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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철학 용어 해설에 관하여

수호천사1 2012. 1. 30. 10:49

철학 용어 해설에 관하여

 

인식론 : 철학의 일부문이며 인식·지식의 기원·구조·범위·방법 등을 탐구하는 학문. 물론 인식의 철학적 고찰은 고대나 중세에서도 신의 인식으로서 행하여지기는 했으나 인간 주체의 인식 문제로서 철학의 중심부문을 차지하게 된 것은 근세에 이르러서이다.

반증주의 : 어떤 문제나 이론을 정의하거나 증명할 때 그 반대의 현상이나 이론을 통하려는 경향.

귀납법 : 개개의 사례를 관찰함으로써 이러한 사례들이 포함되는 일반 명제를 확립시키기 위한 추리 방법. 귀납은 완전귀납과 불완전귀납으로 나누어진다. 완전귀납은 기지(旣知)의 사실을 전부 열거하는 데 그치기 때문에 일종의 연역적 논증이라 할 수 있다. 불완전귀납은 사례의 전부를 열거할 수 없으므로 결론을 위해서는, 어느 경우에는 비약이 따르기 때문에 이에 맞는 새로운 법칙이 나오게 된다. 영국의 J.S.밀은 후자를 참다운 귀납이라고 하였다.
귀납적 비약은 자연운행의 공간적 ·시간적인 제일성(齊一性)을 전제로 한다. 이를테면, ‘모든 A는 B이다’라는 결론이 수적(數的)으로나 시공적(時空的)으로 한정되지 않고 일반적으로 적용될 경우, 이 일반명제를 자연법칙으로 삼는다.
귀납법은 소크라테스의 개념 구성방법에서 비롯되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완성되었고, 이어 F.베이컨이 근대적인 발전의 길을 열었으며, 밀에 와서 그 발전을 보았다. 실험적 탐구에 관한 밀의 일치법(一致法) ·차이법(差異法) ·일치 차이 병용법 ·잉여법(剩餘法) ·공변법(共變法)의 공리(公理)는 특히 유명하다. 또한 수학적 귀납법은 명제(命題) P(n)이 모든 자연수 n 에 대하여 성립하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연역법 : 몇 개의 명제가 옳다는 가정 아래 다른 명제도 옳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밝히는 방법. '사람은 죽는다’ ‘A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A는 죽는다’ 이런 식으로 일반법칙을 전제로 해서 개별적인 명제를 성립시키는 논증을 귀납(歸納)과 대비하여 연역이라 할 때가 많이 있지만 협의로는 1개 또는 2개의 명제를 전제로 한 다음 다른 명제를 성립시키는 논리적인 방법을 말한다.

본질 : 사물이 일정한 사물이기 위해서 다른 사물과는 달리 그 사물을 성립시키고 그 사물에만 내재하는 고유한 존재. 본질이 사물의 본원적 구성요소라는 점으로 미루어 본다면 본질은 사물의 ‘본성(本性:自然性, 그리스어의 physis, 라틴어의 natura)’이다. 따라서 이것은 사물의 존재를 규정하는 원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써 제기되는 것을 사물의 ‘본질(ti estin)’이라 하고 또 이것이 그 사물의 존재 그 자체라는 의미로 이것을 사물의 ‘실체(實體)’라고 불렀다.

실존 : 철학, 특히 실존주의철학 용어. 가능적 존재로서의 본질(essence)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현대 실존주의에서는 특히 인간의 주체적 존재를 의미한다. 실존이라는 말은 근대철학에서 매우 다양하게 쓰이는 말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의(定義)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원래 중세철학에서 실존(existential)이란 ‘(로부터)나가다’, 또는 ‘나와서 현재 있다’를 의미하였고, 이에 대응하는 본질(essential)은 영원불변의 것을 가리켰다. 근대철학은 이 영원불변한 본질을 구하였고 G.W.F.헤겔은 그 완성자였다.
한편 인간 개인의 존재(실존)는 소멸되고 말았다. 헤겔의 이성(理性) ·이념 ·절대정신이라고 하는 완성된 인간존재에 대하여 파멸과 죄를 안고 있는 단독자(單獨者)로서의 인간실존을 강조한 것은 S.A.키르케고르이다. 따라서 실존의 밀바닥에 무(無)를 인정한 것은 F.W.니체이며, 20세기에 들어서 K.야스퍼스, M.하이데거, J.P.사르트르 등이 실존주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존재 : 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총괄. 원래는 일반적인 유(類)로서의 ‘존재자’를 뜻한다. 존재자는 실재자(實在者)뿐 아니라 비실재자도 포함한다. 비실재자, 예를 들면 천마(天馬)도 그것이 ‘천마로 존재하는 것’으로 사고(思考)되는 한에서는 ‘일종의 존재하는 것(가상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비존재자)’도 어떤 뜻에서는 존재자의 일종이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인 상태에서 사고되며, 또한 ‘그러한 것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자는 일체의 것을 총괄하는 유(類)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체의 것에 관한 하나의 지혜로서의 철학을 ‘존재자인 한에서의 존재자에 대한 원리 ·원인의 지식’이라고 규정하였다. ⑵ 보다 엄밀한 뜻으로는 존재는 존재자에서의 ‘존재의 작용’.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무엇’이며 ‘그 무엇’인 한에서 우리들에게 알려진다. 존재자에서의 이 ‘그 무엇’은 각 존재자에게 고유한 것이며 존재자가 속하는 유(類)와 종(種)에 따라 특수화된다. 이 ‘그 무엇’의 특수성에 의하여 존재자는 그것과는 상이한 다른 존재자와 구별된다(인간에서는 인간, 쇠에서는 쇠가 그 무엇이 된다). ‘무엇’은 그것의 ‘무엇인가’를 한정하는 것, 그것의 ‘존재본질(存在本質)’이다.
이에 반해서 모든 존재자에게 적용되는 ‘있다’라는 술어는 모든 존재자에게 똑같이 해당되는 공통적인 것이다. 모든 존재본질이 어느 일정한 유 안에 한정되는 데에 대하여 ‘있다’는 술어는 유의 한정을 초월한다. 따라서 이것은 엄밀한 뜻에서의 유가 아니라 유를 초월하는 것, 즉 ‘초월자’이다. 모든 존재자에 공통된 ‘있다’는 말이 뜻하는 ‘존재의 작용’이 ‘존재’이다. 모든 존재자는 특수한 존재본질과 공통된 존재의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존재자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은 각 존재자에 대해서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우선 특수한 존재본질에 향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한에서 우리들의 지식은 특수화되고 특수과학의 지식이 생기게 된다. 존재자가 존재자인 한에서 갖는 공통된 ‘존재’는 은폐되고 ‘존재’에의 물음은 잊혀진다. 특수한 존재자에의 물음에서 잊혀진 이 존재의 공통된 뿌리로서의 존재, 그 자체에의 물음으로서 철학의 물음이 생긴다.

신앙 : 절대적 타자(他者)나 절대적 자기에 대한 신뢰적·합일적(合一的)인 태도.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 내지는 하나님의 섭리(攝理)에 대한 인간의 순종(신뢰)이라는 인격적 관계를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신불(神佛)과 같은 성스러운 존재에 대한 신뢰와 무조건 복종을 말하며, 불확실한 것을 주관적으로 확실하다고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사람은 종교적 체험이나 의례(儀禮)를 되풀이함으로써 인격의 내부에 차츰 일정한 신앙적 자세가 형성되어 가는 것을 뚜렷이 자각하게 된다. 이 심적인 태도가 바로 신앙이라는 것인데, 신앙은 개인생활을 통일하는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편, 신앙의 표현인 신조·조직·제도를 가진 공동체의 생활을 통일하는 중심이 되기도 한다.
<신념과의 구별> 인간은 지성(知性)을 통하여 직접적인 경험이나, 타인의 경험에 의해 얻어진 지식의 범위 안에서 사물을 생각하고 행동을 결정한다. 지식은 학문적 연구에 따라 무한히 변하면서 진보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지식의 확실성은 항상 불완전하다. 그러나 불확실하고 충분히 검증(檢證)되지 않은 지식이라도, 하나의 가설(假說)로 인정되거나 주관적으로 완전하다고 긍정되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전적으로 지적(知的)인 근거에만 의거하여 생각이나 행동을 결정하는 심적 태도가 신념이라는 것이다. 한편 신앙은 정의(情意)의 면까지를 기능적으로 통일하면서 실존적 상황에서 생사를 걸고 초월적 존재와 전인격적(全人格的) 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신념은 합리적 경험의 범주에 그치는 사고형식을 갖는데 비해, 신앙은 지(知)·정(情)·의(意)의 경험 전체에 관련될 뿐 아니라 경험을 초월한 영역에까지도 관련되기 때문에, 기성의 사고형식을 넘어선 새로운 것을 낳을 가능성을 내포한다. 과학이 진보하면 신앙은 불필요해진다는 사고방식은 신앙과 신념을 혼동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성 : 사물을 옳게 판단하고 진위(眞僞)·선악(善惡), 또는 미추(美醜)를 식별하는 능력. 이성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동물과 구분되게 하는 것이며, 여기에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정의가 성립한다. R.데카르트는, 만인에게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게 갖추어진 이성능력을 '양식(良識)' 혹은 '자연의 빛'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그뿐 아니라, 예로부터 이성은 어둠을 비추어 주는 밝은 빛으로서 표상되어 왔다.
이성에 의하여 우주에서의 제사상(諸事象)을 어떤 비례적·조화적 관계에서 바라볼 때, 어둡고 불분명한 혼돈(混沌:chaos) 속에서 어떤 법칙적 관계 속에 정위(定位)된 조화적 우주(調和的宇宙:cosmos)가 출현한다. 본래 그리스어의 로고스(logos:理性), 혹은 그 라틴어역으로서의 라티오(ratio)에는 비례·균형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밝은 빛으로서의 이성에 대비한다면, 감성적 욕망이나 정념(情念)은 어둡고 맹목적인 힘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성과 가장 날카롭게 대립하는 것은 광기(狂氣)일지도 모른다. 기쁨·슬픔·분노·욕망·불안 등의 정념은 어둡고 비합리적인 힘으로서 내부로부터 폭발한다. 이것을 이성적 의지에 의하여 통어(統御)하지 못하면 정신의 자립성을 유지할 수 없다.
여기에 이성에 의한 정념지배라는 도덕적 문제가 발생한다. I.칸트는 본능이나 감성적 욕망에 기인하는 행동에 대하여, 의무 혹은 당위(當爲:Sollen) 의식에 의하여 결정된 행위가 이성적이라고 하였다. 인간에겐 자율적으로 자기의 의지를 결정하는 이성적 능력이 있어서, 그것에 의하여 도덕적 행위가 가능하다. 이것이 이론이성과 구별되는 실천이성이다. 감성과 대립하는 의미의 이성은 자발성의 능력으로서 파악할 수 있지만, 그 경우 거의 오성(悟性)과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은 가끔 오성과 대립하는 의미로도 쓰인다. 예로부터 개념적·논증적인 인식능력으로서의 이성에 대하여, 진실재(眞實在)를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보다 고차적인 인식능력으로서 오성 혹은 지성(知性:intellectus)이라는 말이 쓰였다. 그러나 계몽기 이후 우위관계(優位關係)는 역전되었다. 칸트는 오성이 감각의 다양성을 개념적 통일로 가져다주는 피제약적(被制約的)인 인식능력인 데 대해, 이성은 판단의 일반적 제약을 어디까지나 추구하는 무제약(無制約)의 인식능력이라고 하였다. 또한 G.W.F.헤겔에서는 오성이 추상적인 개념의 능력인 데 대해, 이성은 구체적 개념의 능력이며, 오성적 개념에 의한 대립의 입장을 초월하여 이것을 살아 있는 통일로 가져다 주는 작용이었다.

이성은 또 우주를 지배하는 근본원리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아낙사고라스(Anaxagoras)의 누스(nous)설(說)도 그러한 예이지만, 가장 전형적인 것은 헤겔의 세계정신(世界精神)에 대한 견해로, 역사는 세계정신의 자기실현 과정이며, 거기에는 어떤 이성적인 원리가 일관되어 있다고 한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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