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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신있는 인간관계를 위한 성품훈련

수호천사1 2011. 2. 12. 09:38

자신있는 인간관계를 위한 성품훈련 


1. 외모를 취하지도, 무시하지도 말라  
성경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은 죄라고 말씀한다.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약 2:9)고 하신다.

그러나 주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말라고 하셨지, 외모를 무시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 2:1).

하나님과 사람은 중대한 차이가 있다. 이 말씀은 사람은 외모를 취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 앞에 설 때는 외모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중심을 봐야 한다.

사람의 외모를 무시하지 말라. 그러나 사람을 이해할 때는 외모를 보지 말고 중심을 보라.

"이에 바로가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낸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 옷을 갈아입고 바로에게 들어오니"(창 41:14).

요셉은 바로 앞에 나갈 때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었다.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의 앞날을 위해 보아스를 만나게 할 때도 룻을 위해 외모를 가꾸게 했다.

룻의 내면은 아름다웠다. 보아스도 룻이 현숙한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외모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룻 3:3-4).

 

2. 아름다움을 가꾸라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가꾸라. 사람들을 사랑하라.
그리고 자신도 사랑스런 사람이 되도록 가꾸라.

예수님 안에 거하면서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하라. 예수님은 성장하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사랑스러워 가셨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벤저민 프랭클린은 "사랑받고 싶으면 당신 자신이 사랑스럽게 변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을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도록 가꾸라.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라.
사람들을 만날 때 입에서 냄새가 나지 않도록 하라.
양치질을 깨끗이 하라.
옷을 단정하게 입으라. 더러운 옷을 입어서 천대를 받지 않도록 하라.
그렇다고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
그들도 사랑하라. 무엇보다도 내면에서 향기가 나도록 당신의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라.
영혼이 자라도록 말씀을 가까이하라.
언어에 향기가 나도록 시를 읽으라.

예수님의 향기가 나도록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

아름다운 것과 예쁜 것은 다르다.

떠오르는 태양을 아름답다고 하지 예쁘다고 하지 않는다.

밤을 참고 어둠을 이겼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광야에 만발한 들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지 예쁘다고 하지 않는다.

모진 바람을 견뎌내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 냈기 때문이다.

얼굴은 '얼의 꼴'이다.

얼굴에 영혼의 모습이 비친다는 말이다.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의 얼굴은 아름답다.

아름다울 ‘미(美)’자에는 큰 '대(大)' 자가 숨어 있다.

바다는 예쁘지 않고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은 큰 것을 품을 줄 아는 것이다.

사람의 크기는 문제를 만났을 때 증명된다.

참된 실력은 위기에서 발휘된다.

잠언은 문제의 크기가 아니라 사람의 크기가 중요하다고 말씀한다.

큰 사람은 품는 사람이다.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잠 24:10).

인간은 외모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원활한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외모에 어느 정도 신경을 써야 한다.

겉만 치장하라는 뜻이 아니라 성숙한 내면을 나타낼 수 있도록 외모를 가꾸라.

나는 자기 스타일이 있는 사람이 멋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스타일을 ‘외모를 화려하게 하고 패션 감각이 뛰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옥스퍼드 사전에서 설명하는 스타일은 ‘대단히 뛰어난 자질’이다.

이 말을 보면 스타일이란 겉치레가 아닌 강한 신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남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자신이 되는 것이 스타일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독특하게 창조하셨다.

이 세상에 당신과 같은 사람은 없다.

성경은 "내가 은밀한 곳에서 지음을 받았다"(시 139:15)고 한다.

정서는 생각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생각의 색깔이 인생의 스타일을 결정한다.

외모를 지혜롭게 가꾸라.

당신의 외모에 당신 영혼의 모습을 담아 내라.

경건의 모양도 중요하다.

경건한 척하는 것은 큰 문제지만, 경건이 있는 사람은 경건의 모양을 나타낸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말라.

그러나 지혜롭게 외모를 가꾸라.

자신의 스타일이 있는 사람은 멋있는 사람이다.

인간관계에 탁월한 사람은 멋있는 사람이다.

3. 온유하고 이해하라
누구나 친구를 원한다.

누구나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기 원한다.
데일 카네기의 책 「어떻게 친구를 만들고 상대를 설득할 것인가(How to Win Friends and Influence People)」는 베스트셀러다. 왜 이 책이 많이 팔렸을까?

누구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좋은 친구가 있는 사람은 수명이 길어진다는 연구 보고서도 있다.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액션을 좋아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만, 누구도 람보 같은 사람하고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만 소박한 곳에 머문다.

이해심 많고 친절하고 온유한 사람이 자기 주위에 있게 바란다.
온유는 무엇인가? 온유는 힘을 다스리는 것이다.

힘이 있지만 아무 데서나 사용하지 않고 꼭 필요한 곳에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은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들이다.

왕궁에서 살던 모세는 혈기가 넘쳤다.

한 주먹에 사람을 죽일 정도였다.

그러나 광야 생활을 하면서 그는 온유해졌다.

자신의 힘을 다스릴 줄 알게 된 것이다.

"너희 관용(온유)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

온유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반응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성품이다.

온유는 사람들에게 반작용(react)하는 것이 아니라 반응(response)하는 것이다.
당신은 사람들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가?

당신을 섬기는 사람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가?

식당의 종업원, 은행원, 고용인들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가?

그들에게 요구하기만 하는가? 무관심하고 비인격적으로 대하지는 않는가?

당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는가, 아니면 자신만 생각하는가?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 2:4).

상대를 이해하려면 먼저 당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존경해야 한다.

가까운 사람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온유하라.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4).

성경은 서로 온유하라고 말씀한다.

당신의 온유를 먼저 가정에서 보이라.

온유는 비판하지 않고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실수했을 때 비판하지 않고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2).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아 주되 그의 연약한 믿음을 비판해서는 안된다(롬 14:1).
연약한 믿음으로 삶을 망치는 사람을 보고 "그래, 내 그럴 줄 알았어!"
"어쩜 그렇게 멍청할 수 있냐?"고 비난하지 말라.
사람들의 실수와 약함에 대해 은혜를 베풀라.
하나님은 당신의 약함과 변함을 늘 참아 주신다.

온유는 은혜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잘 참지 못하고 거칠게 구는 이유는 은혜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체험하면 할수록 이웃에게 더욱 온유해진다.
당신에게 없는 것을 줄 수는 없다.

오직 받은 사람만이 줄 수 있다.

온유는 다른 것을 인정한다
공격적인 사람들은 자기와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비난한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다른 것을 인정한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온유한 반응은 지혜로운 것이다.

온유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지만 굴복하지도 않는다.

온유함은 인간관계의 문제를 가장 잘 다루는 방법이다.

영적인 성숙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약 3:16-17).

온유한 성품이 없는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

이기심 때문에 싸움과 논쟁이 일어난다.

지혜로운 사람은 순결하고 화평하며 온유하고 친절하다.

싸움에서 이기는 것보다 원만한 관계가 훨씬 중요하다.
온유함은 상처를 받아도 복수하지 않고 자기 일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이다.

예수님은 온유하셨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당신은 심판자가 아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다.

오직 하나님만 의로우시기 때문이다.

온유는 하나님이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주신 성품이다.

온유하면 평안하다. 온유는 자신을 다스리는 아름다운 성품이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

다른 사람이 당신의 감정을 좌우하고 있는가?

온유함을 훈련하라.

나는 오랫동안 이 세상에 본받을 사람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특히 내 주변에는 존경할 만한 인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존경할 만한 것을 찾아내는 능력이 없었다.

나 자신이 교만이라는 문제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교만이며 교만의 뿌리는 열등감이다.

사람들은 존경받고 싶어한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발견하고 존경해 주는 것이 온유다.
존경한다고 말하라.

존경한다고 편지에 쓰라.

그리고 정말 존경하는 태도를 품으라.
온유해지는 것이 가장 평안한 삶의 방법이고, 형편에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이며, 이웃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열심히 살아도 평안이 없다면 온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을 괴롭히는 인간관계를 통해 온유를 훈련하라.

당신이 온유하면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이 변할 수 있다.

그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 해도 당신이 평안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당신의 온유함을 보고 배우게 된다.

 

4. 당신 삶에 관계된 사람들을 즐기라
피터 드러커는 지도자의 첫 번째 성품은 "다른 사람을 즐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신은 주위의 사람들을 즐기는가?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으로 인해 즐거운가?
환경이 어려워도 그것을 즐길 줄 아는가?

나는 사람들을 즐기기보다는 견뎌 왔다.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싶었지만 견뎌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을 즐길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

인간관계에서 기쁨의 비결은 무엇을 보느냐에 달려 있다.
나쁜 것을 보고 있으면 즐거울 수 없다.

돈을 보는 태도를 '물질관'이라고 한다.
사람에 대한 태도를 ‘인간관’이라고 한다.

학습에 대한 태도를 ‘교육관’이라고 한다.
이 모든 것에 문제는 있게 마련이다.

문제 그 자체는 문제 되지 않는다.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觀)가 진정한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가치관을 소유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가치관을 통해 모든 것을 바라본다.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보는 관점이다.

사도 바울은 문제를 만났지만 믿음의 눈으로 문제를 보았다.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본 것이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 1:12). 사도 바울은 그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았다. 바울의 그러한 태도를 누가 보았는가?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빌 1:13). 불신자들이 보았다.

감옥의 간수들이 목격자였다. 성도들도 보았다.
성도들은 바울의 그런 태도를 보고 도전을 받았다.

그리고 이처럼 바울이 기쁨으로 문제를 대하는 모습을 하나님이 보셨다.

하나님이 영광받으셨다.

당신은 형통함으로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그것도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역경 속에서 하나님께 더욱 큰 영광을 드릴 수 있다.

에머슨은 "밤이 어두울 때 더 밝은 별을 본다"고 말했다.

밤이 깊을수록 하늘의 별은 더욱 밝게 빛난다.

성도는 역경 중에 더욱 빛나는 존재다.

사도 바울의 고난으로 함께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톨스토이는 "고통으로 인해 세계는 더욱 전진했다"고 말했다.
고통은 퇴보를 가져오지 않는다.

교회의 역사도 고통 가운데 열방으로 복음이 뻗어갔다.
인간은 역경을 이기면서 성숙하고 성장한다.

깊은 골짜기가 있는 곳에는 높은 산이 있다.

사도 바울은 항상 로마를 동경했다.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인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기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서 설교하고 싶어한 바울을 감옥에 가두시고 편지를 쓰게 하셨다.

바울 서신들은 이렇게 탄생했다.
위대한 설교도 중요했지만 하나님은 바울이 흐릿한 잉크 자국을 남기기 원하셨다.

그가 감옥에 갇히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바울의 서신들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궁정의 경호 군인들이 바울을 쇠사슬에 묶었다.

로마 황제의 최정예 부대 군인들이 그를 가두었다.

그들은 높은 보수를 받는 군인들이었고, 그들 중에서 황제의 경호원이 선발되었다.

12년을 섬기고 나면 로마 제국의 지도자가 되는 사람들이었다.

로마에 복음을 전하려는 바울에게 이보다 좋은 환경은 없었다.

하나님은 바울을 로마에 있는 감옥에 가두심으로, 로마의 미래 지도자들이 복음을 듣게 하셨다.

그는 2년 동안 4,380명의 군인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전해진다.

이 군인들은 네로와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들로 인해 로마 황제의 친척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졌다.

"형제 중에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빌 1:14).

사도 바울은 자신의 태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고 말한다.

용기는 전염성이 있다.

바울이 용감해지자 다른 성도들도 용감해졌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고백이다.

올바른 관점은 기쁨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감사는 바르고 탁월한 관점이다.

당신이 갖고 있는 좋은 것들을 감사하라.

감사는 받은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는 행동, 쉬지 않고 기도하는 생활,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감사가 없으면 기쁨도 있을 수 없다.

기쁨과 감사는 기도하는 삶에서 싹튼다.

나쁜 인간관계를 좋은 인간관계로 바꾸는 최고의 방법은 그 사람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가 주는 상처에 질렸고 그를 만나는 것이 무서웠다.

오랫동안 서로 상처를 주고 또 받으며 대화가 끊기자, 결국 우리의 관계는 단절이라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너무 힘들었다.

이 갈등은 그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였기에 상당히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고, 나는 이 문제를 놓고 철야 기도를 드렸다.

내 마음의 원망을 하나님께 쏟아 놓던 밤, 하나님은 그 사람의 허물보다 나의 허물을 보여 주셨다.

사실 나는 그에게 큰 상처를 입었지만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미움 때문에 그의 도움을 감사하지 않았다.

그날 밤, 하나님은 내게 기쁨과 감사와 기도가 하나임을 보여 주셨다.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두 가지를 바꾸어 주셨다.

먼저 내 자신의 태도를 바꾸셨다.

그리고 상대방을 바꾸셨다.

그때 나는 긍정적인 기도가 긍정적인 생각보다 훨씬 능력이 있음을 체험했다.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잘못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받은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것에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이미 하나님은 그 사람의 마음을 나와 같은 마음으로 바꾸셨음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을 즐기기 위해서는 그들이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그들의 과정을 허용해야 한다.
자녀를 즐기고 싶다면 그들이 성장하고 있는 과정을 기뻐해야 한다.

사람들은 행복에 대한 잘못된 환상을 가지고 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상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했던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상처로 남는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인간관계가 좋아도 만남에는 굴곡이 있다.

모든 인간관계에는 어려운 시기가 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행복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
그것은 기쁨이다.

행복이 주위의 여건으로 발생하는 것이라면, 기쁨은 역경이나 환난 중에도 솟아나는 비밀의 샘이다.

성령의 열매 중 ‘희락’이 바로 기쁨이다.

이 기쁨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진정으로 행복하고 싶다면 먼저 기쁨을 알아야 한다.

기쁨을 소유해야 한다.

환경이 주는 행복은 왜곡된 행복이다.

참된 행복은 기쁨, 곧 희락에 있다.

희락은 내면적이다.

희락은 인격이며 성령의 성품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항상'이라는 말을 기억하라.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한다.
환경과 조건을 초월해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이다.

예수님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다는 말이다.

희락은 성령의 열매다.

열매에는 나무가 있고 뿌리가 있다.

성령의 나무에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

이 법칙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눅 6:43-44).

 

5. 절제하라
온유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바른 태도라면 절제는 자신에 대한 바른 태도다.
절제는 인간관계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 (잠 25:28).

절제하지 못하면 인생의 성이 무너진다.

절제가 없으면 인생을 보호할 수 있는 성벽이 없는 것과 같다.

절제는 중요한 일을 먼저 하려는 결심이다.

절제는 목표에 집중하는 사람의 태도며 자신을 향한 결심이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상대는 자기 자신이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자기 정열을 다스리는 자는 통치자지만 자기 정열을 섬기는 자는 노예"라고 말했다.

인생의 승리자는 타인을 움직이기 전에 먼저 자신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다.

욕심은 채워야 할 것이 아니라 절제해야 할 것이다.

절제의 성품은 욕심을 극복하게 한다.

소극적인 절제는 본능적인 요구에 대해 제동을 거는 것이며, 적극적인 절제는 목표에 대한 에너지를 극대화하는 비결이다.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절제하면 삶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절제는 무슨 일을 하든지 삶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는 중요한 요소다. 절제는 성공의 비결이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어질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인간관계에서 절제는 매우 중요한 성품이다.

행복과 자유는 하고 싶은 일을 다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자유하고 싶으면 절제해야 한다.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아무도 자기를 정복하기 전에는 참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인간관계가 거리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면 수많은 인간관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일정한 거리는 절제를 통해서 유지된다.

절제는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다.

청년부 사역을 할 때 나는 그들과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친밀함이란 무조건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섬기는 성도들을 향한 나의 사랑은 뜨겁다.

그러나 함부로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인간관계에서 지혜롭게 설정한 거리는 중요한 순간에 도움이 된다.

아무리 그들을 사랑한다 해도, 감정만 따르다 보면 후회할 일이 많아진다.

절제는 감정을 다스리는 능력이다.

뜨거운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참된 사랑을 위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절제의 능력은 성령의 능력이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 곧 성품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절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령이 당신 마음을 다스리도록 해야 한다.

성령과 동행하며 절제를 이루라.

절제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참는 것을 말한다.

절제는 인내의 고통을 낳지만 이 고통은 성장의 거름이 된다.

절제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위해 조절하고 참는 것이다.

절제는 내적 강화의 외적 표현이다.

절제가 성령의 열매라는 점에 주목하라(갈 5:22-23).
절제는 인격에 맺히는 열매다. 금기는 하지 못하는 고통을 낳지만 절제에는 하지 않는 즐거움이 있다.

 

6. 사랑하라
사랑이 있는 인간관계는 아름답다. 사랑은 찬란하다.

사랑은 대담하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존귀하게 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랑이 매우 크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심장을 품은 사랑이었다.

너무도 크고 강렬해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사랑하는 사랑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사랑의 의미를 잘못 인식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말은 어느 때보다 자주 사용하지만 그 사랑의 대부분은 왜곡되어 있다.

사람들은 사랑이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느낌이 오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물론 사랑에는 느낌이 중요하다.

사랑에는 감정이 중요하다.

그러나 사랑은 느낌이나 감정 이상이다.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면 자신을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서 내 감정을 다스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참 사랑은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왜곡된 사랑에 빠져 느낌과 감정으로만 사랑하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왜곡된 사랑을 경계하라.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서로’는 인간관계며 ‘사랑’은 비결이다.

사랑은 인간관계의 비결이다.

성경은 사랑이 인간관계를 온전하게 매는 띠라고 말씀한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4).

사랑은 선택이고 실천이다.

성경은 행동하는 사랑을 말씀한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세상이 제시하는 사랑은 단편적이고 왜곡되어 있다.
거기에는 균형이 없다.

세상의 사랑은 감정적이고 이기적이며 자극적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참된 사랑의 성품을 말해 주는 탁월한 사랑 장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사랑은 공동체와 인간관계를 회복시키는 비결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이해하려면 먼저 고린도전서 12장을 알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주님이 교회에 허락하신 영적 은사들의 목록이 기록된 장이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지혜, 지식, 믿음, 병 고침, 능력,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 등 여러 은사들을 열거하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그리고 13장에서는 사랑을, 14장에서는 영적 은사의 바른 사용법을 설명한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전 14:1).

14장은 영적 은사의 바른 사용을 위한 성도의 태도, 동기, 상황을 다루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의 초점은 바로 사랑이다.

모든 영적 은사는 성령의 열매인 사랑으로 통제되고 사용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고린도 교회에 성령의 은사들은 있었지만 성령의 열매가 없었다.

사랑의 부족은 고린도 교회 안에 치명적인 인간관계의 문제를 일으켰다.

사랑의 통제를 받지 않은 은사들은 교회 안에서 분쟁과 시기, 분열, 허영 등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참된 사랑이 없기에 인간관계가 몸살을 앓는다.

사랑이 없어서 전도가 되지 않는다.

결국 교회의 문제는 재능이나 은사, 프로그램의 결핍이 아니라 사랑의 결핍이다.

교회와 인간관계의 장래는 은사에 달려 있지 않다.

인간관계는 내가 추구하고 품은 성품에 달려 있다.

사람들은 당신의 은사를 보지 않는다.

당신에게서 사랑의 열매, 인격적인 사랑의 성품을 찾고 있다.

  사랑은 시간을 내서 참아 줄 때 살아나고
  참지 못하고 서두를 때 죽어 가며
  기다리지 않으면 죽는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다. 사랑은 동사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다.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가꾸지 않는 사람이 정말 꽃을 사랑하는 사람일까?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고 사랑을 몸소 실천하라.

또한 사랑은 시간과 관계가 깊다.

성경은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는다"(고전 13:4)고 말씀한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엡 4:2).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다리는 데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

꿈이 실현되기를 기다린다.

병이 낫기를 기다린다.

기다림은 오래 참는 성품이다.

오래 참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고치도록 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 사람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 1:16).

하나님은 당신을 오래 참아 주심으로 당신을 변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기다리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벌써 다 죽었을 것이다.

당신이 기다리지 못하면 사랑이 죽는다.

하나님처럼 오래 참으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

하나님이 당신을 대해 오래 참으셨다면 당신도 이웃에 대해 인내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사랑은 돌봄으로 살아나고
  잊혀짐으로 죽어 가며
  무관심으로 죽는다.

사랑은 온유하다.

사랑은 친절하다.

사랑은 돌봄으로 살아난다.

무관심해지면 사랑이 죽게 된다.

가까운 사람에게 친절하라.

친절은 멀리 있는 사람보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필요하다.

인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고 바로 옆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라.

공동체에 친절이 사라지면 모두 외로워진다.

친절하라.

사랑은 친절하다.

  사랑은 신뢰로 살아나고
  시기함으로 죽어 가며
  교만으로 죽는다.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투기, 자랑, 교만은 인간의 원죄적 특성이다.

투기는 타인의 성공이나 행복을 보고 마음이 상해서 분노하는 것이다.

투기는 ‘남이 가진 것을 나도 가졌으면’ 하는 시샘에서 시작해서 나중에는 ‘그도 갖지 못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발전한다.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약 3:14-16).

투기는 상대의 업적을 무로 돌린다.

그리고 자랑은 자신의 업적을 극대로 과장한다.
투기의 초점이 상대방에게 있다면 자랑의 초점은 자신에게 있다.

투기와 자랑의 공통점은 그 뿌리가 이기심이라는 사실이다.

이기심은 미숙하고 훈련되지 않은 인간의 성품이다.

그러나 사랑은 훈련이다.

사랑은 자신을 과장하지 않는다.

사랑은 겸손하다.

사랑은 투기하지 않는다.

사랑은 상대방을 높이는 행동이다.

자기 자랑이 극대화하면 교만으로 나타난다.

어거스틴은 원죄를 교만이라고 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인간의 교만은 에덴의 평화를 깨뜨리고 질서를 파괴했다.

교만한 사람이 있는 곳에는 평안이 사라진다.

질서가 무너진다.

교만이 있는 곳에서 사랑은 죽게 된다.

요나단은 추악한 투기와 교만을 극복한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는 왕자였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서민 출신의 친구 다윗이 왕이 되었다.

성경으로 본 요나단은 절대로 다윗을 투기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투기의 마음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요나단이…자기의 생명을 사랑함같이 다윗을 사랑함이었더라"(삼상 10:17).
요나단은 자기의 생명같이 다윗을 사랑한 것이다.

사랑은 투기하지 않는다.

  사랑은 줄 때 살아나고
  받은 만큼만 주려고 할 때 죽어 가며
  받으려고만 할 때 죽는다.

"나는 받고 너는 준다"는 관계에서 사랑은 죽는다.

"네가 주었으니 나도 준다"는 관계에서 사랑은 죽어 간다.

"주고 또 준다"는 관계에서 사랑은 살아난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고전 13:5).

성경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정죄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당연한 것을 넘어선다.

로맨틱한 사랑은 계속 관심을 요구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주고 또 주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전적으로 자기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구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라는 우상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자기를 넘어서야 진정으로 행복해진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행 3:6).

베드로는 “내게 무엇이 없는가”를 생각하지 않았다.

“내게 무엇이 있는가? 내가 무엇을 저에게 줄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사랑은 반드시 줄 것을 찾아낸다. 사랑은 줄 때 살아난다.

참된 사랑은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를 사랑하기에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왜곡된 사랑은 계속 받기만 원한다.

항상 조건을 붙인다.

내가 이렇게 너를 사랑하니 너도 나를 이렇게 사랑해 달라고 한다.

진정한 사랑은 그냥 주는 것이다.

거기에는 조건이 없다.
열방의 복음화는 폭탄이나 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을 가지고 열방을 품도록 명령하셨다.

뜨거운 사랑이 전도를 잉태한다.

  사랑은 감정을 초월해서 말씀대로 행할 때 살아나고
  행하지 않을 때 죽어 가며
  느낌대로만 행할 때 죽는다.

참 사랑은 느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으로 행하는 것이다.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5-7).

하나님은 참사랑을 가르치시기 위해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보내신다.

인내를 가르치시기 위해 인내하기 힘든 환경을 만드신다.

진정한 인내라면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 내야 한다.

사랑은 느낌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감정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수많은 사람이 사랑의 감정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된 사랑을 정당화하며 살고 있다.

사랑은 말씀을 따를 때 살아난다.

말씀이 참사랑이기 때문이다.

오직 사랑만 영원하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예언과 방언과 지식은 대단한 은사지만 영원한 은사는 아니다.

예언이나 방언, 지식은 이 세상에서 필요할 뿐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없어도 되는 것들이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9-10).

온전한 것은 하나님 나라다.

천국에서 예언은 필요 없다.

천국은 온전하기 때문이다.

천국에서는 방언도 필요 없다.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데 방언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지식도 필요 없다.

모든 것을 다 알게 되는데 지식이 왜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사랑은 영원히 있다.

천국에도 사랑은 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이다.

천국에서 남는 것은 사랑뿐이다.

사랑만 영원하다.

영원한 것이 가장 귀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도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수고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에 ‘어린아이’라는 단어를 대입하여 읽어 보라.

"어린아이는 언제나 오래 참고, 어린아이는 언제나 온유하며, 어린아이는 투기하지 않으며, 어린아이는 자랑도 아니하며…."

어울리는가?

어울리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미숙하기 때문이다.

성숙한 사람이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성숙의 자격증이다.

성숙은 거저 얻는 것이 아니다.

성숙은 훈련해야 하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사랑은 기술이 필요하다.

사랑은 행복한 훈련이다.

사랑은 행복한 실천이다.

사랑은 성숙의 극치다.

그리고 영원한 것이다.

7. 화목하라
평화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인 ‘여호와 샬롬’은 ‘우리의 평화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엡 2:14)고 말한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천사들은 주님의 탄생 소식을 이렇게 알렸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수백 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예수님을 ‘평강의 왕’이라고 예언했다(사 9:6).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유언처럼, 그리고 유산처럼 남기셨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예수님이 주신 평안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의 중보자가 되셨다.

당신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던지셨다.
화평은 성령의 열매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 신앙 생활의 시작이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의 평화’를 선물로 받는다.

평안을 소유한 사람만 평안을 줄 수 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줄 수는 없다.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이 이웃과 화평하고, 이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 수 있다.

"모만한 자는 성읍을 요란케 하여도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하느니라"(잠 29:8).

싸움을 일으키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사람이다.

교만한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싸움을 일으킨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평화를 지킨다.

무엇이 평화를 깨뜨리는가?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평화를 방해하는 정치적, 사회적 요인들을 분석하고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지만, 성경은 평화의 적을 외적 환경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성경은 간단명료하게 평화의 적은 ‘죄’라고 말씀한다.
페넬롱은 “평화란 외적 요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내부의 영혼이 견고히 자리잡은 것이며, 고통에서의 면제가 아니라 친밀에서 오는 안심이다”고 말했다.

전쟁은 평화를 위협하는 무서운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 나타난 모든 전쟁과 갈등은 사실상 인간의 내면적 갈등의 외적 표출이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 48:22).

내면에 평화를 소유한 사람은 그가 속한 모든 곳에서 평화를 심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내면에 불화를 소유한 사람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 있어도 다툼의 근원이 된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말미암아 좇아 난 것이 아니냐"(약 4:1).

인간이 경험하는 갈등과 다툼의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 내면에 있는 욕심이라는 말씀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라는 예수님의 설교를 기억하는가? ‘화평케 하는 자’의 복 바로 앞에 나오는 복은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주님은 먼저 마음의 청결을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화평을 말씀하신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평화가 없다는 뜻이다.

어떻게 평안을 소유할 수 있는가?

진정한 평안을 소유하려면 먼저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셨다.

용서는 화평의 시작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 이 십자가가 가져온 가장 놀라운 결과는 내가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존 번연은 말했다.

"그가 공의와 씨름하심은 그대의 쉼을 위함이요, 그가 우심은 그대를 웃게 하려 함이요, 그가 배반당하심은 그대를 자유케 하려 함이요, 그가 붙잡히심은 그대에게 놓임을 주시려 함이요, 그가 저주를 입음으로 그대가 의롭다 함을 얻고, 그가 죽임을 당함으로 그대가 삶을 얻고, 그가 가시관을 쓰심으로 그대가 영광의 관을 얻고,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그대가 영광의 옥체를 얻게 하려는 것이오."

용서받은 사람은 이제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만이 비로소 주변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평화의 사도가 될 수 있다.
영국 캐태릭 캠프에는 제 2차 세계대전 때의 그림이 있다.

노르망디 해변 위에서 전사한 한 통신병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병사는 폭격으로 절단된 전선을 연결하라는 명령을 받고 자신이 케이블 양끝을 두 손으로 잡은 채 전도체가 되어 죽어 갔다.
이 그림의 제목은 “소통(Through)”이다.

한 병사의 죽음이 끊어진 선을 연결시켜 통신을 가능케 했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예수님은 한 손에 아버지의 손을 쥐고 다른 한 손에 나의 손을 쥐고 계셨다.

죄로 말미암아 단절된 하나님과 나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서 친히 죄의 대가를 치르셨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5-18).

‘이 둘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킨다.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은 원수였다.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화목케 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모든 사람의 사이를 화목케 하셨다는 말씀이다.

여기에 미움을 넘어선 화평의 비결이 있다.

평화를 위협하는 실제의 적은 관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죄다.

지금 싸우고 있다면 죄 때문이다.
공동체 안에서 평화가 깨지기 시작하는 때는 누군가가 자기 의로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부터다.

죄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용서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를 용서하려 하지 않고 정죄하려 한다.

정죄하는 사람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것이 바로 더 큰 죄라는 사실이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7).

어떻게 평화할 수 있는가?

평화의 비결은 용서다.

실수하고 잘못해서 평화가 깨지는 것이 아니다.

그 잘못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때문에 평화가 깨진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한다.

시험도 많고 유혹도 많다.

그리고 누구나 실패하고 실수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에는 관대하고 타인의 실수에는 매정하다.

사람들은 용서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용서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눅 11:4)라고 기도하셨다.

주님은 용서를 명령하신다.

서로 용서하지 않는 이유는 용서가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용서를 하려고 하면 왠지 나만 손해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서는 공평성의 문제가 아니다.

용서는 불공평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용서는 정의가 아니다.

용서는 은혜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은혜로 당신을 용서하셨다.

하나님이 정의로 대하셨다면 당신은 절대로 구원받지 못한다.

C. S. 루이스는 "용서는 공평함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만일 공평성을 따진다면 당신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정의는 선하고 의롭고 합리적이다.

그러나 은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초월적인 힘이 있다.

용서는 정의가 아니다.

용서는 은혜다.

당신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정의를 넘어선 은혜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당신은 정의 앞에 이미 죽었다.

율법으로 죽은 것이다.

평화를 위해서는 오직 용서가 필요하다.

용서는 출구다.

용서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노벨상 수상자 솔제니친은 "회개와 용서의 능력이 인간을 인간 되게 한다"고 말했다.

용서하지 못하면 스스로 미움의 손아귀에 붙들려 평안의 삶을 살지 못한다.

용서를 통해 치유받는 최초의 사람은 상대방이 아닌 나 자신이다.

용서는 포로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이 포로를 풀어 주고 나면, 내가 풀어 준 포로가 나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용서하지 않으면 나는 과거라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당신이 입은 깊은 상처는 당신이 용서할 때까지 치유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건너야 할 다리를 부수는 것이다.

요셉은 누구를 용서해야 했는가?

형들이다.

요셉은 가장 가까운 형제에게 배신을 당했다.

형들은 연합하여 요셉의 가슴에 증오와 멸시와 질투의 비수를 꽂았다.

그를 구덩이 속에 던져 넣었다.

요셉의 간절한 애원에도 형들은 냉정했다.

요셉의 흘리는 눈물을, 애걸을, 찢어지는 가슴을, 애원을 무시하고 등을 돌렸다.

창세기 42장 이하에 나오는 요셉의 울음이 당신의 가슴에서 들려와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슴에 스며드니 드디어 용서의 울음이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울음이 온 성에 들린다.

이 울음은 한 남자의 용서하는 소리였다.

용서가 화평을 낳는다.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죄를 회개함으로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릇처럼 자신을 계속 닦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해야 한다.

진정한 강자는 용서하는 사람이다.
십자가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극적인 용서의 사건을 주목하라.

주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고 조롱하는 성난 사람들을 바라보며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폭도들이 예수님께 용서를 구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용서를 구하기 전에 주님이 먼저 용서하신 것이다.
삶의 진정한 승리는 먼저 용서하는 데 있다.

우리는 정죄하는 자가 아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요, 용서하는 자이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의 기도를 기억하라.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것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려 죽음으로써
   영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뒤틀린 인간관계 속에서 외로워하고 갈등하고 있는가?

이제 자유를 위해, 승리를 위해 용서하라.

주님이 당신을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셨다.

이 용서의 영이 당신과 함께하게 하라.

당신이 받은 예리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 상처를 준 친구, 가족, 친척, 이웃을 향해 용서한다고 선언하라.

용서의 영이요, 화평의 영이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라. 용서만이 화목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다.

8. 친절하라
성령의 열매 중 ‘자비’는 곧 친절을 말한다.

친절은 사랑이 행동하는 것이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모든 일에 성공한 사람도 하나님과 인간관계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실패한 것이다.

사랑은 친절하다.

친절은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사랑은 움직인다.

당신이 참으로 사랑하면 무언가를 한다.

사랑은 감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행하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친절이라고 말씀한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친절)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딛 3:4).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친절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당신을 존귀하게 보신다.

친절은 하나님이 당신을 존귀하게 보는 것같이 당신도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보는 것이다.

친절은 인색하지 않다.

비난하지 않는다.

인색하고 비난하는 동안에는 결코 친절할 수 없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친절은 상대방의 약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해와 친절은 같이 간다.

모르면 비난하고 오해한다. 잘 이해하면 친절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예수님은 당신의 연약함을 이해하신다.

당신이 연약하다고 업신여기지 않으신다.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셨다.

그리고 시험을 이기셨다.

시험받는 것은 죄가 아니다.

시험에 빠지는 것이 죄다.

시험을 이기신 주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예수님은 당신을 도우시고 남을 도울 수 있는 힘도 주신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정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1-2).

성경은 온유한 심정을 가지라고 한다.

친절함의 비결은 비판하지 않고 온유한 것이다.

사람들의 약점에 대해 온유하라. 비판하면 오해하지만 온유하면 이해한다.

하나님이 온유함으로 당신의 약점을 이해하시듯 당신도 온유함으로 이웃의 약점을 이해하라.

이해와 친절은 같이 가지만 비판과 친절은 절대 같이할 수 없다.

예수님처럼 친절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비판적이지 않고 친절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실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진리가 인간을 자유케 한다는 사실을 아신다.

진실을 외면하면 이중성을 갖게 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예수님의 친절은 당신을 진리와 대면하게 하신다.

진실을 대면한 사람은 두 가지를 경험한다.

우선 진리 앞에 서면 비참해진다.

사람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속이지는 못한다.

하나님의 진실 앞에서 인간은 비참해진다.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된다.

하나님은 양심 가운데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진리는 당신을 자유케 한다.

친절한 사랑은 진리를 사랑으로 말하는 것이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사랑 안에서 진실하라.

참된 친구는 당신의 실수를 실수라고 말해 준다.

그것이 힘들다 해도 참된 말을 해 준다.

진실을 말해야 한다면 사랑으로 친절하게 말해야 한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지라 저희의 재난 중에라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시 141:5).

비난을 위해 비판하는 것과 사랑으로 책망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어떻게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가?

그 차이점은 동기에 달려 있다.

세워 주기 위해 남을 책망하는가?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책망하는가?

아니면 당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책망하는가?

참된 친절은 진실을 말함으로 참 자유를 주는 것이다.

사랑으로 책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당신도 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친절은 성령의 성품이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친절하게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관계에서 친절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먼저 당신에게 친절하셨기 때문이다.

“너희가 그 은혜(친절)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은혜와 친절은 항상 같이 간다.

친절한 마음은 하나님을 아주 많이 닮은 마음이다.

친절하게 행할 때 당신은 그 친절을 되돌려 받게 된다.


친절하기 위해 민감성을 훈련하라
어떻게 친절을 베푸는가?

친절은 상대방의 필요와 상처를 돌보는 데서 시작된다.

친절한 사람은 민감한 사람이다.

친절한 사람은 이웃의 필요를 안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 2:4).
모든 사람이 친절을 갈망한다.

당신의 친절이 가장 필요한 사람은 지금 당신 옆에 있는 사람이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미소를 지으라.

그리고 친절한 언어로 도움이 되어 주라. 친절은 사람을 세워 주는 것이다.

“온량한 혀는 곧 생명 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4).
친절한 사람은 이웃을 당황하게 만들지 않는다.

만나는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를 주고, 세워 주는 사람이 되라.

친절을 미루지 말고 속히 실천하라.

친절을 베풀기 위해 기다릴 필요가 없다.

기다리지 말고 즉각 하라.

당신의 친절을 미루기에는 인생이 넉넉하지 않다.

기다리지 말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친절을 베풀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친절은 옷을 입듯이 입는 것이다.

아침마다 옷을 입는 것같이 영적으로 정서적으로도 옷을 입어야 한다.

아침마다 자신에게 물어 보라.

오늘은 어떤 태도로 살 것인가? 친절이 몸에 배게 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친절)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옷’을 입고"(골 3:12).
헬라어로 ‘친절’이라는 단어는 ‘크레스토스’로 ‘그리스도’와 한 글자가 다르다.

초대 교회 시절,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와 ‘크레스토스’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과 친절한 사람들을 같이 생각했다.
마태복음은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판단의 기준을 기록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나는 이웃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31-46).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면 하나님의 심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비로운 사람이 된다.

출처 : 행복†충전소
글쓴이 : 金鐘日牧師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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