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허' 저자 월리스, 장로교 집사 쟄슨 장군의 해괴한 포즈들.
오른쪽 그림들은 비밀집단 입단식 제스처. [그림 출처: 텍스 마즈, '코덱스 마기카']
글/김삼 칼럼리스트
여는 글
사람은 서로 다른 환경과 정황 속에 태어나 자라나고 살아 간다. 쌍둥이라도 설령 비슷할지언정 똑같진 않다. 아기는 태어날 환경을 스스로 맘대로 골라잡아 나지 못한다. 으앙~하고 태어나면 그뿐, 바로 거기가 자신이 시작하고 앞으로 상황과 환경에 적응하여 또는 거슬러 개척해 나가야 할 기점이고 발판이다. 반면, 사람이 죽는 환경은 강요된 죽음이거나 특수 상황이 아닌 이상 거의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역사 속을 오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살펴 보면 서로 공통되거나 대조되는 부분이 특히 흥미롭다. 극중한 것은 바로 죽은 뒤 머물러야 할 또 다른 세계-내세의 판가름. 쉽게 말하면..천국이냐, 지옥이냐이겠다. 아무리 좋은 곳에서 잘 태어나도 정작 끝을 잘 살다 잘 죽어 좋은 데 잘 가느냐가 삶의 최대 관건이다. '잘 죽느냐'는 것은 언제나, 내세를 바로-제대로 골라잡았냐는 의미다.
같은 시대를 살다 간 두 미국 장군들의 서로 다른 스토리가 우연히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도 이 때문. 한 사람은 북군 측의 루 월리스, 다른 한 명은 남군 측의 제2인자였던 '스톤월' 쟄슨 장군이다. 둘 다 삶의 방식과 행동 양식에 장단점이 있다. 그런데 결정적인 면모에 결정적 차이 또는 공통점을 보인 것이 결정적인 관심을 끈다.
미국 남북 전쟁(the American Civil War, 1861–1865)은 혈육을 나눈 한 겨레가 큰 이념차도 아닌 단지 흑인 노예제 폐지 여부로 엄청난 인명 피해와 손해를 보면서까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였다는 점에서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자유국가인 미국에 독립 쟁취를 위한 전쟁 뿐 아니라, 남북한 간의 6.25 같은 동족상잔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역사적 비극이다.
62만의 전사자(3분의 2는 병으로 사망)를 포함, 총97만명의 인명피해를 낸 처참한 전쟁이었다. 부상자까지 하면 훨씬 더 많다. 남편을 잃은 아내, 아버지를 잃은 자녀 등 무수한 가족들의 희생도 따랐다. 더욱이 뉴욕주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의 같은 기숙사 안에서 피붙이들처럼 몸을 비비작거리며 어울려 지내던 학창 동료들의 가슴에 서로 총칼을 겨눠야 했다는 것은 너무도 비극적이고 참담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남북전쟁에 참가한 장군들이 퍽 많고 남군만 해도 장성들이 440여명이나 된다. 그들 중 특히 기독교계가 자랑(?)해온 위 두 장군의 삶과 신앙을 비평적으로 조망해 본다.
미국에선 쟄슨이 훨씬 존중을 받지만 한국인 교우들은 월리스를 더 익히 알 것이다. 이름만 듣곤 긴가민가 할 지 몰라도 '벤 허'의 원작자라면 이내 '아~!' 할 터. 한국 지명도 점수에서는 월리스가 한 발 앞서는 셈이다. 또 '벤 허' 작가라는 점에서 훌륭한 신앙인이라고도 생각하게도 된다.
사실 소설/영화 '벤 허'만큼 구세대에 깊은 감동을 준 기독교 픽션도 드물다. [역사소설 장르로서의 '벤 허'에 영감을 얻은 폴란드의 노벨상 수상작가 헨리크 센케비치의 '쿠오바디스'도 역시 신약성경을 배경으로 했지만 센케비치는 확실한 카톨릭이며, 작품 줄거리도 성경보다 천주교 전통을 드높인 내용이다.]
여기서 우리의 주된 관심은 과연 둘의 신앙이 참 신앙이었냐는 것. 이에 대해 글 아래서 재론하련다. 월리스의 신앙 편력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은 그다지 많지 않으나 작품 '벤 허'와 기타 저작들, 그의 서신과 자신이 직접 쓴 자서전 등이 남아있다.
장군 1: 루 월리스
전술했듯 루 월리스(Lewis "Lew" Wallace 1827~1905)는 베스트셀러 소설, '벤 허'(원제: Ben-Hur: A Tale of the Christ)의 작가로 유명하다. 4두전차 경기에서 승리하는 주인공역 찰턴 헤스턴의 명연기로 유명한 영화 '벤 허'(1959년)의 원작이다. 노예로 끌려가다 예수님께 생수를 선사 받고 훗날 어머니와 여동생이 보혈로써 치유받는 은총을 입는다는 '벤 허'는 벤 후르 즉 후르(모쉐의 동역자. 출 17:10-12)의 후손이라는 뜻이지만 실제 인물은 아니며 따라서 이 작품은 공상역사소설이다. 복음서엔 예수님이 벤 후르란 인물에게 물을 떠다주신 기록이 없다! 게다가 영화는 원작과도 많이 다르다. '벤 허' 덕에 명성을 떨쳤지만, 월리스는 군인으로서는 일종의 실패의 대명사쯤으로 폄하된다. 예컨대 그는 최근까지도 역사학, 군사학계에서 그다지 큰 관심거리나 연구 대상이 되지 못한다. 관련 연구도서조차 희귀할 정도.
주된 까닭은 북군 총사령관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훗날의 18대 대통령)와의 악연 탓이다. 그랜트의 원병 요청에도 제때 도착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엄청난 인명 피해를 보는 계기가 됐기 때문. 더욱이 그랜트와 여타 장성들에게 계속 악평을 듣자 억울함을 풀어보려고 군사재판을 요청하는 등 해명과 반박에 나섰지만 결국 한 장군의 권고로 포기하게 된다.
월리스가 따돌림 받던 또 다른 이유는 웨스트포인트 출신이 아닌 지원병들의 장군이었다는 것. 그런데도 인디애나 주지사였던 아버지 데이빋의 막강한 입김으로 출세와 진급이 매우 빨라 주위의 질시를 받았다.
1846년 미국의 대 멕시코 선전포고 당시 월리스는 인디애나 지원병들을 모아 일개 부대(인디애나 제1보병연대의 전신)를 직접 창설, 불과 19세 나이로 일약 중위가 된다. 멕시코 전후인 1849년엔 법조계에 끼어 들어 1851년 제1의회선거구 검사가 된다. 1852년엔 결혼해 외아들을 득남하고, 1856년 크로퍼드빌로 이사한 뒤 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된다.
남북전쟁 개전 후엔 고위급 행정부관으로 인디애나주 모병을 도운 뒤 육군 대령을 거쳐 인디애나 제11지원 보병연대 연대장으로 임명돼 잠시 서부 버지니아에서 근무 후 그해 9월초 준장으로 승진, 여단 지휘권을 받는다. 진급이 빨라 동급 육군 장성들 가운데 가장 젊은 '골든보이'였지만 공보다 흠을 더 많이 잡혔다.
1862년 헨리 요새, 다널슨 요새 전투에서는 재치있는 작전으로 남군에게 잃었던 땅을 탈환한 공으로 소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샤일로 전투 당시 그랜트의 명령을 '혼동', 엉뚱한 곳으로 진군했다가 되돌아오면서 전투가 끝난 뒤에야 그랜트 부대에 합류했다. 샤일로 전투는 미국내 단일 전투사상 최다 전사 기록(23,746명)을 낸다.
그랜트와 및 상관 핼리크는 입모아 모든 책임을 월리스에게 떠 넘기는 통에 월리스는 여단장 자리를 잃고 오하이오 행정부서 산하의 신시내티 방위군을 맡아 전출된다. 다른 전투에서는 한 때 호평을 듣기도 했으나 샤일로의 오명을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랜트 회고록 속의 의견 변경을 간청해 보지만 끝내 거절 당한다.
월리스는 치명상을 입은 영예의 개선 노력의 일환으로 정치계와 저작 생활에 매진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월리스를 군에서 철저히 배제하려 들던 그랜트는 훗날 백악관 집권 당시 부패 등으로 '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악명을 떨친다) 월리스는 또 링컨 암살 공모자들에 대한 군사위원회 재판에도 참가했으나 1865년말 군을 떠난다.
'벤 허' 저작의 내력과 동기
월리스는 그후 1870~80년대에 화려하고 다양하게 정치계를 누빈다. 1878~81년엔 뉴멕시코 준주(현재는 주) 지사로, 1881~85년엔 오토만 제국(터키)의 특별대사로 재직했다. '벤 허' 탈고 시기가 바로 이 무렵. 1880년 11월 12일 초판(하퍼&브라더스 출판)을 낸 '벤 허'는 19세기 최고 베스트셀러로 떴다. 그전 베스트셀러였던 해리엩 비처 스토우 부인의 '엉클 탐의 캐빈'(1852)도 이내 따 돌리고 마거맅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6)가 나오기까지 정상을 고수했다. 1912년엔 시어즈 로벜 사가 '벤 허'를 권당 39센트씩에 1백만권을 펴내 한해 최다 출판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벤 허'는 초판 이후 단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다!
월리스는 '벤 허'를 하나님과 크리스토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가름하는 한 방편으로 썼다고 토로했다. 작가의 신앙 편력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은 그다지 많지 않으나 작품 자체와 기타 저작들, 서신과 (자신이 직접 쓴) 자서전 등이 남아 있다. 알고 보면 '벤 허'는 19세기 감상소설에 흔했던 낭만주의/경건주의와 당대의 삼류 풍속 소설에 흔했던 액션 및 모험정신을 배합해 독자를 감동시켰다. 평소 소설을 반대하던 목회자 다수도 적극 '벤 허'의 일독을 권해 더더욱 베스트셀링에 힘을 보탠 결과 경건한 수많은 신자들이 소설/영화 등 문화물에 탐닉하는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월리스 자신이 밝힌 '벤 허' 저작 동기는 이렇다. 1876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 참가 차 올라탄 기찻간에서 유명 무신론자인 라벝 잉어솔 대령과 대화를 나누던 중 월리스는 자신의 신앙에 관해 알기 원하는 만큼의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함을 절감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는 감리교회를 드나들었으나 정작 종교에 무관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련 저술을 결심하고 자료수집 차 성경 읽기에 도전했다. 이미 어릴 적부터 어머니께 들은 얘기로 성경 스토리들 중에서 가장 매료됐던 동방박사들에 관한 단편을 쓴 바 있다. 그것이 '벤 허'의 앞 부분이 됐다. 그는 1899년작 '첫 크리스마스' 서문에서 그의 저술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크리스토의 신성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불러 일으켰다고 고백 비슷한 말을 했다.
'벤 허'의 줄거리는 월리스가 애독한 알레상드르 뒤마 1세의 '몬테 크리스토 백작'(1846년)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몬테 크리스토..'의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도 결혼식날 억울한 죄목으로 정치중범으로 수감돼 14년간 와신상담하다 훗날 명사가 되어 복수극을 벌인다는 점에서 '벤 허'의 플롵과 일맥상통하는 바 있다.
역사가 빅터 데이비스 핸슨에 따르면, '벤 허'는 월리스 자신의 생애에 다량 기초했고 특히 샤일로 전투에서의 악몽과 손해를 반영했다. 사실 주인공 유다 벤 후르가 우연한 사고로 로마 사령관에게 부상을 입힌 뒤 끊임없는 환난을 겪는 과정은 월리스 자신이 그랜트와의 악연으로 명성에 치명적 손상을 입는 것과 매우 비스름한 정황 전개다.
'벤 허'는 로마 교황에게 강복을 받은 사상 첫 픽션이다. 월리스는 1905년 2월15일 인디애나 크로퍼즈빌에서 위암으로 숨져 오크힐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자택은 현재 박물관이 돼 있다. 과연 월리스의 신앙은 참 기독교 신앙이었을까. 이에 대해 글 아래서 재론하련다.
장군 2: 토머스 '스톤월' 쟄슨
남북전쟁의 영웅이자 신자인 토머스 조너턴 '스톤월' 쟄슨(Thomas Jonathan 'Stonewall' Jackson) 장군의 이야기를 영상화한 DVD '아직도 서서-스톤월 쟄슨 스토리'가 10월 1일에 나왔다(http://www.stonewallfilm.com과 미국한인교계 언론 '크리스찬투데이' 최신호 관련기사 참조). 리처드 윌리엄스 원작 넌픽션, '스톤월 쟄슨-흑인의 친구'(저자: 리처드 윌리엄스 주니어, 컴벌랜드하우스 출판사 2006년)에 기초했다.
당대의 군인들 특히 장성급 대다수는 정치인들처럼 성공회인이었지만 쟄슨은 드물게도 장로교인이었다. 더욱이 그의 삶은 적어도 표면상 매우 경건했다. 그는 젊은 나이로 전장에서 죽기 거의 전까지 경건의 본을 보였던 게 역사적 사실이다. 그의 굵고 짧은 생애에 관해선 그의 사후에 아내 메리 애너가 쓴 전기 '토머스 쟄슨 장군의 삶과 서신들'(1892년)을 비롯, 엄청난 양의 연구 자료들과 관련 도서들이 있다. [필자가 참고한 주된 바탕 자료는 메리 애너의 전기다]. 앞서 2003년 란 맥스웰 감독의 '신들과 장군들'(Gods and Generals)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육군 중장 '스톤월'(돌벽이란 뜻) 쟄슨(1824~1863)은 (현) 웨스트버지니아 웨스턴에서 태어나 일찍이 양친을 여읜 고아로 친척들의 도움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환경을 극복하고 매우 긍정적이고 밝은 소년으로 성숙했다. 그러나 자신을 길러준 친척과 하나뿐인 형까지 차례로 상실했던 어린 시절이 너무도 비극적이어서 평생 잊으려고 애를 썼다. 심지어 그가 그토록 다정다감한 애정을 표했던 누이까지도 노예제 반대측인 북부 편을 지지하여 떠난다. 그래서 결혼 후 가정을 무척 아꼈다. 그나마 나이 40도 채 되기 전, 세상을 뜬다.
쟄슨은 비록 소년 시절 삼촌의 도움으로 공부는 했지만 학력이 딸려 웨스트포인트 초기에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피나는 노력 끝에 무난히 극복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또 졸업 직후 멕시코 전쟁에서 보여 준 대담무쌍함으로 빠른 승진을 거듭, 젊은 나이에 장성이 된다. 말년에 북버지니아 육군 사령관들 중 한 명으로 리의 '오른팔' 격이었던 그는 용맹도 대단했지만 드문 지략가이기도 했다.
빠른 기간 내에 리의 신임을 얻게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 였다. 창의적이고도 과감한 그의 전술/전략은 최근까지도 미 군사학의 연구 대상이다. 참전한 전투로는 밸리 캠페인(Valley Campaign)이 가장 유명하다. 그러나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우발적으로 아군 그것도 자기 부대 병사의 총에 맞아 한쪽 팔을 절단한 며칠 뒤 폐렴까지 겹쳐 숨졌다. 39살의 젊은 나이였다. 리 장군은 그의 참사 소식에 "내 오른팔을 잃었다"고 크게 슬퍼했고 얼마 후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대패해 결국 북군에 항복했다. 쟄슨이 살아남았다면 남군이 승리했으리란 군사전략적 구도도 가능했다.
쟄슨의 가문 배경은 재미있다. 북 에이레 출신인 증조부 존 쟄슨은 170 파운드를 훔친 중절도범으로 체포돼 7년부 미국체재형을 선고 받아 1749년 미 대륙으로 향발한 호송선 '리치필드'호 선상에서, 역시 절도범 혐의로 비슷한 형을 선고 받은 일리저벹 커민스(일명 '커밍스')를 만나, 메릴랜드에 도착할 무렵 사랑에 빠졌고, 1755년 결혼했다. 이렇게 두 '중범죄자'가 짝을 맞춰 시작된 가문이 미국 역사상 가장 존중받는 한 위인을 탄생시켰다는 것은 퍽 역설적이다.
쟄슨의 신앙과 삶
쟄슨의 삶은 매우 감동적이다. 비록 노예제 지속을 지지하는 남부 편에서 싸우긴 했지만 자신은 흑인들의 친구였다. 19세기 당대 버지니아 주법상 흑인들을 위한 영어 읽고쓰기 교육이 금지돼 있었으나 법을 어기고 자신이 집사로 있던 교회의 부속건물에서 동네의 흑인 크리스천 학생들을 모아 기독교 구원의 도리를 읽고 쓰게끔 가르쳤다. 그로부터 복음을 들은 많은 흑인 주일학교생들이 사역자가 되어 교회를 설립했고 그런 교회들 다수가 현재도 존립해 있다.
또 자신을 노예로 사 달라고 조르는 흑인 여럿을 집에서 하인으로 거느리며 오히려 그들을 돌보느라 정성을 쏟았다. 첫 아내를 사별한 데 이어 새로 맞은 아내와 함께 살 집을 마련하기 전, 먼저 흑인여성의 집을 챙겨 줄 정도로 흑인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그 흑인여성의 장례식까지도 신경을 써서 담임목사를 대동하고 참석하기도 했다.
흑인들을 가르치게 된 것은 육사졸업 후 10년간 버지니아 군사학교(VMI) 교수로 재직하면서. 멕시코 전쟁 직후 현지에서 관심을 쏟았던 카톨릭을 비롯한 다양한 종교들 중에서 마땅한 교파를 고르던 중, 인근 렉싱턴 장로교회에 몇번 출입하다가 그 단순한 예배의식에 매료돼 이내 열정적인 장로교인이 된다. 특히 담임목회자 윌리엄 화잍 박사의 설득력 있고 인자한 메시지에 깊이 감화됐다. (그러나 쟄슨이 맨처음 복음을 받았던 것은 입대 직후 소속된 제1포병대 대장이었던 프랜시스 테일러 소령으로부터였다)
첫 아들을 사산한 뒤 죽은 쟄슨의 첫 아내 엘러너도 워싱턴칼리지(현 워싱턴-리 대학교) 학장인 개혁교단 목사 조지 정킨의 딸이었고, 둘째 아내 메리 애너도 장로교 목사인 라벝 힐 모리슨(데이비슨 칼리지 은퇴 학장)의 딸이었다.
렉싱턴장로교회에서 쟄슨은 대표기도만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성경과 장로교 교리를 배우는 데 빨라 신앙고백을 한 얼마 후 집사직을 받았고 군인다운 충성심으로 교회일에 온 힘을 바쳤다. 특히 담임목사를 상관처럼 깍듯이 받들었다. 화잍 목사는 으레 주변사람에게 '우리교회 최고 집사'로 자랑했다. 쟄슨은 남북전쟁 당시에도 일선부대 막사에 화잍 목사를 불러 설교를 듣곤 했다.
쟄슨 집사는 매주일 오후3시 교회 종소리가 울리기가 무섭게 성경강의에 임했다. 지각생은 들어갈 수 없었다. 출석/성적 모범생에겐 성경과 신앙도서 등 상을 주었다. 학생들에겐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기를 촉구했다. 그 진지한 열심은 흑인사회의 존중을 받기 시작했고 참석자가 1백명이 넘는 때도 잦았다. 화이트 목사는 훗날 쟄슨 집사가 "사역에 자신의 온 힘과 지혜를 몽땅 바쳐 헌신했다"고 회고했다.
쟄슨이 성서공회 성경 구매 대금 접수직원으로 임명받은 적이 있는데, 그가 화이트 목사에게 보여준 성경 값 접수보고서 맨 끝에 부록처럼 연필로 끄적인 명단이 있었다. 자신이 성경 값을 할인해준 자유흑인들이었다. 당시 자유흑인과 노예흑인들 두 부류가 있었다.
수많은 다른 백인 신자들도 쟄슨처럼 흑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제임스 라버슨 박사는 그의 저술에서 "쟄슨은 내심, 노예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단지 창조주만이 설명할 수 있는 이유 때문에 복종하게 된 상황으로 이해했다. 그로서는 흑인들을 돕는 것이 곧 선교적 노력이었다. 흑인들도 구원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썼다.
쟄슨이 참전한 치열한 전투 하나가 끝난 직후 렉싱턴 시민들이 전황과 승전보를 들으러 우체국 앞에 몰려들었다. 화잍 목사가 장군의 편지를 개봉하는 모습에 군중은 흥분과 기대감에 설레었으나 일부는 크게 실망했다. 봉투 안엔 현금 50불과 함께 고작 흑인성경공부반을 위한 도서구입에 써달라는 짤막한 메시지만 들어있었기 때문. 쟄슨의 흑인 사랑이 그랬다.
그에 대한 흑인 쪽 애정도 마찬가지. 장군의 전사에 이어 렉싱턴이 북군에게 점령되자 그의 무덤가를 장식했던 꽃들이 모두 감춰졌다. 어느 날 아침, 한 다발의 생화를 들고 몰래 무덤을 찾아든 한 부인은 무덤 앞에 꽂힌 소형 남부 깃발과 함께 종이쪽지에 쟄슨의 애창 찬송가 구절이 적힌 데 놀랐다. 알고 보니 쟄슨에게 배우던 주일학교생이 몰래 밤새 저지른 일이었다.
두 장군의 프리메이슨리 개입 의혹
이처럼 삶을 통해 역사 속에서 주목과 존중을 받는 장군들이지만, 신앙 역시도 과연 '장성급'이었을까? 여기 큰 의문이 있다. 바로 두 사람이 프리메이슨에 개입된 여부다.
19세기 미국에서는 프리메이슨리가 성행했기에 당대의 특정인사를 신자 내지 '크리스천 명사'로 믿어주기 앞서 먼저 그가 메이슨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은 하나의 바로미터 내지 시금석일 수 있다. 메이슨이라면 형식상 교인일 순 있어도 참 신자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코! 남군 장성급들 약440명 가운데 훗날 프리메이슨으로 판명됐거나 어림 가는 사람들만 (최소) 80여명 등 상당수였다. 그러니 북군은 오죽하랴.
먼저 부인 못할 명확한 역사적 사실은 월리스와 쟄슨의 부친들이 둘 다 메이슨이었다는 것. 월리스가 아버지의 책들과 함께 가장 아끼던 유품이 바로 데이빋의 메이슨 에이프런(메이슨 비밀의식 때 단원들이 착용하는 앞치마)이었다. 월리스의 군복 차림 대리석상이 전국기념석상전시관(National Statuary Hall Collection)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엔 정계인사를 비롯, 사회 각계 명사들의 석상이 즐비하며 다수는 프리메이슨들이다. 심지어 몰몬교 제2대 교주 브리갬 영의 석상도 있다. 그 역시 메이슨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월리스는 제자교회(일설에) 교인인 동시에 프리메이슨이었다. 그는 1850년 11월6일 인디애나 커빙턴의 파운튼 라지 No. 60에 초단으로 입회했다(재스퍼 리들리, 프리메이슨들: 세계 최강의 비밀사회 역사, 원서 189쪽 참조). 아버지 데이빋처럼 월리스 역시 평생 메이슨으로 충실해 결국 스카티시 라잍 32단까지 승급했다(숀 챈들러 라이티의 논문, '루 월리스의 나락과 재기: 민중문화를 통한 정당성 되찾기'. 원서 발췌문 19쪽).
19세기에 미국 프리메이슨리가 크게 중흥한 이유는 젊은 남성들의 정체성에 심리적 가이던스와 위안거리였기 때문. 특히 메이슨리의 의식과 신화적 종교성은 진보주의가 판을 치던 당대 교회강단의 여성적 신학의 남성적인 대안이었다(라이티의 같은 책자, 18쪽 참조).
그보다 35년 후인 1885년 3월 27일엔 월리스가 메이슨의 일파인 '에인션트애러빅오더노블스오브미스팈슈라이너'의 템플인 인디애나주 뮤랱 슈라이너 신전에 개설된 첫 세러머니얼 클래스의 27명 후보자들 중 한 명이었다(뮤랱 슈라이너 신전 역사 참조). 월리스는 또 1893년 자신의 소설 이름을 딴 전국 '자선'단체 '슈프림츠라이브오브벤허'(벤허생명보험의 전신)의 창설을 주관했는데 크로퍼즈빌에 본부를 둔 이 비밀집단엔 훗날 약10만명이 가입하기도 했다.
월리스의 메이슨적인 이질 신앙은 '벤 허' 발행 3년 후에 펴낸 책 '인도의 왕자..또는 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됐나'(1893년)를 봐서도 드러난다. 종교다원적/신화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책의 제3장 '숨겨진 보물' 편엔 메이슨 그리고 매스터메이슨에 관한 언급이 한번씩 나타나며 컴퍼스 등 매스터메이슨의 도구도 나열된다. 에니어그램을 확립해 20세기 뉴에이지 시대를 활짝 여는 데 기여했던 그루지 구르지예프의 자전적/교시적/신화적 픽션 '베에르쩨붑이 손자에게 해준 얘기'를 연상시키는 비스름한 분위기다. 따라서 '벤 허'의 작가, 루 월리스는 틀림없는 프리메이슨이었다고 누구나 단언할 수 있다.
그런데 경건한 쟄슨은 어떨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쟄슨 집사 같은 모범 신앙인도 그랬을까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쟄슨 역시 심상찮은 문제점이 엿뵌다. 한 사이트를 보면, 부친이 프리메이슨이었고 자신도 프리메이슨 친구들을 여럿 두고 있었지만 쟄슨 본인은 아니었다고 단언해 놨다. 그러나 의문점은 사라지지 않는다.
변호사였던 선친(조너턴 쟄슨)이 프리메이슨이었기에 아버지 사후 어머니가 메이슨 단원들의 일부 도움을 받았던 기록이 있다. 쟄슨 본인도 이를 고맙게 생각한 듯 군대 생활 내내 메이슨들을 퍽 가까이 했고 깊이 친교했다. 웨스트포인트 육사 기숙사 시절 룸메이트도 역시 메이슨이었다.
뿐만 아니라 쟄슨이 친여동생 로라 아놀드에게 보낸 편지엔 다음 구절이 들어 있다. 1853년 8월3일에 보낸 이 편지의 일부인 내용은 우리의 의문을 한층 돋우는 대목이 아닐 리 없다.
"힐리/헬리 부인께 브러컨브로 판사(John White Brockenbrough, 렉싱턴 법대 설립자. 훗날 리 장군의 워싱턴대학교 법학과장: 역자 주)를 만났다고 알려 줘. 하지만 그는 프리메이슨이 아니기 때문에 딴 델 알아봐야겠어. 내일은 스톤튼에 가 있을 텐데 거기서 그 사업에 즉각 참여할 영향력 있는 메이슨을 찾을 수 있길 바라. 스톤튼에 오기까지 계속 힘써 봤지만 여의치 못했지.."
윗 구절은 쟄슨이 평소 얼마만큼 프리메이슨들과 깊은 관계인지 미뤄 추정할 수 있게 해주며, 다만 사업상으로만 그랬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위 문구만으로는 쟄슨 자신이 메이슨이었는지는 명확하지가 않음도 사실이다. 쟄슨 자신은 과연 메이슨이었을까, 아니었을까? 여전히 의문점으로 남는다.
이상한 포즈들
칼럼 맨 꼭대기 월리스의 사진에서 보는, 단추가 열린 코트 옷깃 속에 오른손을 찔러 넣은 이 포즈는 나폴레옹과 조지 워싱턴 등의 초상화에도 나타나는 포즈다. 일명 '나폴레옹 포즈'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실은, 이 비밀 포즈는 고대로부터 있어 왔다는 설이 있고 특히 프리메이슨리에서는 이 제스처가 '둘째 휘장 매스터 싸인' 또는 '야불론(Jabulon 또는 Jahbulun. 영어발음 '재불런')의 남자들의 숨은 손'이라고 불린다. (리처슨: '프리메이슨 모니터'. 74쪽 참조. 메이슨리 신의 이름인 '야불론'에 관해서는 아래서 재론하련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이 포즈를 애호한 나폴레옹/워싱턴/마르크스/레닌 등이 모두 일루미나티 또는 프리메이슨이었다는 공통점. 메이슨들은 독특한 손모양의 악수를 비롯해 그들끼리 통하는 다양한 비밀신호나 제스처, 포즈들이 많다.
메이슨리 비평 권위자인 텍스 마즈가 나열한 내용들을 보면, '둘째 휘장 매스터 싸인'은 유대계 공산사상가이자 프리메이슨이었던 칼 마르크스, 유대계 공산혁명가였던 블라디미르 레닌 등을 비롯한 러시아 공산주의 핵심 인사들, 히틀러 치하의 나치 고관들 등이 애호하던 비밀 포즈였다. 결국 이 사탄적인 인사들과 똑같은 비밀 포즈를 남북전쟁 당시 미국 장군들과 영관급이나 장병 메이슨들이 선호했고 월리스도 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와는 반대로..젊은 시절의 스톤월 쟄슨처럼 왼손을 집어넣은 포즈는 '크리스천 표지 기사단'의 입단 의식 때 하는 '콘클라베 경비병' 싸인이다. (같은 책 123쪽 참조). 이 비밀의식의 내용은 고대 성전기사단(나이츠템플러)에서 유래됐음이 거의 틀림없다. 내용이야 어떻든 비밀집단에 속한 이상 야불론의 굴레에서 벗어날 순 없다.
크리스천 표지 기사단과 콘클라베 경비병 의식은 모두 성구 여기저기서 따다 짬뽕한 내용들인데, 쟄슨의 삶을 볼 때 젊은 시절 이 의식을 치렀음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따라서 자연히..그가 비밀결사단원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희박해진다.
[여기서..순전히 필자의 생각이지만, 흥미롭게도 쟄슨이 죽기 전 아군의 탄환에 맞은 왼팔이 잘렸다는 자체가 어떤 묘한 상징적 의미성을 띤다. 쟄슨은 천국에 가기(?) 앞서, 젊을 때 비밀집단에서 했던 그 의식의 원흉인 왼팔을 절단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지 않았을까? 더욱이 쟄슨의 왼팔은 그의 몸과는 다른 무덤에 따로 묻혀 있다. 왼팔만을 위한 무덤! 야불론 신 앞에 맹세한 쟄슨의 왼팔은 천국 가기 전 정녕 잘려 나가야 했던 것이었나 보다(맑9:43).]
'야불론'신에 관하여
마즈가 인용한 '(맬컴)던컨의 프리메이슨 의식'에 따르면, '로열 아치' 단(degree) 입단 비밀의식 때 라지의 3명의 '형제'들이 동시에 하는 '3x3'라는 악수례가 있다. 이 악수례 때 메이슨의 신인 'GAOTU=the Grand Architect of the Universe'(우주의 대 건축가)의 진짜 이름이 '야불론'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야불론은 [야웨+바알+온]의 '삼위일체' 신이다. 야웨는 이스라엘의 신, 바알은 카나안의 신, 온은 미쯔라임(애굽)의 태양신(창46:20 참조)이다. 이같은 잡신이 메이슨리의 '참 신'이라는 사실은 그들에겐 일종의 비밀이다. 야불론은 실은 싸탄이나 다름없다.
야불론 신의 상징인 로고는 3개의 기름한 타원형이 한데 모인 트리케트라(triquetra)인데, 숫자 6이 한데 얽힌 모습 즉 '666'을 암시한다는 설이 있다. 최근 스마트카드의 바탕문양이 온통 트리케트라인 모습은 우연인지 궁금하다.
[재미있게도..'야불론'은 성경에 나타난 '아폴뤼온'(Apollyon)이란 이름과 흡사하다. 아폴뤼온은 사도 요한이 본 계시 중 5번째 환상에 등장하는 메뚜기떼 왕의 이름이다(계 9:11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 무저갱의 천사 즉 싸탄을 뜻하는 이 말은 히브리어로 '아바똔'(abaddon)이라고 한다(계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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