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과 찬송가의 토착화
- 한국적 교회음악 문화 형성을 위하여 -
이보철(감신대 강사, 교회음악)
월간「기독교사상」 94.9월호
I. 들어가는 말
세계의 모든 민족은 그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 특히 음악은 독특한 음악적 언어와 표현법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더욱 그렇다.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은 옛부터 예술적이었으며, 특히 음악적 요소가 두드러진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나라의 빗장을 풀고 외국과 교류를 시작하면서 개신교가 들어오자, 우리 민족은 이를 잃어버렸던 정신적 새 지주로 삼게 되었다. 함께 들어온 찬송가는 다소 이질적이었으나 음악적 심성의 바탕 위에 쉽게 보급되어, 방방곡곡에 널리 메아리치게 되었으며, 찬송가와 성경은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에 크게 기여함은 물론 신문화의 문을 연 열쇠가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 기독교는 한국 문화 속에서 '우리의' 신학과 교회음악 문화를 창조해 내야 할 사명이 있다. 서울대 이성천 교수는 기독교는 이미 한국인의 종교로 자리잡은 '우리의 종교'이며, 한국인의 의식은 한국적이어야 한다는 기본적 원리를 바탕으로 '한국의 교회' 음악은 한국적 정서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한국 기독교는 미국-영국-독일 등의 찬송을 받아들여 100여 년을 사용하였고, 아직도 이것만이 진정한 찬송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 찬송들은 그들의 문화 속에서 그 시대의 음악 언어로 만들어진 '그들의 노래'였지 '우리의 노래'는 아니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한국 찬송가'를 필자가 분석해 본 결과 19세기경에 만들어진 영국과 미국의 복음찬송(Gospel Hymn)과 복음성가(Gospel Song)가 약 42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리듬도 미국 민요조의 스윙(swing)과 발라드(ballad)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미국 선교사들이 '그들의 노래', 그것도 정선된 예배용 찬송(hymn)이 아닌 전도집회용 복음성가들을 우리에게 가르쳤을 때 우리는 일방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도 우리의 전통 음악과는 무관하게 '미국식 노래'만이 교회음악의 주종을 이루고 있고, 또 그것이 '참 찬송'인 양 생각하는 어처구니없는 맹신과 배타주의에 우리는 빠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적'인 것을 말하며. '전통 음악의 수용', '한국 전통 문화의 존중' 혹은 '교회음악의 현대화'를 말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더욱이 목회현장에서는 더욱 많은 갈등이 있으며 따라서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적 교회음악 문화 형성은 역사의 필연이라 생각한다. 이런 전제에서 한국적 교회음악 문화 형성을 위한 찬송가의 토착화론을 간단히 피력하고자 한다.
Ⅱ. 몸말
1.우리나라의 종교음악
우리나라의 종교음악이 고대 종교 의식에서 무속적 형태에 뿌리를 두고 태동한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이다. 최초의 외래 종교인 불교가 수입되었을 때, 기존의 무속적 음착의 토양 위에서 불교음악이 성립되었다. 불교음악 범패는 830년경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진감선사가 쌍계사를 중심으로 보급시켰는데, 통일신라 범패는 동해안 지방 민요와 유사하며, 현재도 불교 의식에서 사용되는 '회심곡기 곡조는 경기민요 '창부타령'과 거의 같은 곡조이다. 고려시대의 국가적 제사인 '연등회'와 '팔관회'를 살펴보아도 그렇다. 불교의식인 연등회와 무속적 신앙에 뿌리를 둔 팔관회가 나란히 공존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유교 문화가 수립되었으나 음악은 고려 음악을 그대로 사용했고, 세종대왕 때 새로운 노래 정대업, 보태평, 발상 등을 창작했지만, 이들도 전래의 향악에 근거한 것이므로 기존 음악을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 중기 때 '예악'의 영향으로 궁중 음악이 새로 발전하였는데, 전체적으로 볼 때 유교적 가사와 유교식 제사 음악을 채용한 음악이다. 그런데 음악 내용은 유교, 불교, 무교로 명쾌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여서 불교음악이든 유교적 음악이든 모두 서로 기존 음악의 토양 위에서 접목되어 점진적으로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 갔다.
이와 같이 한국의 종교 음악은 민속적 종교 문화와 토양에 불교와 유교가 들어와, 자기의 종교적 주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기존의 음악을 잘 수용하여 변화 발전시켜 현재의 다양한 한국적 음악 언어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독 기독교만은 한국의 전통 음악 어법을 수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를 배척하고 외면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1)한국 전통 문화에 낯선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 전통 음악을 제대로 수용할 수 없었고, 2)전통 음악이 유·불·선에 뿌리를 두고 있어 한국 기독교인들이 거부감을 갖게 되었으며, 3)사회 신분적으로 '쟁이'들이나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4) 일제 통치하에서 우리 것에 대한 탄압과, 5)우리 민족의 사대주의와 열등의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러 원인 중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의 배타성에 큰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2. 우리나라 찬송가의 역사
우리나라 찬송가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실 선교사들이 무조건 우리 것을 배격하지는 않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찬송가인 '찬미가'(1892)를 편찬한 감리교 선교사 존스(Johnes)목사는 찬미가 증보판(1895)서문에서 "번역 찬송이 참다운 찬송이 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한국인 찬송 작가를 마련하실 때까지 개척자적인 중간 역할에 그쳐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2년 뒤에 「찬양가」(1894)를 발간한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목사는 찬양가 서문에서 "이 도는 조선에 온 지가 오래지 아니하니 외국 노래를 가지고 조선말로 번역하고 곡조를 맞게 하여 책 한 권을 만들었으니...... 또 이 중에 제4, 제29, 제38, 제61, 제93, 제113, 제115는 다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이니...."라고 밝힘으로써, 어디까지나 '외국 노래'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복음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을 말하고 있고. 그런 가운데서도 한국 사람이 지은 가사를 7편이나 실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서, 결코 그들은 무조건 한국 문화를 배격하지 않았다.
초기 찬송가에 수록된 한국인 창작 가사를 살펴보면 이를 더욱 뒷받침하는데 「찬미가」(1892)에 4편, 장로교 「찬양가」(1894)에 7편, 북쪽에서 만든 장로교 「찬셩시」(1895)에 1편 등이 수록되어 있고, 장·감 공동으로 편집한 「찬송가」(1908)에는 한국 전통 가락으로 창작된 곡조가 실려 이 곡에 맞추어 다섯 장의 찬송들을 부르게 하였다. 그 이후도 초교파적으로 발전된 찬송가를 만들자고 1924년에 '예수교 연합 공의회'가 발족하면서 그 기념 첫 사업으로 1931년에 「신정 찬송가」를 발간(편집위원장 = 아펜젤러 목사)하였는데, 거기에도 현상 모집으로 채택한 한국인 창작 찬송 6편이 수록되었다.
그러나 이 어찌된 일인가? 해방 후. 장.감.성 연합으로 한국인의 손에 의하여 1949년에 「합동 찬송가」를 발행되었을 때, 한국인의 창작 찬송은 고작 2곡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장로교가 분열되면서 발행한 「새 찬송가」(1962)에도 독일 찬송, 일본 찬송은 대폭적으로 수록하면서도 정작 한국 찬송은 결여 되어 있었다.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하고 찬송가의 현대적 개편에 절박함을 느껴 1967년 「개편 찬송가」가 발행되었다. 과거 집회용 복음성가가 주축을 이룬 것에서 예배 중심의 찬송가로 변화를 시도했으며, 내세지향적 찬송을 많이 빼고 현세지향적이고 기독교인의 생활을 강조하는 찬송을 보강했으며, 무엇보다도 가사를 현대어와 문법에 맞게 개사하여 수록하였으며, 한국인 창작 찬송이 20여 편이나 수록되는 등 당시로서는 아주 바람직한 일대 개혁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합동 찬송가'에 익숙해 있던 일부 교단의 반발과 사용 거부로 말미암아 찬송가가 「합동찬송가」, 「새찬송가」,「개편찬송가」로 나뉘는 희극적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 후, 1977년에 다시 찬송가 통일의 절대적 요청으로 통일 찬송가 위원회를 결성하여, 1983년에 드디어 오늘의 「찬송가」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 찬송가가 세상에 나왔을 때 음악 외적인 요인으로 말미암아 30년전으로 퇴보한 가사, 곡조의 중복 등 편집상의 모순, 창작곡과 가사의 부족 등으로 말미암아 많은 실망을 갖게 하였으며 비판과 문제점을 안고서 지금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3. 한국적 교회음악 문화를 형성하려면
이상과 같은 우리나라 종교 음악의 역사와 찬송가의 역사적 배경하에서 한국적 교회음악 문화 형성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1> 진정한 의미의 '한국 찬송가'로 새로 편집되어야 한다.
찬송가는 한 국가의 교회음악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교회음악 문화형성은 교회 회중들이 부르는 '찬송가'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이렇게 볼 때, 현재의 우리 찬송가를 가지고는 도저히 한국적 교회음악 문화를 이룰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카톨릭의 찬트(chant), 독일의 코랄(choral), 네덜란드, 영국의 시편가(psalter), 영국의 안셈(anthem)과 복음찬송(gospel hymn)이 미국,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등으로 전파되었을 때, 그들은 서양의 음악 어법과 양식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자신들의 전통적 음악을 융합하여 이미 오래 전에 찬송가를 토착시켜 자신들의 노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를 보아도 이토록 자기 민족의 찬송을 외면한 채 남의 것만 가져다가 편집한 찬송가는 없다. 우리나라의 교회의 역사가 아직은 짧다고 말 수 있으나, 1세기가 지난 오늘에 와서까지 세월 타령만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존스 목사의 말대로 번역 찬송은 100년 간의 개척자적인 다리 역할을 마감하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훌륭한 한국인 작곡가들과 작사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들의 노래' '우리들의 찬송'이 이 땅 위에서 널리 불리워야 한다.
더군다나, 멀지 않은 장래에 남과 북이 통일되고 북녘 땅 곳곳에 교회가 세워질 때에, 우리는 어떤 찬송가를 내어놓고 함께 찬송하자고 할 것인가? 민족 주체성이 유별나며, 근본적으로 미국을 싫어하는 그들에게 미국 노래로 도배된 찬송가를 내어놓았을 때,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복고적 찬송을 전하려 하기보다, 남북교회가 어우러져 우리의 찬송을 부르기 위해서는 멈추지 않고 신앙의 줄기를 이어온 남한의 교회가 장자적 입장에서 '한국적 찬송가'를 주체적으로 만들어 통일된 한국교회를 대비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얼마 전에 찬송가공회에서 오랜 작업 끝에 창작 가사와 창작 곡들을 138장으로 엮어 「찬송가 제2편」을 발행한 것은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아직 정확한 분석은 안 되었으나, 그 내용을 대략 살펴본 결과 작사와 작곡이 종래의 번역 가사와 곡조와는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우수한 작품들이 많았으며, 무엇보다도 우리의 정서에 맞는 가사 내용과, 우리 가락과 장단을 사용한 곡들이 많이 채택된 점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이 작업이 계속 이어져 더 좋은 찬송들이 만들어져서 진정한 의미의 '한국 찬송가'가 탄생될 날을 기대한다.
2> 한국 찬송가는 '한국적 창작'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찬송가나 현행 찬송가는 100여 년 전에 미국에서 부흥 운동을 할 때 부르던 찬송, 선교사들이 피선교지에 전도를 목적으로 한 찬송이다 보니, 내세 지향적이고 극한적인 내용을 담은 전도집회용 찬송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그 동안 애창되어 온 찬송들을 보면 내세적이고 염세적이며, 개인적이고 소극적인, 다시 말해서 인간의 삶을 위축시키는 애조적인 것이 많았다. 이제 이런 찬송가보다는 진취적 삶에 용기와 희망을 주는 밝은 내용의 가사들이 많이 창작되어야 할 것이다.
찬송가의 가사와 곡조는 그 민족의 정서와 시대적 역사성도 반영되어야 한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 부르는 찬송이 있다면,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며 부르는 찬송도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또한 '오라'고 부르는 찬송과 함께 '가라'고 보내는 찬송도 만들어져야 하고, 개인적인 신앙 고백적 찬송이 있다면 공동체적 책임을 묻는 찬송도 만들어져야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정의'도 노래할 수 있는 찬송 가사들이 우리의 정서로 창작되어야 한다.
또한 한국적 창작곡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우선 우리 전통 음악의 감(소재)을 사용해야 되겠다. 우리 한국 음악에는 아주 훌륭한 감이 많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에게 세마치, 자진모리, 굿거리, 중모리, 중중모리, 휘모리 등 무궁무진한 장단과 흐드러지게 흐르는 가락을 주셨다. 이미 우리 속에 있는 이 감들, 우리의 얼과 흥을 담은 이 감들을 꺼내 쓰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이 우리의 노래로 찬양하길 원하고 계실 것이다.
그렇다면 서양의 교회음악을 버리자는 것인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 위에 이루어진 서양의 찬란한 교회음악은 위대한 기독교 문화 유산이다. 이 전통을 우리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아가야 한다. 한국 음악이 단성적이요 곡선적이라면, 서양 음악은 화성적이요, 직선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전통 음악 어법과 서양의 음악 어법을 다원적으로 활용하여 현대적 교회음악으로 토막화시킴이 '한국적 창작'아니겠는가 ?
지금 일부에서는 국악을 통한 선교, 찬송가의 '한국화'라는 이름하에 우리 민요 '아리랑' '닐니리야' '도라지' 등을 가사만 바꿔치기해서 연주보급하고 있으며. 각종 세미나에서 이를 한국 찬송가에 편입해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심지어 대중 가요, '갑돌이와 갑순이' 나훈아의 '사랑' 등)하고 있는데. 이런 일은 찬송가의 올바른 토착화나 우리 찬송 부르기 운동을 위해서. 또 전통 음악을 위해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찬송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사와 곡조를 만든 노래이다. 반면에 민요는 민족의 희노애락이 오랜 세월을 지나며 축적된 '민족의 노래'이다. 아무리 좋은 신앙적 가사를 '아리랑'에 맞추어 부른다고 해도 그것이 한순간의 '재미있는 시도'는 될지언정 누가 아리랑을 찬송가로 인정하겠는가? '닐니리야'를 '할렐루야'로 소리높여 부른다고 그것이 진정 찬송으로 가치 부여가 되겠는가?
우리 민족의 심성에 '아리랑'은 영원히 '아리랑'이요, '닐니리야 니나노'는 영원히 '닐니리야 니나노'지 아무리 그럴듯하게 불러도 '할렐루야 니나도'가 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된다. 민요는 어디까지나 민요로 존재해야 그 가치가 있다. 민요는 민요 그대로 두라. 기독교가 우리 민요를 착취(?)한다면 아마 두고두고 역사 앞에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 더욱이 대중 가요 곡조까지 찬송가로 써야 한다는 주장에는 말문이 막힌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루터(Luther)의 콘트라팍툼(가사 바꾸기)과, 현행 찬송가에 들어 있는 외국 민요 곡조와 미국 장로교 찬송가를 예로 들고 있는데, 우선 루터가 코랄을 만들 때 1)찬트를 그대로 번역하여 사용했고, 2)대다수의 곡들을 창작했으며, 3)민요곡에 가사를 창작하여 일부 사용하기는 했으나, 당시 민요곡은 역사적으로 문헌적으로 볼 때 찬트의 선율에서 파생되어 나온 곡조들로 찬송과 민요 곡조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와는 배경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또 한가지 문제를 지적하자면 현행 찬송가에 영국-독일 국가와 외국민요가 몇 곡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것으로 '개편찬송가'에는 빠졌는데, '합동찬송가'를 사용하던 측에서 강경하게 밀어부쳐 다시 들어온 곡들이다. 우리 애국가도 안 싣는 찬송가에 타 국가를 버젓이 실어 놓은 나라는 우리나라와 미국밖에 없다. 미국은 다민족 국가니까 각 나라국가, 민요를 실었다 해도, 우리가 다민족 국가인가? 아니면 미국교회의 종속 교회인가? 이곡들은 당장 빼든지 부르지 말아야 할 것들인데, 이것을 핑계함아 민요를 찬송가에 넣어야 된다든가, 미국 찬송가에 아리랑이 들어 있으니 우리 찬송가에도 아리랑을 가사 바러치기 해서 넣자는 주장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무엇보다도 영감에 넘치는 작사가, 작곡가들은 창작에 불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교회는 이들의 창작에 원인 제공자가 되고 후원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3> 교회의 음악 문화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기독교 문화는 다른 종교의 문화 현상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회 문화적 현상이다. 문화는 다양하다. 문화 현상의 생명은 다양성에 있고 이러한 다양성은 사회를 풍요롭게 한다. 교회 음악도 하나의 문화 현상이라고 할 때, 이것 역시 다양한 음악으로 발전되어야 하고 교회 현장에 수용되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교회의 수용성이 문제가 되는데. 우선 음악 문화에 대한 목회자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고는 한국적 교회음악 문화형성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의 문화 운동이 일어나야 목회현장에서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전통 음악과 현대 음악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은 상상 외로 아직도 심각한 편이다. 그러므로 전통 음악 어법이나 현대 음악 어법으로 창작된 성가나 찬송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없다. 또한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과 거리감으로 말미암아 창작찬송들이 외면당하고, 결국 작곡가들도 현실과의 거리감 때문에 창작의 자유로움에 위축받게 된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목회자들의 문화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현대 음악에 대한 인식과 '우리 것을 찾자'는 의식이 높아지면서 현대적 기법의 성가나 전통 음악 기법을 도입한 찬송에 덜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실례로 필자가 지휘하고 있는 감리교신학대학교 합창단이 작년 11월에 횃불회관 대강당에서 정기 공연을 하였을 때 1부에서 모짜르트의 '대관식 미사'를 연주하고, 2부에서 한국적 찬송가와 성가를 공연했는데, 전통적 가락과 장단이 흐르는 성가들이 열띤 호응을 받았으며, 지방 공연에서도 같은 반응을 얻었다. 오늘날 교회음악의 토착화를 위하여 애쓰고 있는 시점에서 일반 회중들의 인식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복음성가에 물들어 있는 어린이들에게도 우리 가락과 장단의 찬송은 얼마든지 새롭게 교육될 수 있다. 금년 감리교 여름성경학교 주제가를 필자가 '굿거리장단'으로 작곡하였는데 어린이들에게 아무런 거부감없이 널리 불리워졌다.
이와 같이 교회음악 문화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될 때 한국적 정서에 맞는 '우리의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토착화를 이루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4> '우리 찬송 부르기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는 음악적 혼란에 빠져 있는데 그 주범은 복음성가이다. 선교 초기부터 예배용 찬송과 전도집회용 복음성가가 구별되지 않은 상태로 자리잡았다. 1970년대 이후 새롭게 들어온 상업주의적 미국 복음성가가 걸러지지 않은 채 직수입되어 교회에 범람하게 되었고, 한국교회는 아무런 기준도 마련하지 못하고 오늘의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제라도 복음성가 부르기를 줄이고 '우리 찬송 부르기'를 전개하자. 138곡의 '한국찬송가'가 발행되었고, 수천 곡의 훌륭한 창작 찬송이 만들어져 있는 지금, 이 찬송들을 널리 보급함으로써, '밑으로부터의 변화'를 이루어 내야 할 것이다. 현재 사용하는 찬송가 중에서도 창작 찬송이 그 어느 찬송보다도 널리 불리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번역 찬송들을 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백여 년의 세월을 지나며 우리 찬송화된 곡들과 역사적으로 검증된 찬송들을 결코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것이 소중한 만큼 남의 것도 존중되어야 한다.
III. 나오는 말
교회음악의 현대적 토착화를 통한 한국 교회음악 문화 형성은 토착화 신학과 마찬가지로 어느 개인이나 집단만의 영역이 아니다. 모든 교회음악가와 목회자, 신학자가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적으로 연구해야 될 과제이다. 그러나 이것을 미래화시키지 않고 여러 가지 시도와 시행 착오가 있다 할지라도 좀더 진보덕으로 생각하면서 현재화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회음악 문화 형성의 앞날은 매우 밝다. 왜냐하면 다양한 음악 문화가 성숙해지고 있고, 훌륭한 선구적 교회음악가들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인하여 그 열매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능력 있는 훌륭한 교회음악가들이 그 뒤를 계승하여 교회음악의 각 분야에서 한국적 교회음악 문화 형성을 위해 더 한층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마감하며 필자는 환청을 듣는다. 바로크 음악과 현대 음악이 어우러지는 소리, 기타에 맞추어 부르는 가스펠 송과 장구의 장단에 어깨를 들썩이며 부르는 젊은이들의 민중성가가 합창이 되고, 지고한 바하의 오르간 음악과 우리의 대금이 흐드러지게 울려퍼지는 예배당의 메아리가 들린다. 팔레스트리나의 아카펠라 고요한 합창에, 우리 민족의 '한'이 폭발하는 거대한 오라토리오의 합창 소리가 들린다.
우리 민족의 '얼'과 '홍'으로 고난의 그리스도를 가슴 열고 찬양하는, '우리의 노래'로 가득한 한국교회의 앞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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