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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여호와의 복합 명칭

수호천사1 2011. 11. 14. 07:13

여호와의 복합 명칭

 

하나님의 자존성과 언약의 불변성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와 연관 된 하나님의 명칭은 택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구원 사역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특히 하나님의 언약의 불변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호와'와 합성형태를 취한 하나님의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1) 여호와 (야웨) 이레( יהוה יראה )- 여호와께서 준비하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창22:13,14)

 

이 명칭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때 이를 저지하시고 수양을 준비시켜주신 하나님의 사역에 관련된 이름입니다(창22:14). 이 호칭은 아브라함이 그 땅, 곧 모리아 땅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에서 나타내어 주듯이 우리 인생의 기본적인 필요들은 여호와 이레(Jehovah-Jireh), 즉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리라”에 의해서 충족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6:11)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을 때, 그분은 우리의 일상의 모든 필요를 이 기도에 다 포함시키신 것입니다. “양식”은 빵, 물, 의복, 머리를 가려주는 지붕, 여행에 필요한 건강, 그리고 육체와 영혼을 유지시키는 데 필요한 이 밖의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바쳐야할 제물까지 준비해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 이레라는 구절이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해 주신 이름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지은 몇 안 되는 이름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그를 여호와께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창22장) 아브라함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믿음의 행위로서 자기 아들을 죽음의 장소에 데리고 가서, 이 가장 귀한 제물을 드리기 위해 칼을 높이 쳐들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이레께서 그를 제지하시고, 대신‘뿔이 수풀에 걸린 한 수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창22:13) 아브라함은 그 숫양을 잡아서 그것을 대신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창22:14)

 

어린 이삭이 제물로 드려야할 어린양에 관하여 묻자, 그의 아비 아브라함은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22:8)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번역가들은 이 말의 순서를 약간 바꿔서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번제할 어린 양으로 자신을 준비하시리라” 히브리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이 번제할 어린양을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가 되겠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대신하여 제물로 삼으셨으므로, 그를 통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것도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슥12:10 : 요1:29, 3:16)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육체적 영적 필요를 모두 충족시켜 주시는 하나님, 즉 여호와 이레가 준비하신 최고의 선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둘째는 여호와(야웨) 닛시( יהוה נסי )입니다. - 여호와는 나의 깃발(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 출17:15)

 

이 명칭은 출애굽의 여정을 가로막는 대적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여호와의 도우심으로써 승리한 뒤 모세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그 제단의 이름을 여호와 닛씨라고 부른 것입니다(출17:15). 여기에서 닛씨( נסי )란 “깃발”을 뜻하는 명사 네쓰( סנ)에 소유격을 의미하는 대명사 접미 인칭 단수를 붙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호와는 나의(승리의) 깃발이시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 명칭은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대적들과 싸우시는 전쟁의 용사이심을 보여줍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대적들의 침략과 압제를 물리치시고 자기 백성을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용사요 통치자 왕이십니다(출15:3,18).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백성이 그 누구를 무서워하며 그 무엇을 두려워 할 것인가. 여호와는 자신의 구원역사를 가로막는 모든 원수들을 쳐부수고 승리하시어 그의 나라를 굳건히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시 23:4). 두려움을 이기는 이러한 용기는 ‘여호와 나의 깃발’, 여호와 닛시로부터 나옵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헤아려 알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거나, 반대 세력이 압도해 옴을 느낄 때 종종 일어납니다. 그러나 여호와 나의 깃발, 여호와 닛시를 알 때, 우리는 용기와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여호와 닛시라는 단어는 전쟁 용어입니다. 전투 중에 자기 부대에서 멀어지게 된 군인은 전쟁터 위로 나부끼는 자기 군대의 깃대나 깃발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그 깃발 아래로 빨리 달려가서, 혼자 싸우는 위험한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여호와 나의 깃발, 여호와 닛시가 되십니다.

 

이 칭호는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하러 나갈 때 계시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도망쳐 나온 후 처음 치르는 것이었습니다. 구약 시대 내내, 이스라엘은 아말렉과 계속 전쟁을 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군대를 이끌고 르비딤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그동안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쥐고 산꼭대기에 서있었습니다. 모세가 깃발의 손을 들고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이겼고, “모세가……손을 내리면 아말렉이”이겼습니다(출 17:11).

 

모세가 지쳐서 팔을 더 이상 올릴 수 없게 되었을 때, 아론과 훌이 대신 그의 손을 붙들어 올렸고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계속 이 전쟁을 탄원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여호수아는 그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15절). 이것은 사람이 지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나의 깃발은 ‘승리하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전쟁은 사람들이 하리라도, 승리는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아말렉은 구약 시대에 육체의 상징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옛 본성을 이기기 위해 육체와 싸웁니다. 이 전쟁에서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에게 보장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씨름하고, 달리고, 싸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와의 나의 깃발, 여호와 닛시가 승리할 것이기 때문에 전투의 결과에 확신을 가지고 주를 섬길 수 있습니다.

 

(3)셋째는 여호와(야웨) 로페( יהוה רפה )입니다. -너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출15:22-27: 출13:21-22: 신32:39: 사45:6-7)

 

이 명칭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호칭하신 것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후 시내광야를 향하여 행군을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에서 물로 인해 고통 받을 때 그 쓴 물을 고치시고 자신의 사역의 특성을 강조하신 명칭입니다(출15:26).

출15:26의 히브리 원문에는 로페( רפה )라는 Qal 능동분사 남성 단수 뒤에 “너를”이라는 목적격 접미가 붙어 있습니다. 로페( רפה )는 “고치다”, “치료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라파( פהר)의 능동분사형으로서 그 의미는 “치료하는” 또는 “치료하는 자”입니다. 그리하여 야웨 로페(יהוה רפה) )의 정확한 의미는 “치료하시는 여호와(야웨)” 또는 “치료하시는 자 곧 여호와(야웨)”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여호와의 법도와 규례를 잘 지켜 의를 행한다면 그 어떤 질병도 내리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시고 자신은 만병을 통치하시는 최고의 의사이심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즉 하나님 뜻에 따라 사는 자는 위험에 노출되지 않으며 영육간의 질병 가운데서도 보호받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 23:3절에서 시인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여호와가 자신의 병든 양들을 치료하시고, 온전하게 회복시키시는 목자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하시는 하나님은 ‘여호와는(우리의) 치료자’라는 뜻을 가진 여호와 로페입니다.

 

상당수의 동물들이 자기 보호 본능을 가지고 있으나, 양은 이것을 거의, 혹은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양들은 대부분 자기가 상처를 입었는지 혹은 병들었는지를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양들에게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그것들을 돌보는 것은 목자의 일입니다.

 

여호와 로페의 치료에서 두 번째로 나타나는 것은 치료 조치입니다. 마라의 쓴 물을 고치신 것처럼, 하나님은 병든 자들을 치료하십니다. 모세에게 이 약속을 하신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하나님은 그의 누이 미리암의 문둥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민 12:11-16). 오늘 날에도 여호와 로페는 변함없이-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그리고 영적-질병들을 치료하십니다.

 

마라의 물 속에 던져진 나무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치료 능력을 나타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에게 육체적 치유가 즉시 이어나는 것은 아닐지라도(어떤 경우에는 부활 때까지 실현되지 않을 수 도 있습니다-고전 15:42참고), 십자가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모든 치유 관계를 상징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결함으로 말미암은 저주를 친히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호와 로페는 우리에게 참 사랑으로 두터운 옷을 입히시며, 의롭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셔서, 우리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예방 조치를 취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질병이나 죄악에 빠지기라도 하면, 그에 가장 적합한 치료를 베푸십니다. 때로 이것은 죄의 용서라는 형태일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기적적인 육체의 치유일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어떤 때에 이것은 관계의 회복이나 혹은 정신적인 문제의 해결일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우리의) 치료자, 곧 여호와 로페가 바로 이런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뜻에 따라 사는 자는 위험에 노출되지 않으며 영육간의 질병 가운데서도 보호받음을 보여줍니다.

 

 

(4) 여호와(야웨) 샬롬(יהוה שׁלום) - 여호와는 우리의 평강이 되시는 주 하나님(삿6:24)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2) 바로 이 “여호와는 (우리의) 평화” 즉 여호와 살롬(Jehovah shalom)의 역할입니다. 이 명칭도 제단의 이름입니다. 사사 기드온이 미디안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여호와(야웨)의 부르심을 받고 그 중대한 사명에 힘겨워 할 때 여호와(야웨)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분명한 표징을 확인하고 나서 부른 이름입니다(삿6:24).

 

여호와(야웨)께서 자신을 부르시고 또한 자신과 함께 하실 것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뵈었던 여호와(야웨)의 사자를 인하여 기드온은 죽을까봐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 때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여호와(야웨)의 보장을 받고 감사함으로 쌓은 제단을 기드온은 여호와(야웨) 샬롬이라고 불렀습니다. 샬롬( שׁלום )이란 “완성되다”, “건강하다”, “평안하다” 등의 의미를 지닌 동사 샬람( שׁלם )의 명사형으로서 “완성”, “평화”, “평강” 등의 뜻을 갖습니다.

 

이 외에도 샬람( שׁלם )은 강조동사 능동형(Piel)으로서 “맹세를 이행하다”라는 용도로 쓰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여호와(야웨) 샬롬( יהוה שׁלום )은 “여호와(야웨0는 평강이시다”,

“여호와(야웨)는 약속을 이행하시는 분이시다” 등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소명기사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명칭은 오직 여호와(야웨)로서 여호와(야웨)의 속성과 그 사역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평강의 주로서 자기 백성들과의 약속을 반드시 이행하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5)여호와(야웨) 체바오트 (יהוה צבאות )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킵니다(삼상1:3). 하나님은 천군천사의 옹위를 받으시며(창28:12) 택한 백성을 위하여 온 우주를 통치하시며 모든 피조물에게 영광을 받으시는 만왕의 왕 되심을 보여줍니다.

 

이 용어는 흔히 “만군의 여호와(야웨)”로 번역되고 있으나 체바오트( צבאות )의 의미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이 용어는 “전쟁에 나가다”, “징집되다”, “제의(祭儀)를 섬기다” 등의 뜻을 가진 동사 차바( צבא )에 기원을 둔 여성복수 명사형입니다. 명사의 뜻은 “병역”, “전사(戰士)”, “군대”, “제의 봉사”, “노역” 등으로 다양합니다. 고대 근동의 아카드 언어에서도 같은 어근의 유사한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 용어의 동사형은 479회나 출현하는 명사형에 비해서 겨우 14회 정도 밖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용어의 대부분의 용도는 전쟁과 제의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특히 구약과 고대 근동 아시아의 문서들(ANE Texts)이 전쟁과 제의의 두 영역에 중첩되어 사용되는 예들은 현대 성경해석자들을 적지 않게 자극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일반적인 야웨의 현현(顯現)의 장소는 언약궤가 안치된 성막 또는 성전에서와 전장(戰場)에서의 두 가지 경우입니다.

 

그리하여 여호와(야웨) 체바오트를 전쟁의 용사( אישׁ מלחמה )이신 여호와(출15:3)를 강조하는 “만군(萬軍)의 야웨”로 해석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용례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 땅 정복전쟁을 시작하기 직전의 여호수아가 정복전쟁의 승리를 보장받은 사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수5:13-15).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사르 체바 여호와(야웨 שׂר־צבא־יהוה )는 한글 개역성경이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체바오트( צבאות )의 용도를 군대에 관련하여 이해하려는 것으로서 전쟁의 용사이신 여호와의 특성을 강조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군대를 지칭할 때는 단수로 표현하지 복수형으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체바오트( צבאות )는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입장이 있습니다. 야웨 체바오트가 천사들과 연결된 구절에서 발견된다고 보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천사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군대로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창28:12;32:2;수5:14;왕상22:19;시68:17;103:21;148:2;사6:2) 대부분 단수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군대적 의미를 배제시키고 있으며 오히려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이름의 의미와 조화를 이룬다고 주장합니다(신33:2;왕상22:19;시24:10;사6:3;24:23;슥14:16).

 

그러나 야웨의 천사들이 야웨의 군대적 기능을 담당하기도 하고 야웨께서 거룩한 전쟁의 용사이신 사실은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의 매우 중요한 주제이므로 여호와(야웨) 체바오트( צבאות יהוה )에서 군사적인 의미를 전혀 배제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체바오트를 “별들”로 이해하려는 입장이 있으나 설득력이 약합니다.

 

(6) 여호와 메카디쉬켐 - The Lord Who Sanctifies: 여호와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출31:13)

 

“너희를 거룩케 하시는 여호와“란 뜻으로 인간의 의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힘입을 때만이 가능함을 보여줍니다(출31:13). 하나님은 그의 속성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하나님의 내재적, 위엄적, 도덕적 거룩이십니다. 이 거룩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하시면서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라고 하였습니다(출31:13).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로부터 멀리 떠나 거룩한 생활로 전향하기를 원하십니다(fp11:45: fp19:2: 벧전1:16: 벧전2:5: 고전3:17).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시 23:5). 성경 전체에서, 기름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용도를 위하여, 물건과 사람과 장소를 거룩하게 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거룩하게 하다’는 말의 기본적인 뜻은 ‘구별하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후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짓고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 관한 몇 가지 지침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시고 그들과 더불어 만나실 수 있을 만큼, 그들은 충분히 거룩하고 성결한가? 여호와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출 31:13).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가 여호와 메카디쉬켐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성화하여 거룩해질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도록, 친히 우리를 구별해 주십니다. 여호와 메카디쉬켐만이 우리를 거룩케 하실 수 있습니다.

 

(7) 여호와 로이 - The Lord Who Sanctifies: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23:1)

 

로이의 주된 의미는 먹이다, 인도하다, 목양하다(feed, lead, parsture)의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이스라엘(백성)의 목자로 묘사하였습니다(창49:24: 삼하7:8: 시80:1: 사40:11). 시편 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묘사하였습니다(시23:1: 시28:9, 81).

 

성경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사 53:6)라고 말할 때, 이것은 우리를 말 못하는 짐승에 비유한 것입니다. 모든 동물들 가운데, 양은 특히나 무방비 상태로 모든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비가 올 때, 양들은 비에 흠뻑 젖고 몸이 무거워지므로, 물속에 빠져 쉽게 익사합니다. 양들은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독 있는 뱀이나 전염성 곤충에 잘 물립니다. 또한 통통하게 살이 찌면 누워 있어야 하는데, 이때 누군가가 몸을 뒤집어 주지 않으면 질식해서 죽을지도 모릅니다.

 

목자에 대한 이러한 전적인 의존성 때문에, 양들은 하나님과 신자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비유에 잘 등장합니다. 시편 23:1절이 바로 이러한 관계를 표현해주고 있습니다.“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할 때, 이것은 여호와 로이, 즉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우리 목자이신 ‘여호와’이지, 우리 목자이신 하나님이 아님에 주의해야합니다.

하나님의 고유한 칭호인 여호와는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미하고, 로이는 우리들을 온유하게 돌보시는 방식을 말해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이 단지 두려우신 엄위의 하나님만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신약에 나오는 것처럼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지니신 하나님은 강조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편 23편에 나오는 여호와 로이의 모습은, 자녀들을 돌보는 친밀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잘 보여줍니다.

 

여호와 로이라는 두 단어는 하나님의 실제 칭호를 가리키기 위하여 명사나 형용사로 완전히 굳어진, 여호와의 이름을 이루는 한 구가 아닙니다. 이 두 단어는 하나님의 역할을 가리키는 문장 혹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설명하는 묘사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23:1). 시편 23편은 하나님이 백성을 권고하신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목자로 처음 묘사된 시기는, 야곱이 창세기 48:15에서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을 때였습니다. 마치 양이 양치기 혹은 목자를 떠나 헤매는 것처럼 야곱도 하나님을 떠나 방황했지만, 그럴 때조차도 하나님은 항상 그의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노인이 되었을 때, 야곱은 자신이 여호와 로이를 경험하고 살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그리고 나의 선한 목자(good shepherd), 위대한 목자(great shepherd), 그리고 목자장(the chief shepherd)으로 묘사하였습니다(요10:14: 히13:20: 벧전5:4). 진실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말씀하신 것은 가장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 위대한 목자, 목자장으로서 양때들인 우리를 사랑하여 먹이고, 보호하며, 인도하고, 우리의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8) 여호와 치드케누 - 여호와는 우리의 의(렘23:6)

 

이 명칭은 회복된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왕에게 주어지는 명칭입니다. 주님께서 세상 끝날 이 세상에 다시 재림하실 때 많은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구주이심을 인정하게 될 것이며 그 때에 모든 성도들은 주님이 우리의 의가 되심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책을 씼어야 할 우리의 절실한 필요를 채워 주시는, ‘여호와 우리의 의’, 여호와 치드케누입니다.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시23:3) 분이 바로 여호와 치드케누입니다.

죄는 많은 경우에 있어, 자기의 길로 가는 것 혹은 제길을 벗어난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각기 제길로 갔거늘”(사 53:6). 우리가 죄의 길을 걸어 간다면, 우리에게는 죄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옥에 떨어지는 심판은 벌을 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인도하시는 우리의 목자, 여호와 로이는 또한 그분 앞에 덧떳이 설 수 있도록 새로운 신분을 은혜로 부여해 주시는 , 여호와 우리의 의, 여호와 치드케누이기도 하십니다.

 

여호와 치드케누라는 구는 예레미야 23:6에 처음 나옵니다. 때가 이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유대인들이 그분을 메시아로 바로 깨닫고 구주로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때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 우리의 의’로 알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 여호와의 의를 통하여,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경험한 칭의를 알게 될 것입니다.

 

칭의는 타고난 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로운 신분은 우리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셔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시 23:3) 분은 바로 여호와 치드케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행한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위하여”(3절) 자신 백성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9) 여호와( 야웨 ) 샴마(יהוה שׁמה )- 가까이 임재하여 계신 주(主) ,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입니다(겔48:35)

 

이 명칭은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에서 나온 것입니다(겔48:35). 에스겔은 범죄한 유다 백성들에 대한 야웨의 징벌로써 야웨의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나가는 환상을 보았습니다(겔10:18-22;11:22-24). 그 후 예루살렘이 회복되리라는 메시지와 더불어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갔던 예루살렘 동편 문을 통하여 다시 돌아오는 환상을 봅니다(43:1-5). 새로운 성전의 건설과 더불어 예루살렘 성은 이제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거처가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 성읍의 이름이 여호와 샴마( יהוה שׁמה )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샴마( שׁמה )란 “거기에”를 뜻하는 샴( שׁם )에 방향을 표시하는 헤( ה)가 접미되어 공간적인의미를 지닌 보어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여호와 샴마( יהוה שׁמה )란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신다”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온갖 더럽고 추한 것들을 멀리 제하여 버릴 때에 영원토록 그들 중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겔43:9). 즉, 여호와는 그의 자녀들이 어디를 가든지 함께 계실 것이고, 어느 때든지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입니다. 단, 여호와의 뜻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할 때 그리 하실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여호와 삼마의 임재를 확신한 것입니다.

구원과 더불어 우리가 받은 가장 큰 은혜 가운데 한 가지는, 우리 삶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고 명령하시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임재를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대위임을 주셨을 때, 예수님도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여호와 삼마라는 이름은 에스겔 48:35에 나옵니다. 예언을 마치며 에스겔은 영원한 도성을 묘사하고, 하늘에서도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여호와 삼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목자가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안위하실 때에(시 23:4), 그분은 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목자는 지팡이를 야생 동물들을 치는 곤봉으로 사용합니다. 그의 막대기는 곤란한 지경에서 양을 이동시키는 도구입니다. 그것을 사용하여 목자는 물이나 구덩이에 빠진 양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엄밀히 해석하면, ‘안위하다’는 말은 ‘인도하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 삼마는 지팡이로 적들을 물리치고, 막대기로 우리를 위험에서 건져냄으로써, 양들을 인도합니다.

세운교회 김강석목사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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