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기독교

[스크랩] 중국의 종교인 개황

수호천사1 2009. 3. 12. 17:28

중국의 종교인 개황

 

 

독립기독교인

 

1906년부터 계속적으로 다수의 중국현지교단이 중국인들로부터 시작되고 있으며 때때로 서구선교교회로부터 이탈하면서 생성되어지고 있다. 1949년에는 30개 이상의 현지교단의 440,000개의 공동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서구교회보다 더 심한 핍박을 당해왔다. 하지만 1968년 조사에 의하면 서구의 교단들보다 이들 가운데서 더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1976년부터 이러한 독립적인 움직임들은 폭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가장 큰 2개의 전통 현지교단인 회중교회교단(적은 무리)와 참예수교회에는 중국본토내에 1백만명이 넘는 교인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4천만이 넘는 가정교회운동을 따르는 이들과 1천만이 넘는 3개의 카톨릭 그룹들로 인해 이러한 현지교단의 교인들은 감소하고 있다.

 

등록기독교인 1900년부터 모든 교회의 등록교인이 급속히 증가하였다. 1949년에 등록교인들의 수는 로마카톨릭교인 3,266,000명, 개신교인 1,295,000명(60만이 교회원)이고 그중 10만이 오순절교인, 44만이 중국현지교인 (246,000이 교회원), 30만 정교인(90%가 러시아인으로 중국인 개종자도 얼마간 포함됨), 76,741명이 성공회 세례교인이었다. 1949년 공산당이 집권하면서부터 그 수치는 급격히, 그리고 계속적으로 감소하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그 감소추세가 완화되었다.

 

명목상기독교인

 

1949-1970년까지 대규모의 반종교프로그램의 결과로 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종교에 냉담하고 중립적인 위치를 가지게 되었으나 이러한 운동은 1970년에 이르러 그 운동력을 점차 잃게 되었다. 잔존해 있는 여러 종교인들의 저항은 오늘날의 종교부흥을 가져왔다.

 

무슬림

 

우선 대부분이 수니파이며 약간의 시아파가 있다. 거의가 무슬림인 종족들로는 후이인, 우이그후인, 카작인, 키르기즈인, 우즈벡인, 타타르인, 퉁시앙인, 파오안인, 살라인이 있다. 1975년 6월 후이인들간의 무슬림을 탄압하려는 시도는 강력한 무력반발행위를 일으켰으며 출동한 군대는 500명의 후이인들을 체포하였다.

 

무신론자

 

중국공산당(CCP 1949년부터 실권장악). 당원은 1949년 4백5십만명에서 1956년 1천75만명으로, 1961년에 1천7백만명, 1977년에는 3천5백만명으로 증가하였다. 몇백만의 아동들(붉은마후라, 대부분 초등학생들), 1956년 당시 청소년공산연맹 소속의 2천만의 14-25세 청소년들, 1967년 1천1백만의 반종교성을 띈 붉은군대등이다. 중국의 무신론은 공산주의와 모택동사상등이 결합되어 일종의 유사종교의 형태를 띄고 있다. 1968년까지 모택동의 글이 10억권 이상 배포되었다. 그후 30년이 지나 이 모든 것은 사실상 무너졌다.

 

바하이교인

 

지하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현재에는 대도시에서 자비량으로 일반직종을 갖고 선교하는 선교사들에 의해 급속하게 퍼지고 있다.

 

불교인

 

1900년에 6천만의 불교인들(마하야나, 2백만의 티벳 라마교인 포함)의 대부분이 중국토속신앙을 함께 받아들이고 있었다. 1949년 이후로 많은 수의 불교인들이 무종교인으로 돌아섰는데 적어도 4천만은 열심있는 신도로 남아있었고 그외에도 다수의 절기와 행사에 따라 참여하는 이들이 있었다. 티벳의 1백만 불교인(AD 640년에 소개됨)들은 라마교를 따랐으며 다른 불교인들보다도 더 심하게 세속화되었다. 1976년에 이르러 전에 세워졌던 5,000의 사원들 중에서 남아있는 것은 10개정도 뿐이었고 새로 승려가 보충되지도 않았고 불교를 따르는 행위들은 사실상 사라졌다. 1950년에 10만의 승려들이 있었는데 1978년에 이르러서는 300명으로 감소하였다. 1998년에도 별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불교와 그것이 티벳의 지도자들과 결합되면서 서서히 투쟁하며 일어서고 있다.

 

성공회교인

 

1950년 이후 성공회는 자신들의 측면에서 볼 때는 존재하였으나 정부입장에서는 삼자교회로 묶여져 더 이상 자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순절/은사주의자

 

사실상 부흥의 5천만인들은 독립기독교인이다(초교파, 제3물결파). 카톨릭은사주의부흥운동(CCR)에는 절반가량이 바티칸과 연결되어 있고 나머지 절반은 독립적이다. 1993년 해외 중국인들의 방문들로 인해 수천의 새로운 은사주의자들을 만들어내었다. 1997년 홍콩의 반환으로 인해 오순절/은사주의자에 6천명의 엘 셰다이 열성신도들이 포함되게 되었다.


인구 1949년 숙청의 물결이 휩쓸었던 때부터 지금까지 약 1천5백만명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으며 4천만명 정도가 감금되거나 강제노동에 처해져왔는데 여기에는 상당한 숫자의 기독교인이 포함되어 있다. 1976년에는 지진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턍샨의 북방도시에서만도 655,237명이 죽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러한 재해들이 오늘날 군국적 무신론에서 급격하게 기복신앙쪽으로 기울게 하였다.

 

중국 민간신앙인

 

1900년 당시 중국인구의 5분의 4가 민간신앙을 신봉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유교와 조상숭배, 지방신, 영웅숭배, 인기있는 종교적 주의와 의식들, 그리고 얼마간의 불교의 영향이 결합된 종교이다. 또한 민간신앙인의 10%정도가 자신들을 도교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1949년 이후 군국공산주의의 가르침에 따라 거의 모든 마을의 사원들이 세속화되었고 엄청난 숫자의 민간신앙인들이 무종교인으로 돌아섰다 (1970년부터 이후 년간 5백만 정도로 추산된다).

 

지하기독교인

 

고도로 조직되어진 지하교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앙과 활동을 드러나지 않게 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아주 희소하게 보여지곤 한다. 1955년 당국은 호페이에서 말 그대로 지하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200개의 카톨릭 교회를 발견하였었고, 20년쯤 지나서는 외딴 곳에서 일어났던 젊은이들 100명의 침례에 대한 소식이 있었다. 1998년 중국정부는 소위 고백기독교인이 5백만밖에 되지 않는다고 발표하였으나 이것은 단지 7천5백만의 지하기독교인들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토속신앙인

 

중국남부국경의 고산지대에 거주하는 이들은 대부분이 정령숭배자들로 리수인과 야오인 등이 포함되어진다. 남부 윤안지역의 롤로인은 주술을 행하고 있고 또한 티벳-버마인으로 중국 남서부에 거주하는 모소인 혹은 나크히인, 그리고 중국 북서부의 신잉의 몬구오르인 혹은 투젠인들도 무당과 주술을 행하고 있다. 1960년부터 이들을 향한 세속화작업이 학교와 당 하부구조를 통해 진행중에 있으나 거의 대부분이 실패로 돌아가 아직도 많은 이들이 전의 부족신앙으로 돌아가고 있다.

출처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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