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한국 기독교 역사 관련 자료

수호천사1 2011. 8. 9. 12:11


기독교자료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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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



아시아에서 제일먼저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나라는 중국입니다.
그런데 1807년에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가 처음으로 중국 선교를 시작한 이래 25년의
노력 끝에 겨우 성경을 번역했고, 그가 죽기 전에 1명 전도했습니다.
태국은 우리나라보다 65년 빠른 1819년에 선교가 시작되었지만 30년 동안에 두 사람
세례 받았고, 몽골에서는 선교 40년간 한 사람도 세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어떻습니까?


(자료2)


1884년 알렌이 조선에 첫 공식 선교사로 들어온 이후 17년만인 1901년에 감리교에서
한국인 목사가 나왔고(김창식, 김기범), 23년 만에 장로교회서 노회가 만들어지고,
27년 만에 장로교 총회가 만들어져서 해외선교를 시작했습니다.


(자료3)



알렌 다음으로 최초의 성직자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일본 요꼬하마에서 조선에 들어올 때
한글로 번역된 ‘마가복음’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중국에서는 모리슨 선교사가 선교를 시작한지
25년 후에야 중국어 성경이 번역되었는데 우리는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성경이 만주와 일본에서 한글로 번역이 되어 있던 것입니다.
세계에 이런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한국교회는 이런 특별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이런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에게 있는 이런 엄청난 은혜의 역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면서
다른 나라의 신앙과 부흥역사만 특별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선교가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중국, 만주, 일본, 미국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료4)


1.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중국)
조선과 관련된 하나님의 선교 준비는 중국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당시 서양인들에게
아시아는 중국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 조선에 들어오신 선교사님들 대부분은
중국, 만주, 인도 선교를 계획했다가 도중에 조선으로 들어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지금 소개할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토마스는 1840년 8월 영국 웨일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859년 런던대학교 뉴 칼리지에서 대학과정과 신학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부인과 함께 중국 선교를 떠납니다.
그런데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부인 캐럴라인이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 후 너무 상처를 받은 토마스는 중국 선교사직을 그만 두고 중국 산동성에서
세관원으로 일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알렉산더 윌리엄슨 선교사의 주선으로
한국에서 병인 천주교 박해를 피해 중국에 온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게 되면서
다시 선교에 대한 꿈을 꾸게 됩니다.
우리 같으면 선교를 하려다가도 박해가 있으면 안 할 것 같은데
토마스는 오히려 조선선교에 대한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한국에 갈 기회를 찾던 토마스는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호의 소유주인 미국인 프레스톤을 만납니다.
결국 조선말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던 토마스는 제네럴 셔먼호의 안내자겸
통역자로 동승하게 되고 그렇게 염원했던 조선을 향해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가 번역한
한문성경 수십 권을 가지고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셔먼호가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도착하여 계속해서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 때
배가 머문 곳에 조선의 문정관이 와서 외국과의 무역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므로
물러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셔먼호의 선장은 이 말을 무시하고 대포로 조선을 위협하면서,
그리고 병졸까지 납치해서 감금하면서 계속해서 항진을 강행합니다.
당시 평양은 공포로 가득했고, 이 이방인들에 대해서 적대적인 감정이 팽배해 졌습니다.


(자료5)


때마침 조선의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 홍수로 불었던 대동강 물이 줄어들고 서해에 썰물 때가 되어
물이 급격히 줄어들자 셔먼 호는 강 바닥에 좌초되어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평양감사 박규수(연암 박지원의 손자_양반전, 허생전)의 명에 따라 상류에서 병졸들이
작은 배들에 여러 척 연결하고 그 위에 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붙인 신탄선을 떠내려 보내자
셔먼 호에 이르러 배가 불타기 시작했습니다. 배에 불이 붙기 시작하자 선원들은 강으로
뛰어 내려 강변으로 헤엄쳐 올라오게 되었고,
이 때 대기하고 있던 병졸들이 물에 오르는 선원들을 닥치는 대로 칼로 쳐 죽였습니다.
토마스 목사님도 더 이상 배에 있을 수 없어서 떠나올 때 준비한 한문성경 몇 권을 품에
품고 강으로 뛰어 내려 헤엄쳐 나왔는데 헤엄쳐 나온 토마스 목사를 퇴교 박춘권이 칼로
쳐 죽임으로써 그는 한국 초기 선교 역사에서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 때 토마스 목사의 나이 겨우 27이었습니다.
그 시체는 토막 났고 이어 강변에서 불태워 졌습니다. 얼마나 허무한 죽음입니까?
그런데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당시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최치량이라는 13세살 된 소년이 토마스 선교사가
흘린 성경 3권을 주워 집으로 가져옵니다. 그런데 서양인의 물건에 함부로 가져온 것이 무서워서
다시 그 책을 평양성 대동문을 지키던 박영식에게 주게 됩니다.
그런데 박영식도 이 성경을 불태우지 않고 집으로 가져와서 뜯어 벽지로 사용을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벽지로 사용된 성경을 읽다가 그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합니다.
이후 13살이었던 최치량이 성인이 되어서 박영식의 집을 구입한 후 주막을 시작합니다.


(자료6)


평양선교가 처음 시작된 것이 토마스 선교사가 죽은 지 27년 후인 1893인데 이때
마펫 선교사가 평양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갔다가 최치량의 주막에 머물다가 성경으로
벽지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최치량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고, 최치량도 예수님을 믿고 1894년에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과거 박영식의 집이었던 최치량의 주막이 평야 최초의 널다리골 예배당이 됩니다.


(자료7)


널다리골 예배당이 바로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의 중심에 있던 장대현 교회의 전신이고,
그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 장로님이 조선 최초의 장로교 목사가 됩니다. 놀랍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어느 날 널다리골 예배당 근처에 살고 있던 노인이 마펫 선교사를 찾아와서
울면서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데 바로 30년 전에 토마스를 죽인 박춘권 이었습니다.
지난 30년간 박춘권이 서양인을 죽이고 죄의식 가운데 살고 있었는데 몇 년전 부터
널다리골 예배당에서 주일마다 울리는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박춘권은 자신이 예수를 믿은 후 그가 간직하고 있던 성경책 1권을 그의 조카 이영태에게 주게 되고,
이영태 역시 그 성경을 읽다가 예수를 믿게 되는데 훗날 이영태는
평양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레이놀즈 선교사를 도와 성경번역에 큰 도움을 주게 됩니다.
이런 모든 역사가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의 허무해 보이는 죽음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자료8)



2) 만주에서의 상황(로스선교사, 의주청년, 서상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이후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를 위해 만주에서 중요한 작업을 준비하고
계셨는데 바로 성경번역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존 로스 선교사가 사용되었습니다.
로스 선교사는 1872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중국으로 파송이 됩니다.
중국에 도착한 그는 만주로 가고 만주에서 알렉산더 윌리암슨을 통해 6년 전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는 이것을 시작으로 조선 선교에
마음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가 1874년 10월 9일에 간 곳이 ‘고려문’(자료9)입니다.


(자료9)


고려문은 당시 청나라와 조선의 국경이었고, 합법적인 교역이 이루어지던 관문이었습니다.
그는 한국 사람을 만나면 가지고 간 한문 성경을 나누어 주려고 했지만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차가워서 뜻대로 하질 못했습니다. 그러다 로스는 우연히 자신이 머물던 여관에서
50대 남자 상인을 만나 그에게 현재 한국의 상황과 발음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로스 선교사는 그 상인에게 한문으로 된 신약성경을 건네줍니다.
이렇게 로스는 1차 고려문 방문을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별 소득이 없어 보이는 여행입니다.
하지만 로스에게 성경을 받은 그 50대의 상인은 성경을 가지고 집으로가 본인은 보지 않고
그것을 아들과 그 친구들에게 주어서 읽게 했는데 그 젊은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리곤 얼마 후 그 아들과 친구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서 로스와 매킨타이어를 만나기 위해
만주까지 걸어서 찾아갑니다. 하지만 로스는 집에 가서 부모님과 다시 상의할 것을
제의하고, 부모로부터 허락을 받은 후 그 상인 아들의 친구가 먼저 와서
우정장로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되는데 이때가 1879년입니다.


(자료10, 1-최초의 수세자, 2-백홍준, 3-이응찬, 5-김청송, 7-서상륜)


그리고 그 후에 성경은 받은 상인의 아들이 세례를 받게 되는데 그가 바로 백홍준입니다.
백홍준은 로스를 도와 이응찬과 함께 한글 성서 번역에 매우 큰 도움을 주기도 하고
서상륜과 함께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조선에서 권서의 임무를 하면서 복음은 전한 전도자입니다.
이 백홍준은 1887년 언더우드가 세운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의 초대 장로가 되고
그 후 전국으로 순회전도를 하다가 1892년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옥중에서 순교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1876년 3월에 조선이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으면서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한국이 문호를 개방하게 됩니다. 그러자 로스는 그해 4월에 다시 고려문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어학 교사로 의주 상인 이응찬을 만납니다.
로스 선교사는 자신이 조선에 들어갈 수는 없더라도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되면 한글 성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성경번역을 시작하는데 그의 한국어 교사인 이응찬이 많은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이응찬은 당시 아편과 음주가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로스의 성경번역을 도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응찬이 성경을 번역하다가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자료11)


그리고 그 후 열심을 다해 로스의 성경번역을 돕는데
마침내 1882년에 비로서 최초의 한글 누가복음서가 번역이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국 땅에서 콜레라에 걸려 1883년 9월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이응찬이 번역한 누가복음이 김청송이라는 사람을 통해 만주에 있던 한인촌에 퍼지게 되면서
1884년 말에 가서는 압록강 연안 한인촌 들에서 세례교인 100명, 남자 세례요청자 600명,
매일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가정이 수천 가정이나 되었습니다.
여기서 또 한 명 소개해야 할 중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입니다.


(자료12)


서상륜은 백홍준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은 백홍준은 서상륜에게도 복음을
전하지만 처음에 서상륜은 그것을 거절했다가 결국을 예수를 믿게 되는데,
바로 이 서상륜이 만주에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조선에 들어와 1883년 5월부터 평양에만 1천권의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을 배포했고, 같은 해 서울에 4백권의 복음서를 반포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개종자가 생겼고 서상륜은 로스 선교사에게 서울로 와서 세례 베풀어 주기를 요청까지
합니다.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먼저 목회자를 초청해서 세례를 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조선에서 선교가 시작되기 이전의 상황입니다.
이때 서상륜의 동생 서경조도 신약을 몇 번 읽고 예수를 믿게 되는데 그는 삼촌이 계시는 황해도
소래로 내려가서 전도하기 시작했고, 최소 1885년 초까지 최초 20여명의 세례 청원자를 내게 합니다.
그러면서 1883년 5월 16일에 한국인이 스스로 세운 최초의 소래교회(자료13)가 세워집니다.


(자료13)



조선 최초의 목회자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황해도 소래마을에 갔을 때 굉장히 놀란 것이
선교사가 한번도 와 본적이 없는 이 곳에 58세대 중에 50대가 이미 예수를 믿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세상에 이런 엄청난 선교 역사를 가진 나라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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