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105 뉴스파워] 요한동경교회 김규동 선교사 파워인터뷰
“일본 선교, 직접 전도하면 부흥합니다”
2800명의 요한동경교회와 15개 교회 개척한 김규동 선교사 파워인터뷰
"일본 선교 어렵다고 하지 말고 일주일에 이틀만, 반나절씩만 가까운 캠퍼스, 고정된 장소에 전문인 복장 입고 성경책 가지고 가서 전도지 많이 가져가서 “성경 공부 같이 할래?”라고 하면 심심치않게 대어가 낚여진다고 해요"
'선교사의 무덤' 이라는 나라 일본에서 일본인도 놀랄 만큼 놀라운 영적 부흥을 주도하고 있는 김규동 선교사. 7년전에는 일본 적군파에 의해 테러를 당해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일본 선교의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는 김 선교사는 "일본 선교는 안된다는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직접 전도를 하면 10명중 1명은 결신한다"고 자신감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제1기 한국 C.C.C. 파송 일본선교사인 김규동 목사는 한동경교회 담임목사와 코스타 일본 대표, 히브리문화연구회 연합 지도목사로 1988년 동경에서 16명으로 요도바시교회 한국부(현 요한동경교회)를 창립, 일본 최대교회로 성장시켰다. 현재는 2800명이 출석하는 요한동경교회를 비롯해 15개 교회를 개척 제자 훈련과 캠퍼스 선교를 전개하고 있다.
동경요한교회 2800명 신자 중100여명이 중국인이어서 내년부터는 중국선교를 시작하겠다고 밝힌 김규동 선교사는 대학시절 CCC에 연결되어 예수를 인격적으로 영접했고, CCC를 통해 일본 선교사로 파송받아 캠퍼스 사역을 하다가, 교회를 개척하여 일본 선교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교인의 대부분이 젊은이들로 80% 이상이 제자훈련에 참석하고 있는 요한동경교회 김규동 목사를 만나 요한동경교회가 성장하기까지의 간증과 일본 선교의 가능성, 비전을 들어 보았다.
7년 전, 기독교 지도자라는 이유로 일본 적군파 소속 혁명노선협의회에 의해 테러를 당해 죽을 고비를 넘긴 김규동 목사는 “제가 테러 당했을 때 수개월 동안 목회다운 목회를 못했는데 그런데 그때가 제일 가파르게 부흥했습니다.”라며 요한동경교회가 세워진 간증을 전했다.
또한 김규동 목사는 “저는 일본 선교는 99.75%의 가능성이 있다고 얘기해요. 0.25%밖에 안 믿으니깐요. 던지면 툭툭 걸려요.”라며 일본 선교에 대한 가능성과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Q. 일본 최대교회인 요도바시교회 한국부(현 요한동경교회)가 어떻게 창립되었는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1988년 10월 2일에 요도바시교회 한국부를 시작했어요. 요도바시와 한국부를 따서 ‘요한’교회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의 중간 모델이 되면서 요도바시에 한국부로서 시작된 것의 의미가 있지요. 지금 일본에 15개가 있어요. 주요 도시에 거의 다 들어갔어요. 동경에 2개, 후쿠오카, 히로시마, 오카야마, 오사카, 쿄토, 나고야, 시즈오카, 요코하마, 그리고 시가, 사이따마, 오츠노미아, 스탠바이, 여기에 요한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도 요한교회가 하나 자연스럽게 생겼어요. 우리 교회가 제자훈련을 강하게 하는데 그들이 한국에 와서 자기들이 옛날에 배웠던 교재를 가지고 모여서 리피팅을 했어요. 처음에는 장소가 없으니깐 서울 일본인 교회를 빌려서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깐 그게 예배가 됐어요. 다음 달에 10주년인데 자체 건물도 생기고 사단법인도 만들고 인맥도 잘 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의사들, 강사들도 있고 법조인들이 많아요.
Q. 일본이 선교사들의 무덤이라고 하는데 일본 선교사로 파송받게 된 배경과 과정을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1972년도 10월 유신 때 예수님을 믿었어요. 물론 교회는 어렸을 때부터 나갔지만 C.C.C. 간사님을 통해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게 되었어요. 그때 대전은 C.C.C.가 기반이 없었는데 정종원 목사님이 고등학교 선생님을 하시다가 불림을 받으셔서 대전으로 발령받고 저하고 몇 사람을 모아서 사역을 시작했죠. 그런데 3년 만에 지방에서 제일 큰 C.C.C.가 됐어요.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일본에 유학을 보내 주고 그때 일본어와 일본 문화 등을 접하게 되었죠. 네 사람이 유학을 왔는데 세 사람이 회장 친척이더라구요. 저는 아무 연관이 없었고요. 하나님께서 뽑아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전도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결과적으로 유학을 갔다 와서 회사 실적이 탁월해서 35살에 실질적인 점장까지 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일본 선교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김규동 선교사.
Q. 일본 유학을 가셔서 실질적으로 전도를 해 보시면서 일본 선교의 필요성을 느끼셨나요?
그렇죠. 70년대 C.C.C.에서 통계를 냈을 때 한국에서 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 한 사람이 믿었잖아요. 그런데 일본도 똑같더라고요. 일본 전도가 안 된다고 하는데 그 당시(80년∼82년)에 네 사람을 전도하면 한 사람이 믿었어요. 그게 일본 동부 지방에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저는 유학생으로 일본에 왔지만 계속 전도 훈련하러 전국 돌아다니면서 사역을 했어요.
그렇게 하다가 유학 기간이 끝나서 한국에 돌아와서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나가던 일본 교회가 동북지방 제일 큰 교단이었는데, 그 담임목사님이 교단의 총회장이 되시면서 센바이 중심도시에 건물을 짓기로 했어요. 동북 6현의 가장 중심도시가 센바이였는데 그곳에 학생들이 6만 명이 있어요. 학원 도시인데 학원 선교에 대한 중심권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교단에 재정 힘이 있어서 센바이 중심도시에 센터를 짓기로 한 거죠.
문제는 건물의 책임을 누가 맡느냐가 중요한데, 그런데 그분이 임의로 저를 지정을 했어요. 제가 선교사로 왔으면 좋겠다고 협조 요청을 했어요. 당시 저는 직장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제가 자꾸 원하지 않으니깐 이분 내외분이 한국에 오셔서 저에게 영향을 끼치는 목사님들을 만나시면서 설득을 했지요.
그래서 김준곤 목사님을 만나고 부산 동래중학교 신동혁 목사님을 만난 거예요. 그런데 이분들이 전부 동의를 해 줘요. 내가 일본 가야되겠다고. 그때 김준곤 목사님이 동아시아 대륙 대표를 겸임하고 계셨는데 일본에 급히 보낼 사람이 필요했어요. 그런데 국내 간사들 가운데에 적임자가 없어요. 그런데 저는 일본말을 하고 그랬으니깐요. 그래서 그 당시 구원준 간사님이 책임자였는데, 구원준 간사님을 통해서 그게 김준곤 목사님께 보고가 되었어요. 김준곤 목사님이 대구에 연합집회 강사로 오실 때 저를 만나자고 하셨어요. 그때 예상을 했죠. 김 목사님께서 일본에 가 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때부터 비자 준비하는 데 2년 이상 걸렸어요. 그 당시 한국인 선교사는 비자를 내 주지도 않았어요. 더구나 나는 평신도로 가야 될 입장이었는데 김준곤 목사님께서는 급하니깐 빨리 문화 비자로라도 단기로라도 갔다 왔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나는 선교사 비자가 아니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기적적으로 선교사 비자가 나왔어요. 그때부터 C.C.C. 파송이 1985년 8월에 있었어요. 그래서 일단 일본에 들어갔다가 정착을 하고 다시 들어와서 가족들과 함께 1986년 부활주일에 동래중앙교회에서 박수웅 목사님과 공동파송이 되었어요.
처음 2년 동안은 일본 C.C.C.에 속해 있어서 순회만 했어요. 평일에는 대학가에서 전도하고 주말에는 일본 교회 순회하면서 전도 훈련, 제자 훈련했어요. 그러면서 김준곤 목사님이 미네노 목사님(일본)과 두 분이 협의해서 요도바시교회로 교회를 고정하라고 하셨어요. 요도바시교회가 100년 된 교회이기 때문에 거기만 영향을 끼치면 어설프게 많이 돌아다니는 것보다 효과적이라는 거였죠. 그래서 고정해서 사역을 하기 시작했어요.
토요일에는 일본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제자훈련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자꾸 커지는 거예요. 맨 처음에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했는데 하다 보니깐 유학생들이 자꾸 오는 거예요. 토요 모임이 막 커져요. 그 당시만 해도 주일 예배는 없었거든요. 주일 예배는 각각의 교회로 가라고 하니깐 모임이 힘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 사실을 아시고 두 목사님이 다시 만나셔서 주일에도 훈련을 하라고 하셨죠. 요도바시교회에서요.
주일이니깐 훈련을 하기 전에 예배를 드려야죠. 그것이 1988년 10월 2일, 주일 첫 한국어 예배가 됐어요. 16명이 시작했어요. 우린 그때 일본인 전도 많이 했어요. 일본인 교회이기 때문에 바로바로 붙여졌죠. 약 100명 정도까지 늘었어요. 250명 전도 복음을 전하면 100명이 믿으니깐 거기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더욱이 청년 대학생들이니깐. 그래서 제가 요도바시교회 최초의 공인 선교사가 된 거예요.
그러면서 한국에 예배에 대한 훈련을 하도록 일 년이 되니깐 100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위 한인교회에서 샘을 내지요. 시샘이 어느 정도였냐면 김준곤 목사님께 투서가 연속 들어갔죠. 김준곤 목사님께서는 저를 아끼시니깐 투서 내용을 요약해서 저에게 편지를 보내셨어요. 제가 김준곤 목사님 친필 편지를 여러 번 받았어요. 그렇게 해서 몇 년이 지나니깐 300명 400명 정도가 모이게 됐죠.
▲척박한 일본 땅에서 영적 부흥을 주도하는 김규동 선교사.
Q. 교육 훈련의 특별한 것이 있나요? 구체적으로 소개 부탁드립니다.
철저한 교육 훈련입니다. 소그룹 제자훈련. 거의 최근 몇 년 전까지 C.C.C. 교재를 중심으로 했어요. 텐스텝, 민족복음화교재, 순론노트 등. 김준곤 목사님께서 저희 교회 세 번 오셨는데 한국 60년대 원색적인 스피릿은 여기 다 와 있다고 하셨어요. 그게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요. 현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핵심들을 길러내야 해요. 이들이 자신의 후배들을 변화시키는 거예요. 일본에 800명씩 나가고 한국에는 2,000명이 나가고 중국에는 100명씩 나갑니다.
우리 교회 사역자 15개처에 60명인데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예요. 훈련기간 동안에 5만 엔 가지고 생활하는데 상상을 못하는 거지요. 한국에 있어보니깐 경제가 발전하면서 거기 맞추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거예요. 우리는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도록 합니다.
일본 전체에 방학 기간만 빼놓고 4년제 대학에 매주 성경 공부하는 대학이 120개 정도입니다. 제일 많이 쓰는 이름이 히브리문화연구회로 대학에 등록을 했어요. 일본은 등록을 매년 해야 해요. 수년 해서 시한이 다 되어야 고정이 되요. 10년은 해야 합니다. 더러는 종교 단체로 여겨질 경우에는 이름을 바꾸어서 등록을 합니다.
성서문화연구회 하면 의외로 종교단체로 안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나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는 있는데 성경에 대한 이미지는 많이 달라요.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도 있는 것 같고 성경을 추구하는 데는 좋은 가치가 있습니다. 각 종교의 경전이 있듯이 성경도 좋은 게 아니겠느냐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Q. 현재 일본의 영적인 기독교 상황이 어떻게 됩니까?
개신교가 0.45%, 가톨릭과 이슬람 등의 종교가 1%가 안 되요. 그나마 가톨릭 중에서 주일 성수하는 사람을 0.25%로 봅니다. 일부 교회 수는 7천 8백 개 정도인데, 이게 재작년 말 통계입니다. 그중에 1/4, 1/3 중간 정도의 목사님들이 평일에 자기 직업을 가지고 있어요. 생활이 안 되죠. 아이들까지 다 쳐서 30몇 명 정도가 총 출석 인원이니깐 그렇습니다.
Q. 몇 년 전에 테러를 당하셨는데 그때의 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1998년 10월 18일이니깐 정확히 7년 됐네요. 주일 예배 인도하러 나가는 집에서, 8시가 첫 예배인데 집에서 7시 20분쯤 나가는데 바로 집 아파트 앞에서 테러를 당했어요. 적군파의 직계였어요. 일본에는 혁명노선 협의회와 주까끄파, 가꾸나르파가 있는데 혁명노선협의회가 제일 원시적인 행동주의자들이예요.
다른 두 파는 머리를 쓰면서 사회 물의를 일으키는 편이고, 혁명노선협의회는 주로 캠퍼스, 전국의 15개 주요 대학을 쥐고 있죠. 학생중앙위원회를 다 잡고 있고 거기서 자금줄을 대요. 주로 써클 활동을 많이 접수해 놓고 활동을 하죠. 써클 활동은 외부 전문가들이 와서 얼마든지 지도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요. 거의 모든 NGO나 이단, 사회 단체들이 캠퍼스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기독교만 못 들어가고 있는 거죠.
우리가 그 당시에 정기 모임 하다가 봄 가을에는 찬양 집회를 하는데 2주 동안 하는데 한 300명씩 몰렸어요, 그러니깐 얘들이 놀랬어요. 기독교가 이렇게 한 적이 없는데 그래서 우리한테 시비를 많이 걸었습니다. 무리한 요구를 많이 하고 요구를 다 들어줘도 결론이 뭐냐면 전도하지 말라는 거예요. 집회하지 말라는 거예요. 들어줄 수가 없잖아요.
▲7년 전, 기독교 지도자라는 이유로 일본 혁명노선협의회에 의해 테러를 당했던 김규동 선교사 © 최미혜
그쪽은 주로 지도자를 테러하거든요. 3단계로 테러하더라고요.
첫째가 몸의 일부를 완전히 못 쓰게 만듭니다.
두 번째가 식물인간을 만들어요.
세 번째가 죽이는 단계예요. 이 단체는 공민권을 다 포기해요. 지하단체는요. 일본의 안기부를 공안도라고 합니다. 일본 공안도의 혁명의 전담과가 있어요. 31년 역사인데 그 행동 방식이 똑같아요. 그들이 설명해 줘서 알았지요.
60년대 말에 정부에서 강력하게 제재를 하니깐 주 멤버들은 북한에 도망간 극좌세력입니다. 공산주의를 놀랍도록 믿어요. 최초에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켰던 막스 레닌이 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이고 한 것이 원리예요. 저를 테러하려는 목적은 죽이려고 하는 3단계예요. 그걸 어떻게 구별을 하면 나라가 테러하기 위해서 행동 분자는 7명이고 50명이 주위 망을 봅니다. 총 두목이 복면을 안 해요. 총 두목이 50대예요. 저는 봤거든요. 일본 공안부에서 100명 정도 사진이 있더라고요. 20년 전에 행방을 못 찾았는데 이 사람이 나타나서 총 지위를 한 거예요.
양팔이 다 끊어지고 광대뼈가 다 으스러지고 내복이 피로 다 젖고 그랬어요. 그들은 칼과 야구방망이, 쇠, 철봉, 총만 안 쓰고 다 쓰는 거예요. 그리고 사지 폭행까지 써요. 그래서 제가 죽었다고 판단을 하고 모든 매스컴에 보도자료를 다 내고 자기들이 한 것이라고 성명 발표하고 그랬어요. 동경 써클에 다 확인하고.
그런데 제가 기적적으로 병원에서 깨어났어요. 그랬더니 그 소식을 듣고 이들이 테러단을 또 보냈어요. 그때는 일본 공안부에서 37명의 형사들을 보내서 한일 양국의 안기부 사건이 됐어요. 그들은 병원에 테러를 하러 왔다가 그때부터 일본 공안부의 쫓김을 당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입원하는 동안 이름을 일본 이름으로 바꾸고 24시간 병원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깨어나서 회복 단계로 들어갔는데 그 테러단에게는 첫 실패였죠. 그 가운데 살패의 책임 전가로 그 안에서 싸움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24명이 서로 죽었습니다. 간부들만 24명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신문에 났어요. 내부 문제로 싸우는 것으로 사회면 1, 2면에 났어요. 추측하건대 40명 정도가 죽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정체를 이메일로 다 띄우는 거예요. 그리고 폭탄으로 경찰을 7명인가를 죽이고 오토바이 타고 가는 사람을 네 사람이 같은 속도로 쫓고 가다가 죽이는 거예요. 고속도로에서도 쫓다가 죽여버리고. 제일 공포스러운 사람이 저하고 우리 교회였어요. 그러다가 결국 자기들이 그렇게 당한 거예요.
Q. 테러를 당하시면서 좌절감도 들고 두려운 마음도 컸을 것 같습니다. 그때의 간증을 들려 주십시오.
제가 테러 당할 때 수개월 동안 목회 다운 목회를 못했는데 그런데 그때가 제일 가파르게 부흥했습니다. 성도들이 우리 교회에 대한 긍지가 대단했고요, 저에 대한 신뢰가 거의 절대적이예요. 그리고 그 뒤부터 요한교회가 탄생한 거예요. 건물만 6개가 나오고 전부다 융자였는데, 일본의 은행은 학교법인과 정부 외에는 융자 안 해주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융자 해 달라고 사람을 보내줬어요. 우리가 매스컴에 다 알려지면서…. 그러니깐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수지 맞는 거예요.
지금도 휴유증이 조금 있어서 습기가 있고 비가 오면 정확합니다. 제 몸에 나타나요. 너무 심할 때는 누워있어요. 제 몸 속에 있는 도끼 자국, 쇠 자국, 칼 낸 자국 등 결점이 다 있는데 일본에서 제일 좋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거든요. 거기는 유명 정치가, 연예인들이 몇 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되요. 더군다나 독실은 어림도 없습니다. 저는 바로 독실에서 지냈습니다.
거기서 2일 동안 꼬박 검사만 했습니다. 뇌세포, 중추신경, 골수를 검사했는데 그런데 세 개가 아무 이상이 없어요. 셋 중에 하나가 치명적인 것이 나타나야 정상이래요. 그것도 기적이지요. 그걸 생각하면서 제가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그렇게 아무 이상 없이 보호하실 꺼면 처음부터 봐 주시면 되잖아요’ 그래서 제가 깨어날 때 시험이 들더라고요. 주님에 대한 섭섭함. 그때가 주일 아닙니까. 주일 다섯 번 설교를 제가 다 했어요. 내 머릿속에는 오늘 설교 다섯 번을 어떻게 잘할 꺼냐 그런 생각밖에는 없었거든요.
그 당시에 안식년도 포기하고 13년째 사역을 해 왔는데 제가 얼마나 무서웠길래 전부 복면을 쓰고 말 한마디 걸어보지도 않고…. 그런데 제가 웃고 있더래요. 고통스러운 표정이 아니라 웃고 있더래요. 깨어날 때쯤에 그게 섭섭하드라고요. 그때 다섯 가지 환상을 보았어요.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어요. 그 이후에 국민일보에서도 오고, 두란노에서도 와서 책을 내자고 해요. 1부는 국민일보 기자가 와서 쓰고 그래서 나온 「역경의 열매」 책은 다 나갔어요. 두란노에서 나온 「하나님은 불모지에서 일하신다」 책은 거의 8천 권 정도 나갔다고 해요. 거기에 그런 얘기가 자세히 들어가 있습니다.
▲"아파트 한 채를 얻어 드렸던 예배가 열다섯 개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최미혜
일본의 2대 은행이 와서 그 당시 2% 이율로, 갚는 비율을 우리가 정하래요. 여섯 교회가 건물이 있고, 금년 말에도 교회 건물이 또 하나 생길 것 같아요. 처음 개척할 때는 건물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파트 하나 얻어주고 주일예배부터 다 드리고 그랬는데 그러다가 주일예배 공간이 적어지면 가까운 공민관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일본은 가까운데 공민관이 많습니다. 주일은 거기서 해요.
그러다가 50명 정도만 되면 건물을 임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요. 많은 선교사들이 저보고 융자를 해 달라고 해요. 그 은행에는 해 준대요. 거기다가 우리 교회 긍지가 대단하게 됐죠, 명문대생들이 전도를 하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뛰어 다닙니다.
일본어를 어느 정도 하면 중국도 보내고 동남아시아, 이슬람권, 25개국에 250명이 나가있는데 이제 C.C.C.하고 GMP하고 같이 협력해서 연계해서 할 생각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 정부로부터 정부 법인이 나왔습니다. 정부 법인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정부에서 내 주는 것이 있고 하나는 도에서 내 주는 게 있습니다. 정부에서 내 주는 건 교단적인 차원이예요. 교단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죠.
Q. 일본 목회자들과 크리스천들 스스로가 패배의식이 있나요? 일본을 선교사들의 무덤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까지 절망적인 시각을 가지고 가지는 있는 특별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일본이 기독교가 안 되는 게 아니라 과거에 두 차례 큰 짐이 있었습니다. 물론 가톨릭이었지만 처음에는 엄청난 속도로 전해졌어요. 1,600년대쯤 처음에는 호의적으로 하다가 너무 급속히 그러다가 도요토미 히로시마 시대로 갔다가 나중에는 기독교를 경계하죠. 그러다가 도요토미 시대에는 스스로 탄압하기 시작해서 지독하게 잘라버렸죠.
또 한번은 전후에 맥아더 장군이 일본 선교에 큰 영향을 끼쳤어요. 그 뒤에도 리바이벌 앤드운동이 일어났어요. 그때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고 그래요. 하나는 너무 선명운동 쪽으로만 치우쳐서 성경 공부가 없었다. 또 하나는 조직적인 뒷받침이 없었다. 두 가지가 되어서 결격 사유가 되어서 뒤늦게 평가하는 거지요.
그런데 일본은 사상조류가 첫째는 신도이즘이고 둘째는 불교거든요. 신도이즘에 보면 천왕 숭배와 조상숭배 사상이 있지만 더 나아가서는 변질된 유교예요. 조상을 깍듯이 모시면서 효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민족이예요. 죽고 난 조상이 죽은 게 아니라 사실은 집에서 같이 산다. 그리고 불교를 신앙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학생시절에 불교에 심취해서 사서삼경을 많이 읽었는데 그게 도움이 많이 됐어요. 노자, 장자나 그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제가 직접 체험했던 그런 과거가 있으니깐 일본 학생들에게 무식한 놈들이라고 자극을 줬어요. 우리 교회 학생들 가운데 제일 명문대생에게 너희가 혹시 학문적인 것은 그렇게 비판하라고 해요. 강력하게 기독교에 대해서 강조하는 거예요. 그러니깐 성경 공부를 상당히 많이 합니다. 일단 합법적인 거예요. 일본 사람들이 지적인 추구를 좋아해요. 잔잔하게 따지기를 좋아하거든요. 소그룹이 얼마나 좋습니까.
Q. 소그룹 사역의 효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소그룹 속에서는 마음껏 질문하게 해요. 마음껏. 엉뚱한 질문도 다 받아요. 훈련되지 않은 사역자들은 여기서 질려해요. 한국 사람들이 성질이 급하잖아요. 감정적이고 묻는 것 또 물어보고. 알았다고 해 놓고 집에 가서 또 의심하고 미치게 만들어요. 미치면 안 되죠. 같이 페이스를 맞춰서 즐기는 거예요. 속으로 비판도 하게 해요. 별스러운 사람들이 다 있어요.
▲일본에 복음 그대로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최미혜
Q. 전도를 하면 얼마나 영접을 합니까? 또한 반응이 어떻습니까?
최근에 통계를 안 내 봤지만 열 사람에 하나 이상은 반드시 됩니다. 일본 선교 어렵다고 하지 말고 일주일에 이틀만, 반나절씩만 가까운 캠퍼스, 고정된 장소에 전문인 복장 입고 성경책 가지고 가서 전도지 많이 가져가서 “성경 공부 같이 할래?”라고 하면 심심치않게 대어가 낚여진다고 해요. 그리고 전도가 하도 안 되니깐 영어 써클을 만들고 그러는데 하나도 성공한 샘플이 없어요.
교회에 대한, 스펙타클한 복음을 전해야 해요. 그리고 일본 목사님들은 일본인들은 유식한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생각으로 비교 종교학을 일목요연하게 해 줍니다. 한번 강력하게 전하면 숨도 못 쉬게 전해야 해요. 그렇게 절대성이 있다. 이렇게 강조를 하는 거예요. 사석에서 개인적으로 대할 때는 한없이 인격적으로 대하는 거예요.
일본 명문대생들이 헌신을 하니깐 일반 대학생들이 놀래는 거예요. 쟤한테는 도대체 뭐가 있길래. 우리는 전략적으로 명문대를 타켓으로 했어요. 영향력도 있고, 또 하나 내 자신이 자신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 내가 명문대생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데 매일 비실비실하고 뒷골목이나 찾아다니고 그러면 안 돼죠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서울 교회에도 서울대생, 연고대생들이 가장 많습니다. 지하에 있어서 한 400명 들어가면 콱 찰 거예요. 아주 형편없는 시설인데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자기들의 속의 궁금증을 풀어 줄, 그렇게 확실하게 미친 사람을 찾는 거예요.
Q. 일본 요한교회에서 중국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그 배경과 비전을 말씀해 주십시오.
최근에 중국에 대한 새로운 확률이 나왔어요. 한족 사역을 하는데 물론 조선족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근데 영적 감성이 일본 애들보다 좋아요. 몇 년 후에는 중국 현지에 교회를 세워봐야겠어요. 일본에 온 중국 유학생들 가운데 헌신자를 만들어서 그들을 조국에 귀국시켜서 삼자교회로부터 공인 받는게 좋다고 생각해요. 삼자교회 연합에 동의를 받고 그 자격으로 당당하게 하면서 삼자교회 지도자급으로 들어가서 거기를 변화시키는 거예요. 중국으로 선교사 가는 사람이 얼마나 눈치를 보는지 몰라요. 그런데 일본에 중국 유학생들이 엄청나게 많아요. 최근에 얼마 동안은 유학생들을 규제했는데 금년 초에 또 불었어요.
Q. 일본 선교에 헌신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어떤 영적인 준비를 갖춰야 합니까?
첫째는 일본에 너무 겁먹지 말아라.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들어가는 문화만이 꽃이 피었습니다. 우리 나라 문화의 마지막 종착점이거든요. 반드시 한반도를 거쳐 들어가야만 절정을 이뤄요. 중국으로도 들어갔고, 베트남으로도 들어갔고, 에스키모쪽으로도 들어갔고, 다섯 루트가 있는데 한반도로 들어가는 것만이 주를 이룹니다. 일본은 집요한, 약한 민족이 강하지만 실제로 한국을 제일 무서워해요. 모든 형이상학적 뿌리가 한국인 것을 압니다. 역사 흐름을 알고 따라서 일본 선교는 지극히 한국적으로 해야 합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입니다. 자꾸 서양적인 것 흉내내지 말고 복음은 스피릿으로 전하면 모든 실력이 다 나옵니다.
일본 선교의 중요성 열 가지를 항상 얘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가 사도행전 1장 8절에 사마리아를 거쳐야만 땅끝으로 갈 수 있어요.
사마리아는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해요. 하나는 감정이 안 좋아야 한다는 것과 두 번째는 피가 섞여 있어야 하지요. 일본 민족의 15∼20%가 한반도의 피가 섞여 있어요. 서로 생각이 비슷하니깐 싸우는 거예요.
두 번째가 교포선교입니다.
▲"역사 흐름을 알고 지극히 한국적인 모습으로 일본 선교를 감당해야 합니다."
세 번째가 북한선교의 요충지예요.
전세계에서 교포가 세 번째 많습니다. 미국, 중국, 일본이거든요. 일본에서는 복음 전하다가 감옥 간 사람은 없어요.
네 번째는 문화의 흐름의 종착역입니다.
기독교만 한반도를 안 거치고 바로 왔거든요. 그래서 실패했어요. 지극히 한국적인 것을 해야 해요. 목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와요. 3개월만 거기서 살면서 하면 일본어 다 해요. 미국 사람은 2년은 해야 해요. 문화의 흐름이 그러니깐 긍지를 가지고 해야 해요. 일본 사람들은 긍지 없는 사람들을 굉장히 싫어해요.
다섯 번째는 아시아의 로마입니다.
로마가 헬라문화권이거든요. 일본이 추상적인 것은 이해를 못해요. 그래서 소그룹의 따지고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똑같아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로마가 강했듯이 일본도 그렇습니다.
여섯 번째는 한반도 문화 흐름이 있거든요.
바닷물 같은 물결이 있듯이. 이래도 일본 선교를 소홀히 하면 어떻게 합니까? 일본이 한 마디로 귀신 문화요, 물질만능 문화요, 성적 타락 문화거든요. 나는 이것이 한국에 역류된다고 봐요. 이게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어요.
마지막 일곱 번째는 세계 선교를 사랑으로 해야 해요.
마태복음 5장을 보세요. 우리가 일본 말고는 그렇게 지독한 감정은 없지 않습니까. 주님의 십자가로 용서와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그게 어디로 가야 합니까? 사랑의 복음을 실천하는 우리가 첫 번째 식음 속으로, 땅끝으로 가는 실천을 해야 해요.
일본 선교에 대한 부담을 갖고 있는 사람은 피하지 말아라. 사람들은 주로 세 가지를 피합니다. 민족 감정, 고물가, 열매 없음, 선교라고 하는 것은 열매가 없어도 하라면 하는 거예요. 고물가, 우리는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평균 1/2의 사역비를 가지고 사역을 합니다. 마음만 있으면 길이 있어요. 민족 감정 문제는 믿음으로 극복해야 해요. 아무리 못해도 열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믿으니깐 대단한 퍼센트 아닙니까.
저는 일본선교는 99.75%가 가능성이 있다고 얘기해요. 0.25%밖에 안 믿으니깐. 던지면 툭툭 걸려요. 우리는 일본 선교를 할 때 어장에 투망을 한다고 해요. 그리고 사방으로 퍼져가요.
'좋은간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연예인 간증 60인 (0) | 2008.12.19 |
---|---|
[스크랩] 이어령, - ‘이성’을 넘어 ‘영성’으로 (0) | 2008.12.19 |
[스크랩] 이어령 박사 특강 (0) | 2008.12.19 |
[스크랩] 심수봉집사 인터뷰 “恨 벗고 기쁨 노래합니다” (0) | 2008.09.30 |
이어령-지성에서 영성으로 (0) | 2008.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