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을 國祖로 숭배, 형상 우상으로 섬겨
민족 자주성 강조하며 역사 · 교육에 영향
대종교는 단군을 대한민국의 시조로 숭배하는 종교로서 민족주의적이며 보수적인 색채가 매우 강한 토착 종교라 할 수 있다. 대종이란 우리말로 ‘한검, 한얼’이란 뜻으로 ‘大’는 ‘天’에 속하며 우리말로는 "한"이다. "倧"은 신인(神人)을 나타내는 한자로 우리말로는 "검"(神) 또는 "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대종교를 순 우리말로 한얼교로 표기할 수 있는데, 실제로 15대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던 신정일이란 사람이 이 명칭으로 종교단체를 설립한 적이 있지만 대종교와는 다른 단체라 할 수 있다. 대종교의 신앙의 대상은 한얼님(하느님)이며, 단군은 대종교의 1대 교조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 단군이 거의 한얼님의 화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종교는 단군 51년에 강화도 마니산에서 제천단을 마련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데서 그 종교의 기원을 삼는다. 지금으로부터 4286년 전의 일이다. 이후 고조선 시대에는 천신교, 부여에서는 대천교라고 불렀고, 고구려에서는 경천교, 신라에서는 숭천교, 발해에서는 진종교, 고려에서는 왕검교, 만주에서는 주신교라고 불렀던 것이 비록 그 명칭은 달리하면서도 그 교맥은 하나로 계승되어 오다 근세에 부활한 것이 대종교라고 풀이된다.
오늘날 ‘대종교’라고 불리는 종교 단체는 구한말인 1909년 나철에 의해 창시되었다. 나철(羅喆)은 전라도 나주 출신으로서 조선조 승정원 관료로 일하다 일제의 침략에 의한 국가의 위기 속에서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민족을 부흥시키는 원동력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있다고 보고 오기호 등과 함께 단군교를 창시한 것이다. 그러다가 단군교라는 이름을 빙자한 친일분자의 행각에 의해 1년 후인 1910년 8월에 대종교로 개칭하여 오늘날까지 그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항일 운동을 통해 나라를 구하고 동포를 건져야 하겠는데, 그러자면 온 겨레의 구심점을 단군에게로 귀의시키는 것이 가장 시의적절하다는 생각에서 대종교를 일으킨 것으로 풀이된다. 일제 침략에 항거하여 자주 독립을 쟁취한다는 명분 아래 대종교는 1년여만에 교도의 수가 2만여 명으로 늘어나는 놀라운 성장을 기록하였다. 이 때 만주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하였다가 1914년에는 대종교 본사를 만주로 옮겨 포교 영역을 국내와 만주 일대로 확대시켜나가게 된다. 현재 대종교의 총본사는 홍은동에 있으며, 서울을 비롯하여 광역시와 각 도마다 도본사가 있다.
단군을 국조(國祖)로 숭배함으로써 민족의 자주적 정체성을 고취시키고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의 이념을 널리 퍼뜨린다는 것이 대종교의 기본 이념이다. 홍익인간이란 잘 알려진 대로 인간을 크고 널리 유익하게 한다는 뜻이다. 박애와 자비, 봉사의 정신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화세계는 홍익인간을 통해서 올바른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참된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올바른 세상, 이상 세계를 이 땅에 건설한다는 뜻이다. 여기에도 천도교나 증산교와 같이 구한말에 태동한 사교 단체들에 공통적인 요소인 후천개벽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 이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는 한얼님(하느님)으로 이는 조화(造化)?교화(敎化)?치화(治化)의 3대 권능을 두루 갖춘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존재인데, 기독교의 삼위일체에서 그 개념을 따온 것이 아닌가 한다.
대종교는 무오독립선언 초안 마련, 북로군정서?광복군 등 무장 독립운동, 상하이 임시정부 참여, 민족학교 설립, 민족사학의 정립, 한글 지키기 운동, 해방 후 건국운동에 이르기까지 현실참여에 매우 적극적인 면모를 보이면서 사회정치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한 가지 실례로 1920년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청산리대첩의 주역이었던 김좌진을 비롯하여 북로군정서의 장병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고 한다. 이동녕을 비롯하여 상해임시정부 요인들의 상당수 또한 대종교인이었다. 당시 포교활동은 독립운동으로 이어졌으며 독립운동은 곧 포교활동이라 할 정도였다.
대종교가 부흥기를 맞이한 시기인 1910년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한국사 서술을 주도한 대부분의 인물이 대종교도였으며 설사 대종교도가 아닌 역사가라고 하더라도 직?간접적으로 대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한국 민족주의 사학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단재 신채호와 백암 박은식도 대종교인이었다. 조선어학회사건의 핵심 인물 상당수가 대종교도들이었다고 한다. 보다 가까이는 문교부장관을 지낸 안호상이나 여성정치인 박순천 등이 또한 대종교도였다. 이렇듯 대종교는 구한말 일제 강점기에 많은 민족주의적 엘리트들을 규합하여 그 세력을 확장해왔다고 볼 수 있다.
개천절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단기연호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며 단군을 민족 시조로 내세워 이를 기초로 한 역사관을 고취시키고 초등학교마다 단군상을 세우도록 주도한 세력의 배후에는 대종교가 있다. 개천절은 1919년 대종교의 상당한 영향력 속에서 탄생한 상해임시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음력 10월 3일 개천절 행사를 대종교와 함께 거행한 데서 유래한다. 광복 후 개천절이 국경일로 확정된 것은 1949년 8월 5일의 일이다. 대종교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옛 개천절인 음력 10월 3일과 이들 종교의 창시일인 음력 3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리고 있다.
대종교가 교육에 미친 영향도 만만치 않다. 초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안호상만 봐도 그는 1992년 14대 총전교로 뽑힐 만큼 대종교의 핵심 인물이었다. 이들이 세운 일반교육기관으로는 대종교 재단에서 설립한 홍익대학교와 대종교 문화재단에서 설립한 인천대학?대종고등공민학교가 있고, 단국대, 경희대도 대종교의 종교적 기반 위에서 세워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경찰대학교 개교 축제를 비롯하여 각급 대학 동아리를 통해 축제 때 천제를 올리는 일을 주도하고 있다.
전 고려대학교 총장이었던 김정배를 중심으로 1997년 발족된 단군학회는 대종교를 널리 선전하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으며, 대종교를 중심으로 여러 사교단체들이 연합하여 세운 한국민족종교협의회 또한 정관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민족신 단군이라는 이름과 형상의 우상을 섬기는 대종교의 정체를 모른 채 많은 사람들이 대종교를 민족 정신을 고취시키는 애국애족의 단체로만 아는 경향을 우리는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민족-선교민족의 뿌리와 사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한겨레민족사:발해> 07. 신라와 발해의 교섭과 대립 (0) | 2008.11.08 |
---|---|
[스크랩] [그림] 우리 민족 옷 차림 (0) | 2008.10.30 |
[스크랩] <한겨레민족사:발해사> 3. 자주적인 왕조 발해 (0) | 2008.10.23 |
[스크랩] <한겨레민족사:발해사> 2. 발해는 이렇게 세워졌다. (0) | 2008.10.23 |
[스크랩] <한겨레민족사:발해사> 1. 발해사란 무엇인가? (0) | 2008.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