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선교민족의 뿌리와 사명

[스크랩] 조선상고사-제8편 남방 여러 나라의 對 고구려 공수동맹(攻守同盟)

수호천사1 2008. 10. 4. 17:17

조선상고사-제8편 남방 여러 나라의 對 고구려 공수동맹(攻守同盟)

 

단재 신 채 호(丹齋 申采浩, 1880-1936) 

 


제 1 장 네 나라 연합군과의 싸움과 고구려의 퇴각


1. 신라 · 백제 두 나라 관계의 유래와 비밀동맹의 성립


장수왕의 남진정책 ( 南進政策 ) 이 비록 한때 백제를 무너뜨렸으나 마침내 남쪽 세 나라---신라 · 백제 · 가라의 연맹 ( 聯盟 ) 을 이루게 한 원인이 되어 역사상 초유의 대변국 ( 大變局 ) 을 이루었다 . 이 연맹의 주력이 신라에 있었으므로 이제 그 경과를 서술함에 있어 , 먼저 신라 대 백제 · 고구려 관계의 유래부터 대략 말하려 한다 .


신라는 원래 그 지방이 고구려와 멀고 백제와 가까워서 고구려보다 백제와의 관계가 더욱 복잡하였다 . 그러나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신 라 · 백제 관계의 기록은 믿을 것이 적으니 그 한두 예를 들어보겠다 . 이를테면 신라가 탈해이사금 ( 脫解尼師今 ) 이후로 백제와 서로 2 백 명 정도의 적은 군사로 연혁 ( 沿革 ) 도 전하지 않는 와산 ( 蛙山 ) 봉산 ( 烽山 ) 등지를 거의 해마다 빼앗고 빼앗기곤 하였으나 , 신라는 당초 경주 한 귀퉁이의 조그만 나라이고 , 백제는 온조왕 ( 溫祚王 ) 당년에 벌써 마한 ( 馬韓 ) 50 여 나라를 차지하였으니 어찌 신라와 똑같이 해마다 2 백 명정도의 군사를 내었으랴 ? 또 한 가지 , 두 나라가 간혹 화호 ( 和好 ) 한 일이 있으나 늘 백제가 먼저 신라에 향하여 화의를 빌었다고 하였는 데 , 백제가 신라보다 몇 갑절 되는 큰 나라로서 어찌 늘 먼저 굴복하였으랴 ? 백제와 신라 사이에 가라 ( 加羅 ) 6 나라와 사벌 ( 沙伐) · 감문 ( 甘文 ) 등 완충국 ( 緩衝國 ) 이 있었는데 어찌 백제가 가라 등의 나라들과는 한 번의 충돌도 없고 도리어 신라를 침범하였으랴 ? 대개 신라가 백제를 원망함이 심하였으므로 백제가 망한 뒤에 그와 관계된 사적을 많이 고치거나 혹은 위조하였다 . 지나의 삼국지 ( 三國志 ) · 남사 ( 南 史 ) · 북사 ( 北史 ) 등에 보인 기록을 보면 신라가 처음에 백제의 결제를 받았다 하였으니 이것이 도리어 믿을 만한 기록일 것이다 .


근구수왕 ( 近仇首王 ) 이후 백제가 고구려와 혈전을 벌이는 동안에 신라는 비로소 자립하여 백제와 대항하다가 오래지 않아 고구려의 광 개토왕이 나와 국위가 크게 떨치자 백제의 아신왕 ( 阿莘王 ) 이 왜병 ( 倭兵 ) 을 불러 북으로 고구려를 막고 남으로 신라를 치니 , 신라의 내물이사금 ( 奈勿尼師今 ) 은 고구려의 구원병을 얻어 왜를 물리치고 몸소 광개토왕에게 조알 ( 朝謁 ) 하고 왕족 실성 ( 實聖 ) 으로 볼모를 삼았다 . 내물이사금이 돌아가자 내물의 아들 눌지 ( 訥祗 ) 가 아직 어리므로 실성이 귀국하여 왕위를 잇고 , 눌지 · 복호 ( 卜好 ) 형제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 그 뒤에 실성왕이 고구려의 귀인 ( 貴人 ) 과 결탁하여 눌지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고구려 사람이 듣지 않고 눌지를 돌려보내서 실성왕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


눌지이사금 ( 訥祗尼師今 ) 이 이와같이 고구려로 하여 왕위를 얻었으나 고구려가 백제를 아우르면 신라도 홀로 견디어내지 못할 것을 알 고 , 박제상 ( 朴堤上 ) 을 보내서 신라의 고구려에 대한 정성이 한낱 볼모의 있고 없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다는 말로 고구려의 군신을 꾀어 왕의 사랑하는 아우 복호 ( 卜好 ) 를 돌려오고 비밀히 백제와 통하여 고구려를 막으려 하였으며 , 백제도 왜 ( 倭 ) 는 멀고 신라는 가까우므로 왜를 끊고 신라와 사귀어 고구려를 막기로 결정하여 신라와 백제 두 나라의 동맹이 성립하였다 . 삼국사기에 , 눌지이사금 39 년 , 기원 455 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니 눌지 이사금이 군사를 보내 백제를 구원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곧 위에 말한 두 나라 동맹의 결과이거니와 이 밖에도 고구려 대 동맹 양국의 침략전과 동맹 양국 대 고구려의 방어전이 잦았을 것인데 기록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은 사문 ( 史文 ) 이 떨어져나가 없어진 때문이다 .


2.신라·백제 ·任那·阿羅 네 나라의 동맹


장수왕이 신위례성 ( 新慰禮城 ) 을 침노하자 근개루왕 ( 近蓋屢王 ) 의 태자문주 ( 文周 ) 가 신라에 와서 급함을고하니 , 신라는동맹의 의리로뿐 아니라 그 자위상 ( 自衛上 ) 부득이 출병하게 되었다 . 그래서 자비마립간 ( 慈悲麻立干 ) 이 군사 1 만으로 구원에 나섰으나 근개루왕은 이미 죽고 신위례성은 벌써 무너졌으므로 , 문주왕 ( 文周王 ) 은 서울을 회복하지 못하고 물러나 웅진 ( 熊津 ) 에 도읍하니 웅진은 광개토왕의 비문에 고모나라 ( 古模那羅 ) 라고 한 곳이다 . 둘 다 '곰나루'로 읽을 것이니 전자는 뜻으로 쓴 이두자요 , 후자는 음으로 쓴 이두자이다 . 지금의 공주 ( 公州 ) 가 당시의 '곰나루'이다 .


이때 지금의 한강 ( 漢江 ) 이남에 신라 · 백제 이외에 가라 ( 加羅 ) 등 여섯 나라가 있어서 지금의 경상남도를 나누어 웅거하였음은 제 3 편에서 말하였거니와 최초에는 신가라가 종주국 ( 宗主國 ) 이고 임나 ( 任那 ) · 아라 ( 阿羅 ) · 고자 ( 古自 ) · 고령 ( 古寧 ) · 벽진 ( 碧珍 ) 의 다섯 가라는 이에 딸려 있었는데 그 뒤에 신가라와 다른 세 가라는 미약해져서 정치문제에 관여할 권리를 잃고 오직 임나와 아라 두 가라만이 강성해져 신라와 맞섰다 . 그래서 광개토왕이 왜를 칠 때에도 상당한 군사를 내어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도와서 왜와 싸웠다 .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신위례성이 무너지고 백제가 웅진 ( 熊津 ) 으로 천도하니 두 가라가 다 크게 놀라 스스로 보전하기를 도모하는 동시에 , 신라와 백제도 그 두 나라의 힘이 고구려를 막아냄 에 부족함을 느끼고 드디어 두 가라의 동맹가입을 권유하여 , 이에 신라 · 백제 두 나라 대 고구려의 공수동맹이 신라 · 백제 · 임나 · 아라 네 나라 대 고구려 공수동맹으로 변하였다 . 장수왕은 신라가 전번의 고구려의 큰 은혜 ---광개토왕이 왜군을 정벌한 일을 잊고 백제와 연합함을 크게 분하게 여겨 기원 481 년에 대병을 일으켜 신라의 동북부를 침공하니 , 신라의 소지마립간 ( 炤智麻立干 ) 이 몸소 비열홀 ( 比列忽 )--- 지금의 안변 ( 安邊 ) 에 이르러 방어하다 크게 패하여 고구려 군사가 이긴 기세를 타서 남으로 나와 고명 ( 孤鳴 ) 지금의 회양 ( 淮陽 ) 등 일곱 성을 함락시키니 , 백제의 동성대왕 ( 東城大王 : 다음 장 참조 ) 이 두 가라국 ( 加羅國 ) 과 연합하여 길을 나누어 응원해서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고 그 잃은 땅을 회복하였다 .


3. 네 나라 동맹이 40년 계속됨


네 나라 동맹으로 인하여 장수왕의 남진 철편 ( 鐵鞭 ) 이 꺾이고 백제와 신라가 다 스스로 보전함을 얻었으니 , 그러므로 이것은 당시 조선 정치사상 큰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 백제 동성대왕이 해외를 경략 ( 經略 : 다음 장 참조 ) 하여 백제가 고구려 이상의 강국임을 자랑하던 때까지도 이 동맹이 오히려 계속되었다 . 기원 494 년에 신라가 살수 ( 薩水 ) 지금의 대동강 상류 부근에서 고구려와 싸우다가 견 아성 ( 犬牙城 ) 에서 포위당하여 구원을 청하므로 백제의 동성대왕이 군사 3 천을 보내 고구려를 격퇴하고 포위를 풀었으며 , 이듬해 고구려가 백제의 반걸양 ( 半乞壞 ) 을 치자 신라 소지마립간이 또한 구원병을 보내 고구려 군사를 격퇴하였으니 , 이 동맹이 대개 40 여 년 계속되었음이 분명하며 , 이 동맹이 해체된 뒤에야 신라가 가라 ( 加羅 ) 침략을 시작하였다 .


제 2 장 백제의 倭寇 격퇴와 해외 식민지 획득


1. 東城大王 이후 백제가 다시 강해짐


백제는 신위례성 ( 新慰禮城 ) 이 무너져서 외우 ( 外憂 ) 가 한창 심한 가운데 내란이 또한 잦아 문주왕 ( 文周王 ) 은 곰나루〔熊津〕로 천도한 뒤 4 년 ( 연표에는 3 년 ) 만에 반란을 일으킨 신하 해구 ( 解仇 ) 에게 죽임을 당하고 , 맏아들 임근왕 ( 壬斤王 : 본기에는 三斤이라 하였으나 그의 딴 이름 壬乞로 보면 三斤의 三은 王의 잘못 ) 이 l3 살의 소년으로서 즉위 하였는데 , 그 이듬해에 좌평 ( 佐平 ) 진남 ( 眞男 ), 덕솔 ( 德率 ) 진로 ( 眞老 ) 등과 비밀히 모의하여 해구를 벤 영주 ( 英主 ) 였지만 3 년 만에 15 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 그 해 기원 479 년에 동성대왕이 즉위하였다 . 왕의 이름은 마모대 ( 摩牟大 ) 이니 전사 ( 前史 ) 에 마모 ( 摩牟 ) 라 쓴 것은 끝의 한 자를 생략한 것이고 모대 ( 牟大 ) 라고 쓴 것은 위의 한 자를 생략 한 것이다 . 왕이 즉위 당시의 나이가 얼마였던 것은 역사에 기록되지 아니하였으나 임근 ( 壬斤 ) 의 종제 ( 終第 ) 이니까 열너덧 살에 지나지 못 했을 것이다 . 왕은 어린 소년으로 이같이 어려운 판국을 당했지마는 천성이 숙성하고 백발백중의 활쏘는 재주가 있어 고구려와 위 ( 魏 ) 를 물리쳐 국난을 평정하였을 뿐 아니라 바다를 건너 지나의 지금의 산동 ( 山東 ) · 절강 ( 漸江 ) 등지를 점령하고 일본을 쳐서 속국을 만들었으며 그 밖에도 전공이 허다했는데 , 삼국사기에는 다만 당시 천재 ( 天災 ) 인 한두 번의 홍수와 가뭄과 왕의 사냥한 일을 기록하였을 뿐이요 , 그 나머지는 모두 뺐으니 이는 신라 말기의 문사들이 삭제한 것일 것이다 . 이제 다음에 그의 약사 ( 略史 ) 를 말하기로 한다 .


2. 장수왕의 음모와 魏兵의 침입


이때 지나는 황하 ( 黃河 ) 남북으로 갈려 곧 위 ( 魏 )· 제 ( 齊 ) 두 나라 로 분립하였다 . 위는 곧 선비족 ( 鮮卑族 ) 의 척발씨 ( 拓跋氏 ) 로 모용씨 ( 慕容氏 ) 의 연 ( 燕 ) 을 대신하여 일어난 나라인데 , 그 세력이 대단히 커져서 당시 유일한 강국으로 치게 되었다 . 그런데 장수왕은 남쪽 네 나라의 동맹으로 인해 백제를 합치지 못하겠으므로 , 손을 대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신랄한 수완을 부려 제 3 국으로 하여금 먼저 백제를 격파하게 하고 자기는 그 뒤에서 이익을 거두려고 하였다 . 그래서 해마다 황금 · 명주 10 되를 위왕에게 보내주다가 3 년 만에 사신 예실불 ( 芮悉弗 ) 을 빈손으로 위에 보냈다 . 위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 예실불이“사비 ( 泗此 ) 부여 ( 扶餘 ) 에는 황금산이 있고 섭라 ( 涉羅 : 지금의 濟州 ) 에는 명주연 ( 明珠淵 ) 이 었어 두 가지 보물이 한량없이 나므로 전일에는 이를 캐어서 폐하에게 바친 것인데 , 이제 사비부여는 백제의 서울이 되고 섭라도 백제가 정복하여 황금산과 명주연이 다 그의 손에 들어가서 우리 고구려인은 그 두 가지 보물을 구경할 수 없습니다 . 그러니 어찌 폐하께 갖다드릴 것이 있겠습니까 ? ” 하였다 . 위의 임금과 신하들이 이 말을 곧이듣고 백제를 쳐서 황금산의 황금과 명주연의 명주를 빼앗을 야욕이 치밀어 이에 동침 ( 東侵 ) 의 군사를 일으켰다 .


삼국사기에는 위서 ( 魏書 ) 에서 뽑아다가 예실불의 일을 장수왕의 아들 문자왕 ( 文咨王 ) 때의 일로 기록하였으나 남양예씨 ( 南陽芮氏 ) 의 족보에 의하면 예실불을 그 시조라 하고 그가 위에 사신간 일을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기록하였으니 , 대개 위가 북으로는 고구려 , 남으로는 제 ( 齊 )--- 곧 그 육지가 맞닿아 있는 나라를 두어두고 멀리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싸운다는 것은 해운 ( 海運 ) 이 불편한 고대에 있어서 땅을 다투려는 자의 일이 아니니 예실불의 말에 속아 황금과 명주를 가지려 하였음이 사실인 듯하고 , 위의 백제 침입이 장수왕 때요 문자왕 때가 아니니 삼국사기의 연대가 틀린 듯하므로 이제 삼국사기를 버리고 예씨 의 족보를 좇는다 .


3. 魏兵의 再敗(위병의 재패)


지나 대륙의 나라로 조선에 침입한 자가 많으나 그 군사의 수가 대략 10 만에 이른 것은 척발씨의 위가 시초였고 , 이같이 큰 적을 격퇴한 이는 백제의 동성왕이 처음이었다 . 위서 ( 魏書 ) 에는 그 나라의 수치를 숨기기 위해 이를 기록하지 않았고 , 삼국사기는 백제의 공을 샘하여 그 사적을 삭제한 신라의 사필 ( 史筆 ) 을 그대로 좋아 기록하지 않은 것이고 오직 남제서 ( 南齊書 ) 에 그 대략이 기재되었으나 그것도 당태종 ( 唐太宗 ) 의 훼방으로 대부분은 빠지고 겨우 동성왕이 남제 ( 南齊 ) 에게 보낸 국서가 남아 있어 그 사실의 편린 ( 片鱗 ) 을 알 수 있을 뿐이다 .


그 국서는 완전한 원문이냐 하면 , “중국인이 남의 시문 ( 조선인의 詩文 ) 을 고침에 대담하여 중국을 '수방 ( 殊方 ) ' 혹은 '원방 ( 遠邦 ) '이라 쓴 자구는 저네가 채집 ( 採輯 ) 할 때에 반드시 '황도 ( 皇都 ) ' 혹은 '대방 ( 大邦 ) ' 등으로 고친다 .”라고 한 박연암 ( 朴燕嚴 ) 선생의 말이 있으니 , 심상한 음풍영월 ( 吟風영月 ) 의 시나 글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정치상에 관계되는 국서이랴 . 우리가그 국서로 인하여 1) 기원 490 년에 위가 두 번이나 보병 · 기병 수십 만을 내어 백제를 침노하였음과 2) 동성왕이 첫 번째에 삭녕장군 ( 朔寧將軍 ) 면중왕 ( 面中王 ) 저근 ( 姐瑾 ), 건위장군 ( 建威將軍 ) 팔중후 ( 八中候 ) 부여고 ( 扶餘古 ), 건위장군 부여역 ( 技餘 歷 ), 광무장군 ( 廣武將軍 ) 부여고 ( 柱餘固 ) 를 보내어 위병을 맞아 싸워서 이를 크게 격파하였음과 3) 동성왕이 두 번째에는 정로장군 ( 정로將 軍 ) 매라왕 ( 邁羅王 ) 사법명 ( 沙法名 ), 안국장군 ( 安國將軍 ) 벽중왕 ( 벽中王 ) 찬수류 ( 贊首流 ), 무위장군 ( 武威將軍 ) 불중후 ( 弗中候 ) 해례곤 ( 解禮昆 ), 광위장군 ( 廣威將軍 ) 면중후 ( 面中候 ) 목간나 ( 木千那 ) 를 보내어 또 위병을 맞아 쳐서 수만 명을 목베었음과 4) 동성왕이 이 두 번 의 큰 싸움에 큰 승리를 얻고 국서와 우격 ( 우격 : 나라의 급한 일에 내 는 敵文 ) 을 여러 나라에 보내서 이를 과시하였음과 5(동성왕이 여러 대 이래로 쇠잔해진 백제에 나서 국세가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두 번 의 큰 싸움의 승리를 의지하여 국운을 만회하고 마침내 해외 경략 ( 經 略 ) 의 터를 닦았음과 6) 당시 출전한 대장들은 저근·사법명 ·부여고·부여역 ·부여고·찬수류·해례곤·목간나 등이 있었음을 알 뿐 이요 , 전선 ( 戰線 ) 이 얼마나 길었으며 싸움이 얼마나 계속되었는지 , 후자는 육전 ( 陸戰 ) 이거니와 전자는 육전이었는지 해전이었는지 이는 다 분명치 아니하다 .


어찌하여 전후 두 차례의 전쟁에 대장은 각각 네 사람이었던가 ? 이는 백제왕도 부여나 고구려와 같이 중 ( 中 ) · 전 ( 前 ) · 후 ( 後 ) · 좌 ( 左 ) · 우 ( 右 ) 의 5 군 ( 軍 ) 제도를 써서 동성왕이 중군 ( 中軍 ) 대원수 ( 大 元帥 ) 가 되고 네 사람은 각기 네 원수가 된 때문이었다 . 어찌하여 저근이 나 사법명 이 동성왕의 신하로서 또한 왕이 되었는가 ? 신 (伸 ) 은 조선의 고제 ( 古制 ) 이니 대왕은 '신하'의 번역으로 곧 한 나라에 군림 한 천자를 일컫는 것이고 , 왕은 '한'의 번역으로 곧 대왕을 보좌하는 소왕 ( 小王 ) 들의 칭호이기 때문이다 .


4. 東城王의 海外 經略과 중도에 돌아감


조선 역대로 바다를 건너 영토를 둔 것은 오직 백제의 근구수왕 ( 近仇首王 ) 과 동성왕 두 시대이다 . 동성왕 때는 근구수왕 때보다 더욱 영토가 넓었으므로 , 구당서 ( 舊居書 ) 의 백제전 ( 百濟傳 ) 에 백제의 지리를 기록하되 “서 ( 西 ) 로 바다를 건너 월주 ( 越州 ) 에 이르고 , 북으로 바다를 건너 고려 ( 고구려 ) 에 이르고 , 남으로 바다를 건너 왜 ( 倭 ) 에 이른다 ( 西渡海至越州 北懷海至高麗 南渡海至慶 ). ”라고 하였는데 , 윌주는 지금 의 회계 ( 會稽 ) 이니 회계 부근이 다 백제의 소유였다 . 문헌비고 ( 文獻備考 ) 에 “월왕 ( 越王 ) 구천 ( 句錢 ) 의 고도 ( 古都 ) 를 둘러싼 수천 리가 다 백제의 땅이었다 .”라고 한 것이 이를 가리킨 것이고 , 고려는 당인 ( 唐人 ) 이 고구려를 일컬은 명사이다 . 고구려의 국경인 요수 ( 遼水 ) 서쪽 ---지금의 봉천 ( 奉天 ) 서쪽이 다 백제의 소유였으니 , 만주원류고 ( 滿 洲源流考 ) 에 “금주 ( 錦州 ) · 의주 ( 義州 ) · 애훈 ( 愛훈) 등지가 다 백제이다 . ”라고 한 것이 이를 가리킨 것이다 . 왜는 지금의 일본이니 , 위에 인용한 구당서의 위 두 구절에 의하면 당시 일본 전국이 백제의 속국이 되었던 것을 의심할 나위 없다 . 백제가 위의 해외 식민지를 어느 때에 잃었는가 하면 성왕 ( 聖王 ) 의 초년에 고구려에게 패하고 말년에 신라에게 패하여 나라의 형세가 한때 쇠약해졌으니 , 이때에 이르러서 는 해외 식민지가 거의 몰락하였을 것이다 .


동성왕이 이같이 전공을 이루었으나 수해와 한재가 심한 때임을 돌 아보지 않고 화려하게 큰 임류각 ( 臨流聞 ) 을 짓고 그 앞에 원림 ( 園林 ) 을 만들고 못을 파서 진기한 새와 기이한 고기를 기르고 또 사냥을 즐겨 자주 거동을 하였는데 , 기원 501 년 11 윌에 사비부여 ( 泗此扶餘 ) 마포촌 ( 馬浦村 ) 의 사냥에서 큰 눈을 만나 묵고 있다가 왕을 원망하던 위사좌평 ( 衛士佐平 ) 가림성주 ( 加林城主 ) 백가 ( 백加 ) 의 자객 칼에 죽으니 재위 23 년이요 그 나이 겨우 30 여 살이었다 .


출처 http://cafe.daum.net/mookto (삼태극)

출처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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