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스크랩] 복음전도, 구원 그리고 사회정의 (로날드 J. 사이더)

수호천사1 2008. 9. 24. 03:39
복음전도, 구원 그리고 사회정의


로날드 J. 사이더(필라델피아 대학교 메시야 대학 학장) 문전섭 선교사 역

복음전도와 구원 그리고 복음전도의 사회정의에 대한 관계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현재 극히 중요하고도 흔히는 날카롭고 불화적인 토론이 창궐하는 것은 숨겨진 사실이 아닌 것이다. 「오늘의 구원에 대한 세계 교회협의회와 방콕 협의회 (1973.1)」,「복음주의적인 사회 관심에 대한 시카고 선언 (1973.11)」, 「시카고 선언에 대한 NCC의 교회와 사회부에 의한 응답(1974)」, 그리고 「로잔 계약(1974)」, 이 모든 것들은 이런 소란스런 격동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서들이 합의를 나타내 주지는 못한다.

복음전도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과 사회 정의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우리가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려고 시도할 때, 우리는 최소한 다섯 가지의 의미심장한 다른 대답들을 발견한다.

I. 다섯 가지의 상충하는 견해들

1. 복음전도는 교회의 우선적인 사명이다.
빌리 그래함 (Billy Graham)은 교회의 우선적인 사명이 복음전도이며, 복음전도의 목표는 개개인 영혼들에 대한 개인 구원이라는 견해를 가진 가장 잘 알려진 대표자인 것이다. 新生한 개개인들이 그 다음 사회에 대해 절대적으로 영향을 갖게 될 것이다.

로잔에서 열린 세계복음화 국제대회에서의 그의 기조연설에서, 그래함은 복음전도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나의 죄들 때문에 죽으셨고 장사지내졌고 삼일 만에 부활하였던" 그 좋은 소식을 알리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복음 전도 및 영혼들의 구원이 교회의 사활이 걸린 사명인 것이다."(1) 그래함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불의한 사회 구조들의 개혁을 포함한 사회 정의를 위하여 일할 책임을 갖는다고 믿기 때문에, 그는 시카고 선언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논평하곤 했다.2) 그러나 사회 정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은 "우리의 우선적인 사명은 아닌" 것이다.3) 그래서 「로잔 계약」은 "복음전도가 우선적"이라는 그래함의 기본적인 견해를 반영하는 것이다.

新生한 사람들은 물론 사회에 대한 간접적인 영향을 끼치는데,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떠맡아진 사회적 행동은 그들의 우선적인 과제인 복음전도와는 전적으로 구별된다. 이런 관점에서 복음은 개인주의적이며 또한 복음전도는 우선적인 것이다.

2. 복음전도는 교회의 한 기본적인 사명이다.

로잔에서의 복음전도에 대한 그의 중요한 연설에서, 그 유명한 영국의 목사이며 신학자인 존 R. 스토트 (John R. Stott)는 적어도 한 가지의 중요한 점에 있어서는 그래함과 상이한 제 2의 견해를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래함처럼 스토트도, 적어도 이 연설에서, 그 좋은 소식의 내용에 대한 개인주의적인 定義를 향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복음전도는 성령을 통하여 용서하시며 新生케 하시는 그 역사적이며 성경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알림 (사랑의 말들과 행위들로, 그러나 특별히 말들로)인 것이다. 그러나 스토트는 또한 어떤 복음주의자들이 하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 복음적인 요구들을 강조하는 것이다. 구원의 신앙은 예수를 단지 구주로가 아니라 주(主)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혹은 「로잔 계약」이 그렇게 말한 대로, "복음적인 초청을 냄에 있어" 우리는 제자직의 대가를 숨길 자유를 갖지 않는 것이다. (4항)

그래서 스토트의 입장을 그래함의 입장과 의미 심장하게 다르게 하는 것는 스토트가 복음전도를 교회의 우선적인 사명으로 기술(記述)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복음전도는 교회 사명의 한 필수적인 부분인 것이다,"4) 복음주의자들은 때때로 <대위임 (The Great Commission)>을 퍽이나 많이 강조한 나머지 그들은 <대계명 (The Great Commandment)>을 무시하거나 혹은 덜 강조하는 것이다.

그 두 가지 과업들은 아주 구별되며, 혼동되지 않는데 - 그러므로 스토트는 "구원"이라는 말을 사회, 정치적 해방으로 적용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명백히 똑같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 제 2의 견해를 채택하는 자들은 아직도 복음을 개인주의적으로 정의하는데, 그러나 그들은 복음전도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보다 더욱 더 기본적이라고 확언하지 않는 것이다.

3. 교회의 우선적인 사명은 신자들의 공동체적인 집단인 것이다.

구원 및 사회 정의에 대한 적절한 정의와 관계성에 대한 우리의 질문에의 제 3의 응답은 '과격한 재세례파' 견해라고 불리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용서와 거듭남의 그 좋은 소식은 복음의 한 중요한 부분인데, 그러나 복음의 전부는 아니다.

그들의 언어와 행위, 그리고 공동 생활로,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로 모든 관계들이 변화되어지고 있는 어떤 새로운 사회(信者들의 가견적인 집단)에서 사는 것이 이제 가능하다는 그 좋은 소식을 알리는 것이다. 교회는 옛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경제적 가치들로 새 시대의 가치들을 구현시키며 또한 그렇게 해서 구속받은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 경제적,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가견적인 모델을 세계에 제공하는 것이다. 義롭게 되고 거듭나게 된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신앙으로 이 새로운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다. 교회는 그래서 복음의 내용의 일부인 것이다.

분명히 <좋은 소식>에 대한 이런 정의는 처음 두 가지 입장들이 갖는 개인주의적인 성격을 극복케 한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을 사회 - 정치적 해방과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죄는 항상 사람들에 의해 계획되고 실행된 사회 정의의 모든 정치적인 프로그램들을 부패시켰고 또한 항상 철저하게 부패시킬 것이다. 교회와 세계 간에는 한 커다란 간격이 있다.

그 새로운 공동체는 확실히 그 주변 사회에서 사회 정의에 대한 접합성을 갖는데, 특별히 그것은 공동 생활의 특성이 세속 사회에 대한 모델을 제공하는 그 때에 이뤄진다. 그러나 정치적인 활동이 그것의 우선적인 과업은 아니다. 존 하워드 요더 (John Howard Yoder)가 말한 대로, 교회의 바로 그 실재가 교회의 주요한 과제인 것이다.5)

4. 개개인들의 회심과 사회의 정치적인 재구조화는 구원에 대한 똑같이 중요한 부분들이다.
이 제 4의 견해는 에큐메니칼 서클들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구원은 개인적이며 사회적이며 또한 개별적이며 공동체적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가져오는 구원은 '영과 육의, 개별적인 것과 사회와 인류가 신음하는 창조의 구원' (롬 8:19)인 것이다.6) 복음의 내용은 '예수가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전체적인 창조의 질서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러므로 구원은 단지 죄들의 용서와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활동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또한 경제적 및 정치적 제도들의 재구조화를 통한 사회 정의의 성장에 대해서도 관계하는 것이다.

경제적 정의와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들이 구원의 일부이기 때문에, 방콕 대회에서 있었던 자들은 "구원은 베트남에 있는 사람들의 평화와 앙골라에서의 독립과 그리고 북아일랜드에서의 正義 및 화해인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7) 구원에 대한 이런 定義가 주어졌으므로, 개개인들과 동시에 사회 구조들을 복음화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것이다.

따라서 미국 NCC의 복음전도에 대한 어떤 연구 그룹의 한 최근의 보고는 "복음전도는 개개인들에게와 동시에 그룹들에게와, 권력 구조들에게와 그리고 사람들의 문화적인 형태들에게로 향하여질 수 도 있다는 것"을 확언한다.8)

만약 우리가 이 견해를 이해하려면 구원에 대한 개별적인 양상들이 아직도 현존한다는 것을 간과해야만 한다. 방콕에서, 구원이란 개인의 회심과 또한 죄책으로부터의 해방을 포함한다는 그 사실에 대한 반복된 언급들이 있는 것이다. 정치적이거나 혹은 경제적인 正義는 "구원의 전체가 아니며.. 이것을 망각하는 것은 구원의 전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9) 우리는 물론 WCC의 그 전체적인 강조와 프로그램 활동들이 이런 정의를 반영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물어볼 수는 있겠는데, 그러나 이론에 있어서 적어도 '구원'이란 말은 개개인의 義認化 및 거듭남과 동시에 더욱 더 큰 사회 - 경제적 正義를 위하여 사회적 정치적 재구조화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정의들이 대단히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은 거의 숨겨진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최근의 신학적인 운동인 해방 신학의 그 가설적인 핵심을 이루는 것인데, 해방신학의 가장 좋은 실례는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자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Gustavo Gutierres)에 의한 극히 중요한 최근의 저서인 「해방 신학」 (A Theology of liberation)인 것이다. 아마도 더욱 더 놀라운 것은 非타협적인 복음주의자들이 이 용어를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최근의 저서인 「정치적 복음전도」 (Political Evangelism)에서, 리차드 마우 (Richard Mouw)는 구원과 복음전도에 대한 이와 같은 더욱 더 폭넓은 정의를 선택했다. 마우는 결코 개개인들을 義認化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는 주 예수에 대한 신앙으로 사람들을 부르시는 그 중요성을 포기하거나 혹은 심지어 덜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있어서 교회의 중심성에 대한 한 탁월한 진술을 했다.

 

그러나 구원은 이런 영역들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가 구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죄의 편만한 세력으로부터 그 전체의 창조된 질서'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던 것이다.

마우는 불행히도 그는 결코 그의 입장에 대한 성경적인 논의를 발전시키지는 않는다 -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우주적인 의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모든 정치적인 활동은 복음전도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백성의 복음전도 활동 범위는 그 범위가 창조된 질서에서의 죄의 우주적인 현존과 대면하여 있으므로 복음의 능력의 충만성의 제시를 포함하여야 한다. 정치적 복음전도 (예컨대, 정치적 활동)는 그래서 복음전도의 이 전체적 과제의 한 중요한 양상인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올란도 E. 코스타스 (Orlando E. Costas)는 이런 폭넓은 일련의 정의들을 채택하였던 또 다른 非타협적인 복음주의자이다. 코스타스는 방콕대회로부터 다음과 같이 수긍하여 인용한다: "죄책이 개별적임과 동시에 공동체적임과 같이 하나님의 해방시키는 능력은 사람들과 동시에 구조들을 그와 같이 변화시킨다.12)"

그리스도가 '전체 세계의 主요 구주'이시기 때문에, 구원은 억압받은 사람들이 더욱 더 큰 경제적인 正義를 획득하는 때 존재한다.13) 물론 코스타스는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들에서 나오는 구원이 단지 부분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데 재빨랐다.

구원은 우리의 主님이 재림하시는 때만 그것의 충만성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시는 구원의 일부이다. 그래서 이 제 4의 견해에 따르면, 구원의 개개인 신자의 義認化 및 거듭남과 동시에 또한 사회의 정치적 재구조화를 통하여 나타난 사회 정의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5. 복음전도는 구원이 사회 정의이기 때문에 정치인 것이다.
이 마지막 정의는 구원의 그 초월적인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고, 단순히 구원과 사회 정의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깁슨 윈터 (Gibson Winter)와 하비 콕스 (Harvey Cox)와 같은 그런 신학자들에 의해 1960년대 후반에 발표된 세속적 신학들은 분명한 실례들을 제공한다. 구원을 인간화로 정의하면서, 윈터는 다음과 같이 확언하였다.

세속화는 역사 및 의미에 대한 그것의 문제를 구원을 위한 인간의 투쟁의 영역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신앙의 범주들은 그것들의 기적적이며 초자연적인 옷들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진정한 목적이며 그의 구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왜 단순히 그들의 역사적인 책무들 가운데서 인간이라 불리어질 수 없는가?

그리고 웁살라에서의 (1968) WCC 제 4 차 총회를 위한 한 준비적인 성명은 최소한 위험할 정도로 다음과 같이 구원에 대한 이런 세속화된 이해에 접근하게 되었다 : "우리는 인간화를 선교의 목표로 치켜 올리는 것이다." 복음전도는 정치이고, 구원은 사회 정의이다.

기본적인 신학적인 질문들에 대한 이 다섯 가지의 일련의 상충하는 대답들이 교회들 가운데서 혼란과 날카로운 불일치로 결과 되었다는 것은 괴롭게도 명백하다. 그러나 모든 이런 상충하는 견해들에 대한 대변자들이 오늘날 새로운 방식으로 그들의 입장들을 재검토하려 하고 또한 일방적인 강조들을 개정하려고 하는 징표들이 있다.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대한 귀중한 신앙고백 문을 진심으로 따르게 할 수 있는 유동성과 재검토의 이 시점에서일 것이다. 나는 그래서 가장 중요한 관련 있는 신약성경의 개념들 - 복음 (유앙겔리온), 구원(소테리아), 구속(아포루트로시스)과 그리고 주관자들과 권세자들(아르카이 카이 엑수시아이)을 신약 성경의 이러한 용어들의 사용이 복음전도와 구원과 사회정의간의 관계를 진술하기 위하여 우리를 어떤 더욱 더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안내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검토해 보기를 원한다.

II. 신약 성경의 용어들

1. 복음

복음은 무엇인가? 신약 성경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좋은 소식이다. (막 1:14-15). 그것은 구주이시고 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 예수에 대한 좋은 소식이다 (롬 1:3-4; 고후 4:3-6).

그것은 역사적인 예수 - 우리의 죄들로 인한 그의 죽으심과 제 3일에의 그의 부활 - 에 대한 좋은 소식이다 (고전 15:1-5).15) 그리고 그것은 새 시대의 표준들에 따라 살도록 이미 능력이 입혀진 철저하게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인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좋은 소식이다(엡 3:17).

좀 더 체계적으로 진술된다면, 복음의 내용은 1) 십자가를 통한 신앙에 의한 義認化이며: 2) 성령을 통한 거듭남이며; 3) 그리스도의 主되심과, 그리고 4) 교회에 대한 사실이다.
복음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의 죽음을 가지신 그리스도에의 신앙에 의한 義認化의 그 놀라운 소식을 포함한다는 것은 거의 논의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갈라디아인들 (특별히 1:6-17, 2:14-21, 3:6-14를 보라)에게와 로마인들 (특별히 1:16-17을 보라)에게의 논의에 있어서 중심적이다. 우리는 <그 좋은 소식>이 또한 부활하신 주님의 현재에서 그들의 자기중심적인 인격들을 그의 거듭나게 하시고 변화시키는 것을 믿는 개개인들의 사람들 가운데 살고 계시는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논의할 필요가 없다.

개개인들의 義認化와 거듭남을 삭제하거나 혹은 덜 강조하는 복음을 선포하는 어떤 사람이든, 바울이 말하였던 대로, 예수 안에서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좋은 소식이 아니라 그 자신의 메시지를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소식>은 또한 의롭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는 이 예수가 또한 主 -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의 主 - 이시라는 그 선포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인지한다. 그가 설교하는 복음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이셨다는 것을 바울은 고린도인 들에게 상기시켰다. 만약 예수의 주되심이 복음의 일부라면, 그렇다면 이 주권자가 요구하시는 그 철저한 제자직도 또한 그와 같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4-35; 또한 10:39을 참조) 거듭남과 제자직은 불가분리적인 것이다. 의롭게 되고 거듭나게 된 자는 또한 우리가 모든 다른 主들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를 것을 요구받는다.

복음전도의 부름을 받아들이는 것은 필연적으로 불가피하게 예수를 우리 개인적인 삶과 우리 가족의 삶, 우리의 종족적인 태도들, 그리고 우리의 경제와 정치의 主로 받아들이는 것이 따르게 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主로서의 그를 배격한다면 예수는 우리의 구주가 되시지 못할 것이다. 너무나도 자주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금세기에 있어서의 복음주의적인 개신교도들)은 복음의 제자직의 요구들이 없는 복음의 용서를 제공하는 값싼 은혜를 선포하여왔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복음이 아니다. 복음의 바로 그 핵심에는 예수를 우리의 전체적인 삶의 主로 삼는 어떤 철저한 제자직에의 부름이 있는 것이다.

<좋은 소식>의 제 4의 요소는 덜 널리 복음의 일부로 감지되어진다. 그러나 예수와 바울은 명백히 교회는 <좋은 소식>의 일부라는 것을 가르친다. 엡 3:1-7에서, 바울은 그가 이방인들도 또한 하나님 백성의 일부라는 그 비밀을 알리기 위한 복음의 사역자로 삼아지도록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모든 문화적, 종족족, 성적인 갈라지는 벽들을 극복하는 한 철저하게 새로운 가시적인 공동체를 창출하면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간의 그 옛날의 불목을 멸하셨다는 사실은 바울이 설교하도록 부름받았던 복음의 근본적인 일부였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예수의 <좋은 소식>의 핵심은 단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다. 막 1:14-15은 다음과 같다 :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다시금 되풀이하여 복음서들은 <좋은 소식>의 내용을 예수의 인격과 사역 가운데 현존한 나라로서 정의한다 (막 1:14-15, 마 4:23, 눅 4:43;16:16).

그러나 예수가 선포하였던 나라의 성격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당시 개개인들의 마음 속에 있었던 어떤 불가견적인 나라였는가? 그것은 로마에서의 그 동일한 질서로서의 어떤 새로운 정치적인 정권이었는가?

나는 많은 학자들이 저술하였던 난해한 문제들을 학문적인 책들로 단순화시키는 것을 주저한다. 그러나 나는 주제넘게 감행하려는 것이다. 그 나라는 예수가 악의 세력을 극복하였던 곳에는 어느 곳에나 현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가 사탄의 나라를 멸하고 그의 자신의 나라를 수립하기를 선택하셨던 그 방법은 어떤 새로운 정당을 형성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는 그가 제공하였던 신의 용서에 대한 그들의 수납과 그들의 삶에 대한 그의 전적인 주되심에 대한 그들의 무조건적인 복종에 의해 함께 연결된 제자들의 한 새로운 가견적인 공동체를 함께 부르기를 선택하였다.

바울은 골 1:13-14에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나라>가 단지 천상의 구속받은 영혼들로 떼를 지어 있는 불가견적인 영적인 추상(抽象)이 아니라는 것은 신약성경에서 아주 명백한 것이다. 예수는 단지 죄들을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믿는 자들의 육체적 및 정신적인 질병들을 치료하셨다. 그의 제자들은 돈주머니를 공동으로 함께 나누었다.

초대 교회는 거대한 ‘경제적 함께 나눔’에 참여하였다 (행 4:32-5:16). 예수의 제자들의 그 새로운 공동체는 그것의 믿음과 삶의 스타일로 해서 세상과는 예리하게 구별된 한 가견적인 사회적 실재였던 것이고, 최소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의 나라는 물론 그의 재림 때에만 그것의 완성에 이를 것인데, 그러나 바로 지금 은혜에 의해 사람들은 모든 사회적 및 경제적 관계들이 변화되어지고 있는 이런 새로운 사회에 들어갈 수가 있다.

예수의 새로운 사람들로 구성된 전적으로 새로운 공유의 공동생활이 회개하고 믿고, 그리고 복종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이용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다. 하늘나라는 단지 미래적인 것만이 아니고 또한 현재적인 실재이다. 교회는 <좋은 소식>의 일부인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복음의 내용이 義認化이고, 거듭남이고, 예수의 主되심이고, 교회에 대한 사실이라는 것을 보아왔다. 그러나 복음에는 ‘세속적’이거나 혹은 ‘정치적’인 차원은 없는 것인가? 예수는 눅 4장에서 그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억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려고 하는 정치적인 활동은 또한 복음전도가 아닌가?

눅 4:18-19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본문인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으시면서 예수는 그의 선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본문에서 예수는 그의 선교의 몇 가지 양상들을 확실하게 하고 있다. 그는 그가 포로 된 자들을 놓아 주고 눈 먼 자들을 고쳐 주고 억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씀한다.

이것이 그의 전체적인 선교의 한 근본적인 일부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억눌린 자들을 돕는 일과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설교하는 일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둘 다 중요한데,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구별된다는 것이다.

그 동일한 점은 다른 구절들에서도 명백하다. 마 11:1-6에서, 예수는 “당신이 메시아요?”라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다시금 예수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문둥이들을 깨끗케 한다는 것을 동일시하지는 않으신다. 그는 이것들의 모든 것을 행하신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가 다 중요한데, 그러나 그 한 활동이 그 다른 활동에로 합병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한 가지 마지막 실례가 중요한 것이다. 마 4:23과 9:35에서, 복음기자는 예수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여기에 세 가지 구별된 형태의 일들이 있다.

가르치고, 복음을 설교하고, 병자들을 고치는 것이다. 그것들은 동일한 일들은 아니다. 그것들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어떤 것도 감히 삭제되어지지 않는 모든 것이 예수의 선교와 절대적으로 중요한 부분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들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결론은 이 본문들의 어떤 것도 눈먼 자를 고치는 것이거나 혹은 억눌린 자들을 해방시키는 것을 복음 전도와 동일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구조들을 “복음화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에 대해 신약성경의 정당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따르면 복음 전도는 십자가들 통한 죄들의 용서가 있다는 것과, 성령이 왜곡된 인격들을 거듭나게 할 것이라는 것과, 예수가 主시라는 것과, 그리고 사람들이 오늘날도 모든 사회적 경제적 관계들이 새롭게 만들어지게 되는 예수의 새로운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다는 <그 좋은 소식>의 알림(말과 행위를 통하여)을 포함하는 것이다.

2. 구원

신약성경에서 ‘구원’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마도 구원에 대한 폭넓은 정의를 채택하기 위한 최선의 신약 성경의 논의는 공관복음서들에서의 ‘구원한다’ (소오조)라는 단어의 사용으로부터 개진될 수 있다.

예수의 치유의 네 개의 서술들의 대략 하나 정도로, 공관복음서들의 기사들은 예수에 의한 육체적인 치유를 서술하기 위하여 ‘구원한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막 6:5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옷에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받더라(에도존토).” 우리는 다른 비슷한 실례들을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구원하다’는 동사가 육체적인 치유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막 10:52에서 예수는 그가 고쳤던 맹인에게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하였던 반면에, 눅 7:36-50에서 그는 비록 그가 그녀의 육체를 고치지 않았을지라도 그의 발에 기름을 부었던 죄많은 여자에게 그 동일한 말씀을 하였던 것이다.(눅 7:36-50)

이제 복음서들이 ‘구원한다’는 말을 육체적인 치료에 적용하기 때문에, 또한 그 단어를 주의 이름으로 병들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행하여진 온갖 종류의 활동을 포괄하는 것으로 확대하는 것이 적법하다고 논의하는 것은 내게는 전적으로 그럴듯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만약 ‘구원’이라는 말을 정치적인 해방에 적용시키기 위하여 사용하는 데 대한 신약성경의 정당화가 있다면 그것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방금 언급된 그 사용법이 결코 신약성경에서 ‘구원하다’와 ‘구원’이라는 용어들의 우선적인 사용법은 아니라는 것을 즉시 지적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단어들은 사실상 공관복음 전승에서 주요한 말들은 아니다. 그 단어들이 공관복음서들의 그 외 다른 곳에서 나타날 때, 그 단어들은 <그 나라>에 들어간다거나 혹은 예수를 따른다는 것에 대해 언급한다.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부자가 <그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을 때, 놀란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물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구원받았다”는 것과 <그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동의어인 것이다.

이러한 유사한 구절들에 비추어, 우리는 어떤 사람이 그가 모든 경제적 관계들이 변형되어지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됨에로 들어가는 때에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삭개오의 이야기는 이것과 관련하여 주의를 끈다. (눅 19:1-10) 예수와 그의 만남 후에, 삭개오는 그의 죄들에 대해 회개하였다. 억압적인 경제적 구조로부터 이익을 얻었던 한 부한, 부패한 세리로서, 그는 그의 ‘사회적인’ 죄들에 대하여 회개하였으며, 신속하게 가난한 자들을 먹이기 위하여 그의 그릇되게 얻은 재산의 절반을 주었다. 예수는 즉시 그에게 다음과 같이 확실하게 보장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다.” 이제 이 본문은 경제적인 정의가 나타나는 곳에는 어느 곳에나 구원이 현존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는 잃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그는 잃어진 삭개오를 찾으셨다 (10절). 그러나 예수가 그에게 구원을 확실하게 하셨던 것은 단지 삭개오가 예수의 메시지에 복종하고, 그의 죄들에 대하여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구원은 회개와 예수에 대한 복종, 그리고 경제적인 관계들을 포함한 모든 관계들이 변형되어지고 있는 예수의 제자들의 새로운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 사용법은 모호하지 않다. 우리는 예수가 主시라는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일으키셨다는 것을 믿을 때 구원함을 얻는다 (롬 1:10-13). 우리는 복음을 듣고, 우리의 행위들로가 아니고 오히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믿을 때 구원을 얻는다. (롬 1:16-17). 우리 죄인들을 위한 구원은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로부터 십자가를 통한 자유인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이니” 신약성경의 그 외 다른 곳에서도 그 의미는 비슷하다. 사도행전에서의 구원에 대한 통상적인 의미는 죄들에 대한 용서이다. 야고보서에서, ‘구원하다’는 동사는 최후 심판에서의 신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

키텔의 <신약성경의 신학사전>에서 이 단어들에 대한 긴 기사의 저자는 그의 발견들을 이와 같이 요약하고 있다.
“신약의 구원은 지상적인 것의 관계들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것의 내용은 희랍인들의 이해에서처럼 육체와 영혼의 안녕이나 건강도 아니다. 그것은 유대주의에서처럼 이방의 멍에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의 지상적인 해방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관계를 가진다. 신약성경에서 나사렛의 예수의 역사적인 오심과 수난과 부활의 사건만이 죄들의 용서에 의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신약성경에서의 ‘구원하다’와 ‘구원’이라는 단어들의 그 지배적인 의미는 구원에 대한 폭넓은 정의에 대한 채택을 권장하지 않는다. 예수의 치유들에 대한 공관복음서들 기사들의 4분의 1 가운데 육체적인 치유와 관련한 ‘구원하다’는 동사의 사용은 정치를 통하여 야기된 사회 정의를 언급하기 위하여 ‘구원’이라는 단어를 확대하기 위한 그 유일한 실질적인 신약성경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다. 신약성경 구절들의 방대한 양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3. 구속 (救贖)

‘구속’이라는 용어에 대한 신약성경의 사용은 어떤 부가적인 도움을 제공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구속적’ (Redeemed)인 사회적 구조들을 산출해내는 정치적인 활동을 생각해야 하는가?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고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다"고 말하였다 (롬 3:24-25). 바울은 또한 분명하게 구속과 죄들에 대한 용서를 동일시하였다.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들이 어려움의 나라로부터 <그 아들의 나라>로 구속함 받은 것을 상기시킨 후에, 바울은 "우리가 구속과, 죄에 대한 용서를 갖는 것"은 예수 안에서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골 1;13-14; 눅 21:28; 롬 8:23).

또한 구속에 대해서는 중요한 종말론적인 차원이 있다. 우리는 구속의 날에로 인침을 받는 것이다 (엡 1:14; 4:30; 눅 21:28; 롬 8:23). 특별히 롬 8:18 이하에 기록된 종말론적인 회복에 대한 바울의 열광적인 환상은 중요하다. 우리 주님의 재림 때에, 전체의 창조인 죄와 모든 그것의 결과들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며, 우리의 몸들까지도 "구속"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23절).

이 구절은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권세자들’에 대한 바울의 개념을 검토한 후에 자세하게 최상으로 논의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구속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가 그들의 죄들에 대한 화목제물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죄들에 대한 용서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의 주님께서 그의 재림 때 성취하실 죄의 모든 악한 결과들에 대한 전체적인 역전인 것이다. 구속은 그래서 세속적, 경제적, 정치적인 구조들에서 발생하는 어떤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발생하는 어떤 것이라고 볼 수 있다.30)

4. 주관자들과 권세자들

개념들 중 한 가지 마지막 것이 검토되어야 한다. 구원에 대한 가장 도움이 되는 정의를 위한 우리의 탐색을 위하여 ‘주관자들’과 ‘권세자들’에 대한 바울적인 개념의 의의는 무엇인가?
나는 존 하워드 요더가 주관자들과 권세자들이 다만 하늘에 거주하는 천사적인 존재들이 아니라고 논의할 때 그가 기본적으로 옳다는 가정과 더불어 시작한다. 권세자들은 또한 종교적인 구조들과 (특별히 안정된 옛날의, 원시적인 사회들에 대한 종교적인 받침대들), 지적인 구조들과 (‘학문들’과 ‘主義들’), 도덕적인 구조들과 (규약들과 습관들), 정치적인 구조들 (폭군과 시장과 학교와 법적과 종족과 나라)인 것이다.

권세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며 배후에 있으면서 종교적, 지적, 사회-경제적, 정치적 구조들을 지원하는 사회의 질서잡힌 구조들 및 영적인 세력들이다.

바울은 권세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어졌다는 것을 매우 분명히 한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자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6). 권세자들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이다. 불행히도 죄가 이 선한 창조계에 침입했고 또한 권세자들은 그들이 지금 하나님에 대하여 적대적이 되는 지점에까지 부패되어졌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주관자들과 권세자들을 무장 해제시켰다 (골 2:15).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는 교회의 주 만이 아니고 모든 지배와 권위와 권세와 통치의 주가 되신다. 결국, 그의 재림 때에 - 여기에서는 바울이 내다보았던 우주적인 구속의 기막힌 범위가 눈에 보이게 된다 - 주께서는 권세자들에 대한 그의 승리를 완성하실 것이며 또한 만물을 하나님께 화해시키신다 (고전 15:24-26; 골 1:20).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이 우주적인 바울의 견해에 비추어, 우리는 다시금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회 구조들의 개선에 적용시키는 것이 적법한가의 여부를 물어야 한다. 권세자들은 언제 하나님께 화해되는가? 그리고 현재에 있어 교회의 권세자들에 대한 관계는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타락한 권세자들에 대한 승리가 이미 매우 멀리까지 진행되어 왔으므로 신자들의 몸의 지체들은 권세자들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이것은 골 2장에서의 혁명적인 메시지인 것이다.

바울은 아직도 신자들을 ‘철학’과 ‘인간의 유전’과 ‘우주의 초보적인 영들’로써 억압하려고 애쓰는 세력들에 대해 언급한다 (8절). 이런 권세자들은 어리석게도 율법주의적인 음식에 관한 규정들과 사소한 종교적인 절기들에 대한 집착을 요구한다 (16-23절). 바울의 응답은 예수가 만물의 주이시기 때문에 (그런고로 권세들의 주), 그리고 그가 십자가에서 권세자들을 무장 해제시켰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잘못된 억압적인 요구들에 대하여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다 (9-10절, 14-15절).

그래서 우리는 비록 교회가 현재에 있어 그들의 억압에 저항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권세를 갖고 있다고 할지라고 그리스도가 권세자들에 대한 그의 승리를 완성시키지는 않았다는 것을 덧붙일 필요는 거의 없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는 그가 이런 승리를 완성시키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의 오심에서만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와 모든 권위와 권세를 퇴위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죄와 죽음 그 자체를 포함한 모든 그것의 결과들에 대한 그의 승리를 완성시키실 것이다.33) 이 마지막의 우주적인 회복은 매우 파죽지세적이며 모든 것을 망라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과 관련하여 ‘구속’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

롬 8장의 그 기막힌 구절에서, 바울은 죄가 지구의 폭풍처럼 성나 날뛰었던 전체의 창조계가 죄에로의 속박과 그것의 결과들로부터 해방될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스러운 자유를 획득하게 될 날을 그려보았다. 그 날에 우리는 우리 몸들의 구속을 얻게 될 것이다 (롬 8:23).

아마도 우리는 확장하여 전체의 창조계의 종말론적인 구속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현재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義認化와 거듭남과 화해와 다른 어떤 것으로 구원과 구속에 대한 언어를 사용하였던 그 유일한 때가 그가 우리 주님의 재림 때에 그 종말론적인 회복을 논의하였던 때라는 것은 중요하다. 갈보리와 종말간의 그 중간에서 사회 정의를 도입하기 위한 그 비극적으로 불완전한 인간의 시도들과 관련하여 이런 언어의 사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죄가 너무나도 널리 만연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현재에서 권세자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교회와 세계의 主이시다 (엡 1:22). 세계의 주권자로서, 그는 아마도 현재에서 예언자들이 우리에게 역사의 주가 하시는 것들 - 즉 불의한 사회들을 멸하고 좀 더 정의로운 사회들을 만들어내는 것 -을 하면서 일하고 계신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언어를 그 제한된, 불완전한 자들에게의 적용을 정당화하기에는 죄가 너무나도 전체적으로 편만해 있는데, 종말 이전의 시대에 나타나는 극히 중요한 사회정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바울은 교회 가운데서 생기는 구속에 대한 것으로 구원이라는 언어를 보유한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권세자들에 대한 관계는 무엇인가? 엡 3:10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가 하늘의 처소들 가운데 있는 주관자들과 권세자들에게 알려지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회 구조들을 복음화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실제로는 아니다. 권세자들에게 알려지도록 되어 있는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의 신비이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간의 적대의식과 타락한 권세자들이 문화들과 종족들과 성들간에 세운 그 가르는 벽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무너져내렸기 때문에 끝이 났다는 것은 <좋은 소식>인 것이다 (엡 2장, 3장의 전체를 보라). 하나님께서 예수를 그 유일한 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해서 현재에서 타락된 권세자들의 가치들과 규범들과 편견들에 대항해서 살고 있는 그의 새로운 공동체를 통한 구원을 제공하기로 결정하였다는 사실은 교회가 주관자들과 권세자들에게 알려지게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요더가 지적한 대로, 권세자들에게 교회로부터의 이런 메시지는 개개인들에 대한 복음주의적인 부르심과 같은 것도 아니고, 대치되는 것도 아니고, 필수 조건도 아닌 것이다. 권세자들에게 말하는 것이 감히 복음 전도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실제 생활에서, 최소한 쇠퇴되어, 그것은 때때로 복음 전도와 ‘교회 성장’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상이하고 구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적지 않게 중요하다.

그래서 다른 경우들에서처럼, 권세자들에 대한 바울적인 개념에 대한 우리의 검토는 그 동일한 결론에로 이끈다. 복음 전도나 사회적 행동은 둘 다 중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것에 다 관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복음 전도를 통하여 제공하기를 선택하였던 그 구원은 사회적인 행동과 혼동되어져서는 안된다.

 

III. 제 6의 선택 : 구별되며 그러나 동일하다

신약성경의 사용법에 비추어 이 논문의 서두에서 강조된 모든 다섯 가지의 견해들은 부적합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나는 제 6의 선택이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 전도와 사회적 행동은 똑같이 중요한데,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전체적인 선교의 구별된 양상들이다.

복음 전도는 義認化와 거듭남, 예수 그리스도의 主 되심, 그리고 모든 관계들이 구속함을 받고 있는 새로운 공동체의 사실에 대한 <좋은 소식>의 알림 (말들과 행위들을 통하여)과 관련된다. 개개인들이 <좋은 소식>을 받아들이는 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들어가며 또한 구원을 경험한다.

사회적인 행동은 더 큰 사회적인 정의를 위하여 사회에 대한 정치적인 재구성과 관련된다. 이런 증가된 사회 정의를 '구원'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혼란스럽다. 우리 주님의 재림 때까지는, 사회를 재구성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기껏해야 타락의 결과들에 의해 다만 비극적으로 얼룩진 불완전한 사회들을 산출해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 전도가 사회적인 행동보다 더욱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실로 만약 복음화되지 않은 영혼들이 영원한 저주 가운데로 간다면, 그렇다면 복음 전도는 우리의 우선적인 관심이 되어야 한다.

" 현재 나는 그것을 강력한 관심으로 발견하는데 왜냐하면 나는 우리의 주님이 사람들이 자유롭게 그의 은혜의 사랑의 제공을 배격하기도 하고 또한 그들이 결과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전으로부터 영원한 분리를 당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쳤다고 믿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가 그의 거대한 시간들을 1년, 2년 혹은 3년이 지난 후에 썩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던 병든 몸들을 치료하는 것에 바치기로 선택하였을 때 그것을 아주 잘 알았던 것이다. 복음서들은 이론적으로든 혹은 각각에 바쳐진 시간으로든 예수께서 <좋은 소식>의 설교를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보다 더욱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였다는 징후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굶주린 자들을 먹이고 복음을 설교하라고 명령하셨는데, 후자가 우선적이라거나 전자는 시간이나 돈이 여유가 있을 때에나 행하여질 수 있는 것이라는 덧붙임은 없다. 예수는 우리의 유일한 완전하신 모델이시다.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가능한 설교 시간의 대량을 아픈 육체들을 치료하는 것에 바쳤다고 생각하면서도, 실로 우리가 그의 발자취를 따르지 못한다면 불성실한 제자들이다.

그 반대도 물론 똑같이 사실이다. 이론으로나 혹은 우리가 인적인 것과 자금을 할당하는 방식에 있어서 교회는 감히 사회적 행동을 복음 전도보다 더욱 더 중요한 것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다음과 같은 문장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할 때가 왔다: "교회의 우선적인 사명은 ...이다."

나는 만약 여러분이 복음 전도나 혹은 사회적 행동으로 그 문장을 완성한다 할지라도 개의치 않는다. 둘 중 어느 것으로 하든 그것은 비성경적이고 오도된 것이다. 복음 전도와 사회적인 행동과 교제와 가르침과 예배는 교회의 사명에 대한 모든 기본적인 부분들이다.

비록 그것들이 헤어날 수 없게 상호 관련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상호간에 혼돈되어져서는 안된다.
나는 복음 전도와 사회적인 행동이 구별되고 또한 그것들이 삶에서 불가분리적이고 상호 관련되어 있다고 논의하였다. 나는 그것들의 상호 관계성의 여러 가지 양상들에 대한 간결한 논의로써 종결을 맺고자 한다.

첫째로, 성경적인 복음의 선포는 회개와 온갖 죄의 모양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에 대한 부름을 필연적으로 포함한다. 죄는 개인적인 것임과 동시에 구조적인 것이다. 복음주의적인 개신교도들은 예수께 온다는 것은 술과 폭음과 음란물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규례적으로 설교한다. 그러나 너무나도 자주 금세기에 있어서, 그들은 예수께 온다는 것이 경제적인 부정의와 제도적인 종족주의와 같은 그와 같은 개인적인 것과 동시에 구조적인 악들에 연루된 죄로부터의 회개와 회심을 필연적으로 포함한다는 것을 덧붙이는 것을 하지 못했다.

성경적인 복음 전도는 개인적인 것과 동시에 구조적인 악들에 연루된 죄로부터의 회개와 회심을 필연적으로 포함한다는 것을 덧붙이는 것을 하지 못했다. 성경적인 복음 전도는 개인적인 것과 동시에 구조적인 죄들에 우리가 연루된 것에 대한 회개를 요청하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은 또한 예수의 전체적인 주되심의 선포를 포함하기 때문에, 성경적인 복음 전도는 분명히 무조건적인 제자직의 희생을 선언한다. 복음주의적인 악에서부터의 돌이킴(Conversion)을 요구하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복음 전도자들은 예수께 온다는 것은 계속된 거짓과 간음을 배제한다는 것을 규례적으로 주장한다.

만약 그것이 <오직 은혜만>을 희석시키지 않는다면, 예수께 온다는 것이 제도적인 종족주의와 경제적인 부정의에의 우리의 연루에 대한 회개, 그리고 덜 종족주의적이며 덜 불의한 사회를 위해 일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포함하게 될 것이라는 성경적인 주장이 희석되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모든 사회적인 관계들이 구속함을 받고 있는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실재는 사람들이 좀 더 사랑스럽고 정의로운 방식들로 공동체 가운데서 살 수 있는 방식에 대한 어떤 가견적인 모델을 제시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의미심장한 영향력을 갖는다.

교회는 병원들과 학교들과 고아원 등을 발전시킨 첫 번째의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주변 사회의 규범들과 받아들여진 가치들에 대항해서 새로운 모델로 사는 것은 결국 전체적인 사회의 질서에 강력한 영향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36)37)

셋째로, 사회적인 행동은 때때로 복음 전도의 과업을 촉진시킨다. 불의한 사회 구조들의 덫에 걸린 사람들의 바로 그 억압적인 상황이 때때로 복음에 대한 적극적인 응답을 방해하는 것과 똑같이, 너무 지나친 사회정의가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좋은 소식>에 대하여 더욱 더 개방적으로 할 수 있게 하는데 방해가 된다.

때때로 정확히 예수의 이름으로 억압당한 자들을 위한 개선된 사회 - 경제적인 상황을 위하여 일하는 행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의 그 선포된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관심의 행동은 그 자체가 진정으로 복음전도적이다.39) 더욱이 성경적으로 정통한 사회적 행동은 사회적인 부정의에 대한 참여가 단순히 이웃에 대한 비인도적인 행위가 아닐 뿐만 아니라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독한 죄라는 것을 꼭 지적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사회적 행동은, 항상 암암리에 또는 흔히 명백하게, 회개에로의 부름을 포함한다.

넷째로 복음 전도를 의미하기 위하여 '대위임' (The Great Commission)을 사용하고, 사회적 관심을 의미하기 위하여 '대명령' (The Great Commandment)을 사용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대위임'에서 예수가 그의 따르는 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들을 삼으라고 가르치셨을 때, 그는 특별히 이것은 새로운 회심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또한 그들에게 그가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하도록 명령하였던 모든 것을 준수하도록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굶주린 자들을 먹이고, 사로잡힌 자들을 놓아 주고 억눌린 자들을 해방시키라고 명령하였다.

가망이 있는 신자들과 새로운 회심자들에게 있어 예수께 온다는 것은 사회적, 경제적 및 정치적 부정의에 맞부딪힐 값비싼 제자직을 필연적으로 포함할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대명령'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이웃의 사회적인 환경을 개선시키도록 강요하는 것과 똑같이 이웃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책무를 준다. 만약 우리가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분의 그 이웃에게 말할 방법들을 간절히 추구하게 된다.

사실상 복음전도와 사회적인 행동은 헤아릴 수 없이 상호 관련되어 있다.
그것들은 복음전도와 흔히 증가된 사회적인 정의에로 인도하고 또 그 반대의 현상도 있다는 의미에서 그 둘은 불가분리적이며 또한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정확히는 그들이 예수의 성실한 제자들이라는 정도에까지 항상 억눌린 자들을 위한 자유를 추구한다 (눅 4:18) 그러나 복음전도와 사회적인 행동이 불가분리적이라는 사실이 그것들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교회의 전체적인 사명과 구별되며, 동일하게 중요한 부분들이다.

구원의 의미에 대한 그의 논의에서 해방신학의 지도적인 대표적 인물인 라틴 아메리카의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는 구원이라는 말의 폭넓은 정의를 채택했는데 그것은 정치적인 해방을 포함한다. 구원이라는 말을 한정해서 쓰는 자들에게 그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했다.

그는, "구원은 역사의 복판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혹은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인간들과 사회적인 계급들이 억압의 굴레로부터 그들 자신들을 해방시키려고 투쟁하는, 즉 구원을 일소시키는 자들을 탄핵하는 것"이라고 했다. 곧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은 '구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그것을 '잃게 될' 자들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도전과 경고를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가장 좋은 응답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개념들에 대한 성경적인 定義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정치적인 억압으로 우리의 부유함이나 혹은 과거의 무관심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구원에 대한 의미가 정치적이 된다.

단지 우리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지상의 비참한 자들을 위한,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에 매우 명료하게 우리 자신들을 내던지는 때에만 - 다만 그 때에만 제 3세계 신학자들은 구원에 대한 비성경적인 定義들에 대한 비판을 기꺼이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만 지상의 억압받은 자들이 부활하신 주 예수에 대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출처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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