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영원한사명)

[스크랩]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 비젼

수호천사1 2010. 1. 19. 21:53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 비젼

 

 

민족복음화에 대해서는 열의를 가지면서도 세계복음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거나 오히려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는 반대도 한다. 세계복음화운동을 탐탁치 않게 보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은 세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이미 세계의 모든 나라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이상 선교사를 파송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같은 견해는 19세기식의 전근대적인 것으로 취급해 버리는 것이다.

 

둘째는 민족복음화가 더 시급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인구의 75% 이상이 비신자이고 아직도 많은 미자립교회가 도시와 농어촌에 산재해 있는데 인력과 막대한 선교비를 해외로 내보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만한 인력과 자원을 우선 민족복음화 사업에 투자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이다.

 

셋째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어렵고 혼란한 상태에서 우리가 세계복음화를 위해 진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나라 안에서 직면하고 있는 평화, 통일, 사회정의, 인권신장 및 민주화 등의 과제만도 벅찬데 다른 민족의 복음화까지 생각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위의 세가지 견해는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으나 온전한 생각은 아니다. 실제로, 현재 세계에 존재하는 223개국에는 교회가 없는 나라가 거의 없다. 그러나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과 복음화되었다는 것은 동일한 뜻은 아니다. 확실한 사실은 세계 어느 나라도 만족할 만큼 복음화된 나라는 없다. 또한 세계 50억 인구 중에 기독교인의 수를 약 32% 정도로 잡는 것이 상례이지만 이 통계에서 서구와 북미의 인구 중 82%이상과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의 90% 이상을 신자로 넣고 만든 통계이다.

 

이같은 유럽이나 북미 및 남미의 신자 집계는 상당히 과장된 것이라고 할 때 세계 신자의 실제수는 훨씬 적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선교학자들 가운데는 우리 시대를 다시 선교적 개척시대로 보기가지 하는 것이다. 월리암 케리 이후를 해외로 나가는 선교시대로 보고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 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를 창싸마한 때부터를 내지(Inland)로 들어가는 선교형태로의 전환으로 본다면 우리 시대는 다시 아직 복음적으로 취약한 부족, 계층 및 오지를 깊이 파고 들어가야 되는 개척시대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의 주장은 아직도 복음적으로 취약한 부족의 수가 약 16,570 부족에 이른다고 한다. 동시에 전통적으로 기독교 국가였던 서구의 세속화 현상도 심각한 새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서유럽의 경우 교회 출석율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는데 도시는 인구의 약 5% 미만 정도이다. 유럽이 기독교 대륙이던 시대는 지나가 버린 것이다. 라토렛 (K.S.Latou-rette)의 말처럼 많은 기독교인들 조차 비기독교인화(dechristianization)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복음화를 세계적 환상과 운동은 아직도 지키며 계속해야 할 교회의 사며인 것이다.

 

둘째로 민족복음화가 우선적인 과제이기 때문에 세계복음화에 진력하기가 어렵다는 입장은 따지고 보면 비성경적인 것이다. 그같은 의견은 우선 창조신학적으로 타당하다고 볼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어떤 민족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민족적 차이를 초월한다. 모든 민족들이 그를 찬양하기를 원하신다(시편 67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한 것은 그들만을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제사장 나라, 종 및 사자로 삼아 모든 민족을 축복하시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열방을 위하여 봉사하도록 선정된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교회도 세상에서 아직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구원할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져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공동체인 교회의 선교적 사역에 자기 민족과 다른 민족의 구별을 두는 것은 민족주의적 발상이지 성경적 사상은 될 수 없다.

 

예수께서도 세상 죄를 담당한 십자가 사건 이후부터는 유대인 전도를 넘어 세계복음화의 목표를 제시하고 명령하였다.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나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가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분부는 세계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다.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교회가 이 부분을 본격적으로 수행하는 데 얼마간의 시일을 요한 것이 사실이다. 초기에는 예루살렘 안에서 주로 전도하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상당히 성장했으나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진출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흩어져 살던 유대인 공동체들이게는 복음적인 접촉이 이루어졌다. 어떤 형태로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유대인들 중에는 예루살렘 밖에 살면서 바울이 본격적인 박해를 할 때 이미 신자가 된 사람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메섹의 크리스챤 공동체인데 바울은 그들을 박멸하기 위하여 가다가 회심하게 된 것이다.

 

비록 예루살렘 밖에 크리스챤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해도 그것이 예루살렘 회의의 공식적 대외전도 활동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가장 유력한 추측은 유대인 친지나 친구를 통하였거나 예루살렘에 왕래한 사람들 가운데 예루살렘의 신자들과 접촉된 사람들에 의해서 유대인 크리스챤 공동체가 생겼다고 보는 것이다.

 

그후에도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이방인을 위한 전도를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전도한 일을 보아도 그 당시의 예루살렘 교회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베드로는 환상과 지시를 받아 가이사랴의 고넬료 집을 방문하고도 자기의 언행에 상당히 제약을 느끼는 듯한 말을 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않고 왔노라"(사도행전 10:28-29) 고 하였다. 이 부분에 기록된 사건을 고넬료의 개종이라고도 하지만 동시에 베드로의 개종이라고도 하는 이유가 베드로의 전통적인 대이방인관(대이방인관)이 바뀌는 사건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 사건 직후에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돌아가 이 문제로 할례자들에게 힐난을 받았던 것은 (사도행전 11:2) 그 당시의 예루살렘 교회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사도행전 10:35)라고 피력한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는 점차적으로 민족을 초월한 선교집단이 되는 기미를 보였다. 베드로를 위시한 대다수의 사도들이 결국은 예루살렘 밖으로 나가 선교하다가 생애를 마친 것이 그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자기 동족에 대한 애정이 지극한 사람이었다. 바울의 민족애는 로마서에 잘 표명되어 있다. 8장에는 아무 것도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도 9장에서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로마서 9:3) 하였다. 자기 골육의 친척을 위한다는 것은 유대인의 구원을 의미하였다(로마서 10:1). 그같이 불처럼 뜨거운 동족애가그로 하여금 가는 곳마다 거의 예외없이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설명하게 하였으리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다. 터키와 그리이스와 로마로 전진하면서 이방인들에게 전도하였다. 옥에 갇히고 매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면서도 (고린도전서 11:23) 포기하지 않았다.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하나 참고 비방을 당해도 참으며 세상의 더러운 것과 찌끼처럼 되면서 이방인에게 선교하였다(고린도전서 4:11-13).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민의 창조주이시며 하나님의 사랑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른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셨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치, 경제, 사회적인 상황이 어려운 시기에 세계복음화에 대한 관심까지 가질 필요가 있겠느냐는 일부의 견해도 옳지 않다. 에수께서 선교하고 세계복음화를 분부했던 시대적 배경도 우리 시대와 흡사한 점들이 많다. 나라는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고 경제적인 정의는 불의와 착취로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백성들은 정치적 해방과 경제적 풍요를 갈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령했던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도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만족할만한 상태에 도달한 나라가 없고 그런 문제를 해결한 후에 선교하겠다는 생각은 비선교적인 이상론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는 지구촌 시대가 되었다. 어떤 나라도 세계의 다른 나라와 아무 관계를 맺지 않고 살 수가 없다. 상호 관계하면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고 있다. 기독교 선교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한 나라나 지역의 교회가 다른 지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기만 하는 일방통행적인 선교의 시대는 지났다. 모든 나라의 교회가 모든 나라의 교회들을 위하여 동역할 시대가 된 것이다. 영적으로 강력한 교회는 영적인 능력이 약한 교회를 도와야 한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교회는 빈곤한 지역의 교회를 도울 의무가 있다. 지식과 기술이 발달한 지역의 교회는 그런 특징과 자원으로 보완이 필요한 교회를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같이 우리는 이제 세계선교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세계선교의 시대에 걸맞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민족적인 단위를 초월하는 세계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한다. 브라이언이 말한 것처럼 세계적 그리스도인은 세가지를 지녀야 한다.

 

첫째, 세계적 이상(World Vision)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범세계적인 목적을 보는 것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성으로 충만한 세계를 보는 것을 뜻한다. 또한 그리스도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계를 보며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동역자로 하나님의 세계적 사역에서 자기 자신의 일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세계적 이상을 고수하여야 한다. 이 말은 세계적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다른 세계적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연대적 유대를 지니는 것을 뜻한다. 동시에 그 환상에 복종하기로 계획하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는 세계적 환상에 복종해야 한다. 이것은 자기의 세계적 이상을 계속 확대시키는 것과 자신을 직접적으로 세계복음화에 관련시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상을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파급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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