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신,이방종교와 성경적기도개념 차이
구약성경 가운데서 특별히 시편 같은 것을 가장 좋은 기도의 본보기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시편의 기자들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썼다고 해서 시편이 꼭 기도라기 보다도 시편 그 자체가 기도형식으로 되어 있고 또 넓은 의미로 우리가 본다면 시편만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 그리고 신약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에 대한 인간적인 응답이라고 하는 면에 철두철미하게 기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방종교나 미신에 있어서 기도의 개념과 성경적인 맥락에서 보는 기도의 개념이 상당한 정도로 차이가 있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이방종교나 마술에 있어서는 기도하는 자가 능력이 있는 자이고 기도하는 자의 능력 여하에 따라서 그 기도가 효력이 있을 수도 있고 효력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방종교나 마술의 경우에 특이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가령 마술사라고 하는 사람이 마술을 할 때 주술을 외우게 되는데 그 마술사가 능력이 있어야지 그 마술사가 능력 없이 기도드리면 그 기도 즉 주문은 효력이 없다.
그러나 성경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가령 어린아이가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그 기도가 쓸데 없다든지 여인네가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효력이 없다든지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 성경적인 기도의 근본적 자세는 인간이 먼저 하나님께 대하여 청구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도라고 하면 청구권 행사하는 일, 말하자면 졸라대는 일과 같이 생각한다.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청구권 행사로서의 마술과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근복적으로 다르다. 예수님의 경우는 무조건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위임하라는 뜻이다. 아버지의 하나님께서 어찌 아니들어 주시겠느냐? 너희 중에 자녀가 생선을 달라면 뱀을 줄 자가 있느냐? 하물며 천부께서 너희들의 요구를 아니 들어 주시겠느냐?
이와 같이 어린아이가 부모님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고 아무 흉허물없이 믿는 마음으로 내놓듯이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있는 그대로 드러내라는 것이다. 마술과 성경적 기도 사이의 차이를 우리가 분명히 해야겠다.
이것을 조금 다른 각도로 말한다면 마술은 인간이 기선을 제하고 신은 인간의 의지에 종속이 되어지는 것이다. 마술의 특징은 인간이 주인이 되고 신적 존재는 노예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자칫 잘못하면 기도를 마술화 할 수 있다.
인간의 의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신적인 능력을 자유자재로 끌어다 쓰는 것처럼 오해한다면 아마도 하나님은 아라비안 나이트의 이상한 램프에 나오는 거인하고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하나님이 되고 만다. 즉 인간의 의지에 종속된 하나님이다. 그러면 그것은 마술이다.
기도에 있어서는 인간의 의지가 기선을 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 신적의지가 기선을 제하게 되어 있다. 인간의 의지는 신적인 의지에 종속되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뜻에 인간이 복종하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 성경적인 기도의 의미이다.
우리가 이것을 뒤집어 놓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일반신자들에게 그런 위험성이 항상 있다. 마술은 인간이 주인이 되고 신적 존재가 노예가 되는 것이 특징이라면 기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의지가 주가 되고 우리 인간의 존재, 인간의 의지는 종이 된다. 이런 관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우리가 여기서 크게 오해를 하게 된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을 비판했는데,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 형이 상학은 주관주의이라는 것이다. 주관주의의 특성은 인간의 주관, 인간의 의지, 인간의 이성에 있는 것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의지에다 역점을 두었다.
쇼펜하우어가 맹목적 의지를 주장했고, 니체가 권력에의 의지를 주장했다. 그런데 니체가 비판한 것을 보면 서양의 형이상학의 종말에 대해서 이야기 했고, 서양의 형이상학의 종말의 형태는 통속적 플라톤주의를 대표하는 기독교가 바로 형이상학의 종말에 심판받아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고 그런 기독교의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니체가 권력에의 의지를 말했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니체조차도 형이상학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니체는 형이상학의 종말을 예언했지만 형이상학의 종말 이후에 형이상학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니체 자신도 말할 수 없었다. 과학기술이라고 하는 것은 하이데거에 의하면 형이상학의 완성이라고 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과학기술은 "의지에의 의지"이다. 이 특징은 의지가 하고 싶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마술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서 신적인 능력을 빌어다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과학과 마술은 완전히 상통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과학기술은 형이상학의 완성이라고 한다. 기도와 마술과 형이상학과 과학기술을 다 비교해 볼 때 기도는 결코 마술일 수도 없고, 형이상학일 수도 없고, 과학기술일 수도 없다. 마술. 형이상학 . 과학기술의 공통적인 특징은 인간의 의지이다.
그러나 기도는 인간의 뜻대로 한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서적인 기도 이해와 이방종교나 마술에 있어서의 기도 이해가 완전히 다르다. 기도는 독백이 아니고 대화이다. 그러나 이 대화는 사람과 사람이 얼굴과 얼굴을 대해서 만나서 말하듯이 그렇게 대화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 특징이 있다. 또 그것이 장점인 동시에 약점이기도 하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것 같이 하나님과 더불어서 말씀을 나누었다. 아브라함도 그랬다. 이사야도 그런 체험을 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는 체험은 그러한 체험이 아니다.
모세나 아브라함이나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는 우월성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을 전하시고, 그것을 예언하도록 예언자로 선택해 주신 분이고 우리는 그 예언자의 소리를 듣고 증거 하는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런 우월성은 그 예언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고 행하심을 대면한 사람의 응답이다.
응답이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이 인간 에 대한 은혜이며 인간은 여기에 대하여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응답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응답이 아니고 자기가 만들어 낸 주술신적 존재가 우리에게 행한 것이 인간의 응답이 아니다. 인간이 먼저 주술을 부리면 신이 거기에 대해 응답하는 것은 마술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 행하신 데 대해서 인간이 순종으로 응답하는 것이 기도이다. 기도의 근본도 인간의 겸손한 신앙으로부터 나와야지 인간의 체험에 대한 자기 자랑으로부터 나오면 아니 된다. 우리가 기도 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고 용납하시고 먼저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가 그나마도 기도드릴 수 있는 것 뿐이지, 우리가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본다면 완전학 착각이다.
바르트는 기독교의 신학은 근본에 있어서 기도를 시작하고 기도로 관철되고 기도로 끝나야 한다고 가르쳤다. 우리가 신학이라고 하는 것을 단순히 학문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신학을 오해한 것이 되는 것이다. 신학은 척두철미하게 학문이지만 또 철두철미하게 기도다. 기도가 아닌 학문은 신학일 수가 없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회의 병폐 중 하나는 신앙과 신학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데 있다. 또 신학과 목회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데 이것 또한 큰 병폐이다. 또 학문과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만이 옳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것은 학파 사이의 차이점이다. H.오트는 설교와 신학은 연속적인 것이라고 했다. 신학자의 신학에서 얘기를 듣고 설교자는 어떤 암시를 받아 설교할 수 있고, 또 설교를 작성하면서 자기가 깨달은 점은 신학적으로 진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와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또 설교라고 하는 것은 특정한 대상을 앞에 놓고 하는 것이고, 특정한 본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신학은 성경의 특정한 본문과 특정한 절만 가지고는 전제하지 않는다. 성경 전체를 근거로 하여 말하는 것이 신학이다.
또 신학은 한 교회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설교는 특정한 대상을 앞에 두고 한다. 그런 양식의 차이는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신학과 설교를 완전히 다른 분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급적 신학자와 목회자, 설교와 신학, 학문과 기도 이것은 분리되어 진 것이라기 보다는 통합되어진 하나이지만 앞뒤의 관계 가진 것에 불과하다.
히브리서 11장 6절을 보면 "믿음이 있어야 할지니라......"
어떤 믿음이냐하면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분에게로 나온 자에게 상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당에 나와 있어도 하나님은 믿지 않고, 교회 신자이면서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않고 무신론자가 되어서는 신자 노릇은 할 수 없다. 또 아무리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고 그 하나님이 내게 대하여 구원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어야지 그것을 믿지 않으면 신앙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6절에 있는 그 믿음의 최소량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그러한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반드시 그런 것을 설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교회에는 성경도 읽을 수 없고, 찬송도 못 부르고, 더군다나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 말해 줄 수 없는 그런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무엇을 믿고 있다.
즉 예배당에 가면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시고,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말로는 못해도 교회로 오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최소량만 우리가 인정한다면 그런 신앙은 아직 남에게 믿으라고 권고하고 전도 할 수 없는 사람의 신앙이다. 여기서 신앙의 성장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앙이 성장한 사람괴 단순한 신앙을 가진 신자와 누가 신앙이 더 우월한가?라고 질문한다면 물론 신앙이 성장한 신자가 우월하다.
그러나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는 우월하지 않다. 어떤 차원의 신앙이든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신앙보다는 설교자의 신앙이 더 우월하다. 남에게 증거할 수 있으니까 우월하다. 이런의미로 말한다면 설교자의 신앙보다는 신학자의 신앙이 어떤 의미에서 더 우월하다. 설교하기는 하되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것인지를 검증하는 역할을 누가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을 신학이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그의 교회 교의학의 첫 머리에 신학은 파수꾼의 직분을 가졌다고 했다. 백만대군이라도 보초병이 없으면 쉽게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신학이 있어야 즉 교회에 신학이 없으면 마귀가 들어와서 교회를 무너뜨릴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일을 지켜 주는 일을 하는 것이 신학이다. 이것이 파수꾼의 직분이고 그런 의미에서 비판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신학은 단순히 비판적 기능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어떻게 복음을 증거 할지를 지시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또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로 하여금 설교가 되도록 지켜 주는 일을 하는 것이 신학이 하는 일이다. 그럼 이러한 것들이 근본에 있어서는 무엇인가? 기도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설교라면 이것은 인간의 강연이나 무슨 약장사의 얘기 밖에는 안될 것이다.
이와 같이 근본은 항상 기도로부터 나아야 한다. 기도로 우리가 이제까지 경건 형식으로만 얘기를 했다. 그러나 이 경건 형식 없이는 신앙이 신앙으로서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명상과 체험과 기도는 기독교적 신앙이 담겨지는 그릇이다. 이러한 경건의 형식을 통하여 신앙은 자기를 이해하고 표현한다. 기독교적 신앙은 경건을 통하여 삶과 학문 속에 구체화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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