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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이 잘 낳는 사회 만들기” 이태후·정지행 한의사 부부의 단기 비전

수호천사1 2011. 6. 23. 15:30

“아이 잘 낳는 사회 만들기” 이태후·정지행 한의사 부부의 단기 비전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같은 듯 다른 두 사람. 한의대 졸업, 한의학 박사로 같은 이력의 소유자. 둘 다 한의학계에서 빛을 발하는 명의. 그러나 6년 전 임상과 연구라는 각자의 길 선택. 경희대 생명과학대 한방재료가공학과 이태후(46) 교수와 비만 한의학 박사 1호인 정지행(46) 한의원장 부부 이야기다. 장기 비전으로 의료선교를 고려하고 있는 두 사람. 벌써부터 의료봉사에 나선 듯했다. 주일이면 그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꽤 있다. 19일 교회 카페에서 부부를 만났다. 부부는 서로를 ‘내 인생 최고의 동반자’라고 추켜세웠다.

믿음을 유산으로 주신 목사 아버님

이씨는 전북 전주의 목사 집 아들로 태어났다. 6남2녀의 일곱째로 춘궁기에는 개구리를 잡으러 다닐 정도로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무주·진안·장수(무진장) 분란지역에 발을 들여놓은 후 계속 사고지구에서 사역하셨다. 아버지만 사역지로 가셨다.

실질적으로 어머니가 가장이었다. 시집올 때 가져온 논이 있어 밥은 먹고 살았다. 열 식구가 한달에 한가마를 먹었다. 1년에 20가마를 수확해 최소한으로 버텼다. 형과 누나는 등록금을 못내 험한 꼴도 많이 당했다. 이 집 남자들은 대학에 다니다 동생이 들어오면 무조건 군대에 가야 했다. 기가 막히게 맞췄다. 그렇게 대학을 마친 큰 형은 취직해 동생 한 명을 맡았다. 둘째형은 졸업 후 결혼하고 바로 이민 갔다. 이민 가서도 한 동생의 교육 일정 부분을 도왔다. 로테이션으로 모두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다.

목사 가정이니 신앙교육은 두말할 나위 없이 철저했다. 생활이 신앙이었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게 헌금으로 눈깔사탕 10개를 사먹었다 죽는 줄 알았어요.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겠지만 혈기 왕성한 아버지에게 부지깽이로 흠씬 두들겨 맞았어요.”

당시에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아 청교도적인 경건함이 강조됐었다. 주일에 집에서 유행가를 부른다거나 무엇을 사먹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했다. 먹는 거라곤 밥과 김치가 전부였던 이 교수는 어릴 때부터 약골이었다. 목사의 아들로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다보니 스트레스도 많았다. 예민했다. 어머니가 뼈가 녹을 때까지 고아주신 닭은 신물이 날 정도로 먹었다. 그때 기억 때문에 지금은 닭에 손도 안 댄다. 냄새도 싫어한다. 가족이 닭을 먹으면 자리를 피할 정도다. 정 원장과 결혼한 이유 중의 하나가 건강하고 튼튼해서였다고 귀띔했다.

아버지는 연세가 드시면서 항상 유언처럼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아들아, 나는 돈을 유산으로 주는 게 아니라 믿음을 유산으로 준다. 이걸 잊지 말아라.” 2005년 별세하셨다.

교회 빠지는 노하우

아내 정씨는 어릴 때 성당을 다녔다. 친정어머니는 60년 넘게 성당을 다니셨다. 어릴 때부터 교회는 영 정 원장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시끄럽고 격앙된 설교 톤. 정말 듣기 싫었다. 그런데 목사 아들을 만났다. 결혼하자 남편은 교회 가고, 아내는 성당 갈 수 없지 않느냐고 설득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만 교회에 가자고 했다.

시아버님이 평신도라면 타협이나 조율을 할 수 있겠지만 목사이시고 살아계신데 이건 아닌 거 같았다. 남편을 따라 갔다. 역시 분위기가 다르고 목사님 설교 목소리는 거슬리고. 가기 싫었고 적응이 안 됐다. ‘어떡하면 교회에 안 나갈 수 있을까. 어떻게 주일을 빼먹을 수 있을까.’ 온통 머리 속에는한 생각뿐이었다.

아침에 늑장 부려 최대한 늦게 가기,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나오기, 남편이 안 가면 절대 안 가기. 그가 생각해낸 교회 빠지기 노하우였다. 10년 전 정 원장의 모습이었다. 정 원장이 다운교회에 출석하면서는 상황은 역전됐다. 학자스타일의 꼼꼼하고 논리적인 이경준 목사의 말씀이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됐다. 지난해부터는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성경공부를 하면서 새롭게 느끼고 깨닫는 바가 많았다. 모든 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아내가 없으면 남편이 교회에 오지 않기도 한다. 전후를 다 아는 사모님은 정 원장에게 “나중 된 자가 처음 된다”고 말씀 하신다.

부부 한의사

“대부분 아픈 사람들이 정신적으로도 좋지 않아요. 제게 온 사람은 아픈 부위 뿐 아니라 영혼까지 잘 치유받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어요.”

이씨가 의사로 진로를 결정한 이유다. 진료에 집중할 때는 예약 환자 명단을 미리 보고 잠깐이라도 기도하고 진료했다. 항상 떨리는 마음으로 단순히 기계적으로 진료하는 게 아니라 준비하고 치료했다. 정씨도 기도로 준비하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고 있다.

이씨가 한의원을 할 때는 난치병 전문이었다. 또 카이로프락틱을 접목해 그가 만져주면 모두 낫는다고 해 명성이 높았다. 그는 미국과 호주에서 척추신경의학을 연구한 척추신경 의사로서 많은 스포츠 선수를 치료한 척추신경질환계의 명의로 일찌감치 유명세를 탔었다. 아내에게도 든든한 주치의다. 밤에 자다가도 아프다면 언제든지 아내를 만져준다. 현재는 탈모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어머니의 심각한 원형탈모 치료를 고민하다 관심을 갖게 됐다. 6년 전 잘 나가던 한의원의 문도 닫고 탈모 치료 한약 신약 개발에만 전념하고 있다.

정씨는 비만을 병으로 인식하고 연구하며 미국 컬럼비아 의대에서 영양학 과정까지 마쳤다. 2005년 셋째 아들을 출산하고부터는 출산장려정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010년 10월10일 제2회 임산부의 날 기념행사에서 출산장려에 대한 공로로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늦은 나이에 출산이니만큼 부부가 아기를 갖기 전에 준비를 많이 했어요. 규칙적인 생활과 꾸준한 운동. 덕분에 아이가 운동을 좋아하고 체력도 아주 좋아요.”

부부는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불임환자 치료에 나섰다. 주말에는 이 교수가 아내를 돕는다. 약간만 교정해주면 임신이 잘 된다고. 그래서 이 부부의 단기 비전도 아이를 잘 낳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자녀를 가져서 얻는 기쁨과 행복을 우리가 너무 모르고 살았던 것 같아요. 젊어서는 먹고 살기 바빴고 사회도 출산과 양육에 의미를 부여하는 시스템이 아니었잖아요. 마음 하나 바꾸면 되는데….”

부부는 올해로 일곱 살이 된 늦둥이를 무엇보다 인성이 좋은 아이로 키우려고 노력한다.

건강한 아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든든한 지원군이 돼주는 남편에게 감사, 자신을 믿고 후원해주는 아내에게 감사. 이 부부는 감사를 입에 달고 살았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최영경 기자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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