영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을 철저하게 구분한다. 상상력에 새겨진 인상(an impression on the imagination)이나 상상적 관념들은 그것이 하나님, 그리스도, 혹은 천국 혹은 종교에 관련된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참된 은혜나 영적인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즉 상상력의 산물은 아무리 그 내용이 종교적이고 은혜로운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 은혜의 역사는 아니다. 또한, 그것은 자연적 차원의 것이지 영적 차원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상상이나 상상력에 새겨진 인상을 은혜의 체험으로 오인하는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먼저 어떤 형체에 대한 생생한 관념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아름다운 형체의 얼굴을 보면,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말한다. 또 위대한 외적 빛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면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그의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장면이 머리 속에 떠오르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영적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의 피에 의한 구원의 길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관념은 에드워즈에 의하면 십자가의 주위에서 그리스도를 육안으로 보았던 그의 원수 유대인들이 가졌던 관념과 그 자체로서 아무 차이가 없다. 나아가서 에드워즈는 그러한 외부 관념(external ideas)이 단순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성령의 보편적 사역(common work)의 결과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에드워즈는 다시 한 번 구원에 관련된 성령의 특별한 사역과 자연의 영역에 속한 일반적 사역을 다시 엄격히 구별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 예로 그는 발람의 경우를 인용한다. 발람은 하나님에 의해 야곱으로부터 떠오르게 될 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생하고 뚜렷한 관념이 그 마음에 새겨지는 체험을 했다(민24:16-17).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에 대한 영적인 발견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샛별이 그의 마음에 떠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315).
에드워즈는 사단이 어떤 생각과 관념들을 떠올리게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런 상상적인 관념들이나 외적 사물들에 대한 관념들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에게 있는 외부 관념들은 가장 질이 낮은 관념들이며, 이런 관념들은 단지 신체에 자극을 줌으로써 즉 본능을 움직이게 하고 뇌를 자극함으로써 일으킬 수 있는 것들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외적 관념들은 영혼의 더 지적인 작용보다는 질이 낫다고 한다. 또한 사람이 타락해서 연약해졌고 또 어떤 사람들의 체질은 특히 연약하기 때문에, 은혜로운 감정이 매우 강할 때에는 생생한 관념들이 떠오르기도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사람의 감정이 상상에 기초해 있을 때 그런 감정은 확실히 자연적이고 일반적이다.
4. 성경 말씀이 마음에 직접 떠오르는 체험에는 영적인 것이 없다(319-332)
에드워즈는 앞서 소극적 표지 5번을 논하면서 이런 체험에 대해서 논박한 적이 있다. 에드워즈는 성경 말씀을 직접적이고 특이한 방식으로 마음에 떠오르게 하는 것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토대일 때, 이 감정은 영적인 감정이 아니라고 다시 주장한다. 성경에 담겨진 신적인 일들을 새롭게 영적으로 이해하거나 성경의 그 부분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영광스러운 일들을 새롭게 영적으로 느끼는 것이 그들의 감정적 체험에 앞서거나 그 감정적 체험의 기초가 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 말씀들이 너무 갑작스럽고 특이하게 떠올랐기 때문에 그 말씀과 체험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믿는 것은 헛되고 기만적인 것이다. 이는 소리나 문자를 마음에 떠오르게 하는 것은 상상 속에 있는 관념들을 자극하는 방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발람에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성령이 어떤 글자들이나 소리들을 마음에 떠오르게 하시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은혜로운 영향이 아니라 일반적인 역사이다.
만일 어떤 구도자나 교인의 마음 속에 어떤 위로가 되는 달콤한 약속의 말씀이 갑자기 그리고 경이롭게 마음에 떠오른다면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고 자기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신 틀림없는 증거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왜 구원의 약속에 관한 은혜로운 말씀이 그처럼 갑자기 놀라운 방식으로 자기 마음에 떠올랐겠는가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시겠다는 의도를 표현한 것이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이러한 경험을 자기들 신앙과 소망과 위로의 근거로 삼는 것은 구원에 대한 잘못된 확신의 방법이라고 비판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신앙의 근거가 단지 그러한 성경의 약속들이 자기들 마음에 떠오른 방법에 있기 때문이다. 구원에 관한 성구가 갑자기 그리고 경이롭게 마음에 떠올랐다는 것은 참된 믿음의 기초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인간 기억의 한 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사람이 먼저 믿기 전에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는 법은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방법은 그들이 믿기 전이 아니라 믿은 후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들에 대한 그들의 분깃을 계시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믿음이 없는 자에게 성령께서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법은 없다. 즉 아직 믿지 않아서 아무런 은총이나 그리스도 안의 분깃을 갖지 못한 불신자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이 은혜의 약속에 참여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성경 구절을 제시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특정인에 대해서 사죄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선언하는 구절은 성경에 없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믿음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복음의 축복에 초청받았다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확실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그 정도의 자격을 가진 자들도 초대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신 분은 진실하여 거짓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첫째, 하나님이 진실하심에 대한 확신이 생기고, 둘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이 확신되며, 셋째, 성경은 와서 복음의 은택에 참여하라는 죄인들을 향한 초청으로 가득하므로 자기도 초대되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그에게 새로이 말씀하시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에드워즈는 단언한다(325).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그 복음의 초청을 믿을 수 있게 되는가? 믿음을 인간의 능력으로 일으킬 수는 없다면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약속을 어떻게 믿고 적용할 수 있는가? 에드워즈는 성령의 영적 조명(spiritual enlightenment)과 영향에 의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에 적용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복음의 초청, 혹은 제시를 영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제공된 거룩하고 신적인 축복들, 그처럼 은혜로운 제공을 베푼 제공자의 달콤하고 경이로운 은혜 및 자기가 제안하는 것을 성취하시는 그의 거룩한 탁월성과 신실함 그리고 그것을 위한 그의 영광스러운 충족성에 대한 영적 감각 혹은 미각을 인간에게 줌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인도하고 이끌어 그 제안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리하여 제공된 것에 대한 그의 소유권의 증거를 그에게 주는 것이다(327-8).
5. 성령의 증거(332-345)
구원의 확신 문제와 관련해서 에드워즈는 성령의 증거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해명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6). 먼저 그는 그것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를 지적한다. 소위 성령의 증거라는 것은 자주 어떤 이가 회심되었다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직접적 암시내지 인상으로 오해한다. 너는 나의 자녀야라고 모종의 은밀한 음성이나 인상으로 하나님이 내면에 말씀하시는 것이 성령의 증거라고 종종 혼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에 의하면 그것은 마음에 증거를 주시는 성령의 어떤 영향이나 역사로서 사람들은 그것으로부터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주장할 수 있다. 그는 성령의 증거와 성령의 인침을 같은 것으로 본다. 성령의 인은 성령의 어떤 역사 혹은 영향인데, 그것은 영혼위에 신적인 표로 남아 하나님의 자녀들을 식별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그것은 영혼속에 있는 은혜 자체로서 누군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최고의 증거라고 그는 말한다. 결국 성령의 증거 혹은 인은 어떤이가 구원받았다는 직접적인 암시나 계시가 아니라, 성령의 거룩한 도장 혹은 인상지워진 이미지로서 양심에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성령의 인은 또한 성령의 보증(earnest)과도 같은 개념이라고 에드워즈는 생각한다. 성령의 보증 혹은 인은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교통과 영향이다. 그것은 성령이 양자의 영으로 혹은 자녀의 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에게 하듯 처신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있다는 증거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 내지 양자의 영이 주입되어 퍼뜨려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는 하나님에 대한 어린아이 같고 복음적이며 겸손한 사랑이다. 그러나 분리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성령의 증거가 한 번으로 영원히 확정되는 체험은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경계한다. 비록 그것이 영화로운 것이기는 하나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성령의 돌보심들 중 일부이다. 분리주의자들은 성령의 일반적이고 계속적인 사역을 폄하하는 식으로 성령의 증거의 직접성을 주장하면서 성령의 증거를 마음과 삶에서 나타나는 은혜의 증거로부터 분리시켰다. 이 점에서 반율법주의자들은 신약의 주된 강조점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
2. 두 번째 적극적 표지 :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인식(346-364)
- 은혜로운 감정이 생기는 객관적인 근거가 신적인 일들이 가장 탁월하며 그 자체로 사랑스럽다는 데 있어야지, 그 이들이 자기 이익과 관련되었다는 데 있어는 안 된다(The first objective ground of gracious affections, is the transcendently excellent and amiable nature of divine things as they are themselves; and not any conceived relation they bear to self, or self-interest).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행하신 사역들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탁월한 본질(the supremely excellent nature of divine things)은 참된 성도에게 있는 영적인 감정에서 제일 중요하고 근본적인 객관적인 기초가 된다고 주장한다. 즉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탁월성과 영광 때문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역 그리고 하나님의 길 등을 사랑해야지, 자신들이 얻게 될 가상적인 이득이나, 받은 또는 받을 혜택이나 자신의 이익에 관련되었기 때문에 사랑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만일 자기 이익 때문이라면, 자아 사랑이 이런 것들을 사랑하는 제일의 기초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346).
에드워즈는 모든 사랑은 자아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거나 하나님을 향유하기를 갈망하는 것은 누구나 자신의 행복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하여 반론을 편다. 사람은 하나님의 이익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향유하는 것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기 전에, 먼저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그리고 그의 마음이 하나님과 연합되어야 한다고 에드워즈는 반박한다. 사람이 사랑으로 하나님과 연합한 결과로서 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향유하는 것을 자신의 행복으로 갈망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마음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연합된 후에 하나님을 자기의 최고선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으로 여기게 되었다면, 심지어 자아 사랑이나 자신의 행복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향유하게 되었다는 것조차도 그 사랑의 결과요 열매다(348)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자아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면 그 사랑은 참으로 은혜로운 영적인 사랑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 사랑은 전적으로 자연적인 원리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천사에게도 있지만 마귀에게도 있으며 악인들에게도 있기 때문이다(눅6:32). 자아 사랑의 열매는 결코 초자연적이거나 신적인 것이 될 수 없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사실 마귀 자신도 너무나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나머지 단지 받을 수 있는 혜택만을 위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눈에 무가치한 것임을 잘 알았다(욥1:9,10-“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가장 주된 기초는 하나님 본성이 지고하게 사랑스럽다는 사실, 즉 하나님 자신이 사랑스러운 분이시고, 사랑 받으실 가치가 있으신 분 이시라는 것을 생각지 않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하나님을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의 주된 근거는 하나님의 탁월하심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본성 즉 신성은 무한히 탁월하시다. 진정 하나님의 탁월성은 무한한 아름다움과 밝음과 영광 그 자체이다. 하나님 본성 자체가 가진 이 무한한 탁월성이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의 참된 기초이다. 하나님 본성안에 있는 무한한 영광은 원초적인 선이며, 모든 선의 참된 원천이고, 모든 사랑스러움의 근원이고 모든 참된 사랑의 근본이다(350).
그러나 하나님의 본성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전혀 보지 못한 채 자아 사랑이라는 자연적인 원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원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에드워즈는 잘 알고 있다. 자연적인 본성으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하듯이 사람들은 하나님께도 그와 같은 감정을 가질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다. 자아 사랑과 하나님께 받는 눈에 보이는 큰 은혜 때문에 하나님께 감정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나아만, 느부갓네살, 홍해가의 이스라엘 백성들). 이기적이고 교만한 사람은 자신에게 큰 이익을 끼치며, 자신의 야망을 만족시키는 것을 자연스럽게 좋은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충동적인 생각과 자신들의 상상력에 직접 떠오르는 외적 표상들이 있을 때 하나님과 교통이 이루어진다는 잘못된 생각을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호의를 보이시며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생각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근본적인 이유일 때 하나님을 향한 매우 고조된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에드워즈의 판단에 따르면 자만과 교만일 뿐이다.
그러면 성도들 속에 있는 참되고 거룩한 사랑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먼저 알고 나서, 하나님의 사랑스러우심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영광스러움을 먼저 보고, 그들의 마음이 먼저 이런 생각으로 사로 잡히게 된다. 그들의 사랑은 여기에서 시작해서 그 이후로도 이런 생각들이 주를 이루게 된다. 나중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사랑과 큰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도의 감정은 하나님과 함께 시작된다. 이런 감정 속에 자아 사랑은 결과적이고 간접적으로만 연관된다. . .참된 성도가 갖는 사랑의 가장 근본적인 기초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본성의 탁월함에 대한 사랑이 모든 감정들의 원천이다. 그곳에서 자아 사랑은 시녀와 같다”(354-5).
또한 본성적인 감사와 달리 은혜로운 감사가 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성도들은 1)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는 기초 위에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감사하고 고마워한다고 한다.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압도되고 하나님께 매료되어 숭고한 사랑이 생겼기 때문에, 성도의 마음은 온유해져서 하나님께 받은 친절에 쉽게 감화받는다고 말한다. 2) 은혜로운 태도를 지니면 사람들은 자기 이익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속성과 대가없는 은혜에 감동받는다고 한다.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감사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속성과 영광스러움을 보게 되며, 그로 인해 기뻐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감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동되어 나오는 것이며, 그 기초는 이미 마음 속에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지, 어떤 이득이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에드워즈는 우리를 위해 행하시고 직접 우리의 눈앞에 보여 주시는 그 사랑스러운 속성이 드러나는 때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특별한 계기가 될 수 있으며, 그 주의를 고정시키고, 감사의 느낌을 고양시킨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정한다(356-7).
사도 요한에 의하면(요일4:9-11,19) 택한 백성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택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근거가 된다. 1)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사랑하신 열매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사랑은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사랑하시는 것은 성도가 중생하고 구속 받는 기초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당신의 놀라운 사랑을 발휘하시고,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당신의 도덕적 완전성의 영광을 나타내신 중요한 사건이다. 이것은 천사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요한 객관적 근거가 된다. 3) 특별히 선택하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람이 회심할 때 드러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과 영광을 그에게 나타내시는 것이다(358).
성도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성도의 기쁨과 영적인 즐거움과 희열도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 자체가 탁월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이 성도에게 가져다 줄 어떤 유익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오히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거룩한 아름다움을 보게 되거나 묵상할 때 성도의 마음속에 달콤한 즐거움이 생기는 것이다. 참된 성도의 마음은 우선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 가운데서 볼 수 있는 영광스럽고 사랑할 만한 하나님의 성품이 너무 달콤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가진 모든 기쁨의 원천이며, 성도가 가진 모든 즐거움의 정수이다. 참된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는 기쁨은 주로 하나님이 완전하신 분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참된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기쁨은 주로 그리스도가 아름다우신 분 이시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 가운데 최고로 보이게 되며, 완전히 사랑스러워 보이게 된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은 그 안에서 드러나는 달콤하고 감탄할 만한 하나님의 완전성 때문에 성도에게는 즐거움을 주는 길이다. 성도는 먼저 스스로 영광스럽고 탁월하신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그 후에 부차적으로 그렇게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즐거워한다. 먼저 성도는 그리스도와 그의 은총의 탁월함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아름다운 구원의 길을 볼 때 그 마음이 달콤함으로 가득 차게 되며, 그 이후에 그렇게 탁월한 구세주와 그렇게 탁월한 은혜가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한다(359-360).
에드워즈의 위선자들(hypocrites)에 대한 비판은 아주 신랄하고 예리하다. 위선자들은 그리스도, 그의 아름다움 및 충만함을 자기들의 체험으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는 대신 자신들의 놀라운 체험을 기뻐하며 자기 체험에 매혹되어 그것을 찬미한다. 그들이 사로 잡힌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기들 체험의 아름다움이다. 그들은 발견된 그리스도보다 그들의 발견들에서 더 큰 위로를 얻으며, 체험을 먹고 산다(living upon experiences). 참된 성도들이 주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완전성, 사역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 복음의 영광스러운 일들에 대해 많이 말을 하는 반면에, 위선자들은 자기들 자신에 대해 아주 많은 말을 한다. 발견된 사실 보다 발견에 대해, 자기들이 체험한 위대한 일들에 대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이 얼마나 확신하는지에 대해, 그들의 상태가 얼마나 확신하는지에 대해, 그들의 상태가 얼마나 안전한지, 그리고 자기들이 천국에 가리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지에 대해서 주로 떠벌리며 말한다. 그리고 많은 위선자들은 자신들이 탁월한 성도라는 가정 위에서 고조된 감정을 체험하곤 한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자신들이 열등한 성도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들의 고조된 감정은 급격히 식어버린다. 위선자들의 사랑과 기쁨은 모두 자아 사랑이라는 원천에서 나오듯이 그들이 느끼는 죄에 대한 슬픔, 겸비와 복종, 신앙적 갈망과 열심 같은 다른 감정들도 자아 사랑에서 나온다(361-4).
그러나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달콤한 영광을 참되게 발견하고 즐거워하는 참된 성도는 자신이 보는 바 하나님의 영광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업적을 바라볼 여유가 없다. 그가 묵상하는 황홀한 대상에서 눈을 들려 자신의 체험을 살피고, 그 체험이 아주 큰 업적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해 줄 좋은 이야기가 생겼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태만이요 실패다. 그리고 그가 체험하는 즐거움과 기쁨 또한 자신의 안전한 영적 상태나 자신의 특별한 자질, 체험, 정황을 생각하는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바라보는 대상의 지고한 신적 아름다움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지극히 즐겁게 하며 강력하게 사로잡는다(363). 그리고 참된 성도가 가지는 은혜로운 감정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삼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과 자신들의 결함과 체험이 천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그 사실이 그들의 감정을 순화시킬지언정 그들의 감정을 파산나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기에 대한 바른 인식은 감정들을 더 향기롭게 하며 더 고결하게 한다(364).
3. 세 번째 적극적 표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한 인식(365-381)
- 참으로 거룩한 감정들은 신적인 일들에서 드러나는 도덕적 탁월성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다. 달리 표현하면, 신적인 일들에서 드러나는 도덕적 탁월성이 아름답고, 향기롭기 때문에 신적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거룩한 감정들의 시작이며 원천이다(Those affections that are truly holy, are primarily founded on the loveliness of the moral excellency of divine things. Or a love to divine things for the beauty and sweetness of their moral excellency is the first beginning and spring of all holy affections).
양낙흥 교수에 의하면 이 세 번째 사항도 표지라기보다는 거룩한 신앙 감정의 근거의 관한 내용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거룩한 신앙감정이 우러나오는 세 번째 근거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1) 하나님의 일들-복음 혹은 구원의 역사, 혹은 하나님의 계시-이 있어야 한다. 2) 그것들의 도덕적 탁월성이다. 3) 그 도덕적 탁월성이 가진 사랑스러움, 혹은 아름다움과 달콤함이다. 물론 그러한 것들을 감지하는 능력은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는 영적 감각이 있어야 한다.
1. 도덕적 탁월성은 곧 거룩이다.
에드워즈는 독자를 위해서 신적인 일들이 도덕적으로 탁월하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해명해 나간다. 에드워즈는 도덕적(moral)이라는 말을 일반적이고 통속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도덕적이라고 할 때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에서 말하는 외적인 의무들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고, 혹은 이교도들에게 있어서는 정직, 정의, 관대함, 선한 본성, 공중 도덕을 뜻한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이와 같은 통속적인 의미를 거부한다(365). 에드워즈는 신학자들이 도덕적인 선과 본성적 선을 구별한 것을 수용한다. 도덕적 선(moral good)이란 죄를 거스르는 것 또는 의지가 있고 선택권을 받은 자들 안에 있는 선을 뜻한다. 그들은 의지적 행위자로서 존재하고 행한다. 그리고 도덕적 선은 그들의 존재와 행위에 어울리거나, 가장 적절하며, 적합하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반면에 본성적인 선(natural good)이란 거룩함이나 미덕과 전혀 다른 종류의 선을 뜻하는데, 즉 옳고 그름에 대한 규범이나 척도와 무관하고 거룩하거나 그렇지 못한 자질들과 관계없는 본성 자체로서 본성을 완성하거나 본성에 어울리는 선을 뜻한다(366).
사람이나 천사들에게도 두 가지 종류의 선이 존재하지만, 하나님께도 두 가지 종류의 선(도덕적 완전성과 본성적 완전성)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이란 도덕적 행위자로서 하나님께서 발휘하시는 속성이나 하나님의 마음과 의지가 선하고, 의롭고, 한없이 마땅하고 사랑스러우심을 뜻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의로우심, 진실하심, 신실하심과 선하심 즉 한 마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뜻한다. 하나님의 본성적인 속성이나 완전성이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나 도덕적 선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뜻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능력, 전지하심, 영원하심, 편재하심, 그리고 장엄하고 두려운 위엄을 뜻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도덕적 탁월성은 도덕적 완전성과 같은 말이며 그것은 동시에 덕(virtue)과 동의어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거룩이다. “지성을 가진 존재의 이 도덕적 탁월성이 거룩이다. 고로 거룩은 모든 참된 도덕적 탁월성을 포함한다. . .진정한 거룩 외에 참된 덕은 없다. 거룩함은 선한 사람이 지닌 참된 모든 미덕을 포괄한다”(367).
2.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아름다우심 때문에 사랑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하나님의 본성에 있는 도덕적 탁월성과 같은 것이고, 도덕적 행위자이신 하나님께 있는 순수함 그리고 아름다우심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하나님의 모든 도덕적 완전성, 의로우심, 신실하심 그리고 선하심을 포괄한다. 하나님의 친절하심과 자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속한다. 에드워즈는 신적인 일들에서 드러나는 도덕적 탁월성 때문에 신적인 일들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거룩한 감정의 시작점이요 원천이라고 세 번째 표지 서두에서 말했다. 거룩한 사람들이 거룩한 감정들을 드러낼 때 주로 신적인 일들 안에 거룩한 속성이 있기 때문에 신적인 일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체를 좋아하고,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거룩함이나 도덕적 완전성 때문에 신적인 일들을 사랑한다. 성도가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이 시작되고, 신적인 일들에 대한 다른 모든 사랑이 여기에서 흘러나온다. 그러나 또한 성도는 하나님의 본성적 완전성(무한하신 위대하심, 능력, 지식 그리고 두려운 위엄)도 기뻐한다.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은 하나님의 본성적인 속성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서로 서로를 전제로 한다(369).
에드워즈에 따르면 모든 지성적인 존재들의 참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은 가장 본질적으로 그들의 도덕적 탁월성 또는 거룩함에서 비롯된다. 도덕적 탁월성만이 본질적으로 지성적인 존재들을 탁월하게 하며, 본성적 완전성과 특성들을 아름답게 해 준다. 도덕적 탁월성은 본성적인 탁월성들을 결정하는 탁월성이다. 거룩함이 없는 능력과 지식은-마귀에게서 볼 수 있듯이-어느 존재도 아름답게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더 혐오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능력과 지식이 거룩함과 연합되면 그것들은 더 아름다워진다. 거룩함은 특수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본성을 아름답게 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심은 당신의 모든 다른 속성들을 영광스럽고, 사랑스럽게 만든다. 하나님의 지혜가 가진 영광은 그것이 거룩한 지혜라는 점에 있지, 사악한 기교나 간교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거룩한 위엄, 거룩한 불변성...).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뻐함과 더불어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거룩함이 없이는 어떤 속성도 참으로 아름다울 수 없기 때문이다. 거룩함을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본성에 있는 어떤 완전성도 참되게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보여 주는 어떤 참된 영광도 볼 수가 없다(370).
또한 하나님의 본성의 아름다움이 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있는 것처럼, 모든 신적인 일들의 아름다움도 그렇다. 성도가 아름다운 것은 그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주 예수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도 주님의 거룩하심 때문이다. 주님의 온유하심, 겸손하심, 인내, 경건, 하나님에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 비천하고 악한 자에게 스스로를 낮추심, 비참한 자를 불쌍히 여기심 등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가진 모든 영적인 아름다움의 요체는 주님의 거룩하심이다. 주님의 신성의 아름다우심도 그 분의 거룩하심에 있다. 복음도 거룩한 복음이요, 하늘나라도 거룩한 나라이다. 따라서 성도들이 이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것은 주로 이것들의 거룩함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순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다른 성도들이나 하늘나라를 사랑한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성도들의 마음이 복음의 가르침을 기뻐하고, 복음에 계시된 구원의 길에 즐겁게 순복한다.
3. 성도는 신령하고 영적인 미각에 의해서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에드워즈는 마귀나 악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본성적인 완전성 내지 탁월성(ex. 하나님의 엄위하심, 위대하심, 전능한 능력)을 인식한다고 한다 .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지 못하며, 거룩하심을 사랑하지 않으며 대립하고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성령으로 주어진 새로운 초자연적 감각, 혹은 신령하고 영적인 미각에 의해서 영적이고 신적인 일들, 즉 하나님의 도덕적인 탁월성에 나타나는 거룩하심을 음미하고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거룩함의 아름다우심은 영적이고 신적인 일들 속에 있는 것이며 그 어떤 것과도 달리 이 영적인 감각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시편 119편에서 잘 묘사하듯이 영적인 미각을 받은 성도들은 탁월한 거룩함을 직접 맛보고, 누리고, 원하고, 기뻐하는 대상으로 삼는다(373). 거룩함에 대립하고 거룩함을 미워하는 것이 사악함의 본성이라면, 거룩함을 향하고 거룩함을 기뻐하는 것은 반드시 거룩함의 본성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하늘의 천사들만 아니라 지상의 성도들도 사로잡는 아름다움이고, 찬양의 주제가 된다(사6:3,시98:1,99:2-3,5,8-9,97:11-12,삼상2:2).
불신자들은 거룩한 일들이 좋고 탁월하다고 느끼지 못하며, 거룩한 것들을 거룩하다고 느끼지도 못한다. 그래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거룩한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맛볼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의 선함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완전히 숨겨져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으로 거룩한 일들의 선함과 거룩함을 알 수 있다. 성도들에게는 그 초자연적인, 가장 고상하고 영적인 감각이 있어서 성도들은 이 감각으로서 신적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도들의 마음을 매료시키고 기쁘게 하는 것은 신적인 일들의 선함과 탁월함이다. 이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 가운데서 참된 성도들의 마음에 가장 사랑스러운 것이고 가장 달콤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참된 성도의 영혼을 매혹시키고 사로잡는 것이다. 그리고 참된 성도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 안에서 자신의 행복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마음의 위로와 즐거움을 얻기 위해 하늘나라에서 완전한 만족과 축복을 얻기 위해 신적인 것들을 기대한다.
의인들과 마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 모든 것을 엄청나게 맛보게 되겠지만,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의 아름다움을 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악인들과 마귀들은 하나님의 무한한 광대하심과 위엄과 무한한 능력을 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영원하심과 불변하심을 온전히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 자체에 속한 모든 것을 보고 알게 될 것이지만, 그 도덕적 속성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만은 보지도 알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과 천사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의 아름다움에 속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이것을 볼 때만 사람들의 마음은 녹고 겸손해질 것이며, 세상과 단절하여 하나님께로 향하고, 크게 변화될 것이다. 하나님의 두려운 광대하심을 바라보게 되면 사람은 그것에 압도당하여 힘을 잃어버리고, 견딜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379-380). 거룩함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회심뿐 아니라 성화의 원천이다. 그 때문에 에드워즈 신학에 있어서 종종 회심이 성화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라고 양낙흥 교수는 지적한다. 참된 은혜의 결과로 획득된 영적이고 새로운 감각은 우월한 종류의 마음의 습관 내지 성향이며, 그러한 성향에 의해 인간이 성화된다는 것이다. 결국 영적 감각으로 하나님의 거룩의 아름다움을 보고서 그것을 사랑하게 될 때 인간은 변화될 뿐더러 거기서 참된 신앙 감정이 우러나온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요지이다.
4. 네 번째 적극적 표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382-413)
- 은혜로운 감정은 지성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일들을 바르게 이해할 때 생긴다(Gracious affections do arise from the mind‘s being enlightened, richly and spiritually to understand or apprehend divine things).
양낙흥 교수는 첫 번째 표지부터 네 번째 표지까지 에서 에드워즈는 사실상 신앙감정의 표지를 제시하기 보다는 그 원천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고 바르게 지적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원천이 그 결과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원천이 있으면 결과는 자연히 따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신앙 감정은 정신이 조명되어 하나님의 일들을 바로 그리고 영적으로 이해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1. 신앙 감정은 빛 없는 열이 아니다
신앙 감정은 빛 없는 열이 아니다. 거룩한 감정은 언제나 지성을 깨우는 어떤 정보나, 사람의 마음을 깨우는 어떤 영적인 가르침이나, 어떤 빛이나 실제적인 지식에서 생겨난다. 하나님의 자녀는 은혜로운 감정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이전보다 신적인 일들을 더 많이 알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고 복음 안에 제시된 영광스러운 일들을 더 많이 알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그가 은혜로운 감정을 체험하기 전보다 더 분명하고 나은 견해가 생긴다 그는 신적인 일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거나, 그에게 이전에 있던 지식을 새롭게 받아들이게 된다. 요일4:7, 빌1:9, 롬·10:2, 골3:10, 시43:3-4, 요6:45등의 구절들을 보라. 지식은 먼저 굳어진 마음을 열어주고 감정을 풍요롭게 해 주는 열쇠다. 그리고 지식은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눅11:52)(382-3).
사람들은 본질상,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것이나 자신이 생각지 못한 것으로는 절대 감화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지론이다. 참으로 영적이고 은혜로운 감정은 지성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일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참으로 영적이고 은혜로운 감정은 하나님의 탁월한 본성과 놀라운 완전성을 새롭게 이해할 때 생기며 그리스도의 영적인 탁월함과 충만함을 새롭게 생각하고 지성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에 속한 일들을 새롭게 알 때 생긴다. 이런 조명을 통해 성도들은 과거에는 그에게 어리석게 보인 신적인 일들과 영적인 가르침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지성이 밝아지는 것은 외적 관념들이나 상상력으로 생기는 감정과는 관계가 없다. 또한 성경 본문이 갑작스럽게 마음에 떠오르는 현상과도 무관하다.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사람들의 마음이 은혜로운 감정으로 불타오르게 하실 때는, 성경을 그들의 지성에 풀어주심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눅24:32)(384).
2. 거룩한 신앙 감정은 영적인 지식에서 비롯된다.
에드워즈는 신앙 감정은 진정 어떤 교훈이나 지성에 주어진 빛에서 생기지만, 영적인 빛이 아니라 성령의 일반적인 조명에 의해서 지성이 밝아짐으로 생겨나는 감정도 있다고 주장한다. 즉 영적인 빛이 아니라 일반적인 빛에 의해서도 사람의 마음은 크게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들만이 알 수 있는 신적인 일들에 대한 영적, 초자연적 지식(고전2:14,요일3:6,요삼11,요14:19,17:3etc.)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에드워즈는 지식을 개념적 지식과 마음의 지식으로 구분한다, 전자는 사변적인 지식으로서 마음이 사유하면서 사물들을 단지 바라보기만 하는 경우이고, 후자는 마음이 단지 사유하거나 바라볼 뿐만 아니라, 향유하고 느낀다는 의미에서 감각적인 지식이다(389). 에드워즈는 신앙에 속한 일들을 사변적으로 아는 지식과 영적으로 아는 지식을 구분한다(390).
에드워즈에 의하면 참된 믿음이나 감정의 합당한 토대가 되는 지식은 반드시 신적인 일들이 아름답다는 것을 아는 영적 지식이요, 이 지식은 신적인 일들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시각과 감각 속에 더 직접적이며 본질적으로 내재한다고 말한다. 영적인 지식은 신적인 일들에 있는 거룩함이나 도덕적 완전성의 지고한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느끼는 마음의 감각에 내재한다. 더불어 믿음에 속한 일들에 대한 모든 인식과 지식은 그런 감각에 의존하고 그런 감각에서 흘러나온다(389, 390). 영적인 지식은 주로 영적인 아름다움을 아는 마음의 지식에 존재한다. 영혼이 신적인 일들 안에 있는 거룩함이나 참된 도덕적 선함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체험하게 되며, 이 아름다움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이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은 하나님의 모든 완전성과 신적인 일에 속하는 모든 것의 영광스러움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믿음에 대한 참된 체험적 지식은 영적 아름다움을 아는 데서 비롯된다. 에드워즈는 특히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아는 영적 지식을 강조하는데,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보거나 참된 도덕적 선을 보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위대한 것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 거룩함의 아름다움은 만물을 충만케 하는 것으로 그것이 없이는 모든 세계는 헛될 뿐이며, 없는 것과 같으며, 진정 무보다 더 나쁘게 되기 때문이다. “거룩함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본체의 아름다움이며, 신성 가운데 신성이며(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선의 무한한 원천이다.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 자신은 무한한 악이 될 것이다(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또한 그것이 없이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은 사실상 아무 것도 모른다“(392-3).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여러 은혜 중에서 어떤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즉 그에게는 영혼에 미치는 은혜의 모든 작용들과 모든 거룩한 위로와 기쁨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구원에 이르도록 영향을 주는 모든 효과들에 대한 어떤 관념이나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적인 지식은 신적인 일들의 이 거룩한 아름다움 안에 가장 본질적으로 내재한다(398)는 것이 에드워즈의 지론이다.
에드워즈는 이와 같은 영적인 지식 혹은 신적인 감각은 영혼에 주시는 중생의 사건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바르게 말한다.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감각을 처음으로 주시는 회심의 사건이 얼마나 근본적인 변화를 낳고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것인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회심할 때 영적인 눈을 뜨는 사건이 주는 변화는 모든 면에서 맹인으로 태어나 오랫동안 다른 네 가지 감각만으로 살다가, 갑자기 눈이 떠져 밝은 대낮에 사물들을 보게 된 사람이 겪은 변화보다도 훨씬 더 크고 놀라울 것이다. 이는 비록 시각이 다른 외적 감각들 보다 더 고상하지만, 이 영적 감각은 시각이나 사람에게 자연적으로 있는 다른 인식의 원리보다 한없이 더 고상하며, 이 감각의 대상은 한 없이 더 크고 중요하기 때문이다”(393-4). 영적인 지식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영혼에 없는 새로운 영적 감각을 가진 지각에 내재한다(388). 이런 지식은 신적인 일들에 대한 지식이며, 이 지식에서 모든 참된 은혜로운 감정이 흘러나오게 된다. 따라서 이런 지식으로 모든 감정들을 시험해야 한다. 전적으로 다른 지식에서 생기는 감정들이나 다른 깨달음에서 나오는 감정들은 헛된 것이다(394).
3. 성경을 영적으로 이해하는 것(The spiritual understanding of the Scripture)
에드워즈는 영적인 지식이란 어떤 새로운 교리적 지식이나, 읽거나 듣지도 못했던 어떤 새로운 명제들이 마음에 떠오르는 현상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명제들을 마음에 떠오르게 하는 것은 마음에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새롭게 맛보거나 느끼게 해 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에 따르면 영적인 지식은 성경의 어떤 부분을 교리적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것과도 무관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지 교리에 대한 지식이거나 명제적인 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어떤 부분을 교리적으로 해설하는 것은 그 부분에 담겨있는 명제들이 무엇인지를 이해시킬 뿐이다.
에드워즈는 성경의 비유나 예표나 풍유들 속에 있는 성경의 신비적인 의미를 가르쳐 주는 것조차도 교리적 해설에 불과하지 영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해설하는 사람 가운데도 영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예표들, 비유들, 수수께끼들과 풍유들을 해석하는 방법을 알고도 그의 마음속에 영적인 빛이라곤 한 줄기도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신적인 일들에 대해 거룩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영적 감각이 조금도 없을 수 있으며, 성경에 나오는 예표, 비유, 수수께끼, 풍유들과 다른 부분들에 담겨 있는 영광스러움을 전혀 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도가 분명히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 성경의 여러 가지 신비한 내용들을 다 이해하더라도, 구원에 이르는 은혜가 전혀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고전13:2)”(397-8).
에드워즈는 성경을 영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해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성경 본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본문을 영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다. 영적으로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고, 성경을 이해하기 전에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 본문에 담겨있는 본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영적으로 바르게 조명될 때, 과거에는 영적으로 어두워서 보지 못했던 성경을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만일 그가 보지 못했던 이유가 영적으로 소경 되었기 때문이었다면, 분명한 것은 본래의 의미가 성경 안에 이미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성경의 본래 의미를 보지 못한 것이 영적인 소경 됨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 .
영적으로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마음의 눈이 열려서 성경의 참된 의미 속에 담겨 있고 또 성경이 기록된 이래로 항상 그 안에 담겨있던 영광스러운 일들의 놀라운 영적 탁월성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완전성과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충분성이 사랑스럽고 밝게 드러난 것을 바라보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이 탁월하며 합당함을 아는 것이며, 성경의 계명들과 약속들이 보여 주는 영적인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 속에 항상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가 만일 영적으로 소경 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말씀을 주시거나 또 그에게 새롭게 말씀하심으로 더해진 새로운 의미와 상관없이 그 전에도 볼 수 있었던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다“(400-1).
4. 거룩한 미각과 취향(The holy taste and appetite)
에드워즈는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직접 떠올라서 자신들의 의무를 알게 되는 것은 영적인 지식이 아니라고 논박한다. 그는 심지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내면에 직접 생각이 떠오르게 하는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알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비판한다(398). 그러나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의 거룩하고 영적인 인도(롬8:14)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성령의 은혜로운 인도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성령이 하시는 일을 성도에게 가르치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도들이 그 가르치심을 따를 수 있도록 강력하게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성령의 은혜로운 인도가 가르치는 것에 있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참된 도덕적 아름다움을 영적이고 특별한 감각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말한다. 에드워즈는 앞 부분에서 영적인 지식이란 참으로 선하고 거룩한 것을 사랑하고 아름답다고 느끼고 즐기는 것을 포함한다고 입증해왔다(401).
에드워즈는 이 지점에서 거룩한 미각(holy taste) 혹은 거룩한 미각과 취향(holy taste and appetite)에 대해서 상술하기 시작한다. 물론 세속적인 일을 판단할 수 있고 본성적인 아름다움을 알 수 있는 훌륭한 미각도 있다. 따라서 에드워즈는 미각에 대한 백과사전(Chambers' Cyclopedia)적 설명을 그대로 수용한다. 그의 인용문에 따르면 “미각을 갖는다는 것은 사물의 참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며, 사물의 좋은 점에 감동을 받고, 나쁜 점에 충격을 받는 것을 뜻한다. . . 판단은 반성을 거쳐 내려지지만, . .훌륭한 미각은 이런 형식적 절차가 없다. 생각할 시간을 주면, 한쪽을 택해 버린다. 대상이 제시되자마자 인상을 받게 되고, 느껴지며, 더 이상 묻지 않는다. . .미각은 순간적으로 알아내며, 어떤 반성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미각은 그런 논증이 필요 없다. 훌륭한 미각은 말하자면 원초적 자극 또는 일종의 본능적 추론이며, 빠르고 급하게 작용하고, 이성이 추론하는 것보다 더 확고하게 판단 내린다. 훌륭한 미각은 눈으로 먼저 슬쩍 보고서 우리들에게 사물의 본질과 관계들을 순간적으로 알려준다.”(402-3).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께서 성도의 심령 속에 주시고 유지하시는 신적인 미각이 있다. 신적인 미각으로 성도는 진정 영적이고 거룩한 아름다움이 있는 행동인지 아닌지를 분별하고 구별하게 된다. 그리고 성도에게 하나님의 영이 더 강력하게 내주하시면, 더 쉽게, 더 용이하게, 더 정확하게 분별하고 구별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에서 행하는 행동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은혜가 강하고 활력있게 임할 때, 거룩한 성향과 영적인 미각은 영혼으로 하여금 어떤 행동들이 옳으며,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지를 판단 내리게 해준다. 아주 겸손하고, 온유하고 자애로운 성향은 기독교적 영도 없이 가장 강력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가장 근면하게 연구하고 정교하게 추론한 것보다 훨씬 더 쉽고 정확하게, 연약한 사람들을 겸손과 온유와 자애와 같은 기독교적 규범에 일치하는 행동으로 이끌어준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403-5).
심지어 에드워즈는 이렇게 주장한다. “영적인 미각으로 행동을 판단하는 성도들은 그들이 직면한 모든 말과 행동에서 그리고 그들이 판단해야 할 선과 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하고 있는 구체적인 법에 특별히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영적인 미각 자체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법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 바르게 논증된 법으로 연단 받는다.”(405). 그리고 영혼에 있는 미각은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색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법의 참된 의미를 판단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영혼에 있는 영적인 미각은 부패한 정욕에서 생기는 선입견과 편견들을 제거해 주며, 하나님의 말씀에 빛을 던져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화된 영혼의 성향과 미각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법들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 말씀의 참된 의미를 아주 자연스럽게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화가 적절히 적용되었을 경우에는 성경 본문 자체가 마음에 떠오르기도 한다(Yea, this harmony tends to bring the texts themselves to mind, on proper occasions).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가르치는 율례들을 묵상하면서 행동을 결정하며,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분별하고 적용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당신의 법도를 가르치시며, 성도들이 당신의 율례의 도를 이해하도록 만드신다. 이상이 영적인 지식이란 심령에 있는 신적인 초자연적 감각과 미각에 본질적으로 내재한다는 에드워즈의 논지의 해명이다.
5. 온갖 종류와 형태의 열광주의는 사단의 작품이다
교회사를 보면 초대교회 영지주의나 몬타니즘으로부터 시작해서 종교개혁시의 재세례파등을 비롯하여 다양한 종류와 형태의 열광주의가 존재해왔었다. 그런데 이 열광주의의 특징은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령께서 내면에 직접적으로 말씀하시고 어떤 것을 생각나게 한다고 주장한다. 소위 그들은 직통계시를 좋아한다(406-9). 그러나 이들은 사단의 미혹에 이끌린 것이다. 사단은 주로 이런 신앙과 종교에서 자신을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 나타나는데, 보통 사람은 분별하지 못하고 쉽게 미혹당하고 말게 된다. 대단한 것처럼 보이는 요란하고 화려한 신앙 현상을 본 사람들은 사단이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면, 사단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숭배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특히 위대한 영적 각성의 시기에 목사들은 사단의 역사에 대해 중하고 엄격한 경계와 감시를 소홀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에드워즈는 경고한다(409).
에드워즈에 의하면 상상이나 환영(phantasy)은 사단의 이 모든 속임수들이 자리하기 좋은 곳이다. 거짓된 신앙과 가짜 은총과 거짓된 감정의 영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상상과 환영에 도취된다. 상상과 환영은 마귀의 거대한 은신처이며, 악하고 속이는 영들의 본부이다. 에드워즈는 사단이 오직 상상으로만 영혼에 접근할 수 있고, 영혼을 유혹하고, 속일 수 있으며, 그 영혼에 어떤 것을 생각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411). 사단에 대항하여 경계를 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단에게 자신들을 완전히 노출시키고, 사단을 원하고, 초청하는 꼴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사단은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 성령의 조명하심과 은혜의 모조품을 만들기 때문이다. 사단은 내적인 속삭임, 사실이나 사건들을 직접 생각나게 하거나, 듣기 좋은 음성, 아름다운 이미지들 그리고 상상 속에 인상이 박히게 하는 등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속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속고, 그런 거짓된 경험을 통해 교만에 빠지게 된다(*)
5. 다섯 번째 적극적 표지: 진리에 대한 깊은 확신(414-439)
-은혜로운 감정은 신적인 일들에 대한 실재성과 확실성을 합리적이고도 영적으로 확신할 수 있게 해준다(Truly gracious affections are attended with a reasonable and spiritual conviction of the judgment, of the reality and certainty of divine things).
앞서 살펴 본 네 번째 표지가 새로운 감각(new sense)의 지적인 또는 이해의 측면을 강조했다면, 다섯째 표지는 확신의 요소를 강조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확신이 있는 영혼으로부터 거룩한 신앙 감정이 우러나온다. 그는 은혜 받은 사람들은 모두 복음의 진리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확신이 있다고 주장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모든 사람들은 복음에 있는 위대한 진리를 견고하고, 온전하고, 철저하고, 효과적으로 확신한다”(414). 이러한 사람에게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의심이나 논란의 여지가 사라진다. 그것이 단지 여러 견해들 가운데 하나, 혹은 그럴 수도 있는 일 정도의 차원을 넘는다. 그들은 더 이상 두 견해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않는다. 복음의 위대한 교리들이 더 이상 의심스러운 일들이나 견해가 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지만 논란의 소지가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참으로 은혜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세상의 구주라는 사실이나, 그가 자신에 대해 계시한 위대한 일들이나, 하나님, 내세에 대한 성경의 계시들이 거짓이라는 쪽보다는 진실이라는 쪽이 우세한 견해이므로 거기에 동의한다는 차원을 넘는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에 대해 눈이 열려 그것이 정말 그러하다는 것을 본다. 이 복음의 진리가 전 생애 동안 그들의 감정을 통치하고 지배한다. 참으로 은혜로운 감정은 복음의 진리성을 확신하고 성경의 증거를 사실로 믿을 때 생긴다. 에드워즈는 믿음과 확신을 거의 구분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즉 참된 믿음이 있는 자 속에는 확신이 있다.
1. 이성적이면서 영적인 확신(reasonable and spiritual conviction)
에드워즈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신앙 감정들이 진정 기독교의 진리를 강하게 확신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할지라도 두 가지 조건을 구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그것이 이성적 확신(reasonable persuasion or conviction)에 근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단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참된 증거에 기초한 확신이며, 확신할 만한 좋은 이유나 정당한 근거에 기초한 확신이어야 한다(418).
(2)그것은 영적 믿음 또는 확신(spiritual conviction)이어야 한다. 자연인들도 가끔 기독교 진리에 대해 일종의 동의를 표한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제시되는 합리적 논증이나 증거들에 근거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 예컨대 가룟 유다는 그가 보고 들은 것들로 인해 예수가 메시야임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것 만으로는 부족했다. 복음의 일들에 대한 영적 신념내지 확신이 있어야 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그러한 영적 확신은 중생자들 혹은 영적인 사람들 즉 자기들 속에 생명의 원리(a vital principle)로 내주하시는 성령을 가진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고유한 것이다. 복음의 사실성에 대한 확신은 중생자의 이해력에 대한 성령의 조명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성령의 조명에 대한 칼빈의 견해와 전적으로 일치한다(『기독교강요』 3권 2장).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제안되고 전시된 일들의 사실성과 신성에 대한 구원 얻는 믿음은 그러한 일들의 성격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마음을 조명하시는 성령으로부터 온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즉 확신은 영적 시각 혹은 이해를 가짐으로 가질 수 있다. 참된 믿음은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바라볼 때 생긴다.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에 나타난 것들의 비길 데 없는 아름다움을 보거나 감지하게 된 사람은 그 신성을 확신하게 된다. 왜냐하면 신적 영광과 신적인 일들의 아름다움이야말로 그 자체로서 그것들의 신성의 실재적 증거이며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고후4:3-6,3:18).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에 있는 비교할 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느끼게 되면 두 가지 방식으로 복음에 드러난 신성을 우리가 확신하게 된다고 한다. 하나는 직접적으로 이고, 다른 하나는 간적적으로이다.
2. 직접적 방법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면(cf. 고후4:3-6,3:18) 복음에 있는 내용이 거룩하다는 확신이 직접 마음에 생긴다. 왜냐하면 이 영광 자체가 복음의 신성함을 직접적이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증거하기 때문이다. 복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봄으로써, 복음의 신성을 직접적으로 확신하고, 그 확신에 기초하여 판단하는 사람은 이성적으로도 확신하게 된다. 그의 믿음과 확신은 전적으로 이성에 합치한다. 왜냐하면 복음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복음이 거룩하다는 참된 증거이며,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이 다른 모든 존재들과 구별되고 그것들 위에 높이 들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그의 신성한 아름다움에 의해서다. 그 아름다움은 모든 다른 아름다움들과 무한한 차이가 있다. 그 속에는 하나님 같고, 숭고하며, 영광스러운 탁월성이 있어 인간적인 것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 때문에 그것을 본 사람은 누구나 그 신성을 확신하고 만족하게 된다. 마음의 눈이 열려 신적인 것들의 거룩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보게 되면, 자연인에게는 그처럼 이상해 보이는 복음의 가장 중요한 많은 교리들이 진실임을 즉각 알게 된다. 즉 그는 직관적으로 그것을 알게 된다. 어떤 길고 연속적인 추론의 과정이 없이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논증은 한 번으로 충분하며, 그 증거는 직접적이다. 사람의 지성은 단지 한 걸음만 내딛어도 복음의 진리에 다다르게 된다. 그것은 복음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에드워즈는 보통 인간의 심리 상태를 현실적으로 이해했다. 그는 복음에 대한 역사적 증거만 가지고 복음의 교리들을 확신하기에는 미흡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외적 증거들도 아주 귀중함을 그는 인정했다. 그것은 불신자들을 각성시켜 심각한 사고를 하게 하고, 참된 신자의 신앙을 굳혀 준다. 그리고 나아가 어떤 면에서는 구원 얻는 신앙의 산출에 기여할 수도 있다(yea, they may be in some respects subservient to the begetting of a saving faith in men).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인간의 마음에 무수한 의심이 남는 것을 막지 못한다. 인간의 마음이란 박식한 사람들이 복음의 진실성에 대해 들려주는 모든 말을 들은 후에라도 어떤 커다란 시험을 만나게 되면 이게 진실임을 내가 어떻게 알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소유를 팔고, 모든 것을 겁 없이 버리는 모험을 무릅쓰며, 가장 지독하고 심한 고문까지 견디며, 세상을 초개처럼 여기고,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에게 소중한 전부를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으려면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증거 이상의 다른 증거가 있어야 한다. 단지 그럴 듯 하다는 정도나 그럴 수도 있다는 개연성(probability)의 증거를 넘어 이 언약과 약속들이 분명히 하나님의 것이라는 모종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시는 증거, 즉 내적 증거(internal evidence)이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내적 증거는 개신교가 전통적으로 성경의 특성 중 하나로 주장해 온성경의 자증성 교리의 내용과 일치한다. 그에 의하면 이 내적 증거가 있어야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생긴다. 모든 참된 구원 얻는 믿음, 혹은 영적 확신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내적 증거가 다소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에드워즈의 지론이다. 복음의 신적 영광을 보는 영적 시각이라는 것이 있다. 영적 시각이 있는 사람은 성경 계시 안에 있는 내적 증거를 본다. 하나님의 복음은 증거를 구걸하러 다니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자체 안에 최고의, 그리고 가장 적합한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433). 양낙흥 교수는 오늘날 성경과 복음에 대한 자유주의적 견해를 가진 신학자들에 대항하여 에드워즈의 방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복음의 진실성과 사실성을 확신하는 것은 말만 가지고 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와 같이 마음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영광과 신적 사물들의 아름다움을 보아야 한다. 바울의 표현을 빌면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과 능력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어야 한다. 오늘날 정통적 고백주의자들의 문제는 머리로는 정통 신학을 고백하나 마음과 체험에 그것이 부재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독단적 주장으로 끝나 버리고 아무 호소력이 없다. 감정도 의지도 행함도 따르지 않는 정통주의는 경건주의와 합리주의 반발을 받을 수 밖에 없고, 소수의 세력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3. 간접적 방법
다음으로 에드워즈는 신적 영광에 대한 시각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에 기독교가 진리라는 확신을 더 간접적인 방식으로 심어 주는지를 다룬다. 첫째는 신적 영광에 대한 시각은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에 대립하는 마음의 선입견을 제거하고, 증거되는 마음이 녹아지게 함으로써 그런 확신을 심어준다. 둘째는 신적인 영광에 대한 시각은 이성의 장애물을 제거해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성을 도와 사변적인 개념들을 더 생생하게 만들어준다(434).
그리고 에드워즈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영적인 믿음이 아닌데 사람들이 가끔 그것으로 착각하는 몇 가지 경우들을 소개한다. (1) 성령의 일반적 조명 아래에서도 기독교의 위대한 일들이 진리임을 어느 정도는 확신할 수 있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들도 일반적인 깨달음과 깨우침으로도 신앙에 속한 일들의 본질을 더 생생하고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광대하심, 능력, 위엄 같은 하나님의 본성적인 완전성(natural perfections)을 볼 수 있어 그러한 하나님을 거스르고 범죄한 것이 얼마나 큰 죄이며 그러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두려운가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확신이 아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신앙적인 일들에 속한 도덕적이고 거룩하고 탁월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신앙에 속한 일들이 진리라는 것을 영적으로 확신할 수 없게 된다.
(2) 에드워즈는 환상을 보거나 음성을 듣는 것과 같은 신비적 체험에 대해서는 부정적 인 견해를 표명한다. 그런 상상력에 가해진 비상한 인상들을 체험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일들의 진실성에 대한 강한 확신을 종종 가지게 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대개 하나님의 말씀에서 떨어지고 복음을 거부하며 불신과 무신론으로 기울어진다. 그러므로 그것은 망상에 불과한 것이요, 아주 좋지 못한 것들이라고 에드워즈는 단정한다.
(3) 성령의 일반적 조명 아래에서 사람들은 흔히 종교로부터 얻게 되는 여러 자연적 이익에 매력을 느끼고 기독교를 믿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의 교리들 속에 있는 도덕적 탁월성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에 대한 감각은 전혀 없어 그것들의 진실성에 대한 영적 확신을 결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은, 에드워즈에 의하면, 구원 얻게 하는 확신이 아니다. 예를 들면 예수 믿는 나라들은 다 복을 받아 선진국으로 잘 살더라 하는 생각이나, 예수 믿는 가정이 다 복을 받더라 하는 생각에서 기독교를 믿는 것 등이 이 범주에 포함될 것이다.
6. 여섯 번째 적극적 표지: 참된 겸손(440-479)
- 은혜로운 감정은 복음적인 겸손을 동반한다(Gracious affections are attended with evangelical humiliation).
앞서 살펴 본 다섯 가지 표지는 표지라기보다는 그것의 원천이라고 봄이 합당할 것이다. 이제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표지론이 시작된다. 에드워즈는 겸손과 교만에 대해서 상당히 심원하고 풍성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겸손이라는 덕목을 대단히 높이 평가했다. 겸손은 사실상 그리스도인다운 여러 성품들 중 하나다. 성경은 중생하고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에게 합당한 성품들을 여러 가지 언급한다. 온유, 유순, 자비, 긍휼, 동정심, 용서, 관용, 인내, 화평등이 그것이다. 에드워즈는 바로 다음 장에서 참된 신앙 감정의 표지들 가운데 일부러 그러한 성품적 변화를 열거하면서 설명한다. 그것도 다른 모든 기독교적 성품들을 다 합친 것 보다 더 많은 분량을 그 한 덕목의 설명에 할애한다. 그가 겸손을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복음적 겸손은 그리스도인 자신이 전적인 무능함, 혐오할 만함, 그리고 추악함과 같은 심령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아는 감각이다고 정의내린다.
1. 율법적 겸손과 복음적 겸손의 구별(The distinction between a legal and evangelical humiliation)
에드워즈는 겸손을 율법적 겸손과 복음적 겸손으로 나눈다. 전자는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아직 은혜로운 정서가 없을 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후자는 오직 성도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전자는 자연적 원리들을 돕는, 특히 자연 양심을 돕는 성령의 일반적 영향에서 비롯된다. 후자는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원리들을 심고 적용하는 성령의 특별한 영향에서 나오는 것이다. 전자는 우리 정신이 특히 하나님의 자연적 완전성, 즉 그의 위대하심, 무거운 위엄 등에 대한 보다 큰 감각을 가지게 될 때 생기는 것으로, 이를 테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그러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위엄을 보았다. 후자는 하나님의 일들의 초월적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외로운 위대함, 자연적 완전, 그의 율법의 엄격함에 대한 감각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극히 죄악 되며 죄책이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에 노출되어 있음을 확신시켜 준다. 마지막 심판 날, 사악한 자들과 마귀들도 그러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죄로 인한 그들 자신의 가증스러움은 보지 못한다. 이 감각은 에드워즈에 의하면 복음적 겸손 안에서만 주어진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도덕적 완전성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결과라는 것이다. 율법적 겸손 하에서 인간은 위대하시고 무서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미미하며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감지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망한 자이며 도무지 스스로를 도울 수 없는 존재임을 감지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만을 높이려는 성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오직 복음적 겸손 안에서만 주어진다. 하나님의 거룩한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그 성향을 변화시킴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율법적 겸손 하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절망하게 된다. 복음적 겸손 하에서 인간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버리게 된다. 전자 아래서 인간이 제압당해 강제로 땅바닥까지 낮아지게 된다. 후자 아래서 인간은 달콤하게 굴복하게 된다.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그리고 기꺼이 하나님의 발 앞에 부복한다는 것이다. 전자에는 아무런 영적 선이 없다. 참된 미의 속성이 전혀 없다. 반면 기독교적 은혜의 탁월한 아름다움의 많은 부분이 후자 안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적 겸손은 복음적 겸손으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유용하다. 사람이 율법으로 낮아져 있으면서도 전혀 겸손하지 못할 수 있다. 사악한 자들은 마지막 심판 날 자기들에게 전혀 의가 없으며, 온전히 죄악 되며, 지극한 죄책을 가지고 있으며, 영원한 저주를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될 것이며 자신들의 무력함을 온전히 감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 마음의 교만을 전혀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2. 복음적인 겸손의 본질(The essence of evangelical humiliation)
복음적인 겸손의 본질은 자신이 엄청나게 죄로 가득차 있지만 은혜의 경륜 아래에 있는 피조물임을 아는 겸손,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며 전적으로 경멸스럽고 추악한 존재라고 여기며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는 겸손이다. 그것은 자신을 높이려는 성향을 죽이고 자기 자신의 영광을 자발적으로 부인한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믿음에 있는 위대하고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복음의 전체 구조와 새 언약에 속한 모든 것들과 타락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경륜은 사람들의 심령이 겸손케 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신앙 고백을 하든 그들의 신앙 감정이 얼마나 높게 고양되었든지 간에,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442). 에드워즈에 의하면 영적 이해는 필연적으로 의지, 혹은 성향의 변화가 뒤따르기 때문이고, 영적 이해치고 의지가 굽혀지지 않거나 성향이 바뀌지 않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신령한 지식이 있으면 틀림없이 의지가 변화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즉 성품내지 삶의 변화가 뒤따른다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에드워즈는 겸손을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변화의 내용으로 본다. 참 은혜를 받은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겸손은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적 요소들 중 하나이다. 먼저 복음적 겸손은 기독교인의 커다란 임무인 자기 부인의 주된 부분이다. 그리스도인의 위대한 의무인 자기 부인(self-denial)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는 사람이 자신의 세상적인 성향들을 부인하고, 모든 세속적인 대상들과 쾌락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둘째는 스스로를 높이려는 본능을 부인하고, 자존심과 영광을 거부하고,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을 버리게 된다. 복음적인 겸손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행한다. 후자는 자기를 부인할 때 가장 위대하고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비록 두 가지 측면이 항상 함께 있어야 하고, 하나가 없이는 다른 하나도 결코 참될 수 없지만,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후자보다는 전자에 훨씬 더 근접하게 행할 수 있다. 많은 은자들과 수도자들은 부와 쾌락과 세상의 일반적인 즐거움들을 포기하였지만(비록 참된 자기 부정은 없었지만), 자존심과 의로움은 전혀 부정하지 못했다. 그들을 결코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들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의 탐욕을 팔아 버리고, 다른 탐욕을 만족시키고자 했고, 동물적인 탐욕을 팔아서 마귀적인 탐욕을 만족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그들은 결국 처음보다 더 나쁜 상황이 되었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경향이 자연인에게 얼마나 강한가는 상상하기도 어렵다(445-6).
3. 영적 교만
에드워즈는 위선자들이 겸손한 척 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고 지적한다. 말과 행실에 있어 겸손을 가장하려고 무척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겸손한 말이나. 행동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 달콤한 겸손의 태도와 모양은 그들이 모방할 수 없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율법적 영이란 무엇이든 자만하는 영이었다. 역으로 자기의 의로움, 도덕성, 거룩성, 감정, 체험, 신앙, 겸손등 어떤 좋은 것이든 자부하는 영적 교만이야말로 율법적 영이었다.
한편 에드워즈는 영적 교만의 특징이 자신의 겸손에 대해 과대평가하거나 과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자신을 아주 많이 비웠으며, 자신들이 진토에까지 낮아졌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낮아짐에 대한 높은 평가로 마음이 하늘까지 올라가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런데 그들의 겸손은 자신 있고 과시적이며 시끄럽고 주제넘고 마음이 부풀고 자만에 찬 겸손이다. 에드워즈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아주 교만하고 행동이 거만한대도 자신은 아주 겸손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실에 놀란다. 인간 마음의 교활함이 이 영적 교만과 자기 의의 영역에서처럼 많이 드러나는 곳은 없다. 이 점과 관련하여 사람을 다루는 데서 사탄의 교묘함은 그 절정에 달한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했다. 사단은 이 부분에서 가장 많이 경험이 있다. 그는 영적 교만이 어떻게 생기는지를 알고 있으며, 영적 교만의 비밀스러운 원천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죄이기 때문이다.
4. 영적 교만을 발견하고 구별하게 해 주는 첫 번째 표지(452-468)
영적 교만이란 대개 커다란 겸손을 가장하고 나타나지만 두 가지 방식에 의해 그것을 발견해 낼 수 있다. 영적 교만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신앙적 성취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아주 대단하고 비상한 것으로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정도의 구원의 은혜는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체험이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대단한 성도이며 보통 사람들보다 더 큰 은혜를 가졌다고 말하는 셈이라고 에드워즈는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런 체험을 진술할 때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해 줄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던 바리새인은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눅18:11)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러나 입으로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거룩하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해서 자신의 거룩함을 그처럼 높이 평가하는 것이 그들의 교만과 허영의 증거임을 반증하지는 못한다고 에드워즈는 비판한다. 만일 그들이 겸손한 영의 영향 아래 있었더라면, 자신의 종교적 성취가 자기에게 그처럼 찬란해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자신을 내세우며 상석을 차지하려 한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것임에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정죄하는 그 일(눅14:7)을 아주 자연스럽게 한다. 안내하고 가르치고 지도하고 경영하는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하고 그런 노릇을 하는 데는 아주 적극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또 종교문제에 있어서도 자기가 지도자와 교사의 노릇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랍비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23:6-7).
그러나 겸손한 자는 자신을 성도 중에 낮은 자, 모든 성도들 중 가장 낮은 자들 가운데 하나로 여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자신보다 낫게 여긴다. 자기에게 합당한 자리는 가장 낮은 자리라고 생각한다. 가르치는 일에 관해서도 이들은 큰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나 예레미야처럼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적임자라고 여긴다(출3:11,렘1:6). 가르치는 것보다는 배우는 것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이라 여긴다. 그리하여 그들은 듣는 것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데 열심이다. 이들에게는 대담한 상전투의 말씨가 자연스럽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떨면서 말한다(호13:1). 그들은 권위를 지닌 총감독이나 지배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복종하는 경향이 있다. “많이 선생 되지 말라”(약3:1-2).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벧전5:5). 정말 뛰어난 성도들, 즉 가장 탁월한 체험을 가지고 있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춘다(마18:4).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가 보기에 은혜에 있어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과 감사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그처럼 작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것을 부끄러워한다.
참으로 은혜로운 성도는 자신의 의무에 규칙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그 규칙을 따르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는 것이다. 그가 자신이 가진 것이나 자신이 행하는 것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기준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참으로 은혜로운 영혼에게 자신의 거룩함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성도 속에 있는 은혜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조차도 그가 마땅히 도달해야 하는 수준에 비추어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그것을 자기 속에 있는 아름다움이나 사랑스러움이라고 말할 가치가 없다고 본다. 탁월한 성도는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마땅한 정도에 대한 그러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자기 은혜의 미미함뿐 아니라 자신에게 남아있는 죄와 부패가 얼마나 큰 지를 본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부패가 어느 정도인가를 측정하려면 우리의 의무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은혜 안에서 자라게 되면 자신의 선함보다 결함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서 최소한의 죄 속에 있는 결함이나 최소한의 부패조차도 너무나 커 보여 그들의 최대의 거룩함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무색케 하고도 남는다. 왜냐하면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한 최소한의 죄조차 그 안에 무한한 가증스러움, 혹은 결함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피조물 속에 있는 최고의 거룩함은 그 안에 무한한 사랑스러움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 사랑스러움은 최소한의 자기 결함에 비교해볼 때 아무 것도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에드워즈의 죄론이 등장한다. 죄라는 것이 왜 그렇게 문제가 되는지, 그리고 죄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에 대한 청교도적 이해는 기독교의 가장 심오한 차원에 관련된 주제이다. 에드워즈를 비롯한 청교도들은 아마 죄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교회사에서 가장 깊은 경지에 도달했던 사람들일 것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모든 죄는 그 안에 무한한 결함과 가증스러움을 안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분명하게 증명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 논리는 다음과 같다. 죄의 악, 혹은 부정, 혹은 가증함의 본질은 의무의 침해, 혹은 마땅히 하거나 되어야 하는 것에 반하는 행위나 성품이다. 그러므로 침해되는 의무가 얼마나 더 큰 것이냐에 의해 침해의 가증함이나 불법성이 그만큼 더 커진다. 그런데 어떤 존재를 사랑하고 공경할 우리의 의무는 그의 사랑스러움이나 명예로움에 어느 정도 비례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한히 사랑스러운 분이다. 그러므로 그를 사랑할 우리의 의무도 무한하다. 그러므로 그 사랑에 반하는 어떤 것도 무한한 불의, 결함 및 무가치함을 지닌다.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죄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거리에 비례하여 가증스럽다. 대상의 위대함과 주체의 비천함 및 열등함은 그것을 악화시킨다.
역으로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사랑이나 공경은 무한한 가치를 갖지 못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 주체가 비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공경이 주목과 존중을 받을 가치가 그만큼 더 줄어든다. 대상의 우월성이 크면 클수록 열등한 자가 그 우월한 자를 공경할 의무는 그만큼 더 커지는 반면, 열등한 자가 우월한 자를 공경하지 않는 죄는 더 가증스러워진다. 그러나 열등한 자의 그 열등성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그 열등한 자의 공경의 가치가 줄어든다. 열등하면 할수록 그는 주목받을 가치가 더 적어지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사람이 참된 은혜와 영적 빛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만큼 더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주장한다.
에드워즈는 무한의 개념을 즐겨 활용하고 있다. 유한한 것은 무한한 것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람이 영적 빛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사물들이 더욱 더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참된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자신의 선함과 거룩함이 그만큼 더 작아 보인다. 인간의 오염과 일탈을 감추어주는 것은 어두움이다. 그러나 마음에 흘러 들어온 빛은 그것을 드러내고 가장 은밀한 구석에서 그것을 찾아내어 그것이 선명히 나타나게 한다. 특별히 만물을 꿰뚫어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의 빛은 그러하다. 가장 탁월한 은혜를 받아 누리는 성도들은 자신에게 더 많은 사랑, 더 많은 겸손, 더 많은 감사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증스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 가증한 교만과 배은망덕으로 인해 울부짖는다.
에드워즈는 하나의 법칙을 확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자신이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아주 뛰어난 성도이며, 기독교적 체험에 있어 아주 탁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은 아주 잘못되어 있으며 전혀 탁월한 성도가 아닐뿐더러 교만과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그를 계속 지배하는 기질이라면, 그는 전혀 성도가 아니다. 그는 참된 기독교적 체험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다. 체험의 주체로 하여금 그 체험을 대단하게 평가하게 하여 그를 자고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체험은 헛된 망상이라고 에드워즈는 단정한다.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영적 발견으로 인해 마음이 부풀어 올라 그 발견의 탁월성에 대한 감탄으로 가득하게 하며 이제 자기는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많이 보았으며 더 많이 안다고 자부하게 하는 것은 전혀 참된 영적 빛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참된 영적 지식은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의 무지를 더 많이 자각하게 한다.
5. 영적 교만을 발견하고 구별하게 해 주는 두 번째 표지(468-479)
영적 교만의 또 하나의 틀림없는 표시는 자신의 겸손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가짜 체험들은 대개 가짜 겸손을 동반한다. 그리고 가짜 겸손의 속성은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뛰어나게 은혜로운 정서의 소유자들은 그들이 깊이 겸손해야 하는 이유를 아주 잘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미 획득한 겸손을 아주 작은 것으로 본다. 반면 자신에게 아직 남아있는 교만은 크고 아주 혐오스럽다고 여긴다. 참으로 겸손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열함과 혐오스러움을 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낮아져도 자신이 마땅한 처해야 할 위치보다 더 낮아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 자리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마땅히 처해야 하는 더 낮은 위치로 내려가고 싶어한다. 결국 겸손의 원천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자기가 겸손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체가 교만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정말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겸손을 아주 적다고 여기고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겸손을 아주 크게 여긴다. 그것은 본래 자기의 위상(proper height)이 어디라고 생각하느냐에 달려있다. 즉, 자신의 존엄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는 자는 자기를 약간 낮추어도 그것을 아주 큰 겸비라 여긴다. 그러나 본래 자기의 위상이 아주 낮다고 생각하는 자는 자기를 아주 낮추더라도 그것이 당연한 처신이지 특별한 겸비라 생각지 않는다. 참으로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의 존엄이 아주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자기 비하가 스스로에게 아주 작아 보인다. 진흙속의 무가치하고 악하며 혐오스러운 벌레가 무한히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는 그것을 커다란 겸손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이 커다란 자기 비하로 보이는 이유는 그가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자신을 보다 정확하게 보았다면, 그는 그처럼 무한히 경멸할 만하며 비열한 자가 하나님 앞에 더 낮아지지 않는 그 교만에 놀라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들의 행동에 나타나는 겸손을 평가함에 있어 두 가지 요소를 고려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하나는 그들이 실제로 소유한 존귀함의 정도요, 다른 하나는 자기를 낮추는 정도이다(470). 그리하여 똑같이 낮은 자리에 처하는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한 사람에게는 커다란 겸손이 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겸손이 아닐 수 있다. 참으로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의 존귀함에 대해 아주 낮은 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낮추는 모든 행위들이 아주 작은 것으로 보인다. 자기처럼 비열하고 가난하고 비참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발 아래 엎드리는 것이 전혀 대단한 겸손이나 자기 비하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겸손의 정도는 자기를 낮추어야 하는 이유의 정도에 의해 평가될 수 있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참으로 겸손한 성도가 결코 자신의 겸손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낮아져야 하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너무 커 보이는데 반해 자기 마음가짐은 도무지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471). 즉, 자신의 겸손보다 교만이 훨씬 더 많이 발견된다. 이것은 죄에 대한 깨달음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자신의 죄를 크게 깨달은 사람들은 좀체 자신이 죄를 크게 깨달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람이 죄에 대한 자기의 깨달음의 정도를 평가하는 요소가 두 가지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죄책과 오염에 대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감각의 정도요, 다른 하나는 그들의 실재 죄성의 정도 안에서 그러한 감각에 대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유의 정도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비천함과 비열함, 눈멂, 무능함 등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모든 감각에 대한 깨달음에도 그 원리는 적용된다. 그 이유를 생각할 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스로에 대해 비천하고 추하고 무능하다고 느끼는 느낌이 결코 크다고 생각지 않는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탁월한 성도들은 어떤 점에 있어서도 자신들이 탁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은혜와 체험들은 그에게 비교적 작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자신의 겸손이 그러하다. 기독교적 체험과 진정한 경건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있어 겸손만큼 자기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없다. 참으로 경건한 자들은 자신의 겸손보다는 교만을 분별하는 데 천배나 민첩하다. 그는 남의 교만보다는 자신의 교만을 보다 쉽게 탓한다. 참회하는 자는 참된 겸비를 보일때 잠잠하고 고요한 것으로 묘사된다(애3:28). 성경은 침묵이 겸손에 동반되는 것으로 가르친다(잠30:20). 정말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의와 거룩함을 아주 낫게 평가하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하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면에서 가난한 자로 처신한다.
“자신의 의로움과 거룩이 너무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 속에 있는 것이라고는 가난뿐임을 스스로 인식하며, 그에 맞게 행동한다. 따라서 참으로 겸손한 사람, 특별히 탁월하게 겸손한 사람은 여러 면에서 당연하게 가난한 사람으로 행한다. 가난한 사람은 간청과 애원에 익숙하지만, 부유한 사람은 거칠게 대답한다. 가난한 사람은 부유한 사람들에게 성급하고 크게 분개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양보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 낫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완고하지 않고, 방자하지도 않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 잘 참는다. 그는 경멸받지 않는 것을 기대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의 경멸을 참아낸다. 그는 자신이 무시되고 존중되지 않는 것을 가증스러운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낮은 곳에 처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상사들을 기꺼이 존경하며, 그들의 책망을 조용하게 받아들인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나은 사람으로 기꺼이 존경한다. 그는 쉽게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지식과 판단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지나치게 까다롭지 않으며 변덕스럽지도 않다. 그리고 어렵고 힘든 일을 잘 견딘다. 그는 잘난 체하지 않으며, 자기에게 주목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순복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런 사람이 겸손한 그리스도인이다. 겸손은 (위대한 Mastricht가 표현하는 것처럼), 일종의 거룩한 무기력(holy pusillanimity)이다. 매우 가난한 사람은 거지다.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 역시 거지다. 은혜로운 감정과 거짓된 감정 사이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은혜로운 감정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집 문 앞에서 여전히 가련한 거지로 계속 남아있다. 그것도 아주 가난하고 궁핍한 거지로 말이다. 거짓된 감정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부유하다고 생각하고, 필수품이 아닌 여러 가지 물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이 먹고 살기에 충분한 것이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한다“(475-6).
에드워즈는 정말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교만보다 자기의 교만을 먼저 본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보다 더 교만한 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타인의 언행을 가장 선하게 해석한다. 또한 죄를 크게 깨들은 자는 자기가 죄를 크게 깨달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은혜가 깊을수록 죄를 더 깊이 깨닫는다.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진리들을 더 많이 이해하면 할수록 자신의 은혜와 사랑의 작음과 더욱더 이상하고 놀라운 일로 보이게 된다. 그리하여 다른 이들은 자기보다 훨씬 낫다고 더 쉽게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은혜의 미미함에 의아해 하는 성도는 그처럼 이상한 일이 다른 성도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좀체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외면만을 보지만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본다. 영적 지식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참된 신령한 지식의 특징은 사람이 그것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자기 자신의 무지를 더 많이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인간이 겸손해야 할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거리 때문이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나 인간은 열등하고 보잘것 없는 존재다. 인간은 벌레와 같다. 먼지 속의 벌레가 최고의 존경과 겸손으로 무한하신 위엄과 존재에게 접근하는 것은 특별한 겸손의 행위가 아니다. 성도의 최고의 성취조차도 자기들 눈에 미미해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안에 거하면서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이다. 겸손은 모든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다. “뭇사람을 공경하며”(벧전2:17). 그것은 교회 밖에 있는 사악한 사람들 뿐 아니라 교회내에 있는 거짓 형제들과 박해자들까지 공경한다.
에드워즈는 신앙감정을 마리아의 향유에 비유한다. 그녀가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은 그 향유는 온 집을 달콤한 향기로 가득 채웠다. 그것은 옥합에서 흘러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옥합이 깨어질 때까지는 향유가 흘러나올 수 없었으며 그 향기를 발할 수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은혜로운 감정들도 상한 심령(broken heart)에서 흘러나온다. 그리스도에게 달콤한 향기이며 기독교인의 영혼을 하늘의 달콤함과 향내로 가득 채우는 모든 은혜로운 감정들은 상한 심령의 감정들이다. 모든 은혜로운 감정은 겸손으로 채색된 것이다. 참된 기독교적 사랑은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것이든 사람에 대한 것이든 겸손하고 상한 마음의 사랑이다. 성도의 욕망도 그것이 얼마나 열렬한 것이든 겸손한 욕망이다. 그들의 소망은 겸손한 소망이다. 그들의 기쁨은 심지어 그것을 형언할 수 없으며 영광에 가득한 것일 때라도 겸손한 상한 심령의 기쁨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심령을 더 가난하게 만들며 더 어린아이처럼 만들며 더 겸비한 처신으로 인도하는 경향을 가진다(478-9).
우리는 겸손에 대한 에드워즈의 논의를 진지하게 따라왔다면 자신에게 적용해 볼 필요가 있다.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성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나쁜 신호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제 아주 엄격히 자신을 검토해보라. 그러한 점검 후 나보다 더 나쁜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결론이 나왔다면 다시 점검해 보라. 당신이 자신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스스로를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자신의 겸손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만일 다시 내 자신의 겸손을 높이 평가하지 않아, 나는 마귀만큼이나 교만해라는 결론이 나온다면 다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스스로를 겸손하다고 생각지 않는지 검토해 보라. 성도들이 스스로를 겸손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에드워즈가 얼마나 철저히 경계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또 자기가 남보다 낫다고 여기는 것을 얼마나 악한 것으로 강조하는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7. 일곱 번째 적극적 표지: 성품의 변화(480-6)
- 은혜로운 감정을 다른 감정들과 구별하게 해 주는 또 하나의 표지는 은혜로운 감정은 본성의 변화를 동반한다는 것이다(Another thing, wherein gracious affections are distinguished from others, is, that they are attended with a change of nature).
에드워즈는 처음부터 성품의 변화, 즉 인격적 성화를 크게 중시했다. 그는 성령의 능력이나 은사 같은 초자연적 선물보다 그리스도인다운 성품을 가지는 것이 훨씬 더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만일 그러한 인격적 변화가 없다면, 은사나 능력이란 그가 보기에 거의 무의미한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회심은 곧 성화를 낳는다고 보았다. 성화되지 않는 회심은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는 은혜로운 신앙 감정은 성품의 변화를 수반한다고 본다. 모든 영적 발견들은 단지 현재의 행위, 감정, 영혼의 골격만이 아니라 영혼의 본성(nature of soul) 자체에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회심에 대해 묘사할 때 성경은 성품의 변화를 강력히 시사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즉 회심은 사람을 죄에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크고도 전반적인 변화이기 때문에, 회심자의 마음과 본성 자체가 죄에서부터 돌아서서 거룩함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거룩한 사람이 되며, 죄와 원수가 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에드워즈는 인격적 변화 없는 체험은 망상이라 본다. 사람안에 크고 지속적이며 괄목할 만한 변화가 없다면 회심의 체험이라는 것이나 크게 감동되었다는 것도 다 상상이요 가식일 뿐이다. 에드워즈는 그것을 돼지는 씻어도 그 더러운 본성이 그대로 남아있고 비둘기는 더러워져도 깨끗한 본성이 그대로 남는 것에 비유한다.
비록 은혜는 악한 본성적 기질을 완전히 뿌리뽑지는 않지만, 은혜의 강한 능력과 악한 본성적 기질을 고칠 수는 있다. 회심때 일어나는 변화는 전반적인 변화이다. 은혜는 사람 안에 있는 죄스러운 모든 것들을 변화시킨다. 옛 사람은 벗어지고, 새사람을 입게 된다. 사람들은 철저하게 거룩해진다. 그리고 그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옛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된다. 기질적인 죄와 다른 죄를 포함한 모든 죄는 죽는다. 물론 타고난 기질은 고려되어야 함을 에드워즈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큰 변화를 거치게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인간은 타고난 체질 때문에 회심 전에 가장 빠지기 숴웠던 죄에 대해 회심 후에도 가장 쉽게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회심은 그러한 죄에 대해서조차도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다. 여전히 그 죄에 빠질 위험이 가장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더 이상 그를 주관하지는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본성이 될 수도 없다(482).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영혼에 구원하는 은혜를 주실 때 당신의 성령을 어떻게 주시는 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이 영혼의 인격적 기능 안에 거하게 하신다. 따라서 영혼은 은혜를 받을 때, 영원한 새로운 본성을 부여 받게 된다. 모든 은혜로운 역사는 전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자이심을 믿는 영혼 속에 성령이 거하시되 영혼 밖에서만 거하시면서 영혼을 강압적으로 자극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살도록 영혼 안에 거하신다. 성도의 영혼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태양(그리스도)빛을 받는다. 그 때 성도의 본성은 변화되며, 성도는 본질상 발광체가 된다. 태양이 성도 안에 빛을 비췰 뿐 아니라, 성도가 또한 작은 태양이 되어, 그 빛의 원천인 태양의 본성에 참예하게 된다. 또한 성도는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단지 마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물은 성도 속에서 솟아나고, 성도에게서 흘러나오는 물의 근원이 된다(요4:14,7:38-9). 은혜는 땅에 심겨진 씨앗에 비유된다. 그 씨앗은 땅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땅에 거처를 정하고, 거기에 뿌리를 내리며, 거기서 자라고, 거기에서 생명의 본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처음에 영적 깨달음을 얻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에너지가 회심한 이후의 체험에도 있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484). 그 깨달음과 감정들의 영향은 심령의 바닥까지 미치는데 그 깨달음과 감정들을 얼마나 체험하느냐에 따라서, 영혼의 본질 자체가 영향을 받고 변화된다. 이 지상에서의 삶이 다할 때까지 그 깨달음과 감정들은 계속 본성을 변화시킨다. 그 일은 영광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성도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역사를 본성의 계속적인 변화와 쇄신으로 묘사한다.
8. 여덟 번째 적극적 표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감(487-504)
-참으로 은혜로운 감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 같고, 비둘기 같은 심령과 기질을 가지도록 돕고, 그것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거짓되고 기만적인 감정들과 다르다. 다시 말하면 참으로 은혜로운 감정들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 온유, 평온함, 용서, 자비의 심령을 자연스럽게 닮아가게 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도와준다(Truly gracious affections differ from those affections that are false and delusive, in that they tend to, and are attended with the lamb-like, dove-like spirit and temper of Jesus Christ; or in other words, they naturally beget and promote such a spirit of love, meekness, quietness, forgiveness and mercy, as appears in Christ).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기독교의 본질과 복음의 본질적인 정신을 판단한다면, 이런 심령이야말로 탁월하게 그리스도인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심령에 있는 참되고 뚜렷한 성향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말한다(487). 참으로 경건한 사람들과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에게는 이런 정신이 있다(cf. 눅9:55).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런 정신에 입각해서 살아간다. 그들은 이 정신에 크게 사로잡히고 지배를 받기 때문에, 이 정신이 그들의 참된 본질적인 성품이 된다. “온유한 자, 긍휼히 여기는 자, 화평케 하는 자”(마5:5,7,9).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서”(골3:123-13)- 사도는 그런 기질과 성향이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탁월하고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없이는 아무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으며, 가장 영광스러운 신앙고백과 은사들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Cf. 고전13장과 갈5:22-23,약3:14-17.
복음의 본질과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의 본질에 더 특별하게 일치하는 어떤 사랑스러운 특징들과 미덕들이 있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489). 왜냐하면 그런 특질들과 미덕들은 기독교 계시의 위대한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서 더 놀랍게 드러내시고, 영광스럽게 하신 하나님의 속성들과 특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특질들과 미덕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이루어 나가시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아주 놀랍게 베풀어 주신 미덕들과 우리를 위해 세우신 복된 모범과 특별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런 미덕들은 겸손, 온유, 사랑, 용서, 자비와 같은 거들로서, 이런 미덕들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성품에 속한다. 이런 미덕들은 특히 기독교의 위대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다(마21:5,11:29). 그리스도께서 자주 어린양이라고 불리우는 까닭도 이러한 성품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지배적인 성품이 그리스도와 같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새롭게 된다(골3:10).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다(고후3:18)”(489-490).
Cf.롬8:29, 고전15:47-49. 에드워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에 대응하는 은혜가 그리스도인들 안에 있다고 말하면서,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인주와 도장에 비한다. 성품과 성품도 대응한다. 그리스도의 성품에 속한 은혜와 정신과 기질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속한다. 가지는 줄기와 뿌리의 본질을 그대로 갖고 있으며 똑같은 진액을 갖고 있고, 똑같은 열매를 맺는다. 지체들도 머리와 똑같은 생명을 갖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게 있었던 것과 똑같은 기질과 정신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뼈이며, 진정 그리스도와 한 영이라면 말이다(고전6:17). 그리고 이제는 그들이 사는 것이 아니요, 그들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면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영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의 영혼에 찍는 그리스도의 표식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상과 이름을 새겨서 그리스도인들의 이마에 찍은 그리스도의 도장이다(A Christian spirit is Christ‘s mark that he sets upon the souls of his people, his seal in their foreheads, bearing his image and superscription).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온유와 평온과 사랑의 기질로 옷 입은 자들이다. 지금까지 논의해온 미덕들은 그리스도인의 심령이나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들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본성(the very nature of the Christian spirit)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미덕들의 독특한 본성을 상징하시려고 비둘기를 택하셨다. 가장 적절한 상징은 사물의 독특한 본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비둘기는 온유, 무해함, 평화 그리고 사랑의 탁월한 상징(a noted emblem of meekness, harmlessness, peace and love)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비둘기처럼 내려오신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는다(요일2:20,27).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기름으로 기름 부음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의 감정과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달콤한 기름의 향기에서 흘러나온다. 교회는 비둘기 같은 성질과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비둘기 같은 눈을 갖고 있다고 말씀한다(아1:15,5:12,2:14,6:9,시68:13,74:19).
에드워즈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질과 성품은 용서, 사랑 그리고 자비 이 세 가지를 필수적으로 소유해야 한다고 성경은 명백하고 분명하게 가르친다고 한다(498). 1) 그리스도인이 소유해야 하는 첫 성향은 용서하는 정신이나 또는 상처를 간과하고 용서하는 성향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정신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용서와 은혜를 받는 상태에 있다는 표지라고 분명하게 가르친다(마6:12,14-15,마18:22-35). 2) 그리고 모든 참된 성도들은 사랑이 많고 자애로우며, 자비로운 기질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성경은 풍성하게 가르친다(고전13:1-3). 참된 성도를 구별하는 표지로서 신약 성경이 자주 명백하게 제시하는 것은 이런 사랑의 미덕과 성향이다. 이런 성향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 주고, 자신들도 스스로가 그리스도인의 제자인지를 알게 해 주는 특별히 뚜렷한 표지로서 종종 제시된다(요13:34,15:12,17, 13:35). 예수님께 사랑을 받은 제자 요한도 요한일서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정신과 그것에 일치하는 실천을 신앙고백자들을 시험할 수 있는 은혜의 표지로서 강조하였다. 3) 성품이 가난하고, 곤핍하고, 다른 사람들을 동정하고 구제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만이 참된 성도라는 것을 성경은 아주 명백하게 가르친다. 성경에서는 의인과 자비한자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501-2).
에드워즈는 사람들이 오해할만한 두 가지의 덕목 즉 용기와 열정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기도 하였다(494-8). “그리스도인의 용기는 야수적인 맹렬함이나 먹이를 쫓는 야수들의 대담성과는 크게 다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용기란 은혜로 말미암아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을 말한다. 하나는 악과 본능적인 정욕과 감정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죄에 대한 두려움이나 대적들의 저항에도 굽히지 않고 지속적이고 자유롭게 선한 감정들과 성향을 자극하고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강하고 용기 있게 행하면, 그리스도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잘못된 담대함을 가지고 과감하게 표출되는 정욕을 통제할 수 있다. 참된 용기를 힘 있게 드러내는 감정들은 그런 정열에 정반대되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감정이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용기는 우리 밖에 있는 원수들을 제압하고 반격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우리 내부에 있는 적들이 우리의 가장 악하고 강력한 원수이며, 우리를 대항하여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에게 있는 강한 능력은 이 악하고 터무니없는 세상에 있는 모든 폭풍우, 상처, 이상한 행동, 놀라운 일과 사건들 속에서도 그 마음의 거룩함과 평온과 온유함과 아름다움과 자비로움을 계속 유지해 가는 데서 가장 잘 드러난다. 성경은 참된 용기가 바로 이런 것이라고 가르치는 듯 하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494-5)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의 덕목으로서 열심 혹은 열정(Christian zeal)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열정은 진정 불꽃이지만, 그것은 달콤한 불꽃이다. 또는 그것은 달콤한 불꽃의 열이며 열정이다. 그 불꽃의 열은 다름 아닌 신적인 사랑 또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다. 그것은 사람이나 천사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존재할 수 있는 가장 달콤하고 가장 자애로운 것이다. 열정은 이 불꽃에 있는 뜨거움이며, 그것의 대상인 선을 향하여 강렬하고 활력 있게 나아가고, 그 대상을 갈망하며 추구한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선에 반대되고, 선을 방해하는 악에 맞선다. . .참된 열정이 더 따뜻해지고, 더 높이 고양될수록, 사람들은 그런 신랄함에서 멀어지고, 선에 대한 사랑으로 더욱 충만해진다. . .그리스도인의 열정은, 그 본성과 본질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정신이 갖고 있는 뜨거움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 열정으로 사물에 반감을 갖는 것은 주로 이 열정을 가진 그 사람 안에 있는 악한 것들에 반감을 갖는 것이다. . .따라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열정은 온유와 양선과 사랑의 정신에 대립하지 않으며 어린 아이와 어린 양과 비둘기의 정신에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전적으로 그런 정신에 일치하고, 그런 정신을 촉진시키는 경향이 있다“(497-8).
에드워즈에 의하면 참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 양 같은, 비둘기 같은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성경이 매우 충분하고 많이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본질적이며 탁월하게 복음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의 본질이며, 참된 기독교의 본질적인 정신임을 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확실하게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의 감정에는 그런 정신이 내재한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이 정신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두려움과 소망, 슬픔과 기쁨, 확신과 열정에 대한 본질적 성향인 것이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성경의 가치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이 확언한다. 즉 그리스도인들 안에 있는 참된 기독교의 본질에 속한 모든 것은 이런 경향성이 있고 이런 방식으로 역사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땅위에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런 정신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오히려 그런 정신과 본질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또 그 정신이 참되고 정당하게 자신의 성품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따라서 에드워즈에 의하면 목사들과 다른 사람들은 이와 정반대되는 성품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경험한 깨달음과 교훈들을 그럴듯하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들이 회심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도록 권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502). 참된 회심은 그 사람이 과거에 갖고 있었던 사악함 중에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졌던 부분을 아주 주목할 만하고 느낄 수 있도록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은혜는 앞에서 다루어온 정신과 반대되는 방탕이나 음란함 같은 죄악을 억제하고 죽이는 강한 성질이 있다. 과연 성경은 복음의 은혜로 말미암아 악한 본성이 변화된다고 말씀한다(사11:6-9,65:25,딛3:3-5,골3:7-8).
9. 아홉 번째 적극적 표지 : 하나님을 두려워함(505-514)
- 은혜로운 감정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며 기독교적인 온유한 마음을 동반하고 산출한다(Gracious affections soften the heart, and are attended and followed with a Christian tenderness of spirit).
에드워즈가 말하는 마음의 부드러움이란 온유한 성품이나 따뜻한 마음이 아니라 죄에 민감한 마음이다. 즉 예민한 죄의식과 민감한 양심이 그가 말하는 부드러운 마음이다. 가짜 신앙감정(false affections)의 특징은 과거와 현재의 죄에 대해 마음의 감각이 무디며 미래의 죄에 대해 덜 꼼꼼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들과 그의 섭리에 의한 징계에 대해 무덤덤하며, 자기들의 영적 상태나 자신들의 행동 방식과 경향에 대해 보다 부주의하게 만든다. 그들은 율법적 각성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 아래 있었을 때보다 죄악에 대한 분별력이 더 무디어졌고 악의 모양을 덜 두려워한다. 에드워즈는 딱딱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죄에 대한 혐오감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죄악으로부터의 구주(Savior from sin)로서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죄악들의 구주(Savior of their sins)로 그를 신뢰한다. 그들의 영적 원수들로부터 그들의 영적 원수들의 방어로서 그를 이용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기들이 아주 은혜 충만한 신자들인 양 행세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의 은혜에 대한 확신을 자신있게 고백하고 그의 사랑의 달콤함을 맛보는데서 커다란 즐거움을 누린다고 떠들어 대는 것이다.
반면 참된 은혜는 죄에 대한 양심의 깨달음을 증진시키기 때문에 부드러운 영을 동반한다. 대개 사람들이 어떤 은혜를 받기 전에는 죄에 대한 양심의 깨달음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 후에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회심된다면, 그들은 참된 회개, 믿음 안에서의 기쁨, 그리고 평안을 누린다. 이것은 공포를 종식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죄에 대한 깨달음을 종식시키는 경향은 없다. 오히려 그것을 증가시킨다. 그것은 인간의 양심을 마비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더 예민하게 한다. 죄악된 것의 죄성을 더 용이하고, 더 철저히 분별하게 하고 죄의 끔찍하고 두려운 속성에 대한 보다 큰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보다 민첩하고 깊은 감각을 가진다. 자기 자신의 죄성과 자기 마음의 사악함을 보다 더 확신하게 된다. 그리하여 참회자의 마음은 불에 덴 어린아이가 불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이 죄를 두려워한다.
에드워즈는 올바른 감정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부드러운 마음은 또 다른 면으로 어린아이들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마음의 부드러움은 우리 구주께서 그런 사람을 어린 아이에 비유하심에서 아름답게 예시되었다”(508). 어린 아이의 살은 부드럽다(왕하5:14). 또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의 마음도 매우 부드럽다. 어린아이는 살만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도 부드럽다. 어린 아이의 마음은 쉽게 움직이며, 쉽게 영향을 받으며, 쉽게 굴복한다. 어린아이들은 동정심에을 쉽게 품으며,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다른 사람이 고통 속에 있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한다(요11:35,롬12:15,고전12:26). 그리스도인 역시 그렇다. 어린아이는 세상의 악한 일들을 보고 금방 슬퍼하며, 그의 마음이 녹고, 울음을 터뜨린다. 죄의 악함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마음 역시 그렇다.
에드워즈는 소위 거룩한 담대함(a holy boldness)이라는 것의 올바른 의미를 해명한다. 그것은 노예적 두려움과는 반대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 반대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거룩한 담대함은 노예같은 관계의 거리감 및 도덕적 거리감 혹은 소외감을 없애거나 줄여준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자연적 거리는 전혀 없애주지 않는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보다 한없이 낮은 존재로 남는다.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부자 관계를 강조하느라고 하나님에 대한 무엄함, 혹은 무례를 권장하는 경우에 대해 에드워즈는 경고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위대하신 여호와를 언급할 때 거룩한 담대함이라는 미명하에 혹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친근함과 친숙함이라는 명목하에 아주 부적절하고 있을 수 없는 대담함을 보인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그 무한한 거리를 보았더라면, 그들은 그런 일을 생각하기만 해도 두려움과 혼란으로 인해 정신을 가눌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광대하신 하나님과 미물인 자신들과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여 하나님 앞에서 무엄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는 한국교회에서 종종 발견된다. 하나님과 자기 자신들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졌다면 먼지 속의 가련하고 죄악된 벌레가 제 아무리 담대할지라도 하늘의 흠없고 영광스러운 천사들이 가진 것 보다 더 작은 경외심을 가지고서 하나님에게 나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에드워즈는 성도에게 거룩한 담대함이 더 많이 생길수록, 그는 자기 자신을 덜 의지하게 되며, 잘난 체하는 거만함도 줄어들게 되고 겸손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성도가 자신이 지옥에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확신할수록, 그는 지옥이 얼마나 황폐한 곳인지를 더 강하게 의식하게 된다. 그의 믿음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덜 요동하지만, 엄숙한 경고와 하나님의 찌푸린 얼굴과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재난을 보면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쉽게 마음이 움직인다. 그는 가장 견고한 위로를 받지만 그 마음은 가장 부드럽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유하지만 심령으로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가난하다. 가장 위대하고 강한 성도이지만, 그들 가운데 가장 연약한 어린아이와 같다(514).
10. 열 번째 적극적 표지: 신앙의 균형(515-530)
-참으로 은혜로운 거룩한 감정들이 거짓된 감정들과 다른 점 또 한 가지는 그것들이 아름다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Another thing wherein those affections that are truly gracious and holy, differ from those that are false, is beautiful symmetry and proportion).
성도들이 경험하는 미덕들과 은혜로운 감정들의 균형이 이 땅 위에서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 균형은 여러 가지 면에서 결함이 있다. 하지만 은혜로운 감정들과 성도들이 가진 참된 믿음 사이가 소름 끼칠 정도로 조화롭지 못한 경우는 결코 없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성도들이 지닌 참으로 거룩한 감정에는 그들이 전인적으로 성화를 이루어 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조화와 균형이 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형상 전체가 각인되었으며, 그들의 온몸은 전체적으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이다(엡4:22-23).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은혜(골1:19,요1:14,16)가 성도들 안에 있다.
반면에 위선자들이 가지는 거짓된 감정들은 불균형과 부조화가 특징이다. 그들의 감정은 크게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양낙흥 교수는 후자의 사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제시한다.
1)과거에는 죄를 애통해 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그러나 참된 은혜는 죄를 애통해 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애통해하는 것이다(마5:4).
2)인간은 사랑하나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든지 아니면 그 역이다. 전자는 어떤 사람이 아주 성품이 좋고 관대하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경우이고, 후자는 어떤 이가 하나님을 사랑하다 하면서 이웃을 향해 묵은 원한을 품고 있는 경우이다.
3)사람의 영혼은 사랑하는 척하나 육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동정심이 없는 경우다. 이것은 현대의 신학적 보수주의자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라 할 수 있다.
4)남의 결점에 대해서는 흥분하나 자신의 결함과 부패에 대해서는 덤덤하다. 그러나 참된 종교적 정서를 가진 자는 남의 결함보다 자신의 결함에 더 민감하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다른 성도들의 차가움과 고약함으로 인해 기분이 상하고 그것에 대해 많이 슬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나쁜 마음보다는 자기의 나쁜 마음에 대해 더 상심한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염두에 가득한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그가 가장 재빨리 알아차리는 것이다.
5)아직 더 낮은 차원의 것이 없다면 그보다 높은 차원의 것은 없음에 분명하다고 결론지어도 무방하다. “그것은 만일 사람들이 믿음에서 높은 수준을 이룬 체하지만 그것보다 더 낮은 단계의 수준을 결코 이룬 적이 없다면 그것은 헛된 자랑의 표시라는 사실이다”(522). 예컨대 사소한 도덕성 차원을 초월하고 영적이고 신령한 삶을 살기로 했다 하면서 실제는 그 시시한 도덕성도 없는 경우이다. 스스로 신령하다 하면서 기본적 상식, 교양, 예절, 합리성도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한국 신자들이 유의해서 들어야 할 부분이다. 또 자기 내면의 사악함으로 인해 크게 상심한 척하지만 그보다 낮은 차원인 외적 생활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노골적으로 위반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경우다.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저주받는 것도 불사하겠다고 공언하면서도 자기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재산과 명예의 작은 손해, 사소한 세상적 불편도 감수하지 않으려는 경우도 여기 속한다.
6)덜 중요한 것에는 참지 못하고 열을 올리나 더 중요한 것은 은밀한 기도와 찬양 중에 하나님 앞에 영혼을 쏟아 놓거나 하나님을 더 닮아가는 일 등은 소홀히 한다. 참된 신앙 감정의 특징은 자주 홀로 하나님과 대화할 고독한 곳을 찾는 것이다. 물론 참 그리스도인들도 신앙적 교제와 기독교적 대화를 즐거워한다. 그러나 때로 그는 모든 사람들을 떠나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도 좋아한다. 참된 신앙이 있는 사람은 거룩한 명상과 기도를 위해 자주 고독한 장소에서 홀로 있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성경에 의하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를 받는 것은 홀로 있을 때였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가장 현저히 드러내신 것이나 언약의 자비를 베푸신 것은 그가 홀로 있을 때였다. 죄인들의 영혼을 위한 성도의 해산의 수고와 고통은 주로 은밀한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외에는 함께 대화할 아무도 없을 때는 무감동하면서 다른 이들과 함께 하면 크게 은혜를 받는 신앙은 장래가 아주 어둡다고 에드워즈는 경고한다. 만일 어떤 이가 집단적 신앙(social religion)에는 크게 열을 올리는 것 같지만 골방의 신앙(religion of the closet)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가 없다면 그것은 의심스러운 것이라는 말이다(527-530).
7)어떤 특정한 죄에만 분개하고 자신의 죄에는 냉담하다. 참 은혜로운 감정은 죄 일반에 대해 증오심을 가지게 한다. 그 강도는 그 죄성의 크기에 비례한다. “내가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119:104,128). 참된 열심을 가진 자는 주로 자신의 죄에 대해서도 적합한 열정을 발휘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죄악에 대한 가짜 미움은 단지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해서만 반대한다. 이를 테면, 신성모독이나 사치스러운 의상에 대해 열을 올리는 자들이 자신의 탐욕, 신앙 퇴보, 윗사람에 대한 시기심, 다스리는 자들에 대한 뿌리 깊은 악의 등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8)관심이 수시로 변하여 잠시 영적인 관심을 갖는 것 같다가는 금방 세상적 관심으로 옮아간다. 비범한 시기, 즉 성령이 비상하게 부어지는 때, 혹은 하나님의 섭리가 비범하게 나타나는 때, 혹은 어떤 커다란 자비를 실제로 받았거나 받았다고 상상할 때, 혹은 어떤 비상한 지상적 축복을 받고 있을 때, 그들은 크게 감동한 것처럼 보이고 신앙 생활에 열심을 낸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그들은 주로 다른 일들에 마음을 쓰는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 그들이 주로 신경을 쓰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이 세상의 일들에 대해서다.
11.열한 번째 적극적 표지: 하나님을 향한 갈망(531-539)
- 은혜로운 감정들과 다른 감정들 사이의 차이점을 크고 뚜렷하게 구분해 주는 또 하나의 다른 표지는 은혜로운 감정들이 더 높이 고양되면 될수록, 영적인 만족을 위한 영혼의 영적인 욕구와 갈망이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반면에, 거짓된 감정들은 그 자체로도 만족해한다(Another great and very distinguishing difference between gracious affections and others is, that gracious affections, the higher they are raised, the more is a spiritual appetite and longing of soul after spiritual attainments increased. On the contrary, false affections rest satisfied in themselves).
참된 성도가 은혜로운 사랑으로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사랑하기를 갈망하게 되며 자신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더 괴로워한다. 거룩해지고 싶은 영적 욕구와 거룩한 감정을 더 많이 소유하고 싶은 갈망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이미 탁월하게 거룩해진 사람에게서 더 생생하고 강렬해진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치는 장차 누리게 될 온전한 영광을 단지 맛보고 시식하는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바울이 지적한대로(고전13:10-11) 이 땅에서 가장 탁월한 성도들은 그들이 장차 도달할 성숙함과 완전함에 비하면 단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성도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도달하게 되는 최고의 탁월함과 완전함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소원하는 욕구가 사그러들지 않는다. 오히려 성도들은 바울처럼 앞으로 더 나아가려는 강렬한 갈망이 가지는 것이다(빌3:13-15). 그 이유는 사람들이 더 거룩한 감정들을 더 체험하면 할수록 영적인 미각을 더 많이 가지게 되며, 그 미각으로 거룩함의 신적인 아름다움의 맛과 탁월성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더 큰 영적 깨달음과 감정들을 체험하면 할수록, 더 성장하기 위해 은혜와 영적인 양식을 더욱 간절히 갈구하는 거지가 된다. 또한 그는 적절한 수단들과 방편들을 사용해서 더욱 더 간절하게 은혜와 영적인 양식을 추구하게 된다. 왜냐하면 거룩함을 참되고 은혜롭게 갈망하는 것은 결코 나태하고 무력한 갈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론] “이상에서 말한 내용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 영적인 즐거움은 영혼을 만족시키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과 어떻게 모순되지 않을 수 있는가?”(533)
[에드워즈의 답변]
1. 에드워즈는 영적인 즐거움 자체가 아주 싫증나게 하는 성향이 있어서 단지 그 즐거움을 조금만 경험한 사람도 더 이상의 즐거움을 갈구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적인 즐거움은 몇 가지 점에서 영혼을 만족시키는 본성이 있다고 한다. 1) 영적인 즐거움은 그 종류와 본질상, 사람의 영혼의 본성과 능력과 필요에 온전히 일치하게 된다. 그래서 영적인 즐거움을 조금만 경험한 사람은 어떤 다른 즐거움을 갈구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영혼은 결코 물리거나 싫증내지 않는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온 힘을 다해 이 즐거움에 몰두한다. 2) 영적인 즐거움은 영적인 욕구가 기대하는 바를 채워준다는 의미에서 영혼에 만족을 준다. 3) 영적인 즐거움이 주는 만족과 기쁨은 영구적이다. 4) 영적인 선은 만족을 준다.
2. 1항의 주장은 영혼이 조금 맛본 것과 같은 것을 더 맛보려는 욕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는 그가 더 맛보면 맛볼수록 완전한 만족에 이를 때 까지 그의 욕구가 더 커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혼이 영적인 선을 경험하면 할수록, 영혼은 영적인 선의 탁월하고, 비할 데 없는, 고상하고 만족스러운 아름다움을 알게 되며, 영혼의 완전함에 이를 때까지 더 많은 영적인 선을 더 간절하게 갈구하고 갈망하게 된다. 따라서 영적인 감정들은 본질상 그 감정들이 더 크면 클수록, 은혜와 거룩함을 더 많이 원하고 갈망하게 된다.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은 성도들을 구별해 주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시24:6,69:32,70:4).
성경은 도처에서 그리스도인의 찾음과 구함과 수고함을 주로 자신의 회심을 찾고, 구하고, 위하여 수고함으로 묘사하며, 그리스도인의 회심은 단지 그가 해야 할 일의 시작이라고 묘사한다. 신약성경에는 경계함, 자신들을 진지하게 살핌, 자신 앞에 놓여있는 경주를 경주함, 분투하고 고통당함, 혈과 육이 아니라 정세와 권세와 싸움, 다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음, 굳게 섬, 모든 일을 다 한 후에 섬,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감, 기도에 항상 힘씀, 밤낮으로 하나님께 간구함등을 말하고 있다. 이런 말씀들의 대부분은 성도들에 대한 것이고,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런 일들은 회심을 구하는 죄인들과 관련해서 한 번 언급된 반면에, 성도들이 그들이 고귀한 소명에 따르는 위대한 의무를 다함과 관련해서는 10번이나 언급되었다.
성경에서 성도들의 갈망, 열망 그리고 목마름을 언급할 때, 그 대상이 어떤 것보다도 의와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것을 훨씬 더 많이 언급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순전한 젖을 사모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말씀으로 그들이 거룩하게 자라기 위해서이다. 영적인 미각의 주된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은 또한 영적인 식욕의 주된 대상이다. 은혜는 거룩한 사람의 보배이다. 위선자들 역시도 깨달음에 대한 갈망을 가질 수 있지만 그들은 깨달음이 자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영향력보다는 깨달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크게 나타나는 것과 깨달음이 가져다주는 현재의 위로 때문에 깨달음을 갈망한다. 하지만 성도에게는 거룩을 더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영을 더 거룩하게 열망하고 갈증을 느끼는데 이것은 호흡이 살아있는 몸에 자연스러운 것처럼 거룩한 본성에 자연스러운 것이다.
에드워즈는 거짓되고 기만적인 기쁨과 다른 신앙 감정들에서는 반대상황이 벌어진다고 말한다. 이전에 어떤 큰 욕구가 있었다면, 은혜를 받은 후에는 거짓되고 기만적인 감정들이 고양되면서, 그 욕구는 사라지거나 줄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경우 거짓된 감정들이 고양되어 그를 속이고, 그가 회심했으며, 그가 영적으로 좋은 상태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함으로써, 빛과 은혜를 더 간절하게 열망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자신의 죄가 사하여졌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만족하게 된다. 특별히 거짓된 감정들이 아주 크게 고양될 때, 그 감정들은 은혜와 거룩함을 열망하지 않게 된다. 자신을 가난하고 곤핍한 피조물로 보기는커녕, 자신은 부유하며, 자신의 재산이 증가했다고 생각한다. 마치 그들이 해야 할 일을 다 끝낸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그들의 처음 체험 또는 과거에 가졌던 어떤 큰 체험에 의지하여 살아간다. 그리고 하나님과 은혜를 향한 그들의 추구와 갈구는 끝나버린다.
12. 열두 번째 적극적 표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540-638)
-은혜로운 거룩한 감정들은 그리스도인의 행위로 드러나고 열매를 맺는다. 거룩한 감정들은 그 감정들을 경험하는 주체인 성도에게 영향력과 효력을 미치게 되며, 그 결과로 기독교의 원리와 전체적으로 일치하고, 그 원리에 따라 규정되는 행위는 성도가 일생동안 실천하고 마땅히 행해야 한다(Gracious and holy affections have their exercise and fruit in Christian practice. I mean they have that influence and power upon him who is the subject of them, that they cause that a practice, which is universally conformed to, and directed by Christian rules, should be the practise and business of his life.)
이상의 진술이 의미하는 바를 에드워즈는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1) 세상에서 성도의 행위와 실천은 기독교의 원리에 전체적으로 일치해야 하고, 그 원리에 따라 규정되어야 한다. 2) 성도는 그런 거룩한 행위를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한 일로 삼아야 한다. 거룩한 실천은 성도가 주로 관계하고 헌신하며 최고의 간절함과 열심을 가지고 추구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도는 이런 믿음의 행위를 두드러지게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의무로 삼아야 한다. 3) 성도는 이 땅에서 그의 삶이 끝날 때 까지 이 일을 평생 지속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변화나 모든 시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사는 날 동안 지속해야 한다(540).
1. 거룩한 실천의 3가지 특징
1.1. 사람들이 전적으로(universally)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사항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원수들인 아말렉 족속을 다 죽이라고 명을 받았지만, 아각을 제외하고 모두를 죽였다. 그를 살려준 일이 그 자신에게는 파멸이 되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으로 들어갔다. 왜냐하면 그들이 전심으로 주님을 따랐기 때문이다(민14:24,32:11-12,신1:36,호14:6-9,14). 사람들이 자신들의 오른손과 오른 눈처럼, 가장 쉽게 자신들을 공격하고, 그들의 본성적인 성향, 악한 습관 또는 특정한 상황들 그리고 그 외의 다른 것 때문에 가장 쉽게 노출되는 가장 가까운 죄들과 결별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죄의 욕망과 결별하기 전까지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큰 반감이 있고 가장 지키기 어려운 의무에 순종하기 전까지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계시하지 않으실 것이다.
어떤 사람이 참으로 전적으로 순종적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금지의 명령, 즉 전반적으로 악한 행동을 피하는 것 또는 행함으로 짓는 죄를 피하는 것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544). 행함의 죄뿐 아니라 믿음의 적극적인 명령에도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행하지 않음으로써 짓는 죄 또는 태만의 죄 역시 행함으로써 짓는 죄 만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마25장).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려면 이 사람은 반드시 진지하고, 신앙적이며, 헌신적이고, 겸손하며, 온유하고, 용서를 잘하며, 화평하고, 존경하며, 잘 이해하며, 자애로우며, 자비로우며, 사랑이 많으며,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런 것이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법을 순종하지 않는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1.2.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꾸려 가기 위한 사업과 같이, 신앙 생활과 하나님에 대한 섬김을 아주 진지하고 부지런하게 행하는 것을 필수로 한다. 그들은 선한 일을 하되 열심히 한다(딛2:14).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온 마음을 쏟고, 온 힘을 다해 한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으며, 온종일 힘든 많은 봉사를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신약 성경 도처에 그리스도인의 일은 사람들이 힘을 다해 가장 진지하게 감당해야 하는 경주, 씨름, 격투등과 같은 운동에 비유된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기 때문에, 진지함과 간절함이 없이는 생명에 이르는 좁은 길을 끝까지 갈 수 없다. 진지한 노력 없이는 가파르고 높은 시온 산을 올라갈 수 없으며 하늘의 도성에 도달할 수 없다. 지속적인 노력 없이는 우리가 헤엄치고 있는 빠른 시냇물을 거슬러 그 상류에 있는 생명수 샘에 도달할 수 없다.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는 종들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게을리하는 것은 공공연한 반역만큼 저주스러운 것이다. 신자들은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히6:11-12). 그리고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하신 일을 의지하고, 그리스도를 참으로 먹으며 의지하고 사는 자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일과 경주하는 일에 진지하고 간절한 정신으로 임한다(히12:1).
1.3.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가 만나게 되는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마지막까지 전적인 순종의 길과 부지런하고 진지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지속해 나간다(546). 여기서 시련이란 신앙고백자의 신앙 여정 가운데 일어나고, 신앙고백자가 만나게 되는 일로서, 그가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신실함을 다하는 것을 특별히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시련 혹은 시험의 종류는 다양하다. 사람이 자신의 의무를 지속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많은 것이 있다. 다른 것들은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건전성과 지속성을 시험하는 것이 있다. 그것들은 그들이 감당해야 할 의무를 두렵게 보이는 경향이 있으며, 그들이 무서움을 느끼고 의무를 피하게 만든다. 신앙을 고백하는 당신의 친구들과 종들에게 의도적으로 시련들을 허락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그들의 양심이 그들이 속해있는 상태를 충분히 깨달을 수 있게 하신다.
에드워즈는 참된 성도들은 더 이상 전적으로 순종할 수 없을 정도로는 결코 퇴보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548). 참된 성도들은 어떤 죄를 짓고 어느 정도 퇴보할 수 있다. 그리고 특정한 유혹들로 말미암아 타락할 수 있고, 정말 큰 죄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신앙생활과 하나님에 대한 섬김에 진저리가 날 정도까지는 결코 타락할 수 없고, 습관적으로 믿음 생활을 하고 하나님에 대한 섬김을 싫어하고 무시하는 정도까지는 결코 타락할 수 없다. 가장 힘든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기독교의 모든 원리들을 지키고 마땅히 해야 할 모든 의무 심지어 가장 어려운 의무를 포기할 정도까지는 퇴보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신앙 생활보다 다른 일들에 습관적으로 더 열심을 내는 정도까지는 떨어질 수 없다.
참된 성도는 회심하기 전의 모습과 회심 이후의 삶의 모습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까지는 퇴보할 수 없다. 참으로 회심한 사람들은 새 사람이며,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내적으로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새로운 사람이며, 영과 혼과 몸 전반에 걸쳐 거룩해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옛 것은 지나갔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 그들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며 그들의 삶이 끝날때까지 계속 그렇게 행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타락하여 이런 일들을 가시적으로 중단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결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적이 없다는 증거다. 그리고 특별히 자신들이 회심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생각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 생활을 중단하게 하는 이유라면, 그것은 그들이 위선자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2. 은혜로운 감정은 그리스도인의 행함에서 드러나고 열매 맺는다.
이는 은혜로운 감정이 영적인 작용과 양향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며, 감정들이 흘러나오는 내적인 원리가 신적인 어떤 것, 하나님의 자기 전달, 신의 본성에의 참여,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사심, 영혼의 인격적 기능들과 연합된 성령의 내주하심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내적인 생명의 원리이며, 영혼의 인격적 기능들이 작용할 때 성령 역시 당신의 본성대로 역사하신다. 마음속에 있는 은혜의 직접적인 원천인 그리스도의 영은 온전한 생명이며, 온전한 능력이며, 온전한 행동이시다(고전2:4,살전1:5,고전4:20). 구원을 경험한 감정들은 그 안에 비밀스러운 견고함, 생명 그리고 힘이 있다. 그것을 통해 이런 감정들은 마음을 붙들고, 도취시키며, 사로잡아 간다(고후10:5). 따라서 거룩한 감정들은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힘이 있다. 거짓된 깨달음과 감정들은 사람의 행동과 실천의 원천에 다다라서 그것을 지배할 만큼 충분히 깊이 역사하지 못하지만, 은혜로운 감정들은 마음 깊숙한 곳까지 다다르며, 생명과 행동의 아주 깊은 원천들을 지배하게 된다. 즉 실천하도록 효력을 발휘하는데서 참된 믿음의 능력이 주로 나타난다. 경건의 능력(딤후3:5)은 가장 먼저 영혼의 내부에서 은혜로운 감정들이 민감하고 생생하게 작용할 때 드러난다. 이런 경건의 능력은 거룩한 감정들이 실천적으로 행사되게 하는데 중요한 증거가 된다.
은혜로운 감정들이 그리스도인의 행함으로 행사되고 효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은혜로운 감정들의 가장 주된 객관적 근거가 신적인 일들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초월적으로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본질에 있는 것이지, 신적인 일들이 자기나 자기 유익과 관련되었기 때문에서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는 것 같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그리고 은혜로운 감정들이 거룩하게 행동하게 하는 이유는 또한 모든 거룩한 감정의 토대인 신적인 일들에서 보이는 탁월성 즉 신령한 일들이 갖고 있는 도덕적 탁월성 또는 아름다운 거룩함에 있는 듯 하다고 말한다(553). 거룩함 자체 때문에 거룩함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거룩함을 행하게 하며 거룩한 모든 것을 행하도록 이끈다. 주로 거룩함을 봄으로써 모든 은혜로운 감정들이 자극되고 생겨나고 제어된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영혼에게 거룩한 것, 거룩한 모든 것의 달콤함을 맛볼 수 있는 본성적인 미각을 주시며, 동시에 거룩하지 못한 모든 것을 혐오하고 불쾌해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영광을 본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강하게 이끌리게 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야할만큼 그리스도가 가치 있는 분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께 철저하게 복종하고 싶어 하며, 진지한 열심으로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애쓰게 되며,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어려움을 기꺼이 감수해 나가며, 그리스도께 지속적으로 헌신하게 된다(554).
은혜로운 감정들이 실천적인 경향성과 결과를 갖는 것은 그런 감정들이 신적인 일들이 실재하고 확실하다는 것을 온전히 확신하기 때문이다. 믿음에 속한 일들이 진리라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일들의 지배를 받고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 또한 거룩한 감정들이 행함으로 표현되고 열매 맺는 이유는 그런 감정들을 일으키는 본성의 변화를 살핌으로서 알수 있다고 한다. 본성이 변하지 않고는 사람의 행위는 온전히 변하지 않는다. 나무가 좋은 나무가 되어야 비로소 그 열매도 좋은 열매가 된다. 본성은 그것에 저항하는 어떤 것 보다도 더 강력한 생명의 원리이다. 비록 본성은 잠시 동안 힘으로 억제될 수 있지만, 본성은 결국 그것을 억제하는 것을 이기고 만다. 부패한 본성이 죽지 않고 그 부패의 원리가 사람 속에 온전히 남아있는 한, 그 본성이 다시 지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일은 헛된 일이다. 하지만 만일 옛 본성이 정말 죽고, 새로운 하늘의 본성이 주입되면 그 사람들은 새 생명 가운데 행할 것이고 그들의 인생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렇게 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556).
거룩한 감정들이 실천적으로 행하고 열매를 맺는 또 다른 이유는 거룩한 감정들이 겸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교만한 마음은 거스르는 마음이지만, 겸손한 마음은 순복적이고 복종적이며 순종적인 마음이다. 그리고 은혜로운 모든 감정들에 동반하는 어린 양 같고 비둘기 같은 정신은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에 있는 모든 말씀을 지킨다. 그리스도인의 실천은 이 두 번째 돌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기독교의 외적 실천 역시 주로 이 두 번째 돌판과 연관이 있다. 또한 거룩한 감정들이 거룩한 행위를 향한 진지함과 행동과 헌신과 인내를 통해 표현되고 드러나는 주된 이유들로 온유함, 감정 자체, 그리고 영적욕구와 갈망등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거룩한 감정들이 행함있는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이유는 앞에서 거룩한 감정들의 특징을 진술한 내용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논점은 만일 성경이 신실하고 진실하게 신앙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 예증될 수 있고 확증될 수도 있다고 에드워즈는 생각한다(557).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며 하나님을 우리의 유일하신 주님과 분깃으로 선택할 때 그리고 대가를 치루면서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겠다고 결심할 때 신실함과 진실함을 매우 강조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믿음에 속한 모든 것으로 마음을 굳게 하고, 믿음에 동반되는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 대가를 기꺼이 무릅쓰겠다는 마음은 전반적인 행동을 통하여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나타내고 실제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모든 어려움들을 겪으며 인내와 끈기로서 믿음을 지키도록 이끈다.
에드워즈는 참된 은혜는 비활동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활동적이라고 말한다(558). 왜냐하면 은혜는 생명 그 자체이며 가장 활동적인 생명이고 심지어 영적, 신적 생명이기 때문이다. 은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본질에서 은혜보다 열매를 맺고자 하는 더 큰 경향성을 가진 것은 이 세상에 결코 없다. 은혜의 속성이 거룩한 행동이나 실천의 원리로 드러난다. 은혜를 주입하는 하나님의 역사인 중생은 실천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실천이 바로 은혜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실천을 목적으로 모든 사역이 이루어진다. 사람의 영혼을 이렇게 강하고 다양하게 변화시키는데 모든 것이 계획되고 구조되어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직접적인 실천을 지향한다(엡2:10). 실천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표이다(딛2:14,고후5:15,히9:14,골1:21-2,벧전1:18,눅1:74-5등). 또한 거룩한 행실은 성도들을 택하신 목적이다(요15:16,엡1:4,2:10). 거룩한 실천의 삶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도를 위해 행하시는 모든 일의 목적이다(560). 따라서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것은 이 목적에 이르도록 설계되어 있다. 모든 은혜, 모든 깨달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체험에 속하는 모든 것은 직접적으로 이 거룩한 실천이라는 열매를 지향한다.
에드워즈는 성도들의 건전한 신앙고백과 선한 열매는 항상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성도들이 삶 속에서 맺는 열매는 언제나 그들의 아름다운 고백 소리와 같다는 점을 순금 등대(슥4장)와 제사장의 에봇에 달린 금방울과 석류에서 그 예표를 찾아낸다(561-2). 그리스도인의 실천이라는 열매는 성도들에게서 언제나 나타나며, 오직 성도들에게서만 나타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참된 그리스도인들 말고는 어느 누구도 그런 순종의 삶을 살지 못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순종적인 삶은 그들의 의무에 전반적으로 헌신된 삶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생활에 전념하는 삶이다. 그러나 위선자라고 해도 끝까지 신앙생을 해낼 자는 없다. 위선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시련을 견뎌내지 못하고, 잘못된 길로 다시 돌아가고 만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의 실천 또는 거룩한 삶은 참되고 구원을 가져다 주는 은혜의 크고 확실한 표지라는 점을 입증했다. 이제 두 번째로 그가 입증하고 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실천 또는 거룩한 삶은 은혜의 모든 표지 가운데 최상의 표지라는 것이다(568).
3.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천과 거룩한 삶이 그의 이웃과 형제들의 눈에 그 사람의 신실성의 표현과 표지가 된다.
주님은 다른 사람들을 분별하는 기준에 대해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말씀하셨다. 나무의 성질을 알려 주는 절절한 증거는 그 열매이다(마7:16,20,12:33). 그리스도께서는 어느 곳에서도 나무는 그 잎이나 꽃으로 안다든지, 사람은 그들의 말이나, 그들이 경험한 대단한 이야기나 그들이 말하는 태도나 자세나, 표현의 강조점이나 감정이입이나, 열정적으로 말하는 모습이나 유창하게 말하는 모습이나 그들의 많은 눈물과 감정적인 표현이나 그들에게서 당신의 마음이 느끼는 것으로 안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열매로 그들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눅6:44). 믿음은 영혼 속에서 빛나는 별이다. 그리고 그 빛을 다른 사람들 앞에 비취는 길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이다(마5:16).
사도들 역시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그리스도인들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평가하는 주된 근거라고 말한다(히6:9ff,빌2:21-2). 사도 요한은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요삼3-11). 에드워즈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우리 이웃에게 보이는 방식은 말로써 보이는 방법과 우리의 행위로써 보이는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571). 약2장을 인용하면서 에드워즈는 후자의 방법을 최선의 증거로 생각하고 훨씬 더 선호한다고 말한다. 에드워즈는 이성조차도 사람의 행위가 그 말보다도 그 사람의 마음을 더 충실하게 보여준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모든 시대와 나라들에게 걸쳐서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상식은 사람들의 마음을 주로 그들의 행위로 판단하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이성은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14장 21절에서 하신 말씀에 동의한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따라서 우리가 자신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고 닮은 것 같으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크게 노력하고, 자신을 부인하며,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나라와 유익을 촉진시키는 것 같은 사람을 보면, 이성은 이것이 바로 그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더 신뢰할 만한 증거라고 가르친다(572),
잠시 동안 고양되는 감정 때문에 사람들은 쉽게 말을 내뱉는다. 그렇지만 그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경건은 행동보다는 말에서 더 쉽게 가장된다. 그리스도인의 실천은 대가와 희생이 따르고 아주 수고로운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자기 부인과 생명에 이르는 협착한 길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있다. 위선자들은 성도들처럼 행동하는 것보다 더 쉽게 성도들처럼 말하게 된다. 결국 명백한 것은 이웃들의 눈에 실천은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참된 믿음이 있다는 최선의 표지 또는 표현인 것이다. 이 문제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에드워즈는 두 가지 보충 설명을 한다.
3.1.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실천을 다른 사람들의 눈에 참되고 신실한 은혜의 최선의 증거라고 말할 때 기독교에 대한 신앙고백은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전제된다(574). 신앙 고백 자체는 신앙이 진실하다는 증거가 아니며, 신앙을 뚜렷이 특징짓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데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고 믿지 않는다고 명백하게 말한다면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주신 이 원리에 기초해서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간주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마7:15와 약2:18이 말씀하는 원리는 우리가 오직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분별하는데 사용되도록 주어진 것이다. 열매와 활짝 핀 꽃들은 항상 연접해 있어야 하고 방울과 석류는 함께 있어야 한다.
에드워즈는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고백했다고 말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 내지는 “어떤 신앙 고백이 기독교를 적절하게 고백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1)기독교 신앙을 합당하게 고백하려면 당연히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필수적인 모든 것을 고백해야 한다. 기독교의 본질에 속한 것, 예수가 메시아이신 것, 그가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다는 것을 비롯하여 복음의 다른 본질적인 것들을 믿는다고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정통적인 교리를 믿는 것 만큼이나 신앙에 본질적인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합당한 진노를 의식하고 우리의 마음으로 모든 죄를 버리며, 우리의 온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로 영접하며, 모든 것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를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릴 것이며,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그리스도의 소유로 바치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본질적인 것이다(마3:6-12,막1:4,행2:38,느9:2,33,35등). 신앙 고백을 할 뿐 아니라 그 고백과 함께 가시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들을 열매로 안다고 하는 것은 그들 자신들의 신앙고백과 삶이 일치하는지를 보고 안다는 말이다(576-9).
-2)이런 것들에 대한 신앙 고백은 적절하게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이라고 불릴 수 있으며, 그렇게 신앙을 고백한 사람이 앞에서 제시된 기준을 통과하려면, 그 고백은 반드시 그리스도인의 실천과 결합되어야 하고, 그 고백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고백하고 있는 내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인 능력을 갖추도록 신앙의 원리들을 충분히 교육받은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말은 아무런 의미나 뜻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579).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은 이전에 그의 선생님에게서 철저하게 배웠다는 사실, 그에게 충분한 지식이 있다는 증거, 동시에 자신의 신앙 고백에 일치하는 삶이 이 사람의 자질을 판단하는데 최선의 증거로써 반드시 인정되어야 한다(582).
에드워즈는 자신의 기독교적 체험의 특별한 과정, 시기와 정황을 조사받는 사람이 참된 회심에서 종종 드러나는 절차를 따라 그의 처음 회심의 방식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고, 관련된 일들이 지각할 수 있도록 뚜렷하게 그 본질에 어울리는 순서에 따라 일어났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형제들로 하여금 그 사람의 경험의 진실성을 판단하는데 빛을 던져 준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령께서 처음에 영혼을 구원의 단계로 이끌어 오실 때 취하셨던 독특한 절차와 단계들을 특별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만 그 신앙고백자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16세기 청교도 신학자들의 입장에 대한 에드워즈의 비평적 입장 표명이다.
3.2.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실천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실성을 판단하는 최고의 증거가 되는지를 바로 이해시키려면 그리스도인의 실천이 무엇인지에 대해 앞에서 진술한 내용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실천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단순히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소위 정직한 사람이고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 사람의 신앙고백이 대단히 신실하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나타낸 사랑과 행위와 섬김이 있다(히6:9-10). 마5-7장, 롬12장,그리고 신약의 많은 곳에서 제시하는 탁월한 원리와 매우 일치하는 그런 삶의 표현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앙고백이 신실함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의심할 여지 없이 행위를 통해 드러난 그리스도인다운 표현은 체험의 특별한 단계와 절차를 가장 적절하고 명쾌하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582-4).
3.3.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어떤 외적인 표현과 외적인 모습이 참된 은혜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들의 이웃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그 어떤 것도 그 신앙 고백자의 영혼의 상태를 절대적으로 틀림없이 판단 내리는 데는 충분할 수 없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지론이다(585). 왜냐하면 사람 마음은 아주 비밀스러우며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어느 정도로 은혜를 외적으로 가장하고 모방했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다른 사람들이 사람들의 행위를 그 사람들의 양심이 보는 것처럼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4. 성경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실천이 자기 자신의 양심에 은혜의 뚜렷하고 확실한 증거가 된다고 말씀한다(요일2:3,3:18-19,히6:9-11).
열매로 다른 사람들을 분별하기를 권하신 주님께서는(마7:19-20), 이 원리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살펴보기를 권하신다(마7:21-24). 에드워즈는 두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서 설명을 해나간다.
4.1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실천 또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우리 양심에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확실한 표지로 묘사할 때,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587).
에드워즈는 순종의 행위와 선한 열매들이 단순한 몸의 움직임이 아니라 영혼의 행위로 여겨져야 하며, 영혼의 모든 행위는 그 행위의 목적을 따라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 영혼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경이 실천을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우리 양심에 알려 주는 확실한 표지로 묘사할 때, 그 실천은 우리들의 양심이 볼 수 있는 실천을 뜻한다고 한다. 그것은 단지 우리 몸의 움직임일 뿐만 아니라, 그 몸의 움직임을 지령하고 명령하는 영혼의 작용과 행사를 포함한다(590).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신실성의 큰 증거로서는 내면적인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몸의 행위를 지령하고 명령하는 의지를 은혜의 실천적 작용에 따라 외적으로 행하는 것도 큰 증거가 된다고 말한다(591).
4.2.그리스도인의 실천이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양심에 자신의 믿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신실한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모든 증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은 회심 당시의 죄의 자각과 깨달음과 위로의 첫 경험이나 묵상으로 시작해서 묵상으로 끝나는 은혜의 내적 체험이나 내적 작용보다 훨씬 더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주장에 대한 증거를 제시한다.
(1)주장1 -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과 성향을 따르도록 내버려졌을 때, 그들이 실제로 성향을 가지고 선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시험해 주는 것들이야말로, 그들이 마음 속으로 정말 선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적합한 시금석이라는 것을 이성은 명백히 가르친다. 믿음의 신실성은 하나님을 자신의 마음 속에 가장 높은 자리에 모시고, 다른 모든 것들보다 하나님께 우선 순위를 두며,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려는 마음을 가지려는 데 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의 신실성은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데 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의도하는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마음에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마음인데 바로 그 안에 참된 믿음이 있는 것이다(593-6).
(2)주장2 -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 가운데, 그 사람들이 다른 것들보다 하나님을 더 선호하는지 어떤지를 시험해 주는 것들은 그들 믿음이 올바르고 신실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적합한 시금석이라는 것을 이성도 성경도 제시한다. 성경에서 그런 일들을 시련 혹은 시험이라고 부른다. 사람들 앞에 하나님과 다른 것들이 함께 놓여져서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선택을 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시련과 시험이라고 불린다. 이 시련과 시험들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지고의 사랑이 실제인지가 시험되고 밝혀진다. 그것들을 통해 신앙고백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들이 참으로 자신들의 신앙 고백을 따라 살고 있는지가 시험되고 증명된다. 신8:2,삿2:21-2,3:1,4,출16:4,약1:2-3,벧전1:6-7, 참되고 순수한 금은 불을 통과해도 소실되지 않듯이, 연단을 받은 성도들은 정금과 같이 나온다. 불같은 시련을 통해서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미덕의 진실성과 측량할 수 없는 가치가 드러나게 된다(벧전1:7,욥23:10).
시련이나 시험의 결과는 신앙고백자들이 신실한지를 알게 해주는 적절하고 탁월한 증거이다. 시련이나 시험의 결과는 이 시련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양심에 가장 적합한 증거가 된다.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알려주려 하신다(신8:2).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시험은 당신이 가지지 않은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시험을 통해 우리에게 없는 정보를 얻어야 한다. 마19:16이하, 8:20을 보면 예수님도 당신의 섭리 가운데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을 시험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일 우리 자신을 정당하게 평가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달아보기 위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저울에 우리를 달아 보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 삶의 과정에서 만나는 시련들은 우리의 마음을 달아보는 저울이거나, 우리가 믿음으로 세상의 다른 것들보다 그리스도를 더 가치있게 여기는지를 달아보는 저울이거나, 어느 것이 더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저울과 같다(597-602).
(3)주장3 - 거룩한 실천은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에 자기가 받은 은혜가 참된 은혜임을 보여주는 최고의 증거라는 주장은, 실천할 때 은혜가 온전해지고 완성된다는 성경 말씀과 일치한다(약2:22).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서 온전케 된다(요일2:4-5).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가장 큰 계명은 행함으로 형제를 사랑함이라고 한다(요일4:12,3:17-18). 사도는 사랑으로 행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케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실천을 통해 은혜는 그에 적합한 열매를 맺으며, 은혜라는 원리의 목표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실천을 통해 은혜의 성향과 목적이 이루어지고, 은혜의 작용이 온전해지고, 완성되기 때문이다(603).
만일 은혜가 그 열매를 통해 온전해진다는 것이 틀림없다면, 만일 은혜가 이런 실천적인 행사를 통해 그에 적합한 효과를 내고 그 목표를 성취 한다면, 은혜의 실천적인 행사를 통해 은혜의 목적과 성향과 작용에 속한 모든 것이 완성되고 성취 된다면, 은혜의 실천적인 행사들은 은혜의 다른 모든 것들보다 더 탁월한 증거여야 한다. 확실히 모든 원리의 본질과 성향은 그것이 가장 완벽하게 행사될 때 또는 그 본질이 가장 완벽하게 드러나고 그 성향이 가장 완전한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물의 본질을 알고자 하며 그 사물을 다른 것들과 완전히 구별된 상태에서 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완성된 상태에서 바라보아야 한다(604).
(4)주장4 - 신구약 성경을 주의력과 관찰력을 가지고 읽어본 사람은 거룩한 실천이 참된 믿음의 표지라고 강조되어 있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된다. 다른 어떤 표지들 보다 열배나 더 강하게 강조되었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형제를 사랑하고,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만큼 참된 은혜의 표지로서 자주 그리고 분명하게 언급되는 감정적 미덕이나 성향은 없지만, 성경은 이 사랑은 행함으로 또는 사랑의 행위로 행사되고 표현되어야 한다고 분명히 밝힌다(요일3:14).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믿음의 큰 증거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사람들이 서로를 향하여 느끼는 내면적인 감정의 작용이라기 보다는, 영혼이 십계명의 두 번째 돌 판에 새겨진 모든 의무를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신약 성경이 반복하여 말하는 바 다른 사람을 참되게 사랑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롬13:8,10,갈1:14,마22:39-40).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어떤 목적으로 모든 시대에 걸쳐서 믿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를 판단하도록 표지를 제시했을 때, 그들은 어떤 표지를 선택할 것인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의 삶의 원리로 삼는다면 당연히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시험하도록 제시한 표지들을 반드시 수용하고, 그것들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을 시험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제시한 원리들에서 크게 강조한 것들을, 목회자들도 자신들이 제시하는 원리들로 크게 강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인도하고 지도하실 때 어떤 길이 가장 안전하고 최선인지를 아시며, 하나님께서 어떤 것들을 크게 강조하시는 이유는 그것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도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있으며, 성경은 무한하신 지혜를 따라 우리의 유익과 혜택을 주기 위해 쓰여졌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믿음과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모든 면에서 성경을 우리의 안내자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크다고 하는 것을 작다고 하고, 성경이 작다고 하는 것을 크다고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터무니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를 바른 원리에서 벗어나게 만들며, 우리 자신을 올바로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며, 기만과 위선을 낳기 때문이다(607). 에드워즈는 언제나 Sola Scriptura의 정신을 표방하고 있다.
(5)주장5 - 그리스도인의 실천은 다른 표지들 보다 성경에 더 자주 언급되고 강조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언급되는 많은 곳에서 그것은 모든 증거 가운데 가장 크고 주된 증거로 제시된다. 요14:15,23,24,요15:2,8,14,8:31,요일2:3,5,3:18-19,10,3,6-10,5:3,약1:27,욥28:28,렘22:15-6,시34:11이하,24:3-4,119:1,6,잠8:13등(607-611).
(6)주장6 - 그리스도인의 실천이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사용될 큰 증거이다. 이 기준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될 것이고,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의 영적 상태가 분명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 날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이다(롬2:5). 하나님은 세상 뿐만 아니라 사람들 자신의 양심에 하나님의 판단이 의롭다는 것을 가장 잘 드러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심판의 기준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행한 일과 실천이 될 것이다(계20:12,13,고후5:10). 그러므로 우리가 의심할 여지없이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행위가 자기 자신을 시험해 보기 위해 사용해야 할 최고의 증거라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의 지고의 심판주께서 우리가 그 분 앞에 섰을 때 우리를 심판하시는 데 사용하실 것을 가지고서 우리는 스스로를 판단하는데 사용해야 한다(611-3).
에드워즈는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서 그리스도인의 실천이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받은 은혜의 진실성을 가장 적절하게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 너무도 명백한 사실임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이야말로 은혜의 모든 표지 중의 으뜸이고, 표지중의 표지이며, 증거중의 증거이고, 모든 다른 증거들을 인치고, 그것들보다 탁월한 것이라고 말한다(614). 실천은 참된 믿음에 대한 다른 모든 표지들을 확증하고 그것들의 으뜸이 된다는 의미에서 표지중의 표지이다. 우리가 받은 은혜들의 적절한 시금석과 증거는 은혜들이 실천으로 행사되는 데서 나타난다. 마음의 미덕들의 적절한 시금석과 증거는 미덕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시련들과 유혹들을 이겨내고 본성을 변화시킬 때 드러난다(615). 실천은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식이 있다는 합당한 증거이다.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며 복되게 해주는 지식을 입증하는 큰 표지는 그것이 실천적이라는 것이다(요13:17,욥28:28)(616). 거룩한 실천은 회개했다는 증거이다. 거룩한 실천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입증하는 합당한 증거이다. 야고보는 믿음의 실천적이고 행동적인 본질이 믿음의 생명이자 영혼이라고 말한다(약2:20,26). 참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려고 나아오는 것이다(617).
실천은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는 가장 합당한 증거다. 성경에서 신뢰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는 어떤 사람이 너무도 신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일을 행할 만큼 그 사람의 마음이 담대해지고 용기 있게 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복과 생명을 위해 그리스도를 신뢰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그리스도의 충분성과 신실성을 의지해서 그리스도인이 실천할 때 만나는 어려움과 위험들에 맞서는 것이다(618). 실천은 사람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합당한 증거이다. 또한 실천은 겸손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다. 실천은 또한 하나님을 참되게 경외하는 것을 입증하는 합당한 증거이다. 실천은 또한 받은 은혜를 다시 생각하면서 드리는 감사가 참되다는 것을 합당하게 증거하는 것이다(620). 실천은 소망이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합당한 증거이다(621).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의 의무를 다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참되고 거룩하게 기뻐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합당한 증거이다. 실천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용맹을 입증하는 합당한 증거이다.
“거룩한 실천의 열매가 은혜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인 것처럼 경험이 사람의 실천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은 그 경험이 영적이며 신령한지를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다. 사람들이 위대한 깨달음과 큰 사랑과 기쁨을 경험한 척 하더라도 그것들을 그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 이상으로 존중해서는 안 된다. 물론 본성적인 기질이 고려되어야 하지만, 얼마나 은혜로운지는 얼마나 실천했는지에 따라서만 정당하게 측정될 수 있다”(622).
5. 반론에 대한 답변
5.1.반론 1 - 에드워즈는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주로 자신들의 내적인 체험으로 판단해야 하며 영적인 체험이 참된 은혜의 주된 증거라는 입장과 반대되는 주장을 하고 있지 않는가?
<답변> 에드워즈는 자신이 정반대 입장에 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실천이란 영적인 실천이기 때문에, 이 거룩한 실천에서 중요한 것은 몸의 움직임을 지시하고 다스리는 마음의 거룩한 작용이고, 그리스도인들이 내부에서 발견하거나 의식하게 되는 은혜의 작용들은 그들이 그들 자신 속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실천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의 실천을 체험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다(624). 거룩한 실천은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일종이거나 일부분이며, 또한 이성과 성경은 모두 그리스도인의 실천을 그리스도인의 체험에서 가장 중요하며 가장 특색있는 부분이라고 묘사하기 때문이다(렘22:15-6).
그리스도인의 체험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독특한 부분은 영적인 실천에 있다. 뿐만 아니라 은혜의 작용들에는 영적인 실천을 하고자 하는 체험적 성향이 있기 때문에, 영적인 실천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체험적 신앙 생활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실제로 그리스도를 선택하는가 아니면 우리의 욕망을 선택하는가를 시험하실 때, 효력있게 역사하는 은혜의 작용들을 체험한다는 것은 우리 믿음의 진실성과 능력을 입증하는 합당한 시금석이다. 그리고 체험할 때만 믿음에 승리케 하는 능력과 효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신앙 감정과 의도들을 시험하는 것을 체험적 신앙이라고 부른다(627). 내적인 체험이 없는 일종의 외적인 종교적 실천을 하나님을 가치있게 여기지 않으신다. 또한 실천이 없는 체험이 있는데, 이런 체험은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동반하지도 않고, 산출하지도 않는데. 이런 체험은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낫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에드워즈는 성령의 증거나 인치심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영이 마음에 효과적으로 역사하는 것이며, 그것은 마음에 은혜를 심고 마음에 효과적으로 역사하는 것이라고 말한 후에, 그것에 체험에 속한 것이라고 한다(628). 또한 성령의 이런 인치심은 성도들의 양자됨에 대해 성도들이 가질 수 있는 증거 가운데 최고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실천으로 표현되는 은혜의 이런 작용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가장 분명하고 탁월하며 확실하게 증거하고 인치신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경험에서 충분하게 사실로 입증된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보통 자신의 영을 통해 여러 가지 시련 가운데서 은혜의 효과적인 작용을 체험한 성도들에게 그들이 양자됨을 가장 좋아하고 기뻐할 수 있는 증거들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많은 순교자들이 체험한 완전한 확신과 말할 수 없는 기쁨을 통해 분명하게 입증된다(벧전4:14,롬5:1-2,벧전1:8,롬8:15-18).
5.2.반론 2 - 그리스도인의 실천이 은혜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주된 증거라는 에드워즈의 주장이 율법적인 가르침이 아닌가? 자세하게 말해서 그의 주장은 실천을 믿음 생활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것으로 만들고, 행위를 지나치게 강조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행위를 지나치게 중시하게 함으로써, 값없는 은혜의 영광을 약화시키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위대한 복음의 가르침과 모순 되는 듯 하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답변> 에드워즈에 의하면 이런 반론은 전적으로 터무니 없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행위가 은혜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근거로 여겨질 때, 그것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모순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죄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라는 사상은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자질이나 행동이 그 은혜의 열매나 증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어떤 자질과 행위가 가치 있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행위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상은 우리의 행위나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의 가치로움이나 아름다움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상쇄하는 것으로서 여기시지 않으시며, 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셔야 할 이유로 여기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에드워즈는 거룩한 실천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하는 근거가 된다거나 그것이 가치있고 탁월하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율법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거룩한 실천이 믿음을 입증하는 합당한 증거로서 믿는 이의 신실함을 증명해 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율법적이지 않다. 사도 야고보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이런 의미에서 행함으로 그의 믿음이 증명되었다는 것을 율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632). 실천을 통해 믿음이 발휘되고 행사되는 것이 믿음을 입증하는 주된 증표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 믿음의 중요성과 영광을 결코 약화시키지 않는 것은, 행동과 움직임이 생명의 주된 증표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 생명의 중요성을 감소키시지 않는 것과 같다(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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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촌시의 합리주의와 열광주의자들의 무모함이라는 양극단은 에드워즈의 궁극적 부흥 철학인 『신앙감정론』을 낳았다. 이 책을 통해 에드워즈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 중 한 사람임이 입증되었다. 1737년에서 1746년 사이 약 10여년간 에드워즈의 모든 출판물들은 대각성과 부흥의 이슈를 중심 주제로 다루었다. 이 글들을 통해 그는 절제된 형태의 부흥 운동을 위한 뉴 잉글랜드의 주된 대변인으로 등장했고 종교개혁이후 종교적 체험과 체험적 종교의 가장 중요한 해석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신앙감정론』에 대해 촌시는 다시 응답하지 않았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자기들의 갈 길을 갔다. 따듯한 경건은 도외시하고 차갑고 딱딱한 도덕성을 강조한 그들의 경향은 결국 유니테리아니즘(Unitarianism)을 낳게 된다. 촌시는 에드워즈의 책을 무시하고 에드워즈를 환상적 광신주의자이므로 그가 하는 어떤 말에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매도해 버렸지만 그 책은 에드워즈의 저작들 중에서도 가장 널리 읽히는 논문들 중 하나인 동시에 종교적 체험의 성격에 대한 미국의 가장 심오한 연구들 중 하나가 되었다”.
(양낙흥,[조나단 에드워즈],부흥과개혁사,2003,572)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에 대한 세밀한 요약은 2005년도 7,8월 박사교회에서 모였던 강독회를 위해서 제가 일일히 타이핑한 것입니다. B5사이즈로 총 120쪽이 넘는 분량입니다. 이와 같은 세밀한 요약본으로도 에드워즈의 원문의 진가를 담아내지 못합니다. 요약보다는 본문을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평생에 가까이 두고 읽어야할 몇 권의 책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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