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기원과 다원주의
허호익 교수
1.서론
다종교현상(多宗敎現象)이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지배적이었던 유럽이나 북미에서는 비교적 새로운 현상이지만,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여러 가지 종교가 공존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오래 전에 유교와 불교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되어 지금까지 중요 종교로 건재하고 있다. 지난 200년 동안에는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와 교세를 확장하기 시작하여 현재 기독교인의 숫자가 불교인의 숫자와 거의 맞먹을 정도로까지 자라났다. 지금 한국에서는 불교와 기독교가 양대 종교라 하겠지만 이 두 종교들도 한 사회와 가정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교와 무관할 수가 없다.
대체적으로 한국인들은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종교들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한국 사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종교적으로 다원화 사회여서 종교간의 공존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 정치 지도자의 장례식이 몇몇 종교의 의식이 혼합되어도 사회는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소박한 신앙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전통적 신앙은 서구에서 등장한 종교 다원주의는 신학으로 중대한 도전과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한 교단은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신학자들을 정죄함으로 심각한 신학적 진통을 겪고 있다. 다원주의를 지지하는 자들은,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정죄는 현대판 종교 재판이며 학문의 억압이라고 한다. 물론 이 세대는 자유와 민주가 중요한 가치관으로 지배하는 시대로서 학문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학문이라는 미명으로 성경의 근본 원리를 파괴하는 것을 자유로 생각하지 않는다. 종교 다원주의는 민주화라는 시대의 바람을 타고 등장하여 특정 종교나 이데올로기 가 진리와 구원을 독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상대주의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정통 기독교는 더욱 외로워질 것이지만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근본으로 한다.1)
제1장 종교의 기원과 기능
종교에 관한 연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연구된다. 종교를 심리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위시하여 사회학적으로, 혹은 비교종교학적 접근 등 다양하다. 종교에 관한 연구도 물론 서구가 먼저 시작하였지만 역사는 160년에 불과하다. 물론 그 이전에 이미 동양 종교의 가치를 알고 높이 평가한 라잎츠치히 같은 철학자가 있었고, 또한 쇼펜하우어는 불교 철학을 이해하고 그의 철학에 반영하였다. 미국의 장로교 신학자 찰스 하지는 동양 종교가 앞으로 기독교에 도전이 될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동양 종교를 서구에 소개한 학자와 저서는 영국 에딘버러 대학 총장 윌리암 뮤일(William Muir)의 [모하멧]과 1871년 타일러(E.B.Tylor)의 [원시 문화(Primitive Culture)]이며 독일의 막스 뮐러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막스 뮐러는 중국과 인도의 종교를 서구에 소개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동양의 성서들(Sacred Books of the East)과[종교학 개론(An 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Religion)이다. 다음 1890년 프레이저(J.G.F.razer)의 [황금의 나무(The Golden Bough)]는 타일러의 저서 못지 않게 문화 인류학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프레이저와 타일러 는 서구 우월주의에 기초하여 동양 종교는 진화되지 못한 종교로 말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수많은 비교 종교학의 책들이 나왔으며, 기독교 신학자들도 많은 연구를 하였는데 신학자들이 쓴 이 분야의 연구는 불행하게도 대부분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적 관점이다.
19세기 후반, 비기독교 종교가 서구에 소개되기 시작하자 독일에서는 에른스트 트뢸취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는 동양 종교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소위 종교사학을 주장한다. 종교 연구의 방법도 과거에는 주로 서술적 연구에 치중하여 종교의 교리, 제사, 의식, 실천을 다루지만 지금은 인도의 불교, 태국의 불교, 한국의 불교가 왜 다양하게 발전하였는지를 문화적, 사회적 각도에서 다루는 경향이 있다. 최근에는 로마 천주교 신학자들이 종교신학이란 명칭으로 종교를 신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유행한다. 이의 대표적 학자와 저서가 슐레테의 [신학적 주제로서의 종교]이다. 그는 타종교를 하나님이 허용했다면 그들 역시 상대적인 권리가 있고, 따라서 타종교에도 구원의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종교 연구의 방법에 대하여는 학자들에 따라 상이한 방법론을 제시한다. 콤스톡은 심리학적 관점. 사회학적 관점, 역사적 관점, 양식사적 관점, 해석학적 관점을, 킹은 종교를 특정 종교의 안에서 연구하는가, 밖에서 연구하는가의 위치를 중요시하는데 이것은 종교 연구가 순수한 객관적 입장이 가능한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2)
A.종교의 기원에 관한 이론
종교에 관한 기원이 종교 연구에 중요하다. 진화론이 신학은 물론, 종교에까지 영향을 미쳐 종교를 발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통례였다. 부퀘(A.C.Bouque)는, 종교는 모호하면서도 무서운 힘에 대한 신앙인 무생물의 유의식설(animatism)에서,타일러는 물활론(animism)에서 출발하였다고 주장하며, 다른 대부분의 학자들도 정령 숭배와 부활론에서 다신론을 거쳐 일신론으로 발전하였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상은 신학에도 영향을 미치어 신학자들이 종교 진화론을 기독교에 적용하였다. 벳하우젠은 구약은 유목 시대의 물화론 신앙에서 모세 시대의 단일 우상론(monolatry)을 거쳐 유일신론으로 발전하였다고 주장하며, 영국의 성경신학자 로버트 스미스(1846-1894)도 셈 종교의 시초는 전 부족이 공동으로 드리는 희생 제물로서 이것은 토템 신앙과 관련되었다고 한다. 공동체와 토템의 신앙이 점차 발전하여 후일 이스라엘 민족이 속죄, 성례전, 거룩의 개념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종교 진화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대체로 우주의 모든 것을 단순한 데서 복잡한 것으로 발전한다고 믿는데, 이것을 종교에도 적용시켜 원시인들이 자연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종교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종교의 기원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이 많이 사용되었으나 최근에는 사회학적 방법, 즉 사회의 요구나 필연성에 의하여 종교가 만들어졌다는 사회학적 해석을 시도한다. 종교란 어느 사회에도 보편적으로 존재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진화론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는 문명이 발전하지 못한 초기 인류의 과정이라고 한다. 다윈은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에 대한 신앙을 종교라 한다면 종교는 문명이 덜 발전한 인류에게는 보편적 현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잘못된 가설임을 입증하기가 어렵지 않다. 즉, 문명이 고도로 발전하나 현대에 더욱 종교가 극성을 부릴 정도로 왕성하며, 보편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헬라철학이 한창 발전하였던 주전 5세기경에 허로디투스는 그가 방문한 약 50개의 사회에 나타난 50여 종교를 비교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보아 종교란 동서 고금의 보편적 현상임을 알 수 있다.3)
(1) 종교의 심리학적 설명
심리적 해석은 인간이 불안과 고뇌에 대한 대안으로 종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분트(Wilhelm "Wundt)는 공포심에서, 타일러는 자연에는 영혼이 있다는 신앙에서, 프레이저는 마술에 대한 신앙에서,슐라이어막허는 의존 감정에서, 프로이드는 오디퓨스 콤플렉스에서 종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프로이드의 이론을 좀더 소개하면 그는 그의 저서[꿈의 해석]에서 무의식 이론을 개발하는데, 거기서 종교론을 약간 피력한다. 종교는 일종의 뉴로시스로, 즉 아들은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두려워하며 미워하는데 두려움의 대상인 아버지가 무의식 중에 신이 되었다. 칼 융은 프로이드에 기초하여 종교는 내적 갈등과 성숙에 도달하기 위해 대안으로 나왔다고 한다. 프로이드의 무의식 이론은 종교를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미국의 종교심리학자 제임스(William James)와 류바(J.H.Leuba)는 무의식 이론에 근거하여 종교의 기원을 설명한다. 그들에 의하면 종교란 인간의 무의식이 객관적 형태를 취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동시에 경건한 사람은 외부의 힘에 의하여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종교란 장마제 의식의 영역이 객관적 모습을 취하는 일종의 특수한 침입으로 주체자에게 외적 통제를 제안하는 것이다. 종교 생활에서 제어란"높은 것으로"느껴진다. 그러나 우리의 가설로는 이것은 실제로 인간을 제어하는 우리자신의 숨은 마음의 높은 도구인데도 인간 밖의 힘과 하나가 되었다는 감정을 굉장한 것으로 여긴다.4)
프로이드를 위시한 일부 학자들은 비기독교의 관점에서 종교를 심리적으로 해석하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 심리적 해석을 시도한 학자로는 신학계에서도 많이 인용되는 루돌프 오토의 유명한 저서 [거룩(Das Heilige)]이다. 그는 종교의 도덕적 차원을 좀 무시할 정도로 종교를 '절대 타자'의 경험으로 해석한다. 인간은 절대 타자인 누미노우스(The Numinous)를 경험하면 처음에는 공포심을 느끼지만 다음에는 이상한 신비감과 매력을 느끼는 마음의 체험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그는 '두려움과 매력(tremendum and fascinosum)'이라고 한다. 물론 그는 이사야의,성전에서의 체험을 위시한 신구약 성경의 많은 예를 인용하지만 이스라엘, 이집트, 일본, 중국, 인도, 소련 등 여러 나라의 종교를 돌아보고 각 종교가 공통으로 가지는 종교의 본질은 이성적이나 도덕적 차원보다는 '거룩이라고 결론짓는다.
나는 베드로 성당에서 추기경이 외치는"SANCTUS SANCTUS SANCTUS(거룩)"를,크레믈린의 사원에서도 같은 의미인"Swiat Swiat Swiat(거룩)"라는 소리를 들었고, 예루살렘에서도 동일한 소리를 들었다. '거룩'이란 용어가 어느 나라 말로 외쳐지든지 간에 인간의 입술에서 나오는 이 고상한 용어는 인간의 영혼 깊은 곳을 장악하여 큰 두려움으로 마음에 내재한 다른 세계의 신비를 느끼게 한다.5)
오토에 의하면 인간이 절대 타자 앞에서 거룩을 체험하는 단계는 먼저 자신을 벌레로 생각하는 피조물 의식이요, 다음은 두려움이요, 셋째는 압도당하는 마음(Overwhelmness)이며,넷째는 내적 힘을 느끼는 것이며, 다섯째는 전적타자로 경험하는 단계이며, 마지막으로 매료(Fascinans)이다
종교를 심리적 차원에서 해석하는 학자들은 이상 언급한 사람들 위에도 죽음에 대한 인간의 공포심이 종교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폴란드 문화 인류학자인 말리노스키(B.K.Malinowski)가 있으며,19세기 독일의 소위 인종 심리학파를 주장하는 바스티안이나 분트 같은 학자들을 개인의 공포심이나 불안 심리가 종교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한 집단의 구성원이 공동으로 느끼는 문화간이나 자연관등의 기본적 이념(Elementargedannken)이 종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2) 종교의 사회학적 설명
최근에 기독교를 위시한 대부분의 종교 연구에서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 크게 강조되고 있는데, 이것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사회적 모순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한 남미의 해방신학과 1970년대 중반에 우리 나라에서 나타난 민중신학은 종교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강조하게 되며, 이로 인하여 종교를 사회학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많이 나타났다. 그러나 종교를 사회학적으로 연구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은 최근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19세기에 서구 학자들이 시도하였다. 종교를 사회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자들은 종교의 사회 통합(intergration) 기능을 강조하면서 종교는 각 개인의 공동체에서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의 대표적인 학자는 불란서 사회학자 두루깡(Emil durkheim)이다. 그는[종교생활의 기본적 형태]라는 저서에서 "종교는 불변되고 금지된, 신성한 것과 관련된 신앙의 행위의 단일화된 세계"로 정의한다.6) 그는 사회란 본래 내적 차이 없는 메카닉에서 내적으로 서로 다른 이질화의 유기체적 결속(solidarity)으로 발전하는 데 내적 분열과 이완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간은 종교에 호소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종교는 사회를 통합시키고 새롭게 하는 규범적 가치와 공동체를 신성화하는 도덕의 기초를 제공한다. 베이컨은 종교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띠'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이 이론에 적용된다. 두루깡의 모순은 그가 말하는 종교의 통합적 기능은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연구하기보다는 원시 사회에 국한시키고 있으며, 종교의 경험적 차원을 너무 배제한다. 원시 사회는 주로 한 부족이나 마을 주민이 하나의 종교를 믿는 사회에서 이 이론이 적용될지 모르나 오늘날 복잡한 다원화 사회, 특히 종교가 다 다른 사회에서 이것은 실효성이 없거니와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오토의 제자인 요아킴 바하 역시 종교 사회학에서 예배 의식과 교리를 통하여 인간은 신을 체험하지만 동시에 신앙의 주관적 체험과 의식 및 교리는 사회적으로 구체화되어야 하며, 이러한 구체화는 결국 사회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즉, 종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 제일 목적이 있지만 사회통합이 종교의 결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7)
종교를 사회적으로 해석하는 비기독교적 급진주의 이론은 칼마르크스 같은 사회주의 이론이다. 마르크스는 종교를 민중의 아편으로, 소외계층이 사회를 변혁시켜서 자기들의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내세에서 구원을 추구하는 심리에서 종교가 일어났다고 본다. 따라서 종교, 특히 기독교는 지배 계층이 피지배자들을 수동적 자세로 묶어 두려는 의도로 지배 계급이 만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종교란 초자연의 힘이 부여한 선물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이며, 신(神)도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미래의 공산 사회가 완성되면 종교는 자연 소멸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스완슨도 영을 믿는 신앙은 피지배 계급의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지배 그룹의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한다.
종교의 사회학적 연구는 일부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에른스트 트륄취는 기독교를 위시한 모든 종교는 사회 문화의 역사적 상황에서 형성, 발전한다고 주장하여 기독교마저도 상대화하는 모순을 범한다. 독일의 종교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기독교를 위시한 모든 종교가 사회, 경제,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예리하게 분석한다. 종교 사회학의 영향으로 미국의 신학자 H.R.니버는 교파까지도 사회학적으로 설명하는 유명한 저서 [교파주의의 사회적 근원(The Social Source of Denominationalism)]을 썼다.
최근 일부 문화 인류학자들은 재생화의 이론으로 종교의 기원을 해석한다. 아벨러(David Aberle)와 왈레이스(Anthony Wallace)는 개인이나 사회가 긴장과 일탈 현상을 느끼는 사회 불안이 나타나면 여러 가지 방면으로 여기에 대응하여 사회를 새롭게 하여 안정을 구축하려고 시도하는데 이것을 재생화라고 하며, 이러한 사회를 새롭게 부흥시키려는 재생화의 노력은 주로 이단이나 분파주의자들이나, 종교들이 시도한다는 것이다. 즉, 종교가 사회개혁의 역할을 담당하는 차원에서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3) 종교의 본질과 기능
지금까지 우리는 종교의 기원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결국 종교는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신앙 행위냐, 혹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본질적인 의무냐 하는 두 가지로 요약이 된다. 성경은 종교의 본질을 논하기보다는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의무요 필수적인 예의인 것 같이,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겨야하는 의무에 속한 것으로 가르친다. 특히 언약의 신학은 신앙이란 하나님과 인간과의 계약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잘 믿고 복종하면 거기에 상응하는 축복이 임하고 계약을 위반할 때는 화가 따른다는 책임도 부과된다. 여기에서 신자는 기도, 찬양, 설교 등의 예배나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동시에 어려움을 기도로 호소하여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얻는다. 여기서 종교는 인간의 질병, 고통, 삶의 의미, 죽음의 문제, 사후의 세계에 대한 모든 의문을 종교를 통하여 해결점을 찾는다. 현대 사회는 종교의 가치와 존재 의의를 지나치게 사회적 기능이나 정치, 경제적 측면에서 기여도에 더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종교의 본질적 궤도를 약간 벗어난 것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개혁주의 관점에서 본 종교의 본질을 잘 분석한 J.H.바빙크는 종교의 다섯 가지 자력점을 말한다. 종교는 우주의 신비,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도덕적 규범, 인간 존재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세계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종교에서 해답을 추구한다. 이것을 다시 요약하면 첫째로 우주적 자력점으로 인간과 우주와의 관계를 느끼는 것이다. 인간은 우주 속에서 대단히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느낀다. 즉, 나와 우주와의 관계이다. 두 번째 자력점은 인간이 당면하는 종교적 규범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본능대로 살려고 하는 본능과 동시에 이를 억제하려고 하는 본능이 있는데 종교는 이것을 제재하는 규범을 제공한다. 셋째 자력점은 인간 실존의 문제이다. 인간은 사고하고 행동하지만 인간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운명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지만 또한 운명의 지배를 받는다. 즉, 나의 행위와 숙명과의 관계는 대단히 묘한 관계이다. 말하자면 나와 나라는 존재의 수수께끼에 대하여 종교가 해답을 제시한다. 네 번째 자력점은,인간은 현실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더좋은 이상 세계를 추구한다. 즉, 인간은 실수와 허물로 인하여 재난과 불행을 당하나 이것을 초월하여 더 좋은 구원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곧 인간과 구원의 문제이다. 다섯 번째 자력점은 인간과 높은 능력의 관계이다. 인간은 보이는 현상 세계 이면에 영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신앙이 있으며, 이것은 인간의 종교적 직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빙크는 모든 종교가 다섯 자력점을 중심으로 형성된다고 한다.8)
바빙크의 종교 본질론은 물론 개혁주의 신학, 특히 칼뱅의 신학에 기초하여 종교는 신 의식, 혹은 종교 의식 때문이라고 해석을 하고, 종교는 다섯 자력점을 중심으로 다룬다고 한다. 그러나 바빙크의 이론대로 하면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나 기원은 전혀 배제되고 너무 인간의 영역에 국한되는 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종교의 시작은 사회적 관심이나 사회개량의 방편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 실존의 의미를 묻는 데서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불가피하다 하겠다. 개인의 종교경험은 개인으로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 및 인류를 윤택하게 하는 종교 공동체가 형성되는데 이 종교 공동체는 불가피하게 사회적 실제이기 때문에 그 종교가 가르치는 사회적 가르침에 따라 개인으로, 혹은 집단으로 사회를 위한 봉사의 일을 해야 한다. 불행히도 현대 종교는 종교의 본질인 인간 실존과 우주의 신비및 구원에 대한 관심보다도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종교의 본질을 벗어난 것이다.
종교의 사회화는 1950년 후반과 60년대 초반, 구라파에서 등장한 하나님의 선교를 위시한 정치신학과 남미의 해방신학 등 급진주의 신학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인간의 사후세계에 대하여 별 관심도 없는 현세 지향적 사회주의 사상도 간과할 수 없다. 서구의 많은 신학자들은 이미 종교, 특히 기독교의 사회화와 정치화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지적하였다. 영국 성공회 신학자인 노르만은 기독교의 정치화는 종교의 본질을 벗어난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우려한다.
참된 종교는 인간의 내적 영혼의 조건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므로 참 종교는 신앙을 현대 세계의 정치적 이상주의의 한 요소로 재해석하는데 현대 기독교를 의심한다. 수세기 동안 성자들과 학자들이 전하여 준 기독교는 먼저 불완전한 인간의 본성을 논하지 인간사회의 합리화된 불완전을 논하지 않았다.9)
2.종교 다원주의 개념과 등장 원인
오늘날 우리 사회는 다원화 사회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종교에도 적용된다. 과거 서구 사회는 기독교가 독점적인 위치에서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만이 유일한 종교로서 사용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 변화와 더불어 기독교만이 독점하는 시대는 서서히 사라지고 많은 종교와 이단들이 등장하여 종교 시장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미국의 종교 사회학자 피터 터거는 미국을 위시한 서구 사회가 종교 전시장이 되어 사람들이 기독교만을 불가피하게 선택하는 시대가 아니라 다른 종교적 대안이 많아 이단도 선택할 수 있는 사회로 규정하고 이것을 이단적 명령(heretical imperative)으로 정의하였다. 따라서 종교 다원주의란 다양한 많은 종교들이 평화적으로 공존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한다. 피터 버거는 현대 사회는 종교도 시장 경영의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모든 다원주의적 상황의 주요한 특징은, 그것들의 세부적인 역사적 배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탈 독점적인 종교적 기업들이 고객 집단의 충성을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제 충성은 자원적인 것이 되었으며 따라서 정의상 확실한 것이 못된다. 결과적으로 이전에는 권위 있게 부과될 수 있었던 종교적 전통을 이제는 시장에 내놓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더이상 구매되도록 강요받지 않는 고객들에게 판매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원주의적 상황은 무엇보다도 시장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종교 제도가 매매 기관이 되며, 종교적 전통은 소비자 상품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많은 종교 활동이 시장 경제의 논리에 의해서 지배당하게 된다.10)
피터 버거는 서구 사회의 종교 다원주의에 대하여 정곡을 찌르는 지적을 하였다고 본다. 물론 우리 사회는 이미 유교, 불교, 샤머니즘, 기독교가 약간의 갈등을 느끼지만 비교적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사회가 되어졌고 각 종교들이 자유 경쟁을 하는 입장에 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종교 다원주의란 단순하게 다양한 종교들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종교적으로 자기의 종교만을 절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는 구원과 신을 보장한다는 종교의 소위가치 중립을 주장하는 종교신학이라 할 수 있다. 종교 다원주의의 중요한 신학자는 니터(Paul Knitter),힉(John Hick),파니카(Raimund Panikkar),칸트웰(Smith W.Cantwell),사마르타(S.J.Samartha),레이스(Alan Race)등 많은 학자들이 있는데, 특히 로마 카톨릭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카톨릭은 이미 중세 시대의 타종교에 대한 신학적 관심을 더 표시하였고 또 길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종교 다원주의에 대하여 정의를 정확하게 한 학자는 존 힉으로,그는 다음의 세 가지 가능성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존재론적으로 많은 신들이 있다는 가설, 둘째는 한 종교만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반면 다른 종교는 잘못된 우상을 섬긴다는 가설, 셋째는 하나님은 한 신으로, 그가 만물을 창조하였고 만물의 주가 되는데 다른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이 한 하나님을 섬긴다는 가설이다. 힉은 이상의 세 가설 가운데 현대는 부득이 세 번째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 세계적 상황은 다른 종교는 구원도, 신에 대한 바른 지식도, 인정할 만한 예배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면서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전통적 교리를 배격한다. 그는 모든 종교는 문화의 결과이므로 어떤 종교도 절대성을 고집하여서는 안 된다는 19세기 독일 종교사학파의 거장 에른스트 트뢸취의 사상을 수정 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그는 하나의 절대적 종교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구원론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역설한다. 먼저 종교는 문화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그의 견해를 직접 인용하면, 오늘날 우리는 종교를 이와 같이 상호 배타적인 조직체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종교 생활이란 때로는 서로 끌어당기거나 밀어 제치고, 때로는 다른 물결을 흡수-보강-발발하는 수많은 파도를 일으키면서도 한 곳을 향하여 면면히 흘러가는 인류 문화의 다이내믹한 연속체(dynamic continuum)의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 인간 역사 속에는 서로 다른 종교적 전통이 탄생할 수 있는 창조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위대한'모멘트'의 물결이 있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절대자의 은총, 절대자의 이니시어티브, 절대자의 진실성이 인간의 신앙, 인간의 응답, 인간의 계몽과 교차하는 모멘트의 물결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멘트는 인간 생활의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더 나아가서는 인간 문화 전체의 발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더 나아가서는 인간 문화 전체의 발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으로 부르는 모든 종교를 역사적-문화적 현상(historical-cultural phenomenona)으로 설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11)
힉은 모든 종교는 문화적 산물이므로 특정 종교의 절대성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지론이다. "하나의 문명이 참된 문명이라거나 거짓된 문명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의 종교가 참되다거나 거짓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다.12)폴 니터는 다원주의라는 개념에는 단순하게 많은 종교들이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고13)만나는 가운데서 다원화가 가능하다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면서"연합적인 다원론"을 역설한다. 이상 종교 다원주의의 개념은 현대 사회는 종교와 문화 등 모든 분야가 다원화 사회이므로 모든 종교는 평화적 공존을 해야하거니와 어느 특정 종교가 배타적 자세에서 절대성을 주장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종교 다원주의는 왜 일어났는가? 종교다원화라는 용어는 이미1960년대 중반부터 서구 사회에서 종종 사용되기 시작하였다.하비 콕스는 1965년 그의 저서에서'다원주의'라는 말을 사용하였고,1970년대에 서구 학자들은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책과 글들을 많이 쓰기 시작하였다. 종교를 신학적으로 발전시켰다. 타종교 신학적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하는 자들은 종교 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종교 신학은 천주교가 개신교보다 앞장선 셈이다. 종교 다원주의는 서구 사회의 변화에서 일어난 것이다. 즉,1960년대부터 미국과 구라파는 기독교의 독점시대가 사라지고 수많은 동양 종교가 소개됨으로 종교 신학과 종교 다원주의라는 말이 등장하였다. 따라서 종교 다원 주의는 서구와 미국사회에 타종교가 들어가서 부흥함으로 발생한 사회적 변화에서 일어난 것이다. 미국의 경우,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하여도 개신교, 천주교가 지배하는 시대였고 유대교는5%에 불과 하였다. 1955년 미국의 헤르버그(Will Herberg)가 그의 저서[개신교. 카톨릭. 유대교(Protestant. Catholic. Jew)를 쓸때,미국은 위의 3종교밖에 몰랐다. 그러나 50년대 티벳이 중국에 점령당하면서 많은 불교도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고60년대부터 다른 아시아 나라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하면서 미국 사회는 종교 다원화 사회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79년 하비 콕스는 그의 저서 [동양으로의 방향 전환,신 동양 사상의 약속과 위험(Turning East,The Promise and Peril of the New Orientalism)]에서 종교 다원화 사회로서의 미국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기 시작하였다. 서구는 많은 노동자들이 서구 사회로 이입되면서 종교 다원화 사회를 만들었는데, 그것의 대표적인 국가는 영국과 독일이다.
둘째로는, 서구의 문화에 실망을 느끼고 동양 종교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고, 또한 신학자들 중에서도 동양 종교에서 진리와 가치를 찾으려고 하는 데 기인한다. 미국의 경우 인종 차별 정책에 반대하는 흑인 운동, 반전 운동,청년 문화 등은 기독교의 실패를 의미하며, 따라서 사람들은 비기독교 종교에서 오히려 사회문제와 인생문제의 해결을 구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환경 문제는 문화적 사명을 가르치는 기독교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자연과의 신비적 합일을 강조하는 동양 종교를 찬양하는 토인비 같은 사람도 종교 다원주의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60년대 사신(死神)신학은 미국에서 기독교 지배의 시대가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알타이저는 노골적으로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동양의 신비주의는 기독교가 가르치는 성육을 포함하는 모든 교리가 있다고 찬양한다. 그는 신약의 기독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동양 종교야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원시적 전체성(Pri-mordial totality),혹은 극락이라는 장소로 돌아가게 한다고 말한다.14) 서구인들이 동양 신비주의 종교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미국의 영화로 잘 나타난다. 70년대 후반에 인기를 끌었던 [엑소시스트]라든지 최근의 [사랑과 영혼]등은 이것을 증명한다. 정확한 정보에 의하면[사랑과 영혼]은 미국의 이단인 뉴에이지 운동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지금 서구에서 동양 종교를 전파하는 사람들은 영화,소설,유모어 선집 등 문학과 예술을 통하여 기독교를 은근히 비판하고 동양 종교의 우수성을 자랑하고 있다.
셋째로는 서구와 제3세계의 반서구 감정이 종교 다원주의를 부채질하고 있다. 특히 서구의 많은 백인 지식인 중에는 서구의 식민주의와 양차 대전에 대한 강한 자책감을 가진 자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은 기독교와 서구 문명에 불만을 가지고 동양 종교를 찬양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주장하기를 기독교의 선교는 서구의 우월주의와 패권주의의 상징이므로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975년 나이로비에서 모인 WCC의 제5차 총회에서 미국 대표 브라운은 영어를 제국주의의 언어로 묘사하고, 스페인어로 연설하면서 미국인 남자인 자신을 비서구인들이 인종주의, 고전주의,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볼까 두렵다고 하였다. 폴 니터 역시 기독교의 절대성에 기초한 기독교 선교는 서구 우월주의의 영향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현대 선교학자들과 크리스천들은 기독교가 서구 문화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면서 그 이유는 서구 문화에서 발전된 기독교는 복음의 본질과는 모순되는 한계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전통적 서구 기독교는 현대인의 마음과 사상에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구원 사업(salvation business)"을 위한 선교는 포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5)
넷째로는 WCC의 종교 대화는 결과적으로 종교 다원주의를 초래하였다. WCC는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타종교와의 대화를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기독교와 타종교의 대화국을 신설하고 본격적으로 "대화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본래 국제 선교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가 종교간의 대화를 제안한 것은 선교를 위함이었다. 그러나 1961년 뉴델리 총회에서 타종교를 다른 신앙으로 표현하고 대화를 하여가는 과정에서 전도보다는 타종교와의 평화적 공존을, 더 나아가 세계 평화와 질서라는 공동체의 유익을 발전하였다. 세속적 대화에 참여하는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과거 기독교가 범한 오류를 지적하는 데 더 급급하면서 타종교에 대하여 사과하는 입장을 취하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양보하고 말았다. 심지어 WCC의 대화 책임자였던 사마르타는,선교는 종교적 제국주의의 상징이며 비성경적이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도록 전도하는 것은 신구약 성경에 위배되며, 신앙은 역사적 경험의 열매이지 사람에게 강요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16)
다섯째로,비서구 세계의 문화적 정체감 회복이 종교 다원주의에 큰 자극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비서구의 많은 나라들은 서구의 시민주의에서 해방되었지만 서구 문화의 무분별한 침투로 문화적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되어 자신들의 문화적 유산을 찾자는 운동과 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에 이미 기독교 선교는 선교가 문화 침략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하여 토착화를 논하였으나 이것으로만 만족하지 아니하고 더 적극적으로 과거 기독교 이전의 문화를 긍정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전개되었고, 이것은 불가피하게 자신들의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 자신들의 종교는 더이상 우상이나 미신이 아닌 구원과 민족의 자긍심을 주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특히 대부분의 비서구 국가는 기독교를 서양의 종교로 배격하고 자신들의 종교를 더 고수하는 문화적, 종교적 복고주의가 나라마다 성행하게 되었다. 최근 한국도 문화적 종교적 복고주의가 나라마다 성행하게 되었다. 최근 한국도 문화 유산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샤머니즘을 미화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종교 다원주의 자들은 기독교 이전의 우리 종교에도 그리스도와 로고스가 역사 하였다고 하면서 성령은 선교사들이 들어올 때 역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이미 성령이 역사 하였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현 시대를 풍미하는 상대주의와 민주화가 종교 다원주의의 직접, 혹은 간접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20세기에 철학, 사회학, 문화 인류학 등은 진리의 절대를 거부하고 상대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현대는 많은 국가들이 아직도 전제주의와 권위주의적 지배하에 있지만 일반적으로 서구적 민주주의의 가치관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와 가치관 및 윤리에서 역시 절대를 부정하는 경향이 두드러진 다고 사회학자들은 말한다. 지금 세계는 부분적으로는 미국의 코카콜라,맥도날드 햄버거, 미국의 영화가 전세계를 주도하지만 문화와 종교에서는 다양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이 시대의 특징이다. 문화 인류학자 버나드 맥그래인(Bernard Mcgrane)은 서구 문화가 비서구문화를 해석하는 시대적 흐름을 4가지로 분류하는 첫째는 16세기 종교 개혁의 시대로서, 모든 비서구 종교와 문화를 이방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며, 둘째는 계몽주의 시대로서 비서구 문화와 종교는 무지,오류,비진리,미신으로 보는 것이고, 셋째는 19세기는 서구의 발전과 진화의 대명사로, 비서구는 원시와 발전의 단계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넷째 시기인 20세기는 서구와 비서구 문화와 종교를 단순한 차이라는 각도에서 보면서 이 이의마저 민주화되었다고 분석한다. 사회학자 수린은 맥그래인의 20세기의 패러다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부언 한다.
결론은 지금"차이"는 "민주화되었다"지석수의 다른 것은 더이상 화석화된 과거로 몰입된 것이 아니라 차이라는 극단적인 민주화로 인하여 비서구의 다름은 지금 우리들의 현재로 삽입되어 현 세대의 것이 되었다. 금세기의 문화는 인간 진화보다 다일적 진화라는 각도에서 보는 콩트적 해석의 여유는 사라졌다. 비서구의 단일적이고 전체화된 문화는 인간 진보와 진화론의 비전을 불신하고 역사주의도 다양한 목소리의 문화 인류학 세기의 다원화되고 이질적이면서도 건설적인 민주화된 문화의 해석으로 양보하고 맡았다.17)
3.종교 다원주의의 신학 사상
종교 다원주의는 세계의 종교적, 문화적 상황이 더 이상 서구의 우위 시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거니와 기독교에 기초한 서구의 쇠퇴는 정통 기독교에도 큰 부담이 된다. 종교 다원주의는 결국 시대의 상황과 인간의 종교적 현실 문제에 실제적으로 접근하자는 논리에서 시작한다. 즉, 우리는 더이상 세계의 많은 종교가 있고 인구의 1/3이 아직도 타종교인이거나 불신자인데 이들을 어떻게 지옥으로 보내느냐 하는 것이다. 또한 더 이상 선교적 차원에서 비기독교 문화와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자들 간에도 견해는 너무 다양하여 여기서 거론할 수 없고, 종교 다원주의의 가장 핵심 되는 것은 신 중심의 구원론과 기독론의 다른 해석과 문화관이다. 즉, 다원론자들에 의하면 과거 기독교가 타종교에 대하여 가진 자세와 태도는 획기적인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힉과 니터는 지금까지 기독교와 타종교의 관계를 요약하면 복음주의 입장 자유주의적 개신교, 로마 카톨릭인데 자신들은 신 중심의 새 모델을 제안한다고 하면서 이것을 구원론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한다.
(1) 신 중심의 구원론
힉과 니터는 지금까지 기독교는 배타적 절대주의라는 우월주의에 기초하여 기독교만이 절대적으로 구원이 보장되는 종교라고 생각하였고 신에 도달하는 길도 하나밖에 없다는 편견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를 중심으로 다른 종교는 마치 태양을 중심으로 위성이 회전하듯, 그 주변을 도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러한 생각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기독교를 중심으로 다른 종교들이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을 중심으로 모든 종교가 회전하고 다만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는 신과의 거리가 멀리 있는 위성이냐, 혹은 가까이 있느냐의 차이에 불과하다. 그는 이렇게 자연과학의 원리를 종교에 도입하여 기독교와 타종교의 차이를 논한다. 코페르니쿠스는 깨닫기를 중심에 있는 것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지구를 포함한 모든 천체는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달아야 할 것은 신앙의 우주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지 기독교나 다른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이 태양이며 빛과 생명의 근원으로 모든 다른 종교는 자신들의 다른 방법으로 빛을 반사한다.18)
영국 장로교 종교철학자인 힉은 북부의 전통의 문자적 성경주의와 무비판적 자연주의를 거부하고, 현대는 현대 경험주의 철학과 실증주의와 종교사 학파의 관저에서 기독교만이 절대라는 주장은 포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대는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이 하나님에게 도달한다는 프톨레미적 사고는 포기되어야 하고, 모든 종교를 통하여 신을 경험할 수 있기 대문에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한 신에 도달하는 많은 길에 불과하므로 사람은 어떠한 종교를 택하든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필자가 만일 인도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힌두교인 이 되었을 것이고, 이집트에서 태어났다면 모슬렘이 되었을 것이며, 씨일온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불교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영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19)힉은 기독교의 절대성 주장은 인류의 전체적인 종교 생활을 알지 못했던 무지한 시대의 산물로 이것은 오늘날 모순이며 사랑의 하나님은 결코 비기독교 사람이라고 버리시는 냉정한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창조주이며 주님으로서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모든 인류의 구원과 선을 찾으신다고 가르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대다수의 인류를 제외한 특수한 방법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모순이다. 인류의 역사이래 대다수의 인간이 그리스도 이전에 태어났거나 기독교 밖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20)
그러나 힉은,신은 기독교의 성경이 말하는 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폴 틸리히가 말하는 궁극적 존재나 진리, 최고의 신적 실재(Ultimate Divine Reality),초월적 존재,완전자(Perfection)로 표현하기 더 좋아한다. 이것은, 신은 어느 특정종교의 신과 동일화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2) 종교 다원주의의 기독론
종교다원주의의 가장 핵심 되는 이슈는 역시 기독론이다. 종교 다원주의는 성경의 그리스도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그리스도는 모든 문화의 종교에 가능하다는 소위 우주적 그리스도(cosmicchrist),혹은 로고스(logos)를 강조하며, 이것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 예수를 분리하는 것을 전제로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계시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며, 또 더 이상 규범적인 것도 아니라고 본다.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대화함으로 오직 예수라는 전통적 신앙 고백을 거부한다. 먼저 종교 다원주의의 기독론은,예수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는 중요한 이름이 될지언정'그리스도'는 다른 종교와 문화에서도 가능한 중요한 이름이라는 것이다. 인도의 천주교 신학자 파나카는 종교다원주의자이며 또한 이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바, 그는 기독교가 나사렛 예수만이 유일한 그리스도라고 고집하는 신앙은 신적 신비를 나사렛 예수 안에만 국한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각 종교는 자기 나름대로의 중보자가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는데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카르쉬나가,불교에서는 불타가, 회교에서는 알라가 중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크리스천들에게서만 중보자라는 것이다. 성 바울의 발자취에서 우리는 헬라의 알지 못하는 신을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힌두교의 숨은 그리스도를 논할 수 있다. 그 그리스도는 숨겨지고 알려지지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그는 결코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21)
파니카는 힌두교와 기독교는 다 같이 그리스도가 역사하기 때문에 양 종교는 실존적 차원에서 대화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비록 다른 종교와 문화에는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미 존재하였다. 이 원리는 기독교와 힌두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애니미즘, 회교는 물론 아즈텍인, 몽고인, 헬라인, 구라파인 및 15,000년 전에 살았던 크로마뇽인에게도 해당된다고 한다. 존 힉 역시 기독론은 파니카와 유사하게 신약의 기독론은 어디까지나 신화적인 것으로 해석하여 말하기를 도성 인신(道成人身)은"신화적인 사상이며, 언어의 상징이며, 시적 영감의 한 단편"이라고 한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성육하였다는 가르침은 예수가 하나님과 충분하고도 효과적인 구원의 접촉점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다른 접촉점을 배제하는, 결코 유일 무이한 신과의 접촉점은 아니다. 따라서"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구원을 추천할 때 다른 신앙의 구원을 추천하지 아니한다는22)뜻이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 이외에는 달리 구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초대교회의 유대 크리스천들이 예수를 유일한 메시야나 구주로 신앙을 고백하는 시대적 상황은, 첫째로 고전주의적 문화였으며, 둘째는 유대의 종말적,묵시록적 멘탈리티가 지배하는 사회였고, 셋째로는 신자들이 소수 그룹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생존의 언어'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원적인 복수의 진리 요구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4.종교 다원주의 비판
종교 다원주의는 오늘날 다원화의 시대에는 걸 맞는 종교신학으로 보일지 모르나 이 신학은 기독교의 아이덴티티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며, 더나아가서 종교를 시장 논리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이 시장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선택하는 것같이 종교도 택할 수 있다는 종교화 철학을 상업화하는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대는 물론 절대를 거부하는 상대주의 시대이지만 신앙의 진리를 상대화할 때 모든 것은 상대화되어 인류가 따르고 복종하며 충성할 진리나 신은 없어지고 만다. 이렇게 될 때 인간 세계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다원주의는 결론적으로 말하면 혼합주의와 이단에 못지 않게 기독교 교회와 기독교 선교에 심각한 도전이 되는 신학이다. 종교다원주의는 비판적인 성경해석에 근거하면서 동시에 70년대의 사회정의와 민주화를 외치는 해방신학과도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경우, 민중신학에 참여하는 신학자들이 종교다원주의 신학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음에도 다원론자들이 간과하는 것은 민주와 사회정의가 요구되는 지역과 나라들은 종교 다원론자들이 찬양하는 비기독교 종교의 세계이다. 세계복음주의는 성명서에서 다원화 사회는 다음과 같이 원인으로 긍정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 세계에 다양성을 원하심을 인정한다. 우리는 이러한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축하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화, 세계관 과학의 연구와 종교에서 양심,윤리,선전및 전도의 자유를 인정한다. 우리는 세속적인 정부들이 상호관용을 장려하고 이들 분야에서 선택의 자유를 유지함으로 문화적 소수자, 종교적 신앙인들 창조적 사상가들, 및 다른 사람들을 핍박과 독재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인정한다.23)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는 다원주의의 사회와 문화는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부합되고, 그로 인하여 특정 문화와 종교를 따르는 자들이 사회적으로 보호를 받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종교 다원주의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단호하게 거부한다. 우리는, 모든 종교는 동등하게 정당하고 동등하게 진리라는 다원주의의 주장에 대하여 다음의 몇 가지 이유로 반대한다. 1)다원주의는 신관이 추상적이어서 영적 능력이 결여되고 성경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2)다원론자들은 특수한 신관을 제시하는데, 이 특수 신화는 기독교나 힌두교로부터 은밀하게 차용한 것이다. 다원론은 예수에 대한 신약과 신앙고백의 진리들을 단순한 신화로 해석하여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기초가 결여된다. 3)다원주의는 기독교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의 예배를 우상으로 말한다. 4)일부 다원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하나님의 중심성을 부정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 묘사하고 추상적인"궁극적 실재"의 중심마저도 부정한다. 이러한 형태의 다원주의는 인간"구원"을 모든 종교의 핵심과 규범으로 놓고 인간 자신을 모든 의미와 가치의 결정적인 중심으로 만든다. 이러한 다원주의는 자아 중심이 고 근본적으로 힌두교나 뉴에이지 철학과 같은 단원론적 종교와 비슷하다. 5) 다원주의도 겸손을 가장하여 기존 종교적 전통에 대하여 무례하며 공격적이어서 역시 교리적 배타주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종교도 자신의 자아 이해에 기초한 다원주의에 대하여는 반대한다는 것을 안다. 8)다원주의는 목회적으로,혹은 전도적으로 교회의 성도들을 섬기는데, 또한 모든 인종과 민족과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24)
5.종교 다원주의 상황과 한국교회
(1) 종교 다원주의 상황과 갈등관계
한국 사회는 분명히 종교적으로 볼 때 다원주의 사회라 할 수 있다. 그 어느 사회보다도 철저한 다원주의 사회이다. Berger와 같은 대부분의 서구 사회학자들이 종교 다원주의 상황에 대하여 설명할 때 그것은 대체로 개신교, 개신교 교파들의 공존을 의미하며 기껏해야 카톨릭, 유대교의 공존상황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철저한 다종교, 다교파,다종파,상황이 전형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우선 크게는 불교, 유교, 개신교, 카톨릭, 원불교 천도교 그리고 최근에 들어온 이슬람교 등의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교파들이 이들 종교 가운데서 나누어져 공존하고 있다. 불교의 경우 조계종, 태고종, 천태종 등 18개의 종파 안으로, 개신교의 경우에는 기장,기감,예장(통합),예장(합동)등 94개 교단으로 나누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신흥 종교가 있으니 그것들은 동학계(교단수 1개),정역계,증산계(30개),단군계(30개),각 세도(11개),유교계(1개),불법계(20개),무속계(30개),기독교계(60개),불교계(70개),외래계(70개),연합계(23개),계통불명(30개)등으로 나누어지는 바 무려 그 숫자가 조사된 것만도 393개에 이르고 있다.25) 여기에다가 민간인들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민간신앙까지도 고려한다면 한국 사회는 가히 종교의 전시장이며, 종교다원주의가 가장 현저하게 보여지고 있는 사례라 하겠다.
Robertson의 모델에 따르면 한국의 종교상황은 경쟁적이고 융통성이 있는 사회상황이라 하겠다. 이것은 헌법 19조에 명시된"1)오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며,2)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규정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헌법이 규정한 정신은 국가는 적극적으로 종교적 활동을 행하지 않아야 하며, 한편 특정 신앙을 가진 사실을 이유로 차별대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26) 이 정신은 나아가서 신앙의 자유가 각 사람들에게, 포교의 자유가 각 종교들에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고 하겠고, 이것은 종교들뿐만 아니라 교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한국이 다종교 상황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서 다원주의는 건국조선의 상황을 의미하지만 한편 종교간의 갈등과 긴장의 관계가 한국 사회에서는 심각하다는 점이 먼저 논의되어야 하겠다. 다종교 상황이란 다양한 절대신념체계가 우리 사회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종교 상황은 개인들에게 종교적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이점이 있다. 인간의 가치관이 다양하듯이 다양한 종교적 가치들의 공존은 다양한 개인들이 요구와 관심을 다양하게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에 바람직한 현상이라 하겠다. 특히 한국의 다종교 상황은 곧 인류역사가 지닌 지성과 지혜의 전통을 모두 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여러 절대신념체계와 가치관들이 공존한다는 것은 다원가치사회를 의미하고, 따라서 모든 가치관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 질서를 개발하고 유지하게 될 때 개방사회를 이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절대신념체계가 여럿이 공존하는 다종교 상황은 그 안에 사는 개인의 정신 내면 세계에 가치관의 혼돈을 안겨주고, 종교집단들에게는 무절제한 자기 팽창주의를 갖게 하고, 사회적으로는 무원칙한 종교문화정책을 낳게 한다.27)
종교간의 마찰과 갈등은 기본적으로 종교적 신념체계의 특성에서부터 비롯된다. 절대신념체계로서의 종교는 자기의 정당성과 진리에 대하여 어떤 형태로든지 외부로부터의 증명이나 지원이 필요하지 아니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는 이른바 자기 정당화(self-validation)의 능력을 지닌다. 이렇게 종교사상은 자기 정당화의 능력을 지닌 완벽한 절대신념체계이기 때문에 다른 종교들을 포함한 모든 사상과 존재가 구원의 대상이 되고, 따라서 자기의 절대가치를 전파하는 것은 사랑과 자비의 표현이며 구원의 이상을 실현하는 일이 된다.28) 여기에 전도 혹은 전교가 있게 되고 전교가 있는 곳에 마찰이 불가피해진다. 몇 가지 종교간의 갈등의 사례를 보면 중요 인사의 사망시에 개신교, 카톨릭, 불교, 그리고 때로는 유교의 종교 의례들을 모두 행하도록 된일, 각 종교마다 종교적 휴일을 얻기 위해 충돌한 일,군종,경찰 종무 등의 참여와 직책 분배로 인한 종교 갈등, 국정 교과서의 기독교적 성향에 대한 불교계의 반발,단군성전 건립에 대한 기독교의 반대 등을 들 수 있으나, 사실상 사회문제화 되지 않은 사소한 갈등과 대립은 생활 가운데서 흔히 나타나고 있다.
원래 종교적 정체감의 확신이 커질수록 자신이 세계관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되고 따라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갖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기로부터 타인을, 자기종교로부터 타종교를 분리하는 작용이 있게 된다. 이 분리현상이 우월주의와 결합될 때, 세 가지 문제가 생긴다.29)첫째는 자기 종교 밖의 사람들을 저주의 대상이나 적으로 여기는 단죄주의, 둘째는 타종교인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태도를 지닌 지배주의, 셋째는 타종교인들을 자기 종교의 세계관으로 계도하는 것이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라 여기는 후견주의(patronism)가 그것들이다. 경직된 종교적 광신주의자들은 타종교인들에게 단죄의 태도를 보임으로써 반지성적 태도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타종교에 대한 반지성적 단죄주의는 곧 사회분역과 분쟁을 야기한다. 제국주의적 지배주의는 피지배인의 문화적 주체의식을 상실시킴으로써 문화의 재창조 능력을 마비시키고 변질된 종교를 심어주게 된다.
종교간의 갈등은 상반된 결과로 나타나기 쉽다. 즉 내집단(in-group)에의 연대감과 타집단(out-group)에의 적대감이다. 다종교 상황에 있어서 자기 종교 집단에의 연대감이 강하면 강할수록 다른 종교 집단에의 배타적 태도는 강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교세확장에 집착하는 종교일수록 그 집단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고 이에 따른 우월의식을 강하게 심어주게 되며, 이것은 결과적으로 다른 종교집단에 대한 거부감과 적대감을 심화시키게 되는 것이다.30) 이것은 다교파 상황에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종교나 교파의 세력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굳게 뭉쳐야 하는데, 그들을 뭉치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월의식을 심어주면서 연대감을 조장하고 이에 따라 다른 집단을 조장하고 이에 따라 다른 집단을 격하시켜야 하는 것이다. 우리/그들, 선민/저주받은 다, 신앙인/세속인(불 신앙인) 등의 철저한 이분법적 사고가 한 종교(교파)집단의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다원주의 상황에서 종교들이 각기 자체의 교세에만 집착한다던가 우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는 예외 없이 종교간의 갈등과 긴장, 대립이 있게 되는 것이다. 타종교(교파)와의 갈등상황이 자기 종교(교파)내의 연대감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종교 다원주의 상황에서 생겨나는 심각한 문제라 하겠다. 이것은 보수집단일수록 교세가 강하며 동시에 타종교에의 배타성이 강한 결과에서도 보여지고 있다.31)
종교간에 갈등이 생겨날 수 있는 또다른 근거는 종교적 세계관이 서로 다른 데서 비롯될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의식은 일반적인 정치, 경제, 사회의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종교의식이 진보적이면 정치, 경제, 사회의식도 진보적인 경향이 있고, 종교의식이 보수적이면 정치, 경제, 사회이식도 보수적인 경향이 있게 된다.32)예컨대 일반적으로 보면 불교는 기독교와 비교해 볼 때 전통적으로 종교적으로 보수성이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불교의 경우 정치, 경제, 사회의식도 기독교보다 보수성을 띠고 있다. 두 연구 결과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한 조사 연구에 따르면 정치의식에 있어서 진보-보수의 연속성에 있어서 기독교-무종교-불교-천도교의 순서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33)다른 조사 연구 결과를 보면 오늘날의 정치, 경제, 사회의식에 있어서 비판적-수용적 연속성에 있어서 기독교(개신교와 카톨릭은 비슷)-무종교-불교의 순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34) 이 연구는 또한 가장 친여적인 종교는 불교로서 그 지지율이 51%나 되지만,부종교,카톨릭,개신교의 경우는 각각 39%,34%,29%로서 그 차이가 두드러지게 보여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의식성향의 차이를 비교해보면 불교인은 체제 순응적이고 긍정적이며 무비판적인 정치의식이 강하고, 기독교인은 상대적으로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며 변화를 추구하고 혁신을 추구하며 반정부적인 성향이 불교의 경우보다 강하다고 하겠다.35) 이 때 무종교인 은 대체로 중간적인 위치에 있다. 이것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과정에 있어서 불교와 기독교에서 보여준 태도의 현저한 차이에서도 나타난바 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의식 성향의 차이가 종교간의 갈등의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 상황의 결과로서의 의식성향의 차이로 인한 갈등은 비단 종교간에만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같은 개신교 안에서도 교파간에 의식성향은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즉 보수교단과 진보교단 사이의 신앙관의 현저한 차이가 정치, 경제, 사회 의식의 차이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보수교단일수록 정치, 경제, 사회의식이 보수적이고 진보교단일수록 그것이 진보적이어서 이들 교단 사이의 이념적, 그리고 행위적 태도에 있어서의 갈등과 대립은 심각하다.36) 이것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태도와 입장, 심지어는 통일 문제에 대한 시각에 있어서도 대립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다원주의 상황은 각 개인들 수준에서도 각기 다양한 신앙구조을 나타내게 만들었다. 즉 신앙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과 진보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정치, 경제, 사회의식이 현저하게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말이다. 신앙적 보수주의자들은 그 의식구조도 보수적이며, 신앙적 진보주의자들은 그 의식 구조도 진보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37)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교파들 간의, 그리고 개인들간의 대립적인 이념과 태도들이 한국에서는 양극화(polarization)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38) 매우 다양한 입장들이 있을 수 있겠으나 대체로 진보-보수 진영으로 이분화 되고 있고, 그 관계는 첨예한 긴장관계로 발전하고 있다는 데 그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 다원주의 상황은 한국 사회에서 심각한 종교간의, 교파간의, 교인간의 갈등과 긴장의 한 요인으로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하겠다. 바로 이 점이 Berger의 다원주의 모델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한국의 종교다원주의 상황인 것이다.
(2) 종교다원주의 상황의 기능과 역기능
종교 다원주의 상황은 분명히 개인적 수준과 사회적 수준에서 긍정적인 작용도 했고 부정적인 작용도 해 왔다고 하겠다. 한국의 종교 다원주의 상황은 분명히 베커가 지적했듯이 경쟁상황, 시장상황을 초래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분명히 경쟁적으로 고객을 유치하려는 각종 노력을 유발시켰고 그 결과 각 종교마다, 각 교파마다, 각 교회마다 교세확장에 도움을 주었다. 종교별로, 교단별로, 교회별로 신도를 확보하기 위한 온갖 전략과 계획, 수고와 노력이 있었고, 이것은 분명히 종교들의 성자에 기여했다.39)특히 매주일 정기적으로 모여서 상황을 점검할 수 있는 기독교의 경우 더욱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한국 개신교의 경우, 교단별로 경쟁적인 교세 확장에 전념했고, 교회별로도 비슷한 목표와 전략을 세워 교인 확보에 전념했다. 그리하여 교단별로 몇 년도까지 몇 신도, 몇 교회목표를 세워 이 목표달성을 위해 범 교단적으로 노력했는데, 예컨대 감리교의 경우 1984년까지 5천 교회1백만 신도의 확보를 1974년에 결의했고,89년 10월 총회에서는 2000년까지 7천교회 2백만 신도를 달성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마도 70년대 이후 한국교회들의 첫째가는 목회지침 내지 교회 표어는 전도, 선교였을 것이다. 그 결과는 양적 성장이었다. 비록80년대 중반 이후 그 성장률이 둔화되고 있기는 하지만 60년대 이후 교세가 급성장해 왔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종교와, 교파의 시장 상황에서는 또한 Berger의 용어대로 표준화와 주변적 분화가 있었다. 표준화와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종교간의 표준화로는 카톨릭이 한국어로 미사를 드리고 강론이 개신교 형태를 취하게 된 일, 개신교에서 종교의식과 건축양식이 카톨릭 식으로 변해가게 된일, 불교에서도 찬불가가 생겨나고 불경의 번역 작업이 활발해진 일, 그리고 흥미롭게 불교가 산에서 도시로 내려오는 한편 기독교는 산 속으로 크게 진출(기도원,수양관 등)하고 있는 현상들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한편 개신교 안에서의 표준화로는 적극적 사고방식, 물질적 축복 헌금 강요, 치유운동, 성령운동, 부흥성회, 산상기도회, 절기에 따른 대형 종교연합 집회, 총동원 주일 행사 등이 모두 유행이 되다시피 했다. 능력 있는 교회들은 교육관,수양관, 기도원 건립이 유행이 되었고, 해외 선교사 파송과 국내외 개척교회설립도 유행이 되었다. 벧엘,크로스웨이 성서연구도 전 교단들이 파급되었다. 특히 성공적으로 성장하는 교회의 전략과 목회지침이 모델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각 교단과 개체 교회는 자교파, 자교회의 특성을 내세우는 데도 신경을 썼다. 분명히 종교 다원주의 상황은 종교, 교파, 교회성장에 중요한 작용을 했다. 바로 이 점이 Berger 이론으로 설명될 수 없는 한국의 독특한 상황이라 하겠다. 또한 다원주의 상황은 개인 수준에서 종교적 선택의 폭을 넓힘으로써 사람들의 다양한 종교적 욕구를 다양한 형태로 충족시킬 수 있었다. 자율성에 의해 마음껏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종교 다원주의 상황이 초래한 역기능은 매우 심각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문제를 교회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기로 하자. 종교간의, 교파간의, 교회간의 갈등 상황에 대해서는 앞에서 상세히 지적한 바 있다. 그밖에 종교간의 교파간의 교회간의 지나친 경쟁은 무엇보다 성장 제일주의 의식을 심어주게 되었다. 교회성장 자체가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버려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는 목적천치(displacement of goal)현상이 나타나고 있다.40)교회 모든 에너지와 노력은 양적인 팽창에만 쏟아지고, 교회의 성공 척도는 철저하게 수량화된 결과를 가지고 평가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인 확보에만 전념하는 교회, 목회자들이 늘어났다. 그 결과 소위"복음의 상품화"라는 현상이 생겨나게 되었다.41)즉 복음을 원래의 의미대로 전하기보다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비성서적, 비신앙적 포장을 하고, 지나친 광고와 선전을 하면서 세상에 상품화하여 내어놓는 일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42)복음의 상품화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은 신앙의 기복화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의 목적을 단지 축복 받는 것(물질, 영혼, 건강)으로 가르치고 생각한다. 즉 복받기위한 수단이 믿음이 되어버린다. 헌금은 마치 커다란 이득을 약속하는 주식투자처럼 되여 버렸고, 교회는 건강을 보장받는 헬스클럽처럼 되어버린다. 뿐만 아니라 자교단,자교회의 상품의 우수성을 나타나기 위해 타교단,타교회의 상품화에 대해서는 온갖 중상과 비방까지도 서슴지 않는 일들을 교단들, 교회들이 자행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지나친 경쟁상황은 상호 불신과 적대감을 만들어내게 되는데, 이것은 종교간에 뿐만 아니라 교파간에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한 적대감은 물론 자기 우월주의적인 신앙태도에서 생겨나는 것이라 하겠다.
다원주의 상황 가운데서의 지나친 경쟁은 또한 무인가신학교의 난립을 초래하기도 했다.43) 교세확장에 전념하는 나머지 무자격 저질목회자를 양산하여 교회의 질적 수준이 저하되고 있다. 교인들을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하는 일들이 확산되고 있다. 심지어는 개체교회에서도 신학교를 설립하고 어떤 경우에는 교수도, 시설도, 책도 없이 상업주의에 입각해서 신학교를 세우기까지 한다. 이러한 무인가신학교들이 전국적으로 300개가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장 위주의 정책과 전도에만 모든 에너지를 쏟기 때문에 사회적 봉사나 희생은 무시된다.44) 사회적인 사랑과 의의 실천에는 무관심해지기 쉽다. 즉 사회적 책임의식의 마비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 구조는 또한 쉽사리 이분법적 사고를 갖게 만들어 양극화된 신앙 형태가 조성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종교 다원주의, 교파 다원주의, 교회 다원주의 상황은 교인들을 뿌리 없는 떠돌이 신앙인으로 만들기 쉽다. 즉 유행이나 취향에 따라 이 교파에서 저 교파로,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떠돌아다니는 얄팍한 신앙인 들이 증가된다. 이들은 이중, 삼중으로 교회에 등록하게 되고 따라서 교단별 교인수 통계를 크게 과장되게 만든다.45)
한국교회에는 Berger가 말한 대로 사회화 과정도 생겨나고 있는 것 같다. 즉 신앙의 문제가 사적인 일이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신앙이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개인신앙은 직장, 공동체, 사회생활이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단순한 개인 생활이 되어버렸다. Berger의 주장대로 한국에서도 종교나 신앙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라기보다는 가족 현상 혹은 경제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제도들 안에서의 행동에 특별히 적합하지 않은 사적 도덕의 문제가 되어버렸다.46) 예컨대 사업가나 정치가가 종교적으로 정당화된 가족 생활이 제 규범을 충실히 지킬 수 있지만, 동시에 공적인 영역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종교적 가치에 준하지 않고서도 자기의 활동을 적절하게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교회와 교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상황이라 하겠다.
(3) 다원주의 상황에 대한 교회의 대응
현대성에 대한 교회의 다양한 대응 가능성은 어떠한가? Berger는 이에 대하여 동화 혹은 굴복, 그리고 거부 혹은 퇴거의 두 가지 대응 방법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는 이 두 요소가 묘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한편으로는 현대성을 거부하고 성/속 이분법적 사고의 틀 안에서 "구원 방주"에 안주하기를 원하면서도(퇴거), 다른 한편으로는 돈, 명예, 권력, 건강과 같은 세속적인 가치를 철저히 추구하는(굴복)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지배적인 성향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되었듯이 비록 소수의 교회, 기독교인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이긴 하지만 한국교회의 상황에서는 제3의 대안, 곧 단순한 동화로서의 세속화도 아니요, 현대성에 대한 거부로서의 보수화도 아닌 변형의 한 힘으로서의 대응 입장이 있어 왔음을 알 수 있다.47) 때로는 자기 갱신을 통하여, 때로는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통하여, 사회적 관심과 책임 수행을 통하여 사회의 제반 구조 악에 대항하여 정의와 평등이 실현될 수 있게 하려는 교회적 노력도 있어 왔다. 비록 그 힘이 아직은 제한되어 있으나 1960년대 이후 양심적인 기독교인들에 의해 정치적 민주화, 경제적 평등화, 사회적 복지화를 통해 사회변형을 추구해 온 또하나의 대응 방식이 다원주의화된 한국의 사회상황, 교회상황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48)
이번에는 에큐메니즘의 문제를 살펴보자. Berger에 따르면 에큐메니즘은 종교 다원주의 상황에서 나타나는 표준화의 한 전형적인 양상이다. 에큐메니즘은 원래 "함께 모여"(drawing together) "함께 성장하는"(growing together) 단계들을 강조한다. 에큐메니즘을 통해서 독특한 교파들이 다양한 정도의 동조와 접촉 가운데서 서로 밀접하게 가까워진다. 에큐메니즘에 대하여는 단순히 옛 교파적 구분 혹은 경계선의 근거가 되었던 사회적 차이들의 약화로 인해 그것이 생겨난다고 보는 설명이 있다. 그러나 다른 설명은 교회들의 투쟁이 가장 심했을 때, 그들의 자원이 가장 적고 전통이 가장 약했던 교회생활의 영역 - 예를 들면 국내외 선교 - 에서 에큐메니즘은 생겨났고, 이것은 교회의 영향의 약화를 방지하는 하나의 방어수단이라는 것이다.49) 그리하여 Wilson은 "조직들은 강할 때보다는 약할 때에 합병한다. 왜냐하면 동맹은 신앙의 타협과 수정을 의미하기 대문"이라고 보면서 에큐메니즘은 제도적 힘의 약화와 관계 있다고 본다.50) 이것은 교세가 강한 교파일수록 에큐메니즘에는 미온적이라는 사실에서 뒷받침되고 있다. 한국에서의 에큐메니즘 상황은 어떠한가? 교회연합도 양극화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한국의 에큐메니즘의 독특한 양상이라 하겠다. 즉 진보적인 6개 교단들로 구성된 한국교회협의회(KNCC)와 보수교단들 연합체인 대한기독교협의회(DCC)와 한국예수교협의회(KCCC) 사이에는 첨예한 긴장과 대립이 있어서 갈등 상황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종류의 연합체는 신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문제들에 있어서도 상반된 입장을 강하게 표방함으로써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51)
마지막으로 유사종교, 대체종교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종교다원주의 상황은 단순히 다종교, 다교파, 다교회 상황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절대성을 상실한 종교들은 세속적 이데올로기들과도 경쟁을 치르게 된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과학주의, 인본주의 등이 종종 전통종교들을 대체하는 상황을 우리는 보게 된다. 특히 한국 상황에서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신봉자들이 전통종교 신봉자들에게 있어서 강력한 경쟁자가 되고 있다. 서로의 이념을 확산시키고 설득하려는 힘들이 부딪치며 다원주의 상황은 더욱더 복잡해지고 경쟁적이 된다. 이러한 경쟁관계에서의 대응책은 크게 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는 제휴관계로서 그 이념을 수용하여 종교신앙과 결합시키려는 태도요, 다른 하나는 철저하게 그 이념을 적대시하며 말살시켜 버리려는 태도이다.52) 이 두 가지 태도는 오늘날 진보와 보수 종교인들(특히 기독교인)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양극화된 긴장과 대립의 한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들뿐만 아니라 이제는 여가산업과도 같은 것들도 종교에 대한 일종의 기능적 대행물로 종교들과 경쟁하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즉 잘 발달된 유흥산업과 오락제도는 사람들에게 종교를 찾게 만드는 여러 심리적, 사회 심리적 동기들(예를 들면, 심리적 불안정, 박탈감, 소외감, 무력감 등)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게 되면서 많은 기능적 교인들을 종교로부터 빼앗아간다.53) 특히 주말과 휴가철에 그러한 제도는 교회의 강력한 경쟁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 종교 다원주의 상황은 단순히 기성종교, 교파, 교회들끼리의 공존, 경쟁 혹은 갈등상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체종교, 유사종교, 혹은 종교에 대한 기능적 대행 물들과도 공존 내지 경쟁하게 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
결론: 요약과 평가
Berger가 지적한 시장상황, 사회화, 표준화 등의 이론들은 한국의 종교 다원주의 상황에 대하여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론으로 설명될 수 없는 한국 사회와 종교의 여러 특징적 양상들이 논의되었다. 시장상황은 한국의 경우 더욱 복잡하여 다종교, 다교파가 공존하면서도 심한 긴장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종교간 교파간 교인간의 갈등은 단순히 신앙적 차이에서만 유래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구조의 차이, 태도와 행위에 있어서의 차이에서도 유래되고 있다는 것을 제시했다. 특히 보수와 진보의 양극화경향을 나타내면서 종교간에, 교파간에 심각한 갈등이 유발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한편 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 유래되는 여러 가지 개인적인, 사회적인 기능과 역기능의 문제들을 밝혔다. 종교적 자율성과 선택의 자유가 부여되고, 종교성장에 기여했던 것이 다원주의 상황에서의 경쟁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그러나 지나친 경쟁은 결국 종교간에, 교파간에, 교인들 간에 갈등과 대립을 유발시켰고, 이것은 특히 양극화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지나친 경쟁은 성장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거나 복음의 본질이 변질되거나 기복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다원주의 상황 가운데서 세속성에 대한 반응은 한국교회의 경우 거부와 동화의 대조적인 입장이 혼합되어 있으며, 한편으로는 제3의 입장, 곧 변형적 표준화의 한 방법으로서 에큐메니즘이 한국교회에서는 별 성과가 없어 보인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그리고 유사종교, 대체종교와도 경쟁하는 복잡한 다원주의 상황이 도래되어 이제는 이데올로기나 여가 산업들은 종교들에 대한 강력한 경쟁자가 되고 있다는 것이 논의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의 종교 다원주의 상황은 그 정도가 매우 심하나 법적으로, 외형적으로는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고 있고 자율성이 인정되고 있어 수많은 기성종교, 신흥종교, 교파들이 공존하는 융통성이 있으며 경쟁적인 종교 상황이다. 그러나 흔히 그것들 사이의 관계는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양상을 띠면서 화해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한국교회의 양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종교 다원주의 상황은 분명히 한국교회에 긍정적인 작용도 하고 부정적인 작용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겠는가? 우선 배타성과 우월주의 를 극복하여 타종교,타교파에 대해 적대감을 감소시키고, 갈등과 대립이 아닌 공존과 협조의 체제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나친 경쟁을 피함으로써 교회의 존재 근거가 흔들리고 상업화되는 교회제도, 기복화되는 신앙자세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하겠다. 한편 신앙 의식의 차이와 관계가 있는 정치 ,경제, 사회의식의 차이로 인한 양극화와 적대감을 극복하고, 이데올로기나 여가산업과 같은 대체종교들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는 저력을 배양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단순히 게토 화된 보수도 아니요, 세속화된 현실 타협도 아닌 사회변형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방안이 검토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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