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자료

[스크랩] 존 스토트의 성령론

수호천사1 2009. 2. 7. 23:12

존 스토트의 성령론


1. 들어가며

20세기 기독교 내에서 가장 큰 운동인 오순절 운동이 시작되면서 성령론에 대한 논쟁은 지난 세기 기독교계의 가장 큰 화두였다. 특히 칼빈주의적인 전통을 따르는 개혁교회들 내에서조차 성령론에 대한 다양한 입장과 차이를 보이면서 여전히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교회의 경우, 오순절 운동과 은사주의 운동의 중심에 있는 교회가 가장 큰 교회와 교단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기존 교회들이 교회성장을 위한 한 방법으로 은사주의 성령론을 무분별하게 채택하는 왜곡도 가져왔다. 오순절 운동이 한국교회에 여러 가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성령님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성령의 선물(오순절 입장에서의 성령세례)에 대한 결과론적인 관심과 집중에 의해서 부정적인 결과를 낳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와 설교 연구원’이 한국교회와 기독인들에게 성령론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올바르게 이해할 기회를 제공하는 뜻 깊은 컨퍼런스를 개최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번 시간에 다룰 주제는 존 스토트의 성령론이다.


2. 저자 소개와 개론

존 스토트는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복음주의자로 위대한 학자인 동시에 설교가이며 저술가이다. 또한 그는 『기독교의 기본진리』, 『그리스도의 십자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로마서 강해』,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답변』 등 수많은 저서들을 남겼다. 그는 복음주의 운동의 대반전으로 평가받는 1974년 로잔 세계 복음화 국제 대회의 로잔언약의 입안자 중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그는 영국 런던에 있는 올 소울즈 교회(All Souls Church)의 교구 목사로 섬기면서 강력하고 혁신적인 목회 사역을 감당했으며, 런던 현대 기독교 연구소(LICC) 소장을 지내면서 IFES(국제 복음주의 학생회, 한국의 IVF) 등에서 폭넓게 활동해 왔다.

존 스토트의 성령론은 한 마디로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며 이후 성령충만을 강조하는 정통적인 개혁주의 성령론에 가깝다. 이러한 관점의 성령론을 주장한 외국의 신학자들로는 찰스 핫지(Charles Hodge), 워필드(B.B. Warfield),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iper), 개핀(Richard B. Gaffin) 등이 있으며, 국내에서는 박형룡이 『신학지남』을 통해 처음 이런 입장을 펼쳤고, 신성종, 김해연 등을 통해서 잇달아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번 컨퍼런스의 내용 중에는 서철원, 도날드 맥클로우드의 성령론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더 많은 지식을 얻을 것이다.

존 스토트의 성령론은 그의 저서인 『성령 세례와 충만』(IVP)을 중심으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존 스토트는 이 책을 쓴 목적에서 논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긍정적인 진리를 더 분명히 밝혀 그리스도의 풍성한 삶을 누리며, 성령의 열매를 맺고 성령의 은사를 활용해야 하는 우리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번 컨퍼런스를 통해 성령님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자 하는 우리의 목적 역시 그런 관점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3. 기본적인 접근 원리

존 스토트는 성령론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 몇 가지 접근 원리들을 제시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공통된 소원과 의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목적을 찾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성경에서 이 하나님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셋째,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목적은 설명하는 부분에서보다 교훈하는 부분에서 우선적으로 찾아야 한다. 넷째,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하나님의 목적을 배우려고 하는 우리의 동기는 학문적이거나 논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며 개인적이어야 한다.”

위의 원리는 성령론에 대한 이해 역시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서 성경을 기반으로 구체적으로 접근해야 함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 번째 원리의 경우 부연 설명에서 그 목적을 사도행전의 설화체 본문에서보다 주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설교나 글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신약 성경이 묘사하는 행습이나 경험이 아니라 분명한 가르침이 주어진 부분으로부터 우리의 믿음과 표준을 끌어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도행전 역시 성경의 일부이므로 교리적으로 배제될 수 없다는 주장을 통해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려 했던 로이드 존스의 입장1)을 반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4. 성령의 약속(성령 세례)

존 스토트의 성령론에 대한 접근은 다양한 이론에 대한 반박보다는 오히려 성경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와 접근을 통해서 성령님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했다.

먼저 그는 중생이 곧 성령의 선물임을 분명히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성령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거듭남으로부터 시작되며, 이 거듭남은 ‘성령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요3:3-8). 또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롬8:15-16)의 말씀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8:9)라는 바울의 확언이 이것을 증명한다.

문제는 성령의 선물이 곧 성령의 세례와 동일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오순절 운동이 성령의 선물 곧 중생과 성령 세례가 다르다고 보며 구원을 받은 신자가 후에 성령 세례를 받는다고 가르친다. 반면에 존 스토트는 중생은 곧 성령 세례이며, 따라서 구원과 성령 세례는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임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관점에서 성령 세례를 설명한다.

1)성령 세례는 독특한 축복의 약속

성령 세례는 전적으로 신약에만 나오는 표현으로(7회), 구약 성경이 기대해 온 것의 성취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순절에 행한 베드로의 설교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요엘이 약속한) 이 영의 ‘부어 주심’을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약속한) 성령의 세례와 동일시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1:8)는 세례 요한의 고백 역시 구약의 기대에 대한 성취를 통한 세례자로의 예수님의 독특한 사역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의 독특한 사역의 또 다른 언급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이다. 이로 보건대 예수님의 특징적인 사역은 이중적인데, 그 사역은 옮겨 버리는 것과 가져다주는 것, 즉 죄를 지고 가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는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 역시, 죄의 용서와 성령의 선물을 동시에 받게 됨을 확증해 주고 있다. 사도행전 1장과 2장은 ‘성령의 선물’이 ‘성령의 약속’(행1:4; 2:33,39), ‘성령의 세례’(1:5), ‘성령의 부어 주심’(2:17,33)과 동일한 것임을 보여주며, 죄의 용서와 마찬가지로 구원의 복음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된 독특한 축복 중 하나이다.

2)성령 세례는 보편적 축복의 약속

존 스토트는 성령 세례가 새로운 시대의 독특한 축복이면서 구약과 달리 중생한 모든 신자에게 임하는 보편적 축복이라고 말한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인용했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행2:17)라는 요엘서 말씀에서 요엘 선지자를 통해 주신 약속의 강조점 역시 성령이라는 선물의 보편성이다.

구약 시대에는 모든 신자가 중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특별한 때에 특별한 사역을 위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임하였다. 하지만 이제, 모든 믿는 사람은 성령의 축복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늘 성령이 함께 하게 되었으며, 이 모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2:38-39) 오순절 베드로 설교의 결론은 주 우리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성령 세례의 약속이 해당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3)오순절의 단회성과 오늘날의 표준

오순절파와 개혁교회가 성령 세례와 관련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부분이 바로 오순절의 성령강림(행2장)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성령 세례 중 유일하게(오순절파와 개혁교회 모두가 인정하는) 중생과 성령 세례 사이에 시간적인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존 스토트는 오순절 사건이 갖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과 성령 세례에 대한 이후의 표준을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문제로 생각한다.

즉,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받은 후 두 그룹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처음에 나오는 120명과 뒤에 나오는 3,000명이다. 이 두 그룹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120명은 이미 중생한 사람들로서 열흘 동안 하나님을 기다린 끝에 성령의 세례를 받은 반면 3,000명은 불신자들이었다가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동시에 받았다. 이 120명과 3,000명의 두 그룹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오늘날의 표준은 첫째 그룹이 아니라 둘째 그룹인 3,000명의 경험이 더 정확한 것이기 때문이다.

120명의 경험이 오늘날 나타나는 성령 세례의 표준과 달리 중생과 성령 세례가 분리되어 나타난 것은,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에 이어서 오래 전부터 약속되어 온 성령의 부어 주심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마지막으로 나타난 역사적 특수성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 시대의 도래는 구세주의 죽음, 부활, 승천이 반복될 수 없는 것처럼 반복될 수 없는 사건이라고 존 스토트는 주장한다.

따라서 120명의 경험 이후 3,000명의 회심은 죄사함과 성령 받음이 동시에 나타나며 이러한 현상들을 오늘날의 표준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과거 교회사에서 ‘부흥’이나 ‘성령의 능력’이 이례적으로 역사에서 이어져 왔지만 그러한 현상을 표준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4)사마리아인 신자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을 받지 않고도 신자가 된 것처럼 보이는 본문이 두 곳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사도행전 8:5-17이다. 전도자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 이 본문 역시 많은 논란이 불러일으킨다. 오순절파는 이 본문을 중생과 성령 세례의 시간차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인식하지만, 서철원 교수는 이 본문에서 마술사 시몬을 포함해 사마리아들까지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으므로 온전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1)

존 스토트는 이 사건을 중생과 성령세례가 분리되어 나타난 것으로 해석한다. 다만 그는 이 사건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는 말씀에 비추어 사마리아가 갖는 독특한 상황의 문제로 인식한다. 즉 오순절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빌립을 통해 회심한 사마리아인들의 믿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사마리아가 갖는 역사적 특수성에 비추어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그들을 방문해 회심의 진정성을 인정하고 확증할 때까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성령의 선물을 보류했다는 것이다. 즉, 이 경우도 오순절의 성령강림처럼 역사적 정황에서 생겨난 특별한 사건이기 때문에 일회적이며 다시 반복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오늘날 이 사건 역시 우리의 표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5)에베소의 제자들

두 번째의 예외적인 사건은 사도행전 19:1-7에 묘사되어 있다. 바울은 그의 3차 여행 중 에베소에 이르렀고, 어떤 제자들을 만난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2절)고 묻는다. 그러자 그들은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다”(2절)고 말한다. 그러자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고 그들이 방언도 한다(6절).

오순절파는 이 말씀을 중생 이후의 성령 세례에 대한 후속적인 경험에 대한 근거로 사용한다. 그러나 존 스토트는 이 말씀이 그런 견해를 지지하는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바울이 세례를 주고 안수했을 때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그 전에 그리스도인이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바울이 처음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던 질문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들의 믿음의 진실성을 의심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믿는 자들은 성령을 받는다고 일관되게 가르친 바울은 이런 질문을 처음부터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성령 세례를 받지 않고 오히려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아 그들에게 붙여진 제자라는 표현 역시 아볼로와 세례 요한의 제자들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들은 분명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회심은 오히려 바울이 안수하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는 순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존 스토트는 말한다.

6)세례라는 용어(고넬료의 회심)

사도행전 8장과 19장의 특별한 경우에 의해서도 부정되지 않았던 것은, 성령의 선물은 그리스도의 시초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또한 보편적인 경험이라는 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때 성령을 받는다. 그리고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선물(중생)’과 동의어로 사용되며 ‘세례’라는 개념 자체에는 입문을 뜻하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고넬료 사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고넬료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그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것, 곧 그의 회심이었음이 분명하다. 베드로는 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죄사함의 약속으로 끝을 맺었다.(10:43) 고넬료와 그의 온 집이 믿고(15:7) 성령과 물로 세례를 받은 후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묘사되어 있다(11:1).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고”(11:18),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셨다”(15:9)고 성경은 말한다.

성령의 선물의 시초적인 성격은 ‘세례’라는 용어가 시사한다. 또 고넬료의 회심이 예증하듯이 ‘성령 안에’ 있는 것, 성령을 ‘가진 것’, ‘성령으로 사는 것’,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 등은 믿음의 성숙도와 관계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새롭게 출생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똑같이 적용되는 표현들이다.(롬8:9; 갈5:25; 롬8:14) 그리고 존 스토트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을 당여하게 여기며,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권면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7)고린도전서 12:13

성경에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시초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확증해 주는 표현과 관련해서 일곱 개의 구절이 등장한다.(마3:11; 막1:8; 눅3:16; 요1:33; 행1:5; 행11:16) 그리고 일곱 번째 표현은 복음서와 사도행전 이외의 유일한 본문인 고린도전서 12:13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앞에 언급한 여섯 구절과 관련해서는 전부 성령 세례의 주체를 예수 그리스도로 간주하고, 그 결과를 성령 세례로 인식하지만, 고전 12:13의 경우 성령 자신을 세례자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령 자신이 세례자로 나타난다면, 그 분이 사용하셔서 세례를 베푸시는 ‘요소’는 무엇이란 말인가? 세례의 은유에서는 절대적으로 ‘요소’가 필요하기 때문에 요소가 없는 세례는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 구절 역시 다른 구절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례자료 여겨야 하며, 세례의 요소를 ‘성령’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5.성령의 충만

1)‘세례’와 ‘충만’의 차이점

성령의 ‘선물’ 또는 ‘세례’라는 것이 과거적인 사건으로 현재와 미래에는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충만’이라는 지속적으로 축복으로 이어진다. 성령 세례의 결과로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행2:4) 따라서 성령의 충만은 성령 세례의 결과였다. 세례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고(하늘로부터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충만은 그들이 받은 것이었다. 세례는 독특한 입문적인 경험이었고, 충만은 계속되는 영구적인 결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준이 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입문의 경험으로써의 세례는 반복될 수도, 잃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지만, 충만은 반복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든 유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죄로 인해 ‘근심하기도’ 하시고(엡4:30), 죄인을 충만하게 채우시는 일을 그치기도 하신다.

신약성경에서 사람들이 성령으로 “채우심을 받았다”거나 성령으로 “충만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첫째, “충만하다”거나 “채우심을 받았다”는 것은 모든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특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이 표현은 어떤 특정한 사역이나 직책을 위해 하나님이 내려주신 것을 가리킨다. 셋째, 때때로 성령의 충만은 일생 동안 지속되는 직분(예를 들면 사도나 선지자처럼)을 위해서가 아니라 즉각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나 또는 어떤 위기 상황에 준비시키기 위해서 주어졌다. 이것은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의 공적 사역의 시작에서 성령과 깊이 관련되어 나타나는데, 주님의 성령 충만함의 경험은 이 세 가지 범부를 전부 포함한다.

성령 충만의 지속적인 충만과 채움의 중요성은 에베소서 5:18의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을 통해 알 수 있다. 반대로 성령세례와 관련된 신약 성경의 일곱 구절은 명령형으로 된 권면이 하나도 없다. 이러한 구절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잃어버리는 것이 가능하며 자주 있는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은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고전12:3)과 모든 신령한 은사들을 넘치게 받았다(고전1:4-7)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이 신령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책망하는 것을 통해서 성령의 은사 발휘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 맺는 것을 지적한다. 이것은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성령의 은사를 넘치게 받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방언을 하는 것’이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한 필요 불가결한 표지라는 가르침을 접할 때 자신은 성령을 받지 못했거나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도행전에는 성령을 받은 모든 그룹 중 오직 세 그룹만이 ‘방언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2:1-4; 10:44-46; 19:1-6), 성령을 받은 다른 사람들과 그룹들이 그렇게 했다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그런 주장은 독단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방언’의 은사는 여러 은사들 중 하나일 뿐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명확히 가르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에 몇몇 은사주의 운동과 오순절 교회에서 방언이 성령의 선물에 대한 불가결한 표지가 아님을 인정하고 있다.

2)성령충만의 지속과 결과

그렇다면 어떻게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는가? 존 스토트는 요한복음 7:37-39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충만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존 스토트는 계속해서 예수님께 와서 마시는 것 외에는 이러한 계속되는 들이킴과 흘러나감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성령의 충만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충당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윌리엄 템플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의 받은 성령 충만은 전도의 열망과 활동으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성령을 소유하면서(또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자는 그 누구도), 그 성령을 자신에게만 제한할 수 없다. 성령은 그 계신 곳에서 흘러나가신다. 만일 흘러나가지 않는다면, 그분이 거기에 계시지 않은 것이다.”(윌리엄 템플)

존 스토트는 성령 충만의 주된 증거가 기적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며, 성령의 은산에 있지 않고 성령의 열매에 있다고 주장한다. 성령 충만에 대한 결과를 묘사한 유일한 본문으로 에베소서 5:18-21를 제시한다. 이 본문은 먼저 성령 충만을 우리에게 명령으로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 충만이 모든 시대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선택이 아니라 의무로 받아들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성령 충만의 결과로는 서로 화답하며(교제), 찬송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피차 복종하는 일로 나타남을 강조한다.

5)성령 충만의 잘못된 이해

오순절 운동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성령의 세례가 반드시 이러해야 한다는 성경이 아닌 선험적 입장에서 접근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한다. 사람들은 항상 마음 한구석에 오순절의 극적인 사건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들은 바람과 불 그리고 방언 등을 추구한다. 그들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의 회심과 함께 나타났던 초자연적인 표지들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회심에서 전형적인 모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오순절의 성령 강림과 함께 나타났던 초자연적인 표지들이 모든 성령 세례의 전형적인 모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잊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성령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통해서 누릴 수 있는 것보다 수준 낮은 신앙생활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 더 문제임을 지적한다. 따라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실패와 보잘것없는 성과는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오순절적인’ 경험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특정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존 스토트는 단호하게 말한다. 첫째, 그런 경험의 일부는 의심할 여지없이 마귀적이며, 진정한 영적 경험인 양 위장한 사단의 끔찍한 계략이다. 둘째, 그러한 경험 중 좀 더 많은 부분은 심리적인 것들이다. 셋째, 어떤 또 다른 현대의 경험들은 실제로는 회심의 경험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적이지 않고 순전히 심리적이지도 않은 경험들이 있다면 그것은 회심의 경험이며 하나님에 대한 참되고 깊은 경험들이다. 그럼에도 이런 경험에 대해서 존 스토트는 세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그 경험들은 개인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남으로 특정한 것으로 정형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그러한 경험은 매우 감동적이고 흥미로울 수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를 그분과 화목케 하신 그 첫 번째 은혜의 사역이 지니는 중요성과 비교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경험이 중생을 훼손하거나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오점을 남겨서는 안 된다. 셋째, 이러한 경험은 우리의 구원의 여정에서 본다면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걸어가야 할 더 많은 고난의 길이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6. 성령의 은사들

존 스토트는 성령의 충만이 삶에서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다면,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사용되도록 그리스도 개개인에게 주어진다고 말한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교회에 대해서 쓸 때, 종종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대조시킨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성령 사역의 결과다. 교회는 하나인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 신자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다양한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 신자에게 각각 다른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의 선물(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선물)은 교회의 통일성을 이루고, 성령의 은사들(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교회의 사역을 다양하게 만든다. 교회는 통일성의 근거를 ‘카리스’(charis, 은혜)에, 그 다양성의 근거를 ‘카리스마타(charismata, 은혜의 은사들)에 두고 있다.”

1)영적 은사들의 특성과 종류

바울은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4-6)는 말씀을 통해서 비록 은사가 다양하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또한 성령의 은사들은 사람들이 특정하게 각자에게 맞는 봉사의 일을 하는 데 적합하도록 하나님이 그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부여하신 일정한 재능들이다.

존 스토트는 은사와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방언과 예언과 병 고치는 은사 같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은사만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고린도전서 12장, 로마서 12장 등을 통해 다양한 은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적어도 신약 성경에 명기된 스무 가지의 은사가 있으며, 다양성을 사랑하시고, 후히 주시는 분인 살아 계신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은사들을 주실 수 있다. 그것은 바울이 여러 번 반복해서 강조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성령은 한 분이시지만 은사는 여러 가지고, 직임도 여러 가지며, 역사도 여러 가지라고 그는 쓰고 있다.(고전12:4-6)

3)영적 은사와 타고난 재능과의 관계

영적 은사와 타고난 재능의 상호 연관 관계를 부인하기 어렵다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창조의 하나님과 새 창조의 하나님은 같은 분으로서, 그분은 그 둘 모두를 통해 그분의 온전한 뜻을 이루어 가신다. 이 하나님의 뜻은 영원하다. 둘째, 몇 가지 ‘카리스마타’는 기적적인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다. 성경의 모든 증거들은 타고난 재능과 영적인 경계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한다고 말한다.

4)모든 영적 은사는 기적적인 은사인가?

현대에는 ‘카리스마적’이라는 말이 ‘기적적인’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된다. 그러나 어떤 은사들은 기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며, 무척 평범하고 심지어는 단조롭게 보인다. 가르치는 은사나 권위하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나 긍휼을 베푸는 은사는 기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 또는 ‘믿음’(고전 12:8-9)등도 그 용어만 보아서는 그것들이 기적적이거나 기적을 포함한다고 보아야 할 명백한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기적에 대해 우리 인간이 함부로 가능과 불가능을 독단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유로우시며 우주를 주관하시는 절대 주권을 가지신 창조주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거나 그분의 행하심을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활동을 오로지 기적적인 사건들에서만 찾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마술사 같은 존재로 둔갑시킨다. 우리 모두는 초자연이 아니라 자연 안에서 그리고 기적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우선적으로 일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인 계시를 바로 인식해야 한다. 성경을 단순히 기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 역시 문제다. 성경에 여러 기적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의 하나님이 단지 기적의 하나님만은 아니듯이, 성경 역시 단지 기적에 대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 역사의 많은 부분에는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이 구약 시대에 속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셨던 세례 요한은 전혀 기적을 행한 적이 없다고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요 10:41).

그러면서 존 스토트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힌다. “나는 오늘날 기적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적에 의해 그 진정성이 증명되어야 할 특별 계시는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적인 분이시며 또한 자유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기적을 행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특수한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5)성경에 나오는 모든 영적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주어지는가?

존 스토트는 사도와 선지자가 오늘날 교회에 존재하는지의 문제에 대한 접근을 통해서 사실상 구약의 은사가 오늘날 다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사도들의 경우 역사적 예수님, 특별히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자들(행1:21-22; 고전9:1; 15:8-9)이라는 점과, 그리스도에 의해 개인적으로 임명되고 권위가 주어졌다는 점(막 3:14) 그리고 가르치는 사역을 위해서 특별한 영감을 받았다는 점(요14:25-26; 16:12-15)에서 독특하다. 그런 점에서 일차적인 의미로는 사도라는 은사는 성격상 그들의 계승자로 존재하지 않는다.

선지자는 신성한 계시가 주어지는 통로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던 자들이며 따라서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했던 자들이었다(출4:12; 7:1-2; 렘1:4-9; 23:16,18,22,28). 이 용어에 대한 이러한 핵심적인 성경적 의미에서 보면, 더 이상 선지자는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 안에서 완성되었으며, 성경의 정경은 완성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접적이고 새로운 계시의 통로로서의 ‘선지자들’이라는 일차적인 의미에서는 이 ‘카리스마’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가르침의 방법은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경 안에서 이미 완성된 그분의 계시에 대한 강해이다.

6)‘은사적’이라는 말

존 스토트는 ‘은사적’(charismatic)이라는 말이 잘못 사용되는 것은 비판한다. 먼저 어떤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사역을 언급할 때 ‘은사적’이라는 말과 ‘제도적’(instituional)이라는 말을 대치시키는 문제를 지적한다. 그들은 목사나 교사는 ‘제도적인’ 반면, 선지자는 ‘은사적’이라고 부르면서, 전자는 교회가 임명하지만 후자는 하나님이 직접 임명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은 사람은 교회에서도 그 직분을 임명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 존 오웬은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은사를 주셔서 미리 준비시키시기 전에는 그 누구도 사역의 직분에 임명할 권한이 없다.”고 했다. 결국 ‘카리스마’는 직분과 은사가 합쳐서 이루어진 것이다.(고전12:28; 롬12:7; 엡4:11)

둘째로 대중적으로 이 말이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라는 말처럼 매력과 천재성이 합쳐진 모습을 묘사하는 말로 쓰이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신약 성경의 ‘카리스마타’는 마치 눈에 확 들어오는 은사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긍휼을 베푸는 일, 관대함, 행정 등과 같이 눈에 띄지 않는 일들도 성경적인 의미에서 똑같이 ‘카리스마적’인 것이다.

셋째로 오순절 운동과 관련한 특정한 운동을 ‘은사주의적’ 운동이라고 지적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표현은 대단히 왜곡된 표현임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 표현은 전체 교회에 사용될 칭호이지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될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체 교회는 은사적인 공동체로서, 모든 지체들이 자신의 은사(‘카리스마타’)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이다.

셋째로 오순절 운동과 관련한 특정한 운동을 ‘은사주의적’ 운동이라고 지적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표현은 대단히 왜곡된 표현임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 표현은 전체 교회에 사용될 칭호이지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될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체 교회는 은사적인 공동체로서, 모든 지체들이 자신의 은사(‘카리스마타’)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이다.

7)은사의 범위: 은사는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은사의 종류가 다양하다면 그 분배도 다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신약 성경은 ‘카리스마타’는 선택된 소수의 특권이 아니라, 비록 은사를 묻어 두고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한 가지씩은 은사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증하는 근거를 제시해 준다(롬12:3-6; 고전12:11; 엡4:7; 벧전4:10; 고전12:12,14,27) 이러한 관점에서 전체 교회는 ‘은사적 공동체’이다.

8)영적 은사들의 원천: 은사는 어디에서 오는가?

첫째, 영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값없이 주시는 구원과 마찬가지로 봉사를 위해 주어지는 ‘카리스마타’ 역시 영생의 ‘카리스마’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거저 베푸시는 것이다.

둘째, 영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영의 선물이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성령이 우리에게 영적 은사들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셔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시고(3절),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마실 때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하게 하신다(13절).

셋째, 영적 은사들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이다. 성경은 믿음의 성장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는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주권적인 성령의 뜻에 달려 있다.

8)영적 은사의 목적: 은사는 무엇을 위해 주어지는가?

-영적은사의 목적

성경은 은사의 주된 목적이 교회에 ‘덕을 끼치는 것’, 즉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은 ‘봉사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는 말씀과 “각각 은사(카리스마)를 받은대로...서로 봉사하라”(벧전 4:10)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영적 은사들은 우리 자신들(수혜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돕고, 위로하고, 강건하게 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세우는 것’의 의미다.(엡4:12, 16) 모든 ‘카리스마타’가 그리스도인 개개인과 전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세우는 역할을 더 많이 하면 할수록 그 가치는 더 커진다.

-방언에 대하여

방언이라고 알려진 현대의 현상이 신약 성경에 나오는 은사와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을 받았던 신자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 즉 외국어로 말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던 언어들은 모두 군중 속의 여러 그룹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행 2:4-11).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현상도 이와 동일할 것이라는 강력한 신학적·언어학적 추정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과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을 예리하게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양쪽에 나오는 현상이 동일하다고 보는 논증, 즉 알아들을 수 없는 황홀경의 말들이 아니라 적어도 현장에 있는 일부 사람들(오순절 때처럼)에게는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들이었다는 논증의 강점을 생각할 때 그러한 문제점들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바울은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사는 좋은 것이며 사모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언은 그 자체로서는 (다시 말해서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떠나서는) 덕을 세울 수 있는 특정한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 방언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님을 존 스토트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첫째, 신양 성경에서 ‘덕을 세우는 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세우는 사역을 말한다. 자기를 세우는 것은 결코 신약에서 덕을 세우는 것이 될 수 없다. 둘째, 모든 영적 은사들은 봉사의 은사이며 ‘공동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것으로서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는 가르침에 비추어서 방언에 대해 접근해야 한다.

모든 ‘카리스마타’는 ‘공동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다. 바울은 에베소서 4:11-12을 통해 다양한 은사를 설명하며,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7. 결론

지금까지 20세기 가장 대표적인 복음주의자인 존 스토트의 성령론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개혁주의 성령론에 기반을 둔 존 스토트의 성령론은 영국 내에서는 그와 쌍벽을 이루었던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두 사람의 사역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의 원인이 성령론의 차이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까지 보인다. 그렇지만 존 스토트는 위대한 복음주의자답게 오순절 운동에 대해서도 유연성을 보여주며, 성경을 기반으로 한 적극적인 대화를 제안한다.

다른 이야기지만 존 스토트의 설교방법을 Bridge Building라고 부른다. 그것은 성경과 현실을 연결하는 그의 독특한 설교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전통적 개혁주의 성령론을 받아들이는 교회들조차 성령님의 이해와 적용에 대해서는 오히려 오순절 운동을 따르는 모순된 경우를 보게 된다.

가장 대표적으로 'Again in 1907' 같은 기독교 내 운동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과연 성령의 역사가 100년 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가? 오히려 평양 대부흥 운동은 초기 20세기 초 한국적 상황에서만 일어날 수 있었던 독특한 성령의 사역은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21세기에 성령의 역사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왜 바울이 초대교회에서 노예해방을 운동을 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소수의 기독교인이 존재하던 시대적 상황과 다수의 기독교인 존재하던 시대적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존 스토트는 대답했다. 지금 한국교회 역시 소수가 아닌 다수 기독인들을 기반으로 서 있다. 이 상황에서 성령의 역사 역시 Bridge Building 과정을 통해서 이해하고 적용해 간다면 성령의 역사가 더 다양한 방면에서 포괄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아무튼 한국교회처럼 성령운동이 무분별하게 진행되어 온 상황에서 존 스토트의 성령론은 대중적으로 쉽게 다가갈 수 있으며 균형 잡힌 신학적 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한국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데 유익함을 줄 것으로 믿으며 일독을 권한다.

출처 : 행복†충전소
글쓴이 : 행복충전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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