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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 이종성 목사는 누구인가?

수호천사1 2011. 10. 5. 13:48

고 이종성 목사는 누구인가?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2일 별세한 이종성 박사는 평생 확고한 보수신학을 견지하면서도 열린 자세로 타 교파를 포용하려고 애썼다. 비록 몸은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교단에 머물고 있었지만 학술 교류는 진보와 보수를 넘나들었다. ‘교단 분열이 나 때문’이라는 자의식에서 나온 한국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노력이었던 것이다.

예장통합 총회장, 장신대 학장, 한국기독교학술원장 외에도 이 박사가 전국신학대학협의회 회장, 동북아신학교협의회 회장, 한국신학연구소 이사장,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았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고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엔 장녀 박근혜(현 한나라당 국회의원)씨를 장신대 기독교교육대학원에 한 학기 동안 다니도록 했다. 이에 대해 이 박사는 생전 “박근혜 씨의 종교는 고려하지 않았다”며 “다만 어려웠던 처지를 생각해 배려했던 것”이라고 했었다.

평생 기독교학자로 교육계에 몸담았던 그는 ‘기독교 신학이 사회를 통합하고 이끌어야 한다’는 분명한 소신을 지녔었다. 장신대 교수 은퇴와 함께 이듬해부터 한국기독교학술원을 설립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한국기독교학술원은 그동안 줄기세포, 인권, 통일 등 사회 주요 쟁점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특히 깊이 있고 균형 잡힌 그의 저서는 수많은 신학생과 목회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가 지금까지 발간한 저서는 신학서적만 ‘신학적 인간학’ ‘종말론Ⅰ,Ⅱ’ ‘조직신학개론’ ‘신학서론’ ‘이야기로 푸는 조직신학’ 등 40여권에 이른다. 하나같이 한국 신학계에 커다란 이정표를 제시했던 책들이다. 그는 또 10년 넘게 장신대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신학교육 체계를 정비해 장신대를 오늘과 같은 세계적인 신학대학으로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교회 분열, 한국교회의 난맥상, 사회와 민족의 대립에 대해 깊은 자책감을 갖고 있었다. 2005년 5월 6일,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월례발표회에 참석한 이 박사는 “한국 교회와 사회의 총체적인 문제점 앞에서 아무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사실 앞에 신학교육에 30년 동안 교수와 학장으로 재직했던 나로서는 너무나도 마음 아프게 잘못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그는 “1957년 3월 영락교회 부목사로 한국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을 때 장로교회가 셋이요 감리교회가 하나요 성결교가 하나였지만 지금은 교파수가 135개요, 그 중 예장 교회가 98개가 되고, 감리교와 성결교는 각각 둘로 나뉘어졌다”며 “이러한 분열과 파벌주의가 전부 내가 현역으로 활동하던 기간인 1960년대부터 85년 사이에 일어났다는 사실에 크나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또 공개석상에서 개인적인 죄를 고백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1936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가서 중학교를 다니려고 했지만 일본경찰서에서 여행권을 발행해 주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일본에서 공부하던 학생의 학생증을 입수해 그 학생의 사진을 떼어내고 저의 사진을 붙여 무사히 일본으로 가서 공부하게 되었다”며 “이것은 분명 서류를 위조한 죄 된 행동이었다”고 말했다.

이밖에 그는 도쿄시내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무심코 시계를 주워온 일, 친구의 대학입학 시험을 대신 쳐준 일 등을 자백하며 “이것은 명백한 횡령이자 사기 죄”라며 “어느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않고 늘 마음속에 무겁게 숨겨둔 죄였다”고 밝혔다.

이 같은 그의 고백에 당시 참석자들은 “마치 어거스틴의 참회목록 하나하나를 듣는 것 같았다”며 “그의 참회는 풍성한 영적 유산으로 한국 교회에 큰 유익을 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김성원 기자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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