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道)란?
본문 말씀 = 고전1:18
고전1:18의 십자가의 "도"(道)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호 로고스"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는 바와 같이 헬라어
"로고스"의 일차적 의미는 "말씀"입니다(마8:8).
그러나 본문에서는 "로고스"란 단어 앞에
정관사 "호"가 나오므로 여기서는 단순한
"말씀"이 아닌 바로 "그 말씀"이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본절에 나오는 "십자가의 도"가 뜻하는 바는
십자가(十字架)에 대한 잡다한 견해(見解)가 아니라
"십자가에 대한 진실된 바로 그 말씀"입니다.
본문에서는 이 말씀이 구원을 얻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能力)이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믿는 것이
구원의 진리(眞理)를 알고 구원에 동참(同參)하게 되는
첩경(捷徑)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구원(救援)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행4:10-12).
그러나 "인간의 죄(罪)를 위하여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으며
그 예수께서 세상(世上)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十字架)에 죽으심으로 인해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벧전2:24) 이 십자가에 대한
진리의 말씀이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십자가(十字架)의 도(道)가 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여기서는 원어를 통해 알아봅시다.
1.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먼저 멸망(滅亡)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도는 미련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멸망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뤼미"는 "잃어버리다"(마10:39),
"없어지다"(마5:29, 30), "멸망하다"(요3:16)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잃다"는 뜻으로 쓰일 때는
누구에 의해 피동적(被動的)으로 상실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 무엇을 포기(抛棄)한다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救援)하리라(막8:35)는 말씀에서도 그와 같은
의미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멸망하다"라는 뜻으로 쓰일 때는
하나님께 위임(委任)을 받은 자나 혹은 하나님
스스로에 의해 행해지는 심판(審判)을 의미합니다.
또 이때에는 단순히 물질적(物質的),
육체적(肉體的) 손실이란 의미가 아닌
영원(永遠)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절망적인
죽음이라는 뜻이 함축(含蓄)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영원한 죽음의 상태에 놓여 있고
또 그 멸망(滅亡)의 길로 가고 있는 사람에게
십자가(十字架)에 대한 진리(眞理)의 말씀은
결코 받아 들일 수 없는 미련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믿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전적 타락과 구원에 있어서
전적 무능력함을 모르는 커다란 착각일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세상의 시각에서는
미련한 자로 분류되는 자를 택하셔서,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칭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고전1:27).
2. 구원을 얻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둘째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이 십자가에 대한
진리(眞理)의 말씀은 곧 구원을 확증(確證) 짓는
하나님의 능력의 표(表)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 얻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조메노이스"는 구원하다"(마1:21),
"보존하다"(눅17:33)는 뜻이 있는 "소조"의
수동태 현재분사형으로 구원이 미래적(未來的)으로
예정(豫定)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특별히 "소조"는 동일하게 "구원하다"(마27:43),
"건지다"(고후1:10)란 뜻이 있는 "뤼오마이"와는
구별되어 쓰이는 경우(境遇)가 많습니다.
즉 바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혼(靈魂)의 구원을
나타낼 때는 주로 "뤼오마이"를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을 얻었으며
현재에도 구원(救援)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에게는
십자가에 대한 말씀이 더 이상 미련한 것이거나
허탄(虛誕)한 것이 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구원 얻은 사람들에게 십자가(十字架)는
구원을 담보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십자가에 대한 진리의 말슴을
각기 다르게 수용(授用)하는 두 부류(部類)의
반응(反應)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과거 고린도 교회에 대한 교훈일 뿐 아니라,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짊어진 모습으로
우리를 초청하며 여기에 대한 두 가지의 정반대의
반응(反應)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주님은 지금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란
말씀을 하십니다.
이 초청(招請)에 여러분은 응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십자가(十字架)가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큰 능력이 됨을 체험하실 수 있습니다.
아니면 여러분은 이 초청(招請)을 거부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멸망당하는 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이 시간 보다 진지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를 바라봄으로
구원의 감격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 그랜드 종합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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