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스크랩] 성막(聖幕)을 알자

수호천사1 2010. 2. 6. 13:05

성막(聖幕)을 알자

 

 

 

성막이란 무엇인가?(히 8:1-6)

1. 성막 연구의 중요성

왜 성막 연구가 중요하고 많은 사람들이 성막을 연구할까요?

1) 성경에서 성막에 관한 언급이 매우 많다는 사실 때문이다.

출애굽기에만 13장이 성막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성경 말씀이 어느 한 구절이라도 의미 없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출애굽기에만 13개장에 성막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성막을 통해 하나님께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중요성을 파악할 수 있다. 출애굽기에서 성막에 관한 기록이 있는 부분은 25-31장과 35-40장인데, 25-31장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의 내용과 설계를 가르쳐 준 장이고, 출애굽기 35-40장은 성막의 실제적인 공사를 기록하고 있는 장이다. 그밖에 레위기 18장, 민수기 13장, 신명이 2장이 성막을 언급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도 가장 유대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히브리서에서 4장이 성막에 관한 내용으로 할애되어 자세히 언급되고 있다. 이처럼 모두 합해서 성경 전체에서 약 50장 이상이 성막에 관한 진리를 담고 있다. 창세기 전체가 50장이라는 사실을 알면 성막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게 된다.

2) 성막이 가지는 위대한 상징성 때문이다.

성막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머무르는 동안 계시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막의 설계도에 있는 부분 부분마다 그저 설계된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막이 하늘에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히 8:5)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 설계하심으로 강한 영적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히 8:2) 그래서 성막은 물론, 성막 안에 있는 각 기구들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한 의미를 알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2. 성막의 다른 명칭.

1) 장막(출25:9) - 가장 흔히 쓰이는 일반적인 명칭으로 천막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2) 성막(출26:1) -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생각하는 성스러운 천막이라는 뜻.
3) 성소(출25:8) -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생각하는 성스러운 장소라는 뜻.
4) 회막(레1:1) - 하나님과 인간이 이곳에서 만나서 교제한다는 뜻.
5) 증거막(민1:53) - 하나님의 위대한 진리를 증거한다는 뜻.
6) 하나님의 집(삿18:31) -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소라는 의미.
7) 법막(대하24:6) - 율법, 특히 법궤가 그 성막에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

3. 성막의 정의.

1) 구약시대의 은총의 통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두 가지 선물을 주셨다. 하나는 십계명이요, 또 하나는 성막이다. 십계명은 고통의 선물로서 거울처럼 그 법에 비춰봄으로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했으며, 성막은 감사의 선물로서 속죄 제사의식을 수행함으로 죄인을 위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과 단절되었을 때, 그 단절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설정하신 방법이 바로 성막이다. 그러므로 성막은 죄인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의 통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 찾는 장소였다. 그들에게 죄를 속함받는 길은 오직 성막을 통한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언약 즉 신약시대에는 새로운 은총의 통로가 생겼다. 그 새로운 은총의 통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친히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를 잘 계시하는 구약시대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2) 백성 중에 함께 거하는 하나님의 처소.

 

성막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작하신 은총의 통로였기에 광야생활에서 이스라엘의 예배의 중심, 곧 생활의 중심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백성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처소로 여겼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할 때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쳤다. 동편에는 유다, 잇사갈, 스불론 지파가 진을 쳤고, 남편에는 르우벤, 시므온, 갓 지파가 진을 쳤고, 서편에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가 진을 쳤고, 북편에는 단, 아셀, 납달리 지파가 진을 쳤다. 그리고 그들이 진을 쳤던 천막 문의 방향은 반드시 성막을 향하도록 했다. 항상 성막을 바라보고 살라는 하나님의 뜻이다. 다시 말하면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막은 겉으로는 보잘 것 없었으나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인 유대인이 아니면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었고, 유대인 중에서도 제사장이 아니면 성소 안에 들어갈 수 없었고, 제사장 중에서도 대제사장이 아니면 지성소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 구약적 배경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지성소의 교제>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우리에게 감격적이고 고마운 일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성막강해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길을 새롭게 발견해 보시고, 다시 한번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는 은총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성막 건축과정(출35:4-36:7)

성막 건축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1. 모세가 벡성들에게 헌물과 헌신을 권고하는 과정(출35:4-19)

"헌물"을 권고하는 말씀은 다음과 같다.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취하되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5-9) 이 말씀에는 헌물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원리가 담겨있다. 하나는 "소유 중에서 드리라"는 말씀이다. 달리 말하면 빚을 내서 드리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원해서 드리라는 말씀이다. 강요해서, 혹은 강요받아서 드리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헌신"을 권고하는 말씀은 다음과 같다. "무릇 너희 중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와서 여호와의 명하신 것을 다 만들지니..."(10-19) 지혜 중의 최고의 지혜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다 순종하는 것이다.

2. 모세의 권고를 들은 백성들의 헌신의 과정(35장 20절-36장 7절).

1)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렸다.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여호와께 드렸으니.."(35:21)

2) 거의 모든 사람이 드렸다.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사람마다... 마음이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마음에 감동함을 받아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모든 족장은...마음에 원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남녀마다..."(35:22-29) 이 상의 구절들은 보면 거의 모든 사람이 기쁘게 동참했음을 알 수 있다.

3) 특별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모세에 의해 헌신자로 지명되었다.

 

"...브사렐을 지명하며 부르시고...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사..."(35:30절-36:1) 하나님께서 "감동"하셔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 진정 하나님의 일만은 인간의 수단으로 되지 않는다. 돈으로 안된다. 풍부한 경험과 지식으로도 안된다. 대단한 각오와 결심으로도 안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슥4:6-7)

4) 많은 사람들은 시간과 몸까지 바쳤다.

 

"...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36:2)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헌신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 브사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무릇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31:1-11)

5) 헌물이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을 정도로 백성들이 열심을 가지고 드렸다.

 

더 이상 예물을 가지고 오지 말라고 명령할 정도였다. "...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오는 고로...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36:3-7) 다윗은 성전 건축을 준비할 때도 이런 자원하는 기쁨이 백성들 가운데 있었다. "백성이 자기의 즐거이 드림으로 기뻐하였으니 곧 저희가 성심으로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며...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가로되...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29:9-14) 신약에서도 이런 자원하는 드림을 권고하고 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3. 헌물과 헌신을 바탕으로 성막을 건축하여 완성하는 과정.

하나님께서는 정월 초일일에 성막을 세우도록 명령하셨다.(출40:2) 이 명령은 성막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작업이 새해 첫 시간의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는 뜻이다. 이런 정성으로 성막을 완성했을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는가? 출애굽기 40:34-38에는 성막 완성 후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1)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다.

2) 성막을 중심으로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보호가 있었다.

3) 성막을 중심으로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가 있었다.

헌물과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고한 것에 대해 반드시 보상을 내리신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이 아니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의 영광이 다르다(고전 15장). 불 가운데서 게달의 가죽과 같은 모습으로 얻는 구원이 있고 영광 가운데서 찬란한 세마포를 입고 얻는 구원이 있다(고전 3장). 만약에 똑같다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 되시지 않을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고 생명 내걸고 헌신한 사람과 심심하면 교회 나오는 사람과 똑같이 보상하면 되겠는가? 하나님을 위해 쏟았던 정성과 눈물과 땀과 헌신을 반드시 기억하시고 갚아주실 것이다. 우리의 정성은 결국 성막을 짓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성과 차이가 없다. 그러한 아름다운 정성을 계속적으로 유지하기에 힘써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성막을 위해 드려진 예물(출25:3-7; 35:4-9)

본문에는 성막 건축을 위해 드려진 예물이 소개되어 있다. 그 예물에는 나름대로의 영적 의미와 가치가 있다.

1. 금과 은.

    금과 은은 변하지 않는 가장 귀한 물건이므로 금과 은은 하나님을 변함없이 신뢰하는 믿음을 상징한다.

2. 놋.

    광야에 들린 놋뱀을 보았을 때 불뱀에 물려 죽어 가는 영혼들이 살게 되었으므로 놋은 십자가를 상징하는 중요한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

3. 청색실.

    청색은 생각할 때마다 자연의 푸르름를 느껴보게 된다. 그러므로 청색실은 생명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4. 자색실.

    자색은 왕이나 통치자를 상징하는 색. 그러므로 자색실은 왕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5. 홍색실.

    홍색은 피와 고난을 상징. 그러므로 홍색실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6. 가는 베실.

    가는 베실은 흰 실로서 깨끗함을 상징. 그러므로 가는 베실은 성결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7. 염소털.

    이스라엘 백성들은 염소 하면 아사셀 염소를 떠올린다. 아사셀 염소는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사막으로 보내어져서 울다 지쳐 죽는 염소다. 그러므로 염소털은 버림받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8.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

    수양은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남자이신 예수님을 상징. 가죽은 죄와 허물을 덮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은 죄와 허물을 덮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9. 해달의 가죽.

    해달은 홍해 바다에 사는 물개의 일종으로 그 가죽이 질기고 매우 단단하여 보통 신발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한다. 그러나 단단하기는 하지만 검정색으로 겉보기에는 볼품이 없다. 그러므로 해달의 가죽은 볼품없는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10. 조각목.

     조각목은 싯딤나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시내산 주변과 같은 척박한 광야에서 자라는 나무다. 질기고 단단하고 가시까지 돋친 나무로 귀하게 여겨지는 잣나무, 백향목, 밤나무, 상수리나무와 달리 보잘 것 없게 여겨지는 나무다. 그러므로 조각목은 버림받은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11. 등유.

      이 등유는 감람나무 열매를 찧어서 만든 기름. 이 기름은 감람나무로 상징되는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을 상징한다.

12. 관유.

     감람유에 액체 몰약과 창포 계피 등을 섞어 만든 기름. 이 기름은 성막 기구 모두와 봉사하는 사람에게 부어주는 기름이다. 이 관유는 사역을 위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상징한다.

13. 향품.

     소합향, 나감향, 풍자향, 유향, 그리고 소금을 섞어 만들었다. 각종 향은 여러 종류의 성도의 기도를 상징한다.

     1) 소합향은 나무에서 저절로 나오는 향이다. 이 향은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나오는 감사기도를 상징한다.

     2) 나감향은 어패류 껍질을 빻아 만든 향이다. 이 향은 죄에 대한 용서를 비는 회개기도를 상징한다.

     3) 풍자향은 고무나무에서 나오는 소독제로 쓰이는 향이다. 이 향은 심령의 깨끗함을 구하는 성결기도를 상징한다.
     4) 유향은 악취를 제거하는 향이다. 이 향은 문제를 제거해 달라는 탄원기도를 상징한다.

     5)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예수 그리스도 및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변하지 않는 언약의 상징이다. 성도의 기도가 상달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있어야 하며 언약에 기초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

14. 호마노 및 다른 보석.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석을 말할 때 12보석을 말한다. 이 12보석은 열두 지파, 열두 제자에서 볼 수 있듯이 택한 성도를 의미한다. 이 예물들은 성막을 풀어나가는 열쇠들이 되기 때문에 암송하는 것이 좋다.

출애굽기 38장 24-31절 말씀을 통해서 본 성막 건축비용. 성막 건축 비용으로 금은 29달란트 730세겔 은은 100달란트와 1775세겔, 놋은 70달란트와 2400세겔이 들었다. 1달란트는 약 30킬로그램이고, 세겔은 10그램, 1달란트는 약 3000세겔이다. 29달란트는 29X30=870킬로그램이고, 730세겔은 7.3킬로그램이다. 그러므로 소요된 총 금은 877킬로그램이 소요되었다. 대략 877만불이 들었다. 대략 1불당 1300원으로 쳐도, 금 가격만 대략 114억 정도의 금액이다. 나머지 금과 놋 그리고 열두 보석의 가격 및 그 외의 물품들(해달가죽, 실, 염소털과 양가죽)의 가격은 제가 시세를 모르기 때문에 계산할 수 없지만 간단히 추산해도 전체 가격이 160억 원은 훨씬 넘을 것 같다. 이렇게 비싼 대가를 치룬 것을 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수백 평 공간에 그토록 비싼 대가를 치루어 성막을 지었지만 그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 자세와 정성을 우리가 느낄 수 있다.

실질적으로 우리가 가진 종교와 신앙의 특성을 재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척도는 우리의 물질이 어떻게 사용되는가 하는 사실에서부터 결정된다. 여러분들의 돈이 어디에 쓰여지고 있는가? 이것이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고, 우리의 가치관이 어디에 있는가를 결정한다. 즉 서양 속담에 나오는 Money talks(돈이 말해준다)라는 말은 진리다. "돈을 쓰는 자세가 어떠한가?"하는 질문은 사람의 가치관을 판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외적인 척도다.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친구들과 만나서 한번 먹어 없어지는 일에 10만원을 낭비하는 것은 조금도 그것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드리는 1만원의 헌금에 대해서 아까워한다면 우리는 이 사람의 근원적인 신앙의 태도를 의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돈은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돈 배후에 있는 그 사람의 가치관을 결정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향해서 돈을 쓰기를 원하는가?" "내가 무엇을 향해서 돈을 통해 나의 관심을 나타내기를 원하는가?" 이것이 돈의 씀씀이와 관련하여 항상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바치는 일이 즐거운 일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말씀을 <돈 얘기>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시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풍성한 축복을 받기 위해서 이 얘기를 하는 것이다. 주머니를 잘 비우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해서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는 행위라고 했다. 이 시간이 다시 한번 물질관계를 진단해 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성막기구의 의미

성막에는 크게 일곱 가지 기구가 있다. 동문, 번제단, 물두멍, 금촛대, 떡상, 분향단, 언약궤가 바로 그것인데, 이 일곱 가지 기구는 기독교의 일곱 교리를 잘 말해주고 있다.

1. 동문

동문은 구원의 교리를 가르쳐준다. 성막에는 동쪽에 있는 오직 하나의 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다.

2. 번제단

번제단은 화해의 교리를 가르쳐준다. 동문을 통해서 제일 먼저 만나는 기구는 번제단이다. 번제단에서 제사장은 제물을 제단에 놓고 제물에 안수를 한다. 안수를 하는 순간 내 죄가 제물로 옮겨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은 고백한다. "이 제물이 나의 죄를 대신하고 죽습니다." 그리고 그 제물이 태워지면서 죄가 태워지는 셈이 되고 죄가 사라지면서 하나님으로 향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제물이 됨으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 번제단은 신자들의 회개를 상징한다.

3. 물두멍

물두멍은 성별의 교리를 가르쳐준다. 제사를 마친 제사장은 피묻은 손을 물두멍에 씻는다. 하나님과의 화해의 길은 열렸지만 지속적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처럼 거룩함을 추구해야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로 들어갈 수 있다.

4. 금촛대

금촛대는 조명의 교리를 가르쳐준다. 성소에 들어가면 좌측에 금촛대가 있다. 이 금촛대는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1:9)

5. 떡상

떡상은 만족의 교리를 가르쳐준다. 성소에 들어가면 우측에는 떡상이 있는데 상 위에는 12개의 떡이 놓여 있다. 12는 모든 것이 충족된 상태를 표현하는 수이다. 이 떡상은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요 6:35)

6. 분향단

분향단은 중보의 교리를 가르쳐준다. 좌측의 금촛대 우측의 떡상을 지나치면 분향단이 휘장 앞에 놓여 있다. 이 분향단에서는 항상 향이 피워지고 있는데 제사장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가 이 분향단의 향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 분향단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사역을 상징한다.

7. 언약궤

언약궤는 교제의 교리를 가르쳐준다. 분향단을 지나 휘장을 열고 들어가면 지성소가 나오는데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가 있고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그 언약궤 위에 피가 뿌려지면서 비로소 우리의 죄는 덮여지고 우리는 하나님과 만날 수 있게 되면 위대한 교제가 이루어지게 된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은 어디까지 와 있는가? 동문 앞에 있는가? 아니면 회개 직후인가? 아니면 구별된 삶을 살고자 하는 단계에 있는가? 더 나아가서 진리의 빛을 추구하는 단계나 말씀을 먹고 생명화시키는 단계에 있는가? 아니면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매 순간 임재 가운데 동행하는 단계에 있는가? 항상 주님과 동행함으로 승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성막 울타리

성막은 하나님께서 친히 설계하셨고 그 식양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소한 기구 하나에도 나름대로의 깊은 영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먼저 성막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울타리에 대해서 살펴보자.

성막의 울타리(출 27:9-19; 38:9-20)

울타리에는 세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1) 이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은 세상과는 구별된 것이다.

2) 이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은 나의 것이다.

2) 이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은 나의 보호를 받는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이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한다.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거기에 참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는 얽매는 것 같지만 거기에 참 자유가 있다. 기차가 철로라는 한계 안에서 가장 자유로운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자유와 보호의 선언을 하신다. "너는 내 것이라!"(요17:9) 그리고 예수님도 선언하신다.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9)

그리고 그 울타리는 크게 두 부분으로 형성된다. 하나는 울타리를 받쳐주는 뼈대의 역할을 하는 놋 기둥이고, 또 하나는 그 기둥을 중심으로 실제적인 울타리 역할을 하는 세마포 휘장이다.

1. 울타리 놋기둥

성막의 울타리를 이루는 기둥은 남쪽에 20개 북쪽에 20개, 그리고 동쪽과 서쪽에 각각 10개씩 있다. 그래서 총 60개의 기둥이 성막 울타리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성소가 튼튼하게 되기 위해서는 울타리의 기둥이 튼튼해야 한다. 이 기둥의 받침은 놋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놋 기둥이라 불리며 기둥에 있는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만들어졌다(출 27:10). 이 기둥은 세마포 포장을 묶고 고정시켜 성막의 울타리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의 고대사를 연구해 보면 성막이 무너졌다는 기록은 한 번도 없다고 한다. 그만큼 성막이 견고하게 지어졌다는 말이다.

그 성막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안전감을 느꼈겠는가? 그 안전감이 바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의 특권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최고의 안전으로 지켜주신다. 세상 폭풍이 아무리 험하게 밀려와도 견고하게 붙들려있다는 사실을 믿으라. 세상이 흔들린다고 해도 우리들까지 흔들릴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2. 울타리 세마포 휘장

기둥을 골격으로 울타리를 둘러싸고 있는 휘장은 세마포로 이루어져 있다. 세마포 포장은 북편과 남편에 100규빗, 동편과 서편에 50규빗의 크기이고 높이는 5규빗의 크기다. 한 규빗이 대략 45센티이므로 북편과 남편은 약 45미터이고 동편과 서편은 22.5미터이며, 높이는 2.25미터 정도다. 이 세마포 휘장은 흰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마포 휘장을 경계로 해서 그 안에 들어서는 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세마포 휘장으로 덮인 사람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위대한 성도가 된다.

실제적으로 성도가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기 전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세마포로 만들어진 옷을 입혀주신다. "...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6-8)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옳은 행실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날개 아래 들어가는 것이다. 지금은 행실이 완전하지 못할지라도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세마포 옷을 입혀 주실 것이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서만 우리의 믿음이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지금도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주께서 살아 계시기에 지금도 우리의 든든한 백이 되어주신다. 살아 계신 주님!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주님! 이 확신을 항상 인식하고 살자.

살아 계셔서 역사하는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상처, 원망, 불평, 열등감, 절망에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난 사람은 마음에 노래가 생긴다. 발과 발목에 힘이 생긴다. 마음속에 생수가 솟아난다. 하나님을 만나고 모세의 한탄의 지팡이가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불멸의 지팡이가 된 것처럼, 우리의 그 보잘 것 없는 원망거리가 이제는 노래거리가 될 것이다.



성막의 문(출27:16)

1. 동문

성막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동편에 단 한 개 있다. 왜 동쪽에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동쪽에 유다 지파가 진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메시야는 유다 지파에는 나타날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동쪽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으로 참 소망을 상징하는 방향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소망을 가지고 오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은 길이가 20규빗(9미터), 높이가 5규빗(2.25미터)다. 만약 이 문을 통과하지 않고 울타리를 넘으면 죽임을 당했다.

울타리가 율법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이 동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문이니..."(요10:9) 율법의 울타리는 죄인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차단하여 동쪽으로 유일하게 나 있는 출입문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율법의 울타리는 말한다. "멀리 떨어져! 안 그러면 죽어!" 그러나 문이 되신 예수님은 말씀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다 절도자요 강도라고 말한다(요 10:1).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많이 있다고 울타리를 넘기를 부추긴다. 이것은 강도의 짓이요, 그 현혹에 넘어가는 자는 멸망으로 떨어지게 된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는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다(잠 14:12). 예수님께서도 그 길은 '넓은 문'이라고 묘사하시면서 말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그러나 꼭 스스로 묻고 인식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좁은 문이냐?"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예수님 믿는 문은 처음만 좁은 문이다. 그러나시간이 지날수록 넓어진다. 그런데 세상적인 문은 처음에는 넓다. 그런데 끝까지 넓은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좁아진다. 이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호텔에 가면 일본인들하고 같이 다니는 미모의 20대 여인들이 있다. 화려하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만 화려한다. 그리고 현재만 넓다. 5년 후에 그들의 길은 좁아져 있을 것이다. 10년 후에 그들의 길은 더욱 좁아져 있을 것이다. 나중에는 꽉 막힌 담이 나올 것이다. 그것을 절망이라고 한다. 그리고 최후의 절망적인 곳이 있는데 그곳이 지옥이다. 단테의 신곡에는 지옥문의 입구에 이런 글귀가 있다. "이곳에 들어서는 자 일체의 희망을 버려라!" 그러나 예수의 길은 처음만 좁다. 시간이 지날수록 길이 넓어지고 나중에는 길이 없어진다. 특별히 따로 "여기는 길이고, 여기는 들판이다"라고 할 것도 없다. 다 길이다. 바로 대도무문의 경지에 올라서는 것이다. 그리고 최후의 대도무문의 장소,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기 때문이다.

2. 문의 네 가지 색상.

그리고 문은 네 가지 색상의 실로 되어 있다(27:16). 청색 실, 자색 실, 홍색 실, 가늘게 꼰 베실(흰색 실)이다. 이 네 가지 색상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청색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푸른 하늘의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의 상징색이다. 그러므로 문의 청색 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자색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의 상징색이다. 그러므로 문의 자색 실은 예수님이 왕이심을 보여준다. 홍색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피를 뜻하는 고난의 상징색이다. 그러므로 문의 홍색 실은 예수님이 고난받게 되심을 보여준다. "홍포를 입은 구주는/ 가시 면류관 쓰시고 저 십자가 높이 달리사/ 그 아픔을 참았네."(찬 336장 3절) 흰색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죄 없는 완전성의 상징색이다. 그러므로 문의 흰색 실은 예수님이 죄가 없으심을 보여준다. 그리고 문을 받치고 있는 기둥은 네 개 있었다(출 27:16).

이 네 개의 기둥과 네 가지 색상은 많은 사람들이 4복음서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다. 예수님을 네 측면으로 잘 소개하고 있는 4복음서의 조화를 생각해 보시오.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강조되었다.(자색) 마가복음은 종으로 오신 예수님이 강조되었다.(홍색) 누가복음은 죄 없는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 강조되었다.(흰색) 요한복음은 신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강조되었다.(청색) 그러므로 동문은 만왕의 왕이요, 겸손한 종이요, 참 인간이요, 참 신이신 예수님을 잘 상징하는 문이다.

왜 문이신 예수님을 소개하는데 하나님께서 4복음서를 두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스타일을 인정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4복음서의 대상으로 하는 독자가 각각 다르다. 마태복음은 유대인, 마가복음은 로마인, 누가복음은 세계인, 요한복음은 과거, 현재, 미래의 전 인류가 대상 독자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족보가 나오고, 구약이 많이 인용되고, 가르침이 많다. 마가복음은 행동적인 복음이고 가르침이 적다. 누가복음은 이방인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넘치는 이야기가 많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하면서 장엄하게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데 대상 독자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지역마다 특성이 있다. 그 특성에 맞추어서 사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상대방의 스타일을 인정하라. 그 사람을 내 스타일에 맞추려고 하지 말고 내 스타일로 평가하지 말라. 가슴이 뜨거운 분은 냉철한 머리를 가진 분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시오. 냉철한 머리를 가진 분은 가슴이 뜨거운 분을 역시 존경해야 한다. 열정과 지혜를 동시에 인정하는 자세를 가져야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한 존재가 된다.



번제단(출27:1-8)

성막의 동문을 열고 뜰 안으로 들어가면 처음으로 번제단을 만난다.

1. 번제단의 크기.

번제단은 가로 5규빗(2.25미터), 세로 5규빗(2.25미터), 그리고 높이 3규빗(1.35미터)의 제단이다. 이 번제단은 성막 기구 중에서 가장 큰 기구다.

2. 번제단의 의의.

이 번제단은 희생 제물이 태워지는 제단이다. 그러나 아무 제물이나 다 희생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 희생 제물은 반드시 흠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 세상 죄를 지고 갈 메시야는 죄가 없어야 함을 상징한다.

2) 희생 제물은 반드시 수컷이어야 한다. 세상 죄를 지고 갈 메시야는 남성임을 상징한다.

그리고 번제는 대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레 1:1-13)

1) 먼저 제물 위에 손을 얹고 자기 죄를 자복한다.

2) 하나님 앞에서 자기 손으로 그 제물을 잡는다. 자기 죄 때문에 대신 죽는 그 제물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죄를 심각성을 철저히 깨닫게 될 것이다.

3) 제사장은 피를 대야에 담고 제단 뿔에 바르고 단 사면에 "정결하다 정결하다"하고 외친다.

4)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다.

5) 단 위에 나무를 올려놓는다.

6) 내장과 정갱이는 물로 씻어 올려놓는다.

7) 불을 놓아 사른다.

그 희생 제물은 나의 죄가 안수함으로 전가된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희생 제물이 불로 다 탔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제물을 열납하시고 우리 죄를 다 태웠다는 의미다.

그리고 난 다음에 우리는 성소로 들어갈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영적 번제단에서 철저히 죄를 태우는 회개를 선행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에덴 동산이 죄와 결혼했던 장소라면 번제단은 죄와 이혼하는 장소라고 비유할 수 있다.

3. 번제단의 재료와 상징.

번제단은 조각목에 놋을 씌워서 만들었다. 그래서 놋제단 혹은 놋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놋' 하면 무슨 생각이 나는가?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보고 살았는가? 모세가 장대 위에 높이 든 놋뱀을 보고 백성들은 살았다. 그 놋뱀 사건에 대해서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놋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십자가에 달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바라보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구원받고 하나님을 만난다).(요 3:14-15) 그러므로 번제단(놋제단)은 갈보리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갈보리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다. 마찬가지로 성막에서 번제단은 가장 중요한 기구 중의 하나다. 그러므로 번제단은 지성소에 있는 법궤와 함께 성막의 핵심 부분을 이루고 있는 소중한 도구다.

4. 두 개의 정방형의 원리.

성막을 정사각형의 두 부분으로 나눌 때 동문 부분의 정사각형에서 대각선을 그으면 그 마주치는 부분에 번제단이 있고, 나머지 부분의 정사각형에서 대각선을 그으면 그 마주치는 부분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있다. 성막을 두 정방형으로 나눌 때 한쪽 정방형 중심에 번제단이 있다는 사실과 또 한쪽 정방형 중심에 법궤가 있다는 사실은 성막에서 가장 높은 두 개의 봉우리가 바로 번제단과 법궤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과의 만남(법궤)을 위한 가장 위대한 전제 조건이 갈보리 십자가(번제단)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번제단이라는 봉우리와 법궤라는 봉우리, 이 두 개의 봉우리가 서로 부르고 화답한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리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죄가 정리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러 갈 수 있겠는가?

5. 영원하고 위대한 희생 제물.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반드시 죄를 처벌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죄대로 심판하면 살아남을 자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그래서 희생 제물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대신 처벌하신 것이다. 그러나 동물로 드리는 희생 제물은 그 효과가 일시적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하고 위대한 희생 제물을 예비하셨다. 그 희생 제물은이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자기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제물을 받으신다는 표시로 제물을 태우기도 했지만, 때로는 제물을 제단 뿔에 걸어놓기도 했다. 그래서 모세가 광야에서 높이 든 놋뱀을 보고 구원받았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단 뿔에 걸려 있는 제물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의 죄사함과 구원을 확신했다. 희생 제물이 제단 뿔에 걸려 있는 것을 보면서 무엇이 연상되는가?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연상된다. 주님은 갈보리 십자가를 앞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결국 우리 주님은 갈보리 십자가 위에 들려 돌아가셨고 우리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셨다.

6. 번제단 모퉁이의 뿔.

그리고 제단 네 모퉁이에 있는 네 개의 뿔과 관련한 관습이 있다. 성소에 들어가 그 뿔을 잡은 자는 죽이지 않는 관습이다. 아도니야가 솔로몬과의 왕권 다툼에서 패배하고 제단으로 가서 제단 뿔을 잡았고, 그래서 그는 일시적으로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노래했다.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시 18:2) 아무리 잘못을 해도 십자가를 잡으면 산다. 그러므로 "뿔을 붙잡는 것이 무슨 대수냐?"고 하지 마라.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게 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우리가 잡은 십자가는 결코 헛되지 않는다. 우리가 잡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믿음 생활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 제단을 사랑하는 자, 제단 중심으로 사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가장 적절한 길을 열어 주실 것이다.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하나님의 예비된 축복을 받아 누리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란다.



제단 부속그릇

인생은 그릇과 같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어낸 것이라."(사64:8) 디모데후서 2장을 보면 귀히 쓰는 그릇도 있고 천히 쓰는 그릇도 있다고 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이 그릇과 같은 것이라면 귀히 쓰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어떤 그릇이 귀한 그릇일까요?

1) 귀한 그릇은 쓰임 받는 그릇이다. 금그릇과 은그릇이 귀한 그릇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사치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무그릇이나 질그릇과 같은 인생일지라도 주인의 손에 유용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 귀한 그릇이다(딤후2:20-21).

2) 귀한 그릇은 깨끗한 그릇이다(딤후2:20-21). 그러므로 기도와 말씀을 통한 끊임없는 성화가 얼마나 중요한가?

3) 귀한 그릇은 보배를 담고 있는 그릇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고후 4:7) 몇 푼 들이지 않고 살 수 있는 그 값싼 질그릇, 그러나 그 질그릇 안에 보배가 담겨 있으면 귀하게 취급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 사실은 우리 인생은 질그릇이라는 사실이다. 일이 잘된다고 교만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썩은 옥수수처럼 쓰러진다. 그러나 질그릇과 같은 우리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놀라운 보화가 담길 때 우리는 참으로 귀하고 가치 있는 인생이 된다. 그러한 가치 있는 인생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번제단의 부속 그릇들을 살펴보자.

1. 번제단의 부속 그릇들(출27:1-8)

번제단의 부속 그릇들에는 5가지가 있다. 재를 담는 통, 부삽, 대야, 고기 갈고리, 불 옮기는 그릇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 그릇들을 보면 겉으로 보기에 얼마나 보잘것없는 그릇들인가? 그러나 그 그릇들은 보기와는 달리 가치가 있는 그릇들이요 일반 그릇들과 분명히 다른 소중한 그릇들이다. 왜냐하면 그 그릇들은 번제단의 사역에 필요한 부속 그릇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재떨이를 공부해서 뭐 하느냐?"

그러나 그 그릇들은 "번제단"과 한 묶음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그 그릇들도 참으로 가치 있는 그릇이요 각각 나름대로의 영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그릇들이 나름대로의 용도가 있듯이 그 그릇들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나름대로의 사역을 상징한다.

1) 재를 담는 통. 이 통에는 뚜껑이 있다. 그래서 재를 모아 뚜껑을 덮어 재가 날리지 않게 한 뒤에 진밖에 버린다. 그래야 성소가 더럽혀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많은 영적인 재들이 날라 다니고 있는가? 비판, 정죄, 교만과 같은 재들이 너무 많이 보인다. 이 재들이 돌아다니면 교회의 성령의 불은 꺼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재를 주어 담는 성도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재를 담는 통은 성도의 "화목의 사역"을 상징한다.

2) 부삽. 부삽은 재를 긁어서 재를 담는 통에 넣은 역할을 한다. 재를 긁어내지 않으면 재가 쌓여서 제단 불이 꺼지기 때문이다. 이 부삽은 교회의 막힌 부분을 뚫어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부삽은 성도의 "권면과 위로의 사역"을 상징한다.

3) 대야. 대야는 번제단에 올릴 고기를 담는 그릇이다. 그러므로 이 대야는 성도의 "전도사역"을 상징한다.

4) 고기 갈고리. 이 고기 갈고리는 고기를 찍어서 번제단 위에 올려놓는 도구다.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이끄는 사랑의 갈고리를 연상하게 하는 이 도구는 성도의 "사랑과 봉사의 사역"을 상징한다.

5) 불 옮기는 그릇. 제물을 불사르기 위해 제단의 제물 위로 불을 옮기는 그릇이다. 옮겨지는 불을 통해 옮겨지는 생명력을 생각해 보라. 이 도구는 성도의 "중보기도 사역"을 상징하는 것이다. 다른 성도를 위해서 기도하는 중보기도를 할 때 그 영혼은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지금 여러분들은 어떤 그릇이요 어떤 도구인가? 지금 주님의 보조기구로 쓰임 받는 자리에 있는가?

1. 재를 담는 통(화목자)이 되자.

교회에서 연기와 재를 피우는 성도인가, 트러블 메이커의 역할을 하는가? 피아노 아무 데나 놓으면 어떤가? 왼쪽도 좋고 오른쪽도 좋다. 그러나 그 놓는 장소 때문에 갈라진 교회가 있다고 한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것은 진리 싸움이 아니고 감정 싸움이다. 꺼져 가는 심지에 불을 붙이는 성도 및 그런 화목자가 되어야 한다.

2. 부삽(권위자 위로자)이 되자.

100마디의 정확한 분석의 말보다 1마디의 격려가 사람을 더 일으키고, 결국 그 격려를 통해 사람들은 변화의 힘을 얻게 된다.

3. 대야(전도자)가 되자.

섬기는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 섬기는 전도자란 입에 말만 가진 사람이 아니고, 대야에 발씻을 물을 준비한 전도자를 말한다.

4. 고기 갈고리(사랑의 봉사자)가 되자.

5. 불 옮기는 그릇(중보기도자)가 되자.

중보기도는 남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 사람의 입장을 느끼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이 없으면 이 기도는 불가능하다. 사무엘 코울리지의 유명한 말이 있다. "사랑을 잘하는 사람이 기도도 잘한다." 다투기를 잘하는 사람의 기도는 허공을 치는 기도다. 말은 잘해도 기도는 잘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기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여러분이 진실한 중보기도자가 될 때 여러분의 가정, 교회, 사회, 민족은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게 된다. 여러분이 기도함으로 여러분의 가정은 소망이 있다. 자녀도 소망이 있고, 교회도 소망이 있고, 이 민족도 소망이 있다. 찬란한 미래 및 아름다운 공동체는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라.



물두멍

이제 성막 기구 중 물두멍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출 30:17-21). 먼저 번제단과 물두멍의 상호연관적 의미를 살펴보자.

1. 번제단과 물두멍.

번제단과 부속 그릇을 통해서 영혼들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죄가 태워지게 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번제단에서 우리의 죄가 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세상적인 죄의 때로 인해 또 더렵혀질 수 있다. 그 더렵혀진 삶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번제단 다음의 기구인 물두멍을 통과해야 한다.

이 원리는 보통 '성화'의 교리를 가르쳐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만약 이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지 않고 성소에 들어가면 죽는다. 번제단은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단회적 회개를 상징하는 것이나 물두멍은 본질적인 회개를 한 사람도 죄를 짓고 넘어진다는 전제하에 부분적인 죄에 대해서 계속적인 회개를 하는 것을 상징한다. 그래서 물두멍에서는 돌아다니면서 더러워지기 쉬운 수족만을 씻는 것이다.

그와 관련된 장면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길 때 벌어진 장면이다. 그때 베드로가 말했다.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베드로가 반응했습니다.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이 대화에서 목욕은 구원받은 것을 상징한다(번제단 역사).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도 땅에서 살다 보면 손과 발이 더러워지게 된다. 그럴 때에는 손과 발만 씻으면 된다(물두멍 역사).

그러므로 번제단을 죄와 이혼하는 칭의의 자리라고 한다면 물두멍은 지속적인 씻음을 상징하는 성화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로마 군병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왔다(요 19:34). 예수님의 몸에서 나오는 피는 칭의를 위한 상징이고 그 물은 성화를 위한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성화의 방법.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더러워진 발을 씻고 깨끗하게 될 수 있을까요? 말씀으로 계속적으로 정화하고 단장해야 깨끗하게 될 수 있다. 마음의 단단한 결심만 가지고는 깨끗해질 수 없다. 그 마음속에 무엇인가를 넣어야 한다. 그 넣어야 할 것이 말씀이다. 그래서 시편기록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 119:9,11) 예수님도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위대한 기도에서 말씀하셨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3. 여인들의 놋거울로 만듬.

그리고 이 물두멍은 놋으로 만들어졌는데, 특별히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놋거울로 만들어졌다(출 38:8). 이 여인들의 헌신을 보십시오. 값으로 따지면 엄청난 값은 아니다. 그러나 여인들에게 거울은 값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가장 소중한 소지품이다. 이것이야말로 과부의 두 렙돈의 헌신이라고 할 수 있다.

4. 물두멍의 규모와 크기.

성막의 기구 중 유일하게 물두멍만이 크기와 규모에 대한 언급이 없다.

물두멍의 적용과 물의 양에 제한이 없음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용서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용서에 관한 주님의 가르치심. 베드로가 주님에게 용서에 관해 질문했다. "일곱 번까지 용서할까요..." 그러나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 하라!" 이 대답에 담긴 심정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일 것이다. 거대한 물두멍을 보면서 아버지의 용서를 생각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 용서를 실천하는 자가 되라. 가장 위대한 성화는 용서의 성화다. 습관 중에서 가장 위대한 습관은 용서를 인격화하는 것이다. 인간이 누리는 가장 위대한 자유는 용서로부터 오는 자유다. 용서의 신학적 의미는 "그냥 가도록 놓아두는 것"을 말한다. 어떤 사람에게 기막힌 일을 당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새 역사를 믿고 그 사람을 그냥 가도록 놔두라. 자신의 원수를 스스로 갚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 원수보다도 더 못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못난 사람하고 싸우려면 같이 못난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용서는 항상 감정을 넘어서 선택하는 행위다. 용서에는 전혀 감정의 자리가 없어야 한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라고 했다.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또한 자기에게도 영광이라고 했다. 성경은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을 용서해준 용서의 사람들이 복 받는 일화로 가득한 책이다.

다른 앵글을 가지고 보라. 다른 눈을 뜨고 보라. 믿음이 어려운 것은 복수의 작업이 아니라 용서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한풀이가 아니다. 기독교는 사랑풀이요, 용서풀이다.

무엇인가 문제가 풀리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용서하지 못한 사람을 끝까지 추적해서 그 사람을 용서하라. 그러면 어느새 고민했던 문제가 풀리는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용서는 인간관계도 풀지만 어려운 문제도 푸는 신비한 힘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용서풀이를 보고 잠겼던 은혜의 문의 자물쇠를 푸실 것이다.



성막 널판

이제 안뜰을 지나 본격적으로 성소로 들어서게 된다. 성소는 다시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성막 널판, 성막문, 성막 앙장, 떡상, 등대, 향단이 바로 그것이다. 그 중에서 성막 널판이 지닌 상징적 의미를 살펴보자.

1. 성막 널판(성소벽, 출 26:15-30)

성막 널판의 장(세우게 되기 때문에 높이를 말함)은 10규빗(4미터 50센티)이고, 그리고 하나의 널판 넓이는 한 규빗 반(67.5센티)이다. 그 널판이 성소의 남편에 20개(30규빗), 북편에 20개(30규빗), 그리고 서편에 6개(9규빗)가 연하여 있음으로 외벽 뼈대를 이룬다. 그리고 서편 모퉁이 편에 2개의 작은 모퉁이 널판이 있다. 그러므로 서편의 총 널판 수는 8개가 되고, 모퉁이 쪽에 있는 널판은 각각 0.5규빗이므로 서편의 총 길이는 10규빗이 된다. 널판은 조각목을 금으로 싸서 만들었다(출 26:29). 조각목은 버림받은 인간을 상징하고, 금은 믿음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널판 하나 하나는 믿음을 가진 성도 한사람 한사람을 상징한다.

성막 널판은 두 가지 큰 역할을 한다.

1) 성소 전체의 틀을 이룬다.

2) 광야의 비바람과 모래바람을 막아 성소 내부를 안전하게 지켜준다.

그런 의미에서 성막 널판 하나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가? 만약 그 하나라도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 성소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성도 한사람 한사람은 너무 중요한 존재다. 그 한사람 한사람을 몸의 한 부분과 같다고 해서 "지체"라고 한다. 이 지체의식이 탁월한 자가 되어야 우리의 신앙생활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축복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일과 조화, 즉 몸의 지체가 되는 축복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함이니..."(엡1:10) 그리고 성막 널판을 그대로 상징하는 듯한 말씀이 있다. "그의 안에서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주님 안에서의 통일성과 지체 의식이 참으로 중요하다.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는 사도 바울의 강조를 보라. 바울이 이것을 강조한 이유는 체험적 신앙 때문일 것이다. 바울이 위대한 종이었지만 혼자 복음화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알고 있었다. 신약 성경에는 바울을 감동시킨 인물이 많았다. 예를 들어,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따뜻한 사랑을 잊을 수가 없었다. 빌립보 교인은 바울의 옥중수발을 위해 에바브로디도 집사를 파송했다. 그리고 에바브로디도는 바울 사도가 로마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빌립보 교인들의 헌금을 들고 자원하여 그 먼길을 달려왔다. 이런 사람들이 바울만큼 위대한 사람이다.

골로새서 4장 10절에는 아리스다고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는 설교는 많이 했다는 기록도 없고 기도를 많이 했다는 기록도 없고 전도를 많이 했다는 기록도 없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상하게도 이 아리스다고는 바울이 괴로움을 당할 때마다 항상 곁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난의 현장에 같이 있어주는 사람,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 자진해 찾아와서 로마 감옥에 있었던 사람, 바울이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이 아리스다고로 인하여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얼마나 위대한 조력자인가? 만약 그가 없었다면 바울이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드러난 사람이든, 드러나지 않은 사람이든 능력이 있든 없든 모든 지체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다.

2. 널판 받침.

성막 널판을 세울 때 맨 땅 위에 그냥 세우지 않는다. 각 널판 하나에 은 받침 두 개씩 두고 그 위에 세웠다. 그래서 총 48개의 성막 널판과 96개의 은 받침이 있었다. 이 은 받침은 믿음의 고백, 즉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같은 고백을 상징한다. 사실상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성도)가 세워진 것이다. 베드로가 주님께 말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때 주님께서 그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말씀하셨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구절에서 주님은 교회를 "내 교회!"라고 표현하셨다. 그리고 성경은 교회를 주님의 신부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토록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이 그토록 사랑하는 교회를 사랑하면 복을 받지 못할 길이 없다.

교회는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어머니의 품과 같다. 그 안에서 우리는 생명력을 누리게 되고, 큰 힘을 얻게 된다. 더불어 우리는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풍성한 생명을 받고 철이 든 아이가 어머니를 잘 모시듯이 교회를 자신의 어머니와 같이 모시지 않는 자는 사실상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모실 수 없을 것이다.

3. 널판 띠.

성막 널판을 위해서 48개의 널판과 96개의 은받침을 동원했어도 그것만 가지고는 사막의 강한 바람을 이겨낼 길이 없다. 그래서 각 방향마다 다섯 개씩의 띠로 널판 전체를 더욱 든든하게 묶었다. 이 띠는 바로 성도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사랑을 상징한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4) 다양한 은사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위대한 더 나은 은사가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한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널리 전하세." 그 중에서 하나의 띠는 눈에 보이지 않고 널판 가운데 있다. 그것을 중간 띠라고 하는데 그 중간 띠는 끝에서 끝까지 널판들을 이어준다. 그 중간 띠는 우리의 가슴과 가슴을 이어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띠고 보이는 띠는 우리들이 어깨와 어깨를 함께 하는 사랑의 띠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사랑으로 가슴이 관통되었으면 이제 우리는 어깨와 어깨를 함께 하고 같이 나가는 어깨동무 친구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대개 잘사는 사람을 보면 본능적으로 배 아파 한다. 그렇다고 그를 끌어내림으로 그 아픈 배를 고치려고 해서는 안된다. 나도 잘 되려고 노력함으로 그 아픈 배를 고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대인관계나 부부관계나 남을 죽이면 나도 틀림없이 죽게 된다. 두 마리 붕어가 한 곳에 살았다. 모두 혼자 독점하고 싶어서 기운 센 것이 약한 것을 죽였다. 처음에는 혼자 살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죽은 고기가 썩어 물이 독기에 가득 차 결국 기운 센 것도 죽었다. 멀리 예를 들어볼 것도 없이 지난 50년간의 우리 나라 정치가 그러지 않았은가? 남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나 자신도 행복해진다. 남을 축복해 주어야 나 자신도 축복 받는다. 만약 그 사람이 축복 받을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그 빌어준 복이 고스란히 나 자신에게 온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므로 남을 축복해 주는 장사는 한 번도 밑지는 일이 없는 장사다. 이런 멋있고 훌륭한 영적 장사꾼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성막 지붕

성막의 지붕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성막 문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자.(출26:36-37) 이 성막 문은 성소로 들어가는 문을 말하는 것으로 성막으로 들어가는 동문과는 다르다. 성막 문의 기둥 5개는 조각목에 금을 싸서 만들었다. 그리고 그 기둥을 위한 받침 5개는 놋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문은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짰다.

1. 성막 지붕(출 26:1-14)

성막 널판(벽)이 완성되면 그 위에 덮개를 씌워 지붕을 만들었다. 그 지붕은 네 겹의 덮개로 되어 있는데 그 덮개를 앙장이라고 한다. 네 겹의 덮개가 필요한 이유는 악조건의 광야에서 성물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 네 겹의 덮개를 하나씩 살펴보자.

1) 화려하게 수놓인 세마포 덮개. 성막 안으로부터 첫 번째 덮개는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공교히 수놓아서 만들었다. 그래서 성막 안에서 보면 대단히 화려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덮개에는 하나님을 호위하는 천사들을 수놓았는데 마치 하나님이 성막 안을 늘 지켜보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아름다운 세계! 그러나 동시에 그 세계는 우리에게 경외감을 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손길도 느껴야 하지만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동자도 느껴야 한다.

2) 흰색 염소 털 덮개. 두 번째 덮개는 흰색 염소 털로 만들었다. 이 염소는 인류의 죄를 위해서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구약의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리 준비한 두 마리의 염소를 놓고 제비를 뽑는다. 그래서 뽑히지 않는 염소는 안수해 죽인 후 그 피를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 속죄소에서 뿌린다. 그리고 뽑힌 염소는 대제사장이 자신과 온 백성의 죄를 그 염소에 전가시키는 안수의식을 행한 후 광야로 보낸다. 뽑히지 않고 죽는 염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는 것을 상징하고 뽑혀서 광야로 보내지는 염소는 영문 밖에서 희생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흰색 염소 털 덮개는 대속의 피로 우리가 정결하게 됨을 상징한다.

3)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 덮개. 첫 번째 덮개와 두 번째 덮개는 천으로 이루어졌지만 세 번째 덮개와 네 번째 덮개는 가죽으로 이루어졌다. 이 붉게 물들인 수양의 가죽 덮개는 인류를 대속하기 위해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성경에 처음 나오는 가죽 덮개 이야기는 창세기 3장 21절에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타락한 후 무화과나무 잎으로 수치를 가리려는 불쌍한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동물을 잡아 피가 묻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그때 하나님께서 잡은 동물은 아무 수양일 것으로 추정된다.

4) 해달의 가죽으로 만든 덮개. 해달의 가죽이란 홍해 바다에서 서식하는 바다 물돼지 가죽을 의미한다. 이 가죽은 겉보기에는 볼품이 하나도 없으나 당시 신발을 만드는데 주로 사용되는 대단히 질긴 가죽이었다. 그래서 이 가죽으로 가장 외부 덮개를 사용한 것은 성막을 비바람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 해달의 가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한다. "...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해달의 가죽만 보고

그 안에 있는 공교하게 수놓인 내부의 화려함을 보지 못한다. 겉모습은 해달의 가죽처럼 화려하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어도 내부에는 충일하고 아름다운 생명력으로 가득한 삶이 성도의 삶이다. 이 내부의 아름다움을 아는 자는 결코 교회를 떠나지 못한다. "도대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은 무슨 낙으로 살까?" 교회에 다녀도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들어오지 않으면

예수 믿는 즐거움과 기쁨을 알지 못한다. 온전히 안으로 들어와야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 바다 물돼지 가죽이 어디에서 생겼나?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바다 물돼지 가죽이 어디에서 생겼느냐 하는 것이다. 애굽에 있을 때에는 그 가죽을 구하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있는 장소가 사막이 아닌가? 사막에서 바다 물돼지 가죽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어디에서 생겼을까요? 아마 애굽에서 나올 때에 가지고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사막에서는 구할 수 없기 때문에 매우 귀중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가죽이 없으면 신발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해달 가죽을 필요로 하셨다. 그 말은 백성들에게 신을 신발을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마치 모세가 떨기나무 가운데 하나님을 만났을 때 "네 신을 벗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요구와 같다.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나 무리한 요구인 것 같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나님! 우리에게 신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는 거칠과 험난한 광야에 있습니다. 이 광야(IMF)의 한파 속에서 왜 무리한 요구를 하십니까? 이제 곧 신발이 닳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맨발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정말 맨발로 만드셨는가? 아니다. "주께서 40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신29:5) 하나님은 바치는 자의 정성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분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면 그분은 절대적으로 우리를 지켜주신다. IMF 한파가 춥다고 해도, 그래서 다른 모든 것이 경기를 탄다고 해도 여러분의 신앙과 정성은 경기를 타지 않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절대적으로 여러분의 삶과 마음을 지켜주실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지켜주심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넘쳐나기를 바란다.



떡상

떡상과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출25:23-30; 레24:5-9) 성막의 뜰을 지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성소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성막의 뜰 안으로는 유대인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성소 안으로는 오직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소 성소는 휘장을 사이에 두고 성소와 지성소로 나뉘어진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성소를 첫 장막이라고 했고, 지성소를 둘째 장막이라고 했다. 성소의 성소 안으로 들어서면 좌측에 금촛대, 우측에 떡상, 가운데에 분향단이 있다. 제사장들은 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촛대의 등불을 점검하고, 떡을 갈아놓았으며, 향불을 관리했다. 먼저 떡상에는 12개의 신선한 떡이 언제나 놓여 있었다. 매주일 한 번씩 안식일마다 떡을 채워 넣었기 때문이다. 이 떡을 진설병, 혹은 무교병이라고 말하는데

제사의 직임을 수행하는 제사장들이 이 떡을 먹고 힘을 얻었다.

1. 떡상이 상징하는 것.

떡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하나님의 공동체를 상징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말씀공동체인 교회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2. 떡이 상징하는 것. 그러면 떡상에 놓인 떡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크게 말하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1) 떡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베들레헴(떡집)에서 탄생하셨다. 그리고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셨다. "...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48-51)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라는 말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6장 35절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이 말씀도 예수님이 우리의 삶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주라는 말씀이다. 영생 구원만이 기독교의 목표가 아니다. 생활 속에 나타나는 구원의 은총! 이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성도가 천국에 간다는 사실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과제도 대단히 중요하다.

2) 떡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육신의 양식은 떡이지만 영혼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 4:4) 구체적으로 물두멍이 말씀을 통해서 영혼이 단장 받는 것을 상징한다면 이 떡상은 말씀을 통해서 영혼이 에너지를 공급받는 것을 상징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그러한 거룩한 영적 에너지를 어떻게 얻게 되는가? 매일 성경 읽기를 통해서 그 에너지를 얻게 된다. 그리고 매 안식일마다 새 떡을 진설하고 묵은 떡은 제사장들이 먹는 것은, 주일마다 생명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 준다.

3) 떡의 진설에 관한 명령(레24:5-9)

① 고운 가루를 취하라는 명령. 떡을 진설하기 위해서 먼저 고운 가루가 되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설교 준비자의 말씀을 준비하는 노력을 상징한다.

② 떡 열둘을 구우라는 명령. 열둘이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과정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을 위해 합당한 말씀을 준비하고, 그들에게 영혼의 양식이 되는 말씀을 준비하는 것을 상징한다.

③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진설하라는 명령. 이것은 설교자가 성결한 모습을 갖추고 말씀을 준비해야 함을 상징한다. 순결한 상위에 떡을 두 줄로 진설하는 모습은 말씀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함을 상징한다. 말씀이신 주님의 삶은 은혜와 진리와 충만한 균형 잡힌 삶이었다. 그러므로 말씀의 내용도 있어야 하고, 은혜도 있어야 한다.

④ 정결한 유향을 두 줄 위에 두라는 명령. 유향은 기도와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다.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생명의 말씀이 될 수 없다. 아무리 말씀을 유창하게 전해도 생명이 전파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는 기도한다. "하나님! 입술을 친히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⑤ 매 안식일에 이 떡을 진설하라는 명령. 이것은 매 주일 성도에게 말씀이 선포되어야 함을 상징한다. 어떤 말씀이 선포되어야 할까요? 영원한 언약에 관한 말씀이다. 말씀의 대 주제는 "하나님이 영원히 너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다른 말씀은 기억하지 못해도 이 말씀만은 꼭 기억하고 돌아가십시오.

⑥ 떡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려 먹게 하라는 명령. 말씀 사역을 통해서 목회자는 분깃을 얻을 권리가 있다. 어떤 분은 생각한다. "목회자는 굶어야 능력이 나온다!" 아니다. 성도들은 목회자가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이 있다. 보통 개척교회를 해서 10가정 정도가 되면 '조직교회' 예배를 드된다. 왜냐하면 10가정이 소득의 십일조를 내면 목회자는 10가정의 평균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창설하신 이면의 중요한 원리다. 십일조의 온전한 의미는 하나님께 소득의 10분의 1을 바칠 때 모든 것을 바치는 것으로 받아준다는 의미를 가진 것이다.

그러나 십일조의 실제적인 목적은 목회자의 생계 유지를 위해서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풀타임으로 헌신하는 사람과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십일조를 창설하신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다.

4. 떡상 위의 떡을 무교병이라 하는 이유.

떡상 위의 떡을 왜 무교병이라고 할까요? 무교병이란 '누룩(발효제)을 넣지 않은 떡'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누룩'이란 죄를 상징하는 용어였다.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은 누룩을 넣은 떡보다 인간적인 맛은 없지만

그 떡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영적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5. 떡상의 크기가 주는 의미.

떡상은 장이 2규빗, 광이 1규빗, 고가 1규빗 반이다. 그래서 대략 떡상은 67.5센티의 높이를 가지고 있는데 장막 안의 모든 기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이가 낮은 기구 중의 하나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고 자세를 낮추어야 떡을 먹을 수 있다. 겸손하게 말씀을 대하지 않으면 그 말씀이 진정한 영적 양식이 되지 못한다. 겸손한 곳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의 물이 흘러 들어오게 마련이다. 마음을 낮추어 겸손하게 말씀을 받음으로 축복을 예비하는 분들이 되길 바란다.



금촛대

오늘은 금촛대가 지닌 의미에 대해서 살펴볼까요?(출25:31-40;27:20) 금촛대는 떡상 반대편의 남쪽 방향에 놓여 있다.

1. 금촛대의 재료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출25:3) 여기에서 정금이란 말에 주목하라. 다른 성막의 기구는 대개 조각목에 금을 입힌 것이었는데 이 등대만이 순수한 정금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그리스도만이 참빛이 되심을 암시하는 것이다.

2. 금촛대의 구조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 가지 여섯을 등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출25:31)

금촛대는 일곱 개로 이루어졌는데 가운데 촛대를 중심으로 해서 좌우에 세 개씩의 촛대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일곱 개의 금촛대가 가운데 한 줄기와 여섯 개의 가지를 가진 포도나무를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 상징을 생각할 때 주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런데 왜 촛대가 일곱 개 있게 된 것일까요? 일곱은 완전의 상징수였고(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일곱), 여섯은 사람의 상징수였다(여섯째 날 인간 창조, 666). 사람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여섯에 하나를 더해야 한다는 의미를 인간에게 하나님이 더해져야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비유하고 싶다.

이 일곱 금촛대는 빛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한다. 또한 세상에 빛을 발하는 교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은 일곱 금촛대 사이에 예수님이 다니는 환상을 보았고(계 1:12-14; 2:1) 그 장면에서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계 1:20). 그리고 일곱 금촛대는 성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 5:14)

2. 어떻게 성도가 빛을 발할까 - 출27:20.

1) 먼저 감람유가 있어야 한다. 등대만 있다고 해서 빛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등대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기름이다. 등대에 넣는 기름은 감람유인데 감람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을 상징한다.

무슨 말인가? 신앙생활은 정말 인간의 의지로 안된다는 말이다. 신앙생활에서 사람들은 너무나 자신 있게 출발하지만 너무나 쉽게 꺾인다. 베드로는 자기만은 절대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비자 앞에서도 비굴하게 주님을 부인했다. 베드로가 각오와 다짐이 없어서 넘어졌는가? 주님을 덜 사랑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신앙의 기초를 몰라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 말은 인간은 언제나 넘어질 위험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비겁한 그가 성령충만을 받자 가장 용기 있는 사도가 되지 않는가?

2) 간검을 받아야 한다. 이때에 기름이 있는지 없는지를 검사해야 하고 심지가 제대로 기능을 하고 있는지 검사해야 한다. 그리고 심지를 볼 때 주어진 기름은 잘 흡수하고 있는지 보아야 한다.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심지가 너무 들어가 있지는 않은지도 보아야 한다. 교회에서 너무 홀로 지내지 않은지 살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심지가 너무 많이 나와 그을음이 나고 있지는 않은지 보아야 한다. 이것은 너무 자신을 드러내어 재를 날리지 말라는 상징적 의미가 아닐까요?

3. 금촛대의 의의.

그리고 금촛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금촛대의 불빛은 성소 안에서 비취는 유일한 빛이다. 성소에는 창문이 없기 때문에 이 빛은 대단히 중요한 빛이다. 그 빛을 통해서 제사장들이 성소 안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된다. 건축학자의 소견에는 성소에 창문이 없다는 것은 중대한 오류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철저한 설계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 빛이 아닌 성소 안에 있는 빛으로 활동하시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참 빛임을 상징하고 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동트는 새벽에 새 날을 여는 여명의 빛을 보라. 이제 새롭게 무엇인가 시작된다는 약속이 아닌가? 그러나 이 약속을 생각하기 전에 그리스도가 참 빛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대낮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빛이 있다. 그 찬란한 빛과 함께 자연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그 감탄 이전에 그리스도가 참 빛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거짓 빛과 구별되는 참 빛이다. 배를 난파시키는 사람들은 선원들을 파멸로 이끌기 위해 현혹시키는 불을 켠다고 한다. 고상한 정신의 빛, 교양을 가장한 빛, 이성과 철학의 빛이 그것들이다. 그러한 빛을 따라가면 멸망의 길로 틀림없이 빠지게 될 것이다.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라. 그리고 그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라. 그것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많이 알아야 한다. 야구광은 선수들의 타율, 홈런, 안타수를 모두 잘 알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지난해 성적은 물론, 현재의 신상까지 파악하고 있다. 심지어는 야구장에서 먹고 마시며 잠까지 자는 야구광도 있다. 그래서 야구광들은 야구 이야기만 나오면 할 말이 많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참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입을 열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것을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잘 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매일 성경읽기가 매우 중요하다. 매일 성경읽기를 체계화시켜 하라.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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