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본 3·1운동-"무력 아닌 민의에 의존… 세계혁명사 신기원 이뤄"
"이번 조선의 독립운동은 위대하고 성간(誠懇)하며 비장하고 명료하고 정확한 관념이 있어, 민의에 의존할 뿐, 무력에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세계혁명사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찬미와 애상(哀傷), 흥분, 희망, 참괴(慙愧) 등 갖가지 감상을 갖게 된다."
1919년 당시 중국 북경대 교수이자 신문화운동을 이끌던 진독수(陳獨秀)는 3·1운동 직후 《매주평론》(每週評論)에 〈조선독립운동의 감상〉을 썼다. 5·4운동 학생 지도자인 북경대학생 부사년(傅斯年)은 북경대 학생 잡지 《신조》(新潮) 1919년 4월 1일자에 〈조선독립운동의 신교훈〉을 실어 중국 국민들이 3·1운동을 본받을 것을 호소했다. 중국현대사의 기점으로 거론되는 5·4운동은 이렇듯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는 것이 학계에서 유력한 학설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거의 유일하게 호의적인 입장을 취한 것도 손문이 1921년 광주(廣州)에서 수립한 남방 호법(護法)정부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호법정부가 들어선 직후, 신규식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을 광주에 파견, 호법정부로부터 외교적 승인을 받도록 교섭했다.
신규식은 손문에게 차관과 조차지(租借地)를 빌려줘 독립군을 양성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손문은 "한국의 독립에 대해 중국은 마땅히 원조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지금 북벌이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국가가 아직 통일되지 못한 상태에서, 겨우 광동성 하나의 역량만으로 한국의 복국(復國) 운동을 지원하기는 실로 어렵다"고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한국 학생이 중국 군사학교에 입학하고, 임시정부 대표가 호법정부에 상주하는 문제는 받아들였다. 중국 군관학교에 들어간 한국 학생들은 항일무장투쟁의 주력으로 성장했다. 이렇듯 한·중 항일투쟁전선의 연대를 가능케 했던 기저에는 3·1운동이 있었다.
김기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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