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선교 지향적 교회를 위한 교육 개발 (이동휘)

수호천사1 2010. 4. 10. 12:00

선교 지향적 교회를 위한 교육 개발

 

-이 동 휘 목 사(전주 안디옥 교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 : 8).

 

저희 교회는 개척한 지 13년 되었는데 13년 동안 표어가 사도행전 1장 8절이었습니다. 혹시 교인들이 표어를 지루하게 여기지는 않을까 우려도 됐습니다만, 머리에 세뇌시키는 것도 교육이다 싶어 그렇게 해왔고 또 선교의 내용을 사도행전 1장 8절이 가장 잘 담고 있는 것 같아 계속 표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국내 선교가 우선이냐 해외 선교가 우선이냐 논쟁할 필요 없이 제자들이 있던 예루살렘 현지에 사는 분은 서울을 선교 지역으로, 온 유다는 우리 나라 전국을 의미한다고 여기고 선교하면 됩니다. 사마리아는 특수 지역, 분명히 이스라엘 땅인데도 앗수르와의 혼혈 문제 때문에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라 이방인처럼 여겨 특수 지형이 되어 버린 곳이므로 북한과 특수 선교, 농어촌 선교 등을 의미하며, 땅 끝이란 말 그대로 해외 선교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선교를 모두 잘하면 국내 선교가 우선이다, 해외 선교가 우선이다 하는 특정 지역 우선론의 쟁점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은 선교에 대한 순서적 명령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복음화한 후 유대 지방도 가고 사마리아 지역도 가고 땅 끝도 가라는, 그야말로 동시적 명령입니다. 네 지역을 동시에 하라는 것이기에 해외 선교를 한다고 국내 선교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국내가 시급하니 해외를 미룬다거나 혹은 사치스런 말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은 모든 선교의 지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교 정신에 의해 운영되어 왔는데 금년부터는 선교 교재를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저희 교회가 나름대로 해왔던 것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개척하는 첫날, 교회 개척을 위해 기도하고 일곱 가지 실천 강령을 주보에 발표했습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교회 주보를 보면 맨 앞장에 예배당 건물 그림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당 건물 그림 대신 실천 강령 일곱 가지를 맨 앞에 실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임을 나타낼 수 있고 주보에 선교 내용이 일일이 실리니까 나름대로 선교에 대한 윤곽도 잡히고 교인들도 그에 맞추어 나아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일곱 가지 실천 강령에 대해 다 말씀드릴 수는 없고 그 중 몇 가지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의식의 개혁

 

크리스찬이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한국 기독교의 성장이 점차 둔화되어 가고 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기독교의 타락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문에 보면 기독교의 비리도 자주 나타나고 여러 악재도 자주 발표되지만 기독교의 타락 중 가장 큰 것이 성직자의 타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년 전인지 1년 전인지 확실히 모르겠지만, 우리 나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이 사회에서 존경받는 직업을 조사한 것이 있습니다. 그때 제일로 존경받는 사람이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가톨릭의 신부였습니다. 두 번째가 대학 교수였고 세 번째가 중이었고 네 번째가 방송국의 아나운서였고 다섯 번째가 목사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중들조차 우리 목사보다 이 민족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목사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이렇게 목사를 존경하지 않는데 그런 목사가 설교하는 교회에 나가고 싶은 생각이 있겠습니까? 지금 한국의 기독교는 성장이 둔화됐지만 불교와 카톨릭은 계속해서 성장하는 이유를 여러분도 아시겠지요.

 

지금 여기 2천 명의 교역자가 모였다는데 2천 명이 5일간 교회 성장과 교육 개발은 연구했으면 다음 주일부터는 한국 교회가 폭발적으로 교육도 잘 되고 부흥도 잘 되어야 할 텐데, 과연 그렇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싱그러운 삶이 성도들에게 필요하고 교역자들에게도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했습니다. 가롯 유다는 그날 밤 예수님을 악당들에게 넘겨 줄 임무를 맡고, 내가 입맞추는 사람이 예수인 줄 알고 잡아가라고 밀약을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식사하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팔아 넘기려는 가룟 유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속으로는 다 아시면서도 제자의 발을 주물럭거리며 씻어 주셨던 예수님, 내가 선생이 되어 그렇게 했으니 너희도 본을 받아 그렇게 행하라는 말씀을 하신 예수님. 저는 솔직히 예수님처럼 할 자신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므로 저는 교인들에게 “나하고 이렁저렁 같이 해봅시다.” 그러고 말았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고 99세 된 아브라함에게도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99세 되었으니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도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참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여러분의 아픔이고 저의 아픔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율법으로나 교양으로나 신앙으로나, 즉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으니 우리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제일 급선무는 곧 사랑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 프랜시스가 주님 앞에 기도한 내용은 두 가지였다고 합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죄인들에 대하여 그토록 참으실 수 있었던 그러한 사랑을 달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님이 받으신 상처, 바로 십자가의 상흔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 기도가 다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밤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도 나의 정욕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습니까? 성 프랜시스는 “오, 주여! 나의 전부여” 하며 밤새도록 기도하는 가운데, 죄인을 사랑하셨던 주님의 사랑이 가슴에 밀려오니까 나는 죄인이라고 하며 가슴을 쳤던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가 하도 자기를 죄인이라고 하니까 제자들이 “선생님 진짜 악당도 많이 있고 살인 강도도 많이 있는데 왜 자꾸 선생님을 죄인이라고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래, 세상에는 살인자도 많이 있고 도둑놈도 많이 있다.하지만 그들도 내가 받은 은혜를 받았다면 만 배나 주님을 잘 섬겼을 것 아니냐. 그런 생각에서 내가 죄인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자책과 아울러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뿌듯함 가운데 밤새껏 기도하기를 “오 주여, 나의 전부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민족을 책임지고 이 세상을 책임지는 일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우리가 아니면 안 되는 이 중대한 임무를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을 생각할 때에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오늘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도 왜 문제가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모든 역경을 다 물리치면서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의 속성을 지니고 주님의 성품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목회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솔직히 이야기해 봅시다. 교역자가 평신도보다 더 많이 기도합니까?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지만 저는 더 못 합니다. 평신도보다 성경 더 봅니까? 아마 많이 보시는 분도 있겠지만 평신도들은 정말 성경을 많이 읽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그러니까 남들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만 평신도 앞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평신도더러 기도 안 한다고 보채지만 우리는 더 기도를 게을리 합니다. 더군다나 1990년대에 들어와서 교역자들도 웬만큼 살고 교회도 든든해져서 그런지 모르지만 목사의 기도소리가 잘 안 들립니다. 옛날에는 교인들이 기도를 시끄럽게 해서 교회가 덕이 안 된다며 동네에서 교회를 쫓아내려고 했는데 요새는 오히려 교회가 덕이 될 정도로 기도를 안합니다. 저는 기도의 부족이 한국 교회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성장이 둔화된 이유로 우리가 자주 말하는 핑계인 경제 발전, 자동차 문화의 발달, 풍요로워짐 등의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절대적으로 우리의 기도 부족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타락 때문입니다.

 

저는 모태 신앙입니다. 그래서 저한테는 신앙에 대한 어떤 느낌도 계기도 없었습니다. 누가 저더러 선교의 계기가 뭐였냐고 묻는데 정말 없었습니다. 저희 외할아버지가 서당 선생님을 하시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저는 장로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전도사님이 예수 믿은 지 3년, 5년 된 사람이 열심히 전도하고 교회생활도 열심히 전도하고 교회생활도 열심히 하는 것이지, 30년, 50년 믿었거나 모태 신앙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뿌리 깊은 나무 같아서 웬만한 시험에 흔들리지는 않아도 초신자 같은 큰 열심은 없는 것이라고 했을 때 저도 정말 그런 줄 알았습니다. 왜냐 하면 제가 그랬기 때문입니다. 신학교도 어떤 감격이나 사명감을 갖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냥 가야 하는 줄 알고 갔고 목회도 하면 잘 될 줄 알고 그냥 배운 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게 은혜를 주신 다음에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사탄의 소리인가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직분에 따라 상주시고 주를 위해서 얼마나 일하는가? 얼마나 주를 사랑하는가라는 것을 따지시는 분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지구상에는 아직도 하루에 35,000명이 못 먹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2만 원이면 아프리카에서는 하루에 80명이 먹고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셋째, 넷째, 아들은 여기저기서 못 먹어서 죽어가고 있는데 하나님의 첫째 아들인 우리는 포식하다 못해 버리고 있으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죄의 오염 속에 살다보니 죄에 대한 분별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장로교가 100여 개 되도록 갈라지고 지금도 갈라지고 있는데 아무런 죄의식도 없고 또한 그러한 일에 만성이 되었습니다. 저도 하나님께 늘 혼나면서 삽니다. 그러나 혼나는 줄 알면 회개가 나올 터인데 그렇지 못한 걸 보면 우리가 영적으로 얼마나 무감각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하나님 앞에 늘 회개하며 기도해서 그런지 13년 동안 교회에 분란 한 번 없었고 또 선교가 주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것이라 믿기에 온 교인들이 선교하는 데 힘을 합치고 있습니다.


저는 먼저 오수교회에서 23년간 목회하다가 49세 되는 해에,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와 같이 선교하는 교회를 만들고자 전주 안디옥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저는 당시 선교를 하는 데 있어서 장애 요소가 장로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장로님들은 선교의 뜻도 모르고 이렇게 하자고 하는데 저렇게 하자고 반대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님 말씀을 경청하다 보니 선교의 장애는 바로 목사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게 있는 모든 장애 요소를 다 잘라 버리고, 수입의 60% 이상을 선교비로 쓰기로 하고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수입의 50~60%를 선교하는 교회가 2~3백 개로 점차 늘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선교도 모르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수입의 50%를 남에게 주겠습니다 했던 말에 감동을 받아서 조금이라도 주님께 비중을 더 드린다는 의미로 60%로 책정했던 것입니다.


1983년에 교회를 개척했는데 1년 동안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힘들었고, 또 세상 사람들과 항상 간격이 있었고, 모든 일이 이상대로는 안 된다라는 말을 들었으므로 머릿속에는 항상 패배의식, 말하자면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그 전의 100의 100을 다 쓸 때보다 교회 성장이 훨씬 더 빨랐고, 교회의 어느 기관도 지원을 안 했지만 교회 발전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600만 원에 가건물을 전세 내어 6개월이 지난 후부터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건축비라는 것을 생각지도 않았는데 점차 건축비가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십일조 나오는 것에서 현재 선교비는 70% 나가고 건축비로 20%, 소위 말하는 경상비로 10% 씁니다. 저도 처음에는 선교비 60% 하고, 경상비로 40% 쓰려고 했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10% 가지고 쓰지만 저에게는 아무런 불편이 없습니다. 교회 성장에도 불편이 없고 교회 성장에 장애 요소가 있다면 제 기도가 부족하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저는 교인들에게 선교의 정신에 있어서 선교의 장애 요소를 제거하자라는 말을 썼습니다. 왜냐 하면 교회 예산 중 선교에 50~60%를 쓰는 교회들 중에서 선교비를 중단한 교회가 제법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교의 장애 요소를 계속 놓아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선교의 장애 요소를 전부 끊어 버려야 합니다.

 

선교를 하는 데 있어서 선교비는 정상적으로 나가야겠는데 상여금 때문에 장애 요소가 될 것 같아 상여금 지급을 전부 중단해 버렸습니다. 그때 제 아이들 셋이 대학을 다녔고 막내가 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그래서 학비가 엄청나게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개척해 놓고 선교에 불이 붙으니 자식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12개월 생활비와 성미 두 개만 놔두고 전부 안 받았습니다. 학자금, 상여금, 은퇴 적금 모두 안 받았습니다.

 

예산의 10%만 갖고 교회 운영을 하다 보니 교회 예산의 절약 면에 있어서도 많은 일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교인들 결혼식이 있을 때 목사나 장로나 집사의 아들 딸 할 것 없이 축하 선물을 7,000원짜리 예배상으로 통일시켰습니다. 제 딸도 둘이나 결혼했는데 교회에서 준 것이라곤, 7,000원짜리 예배상 하나밖에 없습니다. 목사가 돈을 밝히면 교인들도 부조해야 된다고 여겨서 결혼식이 호화스럽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걸 미리 아시고 우리 딸들로 하여금 피아노 레슨이라도 하도록 해서 자기들 결혼할 것을 미리 준비케 하셨고, 돈이 없으니까 결혼식도 개혁적인 차원에서 진행하도록 하셨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저도 그래왔지만 주일학교 선생, 찬양대원, 구역장, 장로에게까지 항상 세숫비누나 양말 등 선물을 주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선교하는 교회로서 어떻게 할까 망설였습니다. 돈도 없거니와 선물을 주면 선교하는 교회로 구색이 안 맞을 것 같아 안 주기로 결심했지만 젊은 사람들 사기가 떨어지면 어떡하나 상당히 주저했습니다. 그러나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 : 10)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중앙교회에서 시무하십니까? 그러면 중앙교회에 충성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중앙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교회를 통해서 주님께 충성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수고의 짐이 확 풀립니다.
우리가 교회 건축한다고 건축비 바친 것은 교회에 바친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바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피곤이 가십니다.

 

저는 그런 적이 많습니다. 내가 안디옥교회를 개척했으니 다 잘하고 싶은데 장로들이 안 따라오면 나무에 올려놓고 나 혼자 흔들어놓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내가 안디옥교회에 충성했나 주님께 충성했지라고 생각하면 섭섭한 마음이 풀립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여러분의 충성을 안 알아줘도 우리 하나님은 알아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취지의 설교를 했습니다. “자, 상은 하늘나라 가서 받아라”라는 내용의 설교였는데 오히려 역작용을 일으켰나 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상스럽게 비판적입니다. 이유 없는 반항 시대라 그런지 모르지만 하늘나라에 가서 상 받으라고 했더니 여기가 참 교회라면서 젊은이들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손수건 한 장 줘 본 일이 없습니다. 여름 성경학교 끝났다고 수박 한 덩어리 사줘본 적 없고, 시원한 데 가서 휴식하라고 돈 줘본 일도 없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주일학교 선생들도 구역식구들이 해온 떡을 나눠먹고 남은 것으로는 오후에 교인들이 나눠 먹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인도상, 개근상, 전도상, 일반적으로 주는 노트 한 권 없습니다. 그래도 교인들은 아무 불평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주일학교 다닐 때는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입니다. 저도 주일학교에서 상 받은 것으로 초등학교 시절 내내 썼습니다. 연필 한자루 사 본 일 없습니다. 그때는 상이 그렇게도 좋았습니다. 지금은 주일학교에서 여러 명에게 상을 주다 보니 값도 싸고 메이커도 없는 것을 줍니다. 그러나 엄마가 사주는 것은 메이커 있는 것에다가 비싼 것을 사줍니다. 최고급을 사주는데 교회에서 주는 것은 싸구려니 습관적으로 아이들이 ‘고맙습니다’ 하고 받기는 받지만 고마운 마음은 없습니다.

 

먹는 과자도 그렇습니다. 엄마는 유효기간이 지났나, 지방질이 없나 있나를 꼼꼼이 살피면서 최고급으로만 사주는데, 주일학교에서 주는 빵이나 과자는 질이 낮은 것을 줍니다. 그러니 교회의 권위가 점점 떨어집니다.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물질적인 것을 자꾸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린아이들에게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바로 날 위해 죽으셨다는 구원의 확신을 어려서부터 알고 믿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1년만 그렇게 하면 그런 줄 압니다. 아무런 이유를 달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칠판에서 이루어지는 것들로 되지 않고 어른들의 실천을 통해 보고 배웁니다.

 

예식의 개혁

 

장로교 헌법에 의하면 목사 취임식이나 장로 장립식은 주일 대예배 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그런 의식이 사회에서 하는 것처럼 거창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개척할 때부터 교인들에게 아예 세뇌를 시켰습니다. “우리 교회 최고의 상급은 성경 밖에 없습니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개척한 지 5년 후 장로님 세 분을 세우고 제 취임식도 그때 처음으로 했습니다. 우선 청첩장부터 다른 곳과는 다르게 했습니다. 주일 오후에 했는데 축의금, 축품, 화환은 일체 사양하고 점심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장로님들에게도 장로가 되는 기념 집회라고 해서 이것 저것 준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다 장로가 되는 명예 때문에 하는 것인데, 그런 행위는 하늘나라에 상급이 없으며, 언젠지 모르지만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에 감격했을 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장로님 내외에게 옷 한 벌씩 해주는 것도 물론 안 했습니다. 물론 저도 똑같이 했습니다. 저도 위임식 때 성경 하나만 받고 사모도 옷 한 벌 안 받았습니다. 목사 되는 날, 장로 되는 날은 십자가 지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작정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왜 “축하합니다”라고 합니까? “축하합니다”라는 말 대신 차라리 “충성하세요”라고 말해야 옳은 듯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의 상급이 있습니다.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 바쳤다면 교회에 비품은 하나 더 늘었을지 모르지만 하늘나라의 상급은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파이프 오르간이 없고 전자 오르간도 교인이 쓰던 것을 갖다 놓고 씁니다. 그래도 예배드리는 데 아무 지장 없습니다. 5천만 원짜리 전자 오르간이 있어야 예배가 신령해집니까? 그래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됩니까?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정성을 가지고 목회를 한다면 하나씩 하나씩 개혁을 해 나가야 합니다. 저는 처음에 개척할 때 사과 궤짝 놓고 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인들은 교회 비품을 서로 갖다놓으려고 합니다. 저는 사과 궤짝 놓고 예배드리려고 한다고 했더니 창립 예배 드리기 전날 토요일에 여기저기서 비품이 많이 들어와 첫날부터 강대상도 있고 피아노도 있는 상태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만, 없으면 없는 대로 하면 됩니다.

 

“불편하게 삽시다”

 

목사가 자꾸 불평하면 전라도 말로 진짜 짜잔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아이들도 자꾸 불평하면 듬직스러워 보이지 않는데 하물며 목사님들이 자꾸 불평하면 짜잔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불편하게 살면 살만한 것 같고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자꾸 편하게 살려고 하니까 불평이 나옵니다.

 

지금 우리는 편리한 시대, 정보의 시대에 삽니다. 작년에 산 컴퓨터를 금년에 못 쓸 정도로 발달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 쓰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출생하셨습니다. 또 벌거벗은 채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적어도 교회의 자세는 이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다”

저는 지금까지 이 말을 많이 적용했습니다. 얼핏 보면 교인들 입을 막으려고 하는 것 같지만 저는 못 들은 척하고 그대로 적용합니다.


저의 장인 어른이 장로이신데 그런 교훈을 주셨습니다. “내가 보니 교회에 문제가 일어나면 꼭 목사가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을 보았다. 문제가 일어나면 이 목사는 가만히 있어라” 그래서 저는 그렇게 해왔습니다. 자기들끼리 싸우고 다투어도 내버려 두었습니다. 심지어는 기도원에 가면서 “목사님은 이 기도원에 가는 것 좋아하시지 않으니까 살짝 갖다와야 해” 하면서 갑니다. 그래도 내버려 두었습니다.

 

교역자들은 교인을 자꾸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해서 자꾸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길 원하는데 저는 권리 주장을 하지 말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기도를 많이 하시는 편이어서 저도 기도 흉내는 조금 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성격이 내성적이라 찬송은 별로 안 했습니다. 그러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하나님께서 문제 해결을 기도와 찬송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허튼 소리 듣고 마음이 괴로울 때는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를 부릅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다 해결해 주십니다. 저는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자꾸 목사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게 되면 안 된다는 것을 거듭 느끼게 됩니다.


제가 13년 동안 이렇게 살아왔다고 하니까 여러분들은 당연히 두가지 의문점을 가질 것입니다.

 

1. 목사의 권위 문제

 

어떤 목사님은 저 때문에 받을 것을 못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희 교회 교인들은 다른 데 나가서는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다른 목사님들을 헐뜯는 일은 안 합니다. 목사님들을 전부 존경합니다. 우리 선배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교인들은 목사의 흉을 봐야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교인들은 내게 관한 것 뿐만 아니라 모든 목사님들을 좋게, 긍정적으로 봅니다. 어쩌다가 다른 교회에서 온 분들이 가끔 목사 흉을 보면 이상스럽게 봅니다. 우리가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결국 목사 전체의 권위가 올라간다고 봅니다.

 

2. 교회 성장의 문제

 

남에게 다 줘버리고 나면 교회 성장과 교회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어떻게 하느냐가 의문일 것입니다. 사실 이번에 오신 강사님들은 몇만명씩 모이는 교회이니 별 어려움이 없겠지만 저희같이 그릇이 적은 한도 내에서 선교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선교비를 하나라도 더 보내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해서 “교인이 1천 명 될 때까지는 나 혼자 목회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7년이 되니까 출석 교인이 1천 명이 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1년 만에 1천 명이 넘었다고 하지만 저희 교회 규모로서는 교육 전도사 하나 없이 주님 사랑하는 마음과 교회를 부흥시켜야 되겠다는 열심만으로 다른 데 전혀 시간 안 쓴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선교함으로써 교회 부흥에 어떤 영향이 있느냐 없느냐 라는 질문에 아무런 손해가 없고 오히려 교회 부흥이 촉진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성장에 얽매여서 선교를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교회 교육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목사의 선교 정신이 선교 교육에 있어서 근본입니다. 칠판으로 가르치는 교육보다 선교를 통한 산 교육이 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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