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영원한사명)

[스크랩] 바울의 타문화권 선교방법론 (조은식)

수호천사1 2009. 3. 18. 10:07

사도행전 17:16-34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타문화권 선교방법론

 

 

조은식

 

 

I. 들어가는 말


바울은 자기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간주하면서(갈 2:8, 롬 11:13),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사명을 받은 사도임을 확신하였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그의 세 번의 선교여행(제1차 13:1-14:28; 제2차 15:36-18:22; 제3차 18:23-21:26)을 통해서 선교에 대한 놀라운 관심과 이방인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에 대한 묘사는 바울 서신에서 나타난 바울의 모습과 동일한 것만은 아니다. 사도행전은 누가신학의 영향으로 기록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애정을 갖고 바울을 중심인물로 서술하고 있지만, 그는 종종 예루살렘교회 측면에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한 사람의 사도일 뿐만이 아니라, 예루살렘 회의에서 인정된 이방인을 위한 유일한 선교사로 간주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누가는 바울의 편지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사도행전에서의 바울에 관한 서술은 그것의 역사적 타당성이 증명된 후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사도행전은 바울에 대한 부수적인 자료로 사용 될 수 있을 뿐이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비유대인 세계에서 다시 말해 이방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며 선교한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14:8-18과 17:16-34에 나타나 있다. 사도행전 14장의 배경인 루스드라 지역이 농경지대라면 17장의 배경인 아덴은 문명의 중심지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2) 비록 사도행전이 바울의 선교에 있어서 부수적인 자료일지라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기록을 담고 있는 이 두 가지 사건은 바울의 타문화권 선교에 있어 훌륭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사도행전 17:16-34에 나타난 아덴에서의 사역은 기독교 신앙을 이방문화와 철학에 접목시키고 복음을 현장화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아덴에서의 바울의 선교사역에 중점을 두고 간단한 주석을 하고 이 지역에서의 바울의 선교방법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어, 바울의 선교방법을 현대 선교 과정에 적용해 보려고 한다.


II. 사도행전 17:16-34의 주석


바울은 실라(행 15:40)와 함께 제2차 선교여행(15:36-18:22)을 했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과 함께 논쟁을 하였다. 그때 유대인들과 많은 독실한 헬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시기하여 사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였다. 그들이 바울과 실라를 찾았으나, 믿음의 교우들이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다. 바울과 실라는 회당에 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쳤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베뢰아로 와서 다시 군중들을 선동을 하였다. 그때 믿음의 교우들은 바울을 즉시 해안으로 보냈다(17:1-14).

 

바울은 아덴을 방문할 의도가 없었으나, 상황 때문에 홀로 그곳에 갔다. 아덴은 아카이아 지방에 있는 고대의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였고, 예술, 문학, 철학의 중심지였다. 아덴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출생지였고,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러스, 제논의 제2의 고향이었다.”3) 에피쿠러스 철학자들은 신들은 인간에 대해 흥미가 없고, 따라서 그들은 인간들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믿었다. 또 모든 것이 우연히 발생했으며, 삶의 최고의 목적은 행복이라고 믿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모든 것과 인간 안에 신이 있다고 믿었고, 인간의 존재 밖에는 신이 존재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운명이고, 인간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으로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4)

 

바울은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는 동안 아덴을 두루 다니면서 보았다(17:23). 그는 아덴 시의 많은 우상이 있음과 아덴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에 대하여 그릇된 생각을 가진 것에 화가 나기도 했고 몹시 고뇌를 하였지만, 바울은 그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울은 이것을 선교의 기회로 삼아 다른 장소와 마찬가지로 아덴에서도 복음을 선포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바울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뿐만 아니라 회당에서도 변론을 하였다(17:17). 아덴에서 바울이 만나 토론한 사람들은 두 그룹의 사람들이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만났고, 장터에서는 에피쿠러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을 만나 변론하였다. 바울이 예수와 부활에 대하여 설교하였을 때(17:18), 에피쿠러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아덴 사람들은 바울이 신(예수)과 여신(아나스타시스는 부활을 나타내는 헬라어)의 두 외국 신에 대하여 설명한다고 오해를 하였다. 그들은 바울로부터 더 많은 것을 듣고 싶어서 바울을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갔다.5)

 

아덴에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한 제단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그들의 종교를 표현하였다. 아덴 사람들은 많은 신들을 숭배하였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한 제단을 만든 이유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설명된다. 하나는 알지 못하는 신이 행운과 불행을 만든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모든 신들을 안다고는 확신할 수가 없어서, 만일 그들이 부주의로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못했을 때, 알지 못하는 신이 격노할 것에 대하여 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신의 격노를 막기 위하여 알지 못하는 신의 제단을 헌납하였다. 제단은 그들의 종교적 열정을 보여준다.6) 바울은 아덴 사람들과의 접촉점을 알았고, 그의 회중들이 공감할 수 있는 말로 설교를 하였다. 바울은 먼저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17:22)7)하고 말했다.8)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종교심이 많다고 하는 것은 바울이 그들의 종교성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계속해서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경배한다고 말하였다(17:23).9) 이것은 그들의 관심을 끌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아덴 사람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10)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23절을 보면 “너희가 알지 못하고 섬기는 그것을”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섬기는 대상은 인격적인 신(神)이 아니라 사물(ho)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17:29). 따라서 그들의 우상숭배의 무지한 상태를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참 지식으로 깨닫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11) 바울 설교의 진정한 목적은 “알지 못한 신을 그들이 알게 하는 것”이었다.12) 다신론이 부적합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쓰여진 비문을 조심스럽게 사용한 것이다. 바울은 비문이 함축하고 있는 다신론의 불안정성과 천박성을 보여준 다음 비문이 전제하는 비인격적이고 불확정적인 신성으로부터 성경의 인격적이고 특정한 하나님의 본성을 알려주었다.13)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쓰여진 비문이 바울의 설교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바울이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개종자들에게 가르쳤을 때, 그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설명하는 않았다. 아덴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기초적인 사실들을 설명하였다. 아덴에서의 바울의 설교는 루스드라보다 더 구체적이었다. 아덴에서의 설교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비적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14) 이 설교를 “헬라인을 위한 바울의 복음”으로 보기도 한다.15) 또 이것을 기독교와 헬레니즘이 처음으로 만난 사건으로 평하기도 한다.16) 디벨리우스(Martin Dibelius)는 이 설교를 하나님의 참 진리에 대한 헬라적 연설로 사도행전의 정점(climax)이라고 말한다.17)

 

아덴에서의 설교는 바울이 예루살렘교회 회의에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인정받은 후 행한 최초의 설교라는 의의가 있다.18) 이 설교를 고대 수사학적 양식에 의해 구분하면 변호연설(apology)에 가깝다고 보기도 한다.19) 아레오바고 설교는 헬라적 설교로 시작되어 기독교적으로 끝을 맺고 있으며, 그 주제는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하는 것이다.20) 바울의 설교는 서론(22-23절), 본론(24-29절), 결론(30-31절)으로 구분된다. 바울 설교의 서두는 세 가지 중요한 기능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는 “종교심이 많도다”라는 말을 꺼냄으로 청중들의 긍정적인 관심을 끌었다. 둘째는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새로운 신을 소개하려고 한다는 의구심을 버리게 하였다. 셋째는 하나님에 대한 소개를 할 수 있는 동기를 제공했다. 이것은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참 하나님을 전파하려는 의지를 알리는 것이다.21)

 

아덴에서의 바울 설교의 본론과 결론은 10가지의 중요한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주님이시며 창조자이시다(17:24a; 사 42:5; 45:18).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로 그의 설교를 시작한다. 이것은 아덴 사람들이 인식한 “알지 못하는 신”이 바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의 잘못된 신관을 바로 잡아준다. 창조와 다스림은 기독교의 두 가지 기본적인 본질이다.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개념은 유일신적 개념으로 스토아 철학의 범신론의 관점과는 대조적이다. 여기서 바울은 하늘과 땅 즉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본성을 선언한다.22)

 

둘째, 하나님은 성소 안에만 계시지 않는다(17:24b, 7:48).

 

하나님은 제한된 장소에 계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공간을 초월하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시다. 아덴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신이 거처할 곳을 만드는 인간이라는 소극적인 관점에 대하여 바울은 오히려 인간이 거주할 곳을 만드시는 하나님이라는 적극적인 관점을 제시한다.23) 거기서 더 나아가 그들의 성소개념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인간이 구획한 지역에 신이 산다고 하는 모순을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거주하게 하셨고 하나님도 그 세계에 임재하시기 때문에 온 세상이 다 성소가 된다는 새로운 신학적 인식을 보여준다.24)

 

셋째,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다(17:25).

 

그 시대의 아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급자족성을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봉헌을 통하여 하나님이 필요하신 것을 바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들이 하나님께 바쳤던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급자족하시는 분이라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두려움 없이 선포하였다. 이것이 그의 선교였다.

 

넷째, 하나님은 모든 나라를 만드셨다(17:26).

 

우리가 아는 것처럼, 헬라 사람들, 특히 아덴 사람들은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본질적으로 더 낫다는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플라톤의 4중 감사를 알고 있었다. ① 그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했다. ② 그는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했다. ③ 그는 헬라인이며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했다. ④ 그는 소크라테스의 시대에 태어나, 그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된 것을 감사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한 가족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바울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을 설명하며 하나님은 인류가 하나님을 찾도록 하셨다는 내용을 설명한다.25)

 

다섯째, 인간은 하나님을 찾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17:27).

 

바울은 그들의 종교심을 하나님을 갈망하는 표현으로 보았다. 이것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시 42:1), 사람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는다. 이사야는 이것을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고 말씀한다. 예레미야는 이것을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는 말씀으로 설명한다.

 

여섯째는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이다(행 17:28; 신 32:8).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이다. 바울은 두 헬라시인의 말을 인용하였다. 크레타 섬의 시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는 그의 Cretica에서 “그 안에서 우리는 살고 움직이며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 인용은 자신의 존재를 위해  하나님을 의존하는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아덴 사람들은 그들이 제우스에게서 생겼다고 믿었다. 대중적인 스토아 시인이며 철학자인 길리기아의 시인 아라투스(Aratus, BC 315-240) 뿐만 아니라, 클레안데스(Cleanthes, BC 331-233)의 『현상』에, “제우스를 찬양”하는 시 가운데 “우리는 그의 자녀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기원을 보여준다. 비록 바울이 두 시인의 말을 인용하였지만 이것은 바울이 그들의 종교제도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문헌을 인용하여 그들의 관심을 끌어 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바울은 토론과정의 발전을 시도하였다.

 

일곱째는 우상숭배의 무익성이다(행 17:29; 시 115:4; 사 40:18-20, 44:9-20).

 

아덴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바울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설명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대중적인 생각들을 언급하였다. 바울은 그들의 종교심을 정중하게 인정하였지만, 우상숭배의 무익성을 보여주었다. 바울은 “알지 못하던 시대”(17:30)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설득을 통해 그들의 우상숭배를 비판했다.26) 이것이 바울의 중요한 선교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여덟째는 회개를 위한 부르심이다(행 17:30).

 

여기서 바울은 시대를 두 부분으로 나눈다. 전 시대는 무지의 시대로 과거에 하나님은 인간의 무지를 가만히 두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가 계시된 시기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신다. 여기서 바울은 회개의 필요성을 주장한다.27) 왜냐하면 심판의 날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심판의 경고이다(17:31a; 시 98:9).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정하신 날에 우리 모두를 심판하실 것이다. 심판의 기준은 공의이다. 심판은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그 “정하신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암시한다. 28) 복음전도는 닥쳐올 진노와 심판을 피하기 위한 구원의 문을 여는데 있다는 것이 바울 설교의 중요한 내용이다.29)

 

끝으로 열 번째는 부활이다(행 17:31b).

 

하나님은 인자를 죽음으로부터 살리셨다. 부활은 그리스도에 대한 유일한 증거이다.30) 철학적인 사변을 좋아했던 헬라인들은 육체보다 정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사람이 죽어 육체의 감옥에서 정신이 해방됨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에피쿠러스 철학자들은 내세의 실재를 부인했고, 스토아 철학자들은 영혼이 우주에 신비적으로 동화함에 관련된 미래에 대하여 모호한 개념을 갖고 있었다.31) 이런 그들은 부활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바울의 부활에 대한 설교에 조롱과 냉소를 퍼부었다(17:32).32) 그러나 일부는 다시 듣겠다고 반응하여 바울이 그들 가운데로 떠났고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되었다.

누가는 여기서 바울이 그의 설교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예수와 부활에 대하여 설교했다고 진술했다(17:18).33) 우리는 예수와 부활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17:31).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우상숭배와 무지라는 장애물을 극복하고 예수와 부활에 대하여 선포하였다.34)

 

바울 설교의 결론 부분이 갖는 중요성을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바울은 하나님이 죽음으로부터 살리신 예수가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신학적 초점을 청중들에게 직접 선언하였다. 이것은 예수의 인격 안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알지 못하는 신을 알게 하려는 설교의 목적을 성취한 것이다. 둘째, 청중들이 바른 행동을 하도록 촉구하였다. 다시 말해 그들이 우상숭배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였다. 바울의 설교에 의하면 진정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이 아니라 변화(transformation)라는 것이다.35)

 

바울의 설교를 듣고, 소수의 사람만이 그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대다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는 바울의 타문화권에서의 선교사역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아덴에서의 그의 선교는 성공인가 실패인가?

 

어떤 학자들은 바울의 설교에도 불구하고 아덴에는 교회가 설립되지 않았으므로, 바울의 아덴에서의 선교사역을 실패라고 말한다. 특히 디벨리우스는 바울의 아레오바고에서의 설교를 실패한 것으로 간주한다. 디벨리우스는 또 바울이 자신의 실패를 자각했다고 말한다. 실패의 결과, 바울은 철학적 선교방법을 재평가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견하여 복음을 단순히 선포하는 것을 선호하면서, 타문화 접근에 대한 자신의 원래의 선교방법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36) 그들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2:2, 1:18에 진술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구절을 통해 아덴에서의 바울의 실패를 증명하였다.

 

반면에 다른 의견을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고린도전서 2:2, 1:18은 아레오바고에서의 바울의 설교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고린도에서 행한 설교 가운데 십자가를 역설한 것은 아덴에서의 설교와 분명히 다르다.37) 그것들은 다른 상황에서 쓰여졌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언급하지 않고는 누구도 부활에 대한 설교를 할 수 없다.38) 그러나 아덴 사람들의 질문(행 17:18-20)에 대한 대답으로는 십자가에 대한 설명은 그 상황에 적절하지가 않고 오히려 부활에 대한 설명이 가장 중요하다.39) 자연과 사상의 화합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다신교의 혼동된 가르침 가운데서 바울은 살아계시고 참되시며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대해 간단하고 명료하게 설교했다.40) 더구나 바울의 설교 결과, 성경에 이름이 기록된 아레오바고 의회의 회원인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최소한 두 사람의 회심자 외에 다른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전승된 이야기이지만, 디오누시오는 아덴에서 최초의 감독이 되었다고 했다.41) 이런 의미에서 소수의 회심자라도 열매가 있었으므로 바울의 선교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필자는 위에서 간략한 주석을 하였다. 그렇다면 다른 문화를 향한 바울의 선교방법은 무엇인가? 바울의 설교를 통하여 우리는 그 방법을 알 수 있다. 즉 상황을 분석하여 접촉점을 찾는 것이고, 그 시대의 종교적인 면과 문화적인 면을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며, 모든 접촉점과 연관시켜 복음을 설교하거나 논의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제 바울의 타문화권 선교방법론을 살펴보겠다.


III. 바울의 선교방법


바울의 선교방법에 대하여 종종 “바울에게 일정한 선교방법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바울이 미리 그의 선교여행을 계획하고 선교전략을 세워 선교지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면서 그의 선교전략을 실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42) 오히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우리는 바울의 선교사역을 통해 그의 선교 방법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배워 적용할 수 있다. 특히 사도행전 17:16-34에서 바울의 선교방법 네 가지를 찾아 그 내용을 살펴보며 우리의 선교방법을 검토 반성할 수 있을 것이다.


1. 개인의 감정 조절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우상숭배에 화가 났지만 이방인들과 그들의 종교와 철학에 대하여 꾸짖지 않았다. 오히려 바울의 분노와 고뇌는 그에게 말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그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17:23) 라고 말했을 때, 그의 격분함을 표현하지 않았다. 바울은 스스로를 억제하며 그의 감정을 조절했다. 아는 것을 중요시하는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무지함을 비판하되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우상숭배를 종교심이 많은 것으로, 그들의 무지를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것으로 표현하며 분위기를 바꾸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과 심지어 그들의 종교적 열망까지도 인정하였다. 인류가 “온 땅에 살게 하시고...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26-27절)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본 것이다.43) 복음을 조심스럽게 설명하며 기독교를 변호하였다(17:22-31). 만일 바울이 구약의 선지자나 사도행전 14장 15-17절과 같이 우상숭배에 반대하여 격렬하게 화를 냈다면, 그는 그의 회중을 잃었거나, 사도행전 14장 19절처럼 그들로부터 공격을 당했을 것이다. 비록 선교지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문제에 직면했을지라도, 선교 관계자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주변에 타종교를 믿는다고 정죄하듯 꾸짖는 전도자들이 있다. 우상숭배에 대한 분노와 우상숭배 자들의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오히려 반감을 주어 기독교를 배타적인 종교로 보고 거리감과 거부감을 갖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기독교 대학에서 비기독교인 학생들에게 교양필수 과목으로 기독교 과목이나 성경 과목을 가르칠 때, 대부분의 비기독교인 학생들이 갖는 부정적인 견해가 바로 기독교의 배타성이다. 이것은 기독교를 전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부정적 또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그들에게 기독교를 무조건 강요하거나 타종교를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오히려 부작용을 유발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비기독교인 또는 타종교인을 대상으로 전도할 때는 개인의 감정을 내세우기보다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은 그들의 비위를 맞추라거나 또는 비굴한 자세를 가지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열린 태도로 선교 대상의 문화와 종교를 이해하고 눈높이를 맞추어 접촉점을 찾아서 기독교 복음의 위대성을 전하라는 것이다.


2. 문화의 이해


아덴에서 바울은 그의 방법을 아덴 사람들의 종교와 문화에 맞게 고쳤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설교를 할 때, 바울은 종종 구약의 성경을 직접 인용하였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성경을 권위를 받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아덴에서 바울은 루스드라에서와 같이(15:15-17) 구약성경을 직접 인용하여 설교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덴 사람들은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바울은 그들의 철학자들의 작품을 인용하여 철학에 익숙해져 있는 회중들을 설득하였다(17:28-29). 비록 바울이 그들의 철학과 문학를 말했을지라도, 그의 설교에는 성경의 말씀이 포함되어 있었다. 헬라 시인들의 시를 인용한 바울의 의도는 그들의 문헌을 인용함으로 공감을 얻게 하고 진리를 드러내려 함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선교방법을 고린도전서 9:22-23에서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 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도자와 이방인인 전도 대상자들과의 격차를 최소화하여 그들을 개종자로 얻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다.

 

선교사들은 자기 자신들의 문화가 아닌, 다른 문화에 복음을 가지고 갈 때, 그들이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지 결정해야 하는 문제에 당면한다. 그것은 문화화(inculturation)의 문제이다.44)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선교사들은 복음과 세계를 알아야만 한다. 그래야 그들이 다른 상황에서 복음을 적절하게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현장화(contextualization)”라고 부른다.45) 『현장 속의 목회』(Ministry in Context) 보고서에 의하면 현장화는 자신이 처한 정황의 틀 안에서 복음에 의미있게 반응하는 수용력이다.46) 히버트(Paul Hiebert)는 현장화를 “사람들이 이해하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47)

 

모든 나라는 그들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 히브리 문화에서, 양은 신성한 동물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종교의식에 양을 제물로 바쳤다.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래서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부른다(요 1:9). 그러나, 이런 종교의 상징이 모든 문화에 적용되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파푸아 사람들 사이에서는 돼지가 신성한 동물이다. 만일 선교사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을 한다면, 파푸아 사람들은 이 상징적인 말의 성경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대신, 선교사는 “하나님의 돼지”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48)

 

마태오 리치(Matteo �icci)가 중국에 선교사로 갔을 때, 중국에는 “신”(神)이라는 단어가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조셉 피츠패트릭(Joseph P. Fitzpatrick)은 리치가 이 문제를 세 가지 방법으로 해결한 것을 설명한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명칭들인 하늘의 주[天主], 하늘[天], 다스리는 주[上帝]를 받아들였다. 그는 고대 중국 작가들 사이에서 이런 용어들에 의해 대표되는 현실이 기독교 하나님의 완전성과 비슷한 특징을 표현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49) 이것이 타문화 선교의 긍정적인 면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도 있다. 선교사들이 다른 나라에 갔을 때, 선교지의 문화가 그들의 문화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과거의 선교사들은 그들의 선교지에 있는 대부분 현지인의 풍습을 비난하였고, “대부분의 옛 풍습을 이방의 것으로 거절하는 경향이 있었다.”50) 히버트는 “북, 노래, 연극, 춤, 몸의 장식, 옷과 음식의 형태, 결혼풍습, 그리고 장례의식 등이 종종 비난을 받았다”고 진술한다.51) 왜냐하면 옛 풍습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전통 종교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현지 풍습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이런 거부는 민족중심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서양 선교사들은 기독교문화와 그들의 문화의 배경을 동일시하였다. 문화 우월의식으로 그들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서양문화로 바꿀 것”을 요구하곤 했다.52) 이것은 “현대 그리스도 선교의 큰 약점 가운데의 하나이다.”53) 히버트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북, 심벌즈, 그 외의 전통적 악기들이 오르간과 피아노로 대체되었다. 전통음악에 맞도록 새로운 시를 쓰는 것 대신 서양 찬송과 선율이 지역적인 어풍으로 번역되었다. 바닥의 돗자리 대신 의자가 놓여졌고, 영국식, 미국식 교회가 오두막집과 토담집과 어울리지는 않지만 나란히 세워졌다. 목사들에게는 양복이 요구되었다...54)


토착 풍습과 전통을 거절한 결과, “복음이 일반적으로 외국의 것으로, 특히 서양의 것으로 비쳐졌고” 기독교 회심자들은 그들의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여겨졌다.55)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기독교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회심은 그들의 문화유산과 사회적 결속을 거절”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56)

 

히버트는 옛 풍습을 다루는 네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옛 것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둘째, 사건에 대해 성경적 가르침을 연구하는 것이다. 셋째,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옛것을 평가하는 것이다. 넷째, 새롭게 정황에 맞는 기독교 관습을 만드는 것이다.57)

 

미리 포장된 복음을 가지고는 타문화권 선교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복음 전할 지역의 문화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복음을 강요하려 한다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할 것이다. 선교사들은 그들의 문화 우월주의를 버리고 선교지의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 선교사는 지역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는 물론, 그것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선교사들은 선교지에 가기 전, 선교지의 역사, 문화, 정치, 경제, 종교 그리고 사회에 대해 배울 필요가 있다. 그들이 선교지에 갔을 때, 그들은 도시나 시골, 빈민촌이나 부유한 곳, 농촌이나 어촌 그리고 산촌 등 현지인들이 사는 곳을 방문하는 것이 좋다.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은 현지인들의 마을에 머물며 그들의 방식대로 살아보는 것도 좋다. 이것은 현지인들 속에 섞여 살면서,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좋은 방법이다.


3. 접촉점을 찾아야 한다


바울은 유대인을 만나던 이방인을 만나던 만나는 대상에 맞게 복음을 전했다. 바울은 농경지대에서 전도를 하던 도시에서 전도를 하던 지역 환경에 맞게 전도를 했다. 바울은 아덴에서의 그의 문화적 만남을 어떻게 다루었는가?58)

 

아덴에서 바울은 우상으로 가득 찬 것을 보았다. 바울에게 새로운 종교를 포용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우상숭배를 인정할 수도 없었다. 바울은 그들의 제단을 오히려 그의 선교의 출발점으로 사용했다. 바울은 확고한 태도로 알지 못하는 신에게 예배를 하는 아덴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과의 접촉점을 찾았다. 아덴 사람들의 종교생활이 바울에게는 사리에 맞지 않았지만 바울은 그들에게 화를 내거나 꾸짖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의 우상숭배에 대해 격렬한 공격이나 거친 비판을 하지 않았다.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한 그들의 종교심을 비웃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의 우상숭배를 묵인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한 하나님에게 가는 길이라는 다원주의적 사상을 시사하지도 않았다.59) 오히려 바울은 그들을 종교적이라고 말하면서(17:22) 헬레니즘과 기독교 사이의 접촉점을 찾아 기독교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르쳤다. 

 

실제로 이것은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의 상태지만, 바울은 이 상태를 “문화의 그리스도” 또는 “문화 속의 복음”으로 다루었다.60) 종교심에 대한 긍정적인 논평을 통하여 바울은 그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것이 그들의 생각을 개방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대단한 것이다. 알지 못하는 신을 토론함으로 바울은 정중하게 그의 태도를 분명하게 하였다. 바울이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한 숭배를 다룬 것은 다른 신앙과 기독교와의 관계를 어떻게 고려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그는 신(神)을 향한 갈망의 표현으로써의 그들의 신앙을 보았지만(17:19, 20, 23),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들의 갈증을 해결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접촉점을 찾아 공감대를 형성하도록 한 것이다.

 

만일 선교사들이 바울이 그러했듯이, 다른 문화권에서 같은 상황을 경험을 한다면, 타종교 또는 타문화에 대한 적절한 태도는 무엇일까? 우상숭배를 도외시하거나 우상숭배의 무익성을 말하는 것일까?

 

아프리카에서 사역하는 어느 한인 선교사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과거에 서양 선교사들은 그들의 정치적 배경 아래 선교지 원주민들의 언어가 아닌 영어나 불어로 선교사역을 하였다. 이것이 선교지 원주민들에게 이질감을 주었다. 또 이것은 원주민들이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을 소요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선교사역이 “빵 선교”라 불리는 물질선교에 의해 주도되었다. 따라서 원주민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받기 위해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떠난 후 그들의 선교사역은 시들해졌다. 이런 경우 선교의 열매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외국의 경우와는 달리 한국의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특이한 것이 있다. 1876년 두 명의 한국인이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몇 몇의 한국인들과 함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1882년에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가서 성경을 현지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몇 몇 사람들이 성경을 번역해 놓았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해 놓고 있었다. 첫 번째 장로교 선교사인 호라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와 첫 번째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a)는 한국어 성경을 가지고 1885년 한국에 선교하기 위해 왔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접촉점을 찾기 쉽게 해 주었다. 민경배 교수는 “이것은 기독교 선교 역사에 있어 전례가 없는 사건이다”라고 지적한다.61)

 

그러므로 선교사들이나 복음전도자들은 먼저 그들의 선교지의 다른 종교와 문화를 이해해야 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그것을 다루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선교사는 선교지역의 종교와 문화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도록 노력해야 하고 바울처럼 현지인들의 지적 상황에 공감대를 형성하여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62) 롤랑 알렌(Roland Allen)은 선교사의 사명은 현지인들을 “이교도의 신전으로부터 불러내 하나님의 교회로 모으는 것이 아니라 이교도 신전에 어렴풋이 빛나는 하나님의 등불을 장식하고 그것이 새로운 광채를 발할 때까지 기독교 교리의 기름 몇 방울을 그 속에 부어넣는 것”이라고 지적한다.63) 우리는 다른 문화 안에서 접촉점을 찾는 바울의 선교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효과적인 방법이다.


4. 대화


비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선교활동 가운데 하나는 말로 증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추론, 토론, 대화, 설득 등을 포함한다. 바울은 그의 선교사역에 있어서 유대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메시야의 구속적 역할에 대해 성경구절로부터 추론하였다(17:1-4). 그리고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사역의 기초가 되는 부활과 다가올 심판에 대하여 논의하였다(17:17-18, 30-31; 24:25).64) 본문에 사용된 디아레고말은 대화, 강화, 논의, 또는 토의를 의미한다. 바울의 목회는 논의나 토의였다. 누가는 종종 바울의 목회와 설교(행 17:2, 17; 18:4, 19; 19:9, 20:7, 9; 24:12)를 묘사하기 위해 이런 용어를 사용하였다. 바울의 설교 스타일은 단지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회중으로부터 질문과 응답을 할 기회를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우, 대화나 토의는 선포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

 

아덴에서 바울은 유대인과 경건한 이방인들과 회당에서 뿐만이 아니라 광장에서도 변론을 했다(17:17). 바울은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법을 사용했으나, 메시지는 달랐다.65) 바울의 메시지는 예수와 부활에 대한 것이었다(17:18, 31). 바울은 주의 깊게 우상에 대항하여 토의하였고, 아덴에서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의 관점을 지지하기 위해 토의하였다. 왜냐하면 만일 바울이 사람들과 논쟁했다면, 개종자들을 만들기가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변론이라는 특별한 방법을 통해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복음을 전파했다. 바울의 대화 목적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선교적 설교는 청중의 이해수준에 잘 적용되어야 하고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대화는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무지와 반역으로부터 회개를 촉구하는 선포의 기능에 유용하게 사용된다. 사도행전은 기독교 증거자들이 그들의 선포가 진리이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임을 설득하기 위해 논의함에 있어 비기독교적 종교나 비기독교적 세계관과 건설적인 토론과 바른 연대성에 의한 접촉을 보여준다. 누가는 다른 상황에 다른 형태로 전해지는 메시지와 더불어 문화에 순응되는 증거사역을 선교로 보았다.66)

 

대화는 선교의 중요한 방법이다. 종종 설교는 독백으로 흐른다. 때때로 설교 그 자체로는 비기독교인에게 영향을 주지 못할 때도 있다.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에 관심이 있거나 설교를 듣는 것에 흥미를 가지거나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화나 토론은 그들의 주의를 기독교로 끌어들일 수 있다. 이것 역시 그들을 대화 속에 참여하도록 해준다. 설교를 듣고 난 후, 때때로 설교의 내용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대화는 설교를 그냥 듣는 것 보다 메시지를 더 오랫동안 기억하게 해준다. 이것이 사람들의 생활을 바꾸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방법은 선교사들이 청중들의 이해 정도를 측정하는 것을 도와준다. 만일 사람들이 복음을 잘못 이해했다면, 선교사들은 그들의 선교 방법을 바꾸어야만 한다.

 

성경의 중심 메시지는 대화적이다. 복음은 거절의 메세지가 아니라, 용납의 메세지이다. 예수는 용납의 메시지를 설교했다. 그러므로 대화는 문화적 종교적 다원주의에서 선교와 전도를 하는데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IV. 나가는 말


사도행전 17:16-34를 통하여 바울의 타문화권 선교방법의 중요성을 살펴보았다. 기독교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이다. 하나님은 선교를 위해 그의 일군들을 부르시고 보내신다. 하나님은 개인의 마음을 여실뿐만 아니라 다양한 민족에게 신앙의 문을 열도록 하신다. 선교과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하나님을 이해하게 하고, 하나님을 그들의 마음에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은 다른 종교인들에게 전할 현장화된 복음에 대한 시각을 제시한다.67) 첫째는 적절한 태도이다. 좋고 싫음을 드러내는 감정적 표현을 절제하여야 한다. 그리고 부정적 태도보다 긍정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 선교는 감정적 열정만을 갖고 뛰어드는 일이 아니다. 선교를 감정으로 시작하게 되면 감정에 좌우되기 쉽고 감정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할 수 있다. 개인의 감정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하고, 냉철함으로 상황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는 적절한 접근방법이다. 바울은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할 때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접촉점을 찾아 접근했다. 열정만 가지고 무작정 도전한 것이 아니다. 셋째는 적절한 메시지 전달이다. 아덴에서의 바울의 선교는 비기독교인들에게 성경적 진리를 제시하는 문화적 민감성과 창의성의 모델이다.68) 선교사들은 간단하게 그들이 알고 있는 복음을 그대로 설교하는 것보다, 선교지의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이해하여 상황과 현실에 맞는 그리고 현지인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의 설교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비기독교 철학과 종교에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현장화된 설교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69) 오늘 교회가 바울의 선교에서 배울 점은 복음의 진정한 현장화가 다원화된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류 문화에 쉽게 동화되는 길을 피하고 민감성과 창의성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만이 사람들이 진정 변화(transformation)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선교사들은 그들의 선교 방법을 심각하게 살펴보고 반성하며 개선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처럼 선교사들은 다른 문화와 접촉점을 찾고 적절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 선교의 본질적인 면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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