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칼빈의 개혁정신과 한국교회의 갱신 (김재성)

수호천사1 2011. 1. 24. 19:07

칼빈의 개혁정신과 한국교회의 갱신

김재성 (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조직신학)


1. 한국교회의 위기론과 그 대처 방안모색

그동안 한국교회는 날로 발전하여왔고, 세계를 향한 복음전파와 봉사에서 앞장서 왔다. 그러나 최근 교회와 관련된 일들 가운데 우리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는 불미스러운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지금 한국교회가 직면한 일에 대해서 어느 누구에게만 탓을 돌리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서 우리 한국교회가 더욱 거룩한 생활에 힘써야만 한다. 문제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이 별로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이점은 최근 미국에서 나온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자체분석에서도 종종 발견되고 있다.

서구교회의 퇴조는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는 주님의 탄식을 반영하고 있어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회의 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중소형 교회들과 개척교회들은 전도의 열매가 쉽지 않아서 운영상의 난관에 봉착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대형교회들마저도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실 대형교회들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절박한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소형교회의 문제들은 이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지금 한국은 총체적 위기상황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한국인들의 정신구조가 모두 다 잘못된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이 시대가 위기에 처해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교육과 문화 모든 분야에 어두운 그림자가 뒤덮고 있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들은 경제위기만을 거론하고 있다. 그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한국인들의 심성에 영향을 주는 잘못된 정신적 죄악들인데, 대부분 그 핵심들은 거론하지 않고서 그저 표피적인 문제만을 거론하고 있다. 한국의 위기는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지 못해서 발생한 것이라 결코 아니다. 마치 우후죽순처럼 거대하게 지어지는 모텔을 보면서 모든 사람이 개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음탕한 유희를 즐기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방탕한 한국인들의 성윤리가 이미 부도덕의 극치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은 고도 경제성장기를 거치면서 재벌구조의 산업화를 추구해왔다. 대규모 기업집단은 거의 명문반열에 올라서 승승장구했다.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을 희생한 바탕 위에서 이들 대기업의 특혜와 번영이 가능했었다. 그러나 정직하게 돈을 버는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무조건 크고 많이 벌어들이는 기업만이 버젓이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고도의 급성장 배경에 얽혀있던 윤리부재 현상은 공적자금을 받은 기업들의 도덕적 해이에서 여전히 드러나고 있다. 근면, 성실, 절제에 가치를 두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가 부재한 한국 기업들이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고질병을 고치지 못한 상태에서, 교회가 그저 양적인 확산에만 정신을 쏟고 있다면,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서구 유럽이 당했던 기독교의 위기를 그대로 맞이할 것이다. 미국 고든 카넬 신학대학원 데이빗 웰즈 박사는 심지어 복음주의 교회에서조차도 상업주의에 빠져서 건전한 신학이 사라지고 있음을 탄식하고 있다. 이러하니 전세계적으로 교회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진단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기업을 선호하는 한국인들은 대도시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는데, 대형교회 위조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재벌을 선호하는 한국인들처럼, 대형교회를 향해서 최근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있고, 작은 교회들과 개척교회들은 오히려 성도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중소기업을 기피하는 젊은이들이 대기업에만 입사원서를 내듯이, 개척교회에 다니면서 희생과 봉사를 싫어하는 현대 한국 기독교인들의 경향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둘째로, 대형교회들이 거의 대부분 지도력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대형교회를 인도해온 유명한 설교자들이던 몇몇 담임목회자들의 은퇴에 직면해서, 혹은 목회운영과 관련해서 내부적 갈등, 분쟁, 분열 상이 속속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목회자들에게 찾아오는 각종 유혹들에서 넘어지고 나면 곧바로 사회문제가 되어 버린다. 후임 목회자 선정, 교회 재정운영의 투명성, 목회자의 윤리적 방탕 등이다. 그런데도 최근 몇 대형교회들은 지방에까지 프랜차이즈식으로 '지점'을 개척하여, 영상으로 통일된 예배를 들이면서 성도들을 흡수하고 있다. 최근 서울의 한 대형교회가 전세계적으로 '지부'를 구성하여 개척선교를 한다고 하다가, 미국 보스톤과 로스엔젤레스 목회자들의 강력한 항의와 반발에 직면해 있다고 한다. 왜 이미 교회들이 많이 사역하는 장소에 자신들의 대형 교회이름을 사용하는 또 다른 교회를 개척해서 중복투자를 해야만 하는가? 이제 한국 대형교회들은 더 이상 사도행전에 나오는 거룩한 교회 공동체는 사라지고, 오직 예배를 참석하고 돌아가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심히 염려된다.

셋째로, 한국교회에 등장한 불건전한 교회들과 이단 사이비 교회의 증가가 폭발적이라는 사실이다. 최근 갑자기 늘어난 이단들의 발호는 정말로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한국개신교 내에서 아무도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기관이 없고, 전문가도 적고, 극심한 저항에 대비하는 마땅한 전략도 없다는 것이다. 기존의 전통적인 교회에서 따뜻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단에 감염된다고 하는 바, 인간적인 친절과 편안함에 이끌려서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런 경우, 기성교회의 책임을 회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지금 대학 캠퍼스에는 각종 이단들이 합법적인 써클로 위장 등록하여 젊은이들의 혼을 빼앗고 있다. 한국 교회는 이단에 대처하는 기관과 인력을 보강하고 신속하게 재정을 지원하여야 하는데 이런 일에 앞장서는 단체는 힘이 없고 미약하다. 이단은 이단을 낳고, 불건전한 교리는 또 다른 유사 기독교를 만들어 낸다. 자기들이 받은 것에다가 새로운 것을 더하기 때문에 자꾸만 이단적인 요소들이 확산되고 있고, 지금 한국에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이단들이 많다. 정통교회는 정체되고 있는데, 불건전한 교회들과 사이비 이단들은 확장일로에 있으니 어찌 위기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필자는 위기진단에서 곧바로 비관론으로 발전하는 것을 경계한다. 교회는 하나님이 친히 보살피고 있으므로 비관적이지 않다. 세속 문화의 미래는 비관적이다. 더욱 더 쾌락과 저질 오락문화로 전락할 것이다. 한국의 노래방 문화가 처음에는 가족들의 노래방이더니, 이제는 부패의 온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문화적 비관은 피할 길이 없다. 그러나 회개와 죄의 고백을 통해서 새 영을 부여받는 교회는 살아남을 것이고, 빛과 소금이 될 것이다. 따라서, 비관적이지는 않지만 문제는 위기 상황을 돌파하는 대안을 제시하여 새로운 한국교회가 되는 길이 어떤 것인가? 칼빈의 신학은 오늘의 한국교회 위기를 위한 좋은 대안을 제시하며 교훈을 준다는 면에서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고려할 부분들이 많다.

II. 칼빈의 개혁신학

1. 칼빈의 개혁정신: 권징에 대한 목회적 요청

칼빈의 목회와 신학저술을 살펴보면, 암흑기에 진리를 밝혀주는 바른 진리의 해설들과 부패하고 타락한 시대를 향한 간절한 호소가 들어있다. 제네바 교회에 다시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게 되자,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마음에 있는 생각을 표현하였다.

만일 여러분들의 목사로서 나를 갖기를 바란다면, 여러분들의 생활의 무질서를 고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추방하였지만, 다시 초빙하기로 진심으로 원하신다면, 여러분들 가운데 널리 퍼져있는 방탕과 범죄들을 청산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토록 부도덕한 곳에서는 더 이상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복음의 원수들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로마의 교황청도 아니요, 이단들도 아니며, 방탕하도록 유혹하는 자들도 아니요, 가혹한 학정이 아니라, 나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나는 육체적 탐욕에 젖어있는 자들과 술집에서 방탕하는 자들에 대해서 더욱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선한 생활의 열매가 없는 이 죽은 신앙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진리 그 자체가 과연 중요하게 생각되겠습니까? 어디에서 그런 사악한 생활이 진리와 일치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던 적이 있으며, 말한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힌 적이 있었습니까? 이젠 두 번 째로 나에게 여러분들의 도시를 떠나라고 말하든지... 아니면 교회에서 강력한 법으로 다스리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순수한 권징을 다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칼빈은 강력한 권징과 훈련, 교회의 철저한 생활 개혁을 주문하고 있다. 1541년 제네바 교회로 다시 돌아오게 될 때에, 칼빈이 성도들에게 보낸 공개적인 서한에서 강력히 호소한 것도 역시 경건을 회복하라는 부탁이었다. 이 때의 칼빈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바치려는 순교자적인 결심을 하고 독일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스위스 제네바로 돌아 갈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좌우명과 같은 "나의 심장을 드리나이다"라는 말을 담아서 자신을 향해 그토록 간절하게 제네바로 돌아가 개혁작업을 계속해 줄 것을 요청하는 기욤 파렐에게 편지를 보냈다.1538년에 추방명령을 받고 불명예스럽게 떠나야 했던 제네바는 불과 3년여의 종교개혁이 정립되지 못하여 신학적으로 큰 소용돌이 속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무엇을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 것인가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사람에게 주신 신학적인 분별력은 너무나 정확하고 명료한 대답이었다.교회는 거룩한 모임이요, 주님을 머리로 한 몸의 지체이지만, 아직 완전한 공동체가 아니다. 교회는 날마다 거룩함에 있어서 발전해 나가야 한다. 그의 주된 저술,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교회가 권징을 실시할 것은 강하게 피력한 바 있다. 교회 권징이 필요한 여러 가지 이유도 있지만 사도들에게 부탁한 바울의 간곡한 당부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에는 자기편으로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난다는 권고에 기인한다(행 20:31). 그리고 도나티스트들을 정죄했던 어거스틴이 권징을 강하게 역설하였음에 주목하게 된다.

그러나 그 주체가 로마 가톨릭과 같은 주교들을 정점으로 한 정치집단이 되어서는 안되며, 말씀에 입각한 목회자들과 성도들에 의해서 공동으로 시행되어야 할 것을 주장했다. 그 이유는 "사탄이 빛의 천사로 자신을 가장하여" 교회의 통일과 평화의 결속을 깨트리고 분열시키려는 시도만을 하기 때문이다 (고후 11:14).

지금 한국 교회의 문제는 거룩한 노력이 부족하며, 영적인 상태를 책임지는 교회의 책무를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게을리 하고 있다. 성도들은 그냥 교회에 나와주는 것만으로 자신들의 종교적 이익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그러한 이기주의자들의 사리사욕을 채워주는 단체가 아니다. 칼빈은 카톨릭에서 성직자들에게 금지시켰던 세 가지 죄악들을 상기시키면서, 이를 범하면 주교들의 처벌을 받았음을 상기시킨다. 첫째로 사냥, 놀음, 술취함에 대해서 금지했고, 둘째로 그 어떤 상업적인 행위나 돈벌이에 나서서는 안되며, 셋째로 방종하고 타락한 바람둥이처럼 춤추는데 빠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한국교회의 정신이 살아 숨쉬고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점차 사람을 좀먹어들어서 결국에는 변질시키고 마는 서양의 오락문화의 영향으로부터 휘말리지 말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한국교회에는 강력한 권징이 시행되고 살아나야 한다. 악한 것에 대해서는 엄격하되, 성도들이 깊이 반성하는 실수와 허물에 대해서는 한없이 부드러워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부족하다면, 교회는 더 이상 거룩한 공동체로서 살아남을 수 없다. 지속적으로 이러한 유혹을 받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에 대한 교회의 영적인 훈육이 필요한 것이다.

교회의 경건한 법이 살아나야만 성도들이 경계하고 조심할 것인데, 영적인 순결에의 노력은 별로 하지 않고, 한국교회는 지금 양적인 확산에만 급급하다니 참으로 본질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다.

2. 세 가지 개혁: 예배, 신학, 교회제도와 조직

칼빈은 "교회 개혁의 방법과 그 분파의 치유법"이라는 논문 (1549)에서 당시 교회 개혁의 핵심 내용을 세 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예배의 개혁, 신학의 개혁, 교회제도와 조직의 개혁으로 집약된다.

1) 예배 개혁

예배의 개혁은 16세기 종교개혁의 핵심이었다. 지금은 예배학이 하나의 예식적인 학문으로, 혹은 목회학의 일부로 축소되어가고 있으나, 종교개혁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이며, 가장 존중해야할 인식이요, 감사의 표시로
인식되었다.

루터, 쯔빙글리, 칼빈, 그리고 모든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장 저주를 받아야할 오류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하고 시정하였다. 로마 교회에서는 미사라는 희생제사를 통해서, 즉 여러 종류의 거룩한 예식들을 통해서, 다시 말하면 죽은 성자들이나 살아있는 성직자들의 중보를 통해서 구원을 추구하였는데, 이러한 것들은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을 대체시키는 우상숭배적인 시도였던 것이다.

예배는 모든 신학의 내용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칼빈의 예배에 대한 인식에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두 가지 내용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직접적으로 헌신의 행동을 통해서 경배를 올리는 것과 간접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는 행위이다. 개인적인 기도는 믿음의 가장 첫째되는 연습과 실천이었다.

그리고 예배의 질서 있는 순서도 중요시되었는데,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드려지는 예배가 되기를 바랐다. 칼빈의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며, 성례의 시행, 기도 그리고 교제라고 강조하였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좁은 예배에 대한 이해와 행사 위주의 예배 진행들을 보게될 때에 빈약한 성경이해와 실천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2) 신학의 개혁

신학이란 무용지물이요, 신앙과 믿음의 능력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잘못된 '부흥사' 혹은 '은사집회 인도자'들의 주장을 듣게 된다. 그러나 필자가 확신하는 바, 신학은 가장 필요한 학문이요, 우리가 얻은 모든 신앙적인 유익을 가져다 준 학문 중에서 가장 필요한 학문이다.

신학 중에서도 최고의 성경적인 신학체계로 일컬어지는 칼빈주의는 '제네바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칼빈의 사상과 신학은 칼빈주의 속에 용해되어 있으나, 그것은 성경적 교훈이었다. 프랑스의 종교적 부산물이 제네바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었고,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정복해나갔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잘못된 생각이다.

칼빈주의라는 신학체계는 하나의 거대한 성경적 교리체계, 인생관과 우주관, 생명과 문화를 다루는 종합적인 사상체계로 발전하였으며, 심지어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사상처럼 인식되어질 만큼 독특하게 형성되어 왔고,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문화로서 드러나게 되었다.

결국, 칼빈주의 신학체계가 정립되면서 칼빈이라는 사람도 살아남게 되었다. 칼빈은 한 시대에 오류와 잘못을 지적하는 신학자로서 자신의 임무를 마쳤고, 그것은 네델란드 정통 신학자들과 영국의 퓨리턴들과 뉴잉글랜드 개척자들의 손으로 빚어지면서 칼빈주의라는 독특한 신학체계가 형성되어졌다. 개신교 신학은 모든 삶의 영역을 새롭게 하였으며, 윤리적 기초로서 생각의 기초를 바꾸었다. 신학의 핵심기초는 역시 성경에 입각한 중요한 중세 신학의 오류를 지적하여, 종합적인 신앙의 내용들을 신앙고백서 혹은 교리문답서에 담아 놓았고 그것은 곧 바로 개혁 신학의 핵심사항이 되었다.

필자는 아홉 가지 중심진리의 진술이 칼빈주의자들에 의해서 새로운 신학체계로 정착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첫째 성경 중심주의, 둘째 하나님의 주권, 셋째 인간의 부패와 타락, 넷째 그리스도의 구원성취, 다섯 째 구원에 있어서 선택의 교리, 여섯 째 믿음을 가진 자의 성화, 일곱 째 거룩한 교회론, 여덟째 언약과 성례들의 중시, 아홉 째 부활과 재림의 소망 등이 정착되었다.

3) 교회의 제도와 조직의 개혁

칼빈은 교회 제도를 세웠고, 그 중에서도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당회제도를 신약성경의 가르침대로 복구한 최초의 목회자였다. 제네바 교회는 성도들이 선출한 대표들로 구성된 당회를 통해서 교회의 치리를 감당해 나갔다. 「기독교강요」 제 4권에서, 칼빈은 참된 교회의 표지와 거짓 교회로부터의 구별에 대해서 매우 정교한 논리를 펼쳤다. 그 핵심에는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정당한 시행이 있어야만 진정한 교회라고 하는 강조가 들어있다.

칼빈은 교회의 독립권을 위해서 몸으로 투쟁한 사람이었다. 그가 이처럼 교회의 독자권을 확보하고 시 당국의 간섭으로부터 권징과 치리권을 확보하려 했던 것은 사실상 교회의 순수함을 유지하고자 했던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교회관에 보면, 분투 노력하는 교회의 모습이 있어야만 대적자들에게 먹히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러난다.

그 어느 시대라도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이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교회가 이 지상에서 평화롭게 존재하도록 사탄이 허락하는 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상황을 허용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훈련받고, 인내를 배우도록 경건의 연단을 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겸손해지기를 원하고 계시며, 동시에 그 힘을 드러낼 기회를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교회에게 힘을 주시며, 인간들의 무능함을 체험하게 만드신다.

하나님은 종종 더 부도덕한 사탄의 도구들이 교회를 핍박하고 있음에도 허용하시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칼빈은 좀더 긍정적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좀 더 기쁨으로 하나님을 높이도록 하고자,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나가게 하여, 그로 인해서 우리가 부활에서 주님과 함께 참여하게 하려는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교회가 항상 부도덕한 자들에게 고난을 당하지만, 교회는 항상 시련들을 잘 이겨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역사는 성도들에게 과거에 하나님의 하신 일을 돌아보면서 현재의 장애를 극복하도록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 항상 투쟁하고 있는데, 그 배면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사탄이 교회를 공격하는 일면들이 있고, 그에 대해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행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승리하시는 한, 비록 자주 고난을 당하는 교회이지만 결국에는 승리하는 것이다.

3. 고난과 반대를 두려워하지 않은 지도자 칼빈

칼빈의 신학은 진지하게 대하지 않으면서도, 너무나 편협된 대중적 이미지만으로 성급한 판단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다. 그의 외적인 모습은 욥의 고통스러운 시련기와 매우 유사하다. 그의 얼굴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수척해졌으며, 숨쉬는 것도 자유스럽지 못했으며, 등은 굽었고, 몸에는 고열로 인한 고통이 역력하였다. 편두통, 발열, 신장결석, 치질, 폐결핵 등과 끊임없이 투쟁을 해야만 했었기에 외적인 모습도 역시 욥의 경우와 닮은 점이 많다. 그래서 욥이야말로 칼빈이 가장 잘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었던 주제였다. 오직 죽음만이 칼빈으로 하여금 이런 고통에서 건져낼 수 있었다.

칼빈주의는 하나의 경건 훈련과목이라고 볼 수 있다. 칼빈주의는 금욕의 최정상까지, 매우 견디기 어려운 지점까지 끌어올리는 제자됨의 연단과정을 중시한다. 노년기에 접어든 칼빈은 자신의 고향 프랑스에서 종교전쟁의 시대를 경험하였고, 그 과정에서 고뇌하며 살았던 사람이다. 1555년 처음으로 그가 사랑하던 조국 프랑스 여러 지방에 (파리, 모, 쁘아띠에, 부르쥬, 오를레앙, 뚤르즈, 르네즈, 리용 등) 칼빈주의적인 개혁교회가 설립되었지만, 잇단 국왕들의 서거와 암투가 지속되는 프랑스 궁전의 불안함에서 비롯된 개신교 박해로 인해서 긴박한 시간들을 맞이해야만 했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이 원했던 이런 건전한 개혁 교회의 건설에서 승리하지 못하였었다. 아직도 로마 카톨릭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무지하였고, 일부는 조직적이요 의식적으로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인격적으로 감화력을 발휘한 시기는 1555년부터 1564년 죽을 때까지 마지막 10년간이었다. 그 때는 아무도 감히 공개적으로 이 위대한 개혁자에게 대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의 정신과 내용과 하나님을 향한 진심을 이해하게 만들고,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수많은 논쟁과 대적자들과 싸워야만 했다. 내적으로는 시의회를 장악하려는 아미 뻬렝과의 싸움이 가장 어려웠었고, 신학적으로는 삐에르 까롤리와 제롬 볼섹의 추방, 세르베투스의 처형이라는 극한의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

지금까지 칼빈의 교훈을 중심으로 해서, 한국교회가 내부의 부패에 대해서 갱신을 시도하려면, 예배의 개혁, 신학의 개혁, 교회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갱신에는 반대와 대적자들이 있게 마련이므로 끝까지 분투노력하는 개혁자의 생애를 닮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결론에서 필자가 제시하려는 한국교회의 위기 극복 대안은 영적인 감격과 부흥을 통해서 교회를 부패시키고 침투하고 있는 세속적 영향을 극복해나가는 일이다. 모든 한국교회 구성원들은 마음을 비우고 더욱 더 가난해 질 각오로 임해야 한다. 우리 설교자들은 감동적이요, 창조적인 신앙을 일깨우는데 밤낮을 가리지 말고 매달려야만 한다. 대형교회는 마치 권력의 세습처럼 부정적으로 비춰지는 후계자 선정에 있어서 공정하고 진솔하게 성도들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모든 교회는 정통 진리보다는 혹세무민하는 이단이 성행하고, 과도한 경쟁으로 인해서 사랑이 식어지는 이 시대야말로 바로 영적으로 볼 때에는 몰락의 벼랑 끝에 와 있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 개혁주의 교회들은 확고한 말씀 중심의 신학에 충실하면서도, 좁은 우월의식에서 벗어나서 겸허하게 반성하고 마음을 낮추는 일에 힘써야 한다. 한국 교회는 건전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어둡고 왜곡된 죄악과 부패에서 헤매는 한국인들의 희망이 되어야만 한다.

나아가 지금 한국교회는 부활 신앙의 감격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누가복음 24:13-35에 보면, 부활의 사건은 엠마오로 가던 글로바와 또 한사람 제자에게 감격과 뜨거움으로 찾아왔다. 이들은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가슴이 뜨거워졌고, 새로운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다. 예수님은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들의 슬픔과 낙심을 알고 함께 동행하시면서 새로운 사명과 성경적 이해를 갖추게 해 주셨다.

사실 이 두 제자들은 상당부분 부활의 첫 사건에 대해서도 들었고, 무덤을 확인하였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다 글로바에게 있어서는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죽은 예수의 최근 소식, 부활의 확인을 들었지만, 그는 슬픈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이에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하고, 그리고 난 후 영광에 들어간 것임을 모세와 선지자와 시편과 모든 성경에 쓴 것이라고 풀어주었다. 그때에 이 제자들은 마음이 뜨거워졌다. 자연종교의 느낌이나 형이상학적인 회의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근대 유럽의 자아중심적 회의론과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비신화화 비평학으로 부활 신앙은 무너지고 말았다. 또한 극단적인 과학주의로 인해서 부활의 객관성이 상실되었다. 현대 기독교는 객관적인 그리스도의 사건들을 외면하고 각자 자기 나름의 주관적으로 이해하는 종교적 주관주의 혹은 내부주의로 빠져버리고 있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부활신앙은 분명히 이런 혼란을 극복해야 한다는 멧세지를 던져 주고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분명히 눈으로 확인하고 목격할 수 있었다. 부활체험은 외적인 모습에서 왔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경배하고 무릎을 꿇어 예배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누가복음 24장 31절에서 주님과 숙소에 들러서 식사 기도를 마치고 난 후,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는 놀라운 방식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였다. 그들은 이상한 체험에 대해서 아무런 불평이나 하소연을 하지 않고, 도리어 놀라운 체험을 인식하면서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 고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이 체험을 부활신앙의 증거자의 삶으로 바꾸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생명의 능력을 체험케 해 주시고 사명을 주신 것이다. 그들은 다시 험한 길을 되돌아가는 변화된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 그리고 믿음 안에서 우리와 함께 머물러서 이러한 체험을 주시며 변화를 주도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이 우리에게 다시 생생하게 말씀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우리의 기대와 우리의 체험을 바꾸어놓는다. 약하고 부족하고 상처 입은 제자들에게 권능과 사랑의 힘으로 다가왔다. 이해하고 동행하시는 주님은 부활하신 이후로는 개인과 사회에 다양한 방법으로 변화를 주신다. 그의 권능을 나타내사, 모든 만물이 주님을 공경하고 섬기게 하신다.

슬픔과 실망으로 엠마오로 향해가는 두 사람은 우리 주님의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고, 목격하고 되살아났다. 오늘도 나에게는 그런 날로 주님은 다가오신다. 성령의 권능으로 다가오신다. 부활의 체험은 사람을 바꾸었다. 이들 제자들은 다시 돌아가서 사명을 다하고자 인생의 행로를 바꾸게 되었다면, 이제 한국 교회는 이러한 감격이 있어야만 한다. 구원의 감격에 젖어서 살아갔던 제자들처럼, 오늘 한국교회는 부활신앙이 요청되고 있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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