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영원한사명)

[스크랩] 전문인 선교사 알렌과 언더우드

수호천사1 2009. 5. 26. 01:57

전문인 선교사 알렌과 언더우드

 

 

서론
 
1884년 10월 17일, 통신 수단의 혁명을 조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세워진 우정총국의 개막식은 피로 물들게 된다. 한 때 신사 유람단이란 이름으로 미국을 방문한 김옥균은 같이 다녀왔던 친구 민영익을 죽이고 개혁을 이루기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적 국가를 만들려던 그의 눈에 수구파란 처단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임오군란과 더불어 군주가 조선을 주도할 능력이 없음을 나타내는 계기가 되었고, 그 때 막 입국한 선교사 알렌에게는 하나님이 열어주신 기회가 되었다.

 정치적으로 수구파를 보호해야 했던 뭴렌도르프는 세 군데에 칼로 부상을 당한 민영익을 자기 집으로 옮기었고, 이를 살려 낼 의사를 늦은 밤 급하게 찾았다. 서양에서 온 의사를 찾아야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알렌을 부르게 되고, 민영익을 살려 낸 알렌은 조선의 국왕 고종의 신임을 획득한다. 사실 고종은 선대 왕들에게서 배운 데로 선교사를 경계하고 있었고 알렌을 선교사로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기술에 놀라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입국한 물리 교사 언더우드와 교육 사업가 아펜젤러를 보면서 고종의 마음은 변하고 있었다. 고종의 눈에는 그들이 가진 기술이 한 때 김옥균을 의지해서라도 받아들이려던 서양 문물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급기야 고종은 아펜젤러에게 배영 양재하라는 의미의 배재 고등학교의 이름을 하사하고, 갑신정변의 주도자 홍영식의 집을 알렌에게 주어서 제중원이란 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을 개원한다. 개신교 선교가 지속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사실 알렌은 원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비판을 듣는다. 스크랜튼이 금전적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였고, 선교 보고를 하면 본국 선교 위원회가 쓸데없이 간섭한다고 비판하였다. 남을 비판하던 그였지만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언더우드의 부인도 역시 의사였는데 그녀는 알렌이 선교비로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결국 알렌은 선교사를 사임하고 한국에 근무하는 미국의 영사로 변신하여 선교와는 멀어진 것 같은 인생을 살게 된다. 언 듯 보기에는 문제가 많았던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전략적으로 사용하신 것일까?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들을 다루어 가시며 전문인 선교를 이루신 방법을 찾아내고자 하는 부족한 자가 가지고 있는 질문이다.

본론

알렌이 입국하기 84년 전 조선에서 새롭게 정권을 취한 정순왕후는 기독교를 조선에서 단절시키기 위해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오가작통법을 만들어 서로를 감시하게 만들었고 한 사람의 크리스챤이라도 나오면 그 집안을 없앤다는 의미로 집안의 기둥 뿌리를 뽑게 만들었다. 신유사옥으로 특별히 강완숙 순교자가 순교한 후에는 축배를 들었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왜 그녀는 이런 일을 일으킨 후에야 비로써 발 뻣고 잠 잘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정치였다. 노론의 실력자들에 의해 60세가 넘은 영조의 왕후 사별 후 16세의 나이에 정략결혼을 시도하여 정치적으로 궁에 들어 온 그녀로서는 그녀가 미처 힘이 없을 때 노론의 지도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낸 남인들이 원수와도 같았고, 그들을 제거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때 마침 남인들 중에는 기독교인이 많았고
특별히 강완숙 순교자가 남인들이 국왕으로 옹립하려 한다는 의심을 하던 은언군의 부인에게 전도한 후에는 이들이 남인의 배후 세력이라고 보았다. 당연히 어린 순조의 섭정을 하던 그녀에게 신유사옥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세도 정권에 위험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에게는 아무 이득이 없었고 희생만을 강요하는 기독교라고 낙인찍었던 것이다.

알렌을 통해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 전문인 선교
 
입국할 당시의 알렌은 1801년에 일어난 일을 알고 있지 못하였을 것이다. 또 오늘 날 유행하는 선교 전략이란 말도 낯설었을 것이다. 네비우스의 3자 원칙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에 알렌이 전문인 선교 전략의 입장에서 행동하였다고 보기도 어렵다. 단지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고, 그 일들을 이루어 가면서 1898년 이루어진 고종의 선교 윤허 사건을 통하여 현대 선교의 전략 중에 한 가지를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다.

 선교사를 의심하고 그들을 비판적으로 보았던 고종이 갑자기 선교를 윤허하여 선교사들이 마음 놓고 조선의 이 곳 저 곳을 여행하도록 허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선교사들이 전문적 기술을 갖추었다는 점과 그 시대에 최빈국에 속하였던 조선이란 나라에 강대국에서 파송된 선교사라는 외교적 이유 때문이었다. 춘생문 사건과 에밀리 브라운 사건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임금과 세자가 있는 궁궐 안에서 황후를 자객들에게 잃은 고종은 본인의 신변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본인의 눈앞에서 열어진 캔에 담긴 음식과 날 달걀이외에는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본인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고종은 은밀히 자신을 구출하라는 밀명을 조선인들에게 내린다. 또 일본인 자객들이 자기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에 선교사들을 자기와 같이 있도록 한다. 언더우드와 세브란스 병원의 원장이었던 아비슨이 권총을 들고 고종의 방 옆에서 불침번을 섰다는 이야기는 이제는 비밀이 아니다. 자기를 구하려던 조선의 충신들이 경복궁의 춘생문에서 전멸하던 그 때에 고종은 선교사들에게 자기의 목숨을 의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밀리 브라운 사건은 여기에 더하여 선교사였던 미국 공사 알렌을 이용하여 조선의 중립화를 이루려 했던 고종의 마지막 프로젝트를 설명해 주고 있다. 가상의 여인 에밀리 브라운이 조선의 국왕과 결혼한다는 기사가 Boston Sunday Post에 1903년 11월 29일자 신문에 실렸다. 이 당시 미국인들은 왕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고 전한다. 비록 적은 나라이지만 그 나라의 왕이 미국 처녀와 결혼한다는 기사는 당시 조선에 대한 별 관심이 없던 미국의 여론 몰이에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주한 공사 알렌이 미국에 휴가 차 와있는 동안 알렌의 친구인 편집장에 의해 기사화 된 것이다.  

이제 남은 미전도 종족의 거의 모두는 10/40 창 안에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모슬렘 지역이다. 기독교를 배척한다. 전문인 선교사의 진출 없이 church planting movement가 들어갈 길이 없다. 1884년 이전에 기독교를 배척하고 수많은 기독교인을 처형했던 조선의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오늘 이 세계를 바라보는 주님은 누구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고 계실까?    

국가적 전문인 선교사
 
21세기에 선교사를 부르시는 주님은 여러 유형의 선교사를 모두 부르시지만, 국가적인 선교사를 부르고 계시다고 믿는다. 국가적 선교사란 선교사로서 선교지 국가의 중요한 시점에 하나님의 요구하심 대로 국가의 운명을 바꾸는 이들을 말한다. 알렌,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1884년에 미전도 종족이었던 조선에서 국가적 선교사로 쓰임을 받았다. 그들의 전문성을 이용하여 조선 민중의 필요를 공급하였으며, 조선인들이 필요로 하였던 기술과 의료와 교육을 전수하였다. 갑신정변의 혁명정강의 목표는 개화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쓰시는 벽안의 전문인 선교사들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이 민족을 얽어맨 사슬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누리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였던 그들의 비전 선언문이 오늘도 양화진에 있는 묘비에서 빛나고 있다.    
   
 21세기는 새로운 기술의 시대다. 모든 기술은 서로 융합되고 서로를 돕는 가운데 발전하고 있다. 많은 크리스챤 전문인들이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있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로 무장한 전문인들이 자라나고 있다. 그들은 국가적 선교사가 될 소양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남은 지역은 기술, 교육, 의료, 외교적으로 낙후된 지역들뿐이다.  

결론
 
알렌,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생각하면서 오늘의 한국을 생각해 본다. 이들은 필자가 글을 쓰고 있는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이들의 고향 중에 언더우드의 고향인 애틀랜틱시티와 아펜젤러의 고향인 펜실베니아의 서더턴 지역을 가 보았다. 아무리 찾으려 해도 이들의 흔적을 고향에서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한국에는 이들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지 않다. 며칠 전에 만난 사람의 옷에도 있었다. 언더우드. 그의 이름은 한국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한국에서 잊혀질 수는 없을 것 같다. 한국에서 자라난 사람들 중에 한국에서 보다 10/40 창의 나라들에서, 그들의 역사를 생각할 때 마다 기억될 수밖에 없는 전문인 선교사들이 더욱 더 증가되기를 기도한다.

 

|출처: PGM

출처 : 내 사랑 중국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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