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

[스크랩] 밀교(密敎)와 현교(顯敎)

수호천사1 2011. 11. 16. 21:19

밀교(密敎)와 현교(顯敎)

 

  밀교(密敎)는 부처의 깨우친 진리를 직설적으로 은밀하게 표출시킨 대승불교의 한 교파이다. 비밀불교(祕密佛敎) 또는 밀의(密儀)종교의 약칭으로 진언(眞言)밀교라고도 하는데, 일반의 불교를 현교(顯敎)라 하는 것에 대한 대칭어이다. 밀교는 7세기에 대승불교의 화엄사상. 중관파(中觀派) ·유가행파(瑜伽行派)사상 등을 기축으로 하여 인도교의 영향을 받아 성립하였다. 보통 밀교는 미신적인 주술(呪術) 체계로서, 성력(性力:sakti)을 숭배하는 타락된 불교로 인식되고 있으나, 그것은 힌두교탄트라(tantra) 신앙과 결합되어 말기에 나타난 좌도밀교(左道密敎)를 가리킬 따름이다. 정통적인 밀교사상은 개체와 전체의 신비적 합일(合一)을 목표로 하며, 그 통찰을 전신적(全身的)으로 파악하는 실천과 의례(儀禮)의 체계를 갖는다.

 

  밀교에 해당하는 인도의 호칭은 바지라야나(vajra-yāna:金剛乘)인데, 이것은 후기 대승불교를 대표한다. 바지라야나, 즉 금강승은 실재(實在)와 현상(現象)을 자기의 한몸에 융합하는 즉신성불(卽身性佛)을 목표로 한다. 이는 ‘다양한 것의 통일’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그 통일원리는 공(空)과 자비(慈悲)의 일치[空悲無二], 즉 반야(般若:지혜)와 방편(方便)의 일치로 나타난다. 이러한 금강승에는 사크티적(的) 경향, 즉 성력적 성격은 없다. 그러나 이슬람[回敎] 침입(약 1027∼1087) 이후 성립된 구생승(俱生乘:Sahaja-yāna)과 시륜승(時輪乘:kālacakra-yāna), 그리고 금강승에서 갈라져 나온 탄트라승(Tantra-yāna), 길상승(吉祥乘:Bhadra-yāna) 등은 정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밀교를 성력적인 뉘앙스를 갖는 탄트라 불교로 부르는 것은 정확한 호칭은 아니라고 하겠다.

 

  인도에서 티베트 ·네팔 등으로 전파되어 오늘날도 행해지고 있는 것은 구생승 계통이다. 그러나 중국 ·한국 ·일본 등의 밀교는 토착신앙과 결합된 요소가 많아도 성력적 요소는 없다. 일반적으로 밀교에 대한 관점은 현세적 욕망을 처리하는 주술조직(呪術組織), 또는 극단적인 신비주의 속에서 발달한 상징철학으로 구분된다. 전자를 잡밀(雜密, 또는 呪密)이라 하여, 금기(禁忌) ·부적(符籍) ·주법(呪法) 등으로 표현하는 데 반해, 후자는 순밀(純密, 또는 通密)이라 부르는데, 7세기 후반에 차례로 성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7세기경 밀교가 성립될 당시의 인도불교는 소승불교시대로서 실천보다는 전문적 이론과 승려 중심의 경향이 매우 짙었다. 이러한 흐름은 교학(敎學)의 발전을 가져오는 장점도 있었지만, 많은 신도를 잃게 되고 교단의 위축을 스스로 가져오는 단점도 있었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 실천을 위주로 한 대중불교운동이 밀교이다. 밀교사상의 이론적 원리를 밝힌 ≪대일경(大日經)≫과 실천법의 체계를 세운 ≪금강정경(金剛頂經)≫은 밀교의 근본 경전들이다. 일반적으로 이들 경전이 성립되기 이전의 밀교사상을 '잡밀(雜密)'이라고 하고, 그 이후의 것을 '순밀(純密)'이라고 하여 구별하였다. 이러한 인도밀교의 두 형태 가운데서 중국에 먼저 전래된 것은 잡밀 계통이다. 동진의 원제(元帝) 5년(322) 최초로 전래된 뒤 잡밀계통의 경전인 ≪대공작왕신주경(大孔雀王神呪經)≫·≪관정경(灌頂經)≫ 등이 번역되면서 차차 전파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잡밀 계통의 중국밀교를 삼국시대부터 수용하게 되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밀교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신라에서는 7세기 초부터 잡밀 계통이 전래되었고, 8세기에 접어들면서 순밀 계통이 전해지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밀교는 고려나 조선시대까지 민중신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라에 최초로 밀교를 전한 승려는 안홍(安弘)이다. 그는 600년(진평왕 22) 중국에 가서 서역승(西域僧) 세 사람, 중국 승려 두 사람을 데리고 귀국하여 황룡사(皇龍寺)에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檀香火星光妙女經)≫을 번역하고, 640년(선덕여왕 9) 만선도량(萬善道場)을 베풀었다. 안홍과 거의 같은 시기의 밀교승으로 명랑(明朗)이 있다. 명랑은 632년 당나라로 가서 3년 동안 밀교를 공부하고 귀국하여 자신의 집을 금광사(金光寺)로 고쳐 짓고, 이곳을 중심으로 밀교신앙운동을 전개하였다. 안홍과 명랑을 기점으로 하여 명효(明曉) 등은 잡밀 계통을 받아들였고 혜통(惠通)은 처음으로 순밀사상을 전래시켰다. 혜통에 이어 현초(玄超)·의림(義林)·혜일(惠日)과 같은 승려들의 활약으로 신라밀교는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다.

  ① 오대산신앙(五臺山信仰) :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불교신앙운동은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에 의하여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당나라의 오대산신앙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자장 당시는 오대산신앙이 크게 발전하였거나 체계화되지는 못하였다. 신라에서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 본격화된 것은 8세기 초 성덕왕대로 추정된다. 신라 오대산의 중앙에는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이 위치하고 있는데, 중국이나 신라의 오대산신앙이 그 출발부터가 현교(顯敎)와 밀교의 융합에 있었다.  

 

② 사리탑신앙(舍利塔信仰) :

 

신라시대 사리탑에 대한 신앙이 처음으로 밀교사상과 만나게 되는 것은 706년(성덕왕 5)이다. 이해 신문왕과 효소왕의 명복을 빌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경주 황복사(皇福寺)에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탑의 2층에다 부처의 사리와 함께 ≪무구정광다라니경≫을 봉안하였다. 이 다라니경은 작은 탑 99개 또는 77개를 조성할 것과 이 다라니의 공덕을 교설한 잡밀 계통의 경으로, 그 뒤부터 신라에서는 ≪무구정광다라니경≫을 조탑경(造塔經)으로 널리 받들어서 중요한 탑 속에는 반드시 이 경을 봉안하였다.   

 

고려는 건국 당시부터 밀교에 대한 신앙과 관심이 매우 깊었다. 고려에서의 밀교는 왕실을 중심으로 그 초기적 신앙의 전통이 확립되었고, 역대 왕들은 그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밀교신앙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태조의 불교에 대한 신앙의 경향은 〈훈요십조(訓要十條)〉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 제2조와 제6조에서 도선(道詵)을 거론하였고,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이처럼 태조가 팔관회·연등회와 도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특별히 후대 왕들에게까지 유언으로 남긴 이유는 원래 연등회와 팔관회를 고려가 수용하고 전개하는 과정에서 밀교성이 짙게 가미된 불교의식으로 탈바꿈되었으며, 도선의 사상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음양오행(陰陽五行)이나 도참사상으로 이해되어왔으나, 도선의 사상적 연원과 근저는 밀교에 있었기 때문이다.  

 

① 총지종(摠持宗)과 신인종(神印宗) :

 

우리나라의 밀교사상이나 그 신앙의 형태로는 신라시대부터 두 가지의 큰 조류가 있었다. 혜통으로부터 시작된 진언지송(眞言持誦)의 총지법과 명랑을 효시로 한 신인(神印)의 작법계통(作法系統)이 하나의 종파로 각각 성립된 것은 고려시대의 일이다. 원래 총지라는 말은 다라니를 뜻으로 번역한 데서 유래한다. 신라시대의 총지암(摠持·)은 신문왕과 효소왕 때에 창건된 절인데, 고려에 와서 총지사가 되었다. 이 절에서는 1007년 ≪보협인다라니경≫이 개판되었고, 1186년(명종 16) 불정소재도량(佛頂消災道場)의 밀교의식이 거행되었다. 한편, 신인종의 신인이란 결인(結印)을 가리키는 것으로, '문두루(門豆婁)'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인데, 신라 문무왕 때의 명랑이 이 법으로써 당나라 병사를 물리친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 된다. 1130년(인종 8) 4월 나라의 대신들이 경비를 모아 현성사(賢聖寺)와 영통사(靈通寺)에서 의식을 베풀고 나라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이 뒤를 이어 명종·고종·원종·충령왕·충숙왕·공민왕 등이 현성사를 찾아 의식을 거행하였던 것은 모두가 문두루도량과 간접·직접으로 많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처럼 고려에서는 왕실을 중심으로 신인비법에 깊은 신앙과 많은 관심이 있었고, 그것을 국난타개의 최고비법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② 밀교의식과 행사 :

 

고려시대에 행하여진 밀교의 행사로는 인왕도량이 제일 많이 행하여졌으며 깊은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고려에서는 ≪인왕경≫을 나라를 보호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최승의 법으로 신앙하였는데, 특히 ≪인왕경≫ 제5 호국품(護國品)의 교설을 근거로 하여 역대 왕들은 많은 인왕도량을 개설하여 나라와 국민의 안녕을 부처님께 빌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왕경신앙이 왕실을 중심으로 한 궁중이나 사원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장안에서는 경행(經行)이라 하여 국민들의 이익과 복을 기원하는 행사로 ≪인왕경≫을 받들어 모시고 보행독송(步行讀誦)하는 의식이 1046년(정종 12)부터 매년 정기적으로 행하여졌다. 이 경행은 고려 인왕경신앙의 특유한 모습으로서, 그것이 일반농민들과 같은 서민층에서는 행독(行讀)이라는 의식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고려에서 인왕도량 다음으로 널리 행하여졌던 밀교의식은 금광명도량(金光明道場)이다. 인왕도량이 주로 군사적인 목적에서 나라 밖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행하여졌다면, 금광명도량은 주로 나라 안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널리 행하였던 의식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띠고 개설된 금광명도량은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을 근본으로 삼아 개설한 도량이다. 또 고려에서는 밀교도량으로 소재도량이 있었다. 물론 고려시대에 행하여진 80여 종류의 의식들이 모두가 소재(消災)의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좁은 의미에서의 소재도량은 ≪불설치성광대위덕소재길상다라니경(佛說熾盛光大威德消災吉祥陀羅尼經)≫과 ≪불설대위덕금륜불정치성광여래소제일체재난다라니경(佛說大威德金輪佛頂熾盛光如來消除一切災難陀羅尼經)≫에 의거하고 있다. 이밖에도 밀교관계 도량으로는 1367년 6월에 개설된 진언법석과 1264년(원종 5) 6월의 대일왕도량, 1110년 4월의 공작명왕도량 등이 개설됨으로써 고려에서의 밀교에 대한 신앙의 내용이 더욱 풍부하고 발전을 보게 되었다.  

 

  조선은 숭유배불정책을 표방하여 불교를 탄압하고 종단을 통폐합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의 신인종과 총지종도 1407년(태종 7) 11종을 7종으로 폐합하면서 총지종과 남산종(南山宗)을 합하여 총남종(摠南宗)이 되게 하고, 중도종(中道宗)과 신인종을 합하여 중신종(中神宗)으로 하였다. 또 1424년(세종 6) 태종 이후 7종이던 것을 다시 선교양종으로 폐합하게 되면서, 총남종은 조계종(曺溪宗).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선종(禪宗)으로 되고, 중신종은 화엄종(華嚴宗)·자은종(慈恩宗)과 함께 교종(敎宗)으로 폐합되었다. 그리하여 밀교의 신인·총지의 양종은 그 명맥마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400년(정종 2) 3월에는 현성사에서 문두루도량을 개설하였고, 태종은 진언법석·화엄법석 등을 빈전(殯殿)과 각 사찰에서 개설하게 하였으며, 칠칠재(七七齋) 및 소상재(小祥齋)와 대상재(大祥齋)를 개설하게 하였다. 세종도 종단 폐합을 단행하였지만, 1450년 1월 공작재(孔雀齋)를 개설하게 하고 ≪불정심다라니경≫을 개판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또 1451년(문종 1) 5월과 1457년(세조 3) 7월 공작재를 개설하였는데, 그것은 밀교 계통의 ≪공작명왕경≫의 신앙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밖에도 조선시대에는 많은 밀교 관계 전적들이 개판되어 널리 신앙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밀교는 그 발전된 내용 면에서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교리적인 측면에서의 발전보다는 실천면이 강조된 점이나, 실천에 있어서도 밀교 본래의 출세간적인 즉신성불의 목적보다는 병을 고치고 전쟁을 막는 등의 세간적 목적달성을 위하여 신앙되었던 점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밀교에 있어서 더욱 두드러진 것은 밀교가 타종의 교학과 서로 밀접한 융합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이다.   밀교와 미타정토(彌陀淨土)는 인도에서 대승불교운동의 양대 소산으로서, 그 성립 당시부터 서로 무리없이 교섭될 수 있는 역사적 배경과 사상적인 조건 속에서 출발되었다. 법화신앙과 미타신앙을 주축으로 하여 백련사(白蓮社)를 결사하고 천태종풍(天台宗風)을 크게 떨쳤던 요세(了世)는 매일의 일과로서 준제주송(准提呪誦) 1,000편과 미타염불 1만번을 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았다. 이러한 요세의 수행을 통하여 천태사상과 밀교, 그리고 정토신앙이 서로 무리 없이 접근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고려 밀교의 조류는 요세의 경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고, 요세와 거의 같은 시대에 팔공산 거조사(居祖社)에 있었던 원참(元·)은 1298년 ≪현행서방경(現行西方經)≫을 집록하여 미타정토의 왕생을 아미타본심미묘진언(阿彌陀本心微妙眞言)의 염송만으로 가능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특히, 1644년 동래 범어사(梵魚寺)에서 개판된 ≪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佛頂心觀世音菩薩大陀羅尼經)≫의 간기에서 '이 다라니법문은 수양의 미묘한 문이요, 정토왕생의 첩경'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의 밀교는 고려 말기부터 정토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것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개인의 신앙에서는 물론이요, 교학과 사상면에서도 서로 깊은 융합적인 관계로 발전하였다.   밀교와 선 또한 정토와 마찬가지로 신라 말기부터 깊은 교섭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신라 말 도선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동리산(桐裏山) 제2세로서 밀교의 여러가지 작법의식(作法儀式)을 선의 수행법에 응용하여 불교의 일반화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고려의 요세는 매일의 일과에서 선을 하고 남은 시간에 진언지송과 미타염불을 하였거니와, 고려말에는 선수행의 방편인 1,700공안(公案)이 모두 아자(阿字)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선과 밀교의 융섭은 조선시대에 와서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능엄경(楞嚴經)≫은 ≪금강경≫과 더불어 선종의 소의가 되는 경으로서, 이 경전에는 능엄주가 수록되어 있다. 1668년 묘향산 보현사에서 계정(戒淨)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모든 진언들을 모아 ≪진언집≫을 간행하였는데, 여기에 정본능엄주(正本楞嚴呪)가 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능엄주는 선승들도 아침 저녁의 의식 때 염송하였으며, 밀교에서도 이 능엄주를 많이 지송하였다. 이처럼 선과 밀교가 서로 융섭된 관계로 발전하자, 휴정(休靜)은 선가의 의식집인 ≪운수단(雲水壇)≫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선을 교설할 때의 의식집인 ≪설선의(說禪儀)≫를 지어 밀교의 각종 의식법과 함께 필요한 진언까지도 적절히 도입하여 선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게 하였다.

 

상원사. 강원 평창군 진부면. 신라 오대산신앙의 중심도량이다.

 

법광사사리호. '불정존승다라니´라는 명문이 보인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 현교(顯敎)

 

  밀교(密敎)에 대응되는 말이다. 밀종(密宗)인 진언종(眞言宗)에서는 모든 불교를 현교와 밀교로 구별하여 양교의 우열천심(優劣淺深)을 판정하고 있어, 이것을 현밀이교(顯密二敎)의 교판(敎判)이라고 한다. 이 경우 진언밀교 이외의 법상종·삼론종·천태종·화엄종 등의 여러 종과 성문(聲聞)·연각(緣覺)의 이승(二乘) 등을 모두 현교라고 한다. 천태밀교에서는 진언종뿐만 아니라 천태종·화엄종·반야종·열반종 등의 일승교(一乘敎)를 밀교라 하고, 법상종(法相宗) 등의 삼승교(三乘敎)를 현교 또는 현시교(顯示敎)라고 한다.   

 

  또 달리 현교라 함은 예언자 조로아스터(Zoroaster)의 가르침을 신앙하는 조로아스터교를 말한다. 조로아스터교는 종교적·철학적 기반을 두고 있으며,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를 믿는 고대 페르시아 종교이다. 신자들은 스스로를 마즈다 예배교(마즈다야스나 : Mazdayasna)라고 부르며, 한자로는 배화교(拜火敎), 중국에서는 현교(祆敎)라고 하여 삼이교(三夷敎)의 하나로 꼽혔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BC 599~330)에 오늘날의 이란 동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까지, 서쪽으로는 페르시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초기 전파 과정에서는 여러 남신, 여신 등을 믿는 고대 토착 종교와 혼합되었으며, BC 4세기 경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후에 파르티아 제국 시대(BC 247~AD 226)에 이르러 유일신 신앙이 확립되었으며,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가 출현하며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아 발전시켰다. 사산 왕조(AD 224~651)는 조로아스터교 이외의 종교는 박해했으며, 이 시기에 경전 아베스타(Avesta)가 집대성되었고, 일상어인 팔레비어 해설판이 쓰여지기도 했다.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 사상, 내세관, 선과 악으로 대비되는 세계관 등은 유대교·그리스도교.불교·이슬람교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동 지역에 이슬람이 도래하면서 그 교세가 크게 줄었으나, 오늘날에도 인도 뭄바이, 이란 야즈도, 아제르바이잔 등지에서 15만여 명의 신자들이 교세를 잇고 있다.   조로아스터교를 일컬어 배화교(拜火敎), 즉 불을 숭배하는 종교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조로아스터교의 제례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조로아스터 신자들은 불이 타오르는 작은 제단 앞에서 제례를 치르는데, 이 때 신자들은 불 자체를 숭배한 것이 아니라, 동물이나 나무 막대기 헌주 등의 봉헌물에 불꽃과 냄새를 피워 경배를 표현했던 것이다.   이 종교의 창시자 조로아스터의 본명은 스피타마 자라투스트라(Spitama Zarathustra)이며, ’조로아스터’는 자라투스트라의 그리스식 발음이다. 그의 출생 연대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주장들이 있는데, BC 660년 경이라고 보는 것이 보통이지만, 학자에 따라서는 BC 1500년 경, 혹은 BC 6000년 경으로 보기도 한다. 그의 출생지는 학자들의 추측과 자료에 따라 두 곳 정도로 예상되는데, 한 곳은 아프칸니스탄이며, 다른 한곳은 지금의 이란 동부 국경의 옥수스 강 유역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으며 알려진 것도 거의 없다. 후대의 사람들이 전승하는 것으로 추측할 뿐으로, 대개 현명하고 선한 이상적인 인간으로 묘사된다.   창시자 조로아스터의 출생 연도가 불확실한 만큼 이 종교가 창시된 시기에 대해서도 다양한 주장들이 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열두 살에 집을 떠났고, 서른 살에 강력한 신비체험과 영감을 얻어 이후로 자신의 새롭고 독창적인 메시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조로아스터교의 전통에 따르면, 그는 서른살이 되던 해에 아후라 마즈다 신의 천사장으로부터 유일신에 대한 계시를 받게 되며, 그 후 8년 동안 아후라 마즈다의 나머지 다섯 천사들이 하나씩 나타나 그에게 진리를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 후 조로아스터가 계시받은 진리를 대중들에게 전하기 시작했으나, 모두 그를 광인(狂人)이라 생각하고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침내 그의 사촌 중 하나가 그를 믿고 제자가 되었으며, 그 후 왕을 비롯한 많인 이들이 그가 전하는 가르침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조로아스터교는 이원론적 일신교(一神敎)로, 고대 인도-이란 또는 인도-게르만의 종교적 공유재산에 근원을 둔 신들이나 제령(諸靈)을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 아래 통괄하고, 우주를 선과 악의 두 원리로 설명한다. 아후라는 ‘주(主)’를 의미하며, 마즈다는 ‘지혜’를 의미하므로 아후라 마즈다는 ‘지혜의 주’를 의미한다. 당시 대부분의 종교가 여러 신을 섬기는 다신론적 종교였음을 감안한다면, 아후라 마즈다 외의 다른 신을 모두 거짓으로 선언한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은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또한 여기에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는 당시의 다신교적 종교관의 영향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후라 마즈다가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 직접 나타나지 않고, 여섯 가지 불사의 존재 혹은 천사장을 통해 나타나며, 여섯 중 셋은 남성적이고, 다른 셋은 여성적이다. 그리고 이 여섯 가지 존재는 각각 지혜·사랑·봉사·경건·완전·불멸을 상징하고,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아후라 마즈다의 속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여섯 가지 존재를 아메샤 스펜타(amesha spentas)라고 부른다.   경전 《아베스타(Avesta)》에 의하면, 태초에 아후라 마즈다에서 두영이 나왔는데 하나는 선을 선택한 영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천사인 스펜타 마이뉴(spentas mainyu)이고, 다른 하나는 악을 택한 앙그라 마이뉴(angra mainyu, 훗날의 아흐리만, ahriman)이다. 앙그라 마이뉴는 다른 이름들로도 불렸는데, 그 중 가장 많이 불리는 이름은 샤이틴 혹은 사탄이다. 그의 주위에는 악마의 무리가 있어서 명령에 따라 사람을 시험하거나 괴롭히는 일을 수행한다. 이러한 교리를 통해서 조로아스터교는 세계에서 최초로 악마에 대한 계보를 체계화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처럼 선과 악을 분명히 구분한 조로아스터교에 따르면, 세상은 선과 악이 싸우는 투쟁의 현장이며, 인간은 타고난 이성과 자유 의지를 활용하여 이 둘 중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이 때 인간은 선을 선택하여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선택의 결과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 이 때 선과 악은 한쪽이 존재해야지만 다른 한쪽도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아후라 마즈다의 쌍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선의 천사들이 원래의 자연종교적 ·물신숭배적(物神崇拜的) 특성이 약화되고 아후라 마즈다의 뜻대로 움직이는 비주체적 천사가 되고, 반대로 악의 천사들은 주체성을 회복하고 아후라 마즈다와 직접 대결하게 된다.  조로아스터교의 종말론은 2단계로 되어 있다. 신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3일 동안 몸에 그대로 남아서 한평생 행한 일을 돌이켜보고, 제 4일이 되면 심판대로 간다고 믿는다. 따라서 사자(死者)의 육체는 그들의 독특한 장사(葬事)법인 풍장(風葬) ·조장(鳥葬)에 의해 독수리와 들개들의 밥이 되지만, 영혼은 천국의 입구에 도달한다. 그곳에서 천사 미드라가 죽은자의 삶의 행위를 저울에 올려놓고 심판을 한다. 저울이 악한 쪽으로 기울면 그 영혼은 지옥으로 가고, 약간이라도 선한 쪽으로 기울면 그 영혼은 천국으로 간다. 심판을 받은 영혼은 계곡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를 지나는데, 선한 영혼은 넓고 편안한 다리를 건너서 계곡 너머의 천국으로 가고, 악한 영혼은 칼날 같은 다리를 건너다가 결국 계곡 아래의 지옥으로 떨어진다.   한편 조로아스터교의 사후 세계에는 천국과 지옥 외에도 '하밍스타간 (Hamingstagan)'이라는 곳이 있다. 하밍스타간은 양쪽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중간 상태를 말하며 혼합된 지역이라는 뜻을 가진다. 즉,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을 저울질했을 때에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오늘날 천주교가 말하는 연옥설과 유사하지만, 연옥에서 용서받은 영혼은 죄를 씻고 천국으로 옮겨질 수 있다고 하는 천주교의 교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한편 천국과 지옥에 간 영혼은 거기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아후라 마즈다가 예정해 놓은 종말에 이르러 구세주가 나타나면, 모든 영혼들이 부활하고, 악한 영혼은 순화되어 선한 영혼과 합류한다. 그러나 사탄과 악령들은 완전히 소멸된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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