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
목창균 교수(서울신대)
얼마 전 한국 가톨릭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꼽히는 분이 티브 인기 프로에 특별 출연하여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사실상,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 문제는 민감하면서도 조심스런 문제임에 틀림이 없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구원은 기독교에만 있는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구원에 이를 수는 없는가,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는가, 등의 문제가 현대 들어 조직 신학자, 종교 철학자, 종교현상학자, 선교 학자, 에큐메니칼 운동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20세기 후반에 처음으로 제기된 새로운 문제는 아니다. 이 문제의 기원은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까지 소급된다. 이스라엘 종교와 다른 종교들 혹은 여호와 하나님과 다른 신들의 관계는 가나안 정착 후 하나의 문제로 등장했다. 그 후 특히 교부시대에 들어서면서 타 종교와의 논쟁이 활발해지고 변증가들에 의해 기독교와 그리스 및 로마의 고전문화의 관계 문제가 여러 모로 해명되었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기독교만이 참 종교요 절대 종교라고 믿는 기독교 절대주의(Christian absolutism)의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종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절대 종교란 있을 수 없고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종교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가 일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는 기독교의 자기 이해를 위한 중요한 주제가 된 동시에, 다원주의는 기독교인에게 큰 도전과 위협이 되었다. 기독교처럼 자신을 절대적으로 유일한 종교 혹은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라고 주장하는 종교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여러 종교가 만나는 지점이므로 기독교와 타종교의 관계성은 민감한 문제인 동시에 목회와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는 실제적인 문제이다.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다 보면 "모든 종교는 다 마찬가지 아니냐, 어느 것이나 하나만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항변하는 사람을 흔히 만나게 된다.
필자는 종교 다원주의의가 어떻게 일어났으며 무엇을 주장하는지를 살펴보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한다.
1. 종교 다원주의의 태동
에덴 동산에서 인류가 추방된 이후, 종교적 다원화의 문제는 세계 도처에서 제기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구약시대의 여호와 하나님과 다른 신들의 관계 문제 그리고 교부시대의 기독교와 고전 문화의 관계 문제가 그 좋은 예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독교는 특히 중세 이후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기독교 절대주의의 입장을 고수해왔다. 그렇다면 현대에 들어와서 기독교와 다른 종교 문제가 관심과 논의의 대상이 되고 전통적인 기독교 절대주의에 대한 강한 도전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어떠한 이유 때문인가?
종교 다원주의의 태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추적될 수 있다. WCC의 종교 연합운동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과 비교 종교학자들이 종교적 다원주의를 제기했다. 기독교는 313년 로마제국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종교의 자유를 공인 받게 되고 그 후 데오도시우스 황제 치하(379 _ 395)에서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됨에 따라 로마 제국과 기독교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은 기독교 왕국이 되었으며 제국의 안정은 교회의 안정과 직결되고 제국의 적은 동시에 기독교의 적이 되었다. 이에 근거한 18, 19세기의 기독교 선교 정책은 서구의 식민주의 정책과 궤를 같이 하는 식민주의적, 제국주의적 선교 정책이었다. 서구의 군대가 동양의 나라들을 점령하면, 선교사가 뒤따라 들어가 기독교로 그 지역의 종교를 정복하는 정책이었다.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전통적인 선교의 목적이었다. 이러한 식민지주의와 제국주의는 결과적으로 기독교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전파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세계 대전을 전후로 하여 식민지 정책이 종식되고 식민지들이 독립을 획득하게 되자, 정복식의 선교 정책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54년 인도 정부는 개종을 주 목적으로 활동하는 선교사들은 철수하도록 명령했으며, 그 후 선교사들은 중국, 앙골라, 아랍 세계 등에서 동일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선교 상황이 이론과 실제 양면 모두에서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WCC의 연합 운동의 영향 아래, 다른 신앙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었던 선교지 최 일선의 일부 선교사들에 의해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그와 대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다른 종교들과의 대화는 공존의 논리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한편, 과학의 발전이 종교적 다원주의의 태동을 촉진했다. 16세기 이후 유럽에 발견과 탐험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콜럼버스, 마젤란 등이 기독교 세계 밖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으며 그 곳에 기독교와 서로 다른 종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역사, 인류, 과학 연구가들은 인류의 기록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세계의 다른 곳에도 종교의 유형들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동서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서구의 기독교인들이 다른 종교 권의 사람들과 빈번하게 접촉하게 되고 그들의 종교에 관한 문헌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자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문제가 긴급하게 일어났다. 특히 비교 종교학이 발전함에 따라 비교 종교학자와 종교사 연구가들을 통해 다른 종교가 기독교와 동일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일어나게 되었다. 19세기 종교사학파의 대표자, 트뢸치(Ernst Troeltsch, 1865 - 1923)가 그 좋은 예이다. 그는 기독교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종교의 상대주의를 주장했다.
이 같이, 최 일선의 일부 선교사와 비교 종교학자들이 제기한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는 지금 까지 배타적인 선교 정책을 고수해 온 기독교인들에게 당혹스러운 문제인 동시에 신학자와 종교 철학자들이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계속되어 왔으며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되었다.
2. 종교 다원주의의 근거
일반 학자들과 신학자들은 각기 다른 근거에서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한다. 일반적인 입장이 기초하고 있는 토대는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라는 신념이다.
기독교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종교의 상대주의를 주장한 19세기 종교사학파의 트뢸치가 이를 대변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며 제 각기 진리의 요소를 가지고 있음으로 어느 종교가 다른 종교 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다. 기독교가 기독교인에게 훌륭한 종교인 것처럼, 힌두교가 힌두교인에게는 훌륭한 종교이다. 기독교가 서구인에게 최상의 종교일 수 있으나 절대적인 종교일 수는 없다. 동양인에게는 불교와 힌두교가 동일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가 모든 사람, 모든 종교에 주어졌다는 것이 트뢸치의 근본 신념이었다.
둘째, 모든 종교는 동일하다는 신념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신다면 당연히 시간과 공간적으로 다른 문화와 상황 속에서 이일을 수행하실 것이기 때문에, 깊이에서 보면 모든 종교는 동일하며 길은 다르더라도 동일한 목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간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우연적인 것, 문화적인 것, 시대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모든 문화성과 우연성 배후에는 하나님의 신, 즉 공동의 본질이 있다고 주장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 윌프레드 스미쓰 등이 이를 대변한다.
셋째, 모든 종교는 공동의 심리학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이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각 개인에게 공통으로 존재하는 심리학적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견해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무의식 속에 기원을 가진 심리학적 사건으로 취급하여 그리스도의 유일회성과 절대성을 부정한다. 이것은 종교를 심리학으로 환원시키려는 는 일부 현대 심리학자들의 시도로서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이 그 대표자이다.
종교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이 일반적인 견해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다. 모든 종교를 상대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 상 하나님의 유일회적인 성육신이요 전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라고 믿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와 모순된다. 모든 종교가 공동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기독교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계시의 유일회성과 규범성 및 궁극성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거나 부정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공동의 심리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융의 주장은 종교를 지나치게 주관주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며 예수의 유일회성을 부정하고 단지 여러 구원자 중 하나로 간주했다.
이와 같은 비 기독교적이며 비성서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다양성에 대한 상식적인 견해는 일반 대중을 비롯하여 자유주의적 성향의 신학자들에게 직접, 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중에서 가장 극단적인 유형의 종교 다원론을 주장한 개신교 신학자는 존 힉이다. 그는 다른 종교를 판단하는 규범과 모든 종교의 중심을 그리스도에서 하나님으로 전환했다. 그는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신화로 이해하고, 하나님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참으로" 만날 수 있다는 식으로 기독교 전통 신앙을 재해석했다. 그리고 세계의 다양한 종교들은 동일한 신을 섬기고 있다는 극단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특히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God Has Many Names, 1980)라는 제목이 시사하듯이, 힉은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다른 신이 아닌, 동일한 신을 예배하며, 그 신은 여러 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모든 종교의 배후에는 하나의 긍극적 실재가 있으며, 기독교는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God)으로, 유대교는 아도나이(Adonai)로, 모스렘교는 알라(Allah)로, 힌두교는 라마(Rama)나 크리슈나(Krishna)로 부른다. 그러므로 힉은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전통적인 교리로부터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새로운 주장에로의 일대 전환을 제안했다. 이러한 힉의 견해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예배 현상의 유사성으로부터 한 하나님의 개념을 이끌어 낸 것으로 다른 종교와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혁명적 이론이었다.
힉 이외에도, 종교적 다원주의에 가까운 인물로 폴 틸리히, 윌프레드 스미쓰, 알란 레이스, 스탠리 사마르타 등이 있다. 가톨릭 신학자로는 니터, 파니카, 라너, 큉을 들 수 있다. 라너와 큉은 다른 종교를 기독교 안에 포용시키려는 포괄주의의 입장에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5) 선언문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했으면서도 진실로 하나님을 찾는 신도를 포함시키려 함으로써 포괄주의적인 입장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어쩔 수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했으면서도 하나님을 진실로 찾고 하나님의 은혜로써 자기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애쓰는 사람은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요약하면, 다른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는 성서적이어야 한다. 이 원칙을 벗어나면 이미 기독교가 아니다. 따라서 다른 종교에 대한 태도는 성서관에 따라 달라진다.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무오한 말씀으로 믿는다면 선택의 폭은 좁다. 예수 믿어야 구원을 얻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를 유일한 참 종교가 아닌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종교 다원주의의 문제점과 결정적인 오류는 무엇인가? 종교적 다원주의는 성경의 진리와 일치하지 않으며 원칙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데서 반(反) 성서적인 종교 다원주의가 일어났다. 따라서 종교 다원주의는 비성서적인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인 동시에 오류이다. 그것은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출발하여 이성적 방법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한 끝에 그리스도와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비성서적 결론에 도달했다. 기독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면 세계 인구의 70 - 80 %에 달하는 비 기독교인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인도주의적 관심에서 종교 다원주의가 일어났다.
이와 같이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인도주의적인 관점으로부터 기독교와 다른 종교 문제에 접근하여 합리적으로 구원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진리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성경을 오도하는 것이다. 첫째, 모든 종교의 신이 이름만 다를 뿐이지 실제로 동일한 신이라는 주장은 비성서적이다. 여호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한 성경 말씀이 이를 입증한다(출20:3, 23:24-25, 시96:5, 사44:6-8). 이름만 다르지 실제로 동일하면, 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경고했겠는가? 둘째, 종교 다원주의는 하나님의 계시 대신에 인간의 이성과 인도주의에 근거했다. 인간의 구원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원주의자들은 이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성경은 세상적인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다(고전1:21). 셋째, 종교 다원주의는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길과 좁은 문을 넓히려는 인간적인 시도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요14:6),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하였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17:3). 따라서 종교 다원주의는 성경의 진리를 거부하고 이를 다른 복음으로 대치하려는 인간적인 노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 절대주의와 종교적 다원주의를 절충하여 그 중간 길을 가려는 것이 포괄주의이다. 그러나 포괄주의는 양심대로 산 사람은 영생을 얻을 수 있다든지, 익명의 그리스도인, 미지의 그리스도개념, 그리스도와 예수의 분리 등의 개념을 받아들임으로써 원칙으로부터 반쯤 벗어난 것으로 이해된다. 양심이 구원의 기준이 된다는 것도 양심이 보편적이냐 상대적이냐 하는 또 다른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피레네 산맥의 이쪽과 저쪽의 양심이 다르다는 주장이 가능하지 않는가? 극단적인 예로 식인종의 양심과 기독교인의 양심을 비교할 수 있다. 식인종은 사람을 잡아먹어도 양심에 문제될 게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관습적으로 행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마음으로 사람을 미워해도 이미 살인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양심 심판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 역시 경계해야 한다(롬2:14 -15).
비기독교 권의 구원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것이 성서적이고 복음적이다.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께서 정의롭게 판단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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