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에 끼친 영향
고대 한국인이 고대 중국에 끼친 영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왼쪽 그림은 중국인들은 고궁(古宮)이라고 부르고, 우리들에게는 자금성(紫禁城)이라고 알려져 있는 베이징의 왕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중국인들의 기원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셈의 장자들인 엘람과 앗수르 가문이 동방으로 대장정을 시작했을 때 셈의 장막에 거하면 복을 받으리라는 노아 할아버지의 명령을 따라 야벳 가문의 일부가 따라 나섰습니다.
또한 함의 맏아들인 구스 가문의 일부도 셈족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래서 야벳이 주축을 이루고 구스도 일부 섞인, 그리고 셈 가문 여자들을 며느리들로 맞아들여 다양하게 섞여버린 그들이 지금의 중국인들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사마천의 사기 오제본기에 요의 아버지는 곡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곡은 아벳의 아들인 곡, 마곡과 연결이 됩니다.
또 서전요전에 보면 요임금의 대를 이은 순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순의 아비는 고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수는 함의 아들 구스와 연결되고, 구스의 아들이 순이 됨으로써, 고대중국의 왕조와 성경의 족보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고대 중국의 문화를 잠깐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국인과 한국인의 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문화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크게 두 개의 문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앙소문화권(仰韶文化圈)과 용산문화권(龍山文化圈) 2 가지입니다.
앙소문화권(仰韶文化圈)은 서남문화권(西南文化圈)이라고도 하는데 설립자는 중국인 스스로이고, 중국의 남쪽에 있으며, 하남성 앙소촌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규모는 소규모이고 원시적이고 상당히 시시합니다. 그런데 중국의 대부분의 훌륭한 문화권을 이루고 있는 용산문화권(龍山文化圈)은 놀랍게도 설립자가 동방족 혹은 동이족이라고 불리는 고대 한국인이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용산문화권은 다른 말로 동방문화권(東方文化圈)이라고 부릅니다. 그 중심은 산동반도의 용산현 근처입니다. 용산문화권은 중국문화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찬란했던 문화권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중국인 고고학자들이 밝힌 사실들입니다.
이러한 중국역사의 문화적 배경을 보면 중국이라는 나라는 동이족들, 곧 한국인들이 도와줘서 그 기틀을 세웠구나 하는 것을 당장에 알 수 있습니다.
산동성의 용산문화권은 고대 동방으로부터 파견된 동방족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중국으로 파송된 동방족들을 '소호 금천(金天)씨'라고 불렀습니다.
중국인의 역사 기록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소호족의 거하던 곳은 중국대륙의 동해 바깥쪽에 있었는데, 바로 요동반도였으며, 거기서 들어와서 산동반도(山東半島)에 거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시대까지만 해도 요동반도는 우리 땅이었습니다.
요동반도(랴오둥 반도,중국어 간체: 辽东半岛, 정체: 遼東半島)의 위치
▲ 고구려 때 요동반도의 전략 거점이었던 비사성 망루모습. 중국은 대흑산산성 점장대라 부르고 있다. |
요동에 거하던 동방족들이 중국인들을 도와 주다가 도와 주다가 끝이 없으니까, "에라, 안되겠다. 아예 중국에 들어가서 살면서 도와주자" 하고 산동반도로 들어가 살면서 돕게 된 것입니다. 그 산동반도 지역이 완전히 코리아타운으로 화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소호는 동쪽의 해 돋는 곳 (해가 돋을 때 동쪽 하늘이 금빛으로 물들지요?) 금빛 하늘에서 왔다하는 의미에서 쇠 금(金)자 하늘 천(天)자로 금천(金天)씨가 된 것입니다.
"금천(金天) 땅에서 왔다"고 해서 이들은 금천(金天)이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들은 중국으로 파견된 동방족 출신의 엘리트 지도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고대 한국인들은 중국인들이 요를 중심으로 새 땅을 개척하기 위해 떠날 때 그들을 돕기 위해 산동반도로 많이 따라갔던 것입니다.
아직 자립이 안 되고 기술도 부족하고 홍수가 나면 대책이 없었거든요. 그 모든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가서 도왔던 것입니다.
요의 대를 이어 지도자가 된 순을 도와줬던 사람은 '부루(夫婁)'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루(夫婁)는 한국의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는 단군(檀君)의 아들이었고, 이 부루(夫婁)가 금천(金天)씨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금천(金天)씨란 특정한 혈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을 통틀어 코리언(Korean)이라 하듯, 그 당시에 금천(金天)씨라 부른 것입니다.
산동반도에 파견된 소호 금천씨와 자손들은 모두 중국남방의 형제들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양육한 하나님의 파수꾼들이었던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우리나라 명성황후 시절에 한반도에 들어와 복음을 전하던 선교사님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의료인으로, 혹은 기술자로 들어와서 병원도 짓고 기술도 가르치고 학교도 세우면서 신앙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라 김유신 장군의 비석과 삼국사기 열전에 의하면, "김유신은 헌원의 후예이고 소호 금천씨의 자손인데, 그는 가야 왕의 후손이므로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성도 그의 동성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헌원입니다.
이 헌원은 한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지, 이 이름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후난, 즉 셈의 자손인 앗수르 가문의 족보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라는 유적으로 보나 삼국사기로 보나 성경으로 보나 엘람 형님, 제사장 형님을 도와 행정과 정치, 경제, 군사 업무를 장악하고 있던 셈의 둘째 아들 집안인 정통 기마민족인 것이 가장 유력합니다.
즉, 소호 금천씨는 니므롯에 의해 밀려난 앗수르의 헌원의 직계자손이며 셈과 야벳과 함의 일부 형제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 동방을 찾아서 대장정을 감행한 주도세력이었던 것입니다.
왼쪽의 지도를 보시면, 요동반도에 거하면서 중국인들을 도와주다가 아예 산동반도 근처로 들어와서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고대 한국인들이었던 금천(金天)씨들이고, 그들이 신령한 장소로 지정해서 (아마 아라랏산을 형상화했겠지요) 정한 곳이 바로 태산이라는 지역입니다.
지금도 중국사람들이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기는 곳이 바로 여기 태산이고, 중국 역사에 의하면 금천씨들, 즉 동방족들이 살던 곳이 바로 태산 지역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태산 바로 옆이 곡부입니다.
곡부는 무엇으로 유명합니까?
중국 정신사에 매우 중요한 공자가 바로 곡부에서 태어난 사람이며 그가 동방족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자는 기원전 500년경 사람입니다. 그 조상은 기원전 2000여년경에 여기 와서 살았고, 그 이후 공자가 태어난 것이지요. 그래서 중국의 문화도, 종교도, 정신세계도 거의 다 동방족이 이루었다는 사실을 중국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오히려 근래에 이르기까지 사대주의에 빠져서 "황공하옵게도 우리가 어찌 대국인 중국을 가르쳤습니까? 우리가 중국에서부터 배워 온 것이지요." 하면서 그 모든 것을 숨기고, 지우고, 왜곡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중국의 역사책까지 쫓아 가서 지울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중국의 역사책에는 이 대부분의 내용들이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아랫쪽 그림은 태산의 정상인데요, 태산의 정상은 완전히 성전(聖殿)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태산의 정상에는 천상신(天上神), 곧 하늘 황제인 상제(上帝)신의 성전(聖殿)이 지어져 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허물어지고 새로 세워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원래의 모습이 아니고 불교식, 유교식으로 건물모양이 변화되어 세워지게 되었을 뿐이지, '천상신부'라 하여 상제신을 섬기던 정신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맞은편을 보면, 상제신을 섬기던 제사장 소호 금천(金天)씨의 무덤이 있습니다(아래 오른 쪽). 소호 금천씨 무덤에는 그 아래의 그림과 같이 금천씨 상이 있습니다. 금천(金天)씨가 금(金)씨, 금(金)씨가 김(金)씨가 되어 현재 우리나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성(姓)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중국의 고대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은 전설적인 다섯 왕이 있습니다.
황제, 전욱, 제곡 그리고 요 임금, 순 임금입니다.
이미 순임금 시절에 상제(上帝)신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공자의 서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가 기원전 2230년경입니다.
바벨탑 사건이 기원전 2247년경이니까 바벨탑 사건이 터지고 17년 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리고 황제, 전욱, 제곡은 중국인들의 조상이지만, 메소포타미아에 살던 중국인의 조상이고, 이후 동방으로 오면서 엘람과 앗수르 가문과 함께 동행했던 중국인의 조상은 아마도 요임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임금이 아사달에서부터 중국인들을 인솔하여 중원대륙으로 들어갔고, 순임금 때 중원에 자리를 잡아서 안심하고 제사를 지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순임금 다음으로 왕조가 들어섰는데, 하나라, 은나라, 그 다음에 주나라, 그 다음에는 진시황이 통일국가를 세운 진나라,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나라, 수나라, 당, 송, 원, 명, 청나라 순으로 내려갑니다.
결국은 전설적인 왕 다음에 실질적인 중국의 왕들은 바벨탑 사건 이후부터 시작되어 요임금, 순임금 시대, 그리고 그 후 하-은-주, 진, 한-수-당-송-원-명-청 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중국의 간단한 역사입니다.
그러면 고대 중국에 끼친 한국의 역할을 알기 위해서 몇 가지 기록을 읽어보겠습니다.
서전 호서에 기록된 것을 보시면, 순의 제자 우(禹)는 장가를 잘 가서 출세한 사람입니다.
어디로 장가를 갔는가 하면 동방족의 도산국 여자와 결혼하였으며, 그 처갓집이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서 처가의 도움으로 황하의 홍수를 해결하여 명성을 얻고 순임금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역대 신선통감 제 3권에 보시면 앞의 글과 연결이 됩니다.
순의 제자 우는 형산에서 창수사자(蒼水使者)로부터 금간옥첩(金簡玉牒)이라는 비결책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 금간옥첩(金簡玉牒)이 최초의 토목공학 원서가 되겠지요.
창수사자(蒼水使者)란 누구인가에 대해 세종실록지리지 평양부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는 도산(塗山)회의에 참석한 부루(夫婁)로부터 금간옥첩(金簡玉牒)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창수사자란 동방족 출신의 지도자로 단군의 아들인 부루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가의 도움이라는 것은, 중국인 우의 처가는 한국의 왕족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는 코카시안(Cocasian)의 얼굴을 가졌던 중국인들이 자꾸 한국인 얼굴처럼 변한 것입니다. 그러나 말과 문화와 의자생활과 볶고 튀겨 먹는 문화는 그대로 남아서 지금의 중국의 모습이 된 것입니다.
또 우(禹)는 동방의 지도자를 방문하여 가르침을 받고 중국의 역법과 절기를 모두 동방의 것에 맞추었다고 중국의 정사인 사마천 사기 오제본기 (史記 五帝本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요, 순, 우 로 이어지면서 한번도 세습을 하지 않고 능력위주로 왕의 자리를 이었는데, 우는 자신의 아들 계에게 자리를 물려주어서 이 세습된 지도체계는 곧 반발에 부딪혀서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그때 설의 아들인 탕이 강력한 지도체계를 확립하고 대륙의 질서를 바로 잡았는데, 이 탕은 곧 산동반도에 들어와 있던 동방족 출신의 지도세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탕의 시대로부터 동방족이 직접 중국대륙을 치리 하였는데, 이렇게 한국인이 통치하던 시기가 바로 하-은 시대입니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섬기던 신은 샹따이 로서 히브리인이 섬기던 하나님 엘 샤다이 와 발음도 뜻도 같다는 것을 고대 중국인들의 국경제사문 (國境祭祀文)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극히 오래 전 태초에 공허하고 흑암의 큰 혼돈이 있었사옵니다. 다섯 행 성은 아직 운행되지 않았었고 태양도 달도 빛을 발하지 않았었습니다. 거룩 하신 신 상제(上帝)께서 이곳에 모든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주께서 모든 만 물을 만드셨사옵니다. 그리고 사람을 지으셨사옵니다. 당신의 능력으로 모든 만물이 지음을 받았사옵니다."
위의 국경제사문(國境祭祀文)과 기독교인이 믿는 경전인 성경(聖經) 창세기(創世記) 1장의 내용과 비교해 볼까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 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리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 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 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장 1절-27절)
상제(上帝)를 창조(創造)의 신(神)으로 묘사함으로서, 국경제사문(國境祭祀文) 의 내용과 창세기(創世記) 내용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국경제사문 (國境祭祀文)을 보시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생물들이 당신의 뜻으로 말미암았나이다. 上帝시여, 인간도 만물도 모 두가 당신의 사랑으로 이 낙원에 살게 되었나이다. 모든 생명체가 당신의 선 하심으로 지음 받았사오니, 그 축복은 당신으로 말미암음이옵니다. 오 주시 여, 당신만이 이 모든 만물의 참 어버이가 되시옵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에도 기독교 이외에는 이런 기도문이 없습니다. 제사문이라 는 것이 결국 신(神)에게 드리는 기도문(祈禱文)인데, 바벨탑 사건이후 하나 님을 기억하던 백성들이 동방으로 이주해온 후 하나님을 기억하며 드렸던 기도문으로 생각됩니다.
공자(孔子)의 중용(中庸)에 보면 제사란 무엇인가가 기록되어 있는데, "하늘과 땅에 드리는 모든 제사를 통해 사람이 상제(上帝)를 섬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의 공자(孔子)는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하고 있지만, 가짜 공자가 판을 치면서 진짜 상제(上帝)인 하나님에 대한 소식이 들어 왔을 때 얼마나 핍박을 주었습니까?
그래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것처럼, 어용학자들이 만든 가짜 공자가 죽고 상제를 섬기는 진짜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잘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직접 한국인이 통치하는 하나라 은나라(夏-殷시대)가 지속되다가 14대째 지도자인 한국인 주(紂)가 난폭하여 중국인인 주(周)의 서백창(西佰昌)에게 쫒겨나고 주(周)나라가 통치하였습니다.
그 후로 얼마가지 않아 또 여러 나라로 갈려 혼란이 거듭되다가, 마침내 중국최초의 황제인 시황제(오른 쪽)가 나타나서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하고 진(秦)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 지역과 장사를 하여 수많은 돈을 번 장사꾼 여불위가 제국을 세우고자 하는 뜻을 가졌는데, 이를 알고 그의 아들 여정이 아버지를 제거하고 통일제국을 이룬 것이 시황제의 진나라입니다. 그래서 이 진(秦)나라는 서구사회에 중국이 알려진 최초의 나라가 되어서 지나(秦) - 차이나 가 된 것입니다.
장사꾼 여불위의 혈통인 진시황제 정(政)은 바벨론의 악한 문화를 받아들여서 그때까지 받들던 선한 천사의 상징 봉도등(鳳圖騰)을 포기하고 용을 황제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깃발도 용도등(龍圖騰)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과의 결별을 선언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백성들과 학자들이 종교의 자유를 달라, 민주화를 하라 외치니까 큰 압제를 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진시황은 산동(山東) 곡부(曲埠) 출신 공자(孔子)가 하늘의 도리를 가르치고자 지은 많은 책들을 모두 불사르고 가르치는 학자들을 생매장하여 죽인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입니다.
왼쪽 그림은 공자의 집 벽 곧 노벽(魯壁)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아무리 공자의 제자를 생매장하고 그 책을 다 불태웠어도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의 집 벽안에 숨겨 놓은 책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공자의 집이 많이 허물어지면서 그 벽 속에서 공자의 책들이 발견되게 되었습니다.
옛날 책들은 오른 쪽 아래 그림과 같이 대나무 쪽에 기록해서 서로 연결하여 보관하였습니다.
이 책이 발견되면서 공자의 뜻이 잠시 빛났건만 그 당시 정권인 한나라의 어용 정치학자들이 임금에게 해로운 말은 빼고 필요한 말로 바꾸어서 원본은 숨기고 금문학파라고 해서 어용 유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왼쪽 아래는 공자의 집에 남아 있던 우물입니다.
이제 진시황은 아사달과의 사이에 만리장성(萬里長城, 아래 그림)을 쌓음으로서 동방족 사람들이 만리장성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여 종교의 자유운동을 완전히 잠재우므로 써 중국은 하나님과의 그리고 동방과의 결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대 한민족의 신앙과 번영
왼쪽 사진은 환웅천강도라는 중국에서 발견된 그림입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단군신화를 중국인마저도 그대로 믿고 그려놓은 것이지요.
동방에 정착한 셈계의 장자의 백성들은 땅에 충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사달의 넓은 들판과 한반도에 퍼져 나가며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았으나 임금을 세우지 아니하고 그들에게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신앙이 대상이었습니다.
그것은 규원사화 단군기라는 고대 역사책에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신으로 가장 높은 으뜸 자리에 계시며 천지를 창조하고 전 세계를 주관하고, 수 없이 많은 사물을 만드시니 넓고 넓게 둘러싸므로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고, 아주 밝고 밝아 작은 티끌하나 새지 않도록 하시었다"
이 단군기에 보는 바와 같이 우리민족의 신에 대한 정의가 확실히 보여지고 있습니다.
유일신이요, 창조의 신이요, 빛과 같이 밝은 신이다.
더 이상 논의할 것이 없을 정도로 유대인의 야훼 하나님하고 정의가 똑 같습니다.
또한 고대 한국인들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겼다는 사실이 고조선의 역사학자였던 신지(臣智)의 역사책 삼일신고(三一神誥)에 나타나 있습니다.
"체일용삼(體一用三)이요 삼신일체(三神一體)요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
이렇게 쓰여 있는데, 이것은 몸은 하나인데 활동만 창조의 신, 구원의 신, 역사의 신 이런 식으로 활동만 셋으로 한다.
그리고 이 세 신은 사실은 하나이다.
이 셋이 모이면 하나이다. 이런 뜻입니다.
오늘날의 삼위일체 이론하고 완전히 똑같습니다.
그 까마득한 고대의 우리 조상들이 어찌하여 기독교의 신학에서도 가장 어려운 삼위일체 신학을 정통으로 꿰뚫었을까요?
그것은 원래 우리 민족의 집안이 셈의 제사장 집안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학자인 윤내헌 교수의 고조선사 연구에 보면 "이는 3.1 사상 또는 삼위일체 사상이라고 하는데 그 후에 한민족 사상의 주요한 요소를 형성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흑백논리도 아니고, 있다 없다도 아닌, 항상 세 개의 요소로 설명하고자 하는 의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임금일지라도 항상 나무로 된 집을 짓고 살았고, 돌로 된 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 땅은 나그네와 같은 삶이고 돌아갈 집이 저 세상에 있다는 나그네 정신이 투철했기 때문입니다.
이 나그네 정신과, 훗날에는 구원, 천국, 낙원이 올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복음의 전파가 없었을 때에도 자생적으로 메시아 신앙이 생겨나게 되었고, 옛날부터 지금까지 가지고 오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어떤 때는 미륵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정도령으로 표현되기도 하였지만, 사상 자체는 메시아를 갈망하는 사상이 우리 민족의 고유의 사상이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고대 한국인이 지켜 오던 법으로서 팔조(八條)의 금법(禁法)은 유대인들의 십계명과 매우 유사합니다.
오히려 열 개로 늘려 있는 것을 십계명의 뜻은 다 들어 있는 일곱 가지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여덟 번째 계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너희는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만을 섬기라.
- 너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생명있는 것을 사랑하라.
-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보내신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 서로 시기하지 말며 간음하지 말라.
-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도둑당한 집의 노비로 삼는다
- 남을 상해한 자는 곡물로서 갚아야한다.
- 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또한 고대 한국인들은 수천 년 동안 왕을 세우지 않고 신정일치의 전통을 잘 이어왔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사무엘이 그토록 원했던, 하나님이 그토록 원했던 그 사상을 고대 한국인들은 오래도록 잘 지켜 온 것입니다.
즉 천군(天君)이라는 제사장의 인도 하에 신정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리고 도읍의 이름도 신시(神市), 즉, 하나님의 도시, 하나님의 마을로 불렀던 것입니다.
나라를 세운 목적도 특정인의 이익이나 특정 종교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은 놀랍게도 '홍익인간(弘益人間)' 즉, 널리 사람 사회에 유익을 끼친다,
모든 인류에게 봉사한다는 뜻의 '이타주의 사상', '박애(博愛)사상', 즉 기독교로 볼 때 '아가페 사상'을 구현하기 위해서 나라를 세웠던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위해 세워진 나라는 우리나라 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 곳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단군(檀君)이 나라를 이끌어 왔는데요, 단군은 어떤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직책의 이름이었습니다.
단군(檀君)이란 신단수(神檀樹)라는 거룩한 나무 밑에서 제사를 인도하던 신정일치 사회에서의 천군(天君)을 뜻합니다.
즉 미스터 헤븐(Mr. Heaven)이지요.
생명나무(生命樹), 즉, 신단수(神檀樹) 아래에서 거룩한 제사를 지내던 천군(天君)을 줄여서 단군(檀君)이라고 한 것입니다.
고대 유대인들도 신이 정한 성역인 에덴동산 중앙에 서 있던 나무아래에서 신에게 경배하였는데요, 우리 민족도 신이 임하셔서 여러 가지를 듣고 지도하던 나무, 즉, 신단수(神檀樹)도 생명나무(生命樹)와 같은 개념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동방으로 이주한 우리민족은 하나님의 규례대로 장자권자(長子權者)가 백성을 보살피는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대제국(大帝國)을 형성하였건만 아무도 영웅호걸을 숭상하지 않고 대제국이라는 이름을 절대로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 기록도 남지 않아 그 대제국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우리민족을 격하시키기 위해 오랑캐라는 뜻의 동이족(東夷族)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글자 속에 큰 활이 들어가 있습니다.
동방에 있는 활을 잘 쏘는 나라라는 뜻이지요.
지금도 올림픽에서 활 쏘는 종목은 항상 금메달을 따오지요.
그것은 과거부터 우리민족에 그러한 소질이, 유전자가 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동방족(東方族)이라 불리는 고대 한민족의 여러 나라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동쪽으로 이주한 한 형제요 공동체의 나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평화와 우애로 살았기 때문에 전쟁이 있을 이유가 없고 자기 자랑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바빌로니아다, 앗시리아다, 징기스칸이다 하며 자기 이름을 남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러한 지식의 부족으로 일부 학자들에 의해 약하고 부족한 민족으로 평가절하 되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평화를 사랑한 우리 조상들은 흰옷을 즐겨 입어서 '백의민족(白衣民族)' 이라고 불려 졌으며, 큰 자는 작은 자를 섬기고, 작은 자는 큰 자를 공경하여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고대사를 기록한 역사서 중의 하나인 회남자(淮南子)는 이 동방에 있는 장자권의 나라, 곧 엘람과 앗수르의 나라를 군자의 나라라고 기록했던 것입니다.
회남자 대형훈(淮南子 隊形訓)을 한번 읽어보시겠습니까?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으니 동방의 덕목이 어진 고로 군자의 나라가 있다 하느니라."
'중국의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중국의 정치가 혼란에 이르면 동방에 가서 배워 오라.'
'중국의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중국의 정치가 혼란에 이르면 동방에 가서 배워 오라.'
이것이 고대 중국사람들이 오랫동안 진심으로 의존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21세기의 중국인들이 오늘날의 한국인들을 회남자(淮南子)의 이 말대로 보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지 않을까요?
"동방에 돈 독(毒)이 오른 나라가 있으니... 돈 독(毒) 의 나라라 하느니라."
한류열풍도 돈과 관련하여 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섬김과 사랑으로 이웃나라를 도와서 고대에 빛나던 한민족의 이름을 다시금 높여야 할 것입니다.
오른 쪽 그림은 고인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고인돌에 대해서는 무덤이다 제단이다 여러 가지 학설이 많습니다마는 원래는 제단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제단을 지키던 원로가 돌아가시니까 평생 정들었던 고인돌 밑에 묻어드리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제사보다는 형식만 남아가지고 조상 제사 드리는 무덤으로만 인식 되어 버린 것입니다.
고인돌은 대단히 큽니다. 어떤 것은 상판의 길이가 10m, 폭이 4m 되는 것도 있습니다. 엄청나게 큰 제단, 거대한 돌 강대상입니다.
그래서 그 위에 제물을 올려놓고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고인돌은 'Dolmen'으로 불리운다. 이것은 우리말의 '돌멩이' 바로 그것이다)
전 세계에 고인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 세계 고인돌의 50퍼센트가 한반도와 만주 땅에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 민족이 거의 대부분이 성직자 집안이었다, 곧, 전 세계 강대상의 50퍼센트가 우리나라에 있었으니, 우리는 제사장 집안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종교적인 민족이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세운 고조선의 영역을 지도로 나타내면 왼쪽 그림과 같습니다. 동방족들은 아리라, 곧 지금의 송화강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흩어져 살면서 서로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따라온 중국인들, 곧 야벳 족속들은 중원대륙으로 내려갔을 때, 기술, 종교, 문화적으로 그 능력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에, 동방족 형님들에게 계속적으로 도움을 청하게 되었으며, 동방족들은 중국인들을 계속해서 도와주다가 그중의 일부는 아예 산동반도에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산동반도와 중국의 동해안에 걸쳐 동이족들이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중국인들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역사기록을 토대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동방족들은 이 일대를 중심으로 해상왕국을 만들게 됩니다.
훗날 장보고 시절에도 이 지도가 그대로 복원됩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이주해온 경로를 잘 알기 때문에 심지어는 수메르의 잔재로 남아있던 나라, 비록 니므롯의 나라가 되어 버렸고 바벨론의 나라가 되어 버렸지만, 그 추억을 더듬어서 고대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들이 도로 찾아가는데, 그 당시 역사기록을 보면 중동에 '수밀이국'이라는 나라가 있어서 '수밀이국'과 교통하였으며, 무슨 왕 몇 월 며칠에 '수밀이국' 사람 몇명이 찾아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수메르는 망했고, 이미 나라 이름이 바뀌었지만, 과거의 기억을 통해 여전히 수메르라고 불렀으며, 한자로 표현하다 보니 '수밀이'가 된 것입니다.
오른 쪽 그림은 수메르국 여인의 장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래 왼쪽 그림은 수메르 땅의 제국인 페르시아, 곧 성경의 '파사'지역에 남아있는 벽화입니다.
이 벽화에 보면 외국사신들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인데요, 제일 오른쪽에 보시면 긴 도포를 입고 머리에 깃털 장식을 하고 당당하게 칼을 차고 있는 이 청년은 바로 한국 (고구려나 신라)에서온 청년입니다.
그래서 고구려와 신라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여러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를 나누었음을 이 벽화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래 오른 쪽 그림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에 남아있는 사신들의 행렬도 벽화입니다. 전 세계의 사신들이 페르시아 (파사)의 왕에게 알현하면서 선물과 조공을 바치는 모습이지요.
그런데 이 많은 사신 중에 몇몇 사람들은 까마득한 땅 끝, 동방에서부터 온 동방족 사신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한민족의 이동 원인과 이동 경로
바벨탑 사건 때 말이 갈리면서 온 지면에 흩으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우리나라 사람들도 말이 갈리면서 극동까지 온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성경 외에는 어디에도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해 말해주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왼쪽 그림은 바벨탑과 유사한 지구라트의 모양입니다.
그럼, 한민족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머나먼 극동(極東), 영어로 'Far East' 라고 하는 한반도까지 왜 왔을까? 에 대한 원인과, 어느 길로 왔을까? 하는 이동경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밑에 그림은 알타이어의 발원지인 터키의 아라랏산이고,
오른 쪽 아래 그림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백두산 천지입니다.
아라랏산에서 천지까지 머나먼 길을 우리조상들은 왜 이주해 왔을까요?
그리고 어떤 경로로 이동했을까요?
거기에 대한 해답은 세상 어디를 가도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바벨탑 사건 때 말이 갈리면서 온 지면에 흩으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우리나라 사람들도 말이 갈리면서 극동까지 온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성경 외에는 어디에도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해 말해주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왼쪽 그림은 바벨탑과 유사한 지구라트의 모양입니다.
성경의 이야기와 여러 가지 증거들을 모아서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스의 아들 니므롯이 무력으로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많은 민족을 압제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자권자(長子權子)였지만 장자권(長子權) 수호에 실패한 셈의 첫째 아들 엘람 가문과 둘째아들 앗수르 가문 등은 함의 손자요 구스의 아들인 니므롯의 통치 하에서 시달리다가 바벨탑 사건이 터지자 동방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들은 이후 성경에서는 그 이름을 찾을 수가 없게 됩니다. 바벨탑 사건이후에 큰 회개운동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장자권 (長子權)을 잃게 된 것을 통탄해 하면서 이제야말로 신앙적으로 바로 살아보자는 굳은 의지로 빛 되신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동방(東方)을 향해 대장정을 떠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빛 되신 하나님께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땅 그곳이 바로 극동(極東), 'Far East' 인 것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백두산 천지의 일출광경입니다. 그리고 노아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약속하실 때 무지개가 나타났습니다.
몽골 사람들이 한국을 쏠롱고스(무지개의 나라)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무지개가 동방(東方)에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셈족들이 빛 되신 하나님과 더 가까이 하고자 약속의 땅(무지개 땅), 빛의 땅 동방으로 이동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잠깐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족보를 잠시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창세기 10장 21절에 보시면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다'라고 해서 셈족 자손 중에서는 에벨이 가장 유명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셈을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거꾸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지요.
셈이 여러 아들을 낳았는데, 성경에는 셈의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 그리고 그 이후의 자손들을 거쳐 데라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하듯이 셋째 아들의 족보가 나와 있습니다.
이상하지요.
장자권자가 가장 중요한데요.
맏아들 엘람과 둘째아들 앗수르라는 가문은 사라져 버린 것이지요.
그 이유는, 아우에게 능욕을 당하고 있던 정통 장자권자들이 바벨탑 사건을 계기로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자 이번에야말로 신앙적으로 바로 살아보자 하는 신앙각성으로 동방으로 떠나 버렸기 때문에 성경에는 사라져 버렸고, 셋째 아들 가문만이 남아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오시게 되는 히브리인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히브리인이라는 이름은 에벨이라는 이름에서 왔습니다. 에벨이라는 이름은 구약성경에서는 에벨이라고 되어 있지만, 신약성경에서는 헤버라고 되어 있습니다.
헤버는 헤벌로서 이것이 바로 히브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잘 모르던 시절에 일부 신학자들이 히브리라는 말은 이집트의 노예인 하피루에서 왔다고 주장하였지만, 사실은 에벨에서 온 말인 것입니다.
셈의 정통 장자권자들이 빛을 찾아 동방으로 떠났을 때 "셈의 장막에 거하면 복을 받으리라" 던 노아의 명령을 따라 야벳의 일부 후예들이 셈족을 따라 나섰고, 이들은 그 후에 중국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함의 맏아들 구스 가문의 일부도 셈족을 따랐는데, 이들은 인도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 예로서 중국인의 고대 지도자들의 미이라가 발견되었는데요, KBS 특집에도 나왔었지요. 중국인들의 조상의 골격은 놀랍게도 동양인이 아니라 백인, 즉 코카시안(Cocasian) 의 두개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보고에 의하면 미이라에 머리칼이 붙어 있었는데, 머리카락도 금발이었습니다. 그래서 흑발의 몽골리안을 따라오던 이들이 몽골리안의 아내들을 많이 맞아서 동양적으로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말이나 생활문화는 바뀌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중국말은 영어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의자를 좋아하는 입식(立式)생활을 하는 것도 야벳의 자손임을 알 수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것은 중국의 역사책인 사마천의 사기(史記), 서전 요전(書傳 堯傳)과 같은 역사책에도 증거가 남아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오제본기(史記 五帝本紀)를 보시면 '곡이 진봉의 딸을 취하여 요(堯)를 낳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요(堯)는 요(堯)임금, 순(舜)임금 할 때 요(堯) 임금을 말합니다.
요(堯)의 아버지는 곡이었다고 되어 있는데요, 곡은 성경에도 나옵니다.
이 곡은 야벳의 아들입니다.
마곡이라고 부르지요.
서전 요전(書傳 堯傳)에 보시면 순(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순(舜)의 아버지는 고수였다. 그런데 그 고수는 완고하고 그 어미는 악하며 순(舜)의 아우 상은 교만하였는데, 유독 그 집안에서 순(舜)만이 효로서 화합하고 아름답고 어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堯)의 대를 이어 중국인의 지도자가 된 것이지요.
이 고수도 성경에 나옵니다.
고수는 바로 함의 아들 구스입니다.
셈의 아들인 엘람과 앗수르 중에서 엘람은 성직자적인 분위기였고, 앗수르는 행정, 군사를 담당한 기마민족, 곧 고구려 , 신라까지 연결되는 집안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야벳 가문의 일부와 구스 가문의 일부를 데리고 아라랏 산을 넘어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몽골을 거쳐 만주 땅에 이르는 대장정에 올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명에 우스 라는 이름을 가진, 즉 우스토브, 우스벤스키, 우즈베키스탄 등 의 지역이 대단히 많습니다.
이 우스라는 말의 성경적인 뜻은 천사가 인도해준 땅, 약속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라랏산에서부터 만주까지 오는 길이 너무 머니까 좋은 땅이 나타나면 "아이고 여기가 바로 '우스'다." 하며 의지가 약한 순서대로 주저앉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 가까이에서부터 만주 근처까지 우스 라는 말이 붙은 지명이 대단히 많은 것이지요. 이렇게 중간중간 주저앉을 때 "아니다." 하며 계속 나아가고 "아직도 저렇게 해가 뜨고 있잖니?" 하며 끝까지 나아가서, 마치 월드컵때의 투지와 같이 민족의 이동시에도 16강, 8강, 4강에 드는 민족이 바로 우리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터키의 동쪽 아라랏. 알타이어의 발원지이자, 흑요석의 발원지이고, 오클라의 발원지, 여기서부터 우리 민족이 대장정을 거쳐 중앙아시아 무슨 스땅을 거쳐 몽골리아, 만추리아 그리고 한반도까지 오게 된 경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더 부지런한 사람들이 바다를 거쳐 일본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또 일부의 사람들이 북동쪽까지 가다가 그 당시 빙하기의 영향으로 얼어붙어 있던 베링해협을 건너 알래스카 에스키모가 되었고, 거기서부터 일부는 빙하의 계곡을 따라 캘리포니아 쪽으로, 그리고 미국의 동부 쪽으로 뻗어 가서 오늘날의 아메리카 인디언, 남미의 인디오가 되게 된 것입니다.
셈족을 주축으로 한 일부 야벳과 구스족은 시베리아를 거쳐 바이칼 호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큰 강변의 넓은 땅을 보고, 좌 청룡 우 백호도 아라랏산 근처와 비슷한 곳에 정착하였는데, 이 큰 강을 보니까 수많은 오리, 기러기가 내려앉는 강(오리라, 아리라)이었는데, 이곳이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입니다.
'아리라' 라고 강을 부르게 되었고, 그 강변의 넓은 땅의 이름을 아사달, 즉 우스달, 아스달 하여 약속의 땅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우스달이죠.
아사달이란 말은 한자(漢字)식 표현이고, 우리 조상은 우스달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곳은 지금의 지명의 보면 '하얼빈' 지역입니다.
이곳이 바로 약속의 땅, 빛나는 아침의 땅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이름을 '아침의 나라' 곧 '조선(朝鮮)'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빛나는 아침의 나라, 그것은 바로 고대 우리 조상들이 세운 고조선(古朝鮮)입니다.
그곳을 지도로 보시면 왼쪽 위의 그림과 같습니다. 만주 땅 한가운데 하얼빈 (안중근 의사가 이또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그 장소지요), 이곳이 바로 아사달 지역인 것입니다.
왼쪽 그림은 하얼빈 지역의 넓은 들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로 아사달 땅이고요. 그리고 이곳은 그 이후에도 고조선의 대를 잇는다고 주장하는 아골타가 중국에 금(金) 제국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아골타는 놀랍게도 고려사람 김함보의 자손으로서 한국사람임이 밝혀졌습니다. 즉 아골타는 금(金)씨(김씨의 고대발음)로서, 자신의 성을 따서 나라 이름을 금(金) 나라, 곧 금(金)제국을 지은 것입니다.
이곳에 위의 오른 쪽 그림과 같은 비석이 서 있습니다.
금나라의 수도 상경 회령부 의 유적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처: Peace_maker 예수쟁이]
출처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글쓴이 : 무익한 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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