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만찬의 신학적 의미
Ⅰ.성만찬에 대한 신학적 견해
1. 카톨릭의 견해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5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세례받은 교인들이 매주마다 집례 되어지는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었으나, 9세기에 이르러서는 평균 1년에 한번정도밖에는 성만찬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희생(sacrifice)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초대 사도시대로부터 시작된 성만찬의 본질이 로마 가톨릭교회로 가면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초대교회 성만찬은 말씀의 예배와 성찬의 예배가 공존하였지만 가톨릭교회의 성만찬은 말씀의 예배가 퇴보하고 지나친 의식만이 강조된 성찬 예배만이 집례되어 말씀의 예배와 성만찬 예배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말았다. 가톨릭은 수백년동안 말씀보다 성찬의 전통을 지켜왔다. 그러나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에 깊게 자리잡은 것은 사제가 집례하는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의 교리이다.
성찬의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은 9세기 초에 정식으로 제안되고, 12세기에 정의를 받아 화체의 교리로 지명되고, 13세기의 제 4 차 라테란 회의(Laterian Council)에서 정식으로 채용되었으며, 16세기 트랜트 회의에서 최종범식(最終範式)의 작성을 보았던 것이다.
성찬에 대한 가톨릭의 견해는 중세기 로마교회의 성례전을 완성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에 잘 나타난다. 로마교회의 7가지 성례전 중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세례와 성찬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물질 속에 그리스도께서 현재 임하신다는 화체설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성찬이 반복될 때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매번 반복되는 것이다. 성찬을 성례전적 의(義)의 개념보다는 희생의 반복의 개념과 사상으로 보았다.
화체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독창적 교리가 아니라, 9세기 수도사 라베르투스의 주의 몸과 피에 관하여 란 논문에 제시되었다. 그 논문에서 그는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사제의 축사를 통하여 기적을 일어나게 하신다. 성별된 성찬의 물질이 진정으로 역사적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는 것이다. 성찬의 물질의 색과 모양과 맛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그대로 있지만, 기적적으로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화체의 기적은 외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내면적으로 화체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성물의 색과 모양, 맛은 그대로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는 것은 내면적 신비가 된다. 육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성찬의 성물은 영적으로 받지않으면 안된다. 사람들이 성찬의 성물을 받을 때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파악하고 인식하는 자만이 그리스도의 실재의 몸과 피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찬의 물질적 요소인 떡과 포도주는 제정어의 암송에 의하여 물질 그대로 있지만 성찬의 물질의 실체는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떡과 포도주 안에 임재하신다고 가르쳤다. 이로써 성물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는 것이다. 사제가 이것은 내 몸이니... ,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니... 라는 제정어를 외울 때 성물은 내적으로 변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며, 이 변화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객관적으로 나타내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같은 이론은 초대교회에 없었던 것으로써 중세기 스콜라 철학의 이론에 그 사상적 근거를 둔다. 즉 사물의 외부적 우유성(偶有性, accidents)과 내적 본질(substance)을 구별하는 사상을 빌린 이다.
성찬에 관한 이와같은 가톨릭의 견해는 중세기의 예배를 신비종교와 이방종교의 어떤 풍습을 첨가하여 구약의 제사제도로 되돌려 놓았다. 또 감각에 호소하므로 많은 미신이 생기게 되었고, 그리하여 성만찬은 미신적인 관념의 성례전으로 퇴색하고 그 본래적인 의미를 상실케 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예배는 성례전 중심이었고 성직자 중심이었다.
예배에서 사제는 성물에 대하여 이것은 내 몸이라, 이것은 내 피라 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하고 그 성물을 높이 들어 회중에게 보였다. 이 때가 예배의 절정이었고 종을 울려서 회중이 그것을 바라보게 했다. 만약 예배에서 그것을 보지 못하였으면 예배를 못드린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회중은 잘 보이지 않으면 그것을 더 높이 들라고 소리쳤다. 그래서 높이 들렸던 성물을 쳐다보았던 신자는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갔으며, 그 성물을 보지 못하였던 신자는 다음 예배에 다시 참석해야만 했다.
이처럼 회중들은 성만찬을 집례하는 사제를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그들의 참여는 부활절 예배에서만 허락되었다. 그것도 포도주는 허락이 안 되었고 떡만 허락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상 중세교회 예배에서 회중은 참여자가 아닌 방관자였다. 예배는 신부와 소수의 성가대에 의하여 라틴어로 거행되었기 때문에 회중은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이와같은 라틴어 사용은 회중들 사이에 미신을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회중은 다만 예배의 클라이막스에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성물을 봄으로써 예배를 드린 것으로 생각하였다. 집례자는 작은 소리로 회중이 모르는 말을 중얼거리듯 말하였고 회중들은 자신들이 함께 예배에 참여한다는 생각이 없이 사제의 행동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또한 성서는 라틴어로 쓰여져 있어서 회중들이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그나마 라틴어로 쓰여졌던 성서도 개방되지 않고 사제들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예배는 회중들과의 삶과 거리가 먼 것이었다.
또한 중세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교리화했고, 그와같은 희생을 성만찬을 통해 지나치게 강조했기 때문에 성만찬이 희생제사가 되어 버렸다. 이와같은 희생제사도 성직자가 신자 전체를 대신해서 드리게 됨으로써, 성직자가 진정한 대사제이셨던 그리스도를 대신하게 되어 그리스도는 예배로 부터 아주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세 가톨릭교회의 성만찬은 화체설과 더불어 예배에 있어 극적인 신비의 현상으로 집례되었기 때문에 많은 폐단을 가져왔다. 그리고 매주일 예배에서 빠짐없이 집례되어 졌으나 불행하게도 사제의 행위에 머물렀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어 상대적으로 설교가 경시되어졌다.
2. 종교개혁자들의 견해
종교개혁의 초창기에 있어서 나타난 성만찬은 중세기 가톨릭교회의 말씀과 성만찬의 불균형을 회복하고 초대교회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그들은 말씀이 신앙과 예배의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의식과 형식주의 예배에서 말씀 중심의 예배로 복귀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결코 성만찬을 경시한 것은 아니었다.
개혁자들에게 성만찬은 초기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기독교의 개혁이 아무리 거세게 일어나는 현장에서도 성만찬에 대한 신학적 내용은 초대교회의 그것과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개혁의 주역들은 성만찬론을 자신들의 특유한 입장과 신학에 따라 재조명하면서 최우선적인 신학적 과제로 삼게 되었다. 그 이유는 예전을 통하여 구속의 그리스도를 언제나 새롭게 만날 수 있으며, 한 인간과 주님과의 생동력있는 역사적 연접(historical link)을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종교개혁자들의 성만찬의 견해를 다음에 살펴보기로 한다.
① 루 터
루터(Martin Luther)는 말씀은 주님이 제정하시고 구원의 은총을 전달해 주는 방편이 되는 성례전을 절충해 주는 것이므로 말씀이 없는 성례전은 있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루터는 1530년에 저술한 그의 논문 교회의 바벨론 포로 (The Babylonish Captivity of the Church)에서 로마교회의 성례전 제도와 신학적 과오를 지적하면서 로마교회가 범한 세가지 잘못을 논박하였다. 첫째는 평신도에게 떡만을 허락하고 포도주는 주지 않은 것이고, 둘째는 마술적인 화체설의 과오이며, 세째는 성례전을 희생의 반복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과거 가톨릭의 전통을 모두 개혁하고자 한 것은 아니고, 다만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개정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어 성찬을 받기 전에 시행한 부분 중 불을 켜 놓는 것, 제복의 사용, 향을 피우는 것은 그대로 존속 시켰으며 이에 반해 성찬 예배에서 성별의 기도는 변화시켰으며, 화체론을 수정하여 공재론을 수립하였다. 루터는 초대교회에서 사용한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었고, 처음에는 매일 성찬식을 거행하라고 권했지만 매주일 시행하라고 권장하였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 물질이 있는 곳에 현실로 임재한다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주장한다. 즉 주님의 몸이 성찬 물질의 안에, 밑에, 함께 (in, under, along with) 계신다고 했는데, 이는 14세기에 있었던 오캄의 유명론에서 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루터는 믿는 성도들이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접할 수 있도록 되는 것이며,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의 임재를 믿었고, 공간 속에 연장된 몸 (body extended in apace)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루터는 이것이 내 몸이다 라는 주님의 제정어에서 ...이다 를 윤리적,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의 반복과 화체교리를 거절했다. 루터의 성찬에 대한 견해는 여러번 변화가 있었다. 첫째는 1519년 성찬에 관한 교설 을 쓴 때이고, 둘째는 1520-1529년 교회의 바벨론 포로 를 쓴 때(쯔빙글리와 말부룩 회담을 하기까지)이고, 세째는 말부룩 회담 이후이다.
첫째, 성찬에 관한 교설 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떡과 포도주 아래 두고, 성물인 떡과 포도주는 도장(siggel)으로 그 아래 참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성례는 본체의 표징이라고 했다.
둘째, 교회의 바벨론 포로 에서는 로마교회의 화체설을 반대하고 성찬의 결정적 요소는 신앙이라고 했다. 성찬은 약속이며, 성찬의 은혜에 도달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와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앙에 의해서라고 했다. 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첫째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둘째가 우리의 신앙이며, 세째가 사랑이라고 했다.
세째, 말부룩 회담이후에 성찬에 관한 루터의 견해는 공재설로 형성되었다. 또한 그는 쯔빙글리의 견해에 반박했는데, ①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표상한다는 것과 ② 이것은 내 몸이다 를 이것은 내 영적 몸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에 반박했다.
루터는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평신도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서도 피를 흘리셨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루터는 성만찬에서 평신도를 제외시키는 행위는 사악한 행위라고 하였으며, 그러한 권한은 천사에게도 없고 교황이나 공의회의 권한에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루터는 평신도들의 성만찬 참여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평신도들의 권리는 교황이나 공의회의 사제가 빼앗을 수 없는 것임을 역설하였다.
② 쯔빙글리
쯔빙글리(Zwingli)의 성만찬에 대한 견해는 성만찬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단순한 기념을 위한 표시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행동을 회상케 할 뿐이라는 것이다. 쯔빙글리는 루터와는 달리 에라무스의 인문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아 신학적인 접근 방식을 달리하게 되었다. 특별히 쯔빙글리는 어떠한 교리도 이성에 모순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으나 루터는 신학에서 이성의 역할을 거의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차이는 특별히 성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서 역력히 나타났다.
쯔빙글리는 화란의 코넬리우스 호엔의 영향을 받아 1524년에 루터의 공재설을 거부하고 떡과 포도주는 단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두 주장의 견해 차이는 사실상 교회 역사상 여러번 대두되었던 실재론적 개념과 순리주의(Spiritualism)적 개념 사이의 대립을 재생시킨 것이었다.
쯔빙글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공동체의 예배에 임재하시며 그의 몸과 피, 곧 그의 인성은 하늘 아버지 우편에 제한 되어 계시고 성만찬은 십자가상의 구속적 사역을 회고하는 감사의 기념 일 뿐이라고 하여 기념설(Memorialism)을 주장 하였는데, 이와같은 쯔빙글리의 성만찬론은 성만찬의 물질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곧 가시적인 육으로 화할 수 없다는 것이며 그는 승천해 계시는 그리스도를 인성의 몸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루터와 쯔빙글리의 차이점은 그들의 정신적 태도의 표현으로써, 이것은 나의 몸이다 라는 예수의 말을 휴머니스트들은 이것은 나의 몸을 의미한다는 것으로 해석하려고 했다. 그러나 루터는 이 말을 글자 그대로 이해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은 실제로 빵속에 현존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영은 신체적인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영에 의해서만이 만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쯔빙글리는 성만찬을 단지 기념적 행위로써 그리스도의 희생의 기념과 신앙 공동체 의식의 근거로써 단순화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게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성만찬을 예배의 중요한 부분으로 보지 않고 기념적 행사로 간주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지금껏 예배 가운데 말씀의 예배와 성만찬 예배가 언제나 공존했던 것을 분리시키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심지어는 성만찬을 연 2회로 함이 좋다는 견해를 펴 성만찬 예배의 경시 현상을 개신교에 유산으로 물려주고 말았던 것이다.
③ 칼 빈
칼빈(J. Calivn)은 루터의 공재설이나 쯔빙글리의 단순 기념설의 견해를 그대로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이 빵과 포도주와 성례전적 연합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했다. 즉 성령과 말씀 안에서만이 성물은 그것이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연결된다는 루터와 쯔빙글리의 중간적 견해를 취한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실지로 임재하신다고 믿었으나 이것을 믿는 사람들의 감수성(receptivity)과 관련시켰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와 그 경험을 바르게 갖기 위해서는 바로 참여자의 신앙이 요구되며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과 떡과 포도주는 말씀안에서 약속되는 것을 나타내는 징표요, 영상이요, 상징이며, 이와같은 징표와 영상과 상징의 약속이 받는 자의 신앙에 의하여 경험되어 진다는 주장이다. 물질적 요소인 떡과 포도주는 단순히 표상과 상징에 불과하며, 그리스도는 떡의 물질에 부가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쯔빙글리의 기념설과 동일한 견해를 가지지만 성령의 힘에 의해 성례는 일어남으로 신앙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라고 한 주장은 쯔빙글리의 기념설과 다른 것이다.
칼빈은 성만찬은 외형적인 표시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이며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입증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여기서 성물(the elements)의 신비성과 거기에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 사건을 단순히 집례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있다. 그는 여기서 성물이라는 눈에 보이는 표시만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므로 그 약속을 선포하고 , 해석하고, 적용시켜 주는 말씀의 증거가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때 이 성물과 거기에 대한 말씀을 경청한 무리들이 성령의 사역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동시적으로 이룩하는 감격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성례전을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 이란 어거스틴의 사상을 받아들여 세례나 성찬이 성령으로 우리의 사죄와 은총의 수락을 입증하는 표징이요 인장이라고 했다. 그는 성령을 성례전의 지배인이라고 했다. 성례전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오직 성례전을 통하여, 성례전과 함께 은혜가 온다고 했다. 그것은 성령이 성례전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며, 성령이 같이하지 않는 한 성례전은 바르게 집행되는 것이 아니므로, 성령은 성례전 안에 있는 교사라고 했다. 또 성례전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 신앙을 봉헌하는 것이고,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제네바교회 신앙 문답서 에 자세하게 나타나고 있는 바, 성례전은 눈에 보이는 징표로서 우리에게 영적인 모든 일을 계시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외부적인 증명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여러 약속을 우리 마음에 한층 더 강하게 각인하여 우리가 그 약속을 보다 더 확실하게 믿게 하기 위한 것이다 라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빵과 포도주라는 성물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먼저 주님이 세우신 대로 따라야 하기 때문이라는 당연성을 표하고, 둘째로 우리는 육체로 덮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적이고 천상적인 모든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상징을 사용할 필요가 있음.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와 그 경험을 바르게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형성된 언약에 대한 선 이해가 요구된다고 했다. 이러한 선 이해는 바로 참여자의 신앙을 재확인 시키는 것이며 거기에 말씀의 수용이 가능하게 되고 성령의 역사 속에 영적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Ⅱ. 성만찬의 현대교회의 견해
오늘날 세계교회의 예배갱신의 운동은 본래적인 전통교회의 예배를 새롭게 표현해 가려는 노력이요 시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만찬의 전통적 의미의 현대적 재구성이 중심적 과제가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성만찬에 대한 견해도 다음과 같이 재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1. 감사의 예전으로서의 성만찬
성만찬은 어떤 신학적 의미보다 구속의 위대한 사역을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대하는 감격을 필요로 한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신 구속의 사랑때문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서부터 성만찬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험하는 데에 기독교는 최우선적인 신학적 관심을 두어왔던 것이다.
초대교회에서는 성물을 드리는 봉헌에서부터 이런 신앙적 행위가 시작되었으며, 2세기 중반의 순교자 저스틴은 주님의 만찬을 대할 때마다 죄로 물들었던 자신들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려주신 은총 앞에 먼저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할 것을 명령한 바 있다.
또 이러한 사상은 칼빈에 와서도 주님의 만찬은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은사라는 표현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성만찬은 죄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과 다시 언약의 관계를 회복하게 해 주시는 모든 은총에 대하여 드리는 감사의 제사이며, 그리고 공동체적 측면에서 성만찬은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 그리스도와 성도들 사이의 연합, 창조주에 대한 봉헌, 나아가서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랑과 정의와 평화에 대하여 드리는 거대한 감사제인 것이다.
성서를 보면 시편은 찬양의 제사와 감사로 가득차 있다. 시편 99편은 찬양의 제사의 내용이다. 시편 115편은 유월절 식사 예식의 부분이 있다. 예수는 성만찬에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그것을 노래했다. 사도 베드로에 따르면 우리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노래하게 하신 왕같은 제사장 (벧전 2:9)이 되었다. 히브리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저자는 이 길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존재를 묘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히 13:15, 16, 참고 시 50:14, 2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이며 같은 것으로서의 예식과 실제적 봉사인만큼 그리스도인의 삶은 찬양의 제사이며 관용의 제사로서 여기에 묘사된다. 결국 예수가 유월절 식사의 과정으로 첫번째 성만찬을 거행했던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를 위한 감사 기도요, 찬양의 제사인 것이다. 교회는 항상 이러한 방법 안에서 그것을 이해했었다. 왜냐하면 가장 오래된 예식문들이 성만찬 기도의 처음에 창조와 구속의 놀라운 업적을 위한 엄숙한 감사
기도나 축복으로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유카리스트(Eucharist)가 찬양의 제사이며 감사하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모든 교회들은 그들의 성만찬 기도를 감사 기도와 찬양의 제사 모형 안에서 시작한다.
2. 그리스도와 연합으로서의 성만찬
세례를 포함한 성례전 전체는 사실상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져오는 새로운 계약이 성립되고 반복되는 예전이다. 이러한 신학은 칼빈에게 아주 중요한 교리의 한 부분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인(Seal)을 치고 계약을 확인해 가는 성례전으로서의 성만찬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마다 그와 하나가 되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불가분리의 관계가 맺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로 이런 사상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 5:56)라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성만찬의 제정은 주님이 친히 모범을 보이신 성찬의식에 있으나 그 실제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속에 임재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현상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와의 현재적인 거룩한 영교, 혹은 동참의 뜻을 가진다고 앞에서 말한바 있다. 바울은 성만찬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이라고 했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행위이며 영적으로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 영적 친교의 식사에 참여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평화와 그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그리스도와 연합의 선상에서 그와 같은 속성을 가지며, 그 이름을 일컬으며, 그 능력으로의 부름을 받는 것이다. 이런 신학적 의미는 어떤 면에서 가톨릭의 화체설보다 더욱 깊은 뜻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중요한 내용이라 하겠다.
3. 회상으로서의 성만찬
주님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바로 전에 성만찬을 제정하시고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고전 11:24) 하여 계속 시행할 것을 분부하셨다. 이것은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희생을 회상하고 그 부활의 승리와 귀하신 교훈을 되새기는 성례전으로서의 성만찬을 강조하는 것이다. 주님의 구속 사건에 대한 철저한 회상을 요구하는 예전적인 의미는 성만찬이 떡과 잔을 나누는 의식으로써 계속되어지기를 바라는 기념적 회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회상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는 부활의 영광이 나타나지는 표적으로써 기념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만찬은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서 생명력이 있고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 날마다 회상과 기념의 사실이 나타나는 것이다.
맥 튜리안(M.Thurian)에 의하면 이 회상은 유대 민족이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현재적 역사를 재경험하는 유월절 식탁과 같은 성격의 성만찬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회상이란 원래 히브리 민족의 사상에서 단순한 기념적 의미만을 갖지 않고 과거에 있었던 사건의 결과를 현재 속으로 이끌어 오는 것을 뜻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오늘의 단순한 기념적 행위로서의 성만찬 거행에 진지하고 섬세한 신학적 의미를 부여해야 하겠다.
4. 그리스도의 희생제로서의 성만찬
성만찬의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의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memorial)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서 예배가 거행될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현재적으로 이루어진다(present efficacy)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이루신 모든 구속적 기념가운데 임재하셔서 친히 교제를 나누시고 구속의 일을 행하신다. 주님께서 성만찬 제정시에 하나의 빵을 쪼개어 나누어 주시면서 하신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라 (눅 22:19)는 말씀과, 잔을 부어 주시면서 하신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막 14:24)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단번에 드리는 희생제물이 되셨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선포하는 가장 소중한 예전으로서 성례전을 가져 왔었다.
여기서 참여자는 더 이상의 죽음을 통한 희생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그 대신 자신들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롬 12:1)로 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성례전을 통하여 주님의 죽으심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전해야 하는 사명을 부여 받았다(고전 11:26). 이렇게 함으로써 성만찬은 주님의 희생을 직접 보고, 그 살을 받으며, 그 피를 마시는 엄숙한 예전으로써 기독교 역사에 계속 유지되어 오게 되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단순한 기념적인 의미만을 지닌 생명력이 없는 성만찬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개신교의 성만찬이 다시 생명력을 회복하고 진실된 그리스도의 희생을 부활의 영광으로 기념하는 표적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예배 가운데 말씀 선포와 함께 성만찬이 그 원래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말씀은 성찬과 함께 선포되어질 때 그 말씀의 실제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 실제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예배에 말씀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실제로 성만찬 가운데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스롤리(J.H.Srawley)같은 학자도 초대교회에서의 성만찬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살과 피의 희생을 경험하고 십자가의 의미를 재현하는데 그 주안점을 두었다고 한다.
이러한 맥락속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과 죽으심을 선포하는 예전으로서의 성만찬은 오늘도 계속 되어져야 하며, 또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희생에 대한 찬미의 제사의 의미가 이 성만찬 예전에서 표현되어져야 할 것이다.
5. 공동체의 모체로서의 성만찬
성만찬의 본질 중 중요한 부분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그 자체를 이룬 무리들이 동일한 신앙속에서 삶의 내용과 방향을 같이 한다는 점이다. 즉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하나의 결정체를 이룩하는 특수한 공동체가 형성되어 진다는 것이 이 성만찬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초대교회 공동체의 발생과 계속적인 성만찬의 확대는 바로 이런 운동성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며, 땅 끝을 향하여 확대되어 가는 그리스도의 몸이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삶에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표징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세계 어디서나 성례전을 행하는 사람들은 동일한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이 성만찬 안에서 경험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성만찬의 성례전이 십자가 위에서 수난으로 끝나는 그리스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부활하셔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성만찬의 현장에 임재하시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가 있는 것이며, 이를 경험하는 신앙이 있을 때 성만찬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모체로서의 일치된 온전한 형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성만찬은 언제나 공동체의 모체인 그리스도의 하나인 몸을 가능케하는 나눔의 제전임과 동시에 전체를 하나의 신령한 모체로 묶는 결합의 예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만찬 가운데 항상 구속적인 나눔의 모체로서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부활하셔서 첫 열매되신 새 형상의 결합의 모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성만찬이 오늘의 교회 안에 각각의 형태를 이루고 있으나 그 중심은 한 하나님을 섬기는 초대교회의 전통적 핵심을 간직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적 관점에 따라 그 해석을 달리하므로 성만찬의 예전적 공예배와 말씀의 비예전적 예배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근래에 와서 신,구교 각 교회가 예배 갱신을 시도하려는 신학적 관심이 증대하면서 공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기독교의 한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의식이라는 큰 의미와 가치가 있다. 또한 이와같은 신학적 작업과 공동의 노력이 성만찬을 본질적인 차원에서 새롭게 정의하고 함께 수용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한 것이다. 성만찬은 공예배의 행위를 통해서 살아나고 표현되어진다. 그리고 성만찬의 의미는 거듭되는 의식에만 부여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의 모체에 그 의미의 핵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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