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속의 하나님은 우상이다. 부제/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막2:1~12/ 원형수 목사
본문은 가버나움이란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제 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수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자(막 1:21~28)를 고치셨고, 시몬 베드로의 장모(막 1:29~31)를 고치셨고, 각색 병든 자(막 1:33~34)를 고치셨으며,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를(막 2:1~12) 고치신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그러나 가버나움은 이와 같은 기사와 이적을 어느 마을보다도 많이 경험하고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해 냉담했습니다.
이와 같은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 주님은 강렬한 어조로 책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3절을 보면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남들보다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은 그에 따른 책임도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남달리 체험하고서도 냉담하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과 은혜는 우리에게 책임과 의무를 동반합니다.
1.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논쟁 갈릴리 지역을 다니시면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각색 병든 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주님께 고침받은 문둥병자의 증언으로 소문이 퍼져 드러내놓고 다닐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얼마간 은신해 계시던 주님은 며칠 후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오셨는데,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어째서 당신들은 그러한 생각을 품고 있는가.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말이 더 쉽겠는가.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시자, 그 사람이 곧장 일어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기를 떠메고 왔던 들것을 들고 걸어 나갔습니다. 이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은 깜짝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했다’고 하나님을 극구 찬양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중풍병도 고쳤다는 말씀일까요? 병 고치는 이야기는 예수님만의 전매특허가 아닙니다. 부처님도 하셨고, 마호메트도 하셨고, 공자님도 하셨습니다. 오늘날 모모 목사님, 기도원 원장들, 이단의 어느 교주 옛날에 박태선, 현신애 권사등도 병 고쳤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와 같은 이야기들 중의 하나일까요?
2.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하나님이시다’는 증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본문을 보십시오. 지붕을 뚫고 내려오는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은 불필요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도적입니다. 그 다음 구절을 보면 서기관들이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는가”고 분개했을 때 주님은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알았다”(막 2:8)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겠다”(2:10)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논쟁의 초점은 ‘예수가 정말 죄 사하는 권세를 가졌느냐’ 하는 점입니다. 서기관이나 예수님 모두 죄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 한 분만이 가지고 계시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합니다. 예수께서 만일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죄 사하는 권세가 없이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 사건은 예수께서 과연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말이 쉽겠느냐?” 여러분은 어느 말이 더 쉽다고 보십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는 말입니까? 예수님께는 실제적으로는 죄를 사하는 것보다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이 더 쉽습니다. 죄를 사하시려면 죽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외관상으로는 중풍병자에게 네 상을 들고 가라는 말씀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걸어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누구이십니까?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진 분이십니다. 죄는 누가 사합니까? 하나님만이 사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지셨다면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3. 자기 생각 속의 하나님은 우상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나타냈습니까? 그 사실을 목전에서 목격하고도 한 사람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12절에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라고 한 것은 한 사람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런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보고도 하나님이라고 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만일 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면 예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참 하나님이신 예수여, 중풍병자의 죄뿐만이 아니라 나의 죄도 사해 주옵소서”라고 예수 앞에 죄 사함을 요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고 믿습니까? 이 본문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진정 여러분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가버나움 회당의 목격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 것을 교훈 삼아 너희는 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빌립보서 2장5절-11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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