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의 길, 民族의 길
30 / 60 Highway
-이무웅 著
초조한 마음으로, 빠른 걸음으로……
미국 Colorado, Springs에 있는 Adopt-People Clearhouse 본부의 스탭들이며 선교 잡지인 Paraclete Mission Perspectives의 편집인이고 저술가들인 Bill과 Amy Stearns이 최근 발간한 책인 CATCH THE VISION 2000의 첫장을 읽으면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21세기 새 시대에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는 이 책 서두에 2000연대로 진입하는 20세기 후미에서 어떤 역사의 변동 조짐(Something' Happening)이 우즈베키스탄과 한국의 연결고리(Uzbek and korea connection)로부터 나타나고 있다는 논제를 읽게되면서 역사인식에 대한 새로운 의식의 변화가 사고의 내면에서 강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21세기 초입에 들어서는 우리 시대에 있어서 지금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역사의 변동 조짐이 극동의 작은 나라 한국과 철의 장막에 묻혀 있던 중앙아세아의 신생국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기이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외국 선교학자가 역사의 객관성을 가지고 관찰해 온 역사변동의 어떤 조짐을 그 역사의 현장에 존재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에게 일깨워준 사실이 고맙게 마음에 와 닿음으로 인식의 변화가 시작되었고 우리 민족이 의식해야 할 역사의 방향 설정에 일역을 담당해야 할 사명감이 생성되어 이 글을 쓰기에 주저할 수 없었다. 또한 우리에게 설정된 역사의 현 위치가 예사롭지 않음을 깨닫게 되자 마음이 바빠지기도 했다.
고난과 슬픔으로 영걸어진 우리 민족의 한, 그리고 그 수난의 연속적인 민족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결코 그것은 돌아보고 싶지 않은 우리들의 슬픈 과거로서의 아픈 역사만이 아니었다. 그 역사에는 우리 민족을 선택하신 전능자의 계획과 그 계획의 범주안에 준비되어진 사랑과 징계와 시련, 그리고 보응으로 엮어진 그의 예정이 마련되어 있었고 우리 민족이 유대 민족 같이 선택된 종족으로 역사의 중심에 존재하고 있음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 예정된 역사의 진행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에 이어지는 연결 고리가 필연적인 역사의 사건임을 확인해 보기 위해 그 회교의 나라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을 향해 나는 빠른 발길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글을 써야만 했다.
1. 역사가 달리는 大路 - 30/60 Highway
미국에서는 Non-Stop으로 달리는 고속도로를 Free Way라고 하고 준 고속도로로서 가끔 신호 대기도 받아야 하는 도로를 High Way라고 한다. 역사의 진행은 빠른 속도로 달려가지만 꼭 Non-Stop은 아니었으므로 역사가 진행해 나가는 길을 High Way로 가정해 본다. 역사의 진행은 때로 장애가 있어 머물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정지 상태도 있었으나 인류와 더불어 세월이라 일컫는 시간의 순환 속으로 역사는 빠르게 진행되어 왔다.
이 인류의 역사는 진행하는 길이 있다. 그 길은 북위 60도와 30도 사이, 그 틈새에 생기는 지구의 공간을 서쪽방향으로 진행시켜 보면 지구를 순환하는 대로가 된다. 이 지형학적 설정을 전제로 발전되어지는 역사의 진행이 인류가 종착을 향해 달리는 대로가 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기독교 역사를 축으로 하여 진행되어 왔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시작되는 역사(HISTOY)를 관리할 성령을 세상 쪽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교회 중심으로 보내셨기 때문에 이 기독교 역사라 함은 교회사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한 것이고 그 사건들이 실증적으로 곧 인류의 역사가 되어온 사실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죤 칼빈(John Calvin)이 정의한 바와 같이 역사란 창조이래 계속해서 세상을 주관해 온 하나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영을 통해 그분 자신의 계획대로 다스려 온 모든 활동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고(행 1:6∼7), 역사는 하나님의 통제하에 있기 때문에 그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계 22:13), 하나님 자신의 의지로 모든 일을 수행하고 계신다(엡 1:11)는 것과, 그리고 그는 역사의 모든 계획과 목적을 갖고 계신다(롬 9:11, 행 15:14, 롬 11:25, 엡 5:25∼27)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세계사 교과서의 부록 "동서양의 연표"를 펼쳐 놓고 지구본을 돌려보면서 연표에 기록된 인류 역사의 사건들을 자세히 비교해 보면 그 역사의 모든 진행이 지구본에 그려진 북위 30도와 60도 사이에서 이루어져 왔음을 발견하게 되고 그 부분이 지구를 횡적으로 옮겨가는 한 큰길(大路)이 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구약 시대는 북위 10도와 40도에서 역사의 중심 배경을 이루고 있었는데 반해 예수의 시대 이후 즉 기원 이후의 역사는 바울 사도의 2차 전도 여행에서 체험한 마게도니아(Macedonia) 환상사건으로부터(행 16장) 그 역사의 길이 약간 북상하게 되어 30도와 60도 내에서 새로운 길이 펼쳐지게 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사의 진행에는 장애물이나 방해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30 / 60 역사의 대로를 따라 전진해 가는 역사 진행의 선두에는 언제나 역사의 견인 역을 담당했던 복음 전수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영과 늘 함께 했으므로 이 대로상에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역사의 진행을 방해하는 무리들이 항상 앞과 뒤에서 필사적으로 이 역사 진행을 방해해 왔었다. 지난 수세기 동안 역사의 대로상에서 발생했던 이 방해꾼들의 만행과 그 야만적인 행위를 살펴봄으로 이 30 / 60 대로가 복음이 앞서 가는 역사의 진행로임을 더 확실하게 인정하게 된다. 지난 20세기를 지나오는 동안 가장 반 그리스도(Anti-Christ)적인 세력이 사회와 경제와 문화와 과학 그리고 인간의 감성조차도 단일화시켜 정치적인 권력 집단의 지배하에 묶어 놓고 역사의 상당 부분에 사악한 지배자로 나타난 공산주의의 원조인 전체주의(Totalitarianism)의 제창자와 악명 높은 그 추종자 집단들이었다는 사실과, 이들 모두가 이 역사의 대로에서 인류의 수많은 생명을 무참히 앗아갔고 지구의 절반 이상을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으로 몰아 넣었던 장본인들이었다는 엄연한 사실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고 이 사건들 모두가 30 / 60 역사의 대로(30 / 60 Highway)상에서 발생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 소련의 스탈린(Joseph Stalin 1879∼1953), 중국의 모택동(Mao Zedong 1893∼1976), 이태리의 뭇소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 시리아의 앗사드(Hafez al-assad 1928∼), 이란의 훗세인(Sadam Hussein 1937∼), 그리고 북한의 김일성(1912∼1994)들은 역사의 악명 높은 반 그리스도적인 7인방으로 모두가 30 / 60 역사의 대로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그들이 학살한 인물이 얼마며 그들에 의해 피를 흘려야 했던 사람들이 지구상에 얼마였는지 지난 역사의 기록은 분명하게 밝혀 놓고 있다. 그들에게 핍박당하며 그들의 이념운동에 희생된 기독교인들이 또 얼마인가? 그들의 나라, 그들이 존재했던 지역이 모두가 30 / 60 역사의 대로상에 자리잡고 있으며 여기에서 그들 모두가 역사의 진행을 방해해 왔고 지금까지 역사의 전 후면에서 그 잔여세력이나 새로운 반 그리스도적인 무리들이 계속 역사의 진행을 방해하고 있다는 현실을 이해할 수 있다면 30 / 60 역사의 대로를 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역사의 대로를 따라 복음이 앞서 전해져 나갔고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인간과 국가와 문화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어느 곳에서나 경제는 부흥되었고 국가는 부강해졌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복음이 전해짐으로 부강해진 나라들은 인류 역사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선진국으로 발전되었고 선진국이 된 그 민족과 나라는 늘 역사를 주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 역사의 대로를 따라서 세계의 역사를 주도하는 민족의 변화와 이동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세계를 움직이는 힘의 이동이 있었고 문화와 경제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누리는 삶의 질이 단계별로 발전되어 왔다는 사실이 우리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실이다.
2. 물과 땅 사이로 새 시대를 열고……
서기(西紀)로 표현되는 기원 이후 인류의 역사는 예수의 출현 이후 시대를 말하고 그 기원 이후가 모두 주의 해(Anno Domini-Year of Lord)라고 표기하는 AD와 그 이전 시대를 예수 이전의 해(Before Christ-BC)라고 표현하는 BC를 역사의 기원점으로 인정한다면 역사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여 시작되어지고 또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결론을 얻기 위해 기독교 교회사나 영적 운동사를 일반 인류 역사에 비교하면서 자세히 살펴보면 쉽게 수긍하게 된다. 독재자의 고함소리가 한 시대를 호령하다가 일시에 사라지고 세계를 주름잡던 한 강대국의 위력도 때가 되면 세월의 뒷길로 밀려나고 마는, 무수한 변화의 연속이 역사의 무대에서는 한 민족이나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한시적이지만 기독교의 복음운동은 시대 끝, 땅끝까지 지속되면서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기독교의 선교사역은 역사 현장에 나타났던 많은 위인들이나 국가들의 존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유유히 역사의 앞으로 전진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은 인류에게 기원의 분기점을 만들어 놓았고 그는 역사의 시작과 마지막을 위한 시대구분과 그의 활동 방향을 중심으로 하여 지구상에 동과 서의 지형학적인 위치 설정도 분명하게 해 놓았다. 역사에 있어서 예수의 출현으로 시작된 기독교는 외계에서 인류에게 보낸 하나님의 비밀스런 선물이었고 기독교 그 자체는 하나님의 새 창조를 위한 사역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본래의 계획 속에 있었던 역사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사역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예수로 시작하여 성령의 실행으로 그 진행 방향이 분명히 설정되어지지만 이 성령 역사의 진행은 지구상의 제한된 통로를 통해 이루어 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위 30도 위와 60도 아래에 생겨나는 공간이 제한된 역사의 통로이며 대로(大路)가 되는 것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류들이 진행시켜온 그 역사 발전은 위도상으로 북위 30도와 60도 사이에 생기는 틈새 내에서 형성되어 왔고 이 지역은 역사의 중심 무대였으며 이 지역을 벗어나서는 주연으로서나 조연으로서 역사의 본 무대에 등장할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의 출현을 기점으로 하여 인류 역사의 중심(The Midpoint of History)이 세워지지만 그의 지상 생애 이후에 역사의 진행 방향은 바울 사도의 마게도니아 환상 사건(행 16장) 이후에 더 확실하게 설정되어진다.
㈎ 말구유의 울음소리- HisStory(AD 1-100)
일반적인 상식으로 역사를 함축시켜 정의하면 역사란 인류가 겪어온 사건들의 기록들이고 또 한 시대를 살고 간 인류들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영어 표기로 역사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행적과 그의 사역에 대한 연속적인 기록임을 뜻하고 있다. 유대 땅 베들레헴, 한 말구유에서 출생한 예수의 이야기는 그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사건이나 부활 사건 이후 인류의 중심에 서서 지금까지 연속적으로 행하고 있는 그분 자신의 모든 사역에 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역사(History)는 그분만의 이야기(His Story)로서 인류 모두가 그 사실을 인정하며 그분을 따라 그분의 사역에 참여하여 이야기(Story)를 꾸며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유대 땅 한 작은 고을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인류의 새로운 기원을 만들었고 그 울음소리 뒤로 2000년 동안 우리는 그가 영으로 사역하는 현장의 이야기를 역사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초기 역사시대는 성경의 현장 시대라 할 수 있다. 갈릴리 호숫가에 서 계시던 예수가 모여든 군중들에게 하늘의 소식을 설파하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 보이셨던 일이나, 실로암 연못가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예수의 이적이나 베다니의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예수의 행적들이 모든 군중들에게 메시야의 환상을 현실화시켜 주었던 소망의 시대이기도 했다.
로마의 압제하에서 고난의 삶을 살아온 그들의 한을 씻어줄 구세주의 도래를 고대하던 그들에게 예수는 그들의 메시야로서 소망을 충족시켜 주는 듯 했지만 잠시 후 그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해 한없이 실망한 시대였고 또 부활의 기적을 체험함으로 인해 그들은 새로운 소망을 지니게 되었으며 예수의 승천 후 재림을 열망하는 기다림이 그들의 체질이 되어버린 기다림의 시대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인 사도들에 의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류를 구속할 대속주로 소개되어지며 새로운 역사의 진행을 견인하는 많은 노력들이 팔레스타인 전역에 확장되어 간 사도시대였고 바울과 베드로에 의해 지중해를 건너 로마시대를 열어 가는 확실한 성경의 현장시대였었다.
㈏ 지중해에 배 띄운 로마시대(AD 100-400)
예수님 자신의 지상사역 시대 이후 사도시대를 거치면서 지중해 연안에서 시작된 기독교 복음 운동은 바로 인류 역사의 새로운 기원을 만들었고 팔레스타인(Palestine) 지역에서 사도들의 활동은 예루살렘을 중심한 교회시대를 열었지만 유대인적인 우월감(행 21:20)과 선민의 타성에 젖어 있던 예루살렘 교인들의; 복음 전수 사명에 대한 의무 불이행으로 인해 잠시 역사의 진행은 중단되었으나 부득이 하나님 자신의 선교 계획과 자신의 직접적인 역사 관리로 유대인 시대를 마감시키고 안디옥 교회를 중심한 바울 사도의 이방 선교를 시작으로 지중해를 중심한 새로운 로마시대를 열게 했다. 한 세기가 걸린 시간들이었다. 인류의 운명선이 된 동과 서의 갈림길이 되었던 바울 사도의 마게도니아 환상 사건은 그로 동쪽 - 비두니아로 향하려던 개인적인 의지를 접게 하고 하나님 자신의 계획에 따르게 한 강한 싸인(Sign)이었다.
그 환상의 사건은 서쪽으로 향하게 한 역사 진행의 방향 설정이었고 그로 인해 기독교 복음이 인류 역사와 삶의 질을 동과 서로 차등화시켜 놓았으며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선교는 늘 축복의 시대를 예고하는 복음으로서 풍요롭고 질 높은 삶을 보장하는 창조주의 새로운 암시가 되어왔었다.
바울 사도에 의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정복된 로마는 예고된 대로 찬란한 로마의 영광을 창출했다. 기독교 국가가 된 로마는 지중해 연안의 초강대국으로 발전되어 갔고 세계로의 문화, 경제, 과학, 교통의 중심지로서 위대한 로마제국의 화려한 위상을 세워나가고 있었다. 1세기를 거치면서 확산된 기독교는 4세기에 이르기까지 400% 이상의 부흥을 가져왔고 결국 로마는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e the Great AD 274-337)의 개종 이후 기독교 국가로서 화려하게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때 로마 제국은 성경을 라틴어 번역으로 완간하였으며 로마 제국의 주변 종족들의 언어로도 성경을 출간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공헌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도 이 창조주 하나님의 축복을 이웃에게 전해야(행 1:8)하는 복음 전수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견인할 복음 전수자로 개척자적인 능력을 발휘치 못했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비참했던 역사적인 우를 상기치 못한 미련함이 또 다시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교방법으로 역사를 진행시키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역사의 전면에는 항상 복음 전수자들의 사역이 선행되어 왔으며 선교가 선행되지 않는 민족이나 국가들에게는 늘 하나님 자신의 방법으로 선교사역이 시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은 항상 흩어지며 깨어지는 아픔 속에서 창조주를 기억하며 부르짖게 하는 자신의 선교방법을 이용하셨다.
㈐ 대서양의 해적-바이킹 시대(AD 400-1600)
기독교 국가로서 여사의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던 지중해 연안의 대로마제국이 4반세기의 영화와 축복을 누리면서 로마의 교회들은 예언자적(Prophetic)인 통찰력 없이 예루살렘 교회의 실패한 전철을 밟으면서 제사적(Priestic)인 종교에 메여 전진해야 하는 복음의 전수자적인 노력을 하지 못했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두 특성인 제사장적인 권위와 예언자적인 역사의 통찰력을 잘 조화시켜 교회의 사명을 양극으로 실행치 못하고 제사장적인 권위만 즐기며 현실에 안주한 로마 교회가 복음을 전수해야 하는 선교자적 사명을 도외시함으로 역사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역견인할 복음 전수자로 개척자적인 능력을 발휘치 못했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역사는 축복을 향유하게 되지만 그 축복을 분배할 줄 모르는 민족이나 국가들은 항상 그 축복을 강탈당했다. 로마가 그들의 축복을 축적(Blessing Holding)시키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야만 부족들(The Gothic, Celtic Tribes)을 풀어 놓으셨다.
로마가 패망하여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역사의 과정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이 그의 부탁(행 1:8)을 외면하는 국가와 민족들에게 어김없이 시행하시는 역사 운영과 그 관리 방법에 의한 것이다. 이 하나님의 역사 운영 방법은 영구히 동일한 방법이며 하나의 단순한 원칙이다. 전진하는 역사, 즉 예언자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복음을 전수하는 사명을 다하는 민족으로 하여금 역사의 주역으로 머물게 하는 하나님의 단순한 계획이며, 그의 부탁을 거절하는 자들을 역사의 무대에서 무참히 퇴장시키는 확실한 방침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예수께서 지상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탁한 마지막 유언이었던 것이기도 한 조건부 명령이며 간절한 요청이기도 한 것이다.
로마의 멸망은 한 거대한 힘에 의해서가 아니었고 부초같이 떠돌던 해적들과 뿌리 없는 유랑민족인 앵글로색슨족과 게르만 민족 그리고 훈족들에 의해서였다. 이들에게 하나님 자신의 사역으로 인해 복음이 전수되는 과정과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이 역사의 주역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드라마틱한 역사의 과정을 하나님의 역사 운영 원칙에 근거하여 자세히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대로마제국의 멸망은 로마 시민의 권위를 완전히 추락시켰고 황족의 권위나 귀족의 영화가 한낱 전설로 남게 했을 뿐이다.
귀족의 부녀자들이 해적들이나 유목민들의 몸종으로 끌려가서 일생을 종으로 살아가야 했던 그들은 옛 영화를 그리워하며 새롭게 그들의 주를 찾기 시작했고 그들이 부르짖는 기도소리는 무식하고 거칠었던 해적들의 가슴속에 복음으로 전해지기 시작했었다. 그때로부터 대서양을 중심한 구라파 지역에는 로마에서 몸종이나 애첩으로 끌려간 여성들에 의해 소위 기독교의 진리인 복음이 야만민족의 문화 속으로 스며들어가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경이 History of the Glory of the Gospel이란 그의 저서에서 표명했듯이 "개척자인 복음의 기수들을 대신하여 연약한 여인들로 인해 언약된 축복이 250년을 통하여 야만적인 우리 민족들에게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런 경로로 영국을 위시한 구라파의 기독교 국가들은 역사에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해적을 조상으로 둔 영국의 앵글로색슨족이 인류의 일등국민으로 세계의 신사가 되어지는 역사적인 과정을 어떻게 더 드라마틱하게 기술할 수 있을까? 기독교 역사에 묻혀 있는 이 나라들, 그들은 새로운 문화나 경제 발전 그리고 과학 문명의 극대한 발전을 가져왔고 축복의 세기(世紀)를 이루어 나갔다. 오랜 기간을 통해 이들은 역사의 주역으로 세계를 다스려옴으로 영국은 비록 작은 섬나라이지만 자국이 지배하는 영토에 해가 지지 않는 거대한 발전을 이루어 놓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으로 선조들의 예언자적인 삶을 망각한 그들의 후예들이 기독교를 박해하는 하나님에 대한 범행과 종교지도자들의 부패로 인하여 종교혁명이 일어났고 사회혼란에 이어 세계 제1차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역사 진행에 있어서 그 관리를 위탁받은 민족이 교만하여져서 역사의 진행 궤도를 이탈할 때 늘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별도로 세우셨고 스스로 역사의 진행을 관리해 왔다.
이 무렵 신앙의 박해로부터 피할 수밖에 없었으며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땅 끝까지 복음 전수의 의무를 다함으로 역사의 견인역을 지상에서의 극대한 책임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소수의 청교도들(102명)이 메이 플라워(May Flower)호의 작은 배에 생명을 의탁하고 대서양을 건넜다. 대서양을 건너 미지의 세계, 새로운 땅 북미 대륙에서 새로운 역사 창출을 위해 모험을 감행했었다.
㈑ 인류의 부권적인 권위의 나라-미국 시대(AD 1600-1900)
미국의 부와 힘의 생성 과정을 과학이나 수학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다. 그 국가 역사가 200여년에 불과한 미국이 세계의 주인이 된 그 과정을 경제학이나 물리학적인 어떤 원칙에 적응해서 규명할 방법이 있을 수 없다. 노벨상 수상자인 한 과학자가 "어느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이 오늘날 미국을 만들어 놓았다"고 말한 간증이 가장 적절한 해답이 될 것이다.
영국에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고향을 등진 소수 퓨리탄(Puritan)들이 역사 진행의 전면에서 복음 전수자로 죽음이나 어떤 고난의 길도 감수하면서 역사의 견인역을 감당했던 정신이 후대에 이어져 "우리 시대에 복음을 땅 끝까지"라는 삶의 목표를 설정한 18세기 유수한 미국 젊은이들의 예언자적이며 개척자적인 정신은 그들 자신들에게 보장된 지상의 부귀와 출세를 외면하고 세계의 오지로 떠나게 했으며 박해와 죽음에 대한 위험이 도처에 잠재해 있었으나 순교자로 증인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어디든지 주저 없이 떠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일들이 미국 역사를 견인해 갔으며 미국과 미국 민족은 약속된 축복을 향유할 수 있었다.
또한 예언자적인 통찰력을 가진 미국 교회와 사역자, 그리고 교인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그들이 향유한 축복을 축적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분배하였으며 역사의 진행 전면에서 늘 희생을 감수하는 순교자적인 정신을 발휘하며 지상 어디서나 고난받는 민족과 국가를 도우며 지내왔다.
이런 미국 국민과 국가에게 하나님은 조건 없이 복을 주셨고 도저히 수치로 계산할 수 없는 풍요와 세계를 지배할 능력을 주신 것이었다. 인류의 지난 역사와 미국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역사의 참된 뜻을 이해하는 것은 지난날들의 사건들이나 기록된 변화의 과정을 알게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계획과 그가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고 그 일을 실행해 가는 일이 지상에서 가장 복받는 일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 그의 위대한 모든 것을 기대하며 보든 것을 바치자고 부르짖었던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 8/17. 1761-6/9. 1834)로부터 영향을 받은 미국 교인들이 1800년대에 서부 아프리카로 향하는 선교 대열에 줄을 이었고 여성 선교나 각 기능별 선교기관이 세계를 향해 각기 나름대로의 계획과 방법을 모색하여 역사의 전면에서 복음 전수자로서의 사명을 다함으로 역사 진행의 강한 견인력을 지니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미국은 명실공히 세계의 주인으로 그 위상을 세워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눈부시게 발전한 미국의 신세대들은 이 선조들의 삶이 순교자적인 증인의 삶을 다함으로 얻어진 축복의 근원을 잊어가고 있었고 환락과 인간의 감성적 희락을 추구하면서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선조들의 삶의 바탕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미국의 영광은 시들어져 갔으며 그들의 국력은 점차적으로 쇠퇴해 가고 있다.
세계의 경찰로, 세계의 곡창으로 온 인류의 부권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던 미국이 가는 곳마다 낭패를 당하고 수치를 당하고 있으며 20세기에 이르러 세계 제1의 부채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미국이 석양의 노을같이 세월의 뒷길로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은 그들이 역사의 진행에 복음 전수자로서의 책임을 기피하고 있고 그들의 뇌리에 진정한 역사 인식이 결여되러 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교회의 예언자적인 신앙의 기초가 부실하며 역사의 진행 전면에 희생적으로 증인의 삶을 살아갈 복음 전수자들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이제 새로운 선교 계획을 세우기 위해 지금까지 그들에게 도움을 주셨던 그 보이지 않는 손길을 서서히 옮겨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할 시기이다.
㈒ 석양의 땅, 노을진 고을들
기원(起源)의 근원(根源)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역사는 지구를 지형적으로 구분하여 그 시대를 명명(命名)할 수 있다. 예수 자신의 활동과 사도들의 활동 무대였던 팔레스타인(Palestine)을 중심으로 한 성경의 현장 시대로부터 지중해를 건너 새로운 세계로 인식되었던 로마의 제국시대, 그리고 대서양을 바라보는 거대한 집단 유럽Europe)이 다민족 식민시대를 열었고 태평양을 안고 편하게 누운 미국은 한낮의 태양같이 정열적인 아메리칸 시대를 이끌어 나갔다.
이제 히말라야 산맥, 에베레스트(Mt.Everest)의 만년설을 바라보며 아시아 대륙에는 낙조가 물들여 놓은 노을진 고을들이 일몰의 운명을 기다리듯 마지막 시대 즉, 재림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세계의 지붕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해가 지면 새로이 솟아날 대양(大洋)이 없는 땅, 아시아 대륙 이곳에서 지구를 완전히 순회한 세월의 윤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예언에 부응하는 재림의 시대로 진입하게 된다.
30도와 60도 대로(大路)를 따라 달려온 인류의 역사 진행은 하나님의 계획과 사역에 있어서 이 노을진 고을이 마지막 땅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숨결이 쉬면 끝이 나는 것이 역사라고 정의된 것 같이 이 역사의 마지막 해지는 곳이 더 나아갈 길과 대양이 없는 아시아 대륙, 마지막 시대의 땅 끝이 되는 것이다(마 24:14).
30도와 60도 대로에 존재하는 아시아 대륙의 국가들은 24개국으로서 인구는 약 20억이 된다(93년3월 자료). 이 24개의 국가들과 더불어 마지막을 장식해야 하는 역사의 사명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이 대륙은 공산주의와 회교국가들이 양분하는 두 이념의 땅들이다. 이 거대한 아시아 대륙 24개의 국가군(群)과 각기 다른 민족들이 운집해 있는 석양의 땅 거대한 대륙의 동쪽 모서리(Conerstone)에 붙어 있는 작은 나라 한국(Korea)은 두 이념 국가군에서 완전히 색채를 달리하는 유일한 자유민주국가로서 작은 불꽃이 되어 때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은 유일한 복음주의적인 기독교 국가로서 역사의 마무리를 위해 예수의 재림을 준비하는 민족으로 남아 있으며 또 이 국가군에서 가장 축복받은 나라로서 풍요를 누리며 사는 아시아 대륙의 최고의 경제 부국이다. 이 현실은 우리 국가가 21세기를 주도해야 하는 위치에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우리 국가와 민족은 이 역사적인 상황을 바로 인식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의 책임을 성실하게 이행해야 할 것이다.
3. 역사의 무대, 그 현장의 주역들……
미국의 한 선교학자는 1930년대 소련의 철권통치자였던 요셉 스탈린(Josept Staline)이 일본의 압제를 피해 원동(블라디보스토크)에 이주해 살고 있던 한국인들을 어느 날 예고 없이 구 소련, 중앙아시아 지방인 5개 지역에 강제 이주시켰던 비상식적인 역사의 사건을 전제하면서 지난 1500여년 동안 서방 기독교인들의 선교 노력을 지금까지 거부해온 중앙아시아의 중심 우즈베키스탄국의 수도인 타슈겐에서 지금 한국인들로 하여금 회교권의 담장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역사적인 이변(Something's happening)이 일어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1992년도 소련의 붕괴와 이데올로기적 이념 사회의 종식으로 새로운 모습을 나타내게 된 구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우즈베키스탄국에는 한국인들 스스로 미쳐 몰랐던 20만의 고려인(한국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1992년 이후 한국 교회의 공격적인 선교로 한인 사회에 많은 교회들이 설립되었고 2,500만 우즈베키스탄(Uzbekistan) 국민들과 그들의 문화권에서 동화되어 살아온 고려인들이 이제 새로운 정체성(Identity)을 제시하며 중앙아시아의 신생 독립국에서 소수 민족으로 그 위상을 견고하게 세우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들이 세계 여러 나라에 소개되어지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난 십수세기를 거치면서 서방 국가들과 교회들이 부단히 노력해온 복음 사역을 필사적으로 거부해 온 이 우즈백 민족들이 고려인들의 강한 내적 흡인력으로 한인(고려인) 사회를 통해 침투해 들어오는 기독교 신앙 운동을 차단하지 못하고 그들의 회교권 문화가 잠식되기 시작하는 사회적인 변화를 우즈백 국민들이 별 저항 없이 방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방세계에서는 역사의 새로운 변동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외국 선교학자가 경이롭게 언급한 21세기 역사의 이변에 우리 민족이 그 주역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을 감동하기 전에 우리 민족의 슬픈 과거 역사와 수난적인 민족사의 아픔을 재음미해 보아야 하며 역사 이면에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그분 자신의 사역에 대한 계획을 역사적인 의미에서 좀 더 면밀히 연구하고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민족의 지난 역사를 면밀히 살펴보면서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역사의 과정을 분석해볼 때 과거로부터 현실에 이르기까지 그 흐름으로 보아 이 역사는 단순한 우리 민족에 국한된 역사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 역사의 진행 과정은 하나님의 계획된 역사 운영의 한 부분이며 그분의 섬세한 계획 속에 우리 민족을 사용하시기 위한 강한 의지가 베여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게 된다.
그 하나님 자신의 예정된 역사 계획은 1990년 2월 미국에서 온 한 젊은 한국인 목사에 의해 확인되었는데 소련이 붕괴된 후 오랫동안 세월의 장막에 가리워져 온 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이 한인 목사에 의해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고 한인(고려인)들의 강한 흡인력으로 놀라운 교회 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The Uzbek-Korean Connection
The first public sign of the Korean revival and its breakthrough effects on the Uzbeck and Kazakhs came on June 2.1990, when in the first open-air Christian meeting in the history of Central Asia, a young Korean from America preached to a swelling crowed in the streets of Alma Ata, capital of Kazahstan. The village elder had been one of the first in that crowed to confess to his fellow Muslims that, as the kind, trustworthy Koreans were saying,
"Isa is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CATCH THE VISION 2000
13page 13행에서
뿐만 아니라 회교 신앙권인 원주민들의 반대나 모슬렘 광신도들의 저항 없이 그리스도가 증거되어지는 자리에서 한 한국 노인이 예수(Isa)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고백하는 감격적인 순간이 있음으로 해서 이런 한국인인 고려인들을 통하여 복음이 이웃나라 우즈베키스탄이나 길기스탄 등 많은 인근 나라로 복음이 확산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사가 진행하는 과정에서는 그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을 볼 수 있다. 2000여년의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많은 주역이나 배역들 중에는 하나님의 뜻에 순응한 국가들과 민족들이 있었는가 하면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며 대적하는 삶을 살다 간 위인이나 종족들이 있었다. 후대의 역사가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은 이들이 살고 간 삶의 모양과 그 결과를 연구하여 확실한 역사의 자료들로 삼았다. 이 기록들이 모아져서 또한 역사라는 우리들의 교과서들이 꾸며지고 있다.
이제 새롭게 시작될 21세기 역사의 무대에서 주역으로 등장할 새 인물은 누구일까? 그리고 지난 한 세기 동안 역사의 무대에서 주역과 조연을 맡았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 가룟 유다의 후예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 필요 불가결한 인물이 준비되어 있어야만 했었다. 유다가 스승인 예수를 배신하고 은 30냥에 팔아 넘김으로 인하여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그리스도의 구속사적인 지상 사역이 완성되었다.
30도와 60도(30/60 Highway) 사이에 펼쳐진 역사의 순환 대로에서 한 시대에 따른 역사의 마무리 현장에는 어느 나라나 민족의 마지막 사명과 그 완성을 위해 준비된 가룟 유다의 후예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나님 자신의 역사 관리 방법에는 빈틈이 없으며 늘 그의 예정에 의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어 왔음을 세월의 후미에서 발견하고 감격하게 된다.
이 마지막 땅, 아시아 대륙에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이며 그분의 계획은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어디까지 실행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 민족이 분명히 확인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문제이고 우리가 확실히 인식해야 할 역사적인 과제인 것이다.
⑴ 불모지에 모를 심는 악독한 농군
요셉 스탈린(1879-1953)
그는 Gori(지금의 Georgia) 출신의 기독교인으로서 어릴 적에는 교회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며 성장하여 신학교(Tbillsi Theological Seminar)에서 신학을 전공하였다. 가룟 유다가 그랬듯이 그는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었으며 그는 목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가 신(神)을 부정하고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의 총수로서 소련의 절대 권력자가 되기에는 많은 내면적인 갈등과 변화가 있었겠지만 역사의 한 맥을 휘어잡고 역사의 통로에 걸터앉아 역사의 진행을 방해한 그는 한 시대의 거인으로, 영원히 역사의 무대에서 악역을 맡은 조연자로서 악명을 높이고 간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런 위인을 이용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기로 작정한 그에게 어떤 바른 역사 인식이 있었을 리 만무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발병한 정신질환적인 그의 행위는 한국인 강제 이주라는 비상식적인 기행을 저지름으로 한국인의 가슴에 한을 심어 놓았고 한국 민족의 가슴에 통한으로 새겨져 있는 수난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가해자로 남게 되었다.
1930년 9월, 일본의 압제를 피해 원동(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지역)으로 피난해서 살고 있던 우리 민족들에게 소련이 개발한 핵무기 비밀유출 혐의에 대한 누명을 씌워 예고 없이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시킨 사건은 참으로 정신질환적인 스탈린의 광적인 행태가 아닐 수 없었다. 7일 이내에 한 세대당 25㎏으로 제한된 짐을 가지고 시베리아행 열차(군용)를 타고 떠나라는 절대권력자의 명령이 미비한 통신시설로 잘 전달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몰려온 러시아 군사들에 의해 옷 한벌, 이불 한 채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시베리아행 열차에 실려 불모의 땅에 끌려가 쓰레기같이 내버려진 강제 유배는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한 참극이었다. 엄동설한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강제로 군용열차에 실려 시베리아 벌판으로 유배당한 20만 우리 선조들이 내버려진 동토에서 땅굴을 만들어 한파를 피했으며 적토에 묻힌 칡뿌리를 캐내어 허기진 배를 채우고 추위와 허기에 죽어 가는 부모와 자식들의 시신을 붙들고 통곡하며 밤을 세웠던 그 가련한 참상을 어떻게 인간으로 상상할 수 있으며 필설로 표현할 수 있을까?
소수민족의 순박한 한인 집단을 핵무기 비밀 누출 혐의를 씌워 유배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하나님의 세심한 역사 관리와 정교한 계획을 세월 이전에 누가 감히 알 수 있었겠는가? 지금에 와서 그때 스탈린을 이용하여 시행한 하나님 자신의 계획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자각과 인식을 새롭게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늘 주관자의 예정된 계획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세월이 지난 후에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된다.
이 마지막 땅에 예정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일까? 또 이 마지막 역사 관리를 누구에게 위탁할 것인가?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민족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음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그 해답을 시급히 찾아 바로 인식해야 할 위치에 있는 것이다. 요셉 스탈린은 불모지, 그 황량한 땅에 우리 민족으로 역사의 모종을 심어 놓았다.
미국 학자는 지금 UZBECK-KOREAN CONNECTION(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연결고리)이란 제목으로 이 시대에 무엇인가 큰 역사적 사건이 발생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음을 예시하고 있다. 이것은 스탈린에 의해 역사 이전에 행해지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진행되어 온 역사의 연속으로서 그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1800년 이상 서방세계의 교회들이 중앙아시아 복음화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소련이 붕괴되는 시점에서도 전혀 복음 전수 노력에 대한 결과가 없었다. 반면에 기독교 역사 100여년의 한국 교회가 큰 노력 없이 강하게 침투할 수 있었던 사실은 스탈린에 의해 이미 뿌려놓은 우리 민족들로 하여금 강한 내적인 흡인력이 있었고 우리 민족만이 지난 60년간 회교권에 동화되지 않고 그 순수한 인성(人性)을 보존해 왔기 때문이다. 이 역사의 진행을 현실적으로 직시할 수 있는 체험의 바탕 위에서 이 확실한 계획을 이미 60년 전에 미리 준비하고 그 계획을 시행해 오신 하나님의 그 세밀한 역사 운영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요셉 스탈린을 우리 민족의 마지막 사역을 위해 모를 심는 농군으로 이용하셨다.
⑵ 앞 마당의 광대
모택동(Mao Ze-Dong, 1893-1976)
중국은 세계의 앞 마당처럼 넓고 광대한 땅을 가지고 있고 세계 인구의 25%나 되는 13억의 인구를 가진 나라이다. 한국은 반만년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늘 중국의 영향을 받아 왔고 극동에 산재하는 나라들 대부분은 이 중국 문화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1880년대 중국의 청조(淸朝)가 망하고 일본의 침략과 지배로부터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현대사에 나타난 중국은 장개석의 자유민주주의와 모택동의 공산주의 이념의 싸움에서 모택동이 승리함으로 그 본토가 공산화되었다. 앞 마당의 광대 모택동은 죽(竹)의 장막을 치면서 20년 이상의 장기 독재정치를 함으로 중국 인민을 공산주의 사상으로 묶어 왔었다. 그러나 그의 독재적인 권력행사는 내면적으로 늘 도전을 받아왔기 때문에 권력에 대한 불안이 떠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서 정적을 없애고 권력의 중심이 자신을 축으로 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충성 일변도의 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발상한 것이 소위 1966년에 발생한 문화혁명이었다.
모든 교육을 인정하지 않고 전통적인 공자의 도덕성도 무시하게 되는 이 문화혁명은 한 사람의 권좌를 더 확고히 함으로 그를 신격화(神格化)시키기 위한 권력투쟁의 양상이었기에 많은 생명이 피를 흘려야 했고 또 전통적인 삶의 가치관마져도 송두리째 파괴되어져야 했다.
그의 독재자적인 피해의식은 결국 거대한 중국의 역사를 거꾸로 진행시켜 놓았고 그는 얼 나간 광대짓으로 중국을 역사의 뒷길로 후진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3년이 자난 1969년에 가서야 막을 내리지만 이 광대를 이용한 하나님의 섭리가 또한 기묘하다.
모택동 그는 그 자신도 결과를 예측치 못했던 문화혁명을 통해 몇 가지 분명한 일을 완성시켰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확실한 계획과 섭리에 의한 것이었다.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특유의 문화와 특별한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다양하게 살아가는 중국인들에게 문화혁명은 큰 변화 자체였었다.
첫째 공산주의 체제에서 무신론적인 바탕이기는 하지만 다원화된 종교를 배경으로 한 토속적인 다신교의 분위기에 살아온 모든 중국 사람들에게 문화혁명의 주체인 혁명사상을 고취시킴으로 종교성을 말살시켜 중국 국민의 마음을 단일화시켜 놓았었다.
그리고 중국 내에 사용된 공식적인 7개군의 방언과 수백 종류의 지방 사투리로 인해서 한 국가 내에서 언어소통이 되지 않고 통역이 필요했던 중국 언어권의 다양성을 단일화(Mandarin)시켜 놓은 것은 유일한 업적이 될 수도 있다. 언어의 통일과 사상의 단일화, 이것들은 중국 민족을 복음화시키는 일에 가장 큰 공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 시대에 한국인을 위해 광대로 역사에 등장하여 우리가 감당해야 할 중국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언어의 통일과 사상의 단일화 운동을 전개해 주었던 사실을 역사적 관점에서 생산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선교 이해와 마지막 때에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아가서 중국의 역사 배경은 역시 기독교 역사임을 알 수 있다. 문화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문자에 있어서 BC 3000년경으로부터 시작되어 온 상형문자가 3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제정되어 11세기에 현대어로 자리잡기 시작한 그 모든 한자의 발전 배경을 살펴보면 역시 한자가 기독교 역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모택동 그 독재자는 결국 13억 중국인들로 하여금 이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해 단일화 된 접근의 길을 만들어 놓고 간 것이다.
배라고 하는 뜻의 선(船)이라는 한자는 돗을 단(丹) 배위에 여덟(八) 명의 식구(口)가 타고 있었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글자이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노아 방주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또 한 예를 들어 보면 창조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글자인 조(造)자는 사람(人) 머리(·)위의 유일한 분(·)이 흙(土)으로 사람(人)을 빚은 다음 입(口)으로 입김을 불어넣음으로 인해( ) 인간을 만든 창조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여 만든 글자이다.
모든 한자들이 성경의 다양한 역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중국 문화 그 바탕이 성경의 역사임을 입증하게 된다. 수많은 방언을 사용했던 중국인들에게 마지막 때에 언어와 그 인식을 통일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 계획안에서 모택동을 사용하여 언어와 글자를 단일화시켜 놓은 것이다. 그것은 또 마지막 때에 한국인의 역사진행에 도움을 주기 위한 전초 사업이었음을 알게 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모택동은 중국을 세운 거인이고 그는 오랫동안 중국 13억의 인민을 다스려 왔다. 그가 마지막 땅이 될 아시아 대륙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13억 중국 인민들의 마음에 새겨져 온 사회 윤리의 전통성과 토속적이고 다신론 적인 모든 잡신을 섬기는 마음바탕을 쓸어버린 후 마음을 비우게 하고 간 역사의 위인이다. 앞마당에서 광기에 찬 늙은 광대, 그는 마지막 시대를 열고 마지막 땅에 비질을 하고 간 역사의 청소부이기도 했다.
⑶ 치부하는 세탁업자
김일성(1912-1994)
김일성, 그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독재자로서 악명이 높은 7인방 중에 한 사람이다.
그로 하여금 인류의 뇌리에 한국(Korea)의 이름이 강하게 각인되어 지도록 온갖 광대역을 다하고 간 사람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알려진 6.25 동란의 전범자로서, 공산주의가 용납하지 않는 권력의 세습주의 같은 독재자로서의 기행은 세계에 한국인을 알리는 데 부족함이 없었고 그 일을 부끄럼 없이 과감하게 자행한 그는 한국을 세계인의 마음에 새겨놓는 일에 크게 공헌한 사람이었다.
스탈린의 후예답게 그도 기독교 가정의 복음적인 배경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악독한 반 그리스도(Anti-Christ) 집단의 괴수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스탈린으로부터 한반도의 반쪽을 선물 받은 김일성은 스탈린과 더불어 역사의 진행을 방해하는 데 앞장서서 많은 기독교인들을 학살함으로 역사의 역행을 주도해 온 인물이었다. 주(主)의 날들(Anno Domini-Year of Lord)로 표기된 기원의 역사를 무시하고 역행하는 것은 주의 날을 살아가는 기독교도들을 박해하고 그들의 선교적인 사역을 방해하는 일이다. 극동에서는 모택동과 더불어 역사의 역행을 주도했던 가장 악독스러웠던 비역사적인 인물 중에 한 사람이 한반도 출신의 김일성이다.
그는 동양의 예루살렘(Jerusalem)으로 불리웠던 평양과 북한 전 지역에 일어나고 있던 기독교 부흥운동을 종식시키고 동양의 청교도들을 말살하기 위해 그 자신의 주체사상을 강제 주입시켜 왔고 전체주의적인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고 스스로를 신격화(神格化)했으며 전쟁을 일으켜 수십 만의 생명을 도륙하고 정적을 무참히 처형하는 살상을 일삼았으며 많은 민족의 출혈을 강요해 왔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막연히 미워하며 온 광적인 행위나 메시야를 대망하는 유대인의 종족을 없애기 위해 장자로 태어난 갓난아이 모두를 죽이게 했던 애굽의 헤롯을 능가하는 악독한 집정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인물을 한국 민족의 장래와 마지막 때를 위해 유용한 도구로 사용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이 저질러 온 과거의 잘못에 대한 징계와 새로운 사명을 위한 연단의 기회를 동시에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를 이용하여 북한 민족의 가슴에 깔려 있는, 즉 지금까지 생명 없는 온갖 잡신들에게 의탁하는 영적 의타심을 깨끗하게 세탁하게 하기 위해 그를 세탁업자로 이용하셨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한국전쟁을 통해 한국 교회의 각성을 촉구했고 일본의 침략하에 있을 때 교회를 정치나 독립의 바탕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한국 지식층 교인들의 잘못된 관행을 징계하기 위해 채찍을 드시고 스탈린과 함께 그 처벌자로 김일성을 이용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조연으로 악역을 충실히 하고 간 역사의 인물이 되었다.
한국교회 성장사를 보면 한국교회는 1910년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교인들은 증가해 왔지만 해방이 됨과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남으로 인해서 교인의 감소현상을 가지고 왔던 때가 있었다. 이 사실은 해방 전에 교회로 몰려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복음주의적인 진정한 신앙생활로 살아오지 않았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교회를 그들의 사회활동 무대로 이용해 왔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의 마이너스 성장은 한국에 큰 재앙을 유발시켰다. 이것은 지난 인류 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공식적인 역사의 현상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우리의 분단 역사를 다시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한국 민족이 마지막 때의 사명자로서 책임을 다하도록 60년 이상 연단시키고 고난의 삶을 통해 메시야가 진정한 구속주로 오심을 대망하는 민족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 북한 민족을 훈련하고 있다는 사실로도 믿어진다. 김일성 그는 북한 국민 2500만의 마음 바탕을 하얗게 세탁해 놓고 간 위인이다. 비록 주체사상으로 그들 마음에 박힌 검은 점 하나를 뺄 수 없지만 불원간 그 점이 빠지고 새하얀 마음으로 재림주 예수를 대망하며 역사의 전면에서 복음 전수의 선봉 그룹으로 다시 역사에 등장하리라 믿는다.
한국의 남북한이 통일이 되고 복음이 새롭게 그들에게 전수될 때 평양은 마지막 시대에 새 예루살렘으로 복원될 것이며 새하얀 마음의 북한 주민들은 순수하게 복음으로 재무장되어 마지막 때에 불쏘시개로 자신을 태우며 사도적 사명을 다할 증인들이 될 것으로 믿어진다. 자유와 풍요를 즐겨왔던 남한의 기독교인들, 그리고 감투와 명예, 부와 조직에 얽메인 남한교회 지도자들이 순교자의 반열에 설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
김일성 그는 인류의 마지막 때를 위하여 악명 높은 새탁업자로 한국인의 피를 팔아 치부한 거대한 유산을 김정일 그 아들에게 물려주고 간 반 기독교적, 반역사적 인물이었다.
㈏ 마지막 막을 올리며…… 2000년
앞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난 2000년의 역사를 지리적으로 시대 구분을 해 본다면 팔레스타인(Palestine)의 유대 땅에서 시작된 예수의 공생애 3년 동안 그의 사역이 갈릴리 호수 물가에서 이루어졌는데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이 복음이 세계로 확장될 때마다 역사의 무대는 땅(堉)과 물(水)을 구분하며 막이 오르고 닫혔다. 인류의 역사는 5막 6장이다. 예수의 탄생으로 역사의 첫 막이 오른 후 그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이 한 시대의 막을 닫히게 했고 예수 이후 바울에 의한 로마의 복음화는 지중해를 건너 새로운 시대를 여는 2막이 열리게 했다. 로마가 불타버린 한 시대의 종말을 맞으며 막이 다시 내리고 게르만과 앵글로색슨족의 출현과 더불어 3막이 오른다. 긴 역사의 드라마는 대서양을 건너는 한 순수한 청교도 무리들의 모험으로부터 3막이 내리고 청교도들의 감사와 경건으로 시작되는 미국 대륙 개척시대를 여는 4막이 오르고 미국의 화려한 등장과 세계를 호령하던 기개가 태평양에 지는 햇살에 따라 꺾여지면서 긴 여운을 남길 때 또 막이 내리고 제 5막이 열려지게 된다.
아시아 대륙, 그 대륙의 모서리에 붙어 있는 작은 나라 한국(KOREA)에서 마지막 막이 열려진다. 한국은 제 2의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과 한국, 유대인과 우리 민족의 유사성은 의외로 많다. 샤론의 꽃(Rose of Sharon)이 한국의 국화인 무궁화인 것처럼 역사의 첫 무대를 연 유대인이 시작이라면(Α), 우리 민족은 역사의 막을 내리는 마지막(Ω)이다. 지금 인류의 마지막 장이 될 역사의 무대에서 2000년이 열린다.
⑴ 찬란한 조명이 비치는 무대의 배경
21세기의 시작을 몇 년 앞둔 시기에 세계 올림픽 대회를 거행하고 경제성장으로 OECD에 회원국이 된 한국은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적으로 받으며 선진국 대열로 진입하고 있다. 인류의 많은 국가들 중에 교역 물량이 세계 11번째로서 경제대국 대열에 들어가 있는 한국은 역사의 대로(30/60 Highway)상에서 마지막 땅인 아시아 대륙에 산재해 있는 나라들 중에서 가장 선진화된 나라이고 국민 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한국은 반만년 역사이래 중국을 능가하는 경제적인 부를 이룬 때도 없었지만 중국인들에게 우월감을 가지고 중국을 돕는 입장에 있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21세기의 초입에서 지난 반세기를 통해 한국이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함으로 중국을 능가하는 경제력으로 중국을 지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거대한 중국이 공산주의 정치가 가져다 준 피해로 빈국이 되었지만 이것 역시 하나님의 계획된 사역 중에 일부이다. 지난 50여년 동안 중국이 저개발국가로 전락한 것이나 한국이 괄목할 만한 성장의 나라로 발전한 이면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이 작용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손이 작용한 것은 결과적으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대 비가 아니라 기독교 국가와 반 기독교 국가에 대한 대치 입장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결코 뛰어난 민족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1950년대 한국인에 대한 외국인들의 인상은 게으르고 나태한 민족이요 희망이 없는 민족으로 보였다. 그러나 한국전쟁과 더불어 일기 시작한 민족의 회개운동이나 이승만 대통령의 구국적인 신앙은 한국 교회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이후 숱한 정치적인 변화와 격동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한국은 발전해 왔다. 이 지난 50여년간 한국의 발전 과정을 되돌아보면 한국 역사에 가장 부끄러운 일들이 많았다. 결코 정치가의 선정이나 덕치로 인해 국민이 화합하고 생산적인 일에 뜻을 같이 했던 시절이 아니다. 독재로 인한 정치적인 타락과 사회 이면에 누적된 부패와 불의가 팽배해 있었기에 사회 전반에 옳은 가치관으로 국민정신이 고양되었던 시절은 결코 아니었다. 노사간의 갈등과 학원가의 끊임없는 데모와 사회 윤리의 악순환으로 발생된 가치관의 퇴락은 불신 사회의 바탕에서 비생산적인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인 배경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제성장은 하나의 불가사의한 것이었으며 도저히 수치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경이로운 발전으로 이어져 왔다.
한국인이 객관적으로 우수한 민족이라고 평가되지만 모든 사회여건이나 간접적인 요소는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고 기적을 이루어 낼 만한 특수성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사회 이면에 한국 교회들이 급성장하고 기독교 신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진행 앞에 늘 기독교의 복음이 앞서가고 있다는 사실은 앞 장에서 수차례 언급한 사실이지만 우리의 역사 앞에도 늘 복음 사역이 먼저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사실 때문에 지난 반세기를 지나면서 우리 민족이 수학적인 계산을 초월하며 기적으로 표현되는 경제성장을 이룬 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축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참으로 보이지 않는 손길의 간섭과 주관하심으로 이루어 놓은 은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경로로 발전된 한국의 모습은 세계 속에 경이로운 기적의 역사를 이루어 놓은 민족으로 모든 이들의 찬사를 받게 되었고 세계 무대 위에 화려한 배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⑵ 역사의 무대에서 조명 받은 주연 배우
한국 대통령
인류의 역사는 60억 이상의 인류 모두가 참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 시대를 열면서 그 시대의 역사는 단 몇 사람의 지도력(leadership)에 의해 형성되어 나간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이런 현대인들의 역사참여 의식은 "역사의 주인이 되자"거나 "역사의 주인 의식을 갖자"는 말로 잘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기독교적인 바른 인식으로 다시 정의해 보면, 역사란 하나님 자신이 계획하셨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시작하여 성령께서 인류와 함께 그 계획을 성취해 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각 시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미 주어진 배역으로 선택되어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요 계획안에 포함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역사의 무대에서 스탈린이나 모택동 같은 인물이 그 주어진 배역을 잘 연기하면서 한 시대를 거쳐갔고 샤담 후세인이나 김정일 같은 인물이 역시 준비된 역사의 무대에서 열연을 하고 있는 것이다. 30/60 역사의 대로에서 새로운 한 시대를 주도해 갈 무대에 선 주연배우는 누구일까? 많은 석학들이나 심지어 미래의 운명을 점치는 역술인들 까지도 한반도의 한국과 한국인들이 역사의 후미를 장식할 21세기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주저 없이 설파하고 있다. 미래학자들의 논리 정연한 주장이 새시대 21세기의 역사를 한국인이 주관하게 될 것이라는 것과,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들이 한반도의 풍수가 비범해서 21세기를 움직이는 민족으로 부상한다는 풍수설에서나, 지구를 감싸고 있는 기(氣)의 맥이 한반도에 띠로 매어져 있어 한 민족의 정기(精氣)가 한 시대를 주관하게 된다는 역술인들의 주장까지도 예사롭게 들리지 않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책에서 수차례 언급해 온 것과 같이 역사의 진행 과정을 재조명해 볼 때 한국과 한국인을 역사의 무대에 주역으로 등장시키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예사롭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이 민족이 역사의 주역을 맡는 시대가 도래한다면 분명히 이 땅의 대통령이 이 역사의 무대에 주연으로서 그 배역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한국 대통령, 그는 인류 역사를 마감해야 하는 중대한 사명과 책임을 이행할 수 있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 한국 땅이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 대륙 초입에서 이어지는 예루살렘까지 30/60 Highway 상에서 유일한 신앙의 자유국가이며 가장 풍요한 경제 대국으로서 첫 시작점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신비스러운 암시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⑶ 무명 시절-아픔의 세월들
연극 무대에서 많은 배우들이 등장하여 제각기 맡은 배역을 연기하고 사라지듯이 역사의 무대에서도 많은 인물들이 그 배역을 충실히 연기하다가 세월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인류 역사에 시작이고 끝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영을 중심해서 많은 연기자들이 무대에 등장했다가 사라지곤 했었다. 인류의 총체적인 역사의 한 부분이 될 한국이라는 소무대에 선 주역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기원이 시작될 무렵에 한반도에서는 고구려가 건국되었고 기독교에 대한 심한 박해가 끝나고 니케아 종교회의가 열릴 때 이 땅에 불교라는 종교가 고구려에 전해졌으며 비잔틴 제국이 무너질 때쯤에 한반도에서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한 시기였다. 독일에서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나 유럽 전체가 떠들썩할 때 우리는 삼포왜란을 겪어야 했으며,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외치며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고 있을 무렵에는 조선 왕조의 소현세자가 중국에서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접하고 있었고, 미국이 신대륙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있을 때 권철신, 정약용 등이 영세를 받음으로 우리 역사의 전면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었다.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나고 세계적인 인권선언이 제창될 때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곤 했던 반 기독교적인 세력들이 이 한반도에도 어김없이 나타나서 역사의 진행을 방해했으며, 1801년 3000여명이 순교한 신해박해(辛亥迫害)를 필두로 1839년 선교사와 200여명의 신자들이 순교 당하는 기해박해(己亥迫害), 그리고 신부 7명과 8000 교도가 죽임을 당해야 했던 1866년 병인교란(丙寅敎亂)으로 이어지는 반역사적인 사건들이 끊임없이 이 땅에서 자행됨으로 비극적인 역사의 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기독교도들의 목을 베는 사형장이 절두산(切頭山)으로 이름지어 지고 노량진 한강 백사장에서 형극의 길을 걸으며 신자의 양심을 지키던 신앙인들을 광대들의 칼끝으로 목을 치게 하던 새남터의 북소리가 주야로 울려 퍼짐으로 이 땅의 정세는 혼미의 나락으로 떨어져 가고 있었다.
제1회 올림픽대회가 열렸을 때 대한제국이 성립되었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했으며 그 무렵 일본은 한반도에 경인철도를 건설하고 있었다.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유럽에 경제공동체가 생겨날 때에는 제2공화국이 세워졌고, 미국에 영 파워 바람으로 40대의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무렵에 우리나라에서는 군사정치가 시작되는 제3공화국이 생겨났으며,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함으로 동서화합이 시작될 무렵에는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또한 미국이 우주 왕복선 콜럼비아호의 시험비행을 성공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제5공화국이 시작되었고, 소련이 고르바쵸프(Mikhail Gorachev)의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Russian"Resyruction")운동과 글라스노스트(Glasnost-Russian "Openness")개혁을 시작했을 때 한국에서 제6공화국이 출범하게 된다. 1992년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세계의 공산주의 이념 국가들이 와해될 때 제7공화국 소위 민선정부가 이 땅에 세워져 한국인의 가슴에 저려있던 군사정치에 대한 한이 녹아 내리고 있었다.
이러한 한국의 역사 무대에 나타났던 많은 사건에 연루된 주연들은 주로 악역들이었다. 반면에 역사의 전면에서 역사의 진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복음의 사역자들로서 천상의 영광을 위해 지상의 부귀를 포기한 신앙인들이었다. 그들은 때로 생명을 바치거나 형극의 길을 걸으면서도 늘 기뻐했던 거룩한 역사의 뿌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위협했던 반 신앙적이고 반 기독교적이었던 사람들은 국가를 통치할 힘이 있었고 그들은 지상에서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권력의 사람들이었다.
우리 민족의 근세 역사는 30/60 역사의 대로를 향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했던 역사의 한 과정으로서 역사의 진행을 위해 희생을 감수했던 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기록된 역사이며 이는 세계 어느 민족보다 더 강한 신앙의 힘으로 역사의 대로를 건설해 나가는 사역이었다. 한국의 최 근세사에 있어서 한국정부수립 과정과 역사의 견인력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와 통치자들의 관계가 어떻게 연계되어 왔는지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16세기에 전래된 기독교(구교)가 많은 박해로 인해 큰 성장은 없었으나 19세기에 이르러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이래 서방 개신교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선교활동으로 한국 기독교는 많은 교화를 갖게 되었고, 그 교회들은 구국 일념에 불타는 청년들의 구심점으로, 소위 엘리트 구국 청년들의 신앙적인 결집을 유도하는 민족적이고 정신적인 집단체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본질적인 복음주의 입장에서 볼 때는 바람직한 일일 수는 없었다. 해방 이후 많은 엘리트 그룹의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 한국교회가 비복음주의 상황에서 부흥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 교회가 마이너스 성장하는 역사적인 의미는 크다. 이런 현상은 후일에 큰 역사적인 교훈이 되고 있다.
한국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게 됨으로 한국이 남과 북으로 분단된 별개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6.25 전쟁이 발발하여 민족이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적인 역사로 끌려 들어가게 되었으며 반기독교집단인 공산주의와 그 지도자 김일성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소위 인류 역사에 반기독교적인 세계 7인방 중에 한 사람으로 기록될 김일성은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적그리스도였다. 한반도가 핏물의 강토가 된 6.25 한국전쟁은 하나님이 이 민족을 구별하여 사용하시려는 어떤 확실한 계획과, 역사를 견인할 복음주의적인 성결함이 퇴색해 버리고 민족주의적인 독립운동의 사상적인 이념이 강하게 베어있는 교회를 정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드신 징계와 채찍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민족적인 비극으로 인해서 연단 받은 한국 민족은 남은 시대를 책임져야 하고 대망하는 재림주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과정이었다.
남북이 갈라진 뒤 남한에서는 7번째의 대통령을 맞이하고 각기 다른 7번째의 공화국을 갖게 되었다. 제1공화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비록 후일에 불명예로 은퇴한 대통령이 되었지만 초기에는 건국의 공로자로서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특히 기독교인으로서 그의 개인적인 인격과 신앙은 많은 국민들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데 영향을 끼쳤고, 한국 기독교가 6.25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회개와 각성을 통해 복음적인 기초를 튼튼히 할 터전을 만들어 주었다. 제2공화국은 과도정부로서 내각제 정부였다. 윤보선 대통령은 기독교인이었고 장면 총리는 카톨릭 신자였다. 이 짧은 기간동안 실질적인 실권자였던 장면은 카톨릭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카톨릭의 성장기가 되도록 했다. 제3공화국과 5공화국은 한국 기독교의 급성장기였으나 실제로 국가 통치자는 불교에 영향을 끼쳐 불교의 중흥기를 가져오게 했으며, 제6공화국 역시도 불교의 성장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 기간을 통해 한국의 기독교는 눈부시게 발전하였고, 세계 교회의 주목을 받으리만큼 양적으로 성장했었다. 이런 기독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개신교 교회의 장로인 김영삼씨가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김대통령에 대한 무한한 기대를 갖게 되었고, 제2의 기독교 중흥의 기회가 올 것을 기대했었다. 김대통령을 위한 역사의 무대는 참으로 화려했다. 과거 군사정치를 청산하는 입장에서 민선 대통령으로서 정치와 부정 척결의 사회정화운동 등으로 많은 기대와 신뢰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임중 일어나는 대형사고들과 국가 경제의 마이너스 성장이 국민들의 불만과 불신을 유발시켰다. 기독교인으로서, 특히 장로인 그의 지난 통치기간 중 한국의 기독교는 마이너스 성장으로 교인 수가 줄어들고 있다. 기독교의 마이너스 성장은 과거 어느 국가나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국가의 쇠퇴기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종래에는 한 국가와 민족이 몰락해 가는 길이 되기도 했었다.
20세기를 마무리하고 21세기를 맞이할 이 시기에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등장한 한국의 대통령은 역사의 무대를 가장 훌륭하게 장식하고 감동적인 무대로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바람직한 역사의 무대가 되어지지 않고 있는 느낌이다. 우리 국가와 민족이 위기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과 한국교회의 마이너스 성장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심도 있게 이해해야 할 일이다. 역사의 진행에 있어서 궤도수정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의 대통령은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진행의 정도를 확실히 인식하고 역사를 견인할 힘을 배양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각성과 회개, 그리고 복음 전수자들로서의 사역을 역사의 전면에서 의롭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 민족적인 운동이 전개되어야 하며 우리 민족이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 운영계획에 부응해 나가야 할지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기독교가 외면 당했던 비기독교인 대통령의 통치기간동안 한국교회가 급속도로 부흥했던 사실과, 기독교 지도자인 대통령의 국가 통치기간 중에 한국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을 해 나가고 있는 역사의 현실은 아이러니컬한 사회상이 아닐 수 없다. 두려운 일이다.
4. 마지막 땅의 정복자, 시대의 지배자
21세기, 한국이 인류 문명의 주역이 된다는 부제를 가지고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라는 제목의 책을 쓴 고려대 총장이신 홍일식 박사께서는 역사이래 한(漢)족에게 걸려들어 녹아들어 가지 않는 민족이 없었고 녹아들어 가지 않는 문화가 없었다며 속설이긴 하지만 인류의 문화에 영구한 흔적과 자취를 남기고 지금까지 인류 역사의 중심권에 있는 유대 종족마져도 그 한 갈래가 중국으로 들어갔다가 중국에서만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한족(漢族) 문화에 녹아들어 갔다고 중국의 불가사의한 특성을 설명했다.
이어서 그는 그러나 우리 민족만은 중국 문화에 녹아지지 않고 지금까지 주체성을 견지하면서 독립주권국가를 이루고 고유 영토와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지켜오는 유일한 민족으로 남아 있는데, 우리 민족이 무슨 힘과 경로로 중국의 거대한 불가사의의 용광로에 녹아들어 가지 않고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을 지탱해 오고 있는지 그 원인을 분석한 후 그 근원은 결코 물리적이거나 일차원적인 군사력이나 경제력과 같은 어떤 남다른 힘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 민족의 실체인 "문화의 힘"에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 민족의 실체인 문화의 힘을 생각하는 다른 한국의 석학인 박봉배 교수는 "어느 문화를 막론하고 문화에는 종교적 뒷받침이 없는 문화는 없다. 문화의 궁극적 가치의 기반이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고 사회 변화를 가능케 한 정신적 동력(Dynamics)은 종교의 존재성에서 생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 문화와 종교의 유관성을 강하게 제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석학 폴 틸리히(Paul Tillieh)는 "문화는 종교의 외적인 형식"이라고 하였다.
이 3 석학이 제시한 문화의 힘에 대한 내용을 도표화하면 문화의 바탕에는 종교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며 인간 문화가 형성되는 곳 어디에나 종교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는 사실이고, 또 이 공식은 "문화의 힘"은 바로 그 원천적인 힘이 종교의 바탕에서 생성되는 힘이라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존재하는 우리 한국민족의 뿌리는 문화 이전에 종교에 바탕한 힘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종교성이 강한 민족이고 신을 의지하는 민족이다. 우리 민족은 유대 민족과 같이 원래부터 하나님을 숭배하는 민족이었고 그 하나님 숭배는 고대 문화와 사회를 통합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그 하나님을 숭배하는 백성은 윤리적이었기 때문에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의 칭호도 듣게 되었으며 우리 민족이 즐겨 사용하는 속담 중에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하는 말이 그 의미를 함축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한국 민족의 실존적인 힘은 결국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적인 속성에 뿌리하고 있으며 더 깊은 뜻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으로서의 저력이라고 할 수 있다.
⑴ 실크로드-그 은하수 강의 추억들
실크로드(Silk Road)라는 말은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 호펜이 처음 사용한 6,400㎞ 육로를 말하는 것인데 전한(前漢)때인 BC 3세기에 열린 이 길은 페르시아와 중국의 비단 장사들이 낙타를 타고 중앙아시아를 지나 중국과 중동의 옛 페르시아 지역을 왕래하던 교역의 길을 일컬어 온 먼길의 이름이다. 아시아 쪽에서 볼 때는 중국 씨안(西安)에서 시작되는 이 길은 중국 당대(唐代,618-907)에 교역이 활발하여 비단장사들을 비롯한 많은 상인들의 내왕이 있었으나 6세기 돌궐(Turk AD 6-9)이 중원(中原, 現代의 中國)을 위협하여 이 육로를 봉쇄했던 일로부터 근세에 이념 국가들의 출현과 이데올로기(Ideology)적인 국가간의 사상적인 벽이 쌓여가기 시작하므로 교역이 차단되었으며 또 해상의 발달로 인해 이 실크로드가 점차 퇴색해졌다.
이란 이유 등으로 실크로드는 지난 수세기 동안 폐쇄되어 있었으나 1992년 소련의 붕괴 이후 냉전시대의 종식으로 인한 다자간 국가들의 개방정책에 힘입어 실크로드의 연결 국가들 간에 재개발의 의견이 활발하게 교환되어지고 있는데 1995년 태국에서 열린 ASEM 총회에서 범아시아 관통 철도에 대한 합의가 있었고 1996년 9월에 유엔 아시아 태평양 경제사회이사회에서는 범아시아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본격적인 추진을 결의했다.
이 교통망 확충 계획은 범아시아권을 연결하는 철도나 고속도로를 의미하지만 결국 실크로드에 연결되어지는 뉴 실크로드(New Silk Road)의 성질을 가지게 된다. ASEM에서 우리나라 대통령의 제안으로 숙의하게 된 아세아 관통 철도의 건설 계획은 바로 역사의 진행 대로인 30/60 highway 상에 놓이게 됨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크며 뭔가 새로운 역사변동의 조짐(Something's Happening)으로 부각되어지고 있다.
실크로드가 관통하는 지역은 이 지구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무공해 지역이다. 늦 가을, 깊은 밤에 달빛에 이슬방울 헤아리고 은하수 강의 흐름을 손으로 휘젓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맑은 하늘을 지니고 있는 지역들이다. 징기스칸의 기마병들이 달리고 그들의 창검이 달빛에 번쩍이던 옛 역사의 추억이 배어 있는 이 땅에 우리 선조들의 아픈 기억들 역시 풀 한 포기 바위 한 모서리에도 배어 있는 곳이다. 스탈린의 호령에 정든 땅을 뒤로하고 시베리아 철도에 실려 미물같이 황량한 벌판에 실려가 쓰레기같이 버려졌던 우리의 선조들이 처절하게 겪어야 했던 아픔이 배어 있고 통곡과 한이 미물의 숨결에조차 저려 있는 땅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슨 억겁의 죄로 인한 형벌인지 전능자는 우리 민족에게 이런 형극의 길을 준비해 놓았고 피할 수 없도록 해 놓았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 그 이후에 이 형극의 길이었던 실크로드가 미래에 우리 민족이 세계를 다스리고 마지막 땅에서 민족이 사명을 다하고 재림의 때를 준비하기 위한 그분의 섭리였음을 깨닫게 하는 희망과 소망의 길이 되었다.
⑵ 까레이스끼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은 이스라엘을 떠나 해외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집단을 일컫는 이름이다. 유대인 자신들은 이스라엘의 망명객들이라고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는 BC 586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의 재건을 위해 돌아왔을 때 잔류했던 집단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 이후 그리이스의 통치시대에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이집트(EGYPT)의 알렉산드라 지역에 정착했었고 대로마제국 시대에는 아시아와 유럽으로 흩어져 작은 집단을 형성하고 살았으며 한편으로는 기원후 70년경 예루살렘 멸망 이후 로마에 죄수들로 끌려왔던 수많은 유대 사람들이 독일이나 불란서에 정착했다가 영국이나 북유럽 혹은 스캔디나 반도로 이주했었다. 19세기와 20세기 이후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북미 지역으로 옮겨갔고 2차대전 이후에는 이스라엘로 돌아와 새 이스라엘(ISRAEL) 국가를 재건하기도 했었는데 이런 성격의 해외 유대인 집단을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불러왔다.
이 유대인의 역사와 그 민족의 애환을 관찰해 보면 우리 민족의 역사가 그들과 너무 유사한 점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지난 역사에서 구속(救贖)의 주(主) 메시아(Messiah)를 대망하는 유대 민족은 늘 하늘에 존재하는 신(神)의 도움을 기대하며 살았던 우리 민족과 같이 구세주를 대망하는 민족이었고 그 민족사에 그려진 외세의 지배와 시달림을 받아오면서 고난의 삶을 살아온 우리 민족과 너무 흡사한 민족이다.
북으로부터 수많은 외침을 받아오며 생존해왔던 우리 민족이 남쪽 왜적들에게 결국 나라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으며 그로 인한 굴욕의 삶을 살아야 했던 우리 선조들이 그 수난의 현장을 피해 망명지에서 피난민의 삶을 살아오면서 이국의 땅, 타향에서 토지를 일구고 세간 장만하여 안도의 숨을 쉬고 살아갈 무렵 어느 악독한 독재자의 정신분열성 발작으로 행해진 만행에 모든 토지와 집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엄동설한에 시베리아 벌판으로 유배당했던 슬픈 사연이 어쩌면 어릴적에 막연히 품게 된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이 발동하여 가스처형을 감행한 히틀러의 발작에 제물이 되었던 유대인들의 수난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수치와 설움, 그리고 구국 항쟁을 위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한 많은 선조들의 망명, 그리고 독재자의 칼날에 밀려 조국을 등져야 했던 우리의 동포들, 이념의 벽을 높이 쌓으며 총칼로 대적했던 동족상잔의 전쟁을 피해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수많은 동포들이 망명지에서 이루어놓은 삶의 현장, 그리고 거기서 살아가는 우리의 동포들이 한국의 디아스포라(Dispora)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들을 의식하지 못하며 살아왔다. 1990년 철의 장막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때, 우리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의 수많은 동포들이 고려인의 이름으로 중국과 중앙 아시아에 소수민족으로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은 지난 한 세기 동안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고난의 삶을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민족의 뿌리로서 생존해 왔다는 사실이다.
중앙 아시아 거기가 어디였던가? 그곳에 왜 우리 민족이 정착하게 되었는가? 문화와 관습과 혈통의 관계가 전무한 그 땅에 어떻게 우리 민족이 이주해 살아오게 되었는가?
이제 우리 민족이 한 세기를 통해 거쳐온 이 흩어진 민족의 역사를 바르게 정립해 나가야 할 때이며 중앙 아시아에 뿌리내린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Dispora)들이 고국을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볼 때이다.
고난의 민족이었던 이 두 민족의 삶, 그리고 흩어져야 했던 그 역경의 삶이 나무나 흡사하다. 기원 이후 시작된 AD의 역사 출발점에서 유대인으로 하여금 역사의 주역을 맡게 했던 하나님께서 역사의 마무리 현장에서 우리 민족에게 역사의 갈무리 책임을 부여하고 계심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실한 뜻임을 알게 될 때 우리의 확실한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
우리 민족의 길이 될 이 실크로드는 아시아 대륙에 전류가 흘러갈 전선과 같은 것이고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들이 전구(電球)로서 이 전선 마디마디마다 달려있는 것과 같은 형상이다. 이 전선에 전류가 통하는 날 아시아 대륙에 밝은 불이 켜질 것이며 흑암의 대륙을 환하게 밝힐 것이다. 이 불은 역사의 진행을 위해 앞길을 밝히는 역사의 전조등이 될 것이며 역사를 견인할 불빛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자신의 마지막 사역을 위해 이런 설계를 60여년 전에 이미 해놓으신 것이다. 그 계획은 100여년 전에 일본의 압제로 하여금 우리 민족이 조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끔 그 동기를 부여해 주셨고 원동으로 이주해 간 우리 동족들이 스탈린이란 희귀한 반역사적인 인물로 하여금 이유 없이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 당하도록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한국 민족의 불행했던 과거가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사와 동일하게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획이 준비되어 있었던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땅 예루살렘으로 복귀하는 성령의 활동하심과 역사의 진행이 우리가 바른 역사 인식을 가지고 살펴보면 육안으로도 볼 수 있듯이 확실한 현실적인 증거로 나타나고 있다.
실크로드는 지금 페르시아 상인들의 교역의 길, 그리고 중국 상인들의 비단장사 길이 아니다. 그 길이 새롭게 뉴실크로드(New Silk Road)로 재건축되는 날 그 길은 우리 민족의 길이 될 것이다. 이 길 언저리에 한민족의 디아스포라들이 메시아를 대망하는 유대인들과 같이 재림주를 기다리며 회교인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인 적 그리스도와 싸우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디아스포라군(群)을 이루게 한 것은 유대인을 세계에 흩어 놓으신 것과 동일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역사의 형태가 현실로 부각되는 것은 미국 선교학자의 표현대로 지금 무엇인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Something's happening). 지금 역사의 새로운 변동의 조짐이 한국과 한국인으로부터 중앙 아시아 변방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⑶ 언어의 마술사들
세계 인류 중에서 우리 민족같이 단일 혈통을 가진 민족이나 나라를 찾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순수한 혈통의 단일 민족으로서 우리의 문화 역시 단일성과 독립성을 지니고 있다. 언어(言語)가 그 문화의 총체성을 지니고 있음으로 우리 민족의 문화적인 독특성은 고유한 우리 언어에 모두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벨탑 사건(Gen 11:1-9) 이후 많은 민족들은 각 지역으로 흩어졌고 민족마다 고유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으므로 서로 의사소통에 제한을 받아 왔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류에게 내린 하나님의 형벌이었다. 우리 민족 역시 우리가 고유의 언어를 가짐으로 해서 긍지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자랑하며 살아왔지만 타민족과의 교류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또 세계화를 부르짖는 우리에게 지금까지도 언어사용의 불편함은 모든 이들이 겪고 있는 일이다. 이 언어는 국가 발전에 큰 몫을 차지해 왔고 개인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의 표준언어로는 헬라어 시대를 거친 후 로마의 그리스 문자를 바탕으로 발전된 영어가 세계 공통 언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어라든가 러시아어 그리고 터어키어에 바탕을 둔 많은 중앙 아시아권 지방 언어는 모든 나라나 민족들에게 생소한 언어였으며 누구도 쉽게 접근해서 배울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중앙 아이사의 인근 국가나 민족들 외에 특히 서방 국가나 민족들에 있어서 이곳 언어들을 배우고 익혀야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세계는 공통 언어로 영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어느 민족에게나 이 언어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지난 반세기를 통해 우리 민족이 얼마나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민족으로 발전했는가를 우리 자신들조차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세계 어느 민족도 시행할 수 없는 세계 모든 언어의 구사 능력을 보유하는 민족으로 부상될 것이다. 200만의 우리 민족이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나 회교의 중심지 중앙 아시아에서 러시아어나 우즈벡어와 터어키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회 지도자급이 수십 만명이 넘는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영어나 독일어나 서방 언어를 제외하더라도 복음이 아직 미치지 못한 마지막 땅에서 완전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민족은 우리 민족뿐이라는 사실은 예삿일이 아니다.
1800년 이상 노력해 온 서방 세계의 교회들이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각 지역마다 선교의 문이 열렸을 때 왜 성공적인 복음 사역을 못했는가? 그들의 사역을 받아들일 흡인력, 즉 언어의 구사능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짧은 기간 내에 강한 흡인력으로 한국의 복음 사역이 중앙 아시아와 러시아 지역에 빠르게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족의 준비된 디아스포라들, 그들의 언어 구사능력 때문이었다.
마지막 때에 준비해 놓은 하나님의 그 깊은 섭리를 어떻게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을까? 마지막 땅에 복음 전수를 위해 우리 민족이 해야 할 준비를 이미 60년 전에 하나님 자신이 해 놓으셨다는 사실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계획인 것이다.
한국의 디아스포라, 그들은 우리 민족이 보유한 언어의 마술사들이다.
5. 30/60 땅 Highway 상의 주변 동네들
역사가 진행하는 하이웨이 상의 외곽에 존재하는 민족이나 국가들이 왜 역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민족이나 국가인가에 대한 의문은 정밀한 역사 분석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먼저 역사 교본의 연표에서 역사적인 주요 사항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 30/60 Highway를 벗어난 외곽의 나라들이 관계한 사건이나 사항들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실은 이들 국가들이 어떤 역사에 깊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기원 이후 인류 역사를 주도해 온 민족이나 국가가 지형적인 시대구분으로 볼 때 이 30/60 역사의 대로 외곽에 존재하는 국가는 없었다. 이 역사의 대로상을 벗어난 국가나 민족은 항상 역사의 무대에서 관객의 역할만 했었다. 그들은 역사의 진행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하는 민족은 아니었고 항상 하나님의 선교 계획에 피선교민족으로 선교의 대상이 되어 온 사실을 알게 된다.
북위 30도와 60도를 벗어난 지역국가들 중에 그나마 가장 부유하고 선진된 나라들은 대개 60도 이북에 자리잡고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5개국이고 30도 이남으로 가장 큰 민족을 이루고 있는 나라들은 중.남미 대륙의 여러 나라들을 일컬어 말할 수 있다. 그 외에는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을 말할 수 있는데 그들 대개의 나라들은 저소득국가들이다. 그러나 이 나라 전부가 역사의 중심에서 역사의 진행의 주역으로 참여한 나라들은 아무 나라도 없다는 사실이다.
⑴ 스칸디나비아 국가와 남미 동네
스칸디나비아(Scandinavia) 반도에 인접한 세 나라, 스웨덴(Sweden), 노르웨이(Norway), 덴마크(Denmark)는 그 문화와 지리적 환경이 거의 동일하여 스칸디나비아 국가로 불려지지만 문화적인 배경은 다소 다르고 지형학적이고 정치, 경제적인 입장 때문에 핀란드(Filand)와 아이슬랜드(Iceland)를 추가하여 지금은 5개국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로 간주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 나라들이나 남미 국가 대부분은 그 뿌리가 유럽이다. 유럽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민족들이기에 민족의 구성은 동일한 혈통과 동일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형성되어져 있다. 그러나 북과 남으로 양분된 이 국가들 중에서 스칸디나비아 국가 모두가 선진국들로서 국민소득으로는 세계 최상위권에 자리잡고 있는 나라들이고 이들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로서 선진화 된 반면, 남미의 제(諸)국가들은 국민소득률 면에서 세계 최하위권에 맴돌고 있으며, 세계 빈국으로 제3세계로 분류되어 있다.
이 국가들의 건국 이전 16세기의 세계 상황은 유럽 중심의 문화권이 형성되어 있었고 로마를 중심하는 교황권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그때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은 세계를 두 문화권으로 갈라놓았다. 동일한 신앙에 대한 신.구교의 교리적인 대립은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 역사의 진행 방향을 고심하게 했던 문제이고 인류에 대한 새로운 결단을 촉구하는 중요한 사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1517년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 결단에 하나님께서 어느 편에서 역사하셨는가 하는 해답을 얻는 것이다. 또한 신.구교의 신앙 정통성을 어떻게 인정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해답이 되기도 한다.
이 문제에 대해 우선 스칸디나비아와 남미 대륙의 그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그 지형학적인 조건에서 특히 기후가 좋지 않았고 땅이 비옥하지 않았다. 이곳으로 이주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개척을 시작했으며, 그들의 선조들이 그랬듯이 바다로 진출하여 바이킹(Viking) 문화를 이루며 궁색한 삶을 살았고, 남미로 진출한 사람들에게는 비옥한 땅과 넓고 광활한 대지가 있었으며 천혜의 좋은 기후와 무한대의 자원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좋은 조건에서 생활해 나갈 수 있었다. 그들에게 이 남미대륙은 패러다이스(Paradise)였다.
이들이 남미대룩과 북쪽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양 지역으로 이주한 후 한 세기가 못되어 스칸디나비아로 이주한 루터교 중심의 청교도들이 새로운 땅을 개척하며 바다에서 파도와 싸우고 있는 동안 남미로 이주한 로마카톨릭 교도들은 세계 강대국으로 부상하리만큼 부유한 나라를 이루게 되었고 그들은 풍요한 삶을 살 수 있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카톨릭은 교황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남미 쪽으로 집중적인 선교를 하였고, 그 선교의 바탕에는 순수한 복음주의적인 면에서보다는 식민주의적인 정치성향이 강하게 내재해 있었다. 이와 반면에 개혁 측이 된 마틴루터 진영에서는 그럴만한 힘의 여력도 없었겠지만 선교에는 무심한 상태였고 우선 선교에 대한 조직력을 갖추지 못했었다. 이런 16세기와 17세기의 사회현상과 국가나 민족의 위상을 이해하면서 지금의 이 두 국가군의 신앙적인 배경을 점검해 보면 3세기가 지난 지금에 와서 개혁에 동참했던 소수의 무리가 올라간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들은 모두가 국교를 루터교로 확정지을 만큼 루터 교단의 본산(本山)이 되었고, 남미에는 지금까지 인구의 90% 이상이 카톨릭으로 국교화 되어 있으며, 가장 중요한 문제는 3세기가 지난 지금의 국가 경제와 개인의 형편,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질을 비교해 보면 남미 제국들은 거의 최저 임금이 월 $50에 미치지 못하는 나라들로서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되어 있고, 스칸디나비아 반도 5개 연안국가들은 세계 일등 복지국가들로서 국민소득 최상위권의 나라들로 변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시편 54편에 기록된 내용과 같이 하나님이 개혁신앙을 안정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다는 사실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민족으로서 세계 백인 민족을 가정부로 채용하여 고용주의 위상을 가지고 살고 있는 곳은 지구상에 남미지역 뿐일 것으로 생각된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나 북미 지역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역사의 교훈이요 신앙 삶에 대한 역사의 해답이다.
⑵ 검은 대륙, 검은 동네
아프리카는 검은 피부의 사람들이 사는 국가들이다. 인류 국가들 중에서 가장 미자립성을 가진 나라들이 아프리카 국가들이다. 이들 국가나 민족들은 항상 피선교대상국으로 분류되었지만, 성경 역사에서 아프리카 민족은 유대인들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이 역사의 주역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있었던 사실은 성경기록 여러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과거 유대의 백성들이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애굽에서 한 종족을 이루고 살았던 사실과 출애굽의 거대한 역사적인 사건과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아프리카 출신의 인명들을 볼 때 아프리카 민족의 일부가 역사의 중심권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기원이 시작되는 예수 이후에 아프리카는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지 못하고 늘 열악한 후진국 대열에서 저주받은 인종으로 분류되어 왔다. 아프리카는 지금도 에이즈(AIDS)의 발병지로 인구 30% 이상이 지옥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저주받은 땅, 검은 대륙은 이미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처음부터 제외된 지역이다. 최근에 재건되어지는 아프리카 국가들은 과거 영국 식민지 시절에 이미 대다수가 기독교인들이 되어 있었음에도 2차대전 이후에는 토착종교의 재건운동을 벌이며 선교사 추방운동 등 반기독교적인 정서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다.
출애굽의 역사 이후 영국과 불란서 등 유럽국가들의 식민지 시대를 통한 선교정책의 실책과 2차대전 후 아프리카 종족들의 독립에 따른 신생국가들의 출현으로 토속종교의 부활운동은 아프리카 기독교의 마이너스 성장과 회교권의 강한 진입을 유도하는 결과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아프리카 검은 대륙을 역사의 외곽으로 밀려나게 만들었다.
⑶ 세계의 미아리 고개
한국인에게 미아리 고개는 전설적인 옛 고갯길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인간의 미래를 점쳐주는 많은 역술인들이 모여 있는 소위 역술인 밀집지역으로 인식되어지고 있다. 역술인들이 제 나름대로 어떤 신과의 관계를 전제로 미래를 알아내는 예언행위를 함으로 불안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미래의 길흉사를 알려줄 뿐 아니라 운명의 진로를 사전에 교정시켜 주는 조건으로 굿판을 벌리거나 액운을 면케 해 주는 부적을 써주는 일로 복채를 받아 살아가고 있는 역술인 타운이다.
이 지구상에 이와 유사한 집단들이 사는 지역이 서남북 아시아 지역이다. 세계 4대 종교권에 들어 있는 불교(佛敎)나 회교(回敎), 그리고 힌두교가 이 지역에서 발생되었고, 그 종교의 영향권에 살고 있는 많은 종족들이 나름대로 포교에 힘을 쓰며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기독교를 위시해서 모든 종교들이 이 아시아 지역에서 시작되었는데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들은 그들 종교의 발생지나 그 인근 지역에서 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의 본 고장도 소아시아 지역으로 동양권에 속한 지역이지만 일찍이 바울의 마게도니아 환상으로 서쪽을 선교지로 결정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서양화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기독교는 서양 종교로 인식되어져 왔다. 하나님께서 원래 동쪽으로 갈려고 했던 바울의 전도 여행을 서쪽으로 바꾸도록 한 것은 이런 잡다한 종교들이 많은 지역을 피하게 하기 위한 배려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이 지역에는 다양한 신을 섬기는 토속신앙들이 팽배해 있기 때문에 어쩌면 온갖 무속신앙들의 집산지인 한국의 미아리 고개를 연상하게 된다.
성령이 피해간 곳, 그리고 하나님의 관심이 떠나버린 이 지역 역시 역사의 진행 대로에서 벗어난 지역이고 역사의 주역으로 참여할 자격을 상실한 나라와 국민들이다.
⑷ 돈 많은 섬 동네
지구를 돌아보면 30/60도 통로를 벗어난 위치에 있는 많은 나라들 중에 국민소득이 5000불을 능가하는 나라는 별로 없다. 60도 이북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5개국은 이미 설명한 바이지만 그 외 중동의 몇 나라를 제외하면 거의가 빈국들이다. 그 중에 유일하게 30도 60도 상에 있는 나라로서 비기독교국가인 일본이 세계 경제대국으로 존재하고 있다.
어째서 수천 종류의 신을 섬기는 우상의 나라,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문화를 가진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이며 역사에 깊이 참여하는 나라로 그 위상을 높이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모든 기독교인들의 궁금증이고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주관하시는 역사운영에 비기독교작인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풍요한 나라 중에 하나로 복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어떤 설명이 필요할까? 이것은 본 책의 내용이 함축하고 있는 역사논리에 가장 모순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경제적으로 풍요한 것을 축복의 부분적인 기준으로 삼는다면 일본이 누리는 지상에서의 축복에 대한 그 정당성에 대해 논리 없이 "순전히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요 뜻임으로 그 의중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우리로서는 하나님 자신의 뜻"이라고 예외 규정을 둘 수밖에 없는 것일까?
과거 역사에서 하나님이 운영하시는 역사의 대로를 거치면서 지상에서 풍요의 축복을 받지 않는 나라는 없었으며 또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로서 풍요의 축복을 받은 나라 역시 전무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일본은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가 아니면서 어떻게 풍요한 삶을 누리는 민족이 되었을까 하는 문제와 그 정당성을 역사논리에 근거해서 주장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단편적인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로마 교황청 중심의 구교 세력들이 교권 만회와 위기 돌파를 위해 세계 선교에 박차를 가하면서 종교개혁에 대한 반격을 시도했었다. 그때 포르투갈(Portugal)과 스페인(Spain)에서는 카톨릭교 지도자들이 큰 위기의식을 느꼈고 그 위기를 탈피하기 위해 해외 선교에 많은 힘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때 이 지역의 예수회라는 선교기관은 중남미 선교와 인도를 중심한 서북 아시아 지역과 중국을 발판으로 한 극동 선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예수회에서는 극동선교를 위해 1549년경에 프란시스 사베에르(Francis Xaviel)를 먼저 일본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그는 규슈(九州)에서 전도하면서 일본 통치자였던 오다(織田信長)와 교분을 갖게 되었고 그로부터 그의 배후세력으로 복음 사역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었으며, 오다의 후계자 도요도미히데요시(豊臣秀吉)로부터도 신임을 얻게 되어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 때 일본 군사들로 하여금 우리나라에도 비공식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었다.
일본에 있어서 개신교는 예수회의 카톨릭 선교 훨씬 뒤인 1559년경(安定 6년)에 미국 감독 교회의 C.M.Woolyams와 T.Lygins 선교사로 인해 시작되었고, 또 개혁파인 G.F.Fulooubeky목사가 나가사끼(長崎) 지방을 복음화함으로 선교가 시작되었다.
이런 역사의 기록으로 볼 때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먼저 복음을 받아들였고 한일합방(韓日合邦)이 전개될 무렵인 1907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과 1910년 한일합방의 비극적인 사건의 와중에서 일본의 기독교 목사와 지도자들이 한일합방에 대한 침략성과 그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 자국 정부에 항거하고 한국에 대한 침략행위를 질책하는 양심운동과 신앙양심을 고수하다 순교자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그 중에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운동을 전개했던 우찌무라간죠(內村鑑三) 목사나 혼마찌(本口丁) 교회 고야마(小山宗祐) 목사 그리고 야마구찌(山口弘立) 목사, 오사까(大阪)의 고다시(小出明治) 목사 같은 이들은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었으나 굴하지 않고 스스로 순교자의 길을 택하면서까지 복음적인 양심으로 한일합방을 반대했었다.
그리고 조선 침략의 와중에서 1910년 10월에는 고베(神戶) 조합 교회에서 제26차 신도총회를 열고 거대한 전도지가 될 조선인 전도 착수에 대한 의결을 했는데 그로부터 8년 후인 1918년에 한국에는 70명의 교역자가 파송되었고 149개처의 교회가 개척되었으며 13,631명의 신도들이 일본 교회에 등록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은 1868년에 이미 명치유신(明治維新)을 시행함으로 복고주의 정책에 신도(神道)를 국가 종교로 선포했지만 일본 내의 기독교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기록상으로는 일본 정부가 조선인의 동화정책(同和政策)의 일환으로 일본 기독교의 선교를 용납했다고 하지만 조선인에게 복음을 전수하여 많은 결실을 맺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진행에 앞서 복음전수의 사명을 이행한 민족으로 일본을 새롭게 조명해 볼 가치가 있는 것이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지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우찌무라 목사는 자국 정부의 조선 침략과 합방을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조선은 정치적 자유와 독립은 잃었다. 그러나 조선은 심령적 자유와 독립을 획득하려 하고 있다. 하나님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치 않았다. 그러나 조선에 성령을 보냈다."
예언자와 같은 우찌무라 목사의 말은 21세기를 예견한 위대한 예언이며 마지막 날에 한국인의 사명과 그 책임을 영감 있게 대언한 것이라 생각한다. 성령은 일본보다 한국을 선택했다고 그는 믿었던 것 같다.
이런 일본의 기독교사적인 배경은 이 역사의 대로 선상에서 선대의 순교자적 피흘림으로 보응을 받는 지상의 축복을 반증하는 증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과 유대인들과의 관계이다. 일차대전 발발 이후 2차대전으로 이어지는 과정과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 이르기까지 언 유럽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추방과 학살 등 배척운동을 벌이고 있던 당시에 그곳에 살고 있던 많은 유대인들은 돌아갈 곳과 피난할 곳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참으로 절망스럽고 위기에 처한 곤궁스런 시기였었다. 이때 유럽에 상주해 있던 두 일본 영사는 본국의 명령을 무시하고 유대인들에게 입국 비자를 대량 발급해 줌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일본으로 피난할 수 있었고, 오스트리아, 폴란드, 러시아에서 온 2만명이 넘는 그들은 고베에 정착할 수 있었다. 2차대전 말미에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앞두고 전쟁의 기밀 문제를 이유로 일본 수뇌부는 그들을 추방하여 중국 상해(上海)지역 홍커우(虹口)로 이주토록 하여 중국의 신세를 지게 되었으나 한동안 위기에 처했을 때 일본의 도움을 크게 받았던 사실이 있었다(News Week. 1996. 10. 2/9).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민족들 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피난처와 휴식처를 제공해 주고 후히 대접을 잘 했던 인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보응을 받게 되는 사실을 성경 여러 군데서 발견하게 된다. 이런 배경으로 생각한다면 일본이라는 국가가 지금은 잡신의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위기에서 구해준 덕목에 힘입어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보응으로 현실의 축복을 누리고 있지 않을까도 생각된다.
이런 일본의 기독교사적인 배경은 이 역사의 진행대로 선상에서 선대의 순교자적 피흘림과 하나님의 자선들이 쫓겨다닐 때 피난처를 제공해 준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지상 축복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선조들의 피의 대가로 역사의 대로에서 부자 동네를 이루고 사는 일본, 그들은 남은 역사, 새로운 대지를 바라보며 선조들의 발자취와 기독교사적인 역사의 진행과 의미를 새롭게 깨달아야 할 민족이다.
6. 뉴 실크로드
1996년 3월 1일 태국 방콕에서 개최된 아시아, 유럽 정상회담(ASEM)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범아시아 철도 건설을 제창했다. 이 범아시아 관통 철도는 기존 아시아권 철도를 이용하여 부분적으로 신설되는 철도를 연결하여 아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철도가 되도록 건설하는 것인데, 두 갈래의 철도가 건설되게 된다. 중국을 관통하여 옛 실크로드를 따라 유럽으로 연결되는 철도와 배트남과 인도를 연결하는 서남아시아권 국가들을 연결하는 철도를 말하는 것이다. 아시아 대륙을 관통하여 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이어지는 육로로는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실크로드가 있다. 한국의 김대통령은 기존 건설된 철도들을 새롭게 잇고 연결하여서 아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철로(6400㎞)를 건설하고 북한을 설득시켜 북한의 철도를 개방케 함으로 남한에 이르도록 하는 철도 건설을 제창했다. 그리고 동년 3월 3일 방콕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북한을 설득하는 문제에 대해 가능성을 피력했었다.
이 범아시아 관통 철도문제 역시 이미 하나님의 예정된 사역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역사의 진행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것은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 각 민족들 중에서 이미 선택해 놓은 우리 민족을 사용하시기 위한 확실한 계획임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종합해 보면, 만일 스탈린으로 하여금 한국인을 가장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하여 60여년 전에 중앙 아시아로 이주시키지 않았다면 누가 이 땅에 복음을 전할 수 있겠으며 어떤 말로 이 사람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듣게 할 수 있었겠는가? 미국의 역사학자들이 언급한 바대로 타민족으로서 이 이슬람 문화권에서 알라(Ala)를 신으로 믿지 않는 민족은 오직 한국인들뿐이고 과거 1800년 동안 서방 교회들이 그토록 노력했으나 복음 전수에 실패한 이 나라에서 홍수같이 흘러 들어가는 복음의 물결이 현지 한국인들에 의해 강하게 흡수되어지는 사실은 한국인을 이용하여 마지막 때에 역사를 마무리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계획이 성취되어 가는 분명한 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옛 실크로드는 유럽과 소아시아에서 시작하여 중국으로 이어지지만 중국의 중심지인 씨안(西安)시가 종착점이며 중국 쪽에서는 시작점이 된다. 범아시아 철도 건설은 육로로 이어지는 철도이긴 하지만 옛 실크로드의 재건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고 중국에서 끊어지는 이 길을 한국으로 연장하는 새로운 계획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김영삼 대통령의 뉴 실크로드 건설을 위한 제안과 ASEM에서의 합의는 이미 계획된 하나님 자신의 역사 진행 계획에 정확히 부합되는 일로서 역사의 필연성으로 부각되어지는 일이다. 이 끊어진 도로를 중국과 북한을 관통하여 남한 땅까지 연결할 수 있다는 사실은 환상적이다. 만일 이 도로가 연결되면 30/60 Highway상에서 시작에서 끝으로 연결되는 역사의 마지막 공사가 될 것이며 이 길은 거대한 아시아 대륙에 휴즈선으로 깔려지게 된다. 그것은 바로 남은 땅 아시아 대륙을 관통하여 예루살렘까지 연결하는 휴즈선이 되는 것이고, 이 휴즈선의 첫 부분인 부산에서 불을 켜면 유대 땅 예루살렘까지 불을 밝히게 된다. 이렇게 연결된 휴즈선을 통해 무수한 전구로 연결되는 길이 뉴 실크로드가 될 것이며, 이 길이 복음의 불로 완전히 밝혀질 때 주님이 다시 오시게 되는 것이다(마 24:14). 결국 우리 민족이 아시아 대륙을 모두 밝혀 마지막 땅까지 복음을 전수하는 사명을 완수하게 되고 이 때 주님을 영접하는 민족으로 역사를 마무리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욱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앞 장에서도 언급된 사실이나 범아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고도(古道) 실크로드 주변에 많은 한국인(고려인)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분명 아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역사의 견인자들로서 우리 민족의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이행해 나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이 어떻게 마지막 사명자가 되기 위해 실크로드 주변에 흩어져 있느냐 하는 사실과 어떻게 이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왔느냐 하는 사실은 역사의 당위성으로 하나님 자신의 계획이었음을 확실히 알게 된다.
실크로드를 이어가는 국가들과 민족들은 사실 우리 민족과는 아무런 역사적인 관계가 없다. 우리 민족과 정치적인 연결고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지배나 피지배권에 속한 위치에 있어본 적도 없으며 역사적인 유대관계 뿐 아니라 문화적인 배경이나 어떤 종족의 뿌리에서 동일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종교적인 배경을 같이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타 민족사회에 수많은 우리 민족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일 뿐 아니라 단지 세기의 독재자 스탈린의 정신질환적 발작에 의해 일본의 압제를 피하기 위해 연해주 일대에 살던 우리 민족을 강제로 이주해 살게 한 이유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고 우리 민족이 21세기에 역사의 주역일 뿐 아니라 예수의 재림을 맞이할 선택된 민족임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해주는 해답을 얻게 된다. 이것은 절대자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다. 60여년 전에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던 우리 민족의 슬픈 사연은 바로 21세기 마지막 시대를 위해 준비된 역사의 과정이었음을 인식함으로 새로운 실크로드 건설이 암시하는 그 깊은 의미를 새로운 역사의 진행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더 정확하게 뉴 실크로드 재건을 제창하고 이 역사의 당위성을 확실히 인식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⑴ 부산에서 예루살렘까지
이 뉴 실크로드가 철길로 바뀌어서 중국 서안에서 연장되어 북한의 평양을 통과하여 부산까지 연결되어 지면 부산은 뉴 실크로드의 출발점이 된다. 예전에 건설되어 있는 이 철도가 이념의 벽을 허물고 남북한 국경의 문이 열려져서 경의선(京義線)으로 다시 개통될 수 있다면 중국 서안까지의 철도는 이미 개통한 상태나 마찬가지이다. 지구의 도면을 펼쳐놓고 새롭게 시작되는 뉴 실크로드를 따라 부산에서 예루살렘까지 붉은 줄로 연결해 보면 참으로 가슴이 뛰고 마음이 바빠지며 감격스러워진다. 하나님 자신이 이전에 세운 계획과 그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에게 섭리해 오신 역사의 진행 과정과 앞으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분명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 범아시아 철도건설에 있어서 한국의 김대통령은 북한을 설득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자신했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뉴 실크로드의 완성은 이미 우리의 목전에 와 있는 것이다. 이 시기상의 문제에 있어서 북한이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현실적인 문제이지만 하나님의 주관 하에 시행될 이 역사의 진행은 북한이 인위적으로 거부할 수 없도록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북한이 역사의 진행을 수용함으로 새로운 역사의 변혁, 즉 남북한의 통일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믿어진다. 그리고 이 실크로드 주변에 있는 한국인 디아스포라들이 대부분 북한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과거 60년 동안 수난의 삶을 살아온 이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역사의 마무리 사업을 펼쳐 나가실 것으로 믿어지며,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맑게 청소된 그들의 마음 바탕을 이용하여 성결한 일을 진행하실 것으로 믿어진다.
부산을 기점으로 한 이 뉴 실크로드는 서울, 개성, 평양으로 이어지며, 중국 단동, 연길, 서안 우루무찌, 그리고 카자흐스탄의 알마타와 심켄을 경유하여 타지크스탄과 파키스탄을 통과하여 이란과 이락을 거쳐 요르단에서 요단강을 건너 예루살렘으로 이어진다. 이 도로를 따라가는 길은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라고 언급하신 사도행전 1장 8절 이하의 말씀과 관계하여 예수님의 자상 명령을 완수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성경적인 길이 될 것이다. 또한 뉴 실크로드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재림을 즐겁게 맞이할 순례자들의 길이 될 것이다.
⑵ 이념 국가들의 울타리들
30/60 역사의 통로를 설정하여 마지막 땅으로 인식되는 서쪽 태평양 연안에서 이스라엘까지를 지구본에 선을 그어보면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통로에 들어가는 24개국 중에서 두 이념의 국가군을 발견하게 되는데 한 군(群)은 공산주의 이념 국가들이고 다른 한 군(群)은 이슬람 종교군의 나라들이다. 놀랍게도 유일하게 기독교가 왕성한 국가로서 자유 민주주의 국가는 한국(韓國)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 거대한 아시아 대륙의 꼬리에 붙어 있는 작은 땅 한국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기는 민족이 사는 나라라는 사실이 신비롭기도 하다. 이 거대한 대륙, 수많은 민족 중에서 회교권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를 제외한 나라는 작디작은 한국뿐이다. 바로 이 대륙의 작은 나라가 마지막 시대, 마지막 역사를 갈무리해야 할 국가와 민족으로 선택되어 있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여겨진다. 이제 우리 민족이 마지막 땅, 마지막 시대를 책임져야 할 확실한 위치에 서 있음을 확신해야 할 때이다. 비록 1992년에 구소련의 붕괴로 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하고 서방국가들과 같이 자유 민주주의적 국가로 전환하고 있지만 북한과 중국은 아직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그 외 아시아 서쪽 모든 나라들이 공산주의의 잔여사상과 강한 이슬람 문화권 속에서 아직은 정교일치의 영향권에서 국가가 운영되고 있다.
24개국의 20억 이상 인구들이 이 두 이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아직은 견고한 울타리를 허물지 않고 있다. 과거 서방 국가들과 특히 서방 기독교 교회들이 이 울타리를 허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1800여년의 세월을 결실 없이 흘려 보냈다. 그러나 대륙의 꼬리에 매달리듯 불안하게 붙어있는 작디작은 한반도의 한국인들이 이 울타리를 불원간에 허물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92년이래 많은 울타리들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높은 담장이 그 높이를 줄여가고 있고 중앙 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울타리의 빗장을 풀어놓고 있다. 가장 견고한 울타리를 치고 있는 이락 같은 강성 회교권 나라에는 미국과 사방 연합국가들이 무력을 동원하여 울타리를 부셔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견고한 울타리는 개개인이 닫고 있는 마음의 울타리들이다. 공산주의적 이념의 울타리나 회교 신앙의 견고한 종교적 울타리를 허물기 위한 노력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이 일을 사명으로 인식하는 민족은 마지막 역사의 대로에 속해 있는 민족 중에서 단지 한국 민족뿐이다. 많은 교회와 기독교인들, 그리고 실업인들과 개개인의 사명을 지닌 사람들이 현지에 살고 있는 현지 비기독교인들이 닫고 있는 마음의 빗장을 벗기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 이것이 역사를 진행시키고 또 마무리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⑶ Something Happening
미국 학자가 제시한 역사의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변동조짐이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연결고리(Korea-Uzbek Connection)로부터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재음미하지 않더라도 이 지역에서 발생되는 급진적인 변화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우즈베키스탄의 카리모브(Karimov)대통령이 한국을 두 번이나 방문했고, 한국 대통령이 그 나라를 답례 방문하는 양국의 외교적인 발전이나 한국의 대기업인 대우가 진출하여 자동차 생산공장을 새워 우즈베키스탄 역사이래 가장 큰 사업을 시작한 일이나 한국을 모델로 하여 새로운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국가 원수의 집념 등 일련의 시대적인 변화는 무엇인가 큰 역사의 움직임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뿐만 아니라 21세기에 접안하는 시점에 ASEM에서 제창한 뉴 실크로드 건설의 의미가 커지는 가운데 한국에서 그리고 특히 뉴 실크로드의 시발점인 부산에서 많은 역사적인 이벤트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2002년에 개최될 아시안 게임,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그리고 2000년에 ASEM총회 개최 등은 21세기 인류의 시각을 모으는 중대한 행사들이다. 인류의 시선을 모으는 일은 또 하나의 시작을 알리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996년도 10월 28일,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UN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이사회에서는(ESCAP) 남북 철도 연결뿐 아니라 아시아 고속도로 건설사업의 추진과 아시아철도북부노선 개통에 대한 합의(11월 9일자, 한국, 동아일보)에 북한 대표 최재현 주인도대사가 동의하는 역사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다.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Something' Happening),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서 어떤 역사의 변동 조짐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그 역사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인식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할 때이다.
7. 10/40 Window Movement(10/40 창문) 운동하는 세계 크리스천들
미국을 중심하여 세계 교회들은 위도상의 북위 10도와 40도 사이에 생기는 지역을 하나의 창문으로 설정하고 이 지역을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며 지원하는 10/40 Window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들이 이 지역을 선교의 대상 지역으로 설정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A) 역사적이고 성서적인 입장에서
⑴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하나님이 주신 땅을 지배할 권리(창 1:26)를 받은 후 그 권리 행사를 시작한 땅들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⑵ 바벨탑을 세워 하나님을 대적한 인류를 저주하여 언어를 갈라놓고 민족을 분산시킨 그 지역이 이 땅이기 때문이다.
⑶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흥망성쇠의 역사를 누렸던 모든 국가들의 땅이 이집트로부터 메소포타미아까지 모두 이 땅 속에 있기 때문이다.
(B) 잃어버린 양들이 많은 곳이기 때문
서아프리카로부터 아세아에 이르기까지 64개 국가와 33억의 인구로 구성된 이 지역은 땅 면적이 세계 전체 땅의 1/3이며 이중에 55개국이 비기독교 국가이고 97%인 30억의 인구가 비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선교 대상국으로 설정하고 있다.
(C) 이 지역은 이슬람의 중심 지역이기 때문
북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이 모두 회교국들이고 회교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그러나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민족 중 모두가 이스람교도들이지만 한국인은 유일하게 비이슬람교도들이다).
"Yet at the same time, it is reported that many Muslims -having studied the Korean in great depth- have discovered in the process that the highest prophet described in the Korean is Jesus Christ and not Muhammad."
(D) 세계 3대 종교의 발생지이기 때문
불교, 회교, 힌두교의 발생지로서 이 지역에는 32억의 인구 중 22%인 7억 6백만이 모슬렘 교도이고 22%인 7억 7백만이 힌두교도이며 5%인 1억 5천 3백만이 불교 교도들이다.
(E) 세계의 빈국들이기 때문
이 지역에서 50개국이 최빈국의 24억 인구가 살고 있는 곳이다(그러나 이 지역에서 봉사하는 선교사는 현재 세계 전체 선교사의 8%에 불과하다).
(F) 삶의 질이 낮은 곳이기 때문
이 지역의 세 가지 조건이 삶의 질을 낮추고 있다.
1. 삶에 대한 소망이 결여되어 있고
2. 영아 사망률이 높으며
3. 교육이 결핍되어 있다.
이런 상황을 볼 때 시편 기자의 고백과 같이 여호와를 믿는 국가는 복을 받는다(시편 67:1-2절)는 사실을 너무나 잘 입증하고 있다.
(G) 10/40 Window Movement, 그 창문을 열어놓고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들에 대한 구원의 약속과 구속사적인 측면에서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의 은총을 받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고 또 성경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인식해야 될 문제는 앞 장에서 수없이 언급되었지만 역사에는 하나님의 의지로 운영되는 역사의 대로가 있고 그 대로에는 처음(α)과 마지막(Ω)이 있다. 10/40 지역에 생존하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대상이고 선교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어떤 배역을 가지고 참여할 위치에 서 있지는 못한다. 역사의 순환적인 진행에 어떤 배역으로도 참여할 수 없는 민족들이기에 10/40 Window Movement는 구속사적인 선교 운동으로 피선교인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목표는 되지만 마지막 땅에서 구속사의 완성에 참여할 수 있는 민족이나 국가는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 지역의 민족이나 국가들 중에서 30도 이하에 머물고 있는 민족들이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이탈하여 구약시대 이후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되는 새로운 창조권(기원)에 들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수용치 않는 나라들이었다. 이들 민족들 중에는 구약 시대를 중심으로 이미 하나님의 역사 운영에 참여했던 민족과 나라들이 있었지만 새 기원시대 이후 그 일부는 외곽으로 벗어난 민족이 되었다.
시대 말인 마지막 세대에 한국 교회가 설정할 새로운 운동은 3-/60 High Movement가 되어야 하고 1800년대 미국 대학생들이 제창했던 "우리 세대에 복음을 땅끝까지"라는 슬로건 못지 않게 "우리 세대에 역사를 마무리하고 재림의 주를 맞이하자"를 외치며 역사의 현장에서 우리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8. 역사 바로 가기
한국의 문민정부는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전개함으로 부정한 과거사를 새롭게 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는 발상이다. 역사의 진행은 과거의 잘못을 교정하는 일이 아니다. 역사란 지울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기록들이다. 기록의 오류는 고칠 수 있지만 기록된 역사의 잘못된 행위를 바로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후세에 올바른 역사가 세워지도록 우리 모두가 바른 가치관으로 역사에 참여하며 후대에 진실을 전해주는 역사 바로 가기 운동을 전개할 수 있지만 결코 과거사에 대한 역사 자체를 바로 세울 수 있는 방법이 물리적으로 시행될 수 없는 일이다.
역사 바로 세우기는 어느 한 사람이나 어떤 공권력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설령 어떤 힘으로 역사 바로 새우는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 역사가 바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잘못을 밝히고 그 잘못을 응징하는 일은 미래에 대한 어떤 가치관의 잣대는 될 수 있겠지만 지나간 역사를 바로 세워 놓는 일은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다. 역사는 이미 과거에 완료된 일이기 때문이고, 또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이다.
역사를 바로 세우겠다는 생각은 지극히 위험한 발상으로서 인류의 어리석은 선조들이 바벨탑을 세워 신에게 도전하려 했던 불경스럽고 교만한 행위와 같은 것이다. 피조된 인간이 창조주의 위상을 탐하려 했던 이 선조들의 교만에 대해, 신은 인류에게 언어의 교란과 삶의 터전을 분리시킴으로써 인류의 삶이 민족별로 대별되는 질곡된 삶의 형벌을 내렸다. 신에 대한 우리의 무모한 행위가 우리의 후대에 어떤 저주를 물려주게 될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역사를 바로 세우겠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 역사의 주인이신 그분 자신의 영역을 침해하는 지극히 불경스러운 행위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1세기를 맞는 우리 국가는 역사 바로 세우기보다 역사 바로 가기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역사 바로 가기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그 뜻을 좇아가는 것이고, 그 역사의 주인이 가르쳐준 바른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역사 바로 가기 운동은 이념적이고 정신적인 운동이지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삶의 길, 그리고 역사가 진행하는 지형학적인 길을 바로 찾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실크로드를 따라가는 사역자의 길, 그 길이 역사의 바른 길이며, 윌리엄 캐리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 그의 위대한 모든 것을 기대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삶의 길리 역사 바로 가는 참된 길이기도 하다.
1) 큰 길 가기-국가
우리 국가는 세계 질서 속에서 역사가 진행되는 바른 길로 나아가야 할 뿐 아니라 특별히 우리나라는 역사의 참된 길을 건설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역사가 진행하는 길, 그 길 앞에는 장벽이 높고 장애가 많이 있다. 21세기를 향하는 우리는 역사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대통령의 아시아 관통 철도 건설에 대한 제안이라든지, UN산하 아시아개발국협의회(ESCAP)의 아시아 횡단 고속도로 건설의 합의가 보여주는 일련의 움직임은 새로운 역사의 바른 길 건설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런 역사의 바른 길이 21세기를 열고 인류 역사를 마무리하는 뉴 실크로드로 건설될 것이다.
그러나 이 길에 가장 큰 장애는 아직도 개통되지 않은 북한을 통과하는 길 400여 ㎞이다. 이 길이 개통되는 때가 우리 민족에게는 통일의 날이 될 것이다. 또 이 길은 역사의 진행에 지난 반세기 동안 단절되어 온 길이기 때문에 이 길이 필연적으로 불원간 개통되어질 것이다. 역사의 바른 길 건설에 우리 국가는 이 시대적인 사명을 다해야 하고, 이 역사가 진행하는 길목에 선 우리는 복음 전수자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ASEM총회에서 우리나라 대통령이 제시한 아시아 대륙 횡단 건설에 대한 제안은 바로 뉴 실크로드를 의미하는 것이고, 우리나라 대통령은 역사의 부름에 부응하는 사역을 감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국가는 남은 시대의 역사를 햇살같이 밝히고 낙조(落照)의 아름다움으로 그 문을 닫아야 하는 인류 역사의 마지막 파숫군으로서 21세기를 맞이하며 큰길을 가꾸어 나가야 한다.
2) 바른 길 가기 - 한국 민족
30/60 Highway상의 지형학적인 조건에서 볼 때 나머지 땅 아시아 대륙 전체가 회교권 국가와 공산주의 이념 국가로 지배되어 오고 있다. 이 이념적이고 종교적인 범주 안에 살고 있는 수십억 인구들이 세계 인구의 1/3이 넘지만 이 모든 사람들이 지난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한 부류는 자율적인 선택으로 마호멧, 즉 회교권 정신에 귀속되어 버렸고, 불교와 유교권에서 정체되어 있던 중국 민족은 비자율적이기는 하지만 정치가들에 의해 이념 국가인 공산주의 사상에 묶여 살아왔다.
인구 20억이 넘는 아시아 대륙에서 유일한 자유 민주국가로서 기독교 사상이 살아 움직이는 민족은 유일한 한국 민족뿐이다. 바로 이것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이 시대에 유일한 장자(長子)민족으로 선택되어졌다는 사실이다.
남은 시대를 마무리할 역사의 길은 한국의 부산에서 시작되어 예루살렘까지 이어지는 뉴실크로드이다. 이 역사의 진행 앞에서 복음의 씨를 뿌리며 나아가야 할 길, 이 길은 역사를 마무리하는 우리의 의로운 길이며, 바른 길이다. 역사를 이끌어 가야 할 우리 민족의 길이다.
의롭고 바른 마음으로 역사를 이끌어야 한다.
3) 옳은 길 가기-한국 교회
한국 교회는 바울 사도의 마게도니아 환상을 재인식하며 한국 교회가 역사의 견인력을 배양시키고 마지막 시대에 시대적인 사명을 다해야 한다. 30/60 Highway를 달려온 지난 역사를 통해 세계교회가 질적으로 부흥되어 왔던 시절은 기적이라 표현할 수 있는 놀라운 사회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교회가 양적으로 발전했던 시대 말의 사회상은 부패와 타락, 그리고 정교(政敎) 혹은 경교(經敎)유착의 비리가 사회를 종국적으로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한국교회도 역시 경이로운 발전을 해왔다. 교회의 발전이나 부흥은 사회 도덕성과 비례할 수 있다. 더 솔직한 표현은 교회의 발전과 사회 범죄의 대비가 정비례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사회에 기독교인이 10% 늘어나면 사회범죄율도 10% 이상 줄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지난 100여년간 국민 전체 인구의 30%를 능가하는 교인들로 기독교의 양적 발전을 가져왔지만 사회 범죄율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이 객관적 수치를 벗어나서 체감적인 사회현상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한국 교회가 사회정화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한국 교회가 질적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역사의 방정식으로 볼 때 국가나 민족이 위기상황에 처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역사의 진행로에 바로 서서 구국적인 결단과 역사 바로 가기 위한 그 책임을 통감해야 할 때이다. 한국 교회는 옳은 길을 찾아 과실(果實)성 있는 선한 길로 달려 나아가야 한다.
⑴ 누가 진정한 증인이 될 수 있을까?
증인(證人)의 원어는 순교자(殉敎者)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시대에 누가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지난 60여년 동안 기근과 죽음의 현장에서 시련의 세월을 살아가는 우리 북한 민족들에게 눈길을 돌려야 할 때이다. 왜 그들이 피를 나눈 동족인데 긴긴 세월을 시련과 고난 속에서 굶주리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스탈린에 의해 시베리아로 유배당했던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들,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의 삶을 우리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던가? 마지막 때, 환난의 시대에 복음의 정절을 지키며 땅끝까지 증인되기 위해 생명을 바칠 자 누구일까? 긴긴 날 시련의 세월 속에서 연단 받으며 살아온 북한 동포들의 몫이 아닐는지! 우리 한국 교회의 지도자, 그들이 환난 날에 증인으로 나설 수 있을까? 풍요에 비만되어지고 집단 이기주의의 삶에 젖어 살면서 충동적인 자기만족에 도취된 한국 기독교 교인들의 기복적인 신앙의 삶의 형태와, 변화 없는 자기중심적 신앙의 모순 속에서 거만해진 교인들이 어찌 증인이라 할 수 있는 순교자의 반열에 서서 그 생을 마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식량이 없어 굶주리는 우리 북한 동포들에게 식량을 보내주어야 한다. 사천만 한국 기독교인들이 버리는 음식만 아껴 모아 보내면 북한 2500만 우리 동포들이 굶주리지 않는다. 우리 국민이 버리는 년간 10조원의 음식을 절약하고 모아서 북한에 보낼 수 있다면 하루 한끼씩 절식하지 않더라도 결코 그들이 굶주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바른 길을 걸으며 한국 교회가 옳은 길을 가는 이 길은 북한을 관통하는 동토(凍土)의 길이며, 이 길이 녹아지지 않고는 이 역사의 길이 완성되지 못한다. 한국 교회, 그리고 한국 교인들은 각 가정에서 북한의 한 가정 돌보기 운동을 펼쳐 나아가야 한다. 그들이 우리 민족과 마지막 때를 위한 증인으로 세워지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⑵ 허물어져야 할 울타리
한국 교회는 옳은 길을 가기 위해 교파의 담을 헐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목회자의 경영 수완으로 부흥하는 양적인 발전을 지향하고 교회가 체인화하는 사업적인 운영에 교인들의 영적인 삶이 담보되어서는 안 된다.
신학교의 신학이 마지막 시대를 조명하는 통일된 신학으로 전환을 모색해야 하며 역사의 진행 앞에서 복음주의적 선교의 통일정책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역사의 진행을 위탁받은 우리 민족에게 마지막 때에 그 사명을 올바르고 성실하게 진행시켜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9. 21세기를 향한 한국 사회의 기초(基礎) 다지기
21세기는 한국과 한국인이 인류의 역사를 견인(牽引)해야 할 사명을 분명히 가지게 된다. 한국에 한국인에 대한 현실적인 시대의 요청은 우리 국가와 민족이 인류의 역사가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도록 그 견인력(牽引力)을 스스로 보양(保養)시키는 일이다. 우리 민족에게 인류의 역사를 견인해 나갈 만한 순수한 양심(良心)의 힘이 있는가? 우리에게 역사의 바른 길을 가기 위한 확실한 지표(指標)가 있는가?
인류의 역사를 바른 길로 견인하기 위해서는 강한 내적인 힘과 확실한 지표가 있어야 한다. 이 힘은 국민의 올바른 사고(思考)와 선한 양심의 바탕 저변(底邊)에서 매듭지어지는 바른 가치관(價値觀)으로 형성되어질 삶의 기초 위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되어지는 힘이어야 한다. 이차원적인 경제나 국방력과 같은 물리적인 힘이 국력으로 존재한다고 해도 집단이기주의(集團利己主義)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공동 사회의 도덕성(道德性)이 결여되어 지고 저마다 개인의 이익과 안일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적인 삶을 고집하며 시대적인 사명을 회피한다면 역사를 견인할 수 있는 힘은 결코 생성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국가와 민족은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새 역사를 올바르게 견인하는 책임 있는 민족으로서 새로워져야 하고 거듭나야 하는 각성(覺醒)운동이 사회 전역에서 일어나야 하며, 새로운 인성(人性)을 지니고 태어나는 우리의 영, 유아( , 幼兒)들을 위한 바른 도덕성과 가치관을 정립해 나갈 기초교육(基礎敎育)이 사회개혁 차원에서 시급하게 시행되어져야 한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는 21세기의 정신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21세기를 맞이하면서 태어나는 신생아(新生兒)들에게 새로운 교육과 감성적인 훈련이 절대적인 명제(命題)가 되는 것은 21세기 역사의 주체(主體) 그들 시대의 몫이기 때문이고, 그들에게 역사의 바른 진행을 위한 견인력을 배양해 주어야 할 책임이 21세기 초입에 머물고 있는 우리 세대의 몫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21세기의 새 역사 정립을 위해 한국 사회의 기초 다지기는 기성세대의 자성(自醒)과 변화, 그리고 새로운 희생의 바탕 위에서 신생아에 대한 새로운 기초교육 계획을 확실하게 세우는 것부터 시작되어져야 하고 그 교육의 바탕을 세워나가는 것이 21세기를 위해 우리가 준비하고 시행해야 할 가장 큰 과제로 인식하는 새로운 의식운동이 시작되어져야 한다.
역사가 진행되는 30/60 Highway상에서 우리 민족이 이 역사를 견인하고 갈무리해야 할 시대적인 사명을 역사의 전면에서 우리의 후대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를 생각해 볼 사념(思念)의 시간을 가질 때이다.
그리고 역사는 그분(Holy Spirit)의 행로(行路)에 대한 기록(His Story)이기 때문에 우리의 후손들이 어떻게 그분과 동행할 수 있는가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새 Vision 21세기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일에 뜻을 같이 나눌 때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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