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와 종말
부재:하나님 나라를 알면 종말이 보인다.
서론적고찰
1. 말뜻
2. 현재성 미래성
3. 하나님 나라의 임함과 종말
4. 하나님 나라와 종말을 어떻게 확인할수 있는가?
5. 역사적 종말의 의미
1. 때가 차매(역사적 배경)
1.1. 창조사상
1.2. 타락사상
1.3. 언약사상
1.4. 종말사상
2. 태초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2.1. 창조의 목적
2.2.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계신 나라
2.3. 피조물
2.4. 하나님 형상
2.5. 생영
2.6 하나님 나라와 안식일
3. 타락-하나님 나라의 도전
3.1. 사탄의 시험
3.2. 죄의 본질
3.3. 죄의 증상과 결과
4 구원-하나님 나라의 회복
4.1. 구원의 의미
4.2. 최초의 복음(창3;15)
5. 노아언약과 종말
5.1. 노아언약의 배경
5.2. 노아언약과 종말사상
6. 족장들의 언약(구원의언약)과 하나님 나라
6.1. 구원의 언약
6.2. 땅,백성,후손
7. 다윗언약과 하나님 나라
8. 선지자들과 하나님 나라
9.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
10. 하나님 나라와 종말
부록-이 땅의 종말은 언제 오는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와 장차올 하나님 나라의 연속성
종말적 신앙이란 무엇인가?
1.하나님 나라와 종말에 관한 총론적 고찰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맨 먼저 하신 말씀은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이었다(막1:15).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처음 하신 말씀일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가르치신 말씀의 중심이 되는 말씀이다.
즉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동안 그의 선포와 가르침과 행적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어떻게 왔으며,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말씀하셨다.
또한 이 하나님나라에 관한 사상은 신, 구약 성경의 중심이 되는 사상이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는 종말사상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1.하나님나라라는 말 뜻
우리는 대개 "하나님 나라"하면 우주공간 저편에 있는 열두진주문 황금보석이 있는 나라로만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어떤 장소나 공간적인 의미가 아니다.
물론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장소적이고 공간적인 의미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다스리심, 통치하심", 또는 "하나님이 주권을 행사하심"이라는 역동적인 말로 먼저 이해해야 한다.
또 성경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하나님의 나라, 그의 나라, 주의 나라, 하늘나라, 천국이라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성경구절)
1.2.하나님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나라가 장차 올 나라도 되지만(미래성), 이미 왔다(현재성)라고 선포하셨다.
이것을 그림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성경구절)
현재의 하나님나라 미래에 임하여질 하나님나라
창 조 예수님의 초림 예수님의 재림(역사적 종말)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단순 미래적인 사건으로만 이해했다.
이 세상역사의 끝이 오면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미래의 하나님 나라도 인정하셨지만, 예수님이 오시므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벌써 왔다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그 증거로서 병자 치유와 축귀의 행적을 보여주셨다(성경구절),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현재성과 미래성을 가진 나라로 말씀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중에서 어느 쪽에다 더 강조를 두셨는가?
그것은 현재성이다. 예수님은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곧 온다, 반드시 온다, 기다려라"는 식으로만 말씀하셨다. 그리고 장차 올 나라에 대해서는 많은 묘사를 하지 않으셨다(유대인들은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대해 물질적인 현란함으로 많은 묘사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해서는 선포와 가르침과 비유로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보다 현재성에 더 촛점을 두어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에 동참해있지 않은 사람은 미래에 임하여질 하나님 나라에 동참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안에 들어와 있지 않으면서 미래에 임하여질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다고 하자.
그러면 이 사람은 과연 미래에 임하여질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현재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에 동참해 있지 않으면 미래에 임하여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것을 요청하셨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것이 복음이고, 그 나라에 들어오는 것이 구원이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말은 자기 마음대로 살던 세계에서 나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다는 말이다.
이렇게 구원받아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은 그 종말이 언제이냐에 상관없이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보장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우선된 관심사는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에 있어야한다.
1,3.하나님나라와 심판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이미 왔다는 것은 이 땅에 대한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에 동참해 있지 않은 사람은 벌써 심판을 받은 것으로 말씀하신다(요3:18.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영생이라는 말과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벌써 임한 것처럼,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도 벌써 시작되었기 때문이다(롬1:18).
만일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것은 현재 임하여진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가 현재성이 있고 미래성이 있듯이, 이 땅에 대한 종말과 심판도 현재성이 있고 미래성이 있다.
1,4.감추어진 하나님나라
하나님 나라와 이 땅에 대한 심판과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감추어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확인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 중에서 제일 중요한 비유가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이다.(마13장:44)
밭에 감추인 보화는 겉으로 보면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밭을 소유하여 땅을 파보면 보화를 확인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나라가 현재에 임했다는 것은 육신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 나라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임하여져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 할 수 있는가?
첫째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와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임하여 졌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살던 죄악된 세계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세계로 들어왔다는 말이다. 이런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가만히 두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생애를 주관하시고,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사실들을 보고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평안과 안식을 누려나가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임하여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대표적인 비유가 잔치집의 비유이다. 잔치집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잔치집은 풍요와 기쁨, 평안과 안식을 나타낸다. 이것이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임하여졌다는 것은 잔치집과 같은 풍요와 기쁨의 나라가 이 땅가운데 임하여졌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안에 들어온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풍요와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가 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풍요와 기쁨을 완전히 누릴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 완전히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종말이 오기 전 현재 가운데서도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선취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축귀와 치유의 기적들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의 역사 세계 속에 이미 개입하기시작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의 사실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확인할 수 있음을 알게되었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 대한 종말과 심판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확인 할 수 있는가?
첫째로, 롬1장18절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는 막는 사람들 위에 벌써 임하여져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진노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삶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아니하시고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심이다(롬1:24,28) 이것이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모습이다. 우리 주위에서 이와같은 사실을 너무나 많이 볼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조그만 잘못된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것을 보게된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리 잘못해도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음을 보게된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거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때가 많다(시73). 그러나 우리는 결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시고 내어 버려 두시는 것은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하나님 나라안에 들어온 자는 진정한 풍요와 기쁨과 안식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나라안에 들어와 있지 않는 사람들은 진정한 안식과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현재에 심판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 이 시대의 문화는 허무주의 문화이다. 대학가도 마찬가지이다. 왜 대학생들이 향락주의와 쾌락주의에 빠지는가? 그 이유는 그들 마음속에 진정한 기쁨과 안식이 없기때문이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너무나 부러워 할 때가 많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보다 더 자유로워 보이고 풍요로워 보이고 즐거워 보인다(시73) 그러나 그들의 심령 속에 진정한 기쁨과 안식이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겠다. 이 허무함이 바로 현재적 심판의 모습이다.
1,5.재림과 역사적 종말의 의미
그러면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재림, 혹은 역사적 종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벧후 3장 10절을 보면 주님이 재림하시면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불에 탄다고 이야기한다. 즉 예수님의 재림은 역사의 종말이다. 또한 예수님의 재림 때에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이야기한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재림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는 사실로 드러나는 날이다. 마찬가지로 현재에 임하여진 심판이 눈에 보이는 사실로 드러나는 날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 혹은 역사적 종말로 말미암아 장차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그 나라의 기본적인 성격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와 동일하다. 장차 올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계셔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또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풍요와 안식의 잔치를 누리며 살는 나라이다.
결 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안에 들어왔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하나님은 언약으로서 우리의 하나님 노릇 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셨다. 이렇게 우리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살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미래의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살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밖에 있기에 현재적인 심판을 받고 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불과 유황으로 타는 지옥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종말에 관한 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이 언제 오시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마24:36,행1:6) 우리의 관심사는 현재적 심판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야한다. 그리고 이미 그 나라에 들어온 자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알고 그 나라에 합당한 백성의 삶을 궁구하며 살아야한다.
2.태초에 나타난 하나님나라
공생애에 나타난 예수님의 첫 선포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1:15을 보면 이 하나님 나라가 갑자기 온 것이 아니라 "때가 차매" 온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때가 차매"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때가 차매"라는 말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갑자기 온 것이 아니라, 구약의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인 배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약의 창조사상, 타락사상, 언약사상, 선지자들의 종말사상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 나라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주권자이시다(창조사상).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에 도전한 것이 사탄의 시험이다. 사탄의 시험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타락이 오게되었다. 인간의 타락이란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세상을 추구하는 것이다.(타락사상).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구원의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려한다. 그 언약의 핵심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너의 왕노릇해 주겠다"라는 것었다.(언약사상). 그런데 이스라엘에 하나님 나라를 잘 드러내주지 못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메시야를 통한 종말의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가운데 때가차매 예수님이 오셔서 창조의 회복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언약의 완성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종말의 성취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해야 한다. 특히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잘 이해해야 한다.
2.1.창조의 목적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에덴동산을 통해서 알수 있다. 계시록에 보면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창조 때 나타난 에덴 동산의 회복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에덴동산을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인간이 중심이 된 유토피아(이상향)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에덴동산은 인간이 중심이된 인간유토피아가 아니다. 만일 에덴동산이 인간 유토피아라면 하나님께서 왜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두셨겠는가?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에덴 동산이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하나님 나라인 것을 알리시기 위함이다. 또 선악과는 선악을 판단하는 모든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창조 때의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에서 따라서 선악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창조하고자 하셨다. 이와같은 사실을 통해서 에덴동산은 인간이 중심이된 유토피아가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된 하나님 나라인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왜 두셨는가 라고 이야기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면 인간이 죄를 짖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인간이 죄를 짖지 않았다면 세상의 불행이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인간의 죄와 불행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도 결국 에덴 동산을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유토피아로만 본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장차 가게될 미래의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그 나라도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 나라처럼 인간의 뜻대로 사는 나라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가는 나라이다(계: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가더라 )
2.2.하나님이 주권의 실행되는 나라
그러면 창조때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우리가 대개 어떤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또 그 나라의 백성은 어떠한가'를 알아야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창조때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먼저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계신 나라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에덴의 주권을 가지고 계신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에덴 동산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과 에덴의 창조주이기에 에덴의 주권은 당연히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에덴의 주권을 가지고 계시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명령하실수 있는 것이다(주권자는 명령자,혹은 입법자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세가지의 명령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먼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명령하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금령을 하셨다. 이것은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의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인간은 단지 분별만 할뿐이다.그러나 그것을 판단하시는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한 몸을 이룰 것을 명령하셨다(결혼명령) 이와같이 에덴 동산은 통하여 보게된 창조때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계시는 나라로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명령이 있는 나라인 것을 알 수 있다.
2.3.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피조물,하나님형상,생영
처음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알수 있다. 우리가 한 나라의 성격을 파악하려면 그 나라의 주권자가 누구인지도 알아야하지만, 또한 그 주권자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이 어떤 자들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창조때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어떤 모습인가? 이것은 창조때 나타난 처음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먼저 성경에서는 태초에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어진 피조물인 것을 말하고 있다. 요즈음 복제 인간에 대한 논의가 나오면서 마치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창조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혹 복제 인간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창조라고는 할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분명히 말하는 바는 사람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어진 피조물이란 사실이다.
그러면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어진 피조물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먼저 사람과 인생의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지금 이 세상 사람들은 인간이 저절로 진화되어져서 만들어졌다고 항변한다. 이것은 인간의 피조물됨을 인정치 않고 사람이 인생과 세상의 주인인 것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분명히 말하기를 사람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어진 피조물이란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인생의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란 사실은 사람이란 하나님께 대하여 의지하고 순종해야되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도 요즈음의 사람들은 거의 부정하고 있다. 요즈음의 사람들은 인간이 인생과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이란 하나님의 도움심이 없어도 살아갈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아갈수 없는 피조물임을 말하고 있다.
질문/1(묵상과 나눔). 당신은 당신의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얼마나 인정하고
있는가?
질문/2(나눔).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왜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도피주의적이냐? 현실
을 도피하여 신에게로 도망하지 마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당신은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우리가 현실을 도피해서 신에게로 도망하는 존재가 아니라, 너희들이 신에게서 도피하여 세상 속 에 숨어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이다. 인간이란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
하기 때문이다. 지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사람이다.
(마이클 그리피스의 도피하는 현대인이라는 책을 읽어보시오)
질문/3(나눔). 요즈음 일고 있는 복제 인간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지금 세상 사람들이 복제 인간을 통해서 주장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이라고 생각
하는가? 인간이 생명의 창조자,인간의 주인은 인간이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자연적 운명이나 신에 게 의존할필요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한다.
또한 성경은 태초에 나타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인간이란 하나님을 비추이고 반영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마치 밤하늘에 달이 연못속에 비추어져서 달의 형상이 연못에 비취는 것과 같다. 그 연못속에 달이 비췰 때 연못 속에 달 자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달의 형상이 연못속에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연못처럼 하나님을 비추이고 반영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사람들은 어떠한가? 지금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드러내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살아가고 있다(창11:4). 그러나 이것은 참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사람의 제일 최고 가치는 그가 하나님을 나타내고 드러내는데 있다. 이것이 인생의 최대의 목적이다. 사람이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살아가야 할 존재이다(고전10:31).
질문/(나눔). 당신은 인생의 최고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았는가?
우리는 인생의 최고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아야 되겠는가?
마지막으로 성경에서 사람을 생령으로 보고 있다.(창2:7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인간이 생령이라는 말은 인간이란 영적인 존재라는 말이다. 요즈음 일고 있는 복제 인간에 대한 논의중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인간을 단순히 동물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자기 비하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이란 단순히 살과 고기만 있는 육적인 존재로만 보지 않고 영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요즈음의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그러면 사람이 영적인 존재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사람이 영적인 존재라는 말은 사람이란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고 교제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서도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여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고 교제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가 먹고 마시기만 하는 육적인 존재로만 보고 있다(마4:3)
질문/(묵상과 나눔) 요4장에서 우물가의 여인이 많은 남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진정 한 인생의 만족을 누리고 있지 못했는가? 사람이란 어떤 존재이기에 세상적인 것을 모 두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는가?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세상의 모든 것이 있어도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허무할 수밖에 없다
2.4.하나님나라와 안식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창조때 나타난 안식의 의미를 이해해야한다. 하나님께서 6일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 7일째 되는 날에 쉬셨다. 이 사실에 근거해서 출20장에서는 창조때 하나님이 안식하심에 근거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안식하라고 명하신다.(물론 신명기에서는 출애굽 사상에 근거해서 안식일을 지킬 것을 말한다. 문자적으로 보면 안식일 준수의 근거가 다른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의미를 알고 보면 같은 말이다. 출애굽 사건은 결국 창조의 회복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출애굽 사건에서 의미하는 안식일 준수도 창조때 나타난 하나님의 안식하심의 회복을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왜 제 7일에 안식하라고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왜 안식일에 일을 쉬라고 말씀하셨는가?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때 그렇게 하셨기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알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목적이 창조의 회복인 것을 알수 있다. 창조 때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안식만 있고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안식하라는 명령이 없다. 안식일의 명령은 구체적으로 출애굽 사건 이후에 나온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출애굽 사건이 창조의 회복이기 때문에 우리는 창조때 구체적인 안식이라는 명령이 없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안식과 더불어 인간의 안식도 있었음을 짐작할수 있다(안식이 창조때는 명령이 될 수 없었고 도리어 축복이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제 7일에 쉬시고 또 그 안식에 인간을 동참시키시는가? (이것은 창조때 나타난 하나님 나라와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열쇠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태조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어떠한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산물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함이다. 즉 태초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공로나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다. 인간은 제 7일에 하나님과 같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들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때 나타난 안식의 의미이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함으로 사정이 달라지게 되었다. 인간은 이제 아무일도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지 않았다. 범죄한 인간은 이제 땀을 흘리고 노력함으로 안전과 행복을 보장받게 되었다.(창조때 전혀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었다. 예를들어 출생사건-범죄전-복,후-고통) 만일 누구든지 지금도 우리가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고 창조때 처럼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선물만을 고대한다면 그 사람은 타락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타락이후 인간의 노력이 과연 인간의 안전과 행복을 완전히 보장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만 오히려 역작용이 많다. 타락후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그러나 그 발전의 배후에 여러 가지의 부작용이 따랐던 것이 인류의 역사였다.(공해, 인간성의 황폐, 경쟁) 그래서 인류의 역사에는 발전에 따른 반작용도 많이 생겼고 그 결과 자연주의가 나오고 히피주의가 나왔다.
그런데 인간의 노력에 의한 발전을 중단하고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인간의 행복과 안전이 보장되는가? 그렇지 않다. 결국 인간의 완전한 안전과 행복은 이 땅에서의 어떠한 인간의 노력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그 나라는 창조 때와 같이 인간의 행위와 노력에 의해 움직여지는 나라가 아니라 인간이 쉬더라도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들을 풍성히 누리는 나라이다. 이 완전한 안식(쉼)이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지만 그것을 현재에 미리 맛보게 하는 장치가 바로 안식일인 것이다. 이와같이 안식일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말적 완전한 안식에 대한 소망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또한 안식일에 쉼의 의미는 현재적인 의미도 있다. 그것은 6일동안에 나타난 인간의 어떠한 최선의 노력도 완전한 안전과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에 7일에 쉼으로서 우리 인간의 모든 안전과 행복은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창조때의 모습을 잠시나마 회복하는 것과 같다. 창조 때는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산물들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안식일에 누리는 이 안식을 우리가 완전히 누릴수 없는 이유는 여전히 이 땅은 타락한 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 6일동안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6일동안 우리가 열심히 일한다 하더라도 안식일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수고와 노력이 인간의 완전한 안전과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고대하는 마음으로 일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또 우리의 의지만으로 되지 안되기 때문에 7일째 우리의 모든 수고를 중단함으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고대하는 것이다. 또 이 모든 수고의 완전한 안식이 저 영원한 나라에서 이루어짐을 소망하는 것이다. 이것이 안식일에 우리가 쉬어야하는 이유이다(안식년,희년-같은 의미)
질문/3(연구). 성경에서 왜 하나님 나라를 잔치집과 보화로 비유하고 있는가? 잔치집이 나타
내고자 하는 바는 먼저 풍요, 즉 부족함이 없음이다. 또한 부족함이 없음으로 기쁨과
안식이 있는 곳이다. 보화도 잔치집과 같이 부요함과 기쁨을 나타내는 비유이다.
이와같이 하나님 나라는 잔치집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안식과 풍요와
기쁨을 누리는 나라이다.
3.타락-하나님나라의 도전
2과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나라에 도전이 왔다. 그 도전자는 사탄이었다. 사탄은 인간을 끌어들여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도전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탄이 이 하나님 나라를 도전하게 되었는가? 또한 그 결과 이 땅에 죄가 어떻게 들어왔는가? 또한 사탄의 도전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들어오게된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공부해보자. 이로서 우리에게 왜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겠다.
3.1.사탄의 시험
사탄은 원래 하나님 밑에서 수종을 들던 천사였다. 그런데 사탄은 자기의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서 쫒겨나 사탄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사망의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성경구절) 이러한 사탄이 자기와 같은 운명으로 인간을 끌어들이려고 최초의 사람(아담과 하와)을 시험했다. 사탄은 최초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게 했다.(사탄의 말-하나님이 정녕 그 나무 실과를 따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것을 먹는 날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3)
그러면 사탄이 이렇게 시험한 근본적인 동기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된 자리(주로 섬기고, 복종하는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과 같이되게 하려는 동기였다. 사탄은 말하기를 "이것을 따먹는 날에는 선악을 아는데 하나님과 같이 될 수있다"고 사람을 유혹했다(창3:5). 하나님이 세상을 처음 창조하실 때 이 땅에 선악간에 판단하는 모든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었다.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선악과였다. 선악과는 에덴의 모든 선악간 판단의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을 드러내는 나무였다. 이로서 에덴이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나라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선악과를 따먹으라는 것은 인간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도전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사탄의 유혹이 최초의 사람들이 넘어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되었고, 태초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감추어지게 된 것이다(창3:22-24)
질문/1(묵상과 나눔).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인간과 사탄에
게서 어떻게 바뀌어지게 되었나?. 이것을 통해서 당신이 배울 수 있는 바가 무엇인
가?(하와-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을 까 하노라, 사탄-선악과를 따먹으면 결코 죽지 아
니하리라.)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조금 약화시켜 말하게될 때 사탄은 그것을 정반대
로 말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불순종하게 한다.
질문/2(정리). 사탄은 선악과를 통해 어떻게 인간을 시험했나?
A. 불순종하게 함
B. 선악을 분별하는데 하나님과 같이 되려함
3.2.죄의 본질
사탄의 시험에 인간이 넘어감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러면 사탄의 시험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들어오게된 죄란 무엇인가?
첫째로 죄란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하는 것이 죄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사탄은 그것을 따먹으라고 했다. 이에 최초의 사람들이 선악과를 따먹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다. 죄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둘째로 죄란 인간이 인간의 피조물된 자리(하나님을 주로 섬기로,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과 같이 되어 이 땅과 인생의 주인노릇 하려는 것이다. 태초에 인간은 하나님을 주로 섬기고 그를 의지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그런데 결국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본래의 인간의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과 같이 이 땅과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지금의 이 세상의 형편을 보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이 땅의 주인은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 인생의 주인도 자기 자신 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되어 자기 마음대로 세상과 인생을 움직여 나갈까라고 하는 것이 지금 인간들의 최대의 관심사이다.
셋째로 이제 인간은 이러한 죄로 말미암아 더 이상 하나님께 대하여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혼자의 힘으로 살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을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독립 선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은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제한된 자원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질문/1. 지금 이 세상의 문화에 나타난 이러한 죄의 현상들에 대해서 말해보시오.(신은경의 독 립선언, 유행가 가사-넌 할수 있어 너 혼자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어, 빽튜더 퓨처-시
간을 초월하는 모든 문제는 너자신의 의지에 달려있어)
질문/2. 지금 당신은 이러한 죄의 유혹을 받지 않는가?
1학년-하나님에 벗어나 한 번쯤 방황하고픈 생각이 든다. 세상 사람들과 같이 자기 마
음대로 사는 것이 참된 자유이고 자아를 찾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3.3.죄의 증상과 결과
이러한 사탄의 시험과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태초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가 깨어지게 되었다(창3:22-24). 이제 이 세상은 죄와 불의가 난무한 세상이 되었고,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세상이 되게 되었다. 이러한 죄의 궁극적인 결과는 사망 곧 지옥이다.(요계21:8) 지금의 인간과 세상은 어떻게 되든 궁극적으로는 사망(멸망)과 지옥(심판)에 처하게 된 것이다.(롬6:33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런데 이러한 죄의 궁극적인 결과 이전에 죄와 사망의 증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을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죽을 병인 암에 걸려있다고 생각해보자. 암세포가 죄의 본질로 생각해보자. 이 암세포(죄의 본질)의 궁극적인 결과는 죽음이다. 그런데 암세포가 죽음으로 가기까지 암과 죽음의 증상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예를들어 눈이 뛰어나온다든지, 혹이 나온다든지, 몸에 반점이 생긴다든지 하는 암과 죽음의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암의 증상들로 이 사람에게 암세포가 있으며, 또한 결국 이 사람은 죽게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죄가운데 처해 있고 궁극적으로 사망(지옥)가운데 처하게 되는데, 이러한 죄와 사망의 증상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죄와 사망의 증상들로 세상 사람들이 죄 가운데 있고, 또한 궁극적으로 사망(지옥)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인간들의 죄와 사망의 증상들이 무엇인가? 죄와 사망의 증상은 태초에 나타난 바른 관계들의 단절(왜곡)으로 나타난다.
첫째 우리가 볼 수 있는 죄와 사망의 증상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단절이다.
태초의 인간은 하나님을 주로 섬기고 그를 의지하고 순종하고(피조물),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하나님의 형상), 또한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는 인간(생령)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함으로 이제 인간들은 하나님과의 바른관계(주된관계, 의지하고 순종하는 관계, 교통하며 교제하는 관계)가 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는 존재가 되게 되었다.(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또한 하나님으로 더불어 기뻐하며 안식을 누리는 관계에서 이제 하나님께 대하여 반역하고 항변하는 존재가 되었다(창4: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또한 이제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제한된 자원으로 살아가보려고 하게 되었다
질문/.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제한된 자원으로 살아가보려고 할 때 생기게되 는 현상이 어떠한가? 지배와 착취의 현상, 결핍으로 말미암은 고난의 현상, 구원에 있
어서도 인간의 제한된 힘으로 구원을 얻어보려고 함, 기도하지 않는 현상
둘째로 인간에게 나타난 죄와 사망의 증상은 대인 관계의 단절(왜곡)이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었을 때 사람과의 관계도 하나된 관계였다. 최초에 나타난 아담과 하와는 한 몸의 관계였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함으로 부부간의 한몸의 관계도 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아담이 처음에 그의 아내를 보고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했는데(창3:22), 범죄한 후에는 "이 여자 때문에 선악과를 따억게 되었다"고 죄에 대한 책임을 여자에게 돌렸다(창3:12). 창4장에 보면 형제의 관계도 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후에 가인은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내가 아우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했다(창4:9). .또한 창6장에 보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관계에 정욕과 폭력이 개입되게 되었다(창6:2.4).
질문/. 지금 우리 세대에 나타난 대인 관계의 왜곡(단절)은 어떤 것이 있는가?
개인주의 이기주의 사람의 상품화 도구화 비인격주의 인간소외와 착취의 현상
셋째로 대물관계의 왜곡이다. 최초의 인간은 만물에 대해서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는 관계였다. 그런데 이제 인간들은 물질(돈)에 메이는 존재가 되게되었고, 땅은 인간들에게 고통을 주는 땅이 되게 되었다.(창3:17)
질문/. 지금 우리 세대에 나타난 대물관계의 왜곡은 어떤 것이 있는가? 물신주의
결론적으로 말하면 죄로 말미암은 모든 악과 고난의 상태가 죄와 사망의 증상으로 볼수 있다. 이 땅에 끊임없는 전쟁과 불의, 불안과 질병과 걱정와 소외 등의 현상이 있다. 이렇게 인간들이 죄로 말미암아 참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현상들이 바로 죄와 사망의 증상인 것이다.
그런데 창6장 5절에 보면 이러한 죄가 세상에 관영하여 있고, 또한 그 마음의 생각의 계획하는 바가 악하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죄가 세상에 관영하다는 말은 이러한 죄의 범위에 있어서 온 세상에 퍼져 있다는 말이다(사회의 구조적이고 환경적인 악) 또한 그 마음의 생각의 계획하는 바가 항상 악하다는 것은 이러한 죄가 인간의 내부속에 있다는 것이다(죄의 내향성).
질문/. 이러한 죄의 현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어떠한가?(창6:6,7,롬1:18)
지금의 세상가운데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져 있다고 한다.
질문/. 이상의 사실들을 통해서 볼 때 구원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4.구원-하나님나라의 회복
4.1.구원이란 무엇인가?
지난 과에서 죄란 무엇인가를 공부했다. 죄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 죄의 최종적 결과는 사망(지옥)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죄와 사망의 증상은 대신, 대인, 대물관계의 단절(왜곡)이라고 말했다. 또한 죄로 말미암은 모든 결핍과 고난의 상태라고 말했다. 이렇게 죄와 죄의 결과와 증상에 대해서 우리가 먼저 언급한 이유는 우리에게 왜 구원이 필요한가를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비정상적인 죄 가운데 있고, 또 그 죄의 결과들이 어떠한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필요성을 못느끼고 있다. 그래서 지금의 인간의 상태를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인간이 이렇게 죄로 말미암은 사망과 고난의 상태에 있기에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죄의 상태를 이해함으로서 구원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이러한 죄와 그 죄의 결과들에서 구출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처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 할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인 것이다. 그러면 처음 세상을 창조할 때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인가?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구원이란 인간의 죄로 깨어졌던 하나님 나라가 다시 회복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의미이다. 복음이란 죄로 말미암아 깨어졌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여지게 되는 것이다.(막1:14,15)
질문/.(정리와 나눔) 죄에 대한 정의와 그와 반대되는 개념에서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당
신은 이 구원을 얼마나 누리고 있는가?.
구원이란 무엇인가? 첫째로 구원이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받는 것이다.둘째로 구원이란 죄와 사망의 증상들에서 해방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창조때의 바른 관계들이 회복되는 것이다. 먼저는 죄로 말미암아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또한 죄로 말미암아 분리된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또한 만물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다. 또한 죄로 말미암은 모든 악과 고난의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다.
4.2.복음에 관한 최초의 약속-창3:15
앞에서 우리는 구원이란 태초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이라고 했다. 또 그 나라안에 들어감이 구원받음이라고 했다. 그러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깨어졌던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회복되는가? 이것을 설명해 주는 것이 창3:15이다. 창3:15절은 일명 최초의 복음에 관한 약속이다. 왜 이것이 최초의 복음에 관한 약속인가? 여기서 말하는 여자의 후손은 누구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뱀의 후손은 사탄을 가리킨다.
여기서 뱀의 후손(사탄,요계12장)과 여자의 후손(예수그리스도)이 서로 싸우는데,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난을 준다는 의미이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에게 치명타를 입히는 것이다(사탄의 권세를 격파) 그러면 여기서 왜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 받음으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릴 것이라고 약속하는가? 무엇을 이루려고 이런 싸움이 벌어지는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이다. 창조때 하나님 나라를 도전하고 부순 자는 사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사탄의 권세를 부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음으로 사탄의 권세를 부수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볼 것은 예수님이 사탄에게 고난받으시는 것(발꿈치를 상함)과 사탄의 권세를 깨뜨림(뱀의 머리를 상하게 함)은 어떤 관계가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고난받음과 원수를 이김은 정반대의 개념이다. 그런데 창3:15절에서는 이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하나 하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살펴볼 것은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난을 준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가리킨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것을 가리킨다(사53,막10:45,요1:35-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다. 또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다고 함은 죄의 결과인 사망(지옥)의 문제도 해결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받으심은 부끄러운 것이거나 실패의 상징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심으로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심이 어떻게 사탄의 권세(머리)를 깨뜨리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키는 것이 되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의 범죄 이후 사탄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왕노릇 했는가 이해해야 한다. 창조때 이 땅은 하나님의 의와 공평으로 다스려지는 하나님 나라였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이후 이 땅은 사탄이 죄와 사망의 권세로 왕노릇하는 곳이 되었다(창6). 이것이 이 땅에 대한 사탄의 통치방식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심으로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다. 이렇게 고난 받으심으로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심이 결국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주권)를 임하게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질문/1(정리). 고전15장에서는 무엇이 복음이라고 하는가? 막1:14,15절에서는 무엇을 복음이
라 하는가?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가?
질문/2(연구). 창3:15에서 왜 예수 그리스도를 여자의 후손이라고 칭하는가?
여자의 후손이란 남자의 후손이 아닌 자를 가리킨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남자의 후손이다.그러므로 여자의 후손이란 남자의 후손이 아닌, 인간의 후손이 아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온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자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은 엄격히 말하면 하나님의 친아들이 아니라 양자됨을 의미한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탄의 권세를 부수고 하나님 나라(구원)를 이룰자는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아무리 문선명이 메시야라하고 정명석이 메시야라 하더라도 그들은 여자의 후손이 아니다.그들은 모두 남자의 후손들이다.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친아들이 될 수도 없으며 우리의 구원자도 될 수 없다.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여자의 후손으로서 고난받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사탄의 권세를 부수고 하나님 나라를 가져다줄 수 있는 분이시다.
4.3.구원(복음)과 하나님나라
초대교회 당시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했는데 그들이 증거한 복음의 핵심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려주셔서 이 땅의 주요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었다 (행2:36). 우리는 대개 예수의 죽으심으로 예수가 우리의 그리스도(죄에서 구원해주시는 메시야)되심만을 강조 할 때가 많다(단순한 복음주의). 그러나 복음은 그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말한다. 복음이란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는 그리스도가 되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의 주가 되시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 바울이 왜 예수를 핍박했는가? 그것은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사도들이 주요 그리스도라고 선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대인이었던 바울이 보기에 하나님께 대한 신성모독이었다. 신명기서에 보면 누구든지 나무에 메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예수가 나무에 달려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인데, 사도들이 그 예수를 주요 그리스도라고 하니 이것은 분명 하나님께 대한 모독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를 핍박했던 바울이 언제 깨어지게 되었나? 그것은 다메섹도상에서였다. 다메섹도상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중에 계신 예수를 보았다(행9:1-18.행22:6-21.26:12-18). 다메섹에서 본 예수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계신 분이시고 또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우편(이 땅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실행하는 자리) 계신 분이라는 것을 바울이 직접 보게 된 것이다. 이 다메섹의 체험을 통해서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다메섹사건을 통해서 바울은 결론을 짖기를 예수의 십자가 지심은 실패와 저주의 상징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이고 사탄의 권세를 깨드리기위한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의 권세를 이기셔서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의 핵심인 것이다. 단순한 복음주의에서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다는 것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개혁주의에서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할뿐 아니라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의 주이심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예수의 그리스도되심만을 강조하고 예수의 주되심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았다. 또한 우리는 구원이란 우리의 죄가 사해져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신분적인 차원에서만 구원을 적용시켜왔다. 또한 구원받았다는 것이 단순히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출석하기만 하고, 또 죽으면 천당가는 의미로만 생각해 왔었다. 이와같이 우리는 구원 받았다라고 하지만 더 풍성한 구원의 의미를 누리고 있지 못하다(히6:1-2). 이렇게 되다보니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과 세상 속에서의 우리의 삶이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교회가 1000만의 성도를 자랑하면서도 이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도 이런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복음이 무엇이며 구원이 무엇인가? 복음이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것이고, 구원이란 내가 그 나라안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이 세상나라 속에 살지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로 말미암은 자기주장과 결핍가운데 살지말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속에서 하나님과 화평과 충만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한다.(롬5:1) 이것을 일명 하나님 주권의 개인적 적용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이 단순히 개인적인데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더 넓은 범위에서도 적용이 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 구원받은 개인의 주님만이 아니라, 교회와 역사와 세계와 우주의 주이심을 인정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도 하나님 중심의 학문이 되어야 한다. 장래의 직업을 선택하고 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한다. 또한 정치가 인간의 놀음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여전히 정치와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적인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야하는 것이다. 대학문화가 이데올로기가 중심을 이루고, 전통문화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그러나 우리는 대학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며, 이 대학의 문화가 주님이심을 믿고 고백한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여 드리는 삶이 바로 복음에 합당한 삶이며 구원받은 자의 삶이 되는 것이다.
질문/1.(묵상과 나눔) 이상의 사실들을 통해서 당신은 그동안 구원받았다는 의미를 어떤 의미로만 생각했는가? 당신이 더 풍성하게 누려나가야 할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 나누어 보시오.
질문/2.(묵상과 나눔)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당신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있으며,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누리고 있는가?(롬5:1,엡3:)
이웃과의 관계성 속에서-교회-하나됨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풍서을 누림,믿지 않는 이웃
세상문화 속에서-세속문화속의 변혁-동화,도피가 아니라 변혁의 모습
질문/2.(연구) S.F.C.의 영원한 표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위에"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미쳐야할 범위가 어디인가? 복음주의와 개혁주의의 차이를 말하시오. 강영안교수의 '개혁주 의적 입장에서 본 복음화'(S.F.C.간행)을 통하여 복음화의 의미를 말하시오.
질문/3.(연구) 하나님 나라가 왔는데 여전히 이 세상에는 죄악이 관영하는가?
(종더 정리할 것)
5.노아언약과 종말
5.1.노아언약의 배경
여기서 하나님께서 왜 노아 때의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는가? 그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죄가 노아시대 때 죄가 모든 범위에 있어서 퍼졌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는, 사람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기 때문이이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죄의 내향적인 성격을 말한다. 결국 이러한 노아시대의 죄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모든 만물과 사람들을 물로써 심판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죄로 관영한 노아 시대를 물로 심판하시겠다고 하셨는가? 그리고 물로 심판하셨는가(전세계적 심판)? 그것은 첫째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 의도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공의대로 다스려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주인이신 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의도를 저버리고 죄로 관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셔서 이 땅의 죄를 결코 용납하지 못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로 관영한 노아시대의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노아시대의 심판은 단순히 과거에 지나갔던 한 사건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사건은 노아시대와 같이 불의한 지금의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본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본심은 심판과 진노이다. 하나님은 노아시대와 같이 이 세상에 대해서도 진노하고 계시는 것이다(롬1:18). 이것이 복음의 출발이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의 출발을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서만 시작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 노아시대의 심판과 로마서 1장 18-32절에 나타난 말씀을 통해서 보면 복음의 출발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설명이 되어져야 한다. 또한 이 노아시대의 심판은 장차 이 인류가 심판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이다.
여기서 보면 홍수가 끝난 후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홍수가 끝난 후 이 세상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죄가 물로 완전히 씻기어졌기 때문인가? 그것은 아니다. 창세기 8장 21절 중반절을 보면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세상을 심판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세상을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보면 홍수 후에도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은 홍수 전에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항상 악하였기 때문에 물로 세상을 심판했다. 그런데 홍수 후에도 여전히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한데, 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했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는 또한 현대인의 물음이기도 하다. 그것은 지금의 세상이 노아홍수 때보다도 더 악한데, 왜 지금의 세상에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없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을 특히 서구인들은 세계 1,2차 대전을 겪으면서 하게 되었다. 왜 나치의 독일이 무고한 유대인들을 독가스실로 보내면서 죽이는데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가? 왜 세계대전의 가해국이었던 일본과 독일이 20세기 말에 와서는 오히려 제일 잘사는 나라가 되었는가? 그 외에도 우리는 지금의 이 세상이 노아시대보다 더 악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상이 유지가 되어지고 발전이 되어짐을 보고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이에 대해 두 가지의 설명이 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죄를 묵인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어떤 때는 공의로 죄를 판단하시지만, 어떤 때는 죄를 그냥 묵인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이렇게 홍수 후에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하지 않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죄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하지 아니하시고, 참지 못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구약성경을 한 번 보기 바란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호렙산에 올라갔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만일 이 산에 올라오면 "내가 너희를 돌격하여 죽일 것이라"고 하신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들여다보다가 죽은 사건이 나온다. 법궤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다. 그런데 그것을 인간들이 함부로 들여다보다 죽은 것이다(삼상6:19).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잘못 오해하고 있다. 우리는 요한복음 3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의 죄를 묵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만일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죄를 묵인하시고 넘어가시고 덮어 주시는 사랑이라고 한다면, 이 말씀은 이렇게 바뀌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세상의 사람들이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덮어 주시느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독생자를 죽이시므로 세상에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죽이셔야만 했는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죄를 용납하시거나 묵인할 수 없다. 그러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죄에 대한 심판을 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죄에 대한 댓가를 하나님 자신이 지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자가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이면에는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이 깔려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죄인의 모습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그 의를 힘입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히10:19).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홍수 후에 죄를 묵인하셨기 때문에 심판을 내리시지 아니하셨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철저한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죄를 결코 용납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반드시 죄를 심판하셔야 하는 분이시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신 것은 인정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홍수 후에 여전히 세상에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노아 때와 같은 심판을 하지 않으시는가(여기서 노아때와 같은 심판이라는 것은 전세계적인 대심판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도 이 땅에 대한 국지적 심판은 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공의로우신 분인데, 이제는 심판을 베풀만한 힘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께서는 뒷 방 늙은이와 같다는 것이다. 손자가 겁없이 할아버지 수염을 당긴다. 할아버지는 분명히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을 안다. 손자가 수염 당기는 죄를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네 이놈! 누가 할아버지 수염을 당기느냐!"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무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할아버지는 분명히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고, 그 죄를 용납하지 않지만 그에게 벌을 내릴 기운이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홍수 후에도 여전히 공의로우신 분이시지만, 그는 죄를 징벌할 힘이 없다. 그는 지금 늙었고 힘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자유주의 신학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는 졸고 있거나 죽었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과연 그런 분이신가? 만일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면 이 지구와 천체는 어떻게 유지되고 있겠는가? 그렇게 말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또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세계에는 함께 하시고 역사 하시지만 인간들의 세계와 역사에는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도 잘못된 말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무엇을 중심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비인격적인 만물이 아니라, 인격적인 사람을 중심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중심으로 역사하시지 결코 이 세상 만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만물 가운데서는 역사하시지만, 인간과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는 역사하지 않는다는 말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인간과 인간의 역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다. 또한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다.
그러면 왜 홍수 후에도 인류가 여전히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는가?
그것은 바로 노아와 세우신 언약 때문이다(창9:11).
하나님께서는 홍수를 일으키실 때부터 미리 말씀하시기를 홍수를 일으키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기 위함이라고 하셨다(창6:18). 그래서 홍수 후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제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언약하신 것이다. 언약은 마치 임금님 면사포와 같다. 옛날에 백성들이 임금님의 얼굴을 감히 보지 못했다. 그래서 임금님은 면사포를 가리고 백성들과 만났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바로 보신다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당장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면사포에 "나는 다시는 물로써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써 놓고 세상을 대하시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그대로 보신다면 이 세상은 언제든지 노아시대와 같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 범죄한 이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이제 더 이상의 접촉점이 없게 되었다. 만일 인간과 하나님이 바로 접촉한다면 하나님은 심판하실 수밖에 없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범죄 이후에 이 언약이라는 양식을 통해서만 인간과 접촉하시고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인간이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것은 우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범죄한 이후에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있다. 그래서 말하기를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고 저런 분이시라고 자신의 종교적 경험을 가지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종교적인 경험으로 만들어낸 하나님에 불과하다. 언약을 통해서 계시된 참 하나님과 인간의 종교적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낸 하나님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종교적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낸 하나님은 인간의 탐욕을 채워주시기 위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다. 그러나 언약을 통해서 계시된 참 하나님은 인간의 기호에 맞추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인간이 맞추도록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가 만들어낸 종교의 거짓 하나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일 수밖에 없고, 그 언약적 양식을 통해서만 바른 신앙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하나님은 본성보다 언약을 더 앞세우신다.).
노아 언약은 이와 같이 인간이 죄악 됨에도 불구하고 노아 때와 같은 심판이 당장 내려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런데 이렇게 불의한 세상에 대해 당장 심판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불의한 이 세상이 창조 때와 같이 그대로 보존되는 것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그래서 성경신학자들은 이 노아 언약을 보존의 언약이라고 한다(벧후3:7). 또한 이 노아 언약은 인간의 생명이 죄악 됨에도 불구하고 보존되는 것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창세기 5장에 나타난 인간의 족보를 보면 계속 "죽었더라 죽었더라"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범죄한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 10장에 노아언약 후의 인간의 족보를 보면 계속 "낳았더라, 낳았더라"고 하면서 생명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노아언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생명이 계속 보존됨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우리에게 육신의 생명이 주어지게 된 것도 우리가 죄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도 노아언약으로 말미암은 일반은총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또한 마태복음에 보면 '하나님께서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해와 비(자연적인 은총)를 내려 주신다'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도 노아언약의 은혜로 설명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자연적인 모든 은총도 인간과 만물이 죄가 없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노아언약으로 말미암은 은혜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노아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교의학에서는 일반은총(자연은총)이라 부른다.
5.2.노아언약과 종말사상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것은 만일 이 노아언약이 시간적으로 영원한 언약이라면,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을 믿으며 의롭게 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과연 노아언약이 시간적으로 영원한 언약인지를 살펴보자.벧후3:6-7
여기서 보면 노아언약은 시간적인 한계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하늘과 땅을 보존하여 두시는 것이다. 노아언약은 시간적으로 이 세대가 보존되어지는 것만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노아언약은 영원한 세상까지 이어지는 언약은 아닌 것이다. 그러면 노아언약 뒤에 무슨 언약이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시간적으로도 영원한 세상까지를 이어주는 구원의 언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노아언약은 시간적인 한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능상의 한계도 있다. 그것은 이 노아언약으로는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하나님 나라)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하나님나라)을 가리우게 되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노아언약을 통한 자연적인 은총들을 내려줌으로서 영광을 받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자연적인 은총을 입은 인간들이 과연 하나님께 바르게 영광을 돌리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창11장의 바벨탑의 사건이 이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인간들에게 노아언약을 통해서 자연적인 은총(생육,번성 등)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하는 짓은 하나님께 반역하여 바벨탑을 쌓았던 것이다. 바벨탑은 노아언약의 한계를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인류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노아언약으로 말미암은 자연적인 은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없다.또한 이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로마서 1장이다. 로마서 1장 18절에 왜 하나님의 진노가 이 세상 위에 머물러져 있다고 하는가? 그것은 1장 19절과 20절에 보면 "하나님을 알만한 것과 하나님의 자연적인 은총들이 사람들에게 임하여졌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러한 자연적인 은총들을 입은 인간들은 어떻게 하는가?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치도 않고 영광을 돌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선물들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섬긴다. 더 나아가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께 계속 죄를 지으면서도 잘했다 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한다. 이것이 노아언약으로 말미암은 자연적인 은총을 입은 인간들의 모습이다.이러한 인간들의 모습을 예로 들어보겠다(롬1:18-32).
옛날에 우리 집에 바퀴벌레가 많았다. 그런데 그 바퀴벌레들을 한 마리씩 죽이려고 하니까 귀여운 개미까지 죽게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했다. 바퀴벌레들을 유인하기 위해서 습기 있는 보자기를 준비했다. 그 보자기 위에 바퀴벌레들이 좋아하는 온갖 먹이를 넣어 두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퀴벌레들이 좋아하는 곳에 두었다. 바퀴벌레들이 그것을 보고 몰려 들었다. 나는 먹이가 떨어지면 계속 먹이를 공급했다. 그리고 추우면 불을 지폈다. 그런데 이 바퀴벌레들이 내게 큰 은혜를 입고도, 나로 하여금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치도 않았다. 또한 그들은 나보다도 내가 그들에게 준 먹이들을 더 경배하고 섬겼다. 그리고 또한 그 바퀴벌레들은 나를 마음에 두기 싫어했다. 그런데도 나는 끝장이 내지 않고 계속해서 그들에게 먹이를 공급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 보자기의 주인은 없다. 이 보자기는 우리들의 것이다."하고 나를 조롱했다. 그런데 이 바퀴벌레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이 바퀴벌레들에게 보자기를 제공하고, 바퀴벌레들의 죄악 됨에도 불구하고 계속 먹이를 공급하는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바퀴벌레들이 하는 짓을 좋아하기 때문인가? 아니다. 바퀴벌레들에게 계속 먹이를 주는 것은 나중에 한번에 그들을 불살라 버리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것은 노아언약의 일반은총적 은혜를 입은 이 세상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지금의 이 세상사람들은 노아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일반은총적인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반역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와같이 노아언약이 시간적인 면과 기능적인 면에 있어서 위와 같은 한계가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언약을 베풀어주신 것이다. 즉 노아언약으로는 저 영원한 세상도 감당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12장부터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언약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그리고 구원의 언약을 받은 백성들로 통하여 이스라엘(구약교회)을 세우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노아언약은 구원의 언약의 토대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노아언약이 없이는 전 인류가 멸망당하기 때문에 구원의 언약을 이룰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언약을 통하여 이 세상을 보존케 하심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구원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종말은 구원의 언약이 택하신 자들에게 모두 증거 되어지고 이루어지면 오는 것이다(마24:14).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노아의 언약을 통해서 유지시키시고 보존시키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구원의 언약을 베풀기 위해서이다.
6.족장들의 언약(구원의언약)과 하나님나라
6..1.구원의 언약
6.2..땅,백성,후손
7.다윗언약과 하나님나라
8.선지자들과 하나님나라
9.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나라
10.하나님나라와 종말
부록-이 땅의 종말은 언제 오는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와 장차올 하나님나라의 연속성
종말적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
강의 : 김 세윤 敎授 (總神大 神大院 敎授)
일반적으로 성경을 대하는 자세에는 미시적인 방법과 거시적인 방법이 있다. 일반적으로 성서유니온에서 사역하고 있는 성경묵상은 성경을 자세히 보는 미시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만으로 공부한다면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격이 된다. 이런 약점을 보충하기 위하여 가끔은 성경 전체의 흐름을 한 눈에 살펴보는 기회가 필요하다. 이러한 방법이 거시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다. 두 가지 방법은 상호보완적이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하지만 가끔씩 전문가(신학자)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필요하다.
A. 문제제기
1) 복음서 : 예수님의 가르침
마가는 마가복음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고 나서 예수가 선포한 복음을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아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 아는 것으로 매우 중요하다. 마가복음 1: 14 - 15을 보면은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公生涯를 하나님 나라 선포로 시작했다.
막 1 : 15 "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2) 서신서 : 바울(사도)의 가르침
그런데 서신서중 고린도전서 15 : 1 - 5을 찾아보면은 바울이 복음에 대해서 설명한 것이 나와 있다. 특히 3절 후반부에서 5절 전반까지 4개의 小節(영어에서의 that절)로 福音을 說明하고 있는데 이를 要略하면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復活", 즉 " 그리스도의 十字架 "가 된다.
예수님이 선포한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이다.
우리는 하나의 문제점에서 출발하는데 그 문제는 이러한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 예수의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이다. 그런데 사도들은 고전 15장 1- 5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선포했다. 고전 15장 1절에서 3절 중반까지가 서문이고 3절 후반부부터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 요약되어 있다. 내가 전한 복음을 꼭 알아야 하겠다고 하면서 그 복음은 바울이 이미 선포했던 복음이고 고린도 교인들이 그것을 받아서 이미 구원을 얻은 복음이다. 그런데 바울이 걱정이 되었다. 과연 처음 받은 복음위에 견고히 서 있는지 자기가 전한 복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 복음은 자신도 먼저 사도들로부터 받아서 고린도인들에게 전했다. 받고 전했다는 말은 유대 랍비들이 가르침을 선생으로부터 받아서 전승해 주는 전문용어이다. 그 내용은 모두 네 개의 節로 구성되어 있다.
고전 15 : 3 - 5
3절 :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
받은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초대교회부터 랍비들의 가르침의 전형이다. 받은 것 을 그대로 전수하는 것이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핵심)
4절 :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추가설명)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핵심)
5절 이후 (부활증거) 게바에게 보이시고, 열두 제자에게, 500여 형제, 야고보, 바 울에게 보이심 (추가설명)
그렇다면 1) 죽으심(十字架)의 意味와 2) 부활의 意味는 무엇인가 ?
그 다음에 5절 전반부에 베드로에게 보여졌다는 것 이 네 文章이 우리말 성경에는 절의 구분이 되어 있지 않지만 원문 성경과 영어 성경에는 절들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다가 바울은 부활을 부인하는 고린도인들에게 부활의 眞理를 확신시키기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난 씨리즈를 이야기하고 있다. 500여 형제에게 나타나고, 그 중에 일부는 죽고 태반이나 지금까지 살아 있고, 야고보(주님의 동생)에게 나타나고, 모든 使徒들에게 나타나고 마지막에 滿朔되지 못한 바울에게도 나타나셨다. 지금 이 부분들은 바울이 다 덧붙이는 것이다. 앞의 네개의 절들의 내용이 복음이다. 고린도전서 15장 11절을 보자
고전 15:11 "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
그러므로 나(바울)나 저희(다른 사도들)나 다함께 이 복음을 선포하고 세계의 모든 교회가 이 복음을 믿는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도 이 복음을 믿는다고 한다. 이 복음을 자세히 보면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성경대로 죽었다는 것과 그가 사흘만에 일으켜졌다는 것 이 두 문장 중심으로 되어 있다. 가운데 있는 문장들은 앞서가는 문장의 사실을 부가적 기능을 한다. 거기 성경대로라는 문장이 붙어 있다. 그리스도가 성경대로(according to scripture) 죽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것이 우리 죄를 해결하고 종말에 나타난 메시야 구원자의 행위였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선포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했는데,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의 메시지의 중심은 書信書와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다. 그런데 공관복음서를 읽다가 서신서를 읽으면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직접적으로는 거의 안 나온다. 나오더라도 가끔 나온다. 그 대신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선포의 중심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 초두에서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겠다고 자기 복음을 십자가의 道라고 한다. 그것이 복음이고 자기는 그것만 선포하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메시지와 사도들의 메시지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전하는 것일까 ? 이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 일부 自由主義 神學者들은 이 차이점에 대하여 예수님의 복음과 사도들의 복음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 ? 사도들의 메시지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약에 근거하고 있다. 사도들의 서신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약을 상당히 많이 인용하고 있다. 미리 結論부터 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인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고, 사도들의 메시지는 그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졌는가에 메시지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구속사건을 통하여(근거)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축복(결과)이 주어진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어떻게 제자(사도)들은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했는가 ? 하나님 나라 선포의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네 가지 전제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대한 구약에서의 전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B. 4 가지 전제들
1. 創造思想(主) - 창세기 1:1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나온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시기에 하나님만이 主人이시고 王이시다. 본래 히브리어에는 추상명사가 발달되지 않아서 우주(Cosmos)를 지칭하는 말을 그냥 하늘과 땅(天地)이라는 말로 썼다. 천지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지만 하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시고 땅은 하나님의 대리자인 사람이 거하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창1:26,27)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 육체나 영혼등 어느 일부분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아니 사람의 외모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인간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이 온 우주의 왕이시고,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대신 다스리는 副王(Vice-king)으로 세우신 것이다.
2, 타락 -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시고 인간으로 땅에서 통치를 대신하게 하신다. 그러나 사단이 인간을 유혹하여 하나님에 대해 대항하게 하여 인간은 사단의 종이 되고 사단이 땅에서 주인 노릇을 하게 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스스로는 피조물로서 제한성(결핍성)을 지니는데 이로 인하여 여러 가지 고통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증상이다. 로마서 6:23을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삯'이란 단어는 로마시대 용병들에게 주는 품삵(월급)을 뜻한다. 즉 사단이 우리를 부려먹어 죄를 짓게 하고 그 삯으로 죽음을 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며 타락사상이다. 나무의 예를 들어보겠다. 만약 나무가 그 생명의 근원인 땅으로부터 뽑힘을 당했다면 그 나무는 죽은 것일까 ? 산 것일까 ? 물론 산 것이다. 왜냐하면 일정한 기간 물이나 양분의 공급이 없더라도 나무안에 비축된 물과 양분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그 나무는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물,양분의 계속적인 공급이 없으면 결국 죽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도 성경은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성에서 분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살아있다'고 일컫어 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한한 공급이 없어지면 인간은 결국 죽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었다'고 한다. 罪란 바로 하나님의 主人되심을 否認하고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존재하려는 것이다. 人間은 하나님을 의존하고 그분의 보호와 모든 능력과 자원을 제공받으며 살도록 지음 받았는데, 오히려 인간은 사탄의 꾀임을 받아서 하나님처럼 되어 스스로 존재하려고 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존재하려는 것이 바로 罪의 本質이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무한한 가능성을 무시하고 內的인 가능성을 찾은 것이다. 인간 스스로 자기能力과 智慧를 개발하여 하나님을 떠나서 맞게 된 결핍이나 고난을 해결해 나갈려고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人本主義 운동이다. 그 결과는 해결이 아니라 죽음의 길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찾아오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대로 풍성함이 아니라 오히려 결핍이다. 즉 부족함이다. 이 결핍을 극복하려고 인간은 무한한 자기의 능력과 지혜를 스스로 개발하여 왔다. 그 방법으로 해결되는 것 같으나 실상은 안된다. 결핍을 극복하려고 인간의 능력을 개발하여 科學이나 文明을 발달시켜 왔으나 그 결과는 인간에게 더 큰 죽음의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인간성의 황폐화로 인하여 이웃사이의 관계가 삭막해지고 인심이 각박해졌다. 과학이 발달해서 더 살기 좋은 樂園을 이룬 것 같았지만 반대로 더 많은 어려움과 공해를 불러 일으켜 왔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모습이 이러한 것이다. 11, 12세기에 일어난 르네상스운동 즉 문예부흥운동은 로마-그리스시대의 찬란했던 문명을 복구하려한 운동인데, 이 운동은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스스로 무엇인가 해보려고 하는 대표적인 人本主義 운동이다. 인간은 결핍을 극복해보려고 지혜를 발휘하면 할수록 더 어려운 지경에 빠지고 더 큰 타락을 가져왔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탕자가 아버지의 집(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떠난 결과가 무엇인가 ? 그것은 인간성의 황폐와 결핍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 탕자가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회복과 부요함이 그에게 주어졌다. 아버지께서 잔치를 베풀어 주셨다. 잔치는 바로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에게 풍성한 자원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결핍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게 돌아가야만 부요함(풍요)이 있다는 것이다.
3. 救援 - 세번째로 言約思想이 있다. 언약은 곧 선택으로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다시 한번 찾아오셔서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맺음이다. 언약이란 타락한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방법이다. 하나님이 원래 王인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탄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떠나 자기 스스로 존재하려고 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행복하고 혼자 부요함을 누리면서 잘 살 줄을 알았는데 그 결과는 반대였다. 빈곤함과 결핍이었다. 인간이 결핍을 느끼기 때문에 그 결핍을 보충하려고 투쟁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여 내 욕심을 채우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결핍은 그러한 방법으로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언약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다시 너희들의 왕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이다. 타락전의 관계로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이다. " 나는 너희의 하나님(王)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 는 이 말이 바로 언약의 핵심문구이다.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내가 친히 너희의 하나님 즉 王이 되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과 관계를 맺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方法이 바로 인간과 언약을 맺는 것이다.
4. 終末思想 - 마지막으로 종말 사상이 구약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구원사역을 하셔서 종말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先知者들을 통하여 예고하셨다. 그러므로 그 구원은 창조주 하나님과 다시 한번 올바로 연결되어서 즉 탕자가 죽음의 상태에서 아버지께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상속자로 회복이 되어서 아버지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고 아버지의 부요한 잔치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나무로 말하면 타락한 인간이 다시 한번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뿌리박아 무한한 부요함을 덧입어서 사는 삶을 永生이라고 한다. 영생이란 영원한 삶이란 말이 아니고 오는 세상의 삶이란 말이다. 하나님 나라의 삶이다. 하나님의 영원에 참여하기 때문에 영원한 삶이라고도 하지만 죽음이 완전히 극복된 고난이 없는 삶을 의미한다. 하나님적인 삶이다. 하나님의 全知하심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全能하심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영원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에 참여하는 삶이므로 고난이 없고, 결핍이 없는 그것이 바로 영생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같이 됨 그것이 긍극적인 의미로 구원이다. 그런데 하나님같이 됨이 인간 스스로 내재의 가능성 속에서 찾는 아담에 게 있었던 것같은 인본주의의 그 환상에 인간이 늘 젖어 있다. 인간이 만물의 근원인 것 같고 인간의 내재의 자원, 지혜를 개발하고 하면 인간이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죽음으로 가게 한다. 반면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 속에서 살면 하나님 나라에 살면 하나님의 부요함을 덧입어서 하나님 같이 된다. 神的인 삶이다. 이것이 바로 영생이고 종말에 약속된 구원이다.
C. 하나님 나라의 전파는 바로 舊約에서 약속한 그 구원이 임박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네 가지 구약적 전제를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인간이 죄와 죽음이 왕노릇하는 사단의 통치아래 있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구원을 약속하시고 그들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려고 했는데 바로 그 구원이 임박했다고 하는 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어떠한 것일까 ?
그것이 바로 막 1:15의 내용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바로 임박했다고 했다.
"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1). 구약은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올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박했음을 우리에게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주기도문'이란 말은 틀린 말이다)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고 하고 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또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래서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는 미래에 올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유대 묵시문학가들같이 땅의 물질적인 유비를 써 가지고 현란한 그림을 그리는 것을 거부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며 그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말하면 죄의 용서를 의미하는 것이며 구원을 받는 것이며 바로 이런 원칙적인 신학언어를 주로 쓰셨다. 물론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역동적인 통치의 개념이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어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땅위에서도 하나님은 마땅히 王으로 主로 군림하셔야 하나, 이 땅에서는 그의 왕권을 찬탈한 사단과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인간들에 의해 그의 왕권이 무시되고 그의 "뜻"이 거스려지고 있다. 고로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 땅위에 사단의 세력을 꺾고 그의 통치를 세워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땅위에서 그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도록 열망하고 빌라고 가르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은 주로 역동적 뉘앙스를 가진 것으로 하나님께서 왕으로서의 다스리심을 의미한다.
2) 하나님 나라를 비유(PARABLES)로 가르치셨다 --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가르치셨는데, 여러 비유 중에서 잔치비유를 즐겨서 가르치셨다. 구원을 큰 잔치로 비유한데서 온 것이다. 잔치 중에서도 특별히 혼인잔치 비유로 가르치셨다(요 2:1 - 11 참조). 잔치비유로 가르치신 이유는 바로 잔치의 상징성 때문이다. 잔치에는 결핍의 상대어인 풍요와 배부름이 있다. 즉 만족함이 있다. 기쁨과 사랑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에 참예하는 것이 바로 영생이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부요함이 있다. 인간의 결핍이 해결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것이 바로 영생이다.
반면에 사탄의 나라의 특징은 罪와 죽음이다. 그래서 사탄의 나라를 죄와 죽음의 나라라고 한다. 사탄의 나라는 결핍성, 욕구불만 슬픔/아픔, 생존경쟁/갈등 투성이다. 부족하기에 서로 더 가지려고 아귀다툼하면서 살아간다. 생존경쟁에 빠져있다. 제한성에 갇혀 있는 것이 사탄의 나라의 특징이다. 하나님의 무한함에서 제외되어 유한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주장하고 또한 이웃에 대하여 자기주장하니까 착취와 경쟁이 사탄의 나라의 특징을 이룬다.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하고, 다른 사람을 내 從으로 만들어 지배하려고 한다. 그래서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말하기를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다'. 즉 인간은 서로에 대하여 늑대이다. 자존심의 대결이다. 인간 사회는 욕심의 대결장이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비유 즉 혼인잔치의 비유로 설명하시는데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풍성함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눅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는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가 1) 잔치를 베풀어 주시고 아울러 2) 상속(기업)의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상속의 그림은 성경 여러 곳에 나타나 있는데 특별히 눅 12 : 30에 보면 "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상속) 주기를 기뻐하신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는 부요함과 상속의 개념이 같이 들어 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죽음, 고난, 결핍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무한함에 참예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풍성함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 나라는 유대 랍비의 묵시문학이나 회교의 경전인 코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물질적인 나라는 아니다. 예수는 결코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다.
D. 하나님 나라의 독특한 점
1.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임박할 실재의 나라이다.
2. 아울러 하나님 나라는 현재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다고 가르쳤다. 여기에 예수의 강조점이 있다.
눅 11: 14 - 23
눅 11:14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지라 무 리들이 기이히 여겼으나
눅 11: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눅 11:16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눅 11:17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 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눅 11:18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눅 11:19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 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장이 되리라
눅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 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 11:2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눅 11:22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 누느니라
눅 11:23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눅 11: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쫓는 것과 병자를 고치는 것을 보고 예수의 반대자들이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내어 쫓는다고 조롱하였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너희 아들들도) 귀신을 내어쫓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아들들은 (너희자신) 누구를 힘입어서 귀신을 내어쫓는냐고 반문하셨다. 바알세불이라는 말은 원래 유대인의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다. 바알세불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하여 적대자들이 처음으로 만들어낸 말이다. 예수님은 바알세불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가락(능력)으로 즉 성령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셨다.
1) 예수님은 귀신을 내어 쫓으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거기 이미 임했음을 증거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탄의 나라(귀신의 나라)에 속한 자를 해방시켜서 하나님 나라로 이동시키셨다. 믿음으로 이동시켰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귀신의 힘을 극복하고 구원하신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실현된 것이다. 귀신이 쫓겨감은 하나님 나라가 실현됨을 의미한다. 벌써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구원을 말로 약속하셨다.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 이적을 동반한 것은 (귀신을 내어쫓고,병자 고치심)하나님 나라의 실현(시위 :Demonstration)이다. 실제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치유'의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한다. 너무 표면적인 해석만 하여 이 치유를 단지 육신의 병고를 고치는 것으로만 이해하게 될 때 잘못된 구원론, 성령론과 맞물려서 신앙의 미신화를 초래하게 되며 성령을 마력적인 존재로 잘못 이해하게 된다. 또 이와 반대해서 구원을 단지 來世의 '오는 世上'의 것으로 이해하면 신앙이 관념화 ,추상화되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놓치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치유를 포괄적으로 실존의 전 영역에서의 '치유'로 이해해야 한다. 고난 가운데 있는자가 하나님 나라의 새생명에 동참한 것이다. 치유의 사역은 죽음의 증상(질병,고난,지혜 없음,우울증,외로움 등)들을 극복하여 온전케 함이다. 감기 걸리면 재채기, 콧물, 목아픔, 熱등의 감기의 증상이 나타나듯이, 죽음도 증상이 있다. 지혜 없음, 가을이 되면 우울함,병,피곤함 이러한 것들은 바로 죽음이 드러나는 증상들이다. 치유는 단순한 병고침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도 치유의 사역이다. 불치의 병인 암을 고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못된 독재자(김정일, 전두환)들에게 바른 복음을 전하여 그가 변화되어 새 삶을 살고 바른 정치를 한다면 이 보다 더 큰 구원이 어디 있겠는가 ?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치유의 사역이 아니고 무엇인가 ? 병 고치는 것과 복음을 전하여 그를 삭개오처럼 변화시키는 일 어떤 일이 더 큰 일인가 ?
눅 19장에 나오는 삭개오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치유사역이 전인적인 온전한 치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구원 즉 치유하여 온전케 하셨다. 삭개오는 주님을 통해서 치유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고 ,또한 이웃과의 관계도 올바르게 되었다. 뒤틀려진 관계가 바르게 되었다. 육신의 병만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치유이다. 빈곤과 정치적 압박도 고난이다. 구원(치유)은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새 사람되는 것이다. 모든 참된 것과 선, 아름다움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모든 악, 독, 썩어짐은 사탄으로부터 온다.
안식일
예수님은 그 당시 전례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시고 오히려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셨다. 안식일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다 마치셔서 더 할 일이 없는 상태에서 그 "심히 좋은 "창조를 즐기며 쉰 날이다(창2:1 - 3). 그러나 아담과 하와와 더불어 하나님의 창조는 타락하여, 그것은 더 이상 완전하지 않고 사단의 주권아래 부패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안식하지 않고 그의 창조를 고치는 일 ,곧 구원의 사업을 하시는 것이다(요5:17-21). 안식일에 병자가 있다는 것은 원래의 의미로 안식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극적인 증명이다. 이에 예수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병자를 치유함은 병든 창조를 고쳐 하나님의 "심히 좋은"창조로 종말론적으로 회복함으로써 하나님이 원래 의도했던 대로의 안식일이 있도록 한다는 사실의 상징적 또는 극적인 증명이다. 즉 예수의 안식일에의 치유활동은 사단의 통치아래 병든 하나님의 "좋았던"창조를 사단의 통치 밑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다스림 밑으로 가져와 치유하고 원래의 "좋았던"상태로 회복하여 진정한 '안식일'이 있게 한다는 사실에 대한 극적인 천명이었다. 안식일은 결핍에서의 회복과 관계 있다. 하나님께서는 6일간 天地創造를 완성하시고 일곱째날 安息하셨다. 창조를 完成하시고 안식하셨다. 하나님을 떠난 아담은 자기 스스로 일함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려고 하였다. 즉 자기의 지혜와 선행을 개발해 나갔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종교라고 만들어낸 것은 모두 지혜와 선행과 관계가 있다. 모든 종교는 지혜와 선행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려고 한다. 즉 자력구원을 표방하고 있다. 대부분의 종교는 지혜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불교(자각), 힌두교, 마니교, 플라톤 철학을 비롯한 헬라의 종교(영지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지식을 통한 구원의 길을 표방하고 있다. 힌두교의 경전인 리그베다에서 베다라는 뜻은 헬라어 ' ' (오이다 --- 알다,知)와 같은 의미이다. 타락한 인간은 지혜를 극대화하여서 이것이 교육과 연결되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지혜를 개발한 노력이 역사를 살펴보면 계속되어 왔다. 르네상스와 산업혁명(농업혁명)으로 인하여 소비재를 비롯하여 많은 물질의 풍요를 가져왔고, 농업혁명으로 풍요한 양식을 가져왔으며, 의학, 통신, 교통이 발달하였다. 이와 아울러 죽음도 더 크게 확대되었다. 통신의 발달로 우리의 삶이 노출되고 있다. 개인의 정보가 노출5품?있다. 교통의 발달은 대형 사고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건축및 토목공학의 발달로 큰 다리를 건설했으나 더 큰 재해를 가져왔다(성수대교 붕괴). 농기계(경운기, 트렉터)의 발달로 인하여 농민들이 기계화되어 편리한 면도 있지만 기계를 잘못 다루면 목숨을 잃거나 더 큰 재난을 당한다. 소비자 사회는 물질주의에 빠졌고 인간성의 황폐화를 가져왔다. 발달은 해결이 아니라 더 큰 죽음을 가져왔다.(성수대교 사건, 택시강도, 지존파 등) 과학발달및 지혜가 개발되면 될수록 죽음은 더욱 더 극대화되고 공해, 인간성 황폐, 억압과 감시가 더 심하다.
이와 반대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자연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회피운동 같은 것이다. 그래도 그 안에 참만족이 없고 결핍이 있다. 죽음이 있다.
안식은 바로 재창조의 축복이다. 안식일은 그리스도를 통한 안식일과 관계되어 있다. 안식일은 종말의 때에 주어지는 영원한 안식에 대한 그림자이다. 십계명중 제 4 계명은 창조의 완성에 대한 안식의 기념이다. 동시에 종말에 있을 안식일을 고대한다.
안식의 반대인 '일을 한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 인류는 죄를 짓고 하나님의 풍요의 상징인 에덴에서 추방 당하자. 자신의 삶을 위해 일해야 했다. 땅을 일구어 나가면서 그들은 문명을 이룩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문명낙관론'이 환영받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 형태나 공산주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피조물은 피조물의 제한성(결핍성)으로 인해 스스로 삶을 확보할 수 없다. 인간의 '일함'을 통해서 인간은 어느 정도 삶을 확보하지만 이 삶은 항상 죽음을 동반한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이 이를 뒷받침 한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삶과 자유는 확대되었다. 이와 아울러 죽음의 속박도 확대되었다.
안식일 지킴
안식일은 하나님의 하나님(주인,왕)되심을 고백하는 날이다.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만 생명의 근원이 있고 풍성함이 있음을 고백하는 날이다. 6일 동안 일하는 것은 자력구원을 의미한다. 올바른 질서가 아니다. 죽음을 가져온다. 구약성경에 보면 안식일을 안 지키면 죽는다. 하나님의 풍성함에 참예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과 행복이 하나님께 있다. 우리의 일을 삼가야 된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 선포와 관련되어 있다. 치유사역과 관련되어 있다. 결핍을 온전케 하기 위함이다. 안식일에 손 마른자를 치유하셨는데 손이 말랐다는 것은 결핍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풍요에서 떨어져 나감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떠난 결과이다. 이러한 고난은 바로 죽음의 증상들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일로부터 쉬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엿새 동안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잘 살겠습니다라는 다짐이다. 예를 들어 의사가 6일 동안 돈을 받고 의술을 행하였다고 주일에 아무런 의술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생업으로서의 의술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울러 주일은 우리의 신앙을 말씀으로 북돋우는 날이 되어야겠다. 교인끼리 만나서 교제하고 영원한 안식을 사모하며 지켜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잔치와 상속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재는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어가는 과정이다. 예수님이 치유를 안식일에 하셨는데 하나님 나라가 현재 임한 것을 암시한다.치유를 주로 안식일에 하심으로해서 하나님 나라가 창조를 다시 한번 심히 아름다운 상태로 만들어 우리 모두가 생명의 풍성한 상태로 가게 한다는 것이다.
E.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
예수의 언어 사용에 있어서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라는 말과 더불어 "온다"는 동사를 많이 사용한다. "하나님 나라를 주신다" 또 수동형으로 "주어진다". 인간이 "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받다"등의 언어를 사용한다. 반면에 "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확장한다"라는 말은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언어는 아주 독특한 언어이다. 유대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게 되는가 ? 첫째로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이 땅에서 이루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확장하는 내재의 현실이 아니다. 초월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즐겨 쓰는 용어인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거나 '확장한다'는 표현은 일체 쓰지 아니한다.
이러한 예수가 즐겨쓴 말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두 가지 성격을 살펴볼 수 있다. (1) 초월성과 (2) 은혜성이다. 초월성이란 하나님이 초월해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초월자가 아니라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의 구원자는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은혜성이란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노력이나 투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주권을 확립시켜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주권의 영역에 들어와 그 주권의 복(생명)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초월의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이기에 구원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구원은 초월성과 은혜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그냥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이루고 확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두가지 초월성과 은혜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역사를 볼 때 자유주의는 문명 낙관론을 주장하였다. 신학에 있어서도 자유주의자들이 있는데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대로 실천하며 살면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신학은 인간의 이성과 지혜의 가능성을 극대화한 신학으로 정치신학, 민중신학, 해방신학 등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유대 묵시문학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천지개벽처럼 갑자기 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예수님 당시에도 열심당(열혈당)이 있었는데 이들은 정치적 혁명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정의와 자유체제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메시야 즉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강력한 메시야가 나타나서 다윗의 왕국을 지상에 다시 재건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로마로 부터 자기들을 해방하여 새로운 다윗 왕국을 지상에 재건할 것을 꿈꾸어 왔다. 그들은 혁명으로 무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하였으나 예수는 거기에 동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 나라는 오히려 은혜성과 초월성이다. 하나님이 초월해 계셔야만 우리에게 구원이 일어난다. 내재의 것은 제한성(결핍성)이다. 이것은 인간이 아무리 제한된 자원을 다 동원한다해도 극복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동시에 가져온다. 그러므로 제한성 밖에서 무한하신 이로부터 구원이 우리에게 올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구원이란 초월해서 은혜로 주어진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초월성과 은혜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온다", "들어간다", "받는다" 라는 언어를 사용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초월해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물론 2 차적인 의미로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확장한다"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성과 초월성을 망각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해서 중요한 비유들을 사용하셨다. 열혈당원들이 생각했던 식으로 전쟁이나 혁명을 통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유대 묵시문학가들처럼 천지개벽으로 온다고 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마 13장에 나오는 비유의 성격들을 이해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몇 가지 성격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누룩과 겨자씨 비유는 쌍둥이 비유이다. 예수님은 종종 쌍둥이 비유를 가지고 말씀 하셨다. 진주와 밭에 감추인 보화비유,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 비유등이다. 이것은 또한 여자와 남자의 하는 일로 양분하고 있다. 겨자씨 비유는 천국의 외형적인 확장을 의미한다.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일년생 관목으로 가지가 많은 식물로 자라간다. 그 가지 속에 많은 새들이 와서 깃들이게 된다. 여기서 많은 새는 랍비문학에서 의미하는 것처럼 많은 민족을 가리킨다. 그래서 긍극적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구원의 안식처를 제공해서 많은 새들이 깃들 것을 또는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죽음의 요소들을 극복하고 생명으로 부풀린다는 것이다. 천국은 하나님이 확장시켜 나가시는데 우리의 전도와 선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누룩비유는 여인이 가루 서말에 누룩을 넣어 부풀게 한다. 이 비유는 여인과 관계 있는 비유이다. 누룩은 보이지 않지만 결국 가루를 부풀게 하듯이 이 비유는 천국의 내적인 성장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지만 천국은 자라간다.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신다. 이 비유는 천국의 은닉성을 암시한다. 누룩은 가루속까지 파고 들어가 부풀어 올린다. 아울러 필연적으로 자라간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운동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은 (1) 은닉성 (2) 점진성 (3) 필연성이 있다. 사실 하나님 나라는 아주 미미하게 시작되었다. 거대한 로마제국내에서 갈릴리에서 나사렛 출신 예수가 어부 몇 명과 여인 몇 명으로 시작한 아주 미미한 운동이었다. 그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무시해도 좋을 만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 오늘날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지 않는가 ?
겨자씨가 자라서 새들 (모든 민족을 의미한다)이 깃들일 정도로 자라난다. 온 세상이 죽음을 극복하고 생명을 부여 받는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민족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 나라는 말씀을 통해서 온다.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오는가 ? 억압이 아니라 말씀으로 설득해서 온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
예수님은 弟子道를 사랑의 두 계명으로 요약하고 있다. 1.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2.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 두 계명으로 구약의 모든 계명을 요약했다.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삶의 법칙으로 주었다. 사단이 인간을 꿰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어지게 하고 자기주장하게 하고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게하여 착취의 원칙으로 나타나고 그럼으로 갈등과 고난을 낳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의미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반대는 우상숭배이다. 자기주장이다. 자기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장 철저하게 경계하신 것이 맘모니즘이다. 돈에 대한 우상숭배는 돈으로부터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되니까 우상숭배는 곧 착취의 삶을 요구한다. 그것은 갈등과 고난을 낳아 죽음의 길로 이끈다. 오늘날 우상숭배란 돌이나 나무조각에 절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가장 심각한 우상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맘몬 즉 돈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였다(딤전6:10). 눅 19장에 나오는 삭개오도 하나님의 부요함을 깨닫기 전에는 돈이 인간의 행복과 안전을 가져온다고 생각하였다. 결핍을 극복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돈을 착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부요의 길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의 길이며 죽음의 길이다. 삭개오가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몰라서 착취하였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부요함을 깨닫고(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샬롬이 임한 것이다. ) 다른 사람의 것을 착취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하였다. 이웃을 압제하는 자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바뀌게 된 것이다. 삭개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되었던 것이다. 그에게 구원이 일어난 것이다. 그가 구원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웃으로부터도 소외 당하였다. 그래서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혼자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마 19장에 나오는 부자청년은 돈을 숭배하는 자이었다. 삭개오와 정반대의 행동을 취하였다. 네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라고 했을 때 오히려 근심하며 돌아갔다. 착취7臼?많이 소유하면 행복이 보장될 것 같으나 오히려 고난이나 갈등이 더 커질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면 하나님의 샬롬 즉 고통대신에 자유와 평강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삭개오는 하나님을 선택함에 따라 샬롬이 확대되고 불의 대신에 정의가 확대되어 간다. 그것이 하나님 통치에 있어서의 삶이 그만큼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가 점차 확대되어간다. 하나님 나라 백성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함에 따라 즉 두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이루어진다. 첫 계명은 우상숭배에 대한 반대 개념이다. 우상숭배하면 착취를 낳고 갈등을 낳고 죽음을 확대시킨다. 그것이 바로 사단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다. 그러면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거기에는 샬롬이 확대되고 그러니까 초월해서 온 은혜로운 통치의 힘이 우리를 성령으로 설득해서 하나님께 헌신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순종하면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확대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점진적으로 아주 가시적으로 더 많은 생명의 풍성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지금 하나님 나라가 왔다. 그 하나님 나라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 나라 법에 따라 성령의 설득으로 우리가 진짜 우상숭배를 버리고 타락의 세상에서 살려고 하는 중에 시시각각의 가치판단과 윤리판단에서 사랑을 베풀도록 시시각각으로 나를 주장할 것인가 ?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 ? 판단하는 상황에서 사단의 말을 들으면 이웃과 나와 함께 고난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 땅에 샬롬이 확대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살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확장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도의 덕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것을 누누히 강조하셨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오른뺨을 치면은 왼뺨까지 돌려대고 맞는 것이다. 그것이 이웃사랑이고 이웃에 대한 헌신이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반대는 우상숭배로 나타난다. 그래서 바울은 롬 1장 후반부에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싫어하면 결국은 우상숭배로 빠지게 되어 있다. 중간지대는 없다. 하나님의 대용품을 만들어 섬긴다. 우상숭배는 자기주장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인간은 부요가 아니라 오히려 결핍을 가져온다. 그래서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하여 스스로 자원을 확보하려고 노력한4? 그래서 불신자들이 자기가 열심히 돈벌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니까 죽도록 일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부족한 자원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그럴수록 죽음은 더욱 더 확대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타나는 양상이 바로 마약, 폭력, 변태적 성욕, 지존파, 르완다, 소말리아 사태 등이다.
인간의 타락 때부터 사탄의 나라가 지배하고 있다. 이 나라가 계속되는 동안에 예수의 오심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출범되었고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사탄의 나라는 끝이 날 것이고 이와 동시에 하나님 나라는 완성될 것이라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시험 때 이미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선전포고를 하셨고,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사탄의 등뼈를 부러뜨렸다. 그러나 그 사탄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고 완전한 제거는 주님께서 재림할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시 110편에서는 예수님께서 사탄을 완전히 정복할 것에 대하여 네 원수(사탄)로 네 발등상 될 때까지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탄을 완전히 짖밟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사탄의 잔재세력은 다 없어지고 박살날 것이다.
오는 세대 (의,생명이 지배) 성령을 따라 살아감
+---------------------------+-------------------- | |
| |
| 선과 악의 각축장 | 완성된 하나님 나라
| (긴장의 관계) | 새 하늘과 새 땅
초림 |부활(등뼈 뿌러짐) |
----------------------+--------------------- -----+
이 세대 (죄,죽음이 지배) 육신을 따라 살아감 재림
F. 새聖殿의 完成者 - 예수 그리스도
성경에 보면은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종종 가족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여러 가지 그림언어로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왕 -- 백성, 아빠 -- 자녀(상속자), 목자 -- 양떼, 농부 -- 포도원 또한 언약관계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노릇하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별히 가정언어로서 하나님을 '아빠'(ABBA)라고 부르고 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감히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지 못했다(제3계명). 그래서 하나님 이라는 말 대신에 전능하신 이, 창세로부터 계신 이, 세세무궁토록 계시는 분 등으로 바꾸어 불렀다. 그 당시 아빠라는 말은 금방 말을 배운 아이들이 아장아장 걸으면서 매우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었다. 아빠라는 말은 친근하면서도 매우 의존적인 말이었다. 또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집을 비유로 들어서 많이 말씀하셨다. 문 즉 좁은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였다. 또한 열쇠라는 말을 쓰셨다.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셨다. 문으로 들어가 열쇠를 따고 들어가면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식탁이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의 잔치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집의 가장(host)으로서 우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신다. 성전 안에서 하나님 백성들에게 풍성한 잔치를 베푸신다.
詩篇중에서 시14편, 24편 등을 성전순례시라고 한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은 시편 24 편과 이사야서에 나오는 것인데, 성전의 순례시에서 성전에 들어간다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 예수가 그 순례시의 말들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의 言語를 사용했다.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즉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어린 아이란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자이다. 하나님을 '압바'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여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의로워야 하며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것을 버리고 그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제자란 바로 하나님을 따르는 자, 의로운 자이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언어들을 살펴보면은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성전으로 그렸다. 예수의 예루살렘에 대한 태도는 무엇인가 ? 예수는 그 당시 종교와 생활의 중심지인 성전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리고 성전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그대신 자기가 성전을 짓는다고 했다. 왜 예수께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는가 ? 성전을 부수고 새로 짓는다고 했기에 성전에서 데모를 했는데 성전을 청결케 해서 하나님께 바치라고 한 것이 아니고 구약에서부터 내려오는 선지자적 언어로 말하면 드라마이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버린 것을 의미한다. 제사 지내고 하는 것이 이제는 쓸데 없는 짓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제사 드릴 제물을 사고 파는 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체포되어서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 받으신 것이다. 네가 정말 성전을 짓는다고 했느냐 ?라고 하니까 예수께서 묵묵부답이니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라고 다시 묻는다. 그러면 성전 문제와 하나님의 아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 쿰란문서를 보니까 이 용어가 삼하 7 : 1 - 13절과 관련되어 있다.
삼하 7 1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
삼하 7 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 장 가운데 있도다
삼하 7 3 나단이 왕께 고하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무릇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소서
삼하 7 4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삼하 7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 축하겠느냐
삼하 7 6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 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삼하 7 7 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 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삼하 7 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삼하 7 9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 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삼하 7 10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로 전과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삼하 7 11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 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삼하 7 12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삼하 7 13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예수는 자신이 성전을 부수고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주장한 죄목 즉 나단의 신탁에 따라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로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다는 죄목으로 총독 빌라도에게 처형을 당했다. 성전은 그 당시에 유대인의 생활과 종교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시고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시겠다고 하셨다. 자기가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으로 인하여 새로 탄생된 백성들로 새 성전을 지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요 2장의 성전소동사건은 단순히 성전에서 장사를 해서는 안된다거나 성전청결 사건이 아니고 자기가 이 성전을 헐고 구속사건을 통하여 새로운 성전을 세울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하나의 데모이다. 시위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고소 당한 죄목도 성전에 대한 것이다. 네가 이 성전을 허물고 다시 짓겠다고 말한 자이냐 바로 네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이냐고 심문했다. 사실 이 질문은 두 개의 질문이 아니고 한 질문인데 다른 측면으로 두 번 질문한 것이다. 성전재건할 자와 메시야는 동일 인물이다. 예수님은 바로 성전 모독죄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구약배경은 삼하 7:12 - 14에 나오는 나단의 신탁이다. 즉 나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이다. 나단의 신탁에 의하면 다윗이 아니라 다윗의 씨를 통하여 성전을 재건하겠다고 하셨다. 삼하 7장의 문맥을 살펴보면 다윗이 주변의 대적을 다 물리치고 그 백성에게 안식을 주고 자기는 궁궐에 거하였다. 그래서 다윗은 성전(하나님의 집)을 짓겠다고 하나님께 말씀 드렸다. 그러나 나단을 통해주신 하나님의 응답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다윗의 집이란 다윗의 왕조(dynasty)를 의미한다. 여기서 집이라는 단어에 있어서 하나의 WORD PLAY 를 볼 수 있다. 다윗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그의 왕조를 일으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다윗의 씨를 일으켜 왕조(집)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가 합법적으로 통치한다는 의미로 그를 나의 아들로 삼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나의 성전을 짓게 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다윗왕조를 세운다는 말씀이다. 이 약속은 솔로몬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다윗왕조를 세웠다. 그래서 솔로몬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그런데 솔로몬을 기점으로 다윗 왕조가 타락한다. 그8??분열왕국이 되어서 타락해서 망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구약내에서부터 나단의 신탁이 다시 성취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여기서 구약과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메시야 사상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를 세워서 메시야를 일으킬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유래하는 메시야 사상이 강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를 일으켜서 다윗 왕조를 세워서 다시 로마의 통치에서 해방하는 것이다. 다윗의 씨인 메시야가 하는 일은 바로 성전을 짓는 일이다. 그 왕조와 하나님의 아들과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왕조와 하나님의 아들(성경에서 아들은 상속자개념을 의미한다)사이에는 관계론적 의미가 있다. 메시야는 바로 다윗의 왕조를 재건할 뿐만 아니라 새성전을 세우실 분이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바로 다윗의 왕조를 이어 받은 메시야라고 한다. 육적 다윗 왕가는 바벨론 포로로 끝이 났다. 그러나 영적인 다윗의 왕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승 되어졌다(마1 : 1). 다윗의 씨(seed, 후손)를 '가지' 또는 '아들'로 표현하고 있다. 메시야는 바로 성전을 짓는 자이다. 새성전과 메시야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집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그 속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전모독 죄는 하나님에 대한 참람죄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죄인 것이다.
G. 예수님의 의도 -- 하나님 백성의 창조 - 새성전을 이루심
우리는 이전에는 죄와 죽음으로 특징 지워지는 사탄의 나라 백성이었는데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즉 하나님의 부르심과 초대에 응해서 의와 생명이 왕노릇하는 하나님 나라로 옮기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풍요에 참예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는 누구인가 교만한 宗敎指導者들이 아니고 바로 죄인과 창기들이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그래서 그 당시에 불리웠던 예수님의 별명이 1) 탐식가 2) 죄인과 창기의 친구 3) 술주정뱅이(술을 즐기는 자)등이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約束으로 주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의 부요함에 동참케 해주셨다. 우리의 아빠가 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기도란 바로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를 내것으로 끌어쓰는 것이다.(지혜를 주소서, 능력을 주소서, 연약함을 도우소서, 질고에서 건져 주소서 등)
영생이란 바로 신적인 생명을 의미한다. 비유로 시위하셨고, 치유를 통하여 그의 능력이 실제로 나타났다.
막 8 : 28 - 31(마16:21이하 참조)부터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사역의 전환기를 가져온다. 그 때부터 임박한 죽음에 대한 예고를 하셨다. 최후의 만찬을 통하여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드라마를 제시하신 것이다. 1) 시기 - 유월절 2) 재료 - 음식-생명 3) 몸짓 - 죽음 예수님이 떼어주신 떡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찧기실 살을 의미하며 잔은 우리를 위해 흘리실 대속의 피이며 언약의 피이다. 4) 말등 이런 것들은 전부 엄청난 상징을 갖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
시기는 兪越節이다. 유월절을 지킴은 바로 출애굽의 첫 구원을 기념하고, 종말에 있을 제 2 의 출애굽 즉 종말의 구원을 염원하는 것이다. 떡과 포도주등 음식은 生命을 주는 것을 상징한다. 몸짓은 부수고 포도주를 붓고 하는 것은 잔인한 죽음, 최후의 만찬 때 즉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한편의 劇(드라마)으로 마디 마디마다 엄청난 意味를 부여해서 말한다. 즉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 제 2의 출애굽을 이루는데 그 구원을 어떻게 이루는가 ? 자신을 스스로 죽음에 내어줌으로써 그리고 말을 보면 잔의 말씀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言約의 피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사 53 : 10의 引用이다. 예수님의 十字架에서의 죽음은 사 53 :10에 근거한 대속적 제사이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바로 이사야서에 인용된 여호와의 從의 죽음이라고 한다. 패역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스스로를 代贖의 제사로 바쳐서 백성의 罪가 용서되고 그들을 의롭게 함이 내용이다. 바로 그것이 바로 예수 자신의 죽음의 의미라는 것이다. 言約의 피라는 말은 출애굽기 24장 8절에서 왔다. 그래서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의롭게 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한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은 새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언약적 죽음이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하나님되게(왕) 하기 위한 죽음이다. 출 24 : 8에 보면 모세가 언약의 피를 취하여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언약의 예식을 취한다.
출 24: 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 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즉 언약을 맺는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백성됨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렘 31 : 31이하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새언약을 세우시겠다고 한다. 새언약의 내용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마음의 동기에서 시작된다.
렘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언약을 세 우리라
렘 31: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 을 파하였음이니라
렘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 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 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 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시대에 모세를 중보자로 맺은 옛언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백성답게 살지 못한다. 즉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언약을 어겼다. 그래서 새언약을 약속하셨다. 히브리서 8장과 10장에 보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을 통하여 이 새언약을 성취하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종의 노래'라고 하는 사 42 : 8과 사 49 : 6에서도 종이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또한 백성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과 아담사이에 단절되었던 교제를 회복시키어 의로운 새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다.
예수는 자기의 죽음을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로서 죄가 용서되어 의로운 하나님 백성을 창조되는 사건으로 그린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이 왕노릇하시고 아비 노릇해주심에 의해 살 수 있는 백성들을 창조함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인간이 다시 한번 창조주 하나님과 올바르게 연결되고 그래서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해 주심에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생명을 얻는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런 구원을 이루는 사건이라고 예수께서 자기의 죽음을 해설해 주었다. 제자들은 별로 알아듣지 못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의도는 우리에 대한 초대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초대이다. 잔치와 상속의 약속이 있다. 그것은 영생의 약속이다. 사단의 죽음의 나라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죽음의 증상을 고치는 치유로서 시위하면서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약속과 죽음과는 약속과 성취의 관계에 있다. 죽음은 대속과 새언약의 제사인데 이로부터 의로운 하나님의 새백성 창조가 된다. 그의 하나님의 선포는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주겠다는 초대인데 그의 죽음은 그 약속의 제의적인 성취이다. 그래서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과는 약속과 성취이다. 이때까지도 제자들은 자신들의 메시야 사상과 너무나 동떨어져서 이해를 못했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은 것인데 그래서 제자들이 모두 도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셨고(막1:15),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그의 약속을 성취하셔서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면 부활은 무엇인가 ?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부활이다. 십자가를 통한 속죄제사와 새 언약의 성취를 인치는 것이 부활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켰다. 부활한 예수의 나타남을 본 그의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옳다고 인정하고 높이신 것을 깨달았다. 이리하여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고 부활했다(고전15:3-5,롬4:25,고후5:21)는 것이 초대교회 때부터 신앙고백과 케뤼그마가 되었다.
구원이나 영생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생명에 참예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神的인 삶이 바로 永生이다. 지금 현재 우리의 삶은 매우 긴장의 관계에 있다. 현재(부활과 재림사이)는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의 각축장이다. 사단은 우리에게 자기주장하고 이웃을 착취하라고 하고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의존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다. 바울의 표현대로하면 사단은 육신대로 살도록 하고 하나님은 성령의 지시대로 살라고 한다. 성령의 열매가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지금 임시적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직도 사단의 나라가 사단의 통치가 완전히 극복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을 좇아 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인가 ? 아닌가 ? 성령을 따라 살 것인가 ? 육신을 따라 살 것인가 ? 매 순간 직면한다. 그 때마다 육신을 따라 살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의 市民權은 하늘에 있다고 한다. 우리가 이땅위에 살지만 사단의 나라에서 이미 벗어난 자들이다.
골 1:1.3 "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 으니 "
우리를 사단의 암흑과 죄악과 죽음의 나라에서 건져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하나님 나라로 옮겼다. 우리의 신분이 거기에 있다.
교회는 바로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이다. 그러므로 본국의 법에 따라야 한다. 이것이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할 때에 성령의 열매 샬롬이 확대된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사단의 나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서 우리가 매순간마다 믿음으로 살 수밖에 없다. 전적인 헌신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속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과 생명 가운데 동시에 산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면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지만 우리는 손해를 본다. 그래서 구원과 고난이 함께 있다. 그래서 고난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고난과 구원이 함께 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 롬 12 :1,2과 빌 1:27에 의하면 교회는 식민지로서 본부의 지시를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갈 5: 22, 23에는 성령의 열매가 묘사되어 있다. 매 순간마다 육신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살아가야 한다. 고난 속에서 살아간다. 고난은 구원을 가져오고,죽음은 생명을 가져온다. 우리들이 인간사회에 살려면 자신이 손해를 보며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구원과 고난이 함께 공존한다. 인간의 내재의 삶속에 구원의 가능성이 있겠는가 ? 우리의 구원은 초월해서 와야 한다. 그것은 사랑의 힘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런 병든 사회를 사랑 외에는 치유할 힘이 없다. 구원은 바로 사랑의 힘으로 나타나야 한다. 긍극적으로 성령이 우리에게 퍼부어주는 은혜로 우리가 우상숭배를 배격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때 하나님 나라는 그만큼 확대된다. 자기 주장을 하지 않으면 거기에 샬롬이 이루어지고 그만큼 나도 덕을 보게 된다. 결국 하나님 나라가 구원이 확장되면 우리도 덕을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남에게 덕을 입히지만 나는 손해를 볼 수 있다. 그것이 예수가 말하는 복음을 위한 고난이다. 생활속에서 죽는 것이 복음을 위해 고난 받으며 사는 것이다. 복음을 위한 고난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마16:24). 종말론적 긴장의 관계이기에 재림 때까지 이러한 긴장의 삶은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와서 구원이 여기 있는데 왜 고난이 있는가 ? 바로 구조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로 살게하면 우리의 고난도 적어진다. 다함께 하나님께 헌신하고 이웃을 사랑하8?살면 내가 손해를 보니까 ? 전도를 더 열심히 해야한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가지 완전한 구원이 없으나 구원이 더 확장되면 복음선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더 확장되면 샬롬이 커진다. 종말에 가면서 고난이 더 커진다고 예수님은 말하고 있다. 종말에 가면서 구원도 증진되고 고난도 더 증진되는 역설이 있다. 우리가 믿는 바가 얼마나 훌륭한가 ?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얼마나 위대한 구원의 소망을 갖는가 ? 우리가 기도로 날마다 구원을 체험한다. 아빠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은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 종말에 완성될 구원이 우리 삶에 부분적으로나마 임시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오는 세대 (의,생명) 성령을 따라 살아감
이 세대 (죄,악,죽음) 육신을 따라 살아감
바울의 부활 소망 (Lang)
Petr Pokorny Der Brief des Paulus an die Epheser, ThHK 10/Ⅱ, Leipzig: Evangelische Verlagsanstalt, 1992, 256-258.
--------------------------------------------------------------------------------
바울의 부활 소망
바울은 죽음을 이기는 승리에 대한 예언자의 전승, 예수의 선포 전승, 그리고 유대 묵시 전승에서 미래적인 몸의 부활 내지는 변화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부활 소망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다시 사심에 고정시키는 것은 그를 유대의 미래기대와 분리시키며 그리고 그리스•헬라적인 내세 사상과 더 세게 분리시킨다. [241/2]
그리스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은 불가능하게 생각되거나(Homer, Ilias 24:551; Aeschylus, Eumeneiden 648) 드문 이적으로 여겨진다(Plato, Symposion 1700). 역사의 마지막 때에 일어날 죽은 자의 부활이란 그리스인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바울의 사상은 분명하게 그리스•헬라적인 영원 사상과는 구분된다. 철학적인 영혼 불멸론에 맞서 바울은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 대결하지 않는다; 부활을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위로 말미암은 전인(全人)의 새로운 소생(Neubelebung)으로 이해하는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 영혼 불멸론은 결코 진정한 소망이 아니었다(살전4:13 참조). 헬라의 신비주의(Mystik)에서 처럼 인간의 영이 신성에 완전히 나타남에 반대하고 밀의종교에서처럼 제의적인 봉헌 행위를 통한 인간의 변화 내지는 하나님 됨(Vergottung)에 반대하여 바울은 인간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죄에 대한 심판인 죽음으로 말미암은 생명의 철저한 단절을 더 오래 견디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구약성서에서는 그 이전 시기에 유래된,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경우 나타나는, 놀라운 몇 죽은 자 소생에 관하여 기술되어 있는데(왕상 17:17-24과 왕하 4:18-37; 13:20f), 하지만 이 죽은 자의 소생기사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며(시 139편은 다름)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곳인(시 6:6) 스올(지하 세계)이나 무덤에서 그늘에 존재한다는 옛 사상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죽음의 경계에서도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 신실함에 대한 신뢰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안전함에 대한 믿음의 "그럼에도 불구함"(Dennoch)로 인도하였다(시 73:23f; cf. 시 16:10; 욥 19:25ff). 하지만 본래적인 부활 신앙은 이사야의 묵시인 사 24-27장(주전 3백년경)에서 비로소 출현하며(사 26:19), "영생에 이르는" 부활과 "영원한 수치와 부끄러움에 이르는" 부활이 언급되는 곳인 단 12:2f(주전 약 165년)에서 분명하게 증거되어 있다. 부활 신앙에 대해 미치는 페르시아의 종말론의 영향에 대한 문제에서 최근의 연구는 아주 신중하게 자제하였다.
부활에 대한 신앙은 특히 의인의 부활을 요구하는 보응 사상(마카비 전투의 순교자들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배제될 수 없었다. 마카비 2서 7:9. 14 참조)을 통해서, 그리고 의 사상(모든 사람들은 책임져야 한다는)을 통해서 지지되었다. 사두개인(막 12:18-27)과 사마리아인들은 거듭남(Neuerung)으로서 부활을 부정하였다. 그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부활신앙을 기도에 정착시켰으며(18기도문의 두 번째 기도)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 "부활을 부인하는 자는 미래의 세계에 참여하지 못한다"(Sanh 10:1; Bill.Ⅰ, 923)는 교리를 결의하였다.
유대 묵시에서 죽은 자의 부활은 무엇보다도 에디오피아 에녹서(예를 들면 51:1)와 제4에스라 묵시록(예를 들면, 7:32)과 시리아의 바룩 묵시록에서 분명하게 증거되었으며 자세하게 기술되었다(Syr Bar 50f). 메시아적인 중간나라 이전에 일어날 의인의 부활과 세상 종말의 때 일어날 일반적인, 죽은 자의 부활의 구분(계 20장 참조)은 회당에서 주후 3세기 초에 가서야 비로소 실행되었다(Bill. Ⅲ, 827f). [242/3]
예수는 막 12:18-27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출 3:6의 하나님 사상으로써 그 근거를 대며, 부활한 자의 생명을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은 존재"(cf. 단 12:3; 시리아의 바룩서 51:10, "그들은 천사와 같을 것이며 별과 비슷할 것이다")로 묘사한다.
사도 바울은 부활 신앙을 확실하게 기독론으로부터 그 근거를 대며 새롭게 손질하였다. 예수처럼 바울은 죽은 자들이 정확하게 무덤에 눕혀진 그대로 부활한다는 바리새인의 사상(cf. 시리아의 묵시 50:2, "그때 그들의 외모에는 어떤 변화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땅]이 그들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그것[땅]이 그들을 또한 재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 함게 51장에서 아름다움과 미움으로의 변화는 단 12:2에 적절하게 연결되어 있었다)과 다르게 구분된다. 다른 한편 바울은 고린도의 '영성'주의자(Pneumatiker)의 열광주의적인 구원이해와 대치하면서 죽은 자의 부활의 육성(Leiblichkeit)과 미래성(Zukunftigkeit)를 강하게 강조하였다. 믿는 자들이 세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게 됨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의 토대가 된다(롬 6:4). 그러나 부활에서 올리우신 그리스도와 동일한 형상은 미래에 비로소 일어날 것이다(롬 6:5. 8). 바울의 부활신앙에 대해서는 다음의 특징들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1.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종말시 죽은 자 부활의 기초(Basis)와 시작(Auftakt)으로 이해한다. 예수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0)이다.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구원자로(빌 3:20; 행 5:30f), 심판자로(고후 5:10; 행 10:40-42), 주님(Kyrios)으로 등극하셨다. 이러한 견해는 전체 신약성서에 지배적이다. 예수는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골 1:18)이며 "많은 형제 중에서 먼저 난 자"(롬 8:29)요, 생명의 주(행 3:15)요, 죽은 자 가운데서 첫 번째로 부활한 자요(행 26:23), 구원의 주(Urheber)이시다(히 2:10).
2. 바울은 부활을 진화를 통해서 인간의 천성(Naturanlage)에서 나온 한 사건(Vorgang)으로 보지 않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한 창조적인 행동으로 이해한다(롬 4:17 참조). 예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롬 6:4) 다시 살게 되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이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능력으로"(빌 3:21; cf. 고전 6:14; 엡 1:19f; 막 12:24)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죽을 몸을 살리실 것이다(롬 8:11). 영광, 영 그리고 능력은 죽음을 이긴 놀라운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과 동일한 의미로 완곡하게 서술한 것이다(하나님이 펴신 팔 또는 강한 팔로 언급하는 구약의 표현을 참조. 출 6:6; 사 53:1; 62:8).
3.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위는 전인(全人)에게 해당된다. 바울은 구약성서의 사고를 따라 몸이 없는 생명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을 몸과 (혼과) 영을 가진 살아있는 존재로 통전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영성'주의자들이 몸의 죽음을 단지 유물적인 몸에 관련시키는 반면에 바울은 몸의 죽음을 철저한 전체 인간의 종말로 진지하게 고려하며, 죽음을 "죄에 팔림"(롬 6:23)으로 판정한다.[243/4] 이에 부합되게 부활은 일차적으로 몸과 영혼의 재결합(Wiedervereinigung)이 아니라, 새로운 종말론적인 존재양식에 부합되는 신령한 몸(sw'ma pneumatikovn)으로 전체 인간의 새창조(Neuschopfung)이다. 책임적인 인간(Person)의 동일성(Identitat)은 물질적인 구성요소를 통해서, 즉 자연인 안에 있는 형상이나 영적인 알맹이(Kern)을 통해서 얻게 된다.
4.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장차 있을 세상 완성과 결합시킨다. 유대의 미래 기대에 비해서 바울은 구원의 현재를 강조한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미 나타났기 때문이다(고후 6:2). 그러나 고린도의 영성주의자들의 현재적인 구원이해와 비교해보면 바울은 부활이 아직 밖에 있다는 것을(15:22 등; 고후 4:14) 확실하게 강조한다. 바울은 곧 일어날 재림을 더 경험하기를 희망한다(15:51f). 그는 죽은 자의 부활을 어떤 우주적인 갱신 과정 안에 집어넣는다. 그 과정 안에서 결국에는 죽음의 권세가 멸절된다. 롬 8:18-25에 따르면 믿는 자들이 몸의 구속을 기다리면서 탄식할 뿐 아니라 전체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 메시아의 중간 나라에 참여하기 위한 첫째 부활과 세상심판을 위한 일반적인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가정은 바울의 경우 고전 15:24에서도 빌 3:11에도 직접적으로 증거되어 있지 않으나, 다니엘 7장에서 볼 때도 배제될 수 없다(15:24에 대한 석의 참조). 바울이 의식하고 있는 바 종말론적인 완성에 있는 존재는 시간과 공간적인 세상의 어휘로써 대상화(objetktivieren)하면서 채색하기를 포기하며 "주님 곁에 있음"(살전 4:17; 빌 1:23; cf. 고전 13:12; 15:49)에 강조점을 둔다.
5. 바울은 어디에서든 "모든 사람들의 부활"이나 "의로운 자들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행 24:15) 또는 "심판에 이르는 부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바울의 직접적인 진술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에 집중되어 있다; 그는 부활을 대체적으로 구원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12:2f로부터 바울 사도가 어떤 죽은 자의 일반적인 부활을 생각했다는 것이 가정될 수 있다(롬 2:5f; 2:12; 고후 5:10; cf. 딤후 4:1; 벧전 4:15). 마지막 때의 완성에서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동이 전체 인류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간접적으로 로마서 8장에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예수와 바울에 대한 소고
- 종말론을 중심으로-
백 유 현
제 1 장 서 론
흔히 '바울과 예수'라는 주제는 수십년 동안 신약 신학자들의 의제 역할을 해왔다. 그 결과 기독교 역사와 사상 가운데 가장 우뚝 솟아 있는 두 인물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형성되었다. 예수님은 후대에 세워질 기독교 교회를 위해 친히 사역하시고 돌아가신 설립자, 창설자였다. 이해 반해 바울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기독교 교회의 재섭립자이며 가장 위대한 신학자였다. 그러므로 예수와 바울은 기독교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중심인물로서 예수와 바울의 관계에서 과연 바울은 자기의 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12사도가 아닌 바울이 4복음서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신학사상으로 바울 서신을 독자적으로 기록했는가와 만약에 영향을 받았다면, 예수 신학에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점으로 모아진다.
바울서신들이 신약에서 가장 먼저 쓰여졌음에 불구하고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메세지와 인격은 바울의 서신이나 바울의 신학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신학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메세지에 의존하고 있다. 물론 복음서가 단순히 예수의 전기나 혹은 예수의 메세지만을 기계적으로 옮겨 적은 역사적 전기 문헌이라고 생각치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서가 궁극적으로 복음서 저자나 혹은 초대 교회의 신앙적 전유물이라고 보지 않는다. 복음서가 분명히 초대교회나 복음서 저자의 신학을 갖고 있음에 불구하고 그들의 신학은 역사적 예수의 몌시지와 그분의 인격과 사역에 확고한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복음서와 역사적 예수와의 연속선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본 소고에서는 바울의 종말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히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예수의 메세지를 중심으로 예수의 종말사상을 살펴보아야 되며 예수의 종말사상 안에서 종말론사상을 전개한 바울 신학사상은 예수의 종말사상과 서로 같다는 점을 밝히는데 있다.
제 2 장 예수의 종말론 사상
우리가 신약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종말관을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복음서를 중심으로 예수 자신이 종말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쳤는가를 우선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우리가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예수의 종말론 사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의 종말사상에 관한 깊은 이해가 선결적으로 요구된다. 예수 자신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예수의 주된 청중들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에서 뿐 만 아니라 종말에 대한 예수의 교훈 자체가 당시 유대인들의 종말언어와 구조를 통하여 형성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의 종말론을 붙잡기 위해서는 당시 유대 묵시문학과 세계관에 돌아가서 그 문맥에서 살펴보고나서 예수의 종말론을 살펴보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된다.
제 1 절 예수 당시 유대인들의 종말 사상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고대의 그 어떤 민족들의 것과는 다른 독특한 종말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종말 사상이란,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전세계와 인간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종국적인 목적과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종말사상이다. 이는 하나님에 하여 시작이 있었으며 하나님에 종말론적인 완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종말론적인 완성을 향하여 계속 나아가고 있는 현 세계의 역사를 '이 세상' 혹은 '현 세상'으로 표현하고, 반면에 궁국적인 완성이후의 역사를 '저 세상' 혹은 '오는 세상'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오는 세상으로 전환되는 단계를 '주의 날' 혹은 '메시야 시대'의 도래로 간주했고 그리고 이 날에 즈음하여 전세계사적인 종말론적 사건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였다. 유대인들은 이 현 세상은 궁극적으로 사탄과 그 추종세력에 지배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의인들, 곧 율법을 따라 살기을 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는 세상이 올 때까지 잠정적으로 핍박과 고난을 당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는 세상이 도래하면서 사탄과 그 추종세력들이 다 격파를 당하고 메시아가 지배하며 의인 곧 경건한 유대인들이 축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들은 현 세상에서 오는 세상으로 전환되는 것은 진화론적인 과정이나 혹은 이 세상 자체의 혁명적인 과정을 통하여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주재자이신 하나님 자신의 특별한 역사적 개입,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 자신의 특별한 대리자인 메시아의 오심과 그의 사역을 통하여 전환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대리자는 '메시야'로서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때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때로는 '인자'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제 2 절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종말론 사상
1. 종말론의 구조
위에서 살펴본 유대 종말 사상이 팽배해 있는 유대 사회에서 예수가 출생하시고 성장하시고 그 자신 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종말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고 있던 자들을 그의 제자로 부르시고, 그리고 종말사상의 영향 아래 있는 자들을 대상으로 예수께서 기르치셨다면 예수의 종말사상과 당시 유대인들의 종말사상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공통점이 있을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당시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이해 할 수 없었던 독특한 종말론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양자 사이에 어떤 점이 같고 어떤 점이 서로 다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공관복음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메세지의 중심 테마이다. 그런데 예수의 종말사상과 관련하여 복음서에서 발견하는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 하나님의 나라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막1:14-15)라는 선언이다. 만일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올 것이다' 라든지, 혹은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어느날에 올 것이다'라고 선언하셨다면,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미래에 도달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그러한 기대감 속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온다는 사실을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라고 선언하였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그 종말의 시간, '현 세상'에서 '오는 세상'으로 전환되어지는 그 결정적인 시간이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통해 현재의 시간을 오는 미래의 시간으로 바꾸는 그날에 이미 왔다라는 것이다. 오는 세상이 이미 현 세상에 미래에 올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의 시간 속에 의미 침투하였다는 것이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현재의 시간이 이미 종말의 시간이 되는 위대한 역사의 전환이 하나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던 바 곧 장차 자신의 왕권을 세상에 나타내시겠다고 하신 그 말씀에 예수님오심과 그의 사역안에 이미 성취 되었다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미래적인 종말사상에 젖어있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으며 종말이 이미 현세계 안에 침투하였으며, 오는 세상이 이미 현세계 안에 침투하였다는 독특한 선언을 하셨다는 점을 부정 할 수가 없다.
예수의 독특한 선언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라는 것은 이 세상이 이제는 현 세상이 끝이나고 오는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선언이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그 종말이 이미 왔다라는 선언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유대인들의 종말관에 비추어 볼때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종말론적인 사건들이 일어나야 했다. 여기서 말하는 여러가지 종말론적인 사건이란, 메시야를 통해 이스라엘을 괴롭게했던 모든 이방 세력들의 격퇴와 예루살렘과 성전의 회복,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지 귀환, 성지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민족 중심의 메시야 왕국 건설등이다. 이런 사건들이 이루어질 때 만이 오는 세상 곧 종말이 도래한 것으로 이해 될 수 있었지만 예수는 이러한 현상들의 아직 구체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아직도 현세상의 상태가 유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세계 안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종말론에 있어서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세상나라와 하나님의 나라가 함께 공존하는 시대가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두가지 큰 모멘트를 가지는데 역사 안의 성취와 역사 말의 완성이다.
예수께서는 한편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도래를 선포하면서, 또 한편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기 때문에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임할 것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오심에 관하여는 예수께서 자신의 메시야직 인격과 그의 독특한 사역 근거를 두고 말씀하신 반면에,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가 내림에 관하여는 그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과 관련을 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의 오심이 그 자신의 수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 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일어날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자신이 수난, 죽음, 부활등의 사건을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결정적인 계기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이 당시 유대인들의 종말 사상에 비추어 볼 때 독특한 점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저자들 중 특히 사도 바울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하나님의 위대한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해석하기 전에 즉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전 인류를 대표하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전 인류가 그들의 죄 때문에 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심판인 종말론적인 죽음을 대신하는 종말론적인 죽음이며 예수의 부활이 예수 개인의 부활이 아니라 모든 구속받은 성도들의 역사의 마지막에 누리게 될 그 종말론적 부활을 대변하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된다는 사실을 말하기 전에, 이미 예수 자신이 구약에 나타난 고난의 메시야 사상과 관련하여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우연적인 개인의 사건으로 보지 않고, 전 인류에게 영향을 즉 전 인류역사에 영향을 주는 다시 말해서 현 세상을 오는 세상으로, 전 인류의 역사를 종말의 역사로 전환시키는 위대한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종말론적 교훈에서 간과하지 않아야 할 사실은 전 인류와 전 우주의 종말론적인 완성은 예수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두고 있을지라도 전 인류와 전 세계와 전 우주에 종말의 실재와 종말의 역사는 예수의 재림 전에 이미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종말론적인 사건의 역사의 마지막 전세계와 우주의 궁극적인 끝에 가서 비로소 전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미래적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적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사건 직후부터 전 인류와 전 세계와 전 우주에 종말의 실재를 이미 가능하게 하는 현재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불러워지는것은 그것이 미래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현재적인 의미에서라는 점이다. 종말이란 이 세상 끝에 가서 비로서 이루어지는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앞당겨져 일어난 종말론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미 앞당겨져 개인적으로 세계사적으로 현재화 되었다는 점이다.
예수의 종말론의 구조에 관하여 지금까지 말한 교훈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예수님은 결국 종말에 관하여 3중적인 차원을 말씀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전까지 그 자신의 메시야적 자아계시와 그의 메시야적 사역,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과 약속된 메시야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계시하고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든자를 고치고 죽은자를 살리는 그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이미 이스라엘 민족에게 미치는 종말론적인 나라와 둘째,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후 예수께서 친히 높아지신 부활의 주님이 되셔서 성령님을 파송하여 그의 구원역사와 왕권을 온 세상에 나타내심으로 현 세계 안에서 이루어져가는 영광스러운 종말론적인 나라와 마지막 셋째, 세상 끝날에 예수님께서 인자의 영광을 가지고 심판주로 오셔서 완성하게되는 영원한 종말론적인 나라이다. 이와같은 예수의 종말론의 교훈들에 관한 이해를 가지고 있을 때, 그리고 이와같은 예수의 종말사상이 초대교회와 바울을 위시하여 신약저자들의 종말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바로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바울의 종말론의 핵심을 이해하게 된다.
2. 개인의 종말론
예수는 개인의 종말 문제를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론 관점에서 언급하셨다. 신약은 하데스와 중간상태와 게헨나를 명확히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하데스는 구약의 스올과 같은데 여기에 대해 예수는 별다른 언급을 하시지 않았다. 예수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눅16:19-31) 사후의 문제를 밝히고 있는데, 이것을 여자적으로 해석해야 될는지 교훈적으로 해석해야 될는지는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십자기상의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니라'(눅23:43)고 약속하신 말씀은 의롭게 죽은 자는 사후에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됨을 밝혀준다.
부활 문제에 대해서는 예수 자신이 죽은 자를 여러번 살리심으로 메시야 시대의 부활을 암시하였고, 또 예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인 것을 강조하셨다(요11:25).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부활에 대한 교훈은 미래의 객관적인 종말론적 사건과 현재의 영적 실재 두 사건을 말하고 있다. 양자는 모두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기인한다.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그가 육체의 죽음을 당할지라도 다시 살 것이며, 그를 믿음으로 현재의 영적 생명을 소유한 자는 누구든지 또한 장래의 불변적 존재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요5:25, 26, 6:39, 44, 54).
그리고 요한복음에서의 영생과 부활은 현재와 미래 양면을 다 포함하고 있다. 미래의 종말론적 심판에 대해서는 요14:48에 잘 나타나 있다. 미래의 심판은 본질적으로 현재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인간의 믿음에 관계 되어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 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는 것이라'. 이처럼 그리스도를 통한 현재의 심판은 미래의 심판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으며 후자는 전자에 기준하고 동시에 후자는 전자의 완성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제 3 장 바울의 종말론의 사상
바울의 종말론은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이다. 그리고 바울의 종말론에 있어서 참으로 두드러지고 있는 요소는, 바울이 비록 그 자신에서 그 신학, 즉 종말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여러가지 전통적인 술어와 사상을 사용하고 있다 할찌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바울 동시대의 유대적 종말론적 기대의 모든 제 형식들과는 구분이 되어지는 완전히 독립된 특성을 보여주고 있는 그 점에 있다. 이것은 말할 나위 없이 바울의 종말론이 어떤 전통적인 도식에 의해 결정되어지지 않고 예수 안에 나타난 종말론을 토대로한 종말론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종말론에 있어서 결정적인 기독론적 특성이다.
제 1 절 바울의 종말론 사상의 구조
바울 신학의 전체적 사상 구조를 살펴보면, 이 시대와 오는 시대의 종말론적 이원론으로 되어 있다. 이 사상은 바울 자신이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1세기경 유대교 내에 이 사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공관복음에서도 이 사상이 예수의 교훈의 기본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을 볼 수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을 현세적인 이원론에 근본적인 수정을 단행한 그리스도인으로 보아왔다. 하나님이 예수의 역사적인 사역을 통해 이루어 놓으신 일을 인하여 이 두 세대 사이의 구별은 완전 하지가 않다. 반면에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강림을 통하여 인간에게 주신 구속적인 축복사건 즉 종말론적 사건으로 보았다. 이 사실은 바울의 종말론이 그의 전체적인 신학사상과 분리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강림, 즉 이 세 사건들은 이미 역사 안에서 전개되고 있는 구속사적 사건으로 미래성과 현재성 양면을 가진다고 한다. 예수의 죽음심을 통해 신자는 이미 종말론적 심판 아래 놓여 이 악한 현세로부터 해방되고(갈1:4), 어둠의 세력을 벗어나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졌다(골1:13).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신자는 역사의 마지막에 있는 부활을 현재에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말론적 부활의 시작인 동시에 첫 열매이다. 따라서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의미있는 말로 자주 표현하였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죽음과 심판 및 부활을 참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신자는 여전히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삶은 오직 성령의 계속적인 도우심(牽引)을 통해서 유지 될 수 있다. 여기서 신자는 비록 그가 그리스도를 통해 현재 여기서 종말론적 구원을 일부 체험하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종말에 있는 완전한 구원을 또한 대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신자는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긴장된 상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제 2 절 바울의 개인 종말론 사상
1. 중간 상태
바울의 종말론 교훈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해서 이다. 죽음과 부활의 중간상태에 대해서는 고후5:1-10에 약간 임시하고 있을 뿐 이것도 해석상에 많은 문제가 있다. 바울은 그리이스 철학의 영혼불별설에 대조해서 마지막 날 부활을 특히 강조한다. 마지막 날 부활한 몸은 단순히 죽기 전의 몸의 회복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새로운 하늘에서 오는 신령한 몸이다. 바울은 중간상태에서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는가하는 중간 상태에서의 인간의 존재양식에 대해서 구체적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중간상태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암시를 줄 뿐이다(빌1:23). 이것은 예수께서 죽어가는 강도에게 말씀하신 그 이상의 해석은 아니다(눅23:43).
R. H. Charles를 위시한 여러 학자들이 신자가 죽는 순간 즉시 불변의 몸을 소유한다고 주장하나 여기에 대한 확실한 성경적 증거가 없다. 오히려 이러한 견해는 마지막 날 부활의 몸에 대한 사상을 약화시킨다. Oscar Cullmann은 중간 상태 즉 죽음과 부활사이의 영혼은 잠자는 상태라고 말하고있다. 최근 학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 바울도 종종 죽은 상태를 자는 것으로 말한 것은 사실이다(살전4:13, 고전15:10등). 그러나 잠자는 것은 그리이스나 히브리 문학에서 죽음에 대한 일반적 용어이기 때문에 바울은 이런 영향 속에서 문학적 표현으로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였으므로 특별히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잘못 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재림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다양한 표현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역상의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백성을 찾아 오시는 최후의 구속사적 방문이다. 이 방문을 통해 하나님은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로 각각 구분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영원한 저주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혹은 어쩌면 에배소서까지 제외한 바울의 모든 서신서들 가운데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급되고 있을 뿐 아니라, 기독교 복음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기 위해 3가지 특징있는 용어 즉 '파루시아'(παρουσια), '아포칼립시스'(αποκαλυψιs), '에피파네이아'(επιπανεια)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을 G. E. Ladd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파루시아(παρουσια)는 '임재'(빌2:2), '도착'(고전16:17, 고후7:7)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특별히 왕이나 황제들의 지방방문 등, 고위계층들이 방문하는 의미로 사용된 전문 용어이다. 이와같이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에(마24:3)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고전15:23) 백성을 자신에게로 모이시고(살후2:1, 비교 마24:31) 악을 멸하기 위하여(살후2:8, 살전2:19, 3:13, 4:15, 5:23) 권능과 영광 중에(마24:27) 세상으로 다시 찾아오실 것이다.
아포칼립시스(αποκαλυψιs)는 '계시'(드러내는) 혹은, '노출'을 뜻한다. 부활 승천한(승귀)그리스도께서는 높아지신 주(主)로서(빌2:9) 지금 왕으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좌정하고 계신다(고전15:25). 그러나 그의 왕권과 주권은 지금 세상에 완전히 드러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왕권과 주권은 때가 될 때, 즉 그의 재림 때에 완전히 드러나고 효과를 발하게 될 것이다(살후1:7, 고전1:7). 그 때에는 모든 자들이 무릎을 그 앞에 꿇을 것이며 모든 입술이 그의 주(主)됨을 고백할 것이다(빌2:10,11).
에피파네이아(επιφανεια)는 '나타냄'을 뚯하는데, 그리스도의 재림의 가견성(可見性)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주로 목회서신에 한정되어 사용되기는 하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그 입김으로 말미암아 불법의 사람을 죽이시고 파루시아 에피파네이아(by the parousia of epiphaneia)통하여 그를 폐하시리라고 말한다(살후2:8). 그리스도의 재림은 비밀이거나 숨겨진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역사 안에 침투하는 가시적인 것이다.
바울은 재림의 시기가 언제이냐 하는 문제에서 언제나 예수의 말씀을 반복하여 답변하고 있다. 즉 그날은 전혀 예상치 못한 시기에 '밤에 도적같이' 임할 것이라고 말한다(마24:43, 눅12:39, 살전5:1ff).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백성들에게 요청되는 바 그들은 '깨어 근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바울의 교훈이나 사복음서에서 말씀하시는 예수의 교훈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양자가 한결같이 역사 안에 영광스럽게 임하는 그리스도의 인격적이고 역사적인 재림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가 재림함으로 하나님의 모든 구속경륜은 마지막 완성에 접어들 것이다.
3. 부활과 심판
바울은 신약의 어떤 저자보다도 부활에 대해 많이 취급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죽은 자가 부활이 없다(고전15:12)고 주장하는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답변할 때 이 문제에 있어서 아주 큰 공헌을 하였다. 구원은 항상 전인격적이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의 몸의 부활을 거듭 강조했다.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당시 그리이스 철학의 영향 아래 있는 고린도 교회들에게 이 사실을 명확히 밝혔다. 그러나 그는 부활한 몸의 성질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다만 부활한 몸은 영광스럽고 불변적인 것 만을 밝혔다. 또한 그는 신자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밝혔다. 그리스도를 부활시킨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을 또한 부활케 할 것이다(고전6:14, 고후4:14) 실제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마지막 부활의 첫 행위이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말론적 부활 추수의 첫 열매인 것이다(고전15:20). 신자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시에 있게 될 것이다.
심판에 대해서는 롬2:5,16,13:2, 고전11:32, 고전4:5, 살후2:12, 딤후4:1 등에서 말하고 있으나 가장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곳은 로마서 2장이다.여기서 바울은 그 날에 하나님께서 각자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시되(롬2:5),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롬2:7-8)하실 것을 밝힌다. 그리고 율법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유법으로 각각 심핀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심판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유대인이나 헬라이나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그들의 응답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인간에게 한편으로 구원을, 한편으로 심판을 가져다 주는 갈림길이다. 이 심판은 현재성과 미래성의 양면을 가진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마지막 완성은 죄와 악으로 혼란된 이 우주의 회복,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회복을 포함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재 회복을 위해 화목제물이 되셨다.
제 4 장 결 론
기독교의 모든 교리를 체계화한 인물은 사도 바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울이 그 자신의 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독자적인 사상에 의해 전개하기보다는 전승과 계시로 받는 신학인데, 이는 예수의 신학사상에 철저히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의 종말론 사상이나 예수의 종말론 사상은 너무 비슷하다고 말 할 수 있다.
예수의 종말론 사상은 예수 당시의 종말론과 예수의 종말론 사상과는 많은 공통점이 있으나 서로 다른 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종말 사상은 매우 독특한 형태의 종말론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묵시적 종말론 사상인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로부터 서서히 와서 성장하는 형태보다는 완전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성과 속이 확연하게 구별될 종말 그리고 성지 중심으로 이스라엘 민족 중심의 하나님의나라가 도래하는 사상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러한 현상들이 구체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아직도 현 세상의 상태가 유지되면서 현 세계 안에 하나님의 나라 안에 이미 도래하지만,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고 영광스럽게 강력하게 도래할 것을 선언하셨다. 다시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을 하나님의 나라 차원에서 현재적인 측면과 미래적인 측면을 말하면서 오순절 사건 이후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미래적인 종말론적인 나라가 이미 현재화(先取)되었으며, 주의 재림과 함께 주어질 그 완성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는 종말을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예수의 종말론 사상은 초대교회와 바울을 위시하여 신약성경저자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바울의 종말론의 사상은 어떤 전통적 특성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예수 안에 나타난 종말론 사상을 토대로 한 종말론 사상이다. 바울 역시 예수와 같이 유대적 종말론의 형식들과는 구분이 되어지는 완전히 독립된 독특한 종말론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의 종말론은 철저한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인데, 그 구조는 이 시대와 오는 시대의 종말론적 이원론으로 되었다. 그리고 이미와 아직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긴장된 상태 속에서 살아야 하는 종말론적인 성도의 삶을 있는 종말론 사상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종말론의 사상과 바울의 종말론의 사상은 서로 같은 구조 속에 있다. 이는 바울이 예수의 종말론의 사상을 토대로 그의 사상을 전개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바울을 보면, 그는 예수의 철저한 종이었고 사도였다. 그리고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의 가르치심의 본의(本意)를 분명히 깨달았으며, 주의 본을 따라 외인에게 구원의 경륜을 선포한 자이다.
하나님의 자녀의 현존과 종말적인 희망
- 롬 8:12-25을 중심으로-
김희성 (신약학•서울신학대학교)
I. 로마서의 구조와 본문의 맥락.
우리가 다룰 본문이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에 이것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서의 구조와 본문의 맥락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1) 로마서의 구조.
로마서의 본론은 신학적 논증(1-11장)과 윤리적 교훈(12-15장)의 두 부분으로 크게 나뉘어 진다. 우리의 본문이 속해있는 신학적 논증 부분은 다음처럼 짜여져 있다: 맨 먼저 롬 1,16-17에서 하나님의 의에 관한 주제가 선언된 후 이 주제가 4개의 단원으로 나뉘어져 설명된다. 첫 단원(롬 1,18-3,20)은 먼저 하나님의 의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둘째 단원(롬 3,21-4,25)은 이것이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됨을 역설한다. 셋째 단원(롬 5,1-8,39)은 이 의가 그리스도인의 실존 안에 사실로 이루어짐을 가장 길게 설명하고, 넷째 단원(롬 9,1-11,36)은 이 의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로마서의 주제: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롬 1,16-17):
1. 하나님의 의의 필요성(1,18-3,20).
2.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의 실현(3,21-4).
3. 그리스도인의 실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의 사실성(5,1-8,39).
4. 하나님의 의와 이스라엘의 운명(9,1-11,36).
우리가 다룰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실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의 사실성을 설명하는 셋째 단원에 속해있다. 이 단원은 다시 4개의 문단으로 나누어진다. 맨 처음에 간결한 분사구문을 통하여 "이제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었다"는 논제(롬 5,1a)가 선언된다. 이후에 이 논제에 대한 설명이 4개의 장에 걸쳐 나온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의 사실성은 첫 문단인 5장에서 사망의 권세로부터의 자유임을 밝히고, 둘째 문단인 6장에서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임을 밝히고, 셋째 문단인 7장에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임을 밝히고 마지막 문단인 8장에서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을 정돈하면 다음과 같다.
셋째 단원의 주제: 그리스도인의 실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의 사실성:
1) 사망의 권세에서의 자유(5장).
2) 죄의 권세에서의 자유(6장).
3) 율법에서의 자유와 율법의 의미(7장).
4)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종말론적 자유(8장).
이 셋째 단원 가운데서 우리가 다룰 본문은 4째 문단에 속해있다. 이 4째 문단도 대체로 4개의 항으로 다음처럼 나누어진다.
넷째 문단의 주제: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종말론적 자유:
(1) 성령의 지배를 통한 죄와 사망의 법에서의 해방(8,1-11).
(2)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들(8,12-17).
(3) 하나님의 자녀들의 종말론적 희망에 대한 보장(8,18-30).
(4) 승리의 보장에 대한 기쁨의 개가(8,31-39).
이렇게 보면 우리가 다룰 본문은 로마서에서 가장 중요한 단원에, 이 단원에서 가장 중요한 문단에 그리고 이 문단에서 가장 중요한 항에 속해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2) 본문의 문맥.
본문의 앞 문맥은 다음과 같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인간의 실존은 뒤틀려 있다. 그래서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신은 죄의 법을 따른다. 하나님께서 율법 아래에 있는 인간을 죄를 향하는 사망의 몸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시었다. 그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육신 안에 있는 죄를 저주케 하심으로 뒤틀린 인간의 실존문제를 해결하셨다. 이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인간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율법의 요구, 즉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할 때에야만 가능하다. 내재하는 영을 좇는 자는 영 안에 있는 자이며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그들의 몸은 내재하는 영으로 말미암아 부활하게 된다.
이 본문의 뒤 문맥은 다음과 같다: 이렇게 탄식하며 고통을 받고 있는 우리를 성령이 친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간구하심으로 도와준다. 이들, 즉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하나님은 이들을 미리 아셨고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그가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도록 예정하셨고, 부르셨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감히 어느 누가 우리를 대적할 것인가? 우리 모두를 위하여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께서 공동상속자인 우리에게 그와 더불어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분께서 의롭다 하셨는데 누가 우리를 송사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에 누가 정죄할 것인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는가? 아무 것도 어떠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우리의 본문은 위와 같은 앞 뒤의 두 문맥 사이에 밀접하게 서있다. 본문은 앞 문맥의 흐름을 이어받아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방법을 간단히 언급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자에 대해 정의를 내린 후, 그들의 몸의 구원에 대한 종말적 희망과 현재적 고난에 대하여 피력한다. 뒤 문맥은 현재적 고난을 인내해야 한다는 본문의 결론을 이어 받아 성령의 간구하심과 하나님의 구원의 여러 단계 안에 서 있음을 통해 승리한다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II. 주요용어 설명.
(양자의 영: 프뉴마 퓌오테시아스): 퓌오테시아는 아들로 인정함, 양자 삼음의 뜻을 갖고 있다. 이 단어가 여기서 영(프뉴마)을 수식하는 소유격으로 사용되면서 앞에 나오는 프뉴마 둘레이아스에 맞서 있다. 프뉴마 둘레이아스는 집의 아들이 아니라 종이 받는 것과 같은 영, 종의 근성의 영이다. 거기에 맞서 있는 프뉴마 퓌오테시아스는 양자로 삼는 영 혹은 아들로 삼는 영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에 따르면 신자들이 받는 영은 아들로 삼는 영이다. 이 영은 신자들이 새로운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경험하게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 숭클레로노모이 크리스티): 숭클레로노모이는 공동으로 상속하는 뜻을 갖는 형용사 숭클레로노모스의 명사로서 공동상속자란 뜻을 갖는다. 이 말은 다음에 오는 인물의 소유격과 함께 사용되어 그 인물과 공동으로 상속함을 시사한다. 그런고로 숭클레로노모이 크리스티는 그리스도와 공동상속자이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 헤 아포카라도키아 테스 크티세오스): 아포카라도키아는 열망, 고대, 강렬한 기다림을 뜻하고, 크티시스는 피조물을 뜻한다. 피조물의 간절한 기다림으로 번역할 수 있는 이 어구는 간절히 기다리는 피조물과 같은 의미이다.
(허무: 헤 마타이오테스)는 공허, 무가치, 덧없음, 무상(無常), 허무를 뜻한다.
(썩어짐: 헤 프토라)는 창조, 생성과 맞서있는 말로 파멸, 멸망, 섬멸을 뜻할 뿐만 아니라 무상의 상태나 무상의 상태에 존재하는 것(허무)을 뜻한다. 허무의 종(헤 둘레이아 테스 프토라스)은 허무한 상태가 행사하는 종의 종속성을 의미한다.
(함께 탄식하다: 수스테나조)는 함께 탄식하다, 같이 신음하다의 의미이고,
(함께 고통하다: 순오디노)는 함께 고통을 느끼다, 같이 슬퍼하다의 의미이다. 전자는 전체 피조물을 규정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로"의 해방을 갈망하는 강력한 회화어로 사용되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 헤 앞아르헤 투 프뉴마토스): 헤 앞아르헤는 첫 열매, 맏물을 뜻한다. 이 단어는 사람과 사물에 의미가 전의 되어 장자, 첫 사람, 첫 선물, 첫 은사로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 이 어구에서는 사물에 전이된 의미로 사용되어 성령의 첫 선물, 첫 은사를 뜻한다.
(몸의 구속: 헤 아폴루트로시스 투 소마토스): 헤 아폴루트로시스는 원래 종이나 포로를 몸 값을 주고 사거나 구출하거나 해방함을 뜻했다. 그런데 이 뜻이 전이되어 구원, 해방의 의미로 사용된다. 토 소마는 몸, 육체의 의미를 갖는데 소유격으로 사용된다. 이 소유격은 분리 소유격이 아니라 목적 소유격이다. 그러므로 몸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몸의 구원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여기서 소마는 육체의 의미로서 몸이다.
III. 본문의 번역.
12절: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이제는 우리가 육을 따라 살도록 육신에게 의무를 지고 있지 않습니다.
13절: 만약에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이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14절: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 입 니다.
15절: 여러분은 말하자면 다시금 무서움에로 내모는 노예근성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아 들로 삼는 영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를 통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16절: 바로 이 성령께서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합니다.
17절: 만약에 우리가 자녀이면 역시 상속자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이고 그리스 도와 더블은 공동 상속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그와 함께 실제로 고난을 받는다면 말입니다.
18절: 나는 요컨대 현재의 고난이 우리에게 나타날 미래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19절: 피조물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절: 왜냐하면 이 피조물은 무상함에 예속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 라 예속케 하시는 분에 의하여 희망을 근거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21절: 왜냐하면 이 피조물도 허무의 예속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로 해방되 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22절: 우리는 전체 피조물이 지금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느끼고 있음을 알고 있습 니다.
23절: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들, 즉 성령의 첫 선물을 받은 우리들조차도 우리 몸의 구 원, 즉 아들 됨을 기다리면서 마음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24절: 왜냐하면 우리는 희망 안에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볼 수 있는 희망은 희망이 아닙니다.
25절: 만약에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한다면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IV. 본문의 짜임새, 흐름, 제목 잡기.
1) 본문의 짜임새.
12-13절: 1-11절에 의한 결론적인 경고와 권면
14-17절: 13절의 권면에 대한 설명
14절: 권면의 조건에 해당하는 자에 대한 정의
15-16절: 15절: 정의에 대한 논증
16절: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이유
17절: 16절로부터 나오는 귀결
18절: 17c절로부터 도출한 주장(논제)
19-22절: (피조물의 예를 통한) 첫째 설명
19절: 설명의 명제
20절: 첫째 이유(부정적인 면)
21절: 둘째 이유(긍정적인 면)
22절: 첫째 설명의 심화와 둘째 설명을 위한 발단
23-25절: (우리의 예를 통한) 둘째 설명
23절: 설명의 명제
24a절: 그 이유
24b-25절: 결론적 권고
2) 본문의 흐름과 제목 잡기.
본문은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요구, 즉 율법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정해진 새로운 실존이라는 앞 문맥을 이어 받아 전개된다. 그 흐름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형제들(그리스도인)은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의무가 없다. 육신대로 살지 말고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 그래야 산다. 이렇게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들은 아들로 만드는 영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아들 됨을 성령이 친히 증거해 주신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상속자이고 그리스도와의 공동상속자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에 받는 고난은 미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피조물은 허무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갈망하고 있다. 이러한 희망 가운데 현재에서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당하고 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의 첫 선물을 받은 우리도 탄식하며 우리 몸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희망 가운데서 구원을 얻은 것이다. 보이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기 때문에 참고 기다려야 한다.
본문이 이처럼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제목을 간단하게 잡기가 어렵다. 그러나 문맥과 본문의 흐름을 고려하여 제목을 잡아본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현존과 종말적 희망"이라고 할 수 있겠다.
V. 본문풀이.
12절: "그러므로 이제는"이란 도입구를 통하여 앞의 진술들로부터 경고적인 결론이 도출된다. 여기서 바울은 3-4절에서 개진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목적인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로마서의 청중들에게 육적인 욕망을 따르는 삶에로 복귀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한다. 이 경고는 바로 앞의 9-11절에서 기독인의 존재, 즉 우리의 영도 살리고 우리의 몸도 살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육에 거하지 않고 영 안에 있는 존재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에서 이끌어낸 것이다. "형제들이여"란 부름은 경고의 긴박감을 고조한다. 우리 성경에 "빚진 자"로 번역된 말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항상 "의무를 진"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육을 따라"는 "육적인 욕망을 따라"의 의미로, 명사적 용법으로 사용된 속격 부정사 "육을 따라 사는"은 "육을 따라 살도록"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12절은 그들이 육적인 욕망을 따라 살도록 육신에게 봉사할 의무를 진 것이 아니란 사실을 긴박하게 강조한다.
13절: 13a절은 12절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제공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육을 따라 산다면 반드시 죽기 때문이다. 이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강력한 바울의 경고가 담겨있다: 기독인들도 육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는다. 왜냐하면 육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죄와 사망의 법을 아직도 종처럼 섬기기 때문이다. 이 다음에 오는 구절(13b)은 앞의 구절과 다음처럼 대구적인 병행을 이루면서 중요한 권고를 하고 있다: "육을 따라 살면"이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에, "죽는다"가 "산다"에 각각 맞서있다. 또 "죽는다"에는 "반드시 ... 할 것이다"를 사용했다면 "산다"는 단순히 미래형으로 쓰여져있다. 이 대구적인 병행을 통하여 뒤 절의 권고 내용이 현저히 부각된다. 기독인이 육을 따라 죄의 법을 섬기면 반드시 죽게 되나, 성령의 능력으로 육체의 일을 죽이면 살게 될 것이다. 이 대구적인 병행구절에 기독인의 죽음과 삶(생명)에 대한 바울의 독특한 사상이 반영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발생한 죄와 죽음의 멸절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존재가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말고 의 안에서 행함을 통하여, 즉 몸의 행실을 죽이고 영을 따름으로써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요구를, 그의 뜻을 준행함을 통하여 증명되어져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허무에 예속되어 있는 몸의 구원이 실현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의 자유 가운데 영원히 산다. 그렇지 않으면 이 궁극적인 구원에 하등의 기회가 없다.
14절: 이 구절의 구조는 다음처럼 13b절의 구조를 따른다.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을 때에야 가능한 것처럼 "사는 것"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통해서 그 근거를 갖는다. 이러한 구조적 연관성을 통하여 이 구절은 앞 절의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는 권고를 설명한다. 앞 절의 "영"이 여기서 "하나님의 영"으로 정확하게 규정된다. "인도함을 받는다"는 몸의 행실을 죽이는데 있어서 성령의 능동적인 영향력을 시사한다. 그리고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 우리의 의무(12절 참조)이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은 인간의 능동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기독인의 행동을 규정하는 성령의 능력이 더 강조된다. 그러나 인간의 능동성이 배제되지 않기 때문에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란 말은 성령이 인도하게 하다와 동일한 의미이다. "... 하는 자들은 모두"는 배제적이고 강화된 "... 하는 이들만이 그리고 이들은 모두"의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아들" 칭호는 먼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그것의 왕적인 대표성을 위해 사용되었다. 그것이 후에는 드물지만 경건한 개인에게로 전용(轉用) 되었다. 그것이 헬라 사회에서는 신인간에게, 밀의 종교에서는 비전(秘傳)의 전수자에게, 영지주의에서는 천상세계의 구성원으로서의 신자에게 적용되었다. 초대 기독교는 종말론적인 경향성 때문에 이런 주변세계와 구별하여 그 칭호를 성령에 사로잡힌 자에게 사용했다. 이 본문에서도 이러한 관련성이 깊게 나타나 있다. 그런고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영에 인도함을 받는 자만이,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자신을 인도하게 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15-16절: 이 두 구절은 앞 절의 하나님의 아들을 설명한다. 15절에서 바울은 다시 "너희들은 ... "하고 2인칭 복수를 사용하여 먼저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후 "노예근성의 영"과 "아들로 삼는 영"을 대조적으로 맞세우고 있다. 그는 2절에서 언급한 율법으로부터 기독인의 해방을 근거로 하여 그렇게 했다. 먼저 상반절의 노예근성은 율법 아래에 있는 성향을 말한다. "두려움"은 속박의 결과로서 구속되지 못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앞에 서있는 피조물의 표시이다. 이 상반절은 너희는 율법 아래에 있는 성향을 갖게 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앞에 있는 죄인의 두려움에로 복귀시키는 영을 받은 것이 아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반절의 "아들로 만드는 영을 받았다"라는 단순과거는 이미 과거에, 말하자면 세례시에 성령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양자로 삼음의 원래 헬라적인 의미보다는 아들로 삼음이 부각된다. 아들로 삼는 영은 다음에 오는 관계절에서 그 특성이 잘 나타난다. 관계절의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는 셉튜아진타에서는 긴박한 기도를 위한 전문용어다. 아바 아버지는 주기도문의 처음에 나온다. 그런고로 이것은 예배시 영에 사로잡힌 황홀경에서의 부름 혹은 환희적 기도의 부름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16절과 잘 연결된다. 이 기도의 부름 안에서 성령이 우리의 영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한다. 앞 절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대치된다. 이 두 어구는 분명히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용어이다.
"우리의 영"은 신적인 증거를 받아드리는 마음, 정신적인 나, 이성, 영혼 과 같은 인간적인 기관을 의미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영"을 인간적인 이성과 엄격하게 구별할(고전 14,14)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고유한 가장 내면적인 나를 묘사하려는 곳(롬 7,17-23)에서도 의식적으로 "영"의 사용을 피한다. 그는 하나님의 영을 받는 기관에 대한 생각을 표명하는 곳에서 이것을 "영"으로 불렀고 그것을 자신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으로 표시한다. 그에게 있어서 영은 철저히 하나님의 영의 본성을 보존하고 인간 자신의 존재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그를 위해 사는 "가장 내면적인 나"가 된다. 그런고로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형성된 기독인의 "가장 내면적인 나"다.
이러한 해석은 다음의 "더불어 증거하다"의 해석을 통해서 더욱 확실하게 된다. 이 말을 엄격히 해석하자면 그것은 성령만이 아니라 기독인 안에 있는 "가장 내면적인 나"도 자기를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함을 내포하고 있다. 바울신학에 따르면 인간에게 고유한 "가장 내면적인 나"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 형성된 "가장 내면적인 나"를 통해서 가능해 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16절의 진술을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아는 기독인의 "내면적인 나"의 신앙증언이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 확증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17절: 바울은 여기서 16절로부터 중요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아들 됨이 상속권을 향유한다. 기독인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상속자"이다. 즉 약속된 유산이 우리 기독인에게 주어지게 된다. 이 유산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종말의 사실성 안에 보존되고 그들에게 주어질 희망물이다. 문맥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 몸의 구원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우리 기독인들은 그리스도와 상속을 함께 받는 "공동상속자"이다. 종말적인 미래에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지상적인 현재에 그와 함께 사실로 고난을 받는 한에 있어서 그렇다. 이 조건절에는 기독인이 그리스도의 공동상속자로서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반영되고 있다. 기독인은 사실적인 고난 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현존하는 곳에서는 아무도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분을 따르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미래에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아주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이 조건절은 문맥을 고려하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지상에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자만이, 고난과 함께 몸의 행실을 죽이는 자만이 그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18절: 여기서 바울은 17c절의 조건적 진술로부터 이끌어 낸 종말적인 희망에 관한 논제를 제시한다. 그는 이것을 "주장하다, 판단하다, 믿다, 생각하다"를 뜻하는 동사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그것을 가지고 확신이 아니라, 확고한 판단을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이 논제는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과의 대비 속에서 묘사된다. "현재"는 과거와는 구분된, 그리스도의 사건 안에 있는 구원사적인 전환을 통하여 규정된 종말론적인 현재다. 그것은 지상적인 현재도, 구원의 시대도, 사악한 시대도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려진 구원의 시대를, 즉 이미 현재에 시작된 그러나 아직은 아닌 종말적인 상황이 지배하는 시대를 표시한다. "현재의 고난"은 마지막 구원의 시대의 도래에 앞서 일어날 환난들(롬 5,3)이다.
이 "현재의"와 반제로 맞서있는 "미래의"는 원래 "임박하다, 막 ... 하려고 한다, ... 해야만 한다"는 뜻을 갖는 동사의 미래를 위한 대치로 사용된 수동태 분사다. 이 분사는 다음에 따라오는 단순과거 부정사와 함께 "우리에게 나타나야 할" 혹은 "우리에게 나타나야만 하는"의 뜻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기다리는 사건, 즉 재림의 임박함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타나야 할 미래적 구원사건의 사실성을 강조한다. "영광"은 바울의 이해에 의하면 근본적인 하나님의 존재양식이고 하나님 자신의 직접적인 분위기이다. 이것은 그분의 계시를 통하여 나타나는데 창조주의 능력 안에서 빛나는 이성에 의하여 보여지고(롬 1,19ff. 참조), 역사적 현시들 안에 있는 그의 심판과 구원의 능력 안에서 믿음의 눈으로 보여지고,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능력(롬 6,4 참조) 안에서 보여진다. 이 영광은 종말사건 안에서 결정적으로 빛나게 된다. 이 안에 구원의 세계가 존재한다. 바로 이 영광이 그리스도인들이 희망해야 할 최종적이고 고유한 것이다.
그런고로 바울은 여기서 현재의 고난은 우리에게 나타날 미래의 영광에 비하여 하등의 가치가 없다고 선언한다. 우리에게 나타날 미래의 영광을 언급하는 마지막 구절은 다음에 오는 희망과 관련된 모든 진술의 해석학적인 범주가 된다. 왜냐하면 이 영광은 이미 내재적인 희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19절: 바울은 18절에서 제기한 논제를 피조물의 예를 들면서 전개하기 시작한다. "피조물"은 모든 인간을 포함한 전체 피조물이나, 기독인을 제외한 전체 피조물이 아니라, 인간을 제외한 전체 피조물을 뜻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인 기독인들이 종말사건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 안에 실재가 되어 나타나는 그러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그들의 나타남은 그들을 아들로서 부활하신 분과 함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고(롬 8,29절 참조),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그리스도의 공동상속자가 된다. 피조물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결정적인 종말사건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논제를 전개한 바울은 전체 피조물이 이 사건을 갈망하는 이유를 20절에서 부정적으로, 21절에서 긍정적으로 상술한다.
20절: 피조물이 간절히 기다리는 이유는 그들이 허무에 내던져져 있기 때문이다. "무상"이란 단어는 실재세계에 대조를 이루는 가상세계의 상황이나 존재의 소외상황을 묘사하는 말로서 존재의 소외, 존재의 상실, 존재의 덧없음 혹은 존재의 가멸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피조물의 무상(無常)은 하나님의 상존, 불멸과 맞서 있다. 여기서 말하는 피조물의 무상함, 덧없음은 시작과 끝을 갖는다. 시작의 앞과 끝의 저편에 하나님과 "무상함"이 없는 피조물이 서있다. 피조물은 이 무상함에 자의적이나 잘못으로가 아니라 운명적으로 예속되어 있다. 자의가 아니라는 것은 피조물이 스스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이 덧없음에 예속된 것은 인간타락의 결과다. 여기에 피조물의 운명과 상황이 인간의 운명과 상황에 종속되어 있다는 묵시적 사상이 반영된다. 피조물이 덧없음에 던져짐은 그렇게 하시는 분에 의해서 였다. 이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긍정적인 전망을 가지시고, 즉 희망을 근거로 그렇게 행하셨다. 덧없음에 내던져짐은 종말적인 구원 사건의 전망 안에서 발생한 것이다.
21절: 피조물이 고대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허무의 예속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로 해방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허무"는 앞 절에 나온 무상의 개념을 설명한다. "허무의"는 질(質)의 속격이기 때문에 "허무의 예속"에서 예속은 피조물 위에 가리워진 허무가 의미하는 것이다. 허무의 예속은 영광의 자유에 대조적으로 병행한다. 여기서 허무와 영광은 이원론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힘으로 묘사되고 있다. "영광의 자유"도 질의 속격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광과 자유는 질적으로 일치한다. 여기에 연이어 있는 속격 구조는 강조적이다. 모든 것이 날카롭게 자유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하여 이 어구는 종말적인 영광이 자유를 완성하고 이 자유가 다시 하나님의 자녀들의 종말적인 영화의 내용이 됨을 시사한다. "해방되다"의 논리적 주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그 자신의 존재양식인 그의 영광에 참여케 하는 자들에게 자유를 창출해 주신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피조물의 기대는 기독인의 기다림과 동일한 희망 안에 근거를 갖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22절: 여기서 바울은 "우리는 ... 알고 있다"란 도입어투로 위의 설명을 계속하면서 다음의 둘째 설명 단락을 준비한다. "알고 있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함께 탄식하다"는 20절의 예속된 것을 근거로 하고 19절의 고대하다란 용어를 대치한다. 이 단어는 다음 단락의 표제어가 된다. "함께"는 전체 피조물을 시사한다. 탄식의 합창이 전세계를 가득 채운다. "지금까지"는 문장의 맨 뒤에 세워져서 강조되며 18절의 "현재"를 의미한다. 이 시기는 피조물의 현존과 목적 사이에 있는 모순에 의하여 허무에의 예속이 항상 지속되는 시기이며 탄식과 희망이 공존하는 시기이다. 피조물의 탄식은 아래로부터 위를 향한 점증을 묘사하는 순서의 첫 단계다. 23절에 둘째 단계인 기독인의 탄식이 나오고 마지막 단계인 성령의 탄식이 26절에 나온다. "함께 고통을 느끼다"는 바로 앞의 탄식하다를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이 두 용어의 배후에는 오는 새 시대의 예표인 메시아 시대의 고통의 묵시적 상이 놓여 있다. 이 구절에서는 허무에 예속되어서 그래서 미래적 해방을 고대하는 피조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들은 탄식과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고대하고 있다.
23절: 여기서부터 25절까지는 둘째 설명을 다루는 부분이다. 먼저 설명의 명제로 탄식의 두번째 순서인 기독인의 탄식이 등장한다. 도입구 "그들만이 아니라 ... 우리들조차도"를 통하여 피조물의 탄식과 기독인의 탄식 사이의 병행만이 아니라 점증되는 순간임이 강조된다. 이것은 "우리들"과 "우리들조차도"를 통한 강조적 반복에서 분명해진다. "첫 선물"은 고후 1,22;5,5의 담보 혹은 보증(아라본)과 동의어이다. 성령은 종말로부터 미리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는 아들 됨을 증거하고 미래의 구원을 보증한다. 그가 증거하는 아들 됨의 실현은 하나님의 종말적 사건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 됨은 "몸의 구원"으로만 완성된다. 이 용어는 18절과 21절을 받아 우리에게 나타날 미래의 영광의 영향, 즉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몸의 구원이야말로 구원의 최종적 완성이다. 그것은 영광의 자유를 내용으로 한다. 이 기독자의 몸의 구원은 피조물의 허무로부터의 해방에 병행하고 피조물의 기다림의 대상이 된다. "기다리다"는 19절에서의 피조물처럼 현재의 예속적 현존과 고난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때에 이루어질 기독인의 하나님의 아들 됨을 목적으로 갖는다. 기독인은 다른 피조물과는 조금 다른 상황에 놓여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고 종말적인 존재의 첫 선물인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아직 허무에 예속되어 있다. 그들은 성령이 그들에게 증거한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즉 그들의 죽을 지상적인 몸이 죽지 않을 영광의 몸으로 변함으로써만 완성되는 몸의 구원을 마음 속으로 고대하고 있다. 기다리기 때문에 그들은 피조물처럼 탄식한다. 완전한 자유를 기다리며 허무의 예속을 탄식함에 있어서 기독인과 피조물은 연대적이다.
24-25절: 여기서 앞의 명제에서 언급한 기다림에 대한 이유가 나온다.
이 기다림이 기독인의 존재의 특성을 묘사하는 용어인 "희망"으로 대치된다. 희망은 바울의 견해에 의하면 믿음과 함께 기독인의 현존의 세 가지 특성을 구성한다: 미래적인 것의 기다림, 신뢰와 인내. 그런고로 기독인의 존재는 희망없이 생각할 수 없다. 희망은 하나님의 약속, 이미 증명된 하나님의 사랑, 칭의와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를 근거로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불확실성을 물리친다. 그것은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게 한다. 이 희망은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에게 일어난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 희망의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희망이 넘치게 하신다(롬 15,13).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의 희망 없는 상태를 끝장내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희망의 삶을 선사하셨다. "희망 안에서"란 말은 하나님의 아들 됨의 실현, 즉 우리 몸의 구원을 내용으로 한다. 몸의 구원은 아직 미래적이고 희망의 대상이다. 이 희망은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에게 부여한 희망과 같다. 기독인들이 희망하는 구원은 전 피조물의 해방을 포함한다. "우리는 이 희망 안에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라는 진술 안에 미래의 최종적인 구원과 현재적 구원 사이의 긴장이 반영된다: 기독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리고 부활하신 분, 즉 이미 영광을 받은 자와 결합됨을 근거로 의롭다 함을 받고 진노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궁극적인 구원이 미래에 있기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성령이 증거한 것의 실현에 대하여, 즉 하나님의 아들 됨에 대하여 기다려야 한다.
이 기다림에 대한 이유에 곧 희망에 대한 정의가 따른다. 이 정의에서 보는 것과 희망하는 것 사이의 대조가 다루어진다. 희망은 "보다"와 대조적이다. 왜냐하면 희망은 보이지 않는 것에 향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볼 수 있을 때 희망은 필요치 않다. 그런고로 "사람이 볼 수 있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희망한다. 여기 25절에서 바울은 결론을 이끌어 낸다.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한다면 우선 참아야 한다. 기독인은 이미 발생한 칭의와 아직 기다려야 할 완성 사이의 긴장 가운데 서 있다. 이 긴장을 신자는 인내로 극복해야 한다. 다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한다면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다"는 19.23절의 표제어(피조물이 기다리다, 우리가 기다리다)를 받는다. 기독인의 기다림은 피조물의 기다림과 다르지 않다. 그는 전체 피조물을 대리하여 성령을 첫 선물로 그리고 담보로 이미 받은 경험과 신앙 안에서 허무의 압박을 이기는 희망의 힘을 실현하여 인내로 기다리고 인내의 기다림을 계속해야 한다.
VI. 메시지.
본문을 통한 메시지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복음이 복음되게 하라"이다.
즉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하여 발생한 것이 기독인에게 실재가 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에서 발생한 것이 무엇인가?
십자가에서 발생한 것은 죄사함만을 야기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도록 죄를 멸한 것이다.
부활에서 발생한 것은 사망을 멸하신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영광의 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사건이다(롬 1,3-4).
죄와 사망의 죽임과 하나님의 아들이 됨은 죄의 법을 따르는 몸의 행실을 죽이고 성령을 따름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는 행위 안에서 증명이 되어야, 즉 믿음의 내용이 행위를 통하여 증명되어야 실재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법을 따라 율법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실행해야만 허무에 예속된 그의 몸이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의 자유에 도달하게 된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이 바로 이 궁극적인 구원의 조건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데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뜻하시는 율법의 요구를 수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그런고로 기독인의 현존은 신령한 율법의 요구를,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데 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요구를, 하나님의 뜻을 준행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는 영화롭게 됨을 바라보며 현재에서 거룩한 삶,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영원히 산다.
율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수행하려면 우선 소극적으로는 육신을 따라 살지 말아야 한다.
육적인 욕망대로 살면 죄의 법을 따르는 것이 되고 죄에게 종노릇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살면 반드시 죽는다.
육신을 따라 삶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그리하여 죽음으로 인도하는 죄는 무지막지한 죄가 아니다.
그것은 롬 1,29-31과 갈 5,19-21에 나타난 평범한 죄들이다.
예를 들면 탐욕, 시기, 악의, 비방, 교만, 음행, 수군거림, 무정함, 방탕함 등이 죽음에 이르는 병들이다.
이러한 육의 성향들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려면 적극적으로는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신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따르고 영의 인도를 받아야 하며 성령의 법을 따르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성령을 따르는 삶에서 나오는 일들은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와 절제 등이다.
이렇게 육신을 따르지 않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게 될 때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
이렇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들은 종말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실재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바를 실행함으로 종말에 성령이 증거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상속자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공동상속자다. 그는 공동상속자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존재다. 현재 지상에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자 만이, 그 고난을 인내로 이기며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자 만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기독인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몸의 구원을 통하여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기독인의 희망은 바로 이 종말론적 구원에 있다. 허무에 예속되어 있는 피조물도 동일한 희망을 갖고,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로 해방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때 영광의 자유에로 해방될 것이다. 피조물의 운명은 인간의 행위에 종속되어 있다. 그들이 인간의 범죄로 허무에 예속되었듯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인간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날 때) 영광의 자유를 얻게 된다. 기독인은 탄식과 희망과 기다림에 있어서 피조물과 연대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인은 성령의 첫 선물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피조물의 대표자이다. 이러한 대표적이고 책임적인 존재로서 기독인은 현재에는 승리를 기약하는 인내로 몸의 구원을 기다리며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삶으로써 장래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피조물들의 기다림과 희망이 이루어지고, 그들이 영광의 자유에로 해방되어져서 우리 모두와 더불어 영광과 자유의 천국잔치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신학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종교다원주의란 무엇인가? (0) | 2011.02.25 |
---|---|
[스크랩] 예정론의 바른 이해와 오해 (0) | 2011.02.22 |
[스크랩] 기독교 교리문답 (0) | 2011.02.05 |
[스크랩]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0) | 2011.02.05 |
[스크랩]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 (0) | 2011.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