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자교회의 약사(略史)
1807년 영국 런던선교회 소속이었던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ison)이 최초이 개신교 선교사로 중국 선교를 시작하게 되는데, 사실상 이는 중국 선교를 위한 네번째 시도었다. 그러나, 당시 외국인은 중국에 들어갈 수 없었기에 그는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카오에서 거주하면서 중국어 사전편찬, 성경번역 등의 문서사역을 하였다. 그러나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영국에 패하게 되고, 1842년에 난징조약을 조인할 수밖에 없게 되자, 조약 내용에 의거, 외국 선교사가 중국연안 5개 항구(광저우, 햐면, 푸저우, 닝보, 상하이) 범의 내에서 전도할 수 있게 되었다.
제2차 아편정쟁에서 패한 중국은 1858년의 텐진조약과 1860년의 베이징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외국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외국 선교회들은 많은 선교사들을 중국에 보냈고, 전도, 학교설립, 병원설립, 출판사업 등의 사역을 했다. 이러한 선교사역의 형태는 중국이 공산화 되던 1949년까지 계속되었고, 중국의 선교사역이 활발해지면서, 중국 현지의 전도 동역자도 양육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0년 의화단 사건인 반기독교 운동으로 2000여 명의 새긴교 신자, 189명의 선교사와 그 자녀들이 순교를 당했고, 1911년 청 왕조는 손문의 민주주의 혁명에 의해 붕괴되었다. 민국 성립 후, 기독교는 합법적 지위를 얻게 되어 복음이 더욱 널리 전파되었으며, 중국 신도들을 선교에 대한 책임을 느껴, 뜻을 세우고 자립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1918년 중국교회 지도자들은 중화내지전도회를 발기하였고, 최초로 중국인이 조직한 선교회가 생겼다.
1920년부터 1922년 까지 중국의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신문화 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오직 과학과 민주주의만이 중국을 구해낼 수 있다고 믿고, 1922년에 기독교를 미신적으로 여겨 이를 거부하는 반기독교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많은 자립교회가 건립되기도 했다. 그렇듯 교회는 핍박을 받는 한 편,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었다.
1930년대 교회는 더욱 서로간의 단합과 "토착화 운동"을 중시하고 자치, 자양, 자전을 강조하는 삼자운동을 전개했다, 삼자 정신은 적지 않는 중국 신도들에 의해 인정 받게 되었으며, 20-30년대의 교회는 이미 서양적 색채에서 탈피하여 중국에 맞는 교회를 건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의 삼자는 하나의 구호적 수준에 마무르다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고 1951년에 이르러서야 하나의 조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오요종5이 주석이 되어 이 운동을 주도하며 서양교회 배척운동을 했는데, 비단 서양 선교사들을 배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양교회와 무관한 자립교회 지도자인 위치만니와 왕밍따오 등도 모두 토옥되였다. 참고로, 1949년 다잇 교인은 80만명 정도였다.
1954년 7월에 중국기독교 삼자애국운동 우원회가 정식으로 설립되였으며, 이에 가입치 않으려는 전도인은 모두 체포되었다. 목회자들은 모두 노동생산에 투입되었고, 예배드리고자 하는 신도들은 비밀리에 가정집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1955년 10월에 정부는 삼자 이외에는 어떤 기독교 활동도 불법이라고 선포한 뒤, 전국 교회를 대대적으로 합병하여 교회 숫자를 크게 감소시켰다. 이에 상하이에서 약 250여 개의 교회가 7개로 베이징에서는 64개의 교회가 5개로 합병되었다.
1966년에서 1967녀에 걸친 문화 대혁명 시기에는 삼자의 활동조차도 정지되고, 교회는 큰 핍박을 경험하였다. 1976년에 이르러, 모택동이 죽고, 문화대혁명이 끝이 나자, 1979년에 삼자교회가 다시 문을 열었다, 이 삼자는 일찍이 중국 교회에 존대하던 것이었기에 당시로 보아 새삼스러운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모택동 사망이후 다시 활성화 된 삼자교회는 공산당과 연합하여 가정교회 및 가정교회 지도자들에게 삼자에 가입하도록 강요하거나 공안국에 고발하는 역할도 하기도 했다.
5 (오요종은 "하나님은 교회로부터 인류구원의 열쇠를 빼앗아 타자에게 주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타자란 공산당이다. 그는 혁명정부의 사회주의적 변혁운동에 기독교인들이 참여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중국에 대한 하나님의 희망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표하여서 기독교와 자본주의 손잡은 것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기독교가 자본주의에 빠짐으로써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의 사회적 필요에 적절하게 응답할 수 있는 이념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라고 판단하고 있으며 삼자애국운동은 중국적인 상황 안에서 어떻게 해야 기독교가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대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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