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알자
고구려의 건국
옛 고구려의 수도인 집안시에는 유명한 광개토대왕릉비가 장대한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다. 그「비문」의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의 터전을 잡을 때 북부여로부터 나왔는데,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이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내려왔으니 태어나면서부터 신성함이 있었다. 수레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었다. 왕이 나루에 다다라 말하기를 "나는 황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딸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시키고 자라를 떠오르게 하라"고 하였더니,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자라가 떠올라 건너갈 수 있었다. 비류곡 홀본(졸본) 서쪽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인간세상의 왕위에 있는 것을 즐기지 않으니 이로 말미암아 (하늘이) 황룡을 내려보내어 왕을 맞이하게 되니 홀본의 동쪽 언덕에서 황룡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비문」에서 보듯이 고구려 사람들은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과 자신들이 북부여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다. 즉, 자신들이 남만주 지역에서 오래 전에 정착해서 발전해 온 사람들이 아니라 이주민이었다고 생각했다. 고구려의 주도세력도 역시 부여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부여가 고구려보다 북쪽이라는 것을 볼 때 고구려의 주민 구성은 북방에서 말을 타던 무리들이 내려와 압록강 유역에 정착하면서 살던 사람들과 융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가 부여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출신지였기 때문이 아니라 고구려가 당시 동방사회에서 큰 위치를 차지했던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것에서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추모왕(주몽)을 북부여 천제(天帝)의 아들로 알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한편 고구려가 건국되던 때는 고조선이 붕괴된 후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에 부여가 상대적인 강국으로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를 이끌만한 강력한 국가는 없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나라도 무제가 죽은 후에는 외부의 확대정책을 포기하고 있던 터라, 만주 일대에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이와 같은 동방사회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등장한 고구려는 건국 직후부터 빠르게 만주와 한반도 북부 일대의 군소 국가들을 통합하였다. 졸본부여를 시작으로 행인국·북옥저 등을 통합했고 3대 대무신왕 시기엔 벌써 동방지역 최강의 국가로 자리잡게 된다. 이처럼 고구려는 부여의 혈통을 계승하고 고조선을 세웠던 역사적 경험을 이어 받아 강력한 국가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단군신화의 흔적이 나타나고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단군신화의 내용과 밀접한 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고조선의 정신세계를 그대로 계승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구려의 지리적 환경
고구려 발상지인 압록강 중류 일대는 깊은 계곡과 산이 많으며, 평야는 하천 연변에 좁게 형성되어 산재해 있다. 이 지역은 서쪽으로는 혼하(渾河) 쪽으로 해서 요동 방면으로 통하고, 동으로 독로강을 거슬러 올라 개마고원을 넘어 동해안으로 빠지게 되어 있어 동서를 연결할 수 있는 중간지점에 위치하였다. 한편으로는 청천강 상류지역을 거쳐 평양 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고, 북으로는 압록강 상류 방면을 거쳐 송화강 유역으로 연결될 수 있다. 이러한 지리적인 위치와 평야가 부족한 자연조건은 뒷날 고구려가 정복 활동을 촉진하는 주요 동인의 하나가 되었다.
부족집단의 성장
청동기 시대 이 지역의 주민들은 하천 가의 평야를 바라보며 산을 등진 아늑한 곳에 마을을 형성해 살고 있었다. 농경이 주업이었으며, 가축사육도 성하였고 사냥과 어로도 많이 행하였다. 그리고 서기 전 4세기 무렵 이후부터 철기를 사용하게 됨에 따라 철제 농기구와 공구의 사용에 따라 농업에 큰 진전을 보게 되었으며 인구가 점차 늘어나고 마을의 규모도 커지고 그들 상호간의 교류도 증진되었다. 한편 고조선과 중국 문물의 영향이 미쳐오게 되면서 씨족내 친족 집단간의 우열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유력한 친족 집단을 중심으로 일정한 계곡이나 하천유역의 촌락들을 규합한 지역 정치집단이 형성되어갔다.
부족연맹체의 형성
어떤 강력한 조직과 결속력을 지닌 국가라기보다는 각 지역의 부족집단들을 영도하는 완만한 연맹체로써 더 이상의 수준으로 통합되지 못한 상태에서 한(漢)나라의 동방침략으로 인하여 그 지배하에 귀속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 서기 전 107년에 현도군이 설치되었는데 지금의 집안시(集安市)일대이다. 이 현도군과의 관계에서 주목되는 것은 현도군이 설치될 당시에 이미 '고구려'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고구려의 저항
현도군이 설치됨에 따라 압록강 유역은 한나라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면서 토착사회의 전통적인 사회질서와 문화가 급속도로 무너지고 혼란에 빠지면서, 한인(漢人)의 수탈적인 상행위가 자행되었다. 이는 곧 고구려의 반발을 유도하게 되고 그것은 군현의 통폐합, 퇴출로 나타나게 되어 현도군은 서기 전 75년 흥경·노성 방면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계루부의 대두
현도군을 몰아낸 뒤 고구려 지역은 고구려왕을 대표로 하는 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초기에는 소노집단(消奴集團)이 우세하였으나 뒤에 계루집단(桂婁集團)이 점차 주도권을 장악해 나가게 되었다. 계루집단의 기원에 대해 <삼국사기>나 광개토왕비문 등에서는 이 집단이 북부여(北扶餘)에서 갈라져 나와 기존의 집단들과 큰 괴리 없이 점차 상호융합 되었다 한다.
고구려족 역사 전체에서 볼 때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교체는 연맹체장의 교체에 불과한 것이다. 계루집단의 우두머리이기도 한 고구려왕을 정점으로 한 강력한 중앙정부의 통제력 아래 귀속되어갔다.
고대국가의 성립과 지배체제의 강화
대체로 1세기 후반 태조 때에 이르러 고구려족 전체를 통괄하는 강력한 집권력을 지닌 고대국가체제가 확립되었다. 고구려왕들의 성은 해씨(解氏)라 하였는데, 태조왕 이후는 고씨(高氏)라 스스로 칭하였으며, 친족집단의 공동체적 성격이 점차 약화되어갔다. 그리하여 왕위 계승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의 변화가 시도되었고 대외전쟁을 통한 정복과 약탈 및 공납의 징수 등이 가져다주는 부의 증가는 공동체적 성격의 약화를 더욱 촉진하였다.
그에 따라 독자적인 기반을 가졌던 5부의 족장세력들을 중앙귀족으로 편제시켜 나갔으며 중앙관제조직을 성립시켜 고대국가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대외 정복활동
고대국가란 초기국가의 발전된 형태로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의 성립, 그리고 밖으로의 정복사업을 통한 광대한 영토국가의 형성등으로 특징지어진다. 고대국가 성립 후 고구려의 본격적인 대외적 팽창을 대략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초기단계
첫 단계는 태조왕대부터 한군현을 몰아낸 시기(313년)까지로, 물산이 풍부하고 비옥한 농경지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물자와 인민을 노획하는 약탈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이어 중국이 삼국으로 나뉘자 고구려는 양자강 이남의 오나라와도 통교를 하여 폭넓은 국제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이러한 활발한 대외정복활동이 가져다 준 막대한 부는 대내적으로 집권력의 강화와 왕권의 강화에 밑받침이 되었다.
고구려는 밖으로 부여 및 중국세력과 끊임없이 대립하는 가운데 영토의 확장을 도모하고 안으로는 국가체제의 정비를 이룩하였다.
* 4세기의 대외관계
그러나 342년 전연의 침공으로 수도가 함락되는 대 타격을 받기도 하고 남에서 새롭게 일어나는 백제가 북으로 팽창해 371년에는 고국원왕이 백제군을 막다가 평양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이어 왕위에 오른 소수림왕 때에 일대 개혁이 시도되어 율령 반포. 불교의 수용·태학의 설립 등이 행하여졌다. 일정한 법체계로서의 율령의 반포와 태학의 설립은 관료체계 확립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보편적인 정신세계로서 불교의 수용은 고구려 영역내의 여러 족속들이 지닌 신화와 설화들을 포용하면서 이것들을 보다 한 단계 고양된 종교와 철학의 세계로 규합시켜나갈 수 있게 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견고한 뼈대를 확충하게 되었다.
* 독자적인 세력권 구축
이러한 토대 위에서 다음 단계, 즉 광개토왕 및 장수왕 때의 웅비를 가져왔다. 한편, 이 시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어느 한 나라가 국제 정세를 일방적으로 주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다원적인 세력 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대외관계에 힘입어 문화적으로도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나아가 중앙아시아 지역과도 직접·간접의 교류를 함으로써, 고구려사회의 발전에 따라 필요해진 제반 문물을 수용해, 전통적인 문화 기반 위에서 이들을 통합시켜 독자적이면서도 국제성이 풍부한 문화를 이룩해 나갈 수 있었다. 오늘날 전하는 고구려 벽화고분에서 그러한 면모를 여실히 찾아볼 수 있다.
광개토왕은 특히 활발한 정복사업을 전개하여 영토를 크게 넓혔으니 그것은 지금 통구에 남아 있는 거대한 광개토왕릉비로부터 알 수 있다. 광개토왕의 위업을 계승하여 고구려로 하여금 전성기를 맞이하게 한 이는 장수왕이었는데 그는 수도를 통구의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인 평양으로 옮김으로써(427년) 고구려는 대동강 유역의 풍부한 경제적 부를 누리고 과거 고조선 및 낙랑군의 문화 유산을 이어받아 정치·경제·문화면에서 비약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서해를 통하여 중국의 남북양조와 교통하는 한편 남쪽으로 백제·신라 방면으로 진출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평양천도 후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와 두루 교통하여 그들의 압력을 배제하면서 남하정책을 강행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다.
하대의 정세변동
* 귀족연립정권체제
6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고구려의 내외 정세에 새로운 변화가 전개되었는데, 사병집단을 거느린 귀족들이 상호 타협하여 실권자의 자리인 대대로(大對盧)를 선임하는 잠정적인 귀족연립정권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 연개소문의 쿠데타 때에도 그 일면을 볼 수 있는데, 연개소문은 중앙에서 반대파를 대거 숙청한 뒤, 반대하는 지방 유력 세력들에 대한 공략을 감행하였다. 유명한 안시성의 성주는 그의 반대파여서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이에 양자간에 서로를 인정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연개소문의 경우가 말해주듯이, 수상직인 대대로는 중앙귀족들과 각지의 성주들을 포함한 당대의 지배층 귀족들간에 새로운 집권자로 승인되어졌을 따름이다.
* 6세기 후반 대외관계의 변화
한편, 고구려의 내분을 포착한 신라와 백제는 551년 고구려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여 한강 상류지역은 신라가 차지하고, 하류 평야지대는 백제가 점령하였다. 그리고 552년·553년에 걸쳐 서쪽으로부터 북제(北齊)의 군사적· 외교적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신흥 돌궐(突厥)이 등장하여 몽고고원에 새로운 풍운이 일어나 552년 그 상전국이었던 유연을 격파하였고 그 파동이 고구려까지 확산되어 서북부 국경선 일대에 새로운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렇게 내우외환이 겹친 상황에서 고구려는 신라에게 한강유역과 동해안 일대의 지배권을 양도해주고 휴전하기를 원하는 밀약을 맺었으며, 신라는 553년 백제의 점령지인 한강하류지역에 대한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이를 점령하였고, 이로써 1백여 년 지속되어 오던 나제동맹이 깨지고 말았다.
돌궐과의 대결에 따른 급박한 상황을 넘긴 뒤, 고구려는 재차 한강유역의 회복을 시도하게 됨에 따라 신라와의 전쟁이 재개되어, 한반도 내에서 삼국간에 치열한 전쟁의 격동의 바람이 불게 되었다. 온달장군의 전설은 그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수나라와의 전쟁
580년 수나라가 건국되고, 이어 4세기이래 300여 년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하여,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이제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지향하는 추세를 나타내었다. 수나라의 세력이 동북아 방면으로 뻗쳐오면서 종래까지 고구려 세력하에 있던 일부 거란족과 말갈족이 수나라의 영향을 쫓아 이탈해 나가기 시작하고, 수나라는 고구려 왕의 입조를 요구하며 노골적으로 복속을 강요해 시간이 흐를 수록 고구려의 위치는 강대한 수나라의 국력 앞에 불리해져갔다. 이에 휘하의 거란족과 말갈족의 동요를 막고 독자적인 세력권을 유지하기 위해 뻗쳐 오는 수나라의 영향력을 봉쇄하기 위한 비상 조치로 전쟁의 길을 택하였다.
598년 고구려군이 요서지방에 있는 수나라의 전진기지를 공격하여 양국간의 전쟁이 발발하였고, 그것은 수나라의 네 차례에 걸친 대규모 침공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그 결과는 수나라의 참담한 패배로 종결되었고,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 패배가 주요 원인이 되어 곧 멸망하게 되었다.
당나라 및 신라와의 전쟁과 멸망
수의 뒤를 이은 당은 처음에는 고구려와의 화친을 꾀하여 서로 사신을 파견하고 포로를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 태종이 즉위하면서 세계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으로 주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고 고구려에게도 압력을 가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고구려는 국경선에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이는 북의 부여성(지금 농안 부근)에서 남의 비사성(지금 발해만 부근)에 이르는 방어선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영류왕과 온건파들이 태자를 당에 보내고 당장수에게 지리를 익히고 군사상황을 살피도록 길을 열어 준 것에 불만을 품고,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들이 반정을 일으켰다(642년).
연개소문은 왕을 살해하고 실권을 장악한 후에 강력한 대외정책을 펴서 신라와 당에 강경히 대응하였다. 이에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국왕살해를 문책한다는 구실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요하를 건너 요동성 등 몇 개 성을 점령하고 이어 안시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성주 양만춘과 백성의 용감한 저항과 안시성의 지리적 요건 때문에 60여 일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결국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중국의 통일제국 수·당의 거듭된 침입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신라와 당은 백제를 멸망시킨 후(660년) 곧바로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서둘렀지만 연개소문은 강력한 저항으로 나당군의 침입을 막아내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외란으로 국력이 약화되고 연개소문의 독재정치에 대한 백성의 불평도 높아졌으며, 밖으로는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 거란족과 말갈족이 당에 복속되어 요동방위선이 점차 약화되어가고 있었다. 이때 연개소문이 죽자(666년) 고구려 지배층에서는 내분이 일어나고 나당연합군의 공격은 계속되어 평양성의 고구려군은 분전하였으나 결국 함락되어 멸망하고 말았다(668).
부흥운동과 유민의 동향
평양성 함락 후, 당나라는 이 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2만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고구려 전국을 9도독부 46주 100현으로 나누고, 그 장(長)에는 고구려인을 뽑아 임명하되 당나라 관리를 보내어 실제 통치에 임하였다. 그리고 669년 고구려인의 저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유력한 민호 2만 8천 2백)호를 당나라 내지로 강제 이주 시켰는데 이는 당시 고구려 말기의 인구 69만 7천호의 약 20분의 1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고구려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정책이었다. 당나라의 이러한 지배 정책은 곧바로 고구려 유민들의 강력한 저항을 일으켜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이어 안시성 등지에서 봉기가 잇달았다.
한편, 신라는 당나라에 대한 공세를 취하면서 유민들의 부흥운동을 지원하였는데 670년 신라 장군 설오유(薛烏儒)와 고구려 장군 고연무(高延武)가 이끄는 연합군이 압록강을 넘어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676년 신라에게 패배한 당나라가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긴 뒤,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 영역과 주민은 신라에 완전히 귀속하게 되었으며, 요동과 그 밖의 옛 고구려 영역의 유민들이 몽고고원의 돌궐 영내로 이주하였으며, 상당수의 유민은 당나라 내지에 옮겨졌다. 그 결과 요동지역에 거주하는 유민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한편, 당나라의 영주(營州) 부근에 강제로 이주되어 있던 유민 집단은 696년 거란족의 반란에 따른 혼란을 틈타 일부 말갈족 집단과 함께 동으로 탈주하여 동부만주에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에 만주 지역에 흩어져 있던 고구려 유민들은 급속히 그 아래로 규합되었는데 이것이 발해이다. 중국 내지와 돌궐방면의 유민은 점차 그 지역 주민들 사이에 흡수·동화되었다. 요동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은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후, 일시 소고구려국(小高句麗國)을 세워 자립하였으나, 곧이어 9세기 전반에 발해에 병합되었다. 수 백년 동안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걸쳐 강대한 국가와 찬란한 문화를 건설하였던 고구려의 역사는 그 유민들과 함께 신라와 발해로 나뉘어 계승되었다.
고구려의 정치체제
* 초기의 정치체제
고구려 초기의 정치 체제는 다원적인 권력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고구려 형성의 중심 세력 집단이었던 5부는 중앙 정부의 왕권 하에 귀속되어 그 통제를 받고 있었으나, 각각의 관인조직을 유지하며 독자적인 정치체제로의 기능과 결집력을 상당히 유지하고 있었다. 계루부의 중앙 정부에는 왕 아래에 상가(相加)·대로(對盧)·주부(主簿)·우태(憂台)·사자·조의·선인 등이 있다.
2세기 말, 3세기 초의 상황을 전하는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에 의하면, 소노부는 자체에서 그 조상신과 지역수호신·농업신 등에 제사를 지내는 등, 자치적인 정치체제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유지하였고, 계루부에서도 왕족 대가(大加)들은 자신의 관인을 두는 등 휘하에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당히 자치적인 여러 집단을 통합하여 왕국을 운영해 나감에 있어 자연히 제 집단의 모임인 귀족회의가 중요한 기능을 하였고, 왕국 운영에 있어 회의체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 관등제도의 확립
정복활동이 활발해져 광대한 지역이 병합되고, 중앙집권력이 강화되며 점차 일원적인 지배조직의 형성을 지향하게 되면서 필수적으로 중앙 관제가 정비되고 관직체제와 지방 통치조직이 확충되는 등 관료조직의 정비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크고 작은 집단들의 족장 세력을 왕권하에 일원적인 체제로 편제하여 형(兄)의 관계로, 확대된 영역의 수취체제를 정비하는 사자의 관계로 정비되었다.
6세기 후반 이후 귀족 연립 정권체제하에서는 대대로·태대형·울절·대부사자·조의·두태형 등 5인의 고위 귀족이 기밀을 장악하고 국사를 도모하여 병사를 징발하고 관직을 수여하는 등 국정을 주관하였다. 이들 중 최고위 직인 대대로는 3년마다 귀족들 간에서 선임되었으며, 세력이 강하고 신망을 얻으면 계속적인 중임도 가능하였다.
* 관직 제도
구체적인 중앙 관직으로서는 외국사신을 접대하고 대외 교섭문제를 담당하는 발고추가(拔古鄒加)가 있고 이에는 대부사자가 임명되었다. 또 국자박사(國子博士)·대학사(大學士)·사인(舍人)·통사(通事)·전용(典容) 등이 있어 모두 소형(小兄) 이상이 임명되었다. 무관에는 사령관에 해당하는 대모달(大模達)이 있어 두태형 이상이 취임하였으며, 그 아래 말객(末客)은 군두(群頭)라하여 휘하 일천인을 거느렸고 대형(大兄)이상이 취임할 수 있었다.
전국은 주요 성(城)을 단위로 행정구역을 편성하여 지방의 큰 성에는 도독에 비할 수 있는 욕살(褥薩)을 두었고 그보다 작은 성에는 중국의 자사에 비견되는 처려근지(處閭近支) 또는 도사(道使)를 두었다.
고구려의 사회 구성
* 하호(下戶)의 성격
하호는 후한대(後漢代)에 부강한 호족인 상가(上家)와 대비되는 빈한하지만 독립된 가계를 가지고 자유로운 신체를 보유한 소작농을 지칭한 용어로 이는 당대의 중국인들이 동방사회를 살펴보았을 때 파악되는 말이다.
* 지배 계급
《위략》과 《삼국지》 동이전에는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전반에 걸친 시기의 고구려의 사회상을 기술한 부분에서 "대가(大家)는 농사를 짓지 않으며, 하호는 부세(賻稅)를 내어 노객(奴客)과 비슷하다." 또는 "나라 안의 대가는 농사 짓지 않으며, 이러한 좌식자(坐食者)가 1만여 인이 되고, 하호가 식량과 고기 및 소금을 날라와 공급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대가란 직접 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1만여 명의 좌식자들인 왕족과 각부의 족장과 그 친족인 고구려의 지배층이다.
* 양인(良人) 농민층
고국천왕 때에 실시되었다는 진대법이나 그 밖의 《삼국사기》에서 자주 보이는 진휼의 기록 등은 곧 읍락공동체의 해체에 따라 일어나는 계급 분화 과정에서 민(民)이 귀족이나 여타의 호민들의 노비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그들을 국가의 공민으로 확보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신분층으로서의 양인(良人)에 대한 기록상의 첫 표현은 6세기 중엽 신라에서 사다함(斯多含)이 가야정벌전에 참가하고 돌아오자 왕이 그 공으로 포로 2백인과 토지를 주었는데, 그가 받은 전쟁포로 노예들을 해방시켜 양인이 되게 하였다고 한다. 이때 양인이란 재산권과 신체의 자유권을 가지고 국가에 직접 귀속된 일반민을 말한다.
그리고 민에 대해 빈부를 헤아려 차이를 둔 일정액의 부세가 부과되었으며, 이 밖에도 민에 대해 역이 부과되었다. 노동력 징발의 기준은 15세였으며 민은 차출되어 군대에 징집되어 이 군역은 민에게 부담이 컸다. 특히, 통일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을 때에는 제대로 복무 기간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또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는 경우가 빈번할 것이니 이에 따라 민의 경제적 파탄과 몰락이 심하였을 것이다.
* 노비 계급
고구려의 사회구성의 최하층을 형성하고 있는 노비는 발생 요인에 따라, 일차적으로는 포로·형벌·약탈·부채·매매 등에 의한 것이 있고, 이차적으로는 노비의 자손들인 혈연노비가 있었다. 노비는 원시 공동체 단계의 사회가 해체되면서부터 발생한 것으로서 일찍부터 있어 왔으나, 고구려의 경우 그 대외적 팽창에 따라 전쟁포로가 가장 중요한 노비의 공급원이었다. 그리고 호강한 귀족들에 의해 민이 약탈되어 노비화 되는 경우와 형벌에 의한 경우도 많다.
* 집단 예민
고구려의 대외적 팽창에 따라 흡수된 피정복 집단들은 재래의 읍락질서를 유지하면서 족장을 통해 공납을 바치며 간접적으로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다 이 집단 예민은 향(鄕)·부곡(部曲)과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이질적인 종족인 거란·말갈 등속의 부락은 고구려 말기까지도 그들의 예전 부락체제를 유지하면서 피복속민 집단으로 고구려국에 예속되어, 공납과 함께 필요한 때에 군사적으로 동원되었다.
고구려의 문화
* 하호(下戶)의 성격
하호는 후한대(後漢代)에 부강한 호족인 상가(上家)와 대비되는 빈한하지만 독립된 가계를 가지고 자유로운 신체를 보유한 소작농을 지칭한 용어로 이는 당대의 중국인들이 동방사회를 살펴보았을 때 파악되는 말이다.
* 지배 계급
《위략》과 《삼국지》 동이전에는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전반에 걸친 시기의 고구려의 사회상을 기술한 부분에서 "대가(大家)는 농사를 짓지 않으며, 하호는 부세(賻稅)를 내어 노객(奴客)과 비슷하다." 또는 "나라 안의 대가는 농사 짓지 않으며, 이러한 좌식자(坐食者)가 1만여 인이 되고, 하호가 식량과 고기 및 소금을 날라와 공급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대가란 직접 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1만여 명의 좌식자들인 왕족과 각부의 족장과 그 친족인 고구려의 지배층이다.
* 양인(良人) 농민층
고국천왕 때에 실시되었다는 진대법이나 그 밖의 《삼국사기》에서 자주 보이는 진휼의 기록 등은 곧 읍락공동체의 해체에 따라 일어나는 계급 분화 과정에서 민(民)이 귀족이나 여타의 호민들의 노비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그들을 국가의 공민으로 확보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신분층으로서의 양인(良人)에 대한 기록상의 첫 표현은 6세기 중엽 신라에서 사다함(斯多含)이 가야정벌전에 참가하고 돌아오자 왕이 그 공으로 포로 2백인과 토지를 주었는데, 그가 받은 전쟁포로 노예들을 해방시켜 양인이 되게 하였다고 한다. 이때 양인이란 재산권과 신체의 자유권을 가지고 국가에 직접 귀속된 일반민을 말한다.
그리고 민에 대해 빈부를 헤아려 차이를 둔 일정액의 부세가 부과되었으며, 이 밖에도 민에 대해 역이 부과되었다. 노동력 징발의 기준은 15세였으며 민은 차출되어 군대에 징집되어 이 군역은 민에게 부담이 컸다. 특히, 통일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을 때에는 제대로 복무 기간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또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는 경우가 빈번할 것이니 이에 따라 민의 경제적 파탄과 몰락이 심하였을 것이다.
* 노비 계급
고구려의 사회구성의 최하층을 형성하고 있는 노비는 발생 요인에 따라, 일차적으로는 포로·형벌·약탈·부채·매매 등에 의한 것이 있고, 이차적으로는 노비의 자손들인 혈연노비가 있었다. 노비는 원시 공동체 단계의 사회가 해체되면서부터 발생한 것으로서 일찍부터 있어 왔으나, 고구려의 경우 그 대외적 팽창에 따라 전쟁포로가 가장 중요한 노비의 공급원이었다. 그리고 호강한 귀족들에 의해 민이 약탈되어 노비화 되는 경우와 형벌에 의한 경우도 많다.
* 집단 예민
고구려의 대외적 팽창에 따라 흡수된 피정복 집단들은 재래의 읍락질서를 유지하면서 족장을 통해 공납을 바치며 간접적으로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다 이 집단 예민은 향(鄕)·부곡(部曲)과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이질적인 종족인 거란·말갈 등속의 부락은 고구려 말기까지도 그들의 예전 부락체제를 유지하면서 피복속민 집단으로 고구려국에 예속되어, 공납과 함께 필요한 때에 군사적으로 동원되었다.
고구려 연구사
고구려사에 대한 사서(史書)로는 고구려 당시에는 《유기》 《신집》 5권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구삼국사 舊三國史》가 편찬되었으나 이것 역시 망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 역사에 대한 사서로 가장 오래된 것은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는 유교적인 도덕사관과 신라 중심의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편찬되었다. 한편, 고려 무신집권기에 활약하였던 이규보(李奎報)는 《동명왕편》에 《구삼국사》의 기사를 바탕으로 하여, 동명의 건국 과정을 노래하면서, 당시까지 기층 사회에 침전되어 이어져오던 고구려적 전통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고려 충렬왕 때 인물인 일연(一然)은 《삼국유사》를 저술하여, 《삼국사기》가 간과해 버린 고구려의 일부 불교관련자료를 수집·정리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조선 전기에는 권근(權近)의 《삼국사절요 三國史節要》와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국통감》 등이 고구려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들 사서는 새로운 자료의 첨가 없이 편년체 사서로 편찬되었고, 《삼국사기》의 역사인식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으며, 주자학적인 가치기준에 의한 표현이 보다 강조되었다.
조선 후기에 와서 실학의 새로운 학풍이 일어나면서, 고구려사에 대한 인식에도 새로운 면을 나타내게 되었다. 실학자들에 의한 고구려사 연구의 성과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문헌고증학적인 검토에 의해 역사지리에 관한 연구를 하였고, 나아가 고구려사에 관한 문헌자료의 수집과 정리를 시도하였다. 안정복의 《동사강목》·한치윤의 《해동역사 海東繹史》·정약용의 《강역고 疆域考》 등이 그 대표적 성과이다. 다른 일면은 종래의 일방적인 중국 중심의 천하관(天下觀)과 화이관(華夷觀)에서 벗어나, 당시의 확충된 역사지리에 대한 지식과 결부하여, 우리민족의 역사적인 생활권에 대한 관심을 깊이 하였다. 이는 자연 고구려사와 발해사에 관한 이해를 촉진시켰는데 이종휘의 《동사 東史》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같이 합리적인 실증적 연구방법과 자기 민족 중심의 역사 인식이라는 두 가지 조류가 한데 어우러지는 데서 한국근대사학의 방향성이 주어졌지만 이러한 면이 충분히 성숙되기도 전에 개항과 함께 밀려드는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국권의 상실을 당하였다. 그에 따라 민족독립의 쟁취가 시대적 과제가 됨에 따라, 역사연구 또한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수행되었다. 이에 민족주의 사학자들에 의해, 특히 고구려사의 영광과 그 애국명장들이 강조되었다. 순환론적인 정신사관에 입각한 이들의 논리에선 영광된 과거의 민족사는 곧 내일의 독립과 번영에 대한 정신적 담보이었다. 신채호·정인보·문일평 등이 고구려사에 관한 서술 역시 교설적으로 기록하였던 대표적인 학자였다.
한편, 일제강점하에서의 고구려사 연구에 주도권을 쥔 것은 일본인 학자들이었다. 그들의 연구는 초기는 역사지리와 그에 결부된 고구려의 피침략사에 치중되었다가, 점차 정치제도사 분야로 확대되었다. 1930년대 이후 백남운·김광진 등에 의해 사회경제사적인 측면에서 고구려사회의 성격을 파악하려는 논고들이 나왔고, 광복 후 우리 학자들에 의하여 새로운 민족사의 모습을 정립하기 위한 노력이 열정적으로 제기되었지만, 사상적 대립과 분단·내전으로 이어지는 혼란과 갈등의 와중에서 충실한 학문적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소수학자들의 몇몇 연구논문들은 이 시기 고구려사 연구의 학문적 공백을 메워주는 귀중한 성과였다.
1960년 이후 재차 식민지사학의 잔재에 대한 비판이 가해지고, 한국사에 관한 연구가 질적·양적으로 크게 활발해졌다. 그러나 고구려사의 경우, 전공학자의 절대적 부족과 현지 방문의 불가능, 고고학적 자료 입수의 어려움 등에 의해 일정한 제약성을 나타내었다. 1970년대 들어오게 되면서 고고학·인류학·민속학 등 인접학문분야의 연구성과와 방법론을 받아들임으로써 연구자의 관심분야도 정치사 중심에서 사회사·사상사에로 확대되고, 또 인식의 폭도 넓어지게 되고 연구 인원의 증가로 보다 많은 연구 성과들이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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