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료

[스크랩] 세계화 시대에 신학하기 (Hans Schwarz)

수호천사1 2010. 6. 8. 17:25

세계화 시대에 신학하기

 

 

누가에 의하면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 강림의 사건을 모든 민족이 하나의 언어로 통합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행 2:8-11). 이 사건은 단순히 과거의 기적으로 머문 것이 아니다. 교회 공동체는 이제 더 이상 폐쇄적인 게토가 아닌 전 세계를 하나의 공동체로 아우를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유는 성령 강림의 사건은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와 용서가 모든 인류에게 약속되었다는 복음 때문이다. 
 
바울은 그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유대인 지역을 넘어 이방 지역까지 뛰어들었다. 그리스도인의 책무는 바로 바울이 했던 것과 같은 복음을 만방에 전하는 것이다. 파울 틸리히와 칼 바르트가 동일하게 주장했듯이 신학은 교회를 성장시키고 바로 잡는 기능을 수행한다.
 
오늘날의 세계는 이미 모든 대륙이 하나라는 세계화의 시대에 들어서있다. 교회와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신약 시대에는 기쁜 소식을 듣기 위해 예루살렘을 바라보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진 듯 하다. 전 세계에 많은 신학대학이 생겨났고 자국인으로 이루어진 신학자 그룹과 교회들이 넘쳐난다. 이미 교회와 신학은 세계화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와 신학이 세계화의 과정 속에서 세속화의 도전에 방향성을 잃고 있는 듯하다.
 
19세기 기독교는 서방 세계의 공격적 선교정책에 힘입어 널리 퍼져 나갔다. 그러나 이 당시 선교는 강대국의 식민지정책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교세가 급속도로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세속화는 막을 수 없었다. 교회와 신학은 세속화라는 거대한 도전 앞에 놓이게 되었다. 목회자를 배출하는 신학대학으로 출발했던 미국의 하버드 대학과 시카고 대학이 그 좋은 예이다. 이곳에서는 이제 더 이상 특정 교단의 목회자를 배출하지 않는다. 신학은 점점 종교학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신학과 교수라는 이름보다 종교학 교수라는 명칭을 선호한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들과 네덜란드의 경우에는 신학대학들이 이제 더 이상 신학과를 고집하지 않고 종교학으로 변화되고 있다. 유럽과 북미지역에서 이런 현상은 점점 가속화 되고 있다.
 
아시아의 경우 조금 복잡한 양상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은 매년 수 천명의 선교사를 외국에 파송하고 있지만 정작 자국내에서 기독교의 영향력과 교세는 침체 또는 하향 국면이다. 인도의 경우 제대로 교육 받은 신학자들이 자국에서 가르치려 하기보다 영국이나 서방 국가에 머물기를 원한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인도의 기독교인 숫자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다.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와 같은 공산권 국가들은 동일한 아시아지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최근 이 지역의 기독교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기독교가 그들에게 전에 없던 새로운 삶의 의미를 던져주고 미래의 지향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공산권 체제하에서 그들은 참된 자유를 맛보지 못했고 삶의 궁극적 목표를 찾지 못했지만 이제 복음을 통해 그것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인의 자기이해는 항상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며(마5:13이하) 이런 책무가 온전히 발휘 되는 곳에서 복음은 힘을 얻게 된다. 이 복음은 성서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그렇다면 성서의 복음을 시대와 문화가 다른 상황 속에서 온전히 전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신학자와 목회자인 우리의 질문이며 과제이다.
 
파울 틸리히는 자신의 상관방법론을 통해 문화와 신학을 하나로 엮어내려고 시도했다. 그의 방법론은 루터의 대교리 문답서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십계명 제1항 해설). 루터에 의하면 우리의 궁극적 관심사가 곧 신이다. 그 때문에 모든 인간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든 부정하든 간에 본질적 차원에서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바른 신을 바르게 신앙하는 것이다. 즉 신앙이 바르면 신앙의 대상인 신도 진리가 되고, 신앙이 잘못되면 그 신도 우상이 된다. 이러한 루터의 진술을 틸리히는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란 용어로 바꾸어 설명한다. 신학은 곧 궁극적 관심사를 온전한 곳으로 유도하는 기능을 한다. 즉 문화는 질문하고 신학은 그들의 언어로 답하는 것이 틸리히의 상관방법론이다. 그는 이 방법을 통해 성서의 진리를 현대인에게 전하고자 했다.
 
판넨베르그 역시 신학의 ‘과학화’ 또는 ‘학문화’를 주장하면서 간(間)학문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주장한다. 신학은 신학자들만의 놀이 공간이 아니라 모든 학문이 통섭할 수 있는 공동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신학과 교회는 세속화된 세계 한 가운데서 세계를 향해 하나님의 계시 사건을 전해야할 책무를 지니고 있다. “계시는 이미 일어났고 역사의 끝에 그 계시는 온전히 드러날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역사적 사건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그 때문에 그는 단순한 교리와 이상적 담론을 넘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바로 종말의 때에 일어날 완전한 계시의 선취적 사건이므로 현대인은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올바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건은 우리의 과거였지만 우리의 현재이며 우리의 미래이다.
 
바울, 틸리히, 판넨베르그에게서 우리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다양한 방법으로 성서적 진리를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카멜레온 처럼 변하라는 것도 아니며 상황신학이란 이름으로 성서적 진리를 퇴색시키라는 것도 아니다. 세계화 시대라는 다양한 상황과 문화 가운데서도 잃어버려서는 안 될 중요한 신학의 방향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류에게 삶의 궁극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며 그 답을 실존적이고 성서적 근거에서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의 세계화’와 ‘세계화 시대에 신학하기’는 동일한 의미이다. 신학은 결코 장소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도 아니며, 시대에 따라 변하지도 않는다. 복음의 진리와 가치는 시간에 의해 퇴색되지도 않고 상황에 의해 변질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Hans Schwarz 박사(독일 Regensburg 대학교 조직신학)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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