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나쁜신앙)

[스크랩] 요즘 유행하는 이단들은 별거 아닙니다!~(2)ㅡ이단자료(재수정)

수호천사1 2011. 8. 3. 16:23

요즘 유행하는 이단들은 별거 아닙니다!ㅡ(2)ㅡ이단자료.

앞서 다룬 이단들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수정)

 

참고: 이단들이여~ 여기에서 이단이라고 사용한 것은 사이비라는 단어가 아닙니다.

이단들은 오해하지 마시고 문자 그대로 처음은 같으나 끝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안식교는 안식일을 중시하는 이단이다]

 

전형적으로 구약과 신약을 구분하지 못하는 가운데 나타난 대표적인 절기중심 이단이다.

이들의 주장은 안식일은 구약성경에서 영원히 지켜야할 규례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런 논리라면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절기들 중에서 유월절도 영원한 규례다.

그러면 유월절도 지켜야 한다는 말인가? 그들의 오류는 그림자와 실체를 구분 못했다.

 

먼저 질문하고 싶은 것은 안식일은 누구에게 주어진 절기인가?

그것은 선택받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유대인들의 절기였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안식일 뿐 아니라 구약성경 모든 절기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해당되는 것들이다.

만약에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지 않았다면 그들의 절기는 영원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스라엘은 버림을 받았고 그 이후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이 나타난 것이다.

즉 시대가 전혀 다르다. 그런데 왜 굳이 과거 유대인들이 지켰던 것을 지켜야 하는가?

 

또한 신약성경에서 유대인들의 절기를 지키라는 단 한 구절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유대인의 모든 것들이 옛 것으로 되었다는 것을 강조한 말씀이 곳곳에 등장한다.

 

또 한 가지 안식교에게 묻고 싶은 것은 현재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민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선택 백성은 교회라는 신약시대의 영적 이스라엘이다.

 

그렇다면 지금 유대인들이 지키는 절기들은 사실상 모두 지나간 것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신약시대 성도가 그렇게 지나간 것들을 현재의 유대인과 같이 지키는가?

 

안식일의 기원은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7일째 되는 날 안식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의미 있는 것은 아담이 범죄함으로 그 누구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했다.

 

즉 이 땅에서 참 안식을 사람들은 잃어버렸다는 것이다.(히브리서)

그 안식을 과연 누가 이루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가 7일째 되는 날 무덤에 들어갔다.

 

유대인들이 지켰던 안식일 날 예수는 정확히 그 날에 무덤에 묻히시면서 성취한 것이다.

이렇게 창조 이후 누구도 참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예수가 처음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8일째 되는 날 이 땅에서 부활을 하셨다. 그 날이 주의 날이다.(일요일)

이렇게 예수는 과거 유대인들의 절기 속에 담긴 것들을 성취하게 된 것이다.

 

창조6일(유대인의 15일)ㅡ유대인의 유월절 날 예수는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죽으셨다.

창조7일(유대인의 16일)ㅡ유대인의 안식일 날 예수는 안식일의 주인으로 무덤에 묻혔다.

새날8일(신약시대 17일)ㅡ유대인과 무관하게 주의 날에 주님은 부활을 하신 것이다.

 

이렇게 유대인이 지켰던 모든 날짜와 절기들은 예수를 상징하는 그림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진정으로 그런 것들을 성취하기 위해서 유대나라에서 태어난 것이다.

신약시대 교회가 주일에 모이는 것은 절기가 아니다. 부활의 날에 모이는 것 뿐이다.

 

초대교회가 유대인의 절기를 지켰다면 신약성경에 정말로 자주 등장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반대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심하라고만 가르친다.

이렇게 신약성경에서 교회가 유대인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는 내용은 전무하다는 것이다.

 

 [안상홍파는 유월절을 지키는 신흥 기독교 이단이다]

 

안상홍파는 여호와 증인의 구약성경 중심과 달리 신약성경 안에서 벗어난 자들이다.

이들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세례, 유월절, 안식일까지 모두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약성경 안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구분하지 못한 이단이 바로 안상홍파다.

그럼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신약과 구약이라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언제부터 구분이 되었는가?

흔히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으로 혼동하기 때문에 안상홍파가 나타난 것이다.

 

신약성경이라고 해서 모두 새 언약의 시대로 착각하면 매우 곤란하다.

한 예로 예수는 자기가 죽기 전에 안식일과 유월절 기타 등등 대부분을 지켰다.

 

이렇게 예수도 죽기 전까지는 구약의 십일조까지 다 지키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럼 예수가 십자가에 죽기 전 이렇게 행한 시대가 과연 새 언약의 시대일까?

 

아니면 옛 언약의 시대일까? 결론은 그 시대는 아직은 옛 언약의 시대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초적인 구분을 못하고 그들은 유월절을 새 언약으로 유착시킨 것이다.

 

그럼 새 언약은 언제부터 시작 되었는가?

새 언약의 진정한 출발은 엄밀히 말한다면 예수의 죽음으로 성취가 된 것이다.

 

예수가 죽기 전에는 죄와 사망과 율법들이 여전히 왕노릇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죽은 이후 새로운 시대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새 언약의 신약시대다.

 

사실상 예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뒤집어진 것이다. 예수의 죽음 이후는 다르다.

예수는 더 이상 유대인의 왕이 아니며, 이스라엘은 더 이상 선민이 될 수 없었다.

 

또한 율법으로 서 있었던 구약의 죄 사함이라는 그림자가 실제적으로 가능하게 된다.

이 모든 경계와 그리고 구분은 예수의 죽음으로 비로써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이렇게 구약의 모든 절기와 율법들을 옛 것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유대인의 언약을 그림자로 만들고 그리고 그가 실체로 나타난 것이 예수 십자가다.

 

물론 부활도 마찬가지로 더 크게 확장이 되는 새 시대의 사건이었다.

안상홍파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구분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보인 것이다.

 

안상홍파의 주장대로 예수가 십자가에 죽기 전에 행했던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면??

그럼 예수가 죽기 전에 행한 유대교적인 각종 절기와 의식도 모두 다 지켜야 하는가?

 

최소한 옛 것과 새 것의 구분조차 못해서 그들은 십자가 이전의 것들을 주장하고 있다.

예수가 죽기 전에는 여전히 새 언약이 아직 오지 않았던 옛 언약의 시대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안상홍파는 위 구절을 인용하면서 예수도 안식일을 지켰다고 주장하면서 우리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가?

예수는 자기가 죽기 전 자기의 그림자였던 율법들을 대부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는 처음부터 돌에 맞아 사역을 하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다.

당시 예수가 율법을 전면 거부했다면 3년 동안 사역도 못하고 일찍 끝났을 것이다.

 

안상홍파는 새 언약과 유월절을 전혀 구분하지 않고 같은 선상으로 이해한 것이다.

특히 그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새 언약의 만찬이 곧 유월절 만찬이라고 주장한다. 

 

그럴듯한 이야기다. 그러나 유월절과 새 언약은 그 성격이 크게 다르다.  

유대인이 지켰던 유월절은 예수의 희생을 상징한 옛 언약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유월절과 새 언약이 같은 것인가라는 것이다.

주의 만찬은 새 언약의 약속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옛 언약의 유월절과 동일한가?

 

주의 만찬은 유월절 그림자에 속한 것이 아닌 새 언약에 속한 약속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월절과 만찬을 혼합해서 지켜야 한다는 것은 상식밖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안상홍파 주장대로 유월절을 지키려고 한다면 예수처럼 모두 죽어야 한다는 소리다.

왜냐하면 예수는 유월절 날 만찬도 행하시고, 유월절 날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이다.

 

진짜로 유월절을 지키려면 유월절 뿐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다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유월절 날 만찬보다 유월절 날 십자가에 죽었던 사건이 더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월절 날에 행했던 예수의 만찬은 유대인의 유월절과 동일한 성격이 아니었다.

 

유월절 만찬을 거행하면서 언급한 새 언약의 실체는 그 만찬 자체가 결코 아니었다.

그 새 언약은 바로 보이는 만찬이 아닌 십자가에 희생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누구도 부인 못하는 것은 유월절 만찬과 새 언약이 무엇을 말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새 언약의 표적이다.

 

이렇게 새 언약을 성취할 예수는 구 언약인 유월절 날 제자들과 약속의 만찬을 가지셨다.

결국 유월절 날에 가진 예수의 만찬은 '약속으로써 새 언약'이라면 그 '새 언약의 성취'는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이다. 그것은 유월절이라는 그림자를 이루신 실체의 사건!

 

그런데 안상홍파가 주장하는 새 언약 예수의 만찬+유대인의 유월절이라면 말이 되는가?

어떻게 새 언약을 이루실 예수와 옛 언약의 유월절이 서로 같은 레벨인가 라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새 언약의 재물이며, 유월절의 실체이며, 새 언약의 성취였던 것이다.

 

새 언약을 이루실 예수는 자신의 그림자였던 구 언약이라는 유대인의 유월절과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유월절의 실체가 되시는 분이시다. 그는 그림자라는 유월절을 성취하는 새 언약을 위한 참 재물이었고 또한 그림자라는 안식일의 참 주인이 되시는 분이셨다.

 

더 이상한 것은 사도들이 안상홍처럼 유대절기를 끌어다가 지킨 예가 있었는가?

아무리 역사가 오래 되었다고 해도 이런 억측스런 주장을 하다니 정말로 이상하다.

그래서 그들이 유월절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안식일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다시 정리하면 예수가 유월절 날 친히 거행했던 만찬은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이라면, 예수가 유월절 날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은 새 언약의 성취(완성)라는 것이다. 즉 예수는 새 언약의 두 요소인 약속과 성취를 위해서 만찬과 그리고 죽음을 당하셨던 것이다.

 

혹시 과거에 경북에서 어떤 사람이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은 한국 최초의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해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지요. 아마 이런 사상들 때문에 치명적인 행위를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상식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는 행위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지요.

 

그리고 초대교회(신약시대)가 유월절을 지켰다면 초대교회에서 단 한 구절이라도 유월절 만찬을 지켰다고 나와야 한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내용이 초대교회에 단 한군데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유월절 만찬과 전혀 다른 표현인 주의 만찬을 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새 언약의 적용은 예수가 죽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적용되지 않았다.

즉 성령의 내주가 없었다는 것이다. 성령의 내주는 예수의 죽음 이후에 나타난다.

오순절의 의미는 바로 새 언약을 적용한 새로운 시대에 나타난 대표적인 특징이다.

 

이렇게 분명한데 성경을 억지로 풀려는 이단들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지?

이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구분하지 못한 여호와 증인과 비슷한 오류에 빠진 것이다.

안상홍파는 신약성경 안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류가 되었다.

 

[참고: 유월절 날 만찬은 새 언약의 약속이며 유월절 날 십자가는 새 언약의 성취다]

 

살펴볼 것은 유월절 만찬에서 새 언약을 언급한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유월절은 예수의 죽으심을 나타내는 옛 언약으로써 그림자적인 절기에 불과하다.

 

예수가 유월절에 새 언약을 언급한 것은 유월절 그림자와 또 다른 새 언약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유월절과 그 날 예수가 언급했던 새 언약은 분명하게 그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날 만찬에서는 마치 유월절이라는 옛 것과 새 언약이라는 새 것이 동시에 나타난다.

예수가 죽기 전 말한 그 새 언약은 바로 옛 것이 아닌 십자가라는 새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또한 언약의 기본적인 구조는 약속과 성취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월절에 말씀하신 새 언약은 그 만찬 자체보다 전혀 새로운 십자가 죽음이었다.

 

이렇게 그 날 밤에 말씀하신 새 언약은 새 언약의 요소 중에 약속에 포함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 날 밤에 예수는 그 만찬으로 자기의 죽으심을 약속하고 있었던 것과 같다.

 

이렇게 유월절 날 예수의 만찬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새 언약을 약속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은 바로 성취로 나타나게 된다. 그것이 곧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었다.

 

이렇게 만찬은 새 언약을 위한 약속이라면 십자가 죽음은 새 언약의 성취라는 것이다.

그 날 만찬에서 보여주신 것은 새 언약이라는 것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약속이었다.

 

사람이 어떤 약속을 할 때에 새로운 약속을 미리 정한다면 그 약속은 새 약속이 된다.

만약에 새 약속이 아닌 과거의 것을 말했다면 새 약속이 결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새로운 것을 예수는 만찬에서 약속하셨던 것과 같다. 그것이 십자가다.

주의 만찬 날 새로운 것을 말씀하신 새 언약은 바로 새로운 약속의 성격이다.

 

그리고 그 새 언약의 약속대로 주님은 십자가에서 그 새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셨던 것이다.

이 때에 약속을 성취한 십자가의 죽음은 바로 새 언약에서 성취의 성격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구 언약 안에서 새로운 약속을 하시고 구 언약 안에서 새로운 성취를 이루셨다.

이렇게 예수는 유월절 날에 새 언약의 약속과 새 언약의 성취를 모두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약속을 성취한 이후는 새 언약의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런데 굳이 유월절 만찬이라는 약속을 가지고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다음은 가장 큰 이단인 카톨릭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카톨릭은 성경적인 정치와 신학에 있어서 치명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흔히 정치라고 하면 단순하게 교황정치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와 사도들은 전체 교회를 대표하는 교회의 교황과 같은 존재를 세우지 않았다.

왜냐하면 교회 전체를 대표한다면 사도들이 서로 각각 차별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사도들은 같은 사도들이었다. 그들은 지역교회를 대표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역의 대표성을 가진 자들이 후일에 감독으로 등장을 하게 된다.

감독이라는 위치는 사실상 도시나 지역을 목회하는 위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사도보다 더 높고 전체 감독과 같은 막강한 교황이 존재한다면 말이 되는가?

 

사도들이 떠난 이후 사도들보다 더 높은 교회의 직분은 없었다.

그런데 사도들을 다 합친 막강한 교회의 감독이 교회에 존재한다면 누굴까?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그 위치만이 홀로 대표성을 가진다.

 

즉 초대교회 직분은 사도, 장로(감독), 집사와 교사 등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위치보다 더 높은 교회의 직분을 만들었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기독교 국교가 된다고 해도 전체 감독을 직분으로 만들 수 없다.

 

물론 오늘날 각 교파들의 총회장과 같은 직위도 사실상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개신교 대표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만약에 전체 연합회를 만들어서 대표를 세운다고 해도 그것은 임시직일 뿐이다.

 

신학에 있어서 카톨릭의 문제는 더욱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카톨릭의 문제는 이단들과 같은 구약사상에 기초해서 정치와 신학에 영향을 주었다.

신약시대의 특징은 육적인 질서와 영적인 질서의 세계관이 분명히 구분이 된다.

 

앞서 말한 이단들은 구약사상이나 혹은 옛 언약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오류가 되었다.

카톨릭은 구약사상과 함께 세계관의 결여에서 치명적인 약점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 하나는 연옥교리이며, 다음은 천상교회 개념이고, 그리고 대리 속죄의 문제다.

 

그 외에 마리아 문제나 성상 숭배사상과 성인 숭배사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었다.

그럼 왜 이런 문제가 나타났을까? 결정적인 것은 신약시대의 두 세계관의 결여이다.

세계관의 결여는 먼저 구약과 신약의 구분실패와 신약 안에서 구분실패로 나타난다.

 

1, 지상에서 수평적 교체인 영적 이스라엘과 육적인 이스라엘의 질서를 혼동하고 있다.

 

신약시대는 예수의 죽음으로 육적 이스라엘이 사라지고 영적이 이스라엘이 등장한다.

지상세계에서 교회의 질서가 전자가 아닌 후자에 해당되는 영적 지상질서가 나타난다.

그것은 구약 이스라엘 직분과 절기와 율법이 아닌 영적 직분과 예배와 은혜의 입장이다.

 

영적인 이스라엘은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상에서 구약과 다른 질서가 나온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질서와는 무관하게 교회의 직분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카톨릭은 구약시대와 같은 성직의 모습을 따라간 것이 나타나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대제사장은 교황이 되고, 제사장은 사제가 되는 논리로 나온다.

사실상 신약시대에서 구약교회를 만든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정치논리다.

이런 논리라면 예수는 대제사장 그리고 사도는 제사장? 장로와 집사는 그 아래인가?

 

그렇다고 해도 구약 이스라엘이든 신약 교회든 모두 단일성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구약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은 그리스도이며 신약에서는 영적 대제사장이다.

이렇게 단일성을 가진 영적인 위치는 그리스도가 구약이든 신약이든 확고한 것이다.

 

그런데 교황이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어디에 끼어 들 수 있다는 말인가?

교회를 한 사람의 영향력으로 지배하는 감독은 오직 유일하신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

이것을 버리지 않는다면 카톨릭은 이단이라는 심각한 정치적 비판을 피할수 없다.

 

2. 지상과 천상의 구분을 못하고 연결시킨 결과 교회와 천상이 만나게 된 것이다.

 

신약시대에는 교회가 존재하는 지상세계와 천국이라는 내세가 엄격히 구분이 된다.

그런데 죽은 자까지 구원에 포함시키려는 의도로 나타난 것이 결국 교회와 내세까지 연결시킨 것이다. 이 연결로 말미암아 수직적인 지상교회와 천상교회가 통하게 된 것이다.

 

그 연결 고리가 지상과 천상의 중간에 위치한 연옥설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살아 있는 세상의 질서와 죽은 다음의 질서는 전혀 다르고 또한 만날 수도 없다.

그런데 그들은 땅과 하늘이 평화를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배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었다는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이런 오판으로 카톨릭은 심각한 수직적 질서가 파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늘과 땅에서 죄에 대한 대제사장은 오직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중간에 어떤 사람의 연결고리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이 그 중간 역할을 감당하면서 사람의 죄가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게 된다.

그런데 카톨릭은 하늘과 땅을 사람들의 직분으로 연결시키고 만 것이나 마찬가지다.

 

죄 사함에 대한 중간적인 역할은 사제가 고해를 통해서 맡게 된 것이다.

또한 대제사장의 역할은 교황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중간 장소인 연옥을 만들어 놓아야 자신들의 이런 역할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신약성경을 뒤집어 놓아도 이렇게 뒤집어 놓은 이단이 또 있을까?

수평적인 질서와 수직적인 질서를 모두 파괴한 카톨릭이 전형적인 이단이 아니면 누가?

이렇게 카톨릭은 약 2천년 동안 심각한 정치, 신학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그 중간에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교회가 백보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그런데 구원의 역할인 속죄의 역할까지 인간이 대신한다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다.

아무리 양보하라고 해도 이런 교리를 포기하지 않는 한 카톨릭은 명백한 이단이다.

 

3. 카톨릭은 구약사상과 의식으로 신약의 교회와 의식들을 대체한 것이다.

 

초대교회는 주의 만찬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만찬 자체를 신성화시키고 말았다.

구약시대 제사와 카톨릭의 성만찬은 내용물만 다를 뿐이지 같은 성향을 보인다.

 

*구약의 제사=카톨릭의 미사(성만찬)

*구약의 대제사장의 위치=카톨릭의 교황 위치

*구약의 제사장 역할=카톨릭 신부(사제)의 고해수행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카톨릭 신도들로 나타난다.

 

위와 같은 모습은 그들의 의식에서 매우 잘 드러나고 있다.

정상적인 이해는 개혁교회에서 주장하는 내용으로 아래와 같다.

 

*구약의 제사=신약의 예배(산제사)

*구약의 대제사장의 위치=신약교회의 예수그리스도의 위치

*구약의 제사장 위치=신약교회 성도들의 위치

*구약의 사람의 역할=신약시대 성령의 교통으로 이해한다.

 

신부라는 말은 교회의 아버지라는 말로 풀이 된다.

그러나 교회의 아버지는 오직 유일하신 성부 하나님이시다.

 

카톨릭은 성부의 위치와 성자의 위치와 성령의 위치와 역할을 도용한 것이다.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엄격히 구분된다. 그런데 카톨릭은 사람으로 대체한다.

 

*성부는 하나님의 교회를 소유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로 부른다.

*성자는 하나님의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그래서 교회의 대제사장 역할을 하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교회를 돕는 보혜사이시다. 그래서 교회의 영적인 교통을 감당한다.

 

이렇게 교회는 카톨릭처럼 스스로 성직을 통해서 지배하고 통치되는 원리가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가 나타나는 것이며 교회는 통치을 받고 순종하는 것이다.

순종하는 자들이 스스로 지배하는 성직을 만들어 놓았다면 문제가 아닌가?

 

[다음은 여호와 증인에 대해서 살펴보자]

 

여호와 증인과 안식교는 전형적인 구약사상을 중심으로 나타난 이단들이다.

반면에 요즘 유행하는 안상홍파와 구원파는 신약성경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앞서 말한 이단은 구약성경을 중심으로 한 결과 신약을 구약화 시켰다는 것이다.

후자는 신약성경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구분하지 못한 결과 나타난 것이다.

 

그럼 전자에 해당되는 여호와 증인의 결정적인 오류는 과연 무엇인가?

여호와 증인이 가장 비중있게 다루는 것이 바로 구약의 네페시(영혼)이다.

 

영혼은 구약성경에서 네페시로 신약성경은 프쉬케로 각각 번역을 하고 있다.

문제는 여호와 증인은 영혼의 소멸을 위해서 이 단어를 철저히 왜곡시켰다는 것이다.

 

이 네페시라는 단어는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서 매우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문제는 이 영혼이라는 네페시를 생기(육체의 혼)로 통일시키면서 오류가 발생했다.

 

구약의 히브리어 세계관은 한 단어를 다양하게 접근하는 언어적인 특징이 있다.

반면 신약 헬라어는 추상적 접근보다 실존적으로 접근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헬라어 신약성경과 히브리어 구약성경에서 그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영혼과 육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실존적으로 구분해서 사용된다.

 

그래서 헬라어 특성상 생명, 생기, 영혼, 영, 목숨, 혼, 육체 등등으로 각각 구분된다.

즉 각각이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 그대로 표현하려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영혼이라는 네페시는 다양하게 사용된다.

즉 사람의 영혼이 포함하려는 것들을 다양하게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예로 네페시(영혼)는 생명, 생기, 혼, 영혼, 사람, 목숨 등등에 속하거나 포함된다.

이렇게 구약성경은 네페시를 살아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보편적인 용도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신약시대의 언어적 특징을 무시하고 구약성경을 본 것이 여호와 증인이다.

그들은 구약에서 말하는 영혼의 특징 중에서 육체의 생기로 국한시킨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영혼은 육체의 생명과 동시에 독립적인 영혼으로 각각 이해하고 있다.

만약에 여증이 원하는 대로 신약의 영혼을 모두 생기로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엄청난 해괴한 이론이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는지?

어떻게 신약성경 헬라어와 구약 히브리어 특징조차 구분을 못하는지 우려스럽다.

 

정상적인 이해는 구약의 네페시와 신약의 푸쉬케는 각각 용법이 달랐다는 것이다.

물론 신약성경에서 영혼의 이해는 대부분 육체(몸)와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구약성경은 사실 예수가 오시기 전까지 그림자처럼 존재한 내용들이 가득하다.

구약의 대부분은 불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삼위의 존재도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것을 신약성경으로 말미암아 밝히 실체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성경의 단어의 한계를 가지고 신약성경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말이 되는가?

 

마땅히 신약성경으로 구약을 이해하고 밝혀 나가야 옳다.

그것은 신론부터 종말론까지 모두 해당되는 것이다. 이단들은 이것을 무시하고 있다.

 

또한 여호와 증인의 결정적인 오류는 문자적인 해석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함으로 많은 부분 영적인 부분을 포기한 것이다.

 

그 결과 구약시대 음부나 지옥을 영적인 내세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계시록에 등장하는 십사만 사천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

 

즉 구약을 문자적으로 해석했듯이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오류라고 본다.

구약 성경은 문자적 단일 해석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용도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약성경도 문자적 단일 해석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신약성경도 문자적이면서 또한 상징적인 해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상징적인 것이 가득차 있다.

그런 것을 구약성경과 같이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정말로 이상하지 않는가?

 

또한 여호와 증인은 혼을 중심으로 동물적인 요소를 유난히 강조한 이단이다.

반면에 지방교회(형제교회)는 영을 중심으로 신성의 요소를 강조한 이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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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신천지의 비유신학을 조금 다룬다면 매우 저급한 신학이다.

그들은 구약과 신약을 비유와 상징으로 다루지만 사실상 실패한 구분이었다.

구약성경은 그림자로써 그리고 신약은 실체로써 각각 구분하고 접근해야 옳다.

 

그런데 그들은 구약의 그림자와 신약의 실체에 대해서 거의 같은 무게을 둔다.

사실 구약의 그림자보다 신약의 실체는 비교할 수 없는 영적인 무게가 존재한다.

이런 분명한 차이를 인정하기보다 구약과 신약을 모두 동등하게 생각한 것 같다.

 

정상적인 교회는 구약성경을 여기 저기 보면서 신약의 그림자라고 항상 말한다.

그러나 저들은 구약성경의 비유 자체로 신약의 실체를 밝히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 차이는 구약성경의 그림자를 신약의 실체와 바꾸려는 무모한 교리라는 것이다. 

 

결론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이단들의 특징은 구분을 못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을 구분하지 못한 것도 있으며 신약성경 안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구분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같은 선상으로 접근한 결과 그들은 구약사상에 빠지거나 혹은 옛 언약에 빠져버리는 저급한 이단들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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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 운동 그 실체를 논하다.

 

신사도 운동과 병고침의 집회와 기타 등등 과연 성경적인가?

신사도 운동을 먼저 살펴보겠다.

 

집회 장면을 보았는데 마치 광란의 집회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물론 초대교회도 성령에 취했다는 내용은 있지만 이 정도로 심했을까?

 

신비주의 운동은 기적체험 혹은 표적운동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것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으려는 것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럼 그들의 행위는 누구의 역사에 의해서 나타날까?

성령은 지혜의 영이며 또한 질서를 존중하는 영이시다.

 

그런데 무질서한 집회의 모습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오늘날도 성령으로 기적과 이적과 또한 특별하게 표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나타나는 것이지 개인의 욕심과 무관하다.

아마 과거 기도원 운동에서 나타난 운동이 변형된 모습으로 이해하고 싶다.

 

물론 모든 것이 다 귀신의 역사라고 절대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무질서한 것은 성령이 원하시는 것이 또한 아니라는 것이다.

 

초대교회 1~3세기까지 사도들이 다시 사도들을 세운 역사가 거의 전무하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신사도라는 용어와 사도라고 자칭하려는 것인지 의문이다.

 

아무튼 그것이 교회에 덕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적과 표적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비성경적인 내용이라는 것이다.

 

초신자들에게 성령의 역사는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

만약에 그런 자들의 연약한 심성이라면 또 다른 역사도 나타날 수도 있다.

 

교회는 이런 이적을 쫓는 신앙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병고침을 빌미로 사람을 모이게 하는 것이 순수한가?

 

순교자의 길을 본받아야 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병이나 고치는 것이 목적인가?

우리는 이미 영혼의 구원을 받고 또한 장차 영원한 육체를 이미 약속 받은 자들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현세의 육체의 기복에 그렇게 집작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건강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건강한 삶와 운동을 통해서 유지해야 한다.

 

기적적인 신의 능력으로 병을 고침 받으려는 것은 인간의 욕심에 더 가깝다.

흔히 환자들의 연약한 마음을 이용해서 브로커들이 거액의 돈을 뜯는 것은 나쁜다.

 

마치 영적으로 볼 때에도 환자들의 나약한 마음을 이용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그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한다면 미래의 영원한 세계와 구원을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현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얻으려고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복, 병고침, 표적 등등이다. 이것은 개인의 욕심이 앞서는 것이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다른 것이 과연 무엇이가?

똑 같은 환경과 조건으로 살지만 다른 것은 표적이 아닌 바로 믿음이다.

 

그런데 표적으로 믿음을 찾으려는 자체가 바른 신앙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표적으로 얻어진 것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얻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인데 왜 굳이 보이는 것들을 신앙으로 삼을까?

그런 믿음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표적이 사라지면 또 다시 허무해진다.

 

이렇게 표적중심의 신앙은 계속 그 표적만을 쫓아서 따라가고 싶을 것이다.

우리가 내세와 신천지와 영혼의 구원을 진정으로 알았어도 과연 표적을 계속 쫓을까?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결국 한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표적은 의미가 없다.

그리고 더 이상 세상의 기준과 표적들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으로 삼지 않을 것이다.

 

표적과 이적이 다 악영의 역사라고 생각하는 것도 물론 큰 문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바로 잡아주는 교회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복음으로 잘 양육한다면 왜 그들이 참 복음 대신에 그런 표적들을 찾아서 다닐까?

이것이 모두 다 교회의 양육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성경을 깊이 아는 사람일수록 그런 표적보다 말씀에 관심을 가진다.

말씀의 깊이가 있는 사람들이 표적을 쫓아 다니는 자들을 거의 보지를 못했다.

 

왜냐하면 말씀으로 그에게 모든 영적인 만족을 주기 때문이다.

왜 성경을 깊이 알고 묵상하는 자들이 신비주의를 멀리하는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초신자일 경우 그런 곳들을 선호할 수 있다.

그러나 점점 자라면서 그런 곳들을 멀리하고 말씀으로 든든히 세워져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교회의 교육은 너무 이원화가 되어 있다. 물론 자질의 문제라고 본다.

앞으로 한국교회는 모든 신학과 성경공부를 전면 무료로 개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표적과 이적을 쫓아다니는 일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표적과 이적은 하나님의 필요로 주어져야 하며 또한 우리가 사용되어져야 한다.

 

그것이 뒤집어져서 우리가 필요해서 받고 하나님은 심부름 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바울의 말처럼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한국교회 말씀으로 재무장하는 것만이 안티든 신비주의든 이단이든 극복할 수 있다.

결국 말씀에 그 정답이 있는 것이다. 말씀으로 세워지는 한국교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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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오래 전에 기록된 글입니다.

참고할 내용이 있어서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구분은 예수의 죽음으로 갈라진 것이다.

 

흔히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우리는 말한다.

그런데 과연 그 시점이 언제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예수의 탄생으로 기준을 잡는 자들도 있다.(안상홍파 같은 이단이 나옴)

그러나 그 때에는 구약시대에 죽었던 사람들이 죄사함으로 구원을 얻지 못했다.

 

죽은 자들에 대한 구원은 반드시 죄사함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구약시대의 제사들은 그림자적인 모습이었지 실제적인 것은 아니었다.

 

예수도 사역할 당시 자신을 진실로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죄를 용서해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자신이 그들을 용서해 준 것이지 아버지가 그들의 죄를 사해준 것은 결코 아니다.(죄사함은 십자가 상에서 죽은 이후에 적용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죄를 사해주는 조건은 참 희생제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을 믿고 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두고서 그들을 용서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구약성경 시대의 성도들도 그 당시에 하나님께 용서는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오실 예수를 두고서 용서받았지만 죄가 사해진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구약시대라고 해도 그들의 죄는 결코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가 죄인을 위해서 희생하기 전 까지는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구약시대는 용서와 죄사함은 동시적인 것이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용서와 죄사함이 동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새 언약의 시대) 

 

현재적으로 죄사함이 나타나며 또한 죽으면 구약과 같이 음부가 아닌 내세로 들어간다.

이를 위해서 사도들은 죄사함을 받고서 또한 성령으로 세례로 받으라고 말하였다. 

 

이는 구약시대에는 실제적으로 죄사함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과 크게 대조되는 부분!

그럼 언제 하나님께로부터 인류의 죄사함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졌을까?

 

그것은 죄사함의 십자가 제사이며 재물이 되신 예수의 죽음이 완성된 때부터 시작됐다.

이 대속의 은혜는 음부에 있었던 구약시대에 죽었던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전파되었고 또한 그들이 비로써 예수와 함께 낙원에 오르게 된 것이다.(요,밷전)

 

또한 그 이후 신약시대에는 예수의 대속물로 말미암아 참 죄사함이 날마다 이루어진다.

물론 동시에 신약시대 성도들은 구약시대와 같이 음부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 아닌 즉시 내세의 낙원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죽음은 구약시대라는 그림자 시대와 신약시대라는 실체의 시대를 확실히 갈라놓았던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예수의 부활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장차 육체로 부활하게 될 것을 선포하고 있다.

 

그 마지막 부활은 성도와 불신자들이 영생과 영벌로 나누어지는 최후의 재림심판이다.

예수의 부활은 모든 사람들이 육체의 사망에서 나올 수 있는 대표적인 부활이었다.

즉 예수의 부활은 인류의 모든 사람 가운데 육체의 사망을 이기신 사건이었다.

 

[2009년 9월 5일 김인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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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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