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대부흥운동 성격과 의의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한국에서는 1903년, 1907년, 1909년 세차례의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특히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 영적대각성운동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지난 100년 간의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이 부흥운동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와 해석이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다. 단편적인 연구가 있었지만 왜 부흥운동이 발흥하고 어떤 발전과정을 거쳤으며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검토가 부족했다. 더구나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을 종교사회학적으로, 혹은 군중심리의 한 현상으로 단정하는 경향마저 우리 학계에 나타났다.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세 가지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첫째,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당시 세계기독교계에서 일고 있던 웨일즈 부흥운동, 인도부흥운동, 미국의 오순절운동이라는 전세계적인 부흥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포스터(John W. Foster)가 적절히 표현한 것처럼 당시 강대국들이 노리고 있는 “나봇의 포도원,”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 러시아와 일본의 패권주의로 인한 정치적 위기가 한국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토양을 제공해주었다는 사실이다. 주지하듯이 1894년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이후 1910년 한일합병이 체결될 때까지, 좀더 시간의 범주를 축약한다면 우리 민족이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고종의 퇴위라는 고난의 시대를 맞고 있던. 이때 놀라운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시대적 정황이 한국인들의 심성을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토양을 제공해주었다. 그 시대를 연구하면 이점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부흥운동을 가져다 주시기 위해 역사에 개입하셔서 강퍅한 심령을 갈아엎으시고 옥토로 만들어주신 것이다. 1904년 러일전쟁이 한반도 전역에 일어나고 있을 때 원산부흥운동이 발흥하여 을사조약을 전후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1907년 고종의 퇴위로 민족이 위기를 만나고 있을 때 평양대부흥운동의 발흥으로 부흥운동이 절정에 달했다. 마치 전쟁과 부흥이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 주제가 한국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제임스 부스컬크(James Dale Van Buskirk)가 지적한 것처럼 평양대부흥운동은 을사조약과 고종퇴위 한일합방으로 대변되는 당시의 정치적인 암흑기를 극복하고 민족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다지게 만들어준 중요한 종교적인 사건이었다.
셋째는 한국의 부흥운동은 일차적으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일환으로 채택된 사경회운동과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며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세 개의 부흥운동의 파장 중에서 적어도 원산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은 말씀과 기도로 특징되는 기도회나 사경회 기간 중에 발흥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기도회와 사경회는 白樂濬 박사의 말대로 한국 “부흥운동의 기원”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성령의 임재 속에서 기도와 말씀과 회개로 특징되는 영적각성운동이었다.
한국교회 부흥운동을 이해하기 위해 위 세 가지를 균형 있게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교회사가들이 두 번째 사실을 부각시켜, 강대국들의 침략으로 인해 정치적 희망을 상실하자 종교적 소망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부흥운동이 발흥하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한국교회 부흥운동이 비정치화 현상의 결과로 혹은 정치적 울분을 대부흥운동을 통해 분출시킨 종교적 카타르시스 현상이었다고 주장한다. 한국교회 부흥운동이 정치적, 민족적 위기와 맞물려 진행된 부흥운동이었기 때문에 부흥운동의 인과를 논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민경배 교수가 부흥운동을 비정치화 현상으로 해석하면서 한국교회사학계에 널리 수용되게 되었다. 비정치화 현상의 결과로 부흥운동이 나타났다는 주장이나 부흥운동이 독립의 소망이 끊겨 정치적 울분을 종교적으로 토로한 일종의 종교적 카타르시스 현상이라는 주장은 부흥운동의 신적 기원을 평가절하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비정치화 해석은 부흥운동을 순수 종교적인 현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종교사회적인 현상으로 해석하는 서구의 해석학적 동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과연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성격은 무엇인가? 민경배 교수와 이만열 교수를 비롯한 많은 신진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국교회 부흥운동이 비정치화의 결과인가? 본고는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성격이 무엇인지, 그 의의가 무엇인지를 집중적으로 조명함으로써 부흥운동의 성격과 의의를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대부흥운동의 비정치화 해석의 논지를 살펴보고 과연 그것이 한국교회부흥운동의 성격과 의의를 충분히 반영한 것인가를 심도 있게 고찰할 것이다.
1. “비정치화 현상으로서의 부흥운동” 그 해석의 논지
그동안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한 총체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활발하지 못한 상태에서, 평양대부흥운동은 학계 일각으로부터 비평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비평적인 평가는 이미 평양대부흥운동이 발흥했던 당시부터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운데 하나가 예일 대학교 조지 래드(George T. Ladd) 교수였다. 친일파였던 조지 래드는 평양대부흥운동이 한창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던 1907년 여름 평양을 방문하여 부흥운동의 생생한 현장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는 부흥운동의 현장을 목도하고 이와 같은 영적각성이 한국인들의 “비정상적인 심리적 성품”에서 나온 것으로 혹평했다. 마치 미국에서 오순절운동이 발흥했을 때 그 운동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한 것과 유사한 현상이 한국에서도 나타났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그것이 단순히 자신들의 감정 표출이나 감정적 격정에서 나온 일종의 탄식이 아닌 자신들 안에 역사하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놀라움과 감사가 떠나지 않았다. 조지 매큔 선교사가 지적한대로 “그곳에는 종종 감흥(the emotional)"이라는 말로 사용되는 감정(the sensational)적인 요소는 하나도 없었고, 모인 각 개인이 기도에 온전히 집중하였다.”
통성기도와 부흥운동을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군중심리 현상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정확한 판단이 아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찰스 클락은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에서 이렇게 증언하였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것이 주로 군중심리 기법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아마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청중들을 어느 정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필자는 여러 개인들의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그들의 기도가 얼마나 이성적인가를 깨닫고 깜짝 놀랐다. 각 사람은 마치 자기 홀로 작은 방에 갇혀 하나님과 단독으로 만나고 있는 것처럼 신실하게 기도를 드렸다.“
더구나 “부흥운동의 결과 삶이 변화되고 그러한 변화가 지속되여 왔다는 사실은” 선교사들로 하여금 ‘부흥운동에 대한 섣부른 전면적인 비판을 삼가도록 만들었다.“ 심지어 클락은 ”군중심리 같은 기법에 대한 서양의 일반적 비판 행위가 이성에 근거한 견해라기보다는 어떤 통칭에 의해 정죄하는 논리적 오류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보았다. 의심할바 없이 평양대부흥운동은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이 나라와 이 민족을 복음화시키시려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였다.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조지 래드 교수가 한국교회 부흥운동을 일종의 집단심리적 현상으로 치부했지만 1929년 백낙준 박사는 원산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이 “영적각성운동”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민경배 교수와 이만열 교수를 비롯한 일련의 학자들에 의해 초기한국교회부흥운동에 대한 평가 작업이 새로운 방향에서 진행되어 왔다. 이들은 한국교회부흥운동을 비정치화 내지 몰 역사성이라는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해왔다. 이들의 논지의 핵심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이 당시 정치적인 소망이 사라지면서 기독교에서 그 분출구를 찾으려는 현상이 나타나, 정치적인 소망을 종교적인 소망으로 대치되면서 부흥운동이 발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부흥운동에 대한 해석은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이들이나 독자들에게 너무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1970년대 이후 한국교회부흥운동을 비정치화의 현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한국교회 학계를 지배, 한국의 적지 않은 교회사가들이 평양대부흥운동을 한국교회의 비정치화의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다.
민경배 교수는 한국교회대부흥운동을 다루면서 “경건과 피안의 교회 신앙-비정치화의 신앙”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성격을 비정치화로 규정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비정치화란 한반도를 노리고 있는 열국들의 식민지 침략계획이 진행되는 가운데 한국교회가 정치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한국교회 안에 부흥운동을 전개 한국교회의 비정치화작업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일제의 정치적인 득세로 인해 야기된 좌절감과 절망감이 온 백성을 지배하고 있을 때 선교사들은 한국교회가 독립운동을 비롯 정치적인 소용돌이에 휩싸여 선교에 지장을 초래할까봐 의도적으로 부흥운동에서 그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그 신앙 형태의 확립을 재촉하는 한 계기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부흥의 물결을 통해서, 한국교회를 비정치적인 피안적(彼岸的) 교회로 구형(구형)시키려고 하는 선교사들의 강렬한 의도가 태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마찬가지로 왕실의 비운에 접근되면서 의외로 정치의 회오리 속에 끌려갔다고 자성한 선교사들 뇌리 속에 본래적인 신앙 형태로의 복귀가 숙제처럼 남아 있다가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그렇게 해서 한국교회를 숙청(肅淸)한 것이 이 1907년의 대부흥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교회는 “좌절 속에 방황하는 한국이 찾아 갈 유일한 보루”였고, 자연히 교회로 대거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 결과 “교회의 정치적 성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소망이 끊긴 상황에서, 미국 마저 일본의 손을 들어주는 국제정세 속에서 선교사들은 한편으로 교회의 정치화를 막고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좌절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한국인들의 정치적인 절망을 종교적 소망으로 대치하려는 의도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이를 받아들여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같은 현상이 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민경배 교수는 자신의 한국기독교회사에서 이 부분을 선명하게 밝히고 있다:
“선교사들이 이 1907년 대부흥을 지도하고 결실하게 한 원리와 목표는 한국교회의 “비정치화(非政治化)” 그것이었다. 한국교회가 이 때를 계기로 해서“부흥회적 열정”으로 특징짓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비정치화의 과정과 함께 수반한 필연적인 신앙형태로 경화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불가피하게도 한국교회가 이때부터 정치적 관심과 행동을 극소화(극소화)시켰다는 결론이 된다.
이와 같은 민경배 교수의 비정치화 해석은 상당수의 학자들에 의해 수용되어 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만열 교수를 중심으로 한 한국기독교 역사 연구소 멤버들이다. 이들은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순수한 신앙과 정신이 한국기독교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신자와 선교사간의 이해 증진”에도 기여했으며, “한국교회와 교인의 도덕적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고 성경공부와 기도가 더욱 고양되었지만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에 부정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부흥회를 평가할 때 이상과 같은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역기능적인 부정적인 평가 또한 없지 않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점을 지적한다면 한국교회의 비정치화내지 몰역사성의 문제이다. ... 요컨대 1907년 대부흥운동은 1907년을 전후한 시기의 시대적인 한국민족의 아픔과 분노를 성령운동이라는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통해 희석시킨 몰역사적 성격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고 부인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은 한국기독교 역사 연구소의 입장은 민경배 교수의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만열 교수도 한국기독교사 특강에서 민경배 교수와 같이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비정치화 해석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이 최종적으로 일본에 병탄당하는 시기인 1905년-1910년 사이에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한국신자들이 회개하며 가슴을 치는 동안 선교사들 중에는 이를 한국 민족의 운명과 일제의 한국 강점과의 관계에서어 보았던 사람들이 없지 않았던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즉 이운동에 관심이 쏠리게 됨으로써 한일합병이 진행되어 가는 동안 국내 평화와 질서가 유지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이 운동은 민족적 울분을 종교적으로 카타르시스하는 역할도 하였다는 것이라는 점이 지적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1907년, 1909년의 부흥운동. 구령운동이 한국기독교의 신앙적 성장을 가져왔을 것이라는 선학(先學)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시 이 운동이 민족적 울분을 종교적으로 카타르시스시킴으로써 민족 문제에 무관심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라는 민족사적 관점에도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비정치화라는 민경배 교수의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이만열 교수 역시 전체적인 톤이 민경배 교수의 주장과 일치하고 있다. 아마도 민경배 교수의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는 인상을 받는다. 이만열 교수는 그러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민경배 교수보다도 더 강하게 부흥운동 자체를 “종교적 카타르시스” 현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부흥운동전반으로 확대한다. “이것은 단순히 1907년, 1909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기에도 해당되는 바이다. 오늘날 한국 보수주의 교단들이 취하고 있는 유사한 형태, 여의도 대집회니 하는 것들이 이러한 경향의 가능성을 많이 지니고 있지는 않을까”라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종교적 카타르시스와 비정치화는 같은 의미, 같은 해석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와 같은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다. 유동식 교수도 한국감리교회의 역사 1884-1992에서 같은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1903년에서 1907년 사이는 일본의 치밀하게 계획된 침략 행위 아래 한국이 국권을 상실해 가는 망국의 시기였다. 러.일전쟁, 을사조약, 헤이그 밀사 사건과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군개 해산으로 이어지는 민족의 일대 수난기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교회와 감리교회는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한 구국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적차원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또한편 이때 한국교회는 망국의 시련과 혼란의 와중에서 절망한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삶의 용기를 제공해야 할 사명을 안고 있었다. 이에 응답한 것이 신앙부흥운동이었다.”
선교사들이 의도적으로 망국의 시련을 신앙부흥운동에서 찾았다는 유동식 교수의 논지 역시 비정치화 해석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민경배 교수가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비정치화 해석을 제시한 후 상당수의 학자들이, 아니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덕주도 한국토착교회형성사연구에서 한국교회 부흥운동을 “비정치화”로 풀어갔다. 부흥운동의 결과 “한국기독교인들의 비정치화가 한층 심화”되었고, 기왕의 정교분리 원칙이 더욱 고착되었다고 주장한다:
...부흥운동의 또 다른 결과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비정치화가 한층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선교 초기부터 “목사들은 대한 나라 일과 정부 일과 관원 일에 대하야 도모지 그 일에 간섭하지 아니하기를” 결의한 바 있는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원칙은 한국기독교인들에게도 적용되었으며 이 같은 원칙은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더욱 고착되었다. 특히 부흥운동이 가장 강력하게 일어났던 평양에서 그러했다. ...
부흥운동이 일어난 1903-7년 어간은 한 민족이 일본의 정치적 간섭과 군사적 침략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이 시기 기독교인들의 정치 참여 문제를 두고 선교사들과 한국인들 사이에 긴장 관계가 조성되기도 했다. 이는 ‘정치 문제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엡윗청년회를 해산했던 스크랜튼의 표현대로 “한국인과 외국인 선교사 사이에는 너무도 큰 틈새”가 있었다. 부흥운동으로 종교.문화적인 측면에서 선교사와 한국인 사이의 간격은 좁혀졌다 할수 있지만 정치.사회적인 측면에서는 그 간격이 오히려 더 넓어졌다. 그 간격은 선교사들이나 부흥운동 주역들이 메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민족 상황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응답해야 할, 교회가 “비정치화” 논리를 내세우며 강한 자, 지배자의 통치를 묵인하거나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변형된 “정교유착” 원리가 안고 있는 한계였다.“
이들의 주장에서는 몇 가지 공통적인 측면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한국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엽 강대국의 침략 정책으로 정치적 위기를 만나고 있었다. 둘째 이 같은 정치적 위기 앞에 그리스도인들 일각에서는 교회로 찾아들었고, 교회가 열국의 침략 앞에 민족적 구심점의 역할을 해 주기를 고대하였으며, 자연히 정치적인 현상이 교회에 등장하게 되었다. 셋째, 선교사들은 교회가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려 선교가 지장을 초래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철저한 정교분리 원칙을 주장했고, 교회가 정치적인 내분에 개입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막았다. 넷째, 한국민족이 일본의 정치적 침략 앞에 무너져 내리며 정치적 소망을 상실하고, 믿었던 미국 마저 일본의 손을 들어주자 한국인들 사이에 반미운동과 폭동이 일어날 움직임이 있어 정치적인 울분을 종교적인 소망으로 대치하려고 의도적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교회 1907년 부흥운동이 비정치화의 산물인가하는 것이다. 자료를 추적해 보면 정치적인 위기 속에 신앙적으로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기를 원했던 것이 한국교회와 선교사들 가운데서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1906년에 접어들어서 을사조약으로 일본이 한국을 찬탈하는 상황에서도 필리핀 지배를 독점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흔들지 않으려고 일본의 입장을 두둔해준 미국에 대한 분노가 반미운동의 차원을 넘어 선교사들에 대한 적대감으로 발전되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선교사들은 위기 의식을 느꼈고, 영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했다. 민경배 교수, 이만열 교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멤버들 모두 블레어의 이 같은 언급을 비정치화의 결정적 단서로 삼고 있다. 민족적, 정치적 위기 앞에 정치적 좌절을 종교적 소망으로 대치시켜 부흥운동이 발흥하게 되었고, 이 면에서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비정치화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블레어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비정치화를 뒷받침하는 단서로 사용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민족의 위기 앞에 진지하게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 머리를 숙였다,” 한국의 민족적, 정치적 위기 속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도록 하셨다”는 것이 그가 말하려는 골자이기 때문이다.
과연 1907년 부흥운동이 비정치화의 산물이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와 같은 주장이 1907년 부흥운동의 성격을 깊이 연구하면 논리적인 비약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주변국의 침략과 민족적 위기가 한국인들의 심성을 가난하게 만든 것이 사실이지만 정치적인 소망을 종교적인 소망으로 대치하면서 부흥운동이 촉발된 것은 아니다. 비정치화 해석은 다음 몇 가지 면에서도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정치적인 소망이 끊긴 상황에서 종교적인 소망으로 방향을 대치시켜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주장은 부흥운동이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현상, 곧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 부흥운동, 특히 1903년과 1907년의 부흥운동의 성격을 살펴보면 회개운동으로 대변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회개운동이 강하게 나타났다. 회개운동은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이 개신교의 신앙이다. 따라서 민경배 교수나 이만열 교수 그리고 유동식 교수와 이덕주 교수를 비롯 이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이들의 부흥운동의 해석은 부흥운동이 일차적으로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을 평가절하한 것이다. 최근 한국교회부흥운동 연구에서 박명수 교수가 한국교회 부흥운동이 비정치화의 과정에서 생겨난 현상이라는 주장을 일축하며 언급한 것처럼 “대부흥이 의도적인 비정치화의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부흥운동은 근본적으로 성령의 역사이지 인위적인 조작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순수 종교적인 운동, 신앙적인 운동, 곧 죄에 대한 회개, 성결한 삶, 복음전도를 특징으로 한 말씀과 성령의 역사였다. 당시 자료를 분석하면 한국인들이라면 민족적 위기 앞에 민족의 시련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이 민족을 긍휼이 여겨 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의 앞날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의식을 가졌던 것이다. 이 민족의 위기가 영적인 축복의 수단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부흥운동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였고, 한국인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정치적인 위기를 만난 것이 사실이지만, 또한 정치적 위기 앞에 그 문제의 해결책을 가지고 고민한 것도 사실이지만, 부흥운동이 종교적인 방향으로 틀었기 때문에 발흥한 것은 아니다. 선교사들은 이미 선교를 시작할 때부터 이 민족을 살리는 길이 복음화에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이들의 일련의 노력을 1903년 민족의 위기 이전과 이후를 지나치게 구분하여 단절시킬 수 없다. 이 민족을 살리는 길이 이민족이 복음화하는 길이라는 인식은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일치된 견해였고, 이들은 그런 방향에서 처음부터 선교를 진행시켜 나갔던 것이다.
둘째, 비정치화 해석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이 독자적으로 일어난 운동이 아니라 당시 일고 있던 전세계적인 부흥운동의 맥락 속에서 발흥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은 당시 영미와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일고 있던 웨일즈부흥운동, 인도부흥운동, 아프리카 부흥운동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미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발흥하기 2년 전 1905년 목포부흥운동의 주인공 저다인은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이 영국과 호주에서도 나타났고 미국에서도 나타났다며 한국부흥운동도 영미에서 일어난 부흥운동과 같은 시기에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실제로 1년 후 1906년 9월에 한국의 장감 선교사들은 웨일즈와 인도를 거쳐 한국을 방문한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위원이며 부흥사였던 하워드 존스톤(Howard A. Johnston)이 웨일즈와 인도에서 일어난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소개하여 한국에서도 부흥운동의 역사가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도록 도전을 주었던 것이다. 이에 선교사들은 선교사 사경회를 개최하고, 크리스마스 휴가도 반납하고 정도기도회를 여는 등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한국에서도 일어나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했다. 그리고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 동안에 놀라운 부흥운동이 발흥하였다.
이처럼 한국교회부흥운동은 이 부흥운동이 한국에서만 일어난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당시 일고 있던 전세계적인 부흥운동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던 그해 영국의 동아프리카 Toro의 수도, Kabarole에서도 영적대각성운동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이미 웨일즈, 인도, 한국에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에 이어 아프리카 부흥운동의 소식을 접한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어떤 인종 혹은 지역에 제한되지 않고 인도, 중국, 한국, 아프리카, 웨일즈, 미국에 있는 순종하고 성령의 능력을 알려는 이들 모두에게 나타난다는 표식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 가운데는 이미 무디부흥운동, 케직운동, 나이아가라사경회운동 등 19세기 말의 부흥운동을 경험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부흥운동은 해외선교운동과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고 있어 부흥운동의 결과 태동된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으로 한국에 파송된 이들이 상당수였다. 1907년 1월 14일 부흥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이들 모두 무디 부흥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맥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이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근대복음주의 운동의 배경 속에서 성장한 이들은 당시 한국을 방문한 외국 지도자들 프란손, 존스톤이 전해준 외국의 부흥운동 소식에 적지 않은 자극과 도전을 받았던 것이다.
셋째, 한국교회 부흥운동을 비정치화로 해석하는 것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이 말씀과 기도로 특징되는 사경회운동이나 기도회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해석이다. 1903년에 일어난 원산부흥운동, 1907년에 발흥한 평양대흥운동 모두 기도회나 사경회 동안에 일어났다. 오전에는 말씀을 공부하고, 정오에는 전심으로 기도하고, 오후에는 전도를 나가고 그리고 저녁에는 전도한 사람들과 사경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전도집회를 열었던 사경회운동이 한국교회 부흥운동과 깊은 연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07년 1월 14일과 15일 양일간 평양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겨울 남자 도 사경회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한국에 임했던 것이다. 곧 장로교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숭실대학과 평양장로회신학교를 비롯 미션스쿨들로, 평양남산현감리교회를 비롯 교파를 초월 평양전역으로 다시 이북지역은 물론 서울과 경기를 비롯 남한 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던 것이다.
민족의 위기 앞에 한국교회가 정치적으로 흐를 것을 우려하여 의도적으로 비정치화를 추구하여 부흥운동이 일어났다면 왜 일제의 압박 속에 있던 한반도의 다른 주변국에서는 강력한 부흥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전세계적으로 웨슬리부흥운동, 미국의 1차 2차 대각성운동, 무디부흥운동, 웨일즈와 인도의 부흥운동, 그리고 한국의 원산과 평양대부흥운동 모두 성령의 역사로 인한 영적각성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정치적인 소망을 종교적인 소망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교회를 비정치화시킴으로써 한국교회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비정치화해석은 춘생문 사건 이후 교회 안에 일기 시작한 정치적인 문제로 인한 선교사들과 일부 한국교회 지도자들 간의 대립을 풀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평양대부흥운동은 사경회와 깊이 맞물려 있고, 그 사경회는 1890년 채택된 네비우스 선교정책에서 기원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2. 순수한 영적각성운동: 말씀, 기도, 회개의 성령의 역사
이 시대 부흥운동을 깊이 연구하면 이 부흥운동이 정치적인 동기에서 발원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인한 회개운동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로이 스위러(Roy E. Shearer)가 한국교회성장사(Wildfire: Church Growth in Korea)에서 지적한 것처럼 부흥운동에 비영적 요인들(non-spiritual factors)이 작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영적 요인에 의해 기인”되었다. 특히 원산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 기간 동안 처음부터 성령과 말씀을 통한 회개의 역사는 부흥운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다. 마삼락(Samuel Hugh Moffett)이 지적한 것처럼, 1903부터 1907년까지 한반도 전역을 휩쓸었던 원산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은 “영적부흥”(spiritual revival)이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놀라운 영적각성운동이었고, 또 전국적인 현상이었다는 점에서 케넷 웰스(Kenneth M. Wells)가 새 하나님, 새 민족(New God, New Nation)에서 표현한 것처럼 “이 부흥운동은 그 당시 한국기독교의 중심적인 종교경험이자 획기적 사건이었다.”
주지하듯이 우리는 원산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에서 부흥운동이 나타나는 곳마다 마치 판에 박은 듯, 정해진 코스를 밟듯이 회개운동과 더불어 일련의 영적 각성이 나타나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 영적각성운동은 성령과 말씀으로 특징되는 회개운동이었다. 회개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은 말씀을 통해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부흥운동은 말씀에 토대를 둔 사경회에서 출발한 성령의 놀라운 역사였다.
학계 일각에 주장하듯이 부흥운동이 비정치화로 인해 발흥한 것도, 부흥운동으로 인해 비정치화 현상이 나타난 것도 아니다. 이 시대 한국의 부흥운동의 동인을 정치적인 동기로 설명하려는 이들은 정치적 독립의 소망이 상실되자 종교적 소망으로 대치했기 때문에 부흥운동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나 당시 부흥운동을 면밀히 고찰하면 분명히 정치적인 이유가 영적각성운동의 일차적인 동기는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907년을 전후한 당시 평양대부흥운동의 발흥과 저변 확대를 정치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것을 돌파구를 찾기 위한 한국인들의 일시적인 현상으로 진단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북감리교 보고서는 여기에 대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정치적인 이유가 한국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제시되어 왔으나 이것은 정확하지 않으며, 더 적절한 원인은 기독교 신앙을 그들의 이웃에게 전하는 일에 있어서 한국 그리스도인들 스스로의 지칠 줄 모르는 중단 없는 활동 때문이다.
이승만과 이상재를 비롯한 상당한 정치 지도자들이 출석했던 북감리교 선교회가 정치적인 동기와 부흥운동과의 관련성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감리교 선교회와 선교사들이 장로교 선교회나 선교사들보다 정치적인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부흥의 요인을 정치적인 요인에서 찾는 것보다는 좀더 신앙적인 원리, 말씀과 기도 그리고 복음을 전해 받은 한국인들이 그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려는 한국인 스스로의 구령의 열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중에서 전도는 부흥운동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한국인 스스로에 의한 전도열이 부흥의 요인이었다는 것은 당시 선교사들의 일반적인 중론이었다. 부흥의 요인으로 선교지 분할 협정, 한국인의 전도열, 그리고 협력을 들고 있다. 1906년 10월부터 1907년 9월까지 한국은 그야말로 “각성운동의 해”이자 “부흥운동의 해”를 맞고 있었다. 각성운동은 놀라운 영적 각성을 통해 사회적인 변혁을 낳았고, 또한 전도로 질적, 양적인 놀라운 신장을 기록하게 되었다. 분명히 이와 같은 놀라운 한국교회의 성장은 부흥운동의 결과였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선교지 한국을 놀랍게 축복하셨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여기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지역보다도 한국교회가 이와 같은 영적각성운동을 통해 더 많은 결실, 더 지속적인 결실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인도와 다른 선교 지역에서도 부흥운동이 일어났지만 그들 지역보다도 실제로 영적인 결실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랍게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교회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어떤 특징들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 가지 가능성으로 집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선교지 분할 정책이다. 이 선교지 분할 정책은 선교사들의 책임하에 그 선교지를 순회하면서 선교 현장을 책임지고 돌보아야 하기 때문에 선교의 낭비를 막고 모든 선교사들이 효율적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장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또한 선교지의 경쟁이나 또는 비선호 지역을 선교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일이 없이 골고루 모든 지역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복음 전파를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한국인들에 의한 복음 전도이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은 다음에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셋째는 협력 정신이다. 아무리 선교지 분할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선교회끼리 협력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에서와 같은 선교의 결실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구령의 열정, 복음전도는 부흥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 전도열은 부흥운동을 통해 영적각성운동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어진 부흥운동의 결실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1905년 장감연합공회가 조직되었을 때 선교사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교회로 전도하는 일보다 먼저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 기성의 신자들을 영적인 잠에서 깨우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1906년 신년을 기해 전국적인 부흥회를 갖기로 결정한 후 이렇게 이유를 밝혔다. “부흥집회의 첫 번째 목적은 새로운 신자의 등록보다 교회내의 영적각성이어야 한다. 사역이 먼저 깊이(depth)가 있으면, 그 다음에 자연히 넓이(breadth)는 따라 올 것이다”
청일전쟁 후 백성들이 희망을 상실하여 무엇인가 의지할 대상을 갈망하고 있던 당시의 시대적인 환경이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이 성령의 역사로 중생함을 받고 교회의 일원으로 접붙임을 받지 않았다면 교회의 부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시면서 성령의 역사 없이 중생이란 불가능하며 중생 없이 하나님 나라를 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 하나님이 주의 백성들을 부르시는 이유는 매우 다양하지만 일단 부르신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 국한되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되지 않으면 될 수 없는 것이다.
샤프가 보여주는 것처럼, 정치적인 동기만으로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은 진정한 중생의 경험을 맛보지 않을 경우 종국에 교회 밖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고, 학습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기독교와 교회의 영적인 면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아 이들에게 세례를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민족이 당하는 고난이 이 백성을 복음으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넘어 그것이 부흥운동의 저변 확대를 가져 온 직접적인 요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상당한 비약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을 넘어서서 역사하셔서 이런저런 동기로 교회를 찾아오게 하실 수 있지만 그와 같은 주변 여건을 부흥운동의 요인으로 도식화하는 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
선교사들은 오래 전부터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통해 성경 중심의 선교 정책을 사용하여 왔고, 사경회와 주일 성경학교를 통해 말씀을 연구하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끊임없이 제공해 주었으며, 때로는 이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하나님만이 이 시대, 이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민족주의 사관이나 민중사관이 일제의 침략으로 인한 정치적인 상황이 민족의 부흥운동을 촉발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이해해 온 것이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인들 가운데 전에 없이 복음에 대한 반응과 결실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는 것에 대해 그 원인들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나 그것이 결코 정치적인 동기 때문에 발흥한 것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정치적인 이유로 부흥운동을 설명하려는 노력은 당시의 부흥운동의 발흥과 성격을 충분히 설명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교회가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적도, 또한 그것을 위해 일부 선교사들이 한때 의도적으로 노력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부흥운동을 전후하여 절대 다수의 장감 선교사들은 교회가 정치적으로 도구화되는 것을 반대하였고, 따라서 그들은 철저하게 정치적인 문제를 배제하려고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기독교 선교회는 25년 전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서 시작되었다. 초기에 그들은 정부와 국민 모두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 후 기독교는 놀랍게 발전해 이제는 10만 명의 회심자가 넘어섰고 1,000개 이상의 교회가 조직되었다. 정치적인 변화와 중일전쟁, 러일전쟁, 그리고 다른 어려운 상황들이 새로운 신앙을 향한 민족의 이러한 운동을 늦추지는 못했다. 내가 사실을 힘들여 조사한 것처럼 그 이유가 정치적인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한때 정치 운동에 기독교인들을 관여시키려는 특별한 노력이 있었고, 어느 정도 이것이 성공을 거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효과적으로 바르게 잡혔다. 선교사들에 의해 얻어진 것이지만 정치 문제와 관련된 설교와 연설은 결코 교회에서 들리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지난 해, 구 황제가 폐위되고 일본과 한국 사이에 새 조약이 발표된 7월과 8월의 문제의 시간 동안 한국기독교의 대규모 단체는 조용하고 권세에 복종할 뿐만 아니라 주로 백성들이 폭동을 삼가도록 했다.
위에서 보듯이 선교사들이 교회를 비정치화시키려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의 결과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흥운동의 신적 성격을 간과한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진정한 부흥운동과 각성운동이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한국의 부흥운동을 단순히 정치적인 현상으로는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정치적인 관심이 종교적인 관심으로 대치되면서 부흥운동이 촉발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을 들어 부흥운동의 주된 요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3. 대부흥운동과 사경회운동
우리는 말씀과 성령의 사경회운동에서 원산․평양대부흥운동의 역사적 기원과 과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1890년에 채택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일환으로 채택한 사경회운동과 밀접히 연계되어 진행되었다. 한국 은둔의 나라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반응(Korea The Hermit Nation and Its Response to Christianity)에서 스탠리 솔터(T. Stanley Soltau, 소열도)가 말한 것처럼 “1907년 부흥운동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채택으로 인해 조성된 분위기의 결과였으며 한국교회의 발전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윌리암 블레어 선교사는 자신의 골드 인 코리아(Gold in Korea)에서 “50여 년이 넘도록 한국교회가 급격히 성장하고 지속적으로 부흥할 수 있었던 조건을 각자 나름대로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사경회라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白樂濬 박사 역시 그의 韓國改新敎史에서 부흥운동과 사경회와의 밀접한 연계성을 지적한 바 있다. “평양의 부흥운동도 장로교 남녀 사경회 때에 일어났었다.” “사경회는 부흥회의 계기를 마련하였고 부흥회는 구령운동에 나가려는 자극과 열정을 북받쳐 치밀어 오르게 하였으니 전도운동은 그 북받쳐 오르는 감동의 표현이었다.”
사경회는 모든 교회에서 해마다 적어도 일주일 동안 개최되었고, 모든 큰 중심지에서는 큰 도 사경회가 열렸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듯이 한국기독교인들은 사경회 기간 동안 경건하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며 보냈다.” 사경회 기간은 가능한 모든 교인이 만사를 제쳐두고 교회에 모여 매일 조직적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며 개인전도에 전념할 수 있도록 보통 농한기인 겨울에 한 주간 혹은 그 이상을 잡는다. 보통 사경회는 5시에서 6시까지 새벽 기도회를 가지며, 9시에서 10시까지 함께 모여 성경공부를 하는데 크기에 따라 반을 나누어 공부를 한다. 10시에서 10시 45분까지는 기도회를 갖고 그 후 15분간 휴식한 후 다시 11시에서 12시와 점심시간후인 2시부터 3시까지 성경공부를 하고, 그 후에는 교회 교직원들과 함께 축호전도를 나가 사경회 기간 동안 진행되는 일종의 부흥집회인 저녁집회에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이 보통이다. 기도와 말씀 공부와 전도(집회) 이 세 가지는 사경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모든 사경회에서 이 세 가지는 항상 필수적이었다. 특별히 성경공부는 사경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요소였다. 한절 한절씩 성경을 공부하고 질의 토론 시간을 가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 결과 적어도 한국에서는 전 교회가 조직적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공부에 흥미를 가지고 있으며 성경에 대한 일반지식이 증가하고 있다.” 교인들 대부분이 참석하는 사경회는 단순히 성경에 대한 지식만 증가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부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성령 안에서의 부흥은 교인들로 하여금 믿지 않는 이웃들과 초신자들에게 관심을 가지도록” 촉구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기성의 신자들에게는 나태해진 자신의 신앙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를 제공하고, 타락한 신자들은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고 좀더 성결한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계기를, 그리고 초신자들에게는 주님을 만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모든 초기 한국의 서양 선교사들은 교파를 초월해 사경회가 “교회를 부흥시키는 참되고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확신했다.
처음부터 부흥회와 사경회는 성격이 달랐고, 선교사들은 이 차이점을 분명히 인식한 가운데 사경회를 선교사역의 중요한 요소로 다루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국교회의 영적인 성장과 발전을 지속적으로 가져다주는 데는 부흥회 보다 사경회가 훨씬 더 낫다는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사경회]는 회중에게 고도의 부담을 주어 그리스도를 위해 결단케 하는 식의 부흥사에 의한 전문적인 부흥회보다 훨씬 낫고 오래 지속되는 것 같다. 물론 복음을 선포하여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식의 부흥회도 없는 것보다 낫다. 하지만 나는 교회 생활 속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성경공부와 개인전도 사역이 잘 맞물릴 때 교회가 부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철저한 말씀에 대한 연구, 그리고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성령의 역사를 구하는 간절한 기도, 복음의 빚진 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복음 전도는 사경회에서 항상 있었던 것이다.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저녁에는 부흥회를 열어 상한 심령, 깨어진 심령들이 주의 말씀 앞에 엎드려 자신들의 죄를 통회하고 다시 한번 이 세상을 주안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영적인 힘과 능력을 간구하여 은혜를 받고는 세상을 향해 나갔던 것이다.
평양부흥운동은 말씀을 체계 있게 연구하는 사경회에서 출발했다. 로이 쉬러(Roy E. Shearer)의 말대로 “사경회는 부흥운동의 진정한 수단”이었다. 그것은 “한국의 부흥운동의 실제적인 기초”가 바로 사경회에 있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블레어(W. M. Blair)가 지적한 것처럼 사경회 외에 어떤 다른 것으로는 이 시대 한국교회의 급성장과 부흥운동의 상태를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없다. 성령께서는 말씀, 기도, 전도가 한데 어울러진 사경회운동을 통해 잠자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도록 촉구했던 것이다.
4. 평양대부흥운동과 미국 오순절운동과의 관련성
평양대부흥운동이 순수한 영적각성운동이었다는 사실은 당시 미국에서 일고 있던 오순절운동과의 관련성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평양대부흥운동이 발흥할 때 미국 오순절 운동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소위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은사는 나타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몇몇 단편적인 자료들이 있기는 하지만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 충분하지 않다는 표현보다는 매우 드물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다. 브루스 헌트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서 “서구의 오순절주의 적인 요소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에서 방언운동과 신유(神癒)가 널리 강조된 것은 최근에 와서이다”고 말했다. 박명수 교수도 일반적으로 20세기 초의 복음주의자들은 방언을 참된 부흥의 증거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1907년의 대부흥운동과 1906년의 아주사 운동(오순절운동)은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필자 역시 이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양대부흥운동과 성령의 은사적인 측면과의 관계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는 것은 미흡하지만 평양대부흥운동 때 은사적인 측면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 게일이 전환기의 한국에서 언급한 바 1907년 부흥운동이 평양전역을 휩쓸고 있을 때 평양을 방문 길선주를 만난 중국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도를 하면서 “중국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단음절로, 한국인들이 그들 세계가 잊어버린 고대어로 그들이 기도했다”는 것이 방언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견해도 조심스럽게 제기되었다.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관련기록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비록 단편적이지만 이 부분을 언급한 기록이 발견되었다. 리차드 베어드가 자신의 아버지의 전기, 한국의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of Korea: a Profile)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장로교회는 예배드릴 때 결코 오순절 적이지 않았다. 1907-1908년 대부흥운동 동안에 장단에 맞춘 손뼉, 방언, 황홀경에 찬 외침이 약간 있었다. 이것은 칼빈주의로 무장한 언더우드, 마펫, 베어드 그리고 그 외 다른 선교사들에게는 너무 지나친 것이었다. 그들은 곧 그것을 중단시켰다. 동양선교회와 관련된 성결교회가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부흥운동을 이 방향으로 이끌었고, 성결교회는 아직도 예배에서 장로교보다 더 제약을 두지 않는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방언”에 대한 언급이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때 만약 방언의 은사가 실제로 나타났다면 평양대부흥운동과 미국의 오순절운동과의 모종의 연계성 혹은 연속성을 추론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1906년 4월 아주사 가에서 방언을 성령세례의 두드러진 체험으로 강조하는 오순절운동이 태동되었기 때문이다. 축귀 현상과 신유는 평양대부흥운동을 전후하여 나타났다는 분명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알렌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으로 “귀신이 쫓겨나가고 병자가 고침을 받는” 역사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신유와 관련해서는 “한국교회는 항상 안수를 포함하여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강조하여 왔다. 그것은 아직도 시행되고 있다.”
베어드의 기록에서 우리는 평양대부흥운동 때 방언과 같은 은사운동이 있었던 것이 사실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은사운동이 장로교 안에서도 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칼빈주의 전통에 익숙한 선교사들은 한국교회가 그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반면 평양대부흥운동이 한창 일고 있던 1907년을 전후하여 한국선교를 시작한 신유, 방언, 성결, 재림을 강조하는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은 그런 방향에서 부흥운동이 진행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이 발흥할 때 한국선교를 막 시작한 동양선교회는 처음부터 미국 성결운동의 전통에 따라 성령의 역동성과 영적 은사를 강조했다.
맺는 말
우리는 당시의 정치적, 지정학적 정황을 고려해야 하지만 이것이 평양대부흥운동의 일차적인 동인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놀라운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이들은 과거 자신들이 도둑질한 물건이나 돈을 되돌려주고,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기독교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에게도 개인적으로 자신들이 범했던 잘못된 죄악들을 토로했다. 부흥운동 이후 여기저기서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이길함 박사와 블레어 선교사가 1907년 2월 영유에서 사경회를 개최할 때 한 사람이 일어나 교회 가까이에 있는 계곡에서 사람을 죽였다고 고백하고는 단상 앞에서 기절하는 바람에 그 형제를 두드려 깨운 후에야 그가 일어났던 일도 있었다. 한국의 중국 상인은 한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찾아와 그가 회심하기 이전, 몇 년 전에 부당하게 착복한 엄청난 돈을 되돌려주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은혜를 받고나면 죄책감에 사로잡혀 그 모든 죄들을 토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법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은 말씀과 기도를 통한 회개로 특징 되는 성령의 영적각성운동이었다. 이와 같은 회개운동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고, 성령의 역사는 말씀을 통해 말씀과 더불어 나타나는 법이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 말씀과 더불어 역사한다는 개신교 신학의 원리를 구태여 예로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씀 앞에 자신을 점검하고 말씀을 배워 그대로 순종하려고 하는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놀랍게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을 우리는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경건주의자들이 그랬고, 또 1740년 미국의 1차 각성운동이 그랬고, 웨슬리의 홀리 클럽이 바로 그와 같은 모임이었다. 왜 경건주의 운동이 계몽주의시대 유럽의 기독교를 새롭게 갱생시키고 그와 같은 영적인 움직임이 프랑케의 고아원운동, 진젤돌프의 신앙의 공동체로 이어지고 영국의 웨슬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가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웨슬리의 부흥운동도 마찬가지다. 홀리 클럽에서 말씀을 배우고 그대로 실천하는 노력, 모라비안 공동체에서 체험한 말씀과의 만남이 웨슬리 부흥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1740년 뉴 잉글랜드에서 있었던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 때도 마찬가지였다. 에드워드가 자신의 교회에서 성경을 강해하며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 앞에 회개를 촉구하며 죄의 각성을 외쳤을 때 그곳에 모인 이들 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교회 부흥운동이 과연 비정치화의 결과였는가를 심도 있게 고찰하면서 아래와 같은 몇 가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첫째, 1903년과 1907년 한국교회부흥운동은 기도, 말씀, 회개를 특징으로 하는 순수한 영적각성운동, 신앙운동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점에서 한국의 평양대부흥운동은 1차 대각성운동, 웨일즈부흥운동, 인도부흥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 전세계적으로 일고 있던 영적부흥운동의 연장선에서 볼 때도 한국교회 부흥운동을 비정치화의 현상으로 풀어가는데는 한계가 있다.
둘째, 한국의 부흥운동이 정치적인 위기를 종교적인 소망으로 대치하면서 일어난 부흥운동이라고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부흥운동이 순수한 영적각성운동이라는 사실은 부흥운동의 신적 기원을 전제한 것이며, 부흥운동을 비정치화로 해석하는 것은 이와 같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신적 기원을 평가절하시키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고백처럼 부흥운동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었다. 민족의 위기가 민중들의 심령을 부드럽게 만들어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토양을 제공해주었지만, 다시 말해 민족의 정치적인 위기가 영적부흥운동의 배경을 제공해주었지만, 이것이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동인으로 보는 것은 비약이 아닐 수 없다.
셋째, 말씀과 기도와 회개로 특징되는 순수한 영적각성운동이라는 사실은 이 부흥운동이 사경회 운동과 깊이 연계성을 지니고 발전했다는 사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말씀과 기도로 특징되는 사경회 혹은 기도회 기간 동안에 일어났다. 사경회가 부흥운동의 중요한 도구였다는 사실은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을 특징 짓는 놀라운 회개운동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하고, 성령의 역사는 말씀을 통해 그리고 말씀과 더불어 나타난다는 개신교 원리와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 따라서 비정치화 해석은 한국대부흥운동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라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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