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학

[스크랩] 예루살렘 교회

수호천사1 2011. 11. 21. 10:56

예루살렘 교회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구속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교회사의 큰 분수령을 이루었던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핍박과 십자가 처형이 이루어졌던 예루살렘지역에 교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른 것입니다

 

오순절은 하나님의 새언약 공동체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설립한 날이었습니다   오순절에 내린 성령은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이자 하나님의 성전인 그리스도의 몸을 세웠던 것입니다   구속사속에서 이처럼 결정적이고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오순절 성령강림은 또다시 되풀이 될 수 없는 단회적 사건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던 자신을 대조시켜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분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은 오순절에 내린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오순절의 진의는 그리스도 사역의 성취라는 시각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성령의 임재하심을 설명하였고, 바울도 성령의 오심을 기독론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며 부활 승천하여 존귀함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불가견적인 현림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의 은사 역시 교회에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은사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성령이 충만한 사도 베드로의 설교는 회개를 촉구하는 회복운동으로 퍼져 나갔으며, 하루 동안에 3,000명이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는 초대교회 대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사도행전2:37~41)   교회는 급성장 하였고 5,000명을 초과하며 부흥 성장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임은 날마다 이루어졌으며 재산과 소유의 구분없이 상호 통용하고 예배와 성찬이 한마음 한 뜻으로 이루어졌습니다(사도행전2:42~47)

 

그들 중의 대다수는 헬라파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선조들의 관습과 언어를 고수하는 히브리파와는 달리 유월절과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헬라 문화권에 속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헬라파는 히브리와 평행선을 유지하며 항상 대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초대교회 일곱집사는 모두 헬라파였고 최초의 박해도 주로 헬라파 기독교인들에게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외에 당시를 지배하고 있었던 많은 제사장들의 개종은 예루살렘 사회에서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러한 폭발적인 성장으로 예루살렘교회는 수만명의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성장을 바라보던 유대지도자들의 박해 움직임도 심각한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사도들의 복음 전도를 공식적으로 비난하며 금지시켰던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사도 베드로가 옥에 갇히게 되었고(사도행전4:1~4),  일곱 집사가운데 한사람이었던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사도행전6:8~7:60)  이로서 예루살렘교회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표출화되고 사실상 본격화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구속과 스데반의 순교사건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교회가 도처에 전파되고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사도행전8:1)  특히 스데반의 순교사건은 당시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울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신앙적 신념은 결과적으로 박해자 사울이 변하여 전도자 바울이 되게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확산을 강제적이고 폭압적으로 막으려했던 산헤드린 공회의 표본적인 스데반 순교사건은 교회를 지하화하게 하였으며 소규모, 지역적으로 확산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를 이용한 기독교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는 유대 지도자들과 헤롯왕이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정치적인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요한, 야곱은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며 복음전도 활동을 위축하거나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제시한 할례문제가 좋은 예로서, 지방 교회에 그들 교회안에서 파생되는 공동체와 신학적 이론에 문제가 생기면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나서서 중재와 해결점을 제시하는 형태로 발전하였습니다   유대적 의식에 관한 율법에서 자유할 필요가 있다는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은 이방인 교회들로 하여금 유대적 지배로 부터 영적으로 해방되게 하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대내외적인 빈곤, 박해 등으로 영적 시련에 봉착해 있을때, 바울은 3차 전도여행에서 헌납받은 여러 공동체의 구제금 원조로 회복할 수 있었으며,  이것은 영적 사랑의 교제로서 교회와 공동체에 관한 사도 바울의 역할이 적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활동에서 생사고비를 여러차례 경험해야 했던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서도 가이사랴에서 2년이 넘도록 감옥생활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대인들의 박해로 인하여 사도바울은 로마 선교의 길을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후 사도 바울을 체포하는데 실패를 거듭한 유대인들은  본교회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끊임없이 핍박하였습니다

 

주후 61년, 총독 베스도(Festus)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하여 알비누스(Albinus)가 후임 총독으로 부임하기 까지  3개월간의 공석기간을 이용하여 유대인 대 제사장 하난(Hsnan)이 불법적으로 재판을 열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 야고보를 심문하고, 모세율법을 어긴 죄를 물어 돌로 쳐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하난은 제사장직에서 해임되고 담내(Damnai)의 아들 여호수아(Joshua)가 임명되었지만 이러한 관계는 전혀 호전되지 않고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주후 64년, 풀로루스(Gessius Florus)가 팔레스타인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로마의 유대인 탄압정책은 매우 강화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66년 9월 과격파 유대인들에 의해 반란이 일어났으며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 그리고 네게브와 갈릴리까지 점령하는 전쟁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사태가 로마에 불리하게 되자 시리아 주둔군이었던 로마군 사령관 갈루스(Cestius Florus)는 가이사랴를 점령하고 황제의 명장 베스파시안(Vespasian)을 통해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습니다  이 와중에서 유대 사학자인 요세프스(Josephus)는 베스파시안의 황제 등극을 예언하고 적중한 댓가로 로마군의 보호를 받으며 로마에서 방대한 역사서 저술작업으로 여생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사제와 군인이며 학자였던 요세푸스(Joseph ben Mattathias)는 제사장 가문인 마타디아스와 왕족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예수의 활동시기 몇 해 후이며 유대 땅을 로마가 점령하고 있었을 당시, 가이우스가 로마제국의 황제에 등극한 주후 37년에 태어나 100년 경에 세상을 떠난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인물입니다  

 

요세푸스(Joseph ben Mattathias)는 유대인 동족들에게는 배신자로서 지탄을 받는 반면에 기독교인과 초대 변증가로 핵심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유대주의와 헬레니즘의 두 전통을 종합하였으며 로마의 세속 세계와 성경의 종교적 유산을 연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 치하의 여러 민족들의 멘탈리티, 특히 예수님 당시의 유대 백성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않될 중요한 정보와 자료들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탄생 이전 시대와 기독교 1세기 동안 일어났던 팔레스타인과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역사를 알려주는 유일한 역사서라는 점에서 그의 위치는 확고하다 할 것입니다

 

주후 68년, 여름 네로 황제의 자살로 베스파시안이 황제에 즉위한후 그의 아들인 디도(Titus)r가 전투를 이끌었고, 70년 7월 5일,  안토니아 보루가 무너지고 7월 17일,  성전의 제사는 중지되었으며 8월 8일,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생존자들은 사해 해안 맛사다 고지에서 3년간 저항하였으나 73년 4월 15일,  로마군에 의해 이 전쟁은 끝이 났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함락전에 베뢰아 지방의 도시 펠라(Pella, 데가볼리Decapolis)로 피난을갔던 유대인들은 신앙의 양심을 따라 스스로 결정 하였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돌아갈 꿈으로 살았던 그들이었지만 남아있던 동족들의 반감과 오해속에서 국민의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다시는 귀환의 기회를 영영히 얻지 못하는 슬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교회사 학자 유세비우스(Eusebius)는 그들의 피난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그 보다는 신앙적 양심을 따라 결정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펠라의 피난사건은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믿었던 유대적 크리스챤과 유대 민족 사이에 완전한 분리를 가져오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그들은 이방인들과 융합되어 함께 교회생활을 유지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촌이며 글로바의 아들인 시므온(Symeon)을 펠라교회의 목사로 천거함으로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더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나 에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펠라지방에서 얼마나 오랜동안 생활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후 하드리안(Hadrian)황제가 예루살렘 옛터에 이방도시(Aelia Capitolina)를 건설하고 유대인의 출입을 금지시킴으로서 유대인 크리스챤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교회를 건설할 꿈이 차단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계기로 유대인 크리스챤들과 이방인 크리스챤들의 구별성과 차별성은 거의 사라졌던 것입니다

 

주후 81년,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유대인들이 매년 예루살렘에 보냈던 헌금을 황제에게 바치도록 강제조항을 들어 결정하였습니다  또한 이에 불복한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러한 기독교도들 때문에 다른 모든 신들이 노했다는 죄명으로 박해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박해를 피해 지하무덤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카타콤"이라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로마 당국자들의 심경속에 유대인과 기독교 신자들 사이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교적 풍습을 쫓는 모든자들을 대상으로 박해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유대교 신자와 기독교 신자를 구별하지 않는 새로운 박해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예배하였으므로 이교도들은  기독교인들을 흔히 무신론자들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핍박 가운데 요한계시록이라는 묵시록이 기록되어졌던 것입니다

 

주후 84년, 팔레스타인 유대지도자들은 각 처에 흩어진 유대인 회당에 공한을 보내어 유대인 크리스챤들을 그들의 모임에서 추방할 것을 권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후로는 유대인 크리스챤들이 그리스도의 신앙을 소유하면서 동시에 유대인의 지위를 공유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새술은 새부대에 담겨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세계 복음화를 향한 비젼의 섭리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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