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성경이 말하는 가난한 자의 정체성은?
성경이 말하는 가난한 자의 정체성은?
“가난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가난한 자에게 선교를....”
“가난한 자와 함께 일을....”
“가난한 자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
요즈음 기사들과 책들마다 가난한 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 보았는가? 그러나 가난이란 단어를 주의 깊게 정의한 것은 별로 없다. 가난한 자에 대해 지극히 일반적인 용법 외에는 달리 설명하고 있지 않다. 가난한 자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졌고, 쉽게 구별되어지고 인식된다고 가정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서의 용법을 생각해 본다면 그 가정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실수로 이 하찮고 단순한 단어에 대해 좀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겨우 부분적으로만 보장된 선교혁신의 문을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에 관한 널리 퍼져 있는 선교적 고찰 1970년대 이후 복음주의적 선교가 가난한 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일찍이 에큐메니칼 신학자들과 선교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패턴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물론 항상 같은 방법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
1. 인간과 같이 되고 인간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선교사의 모델이다.
2. 예수님 사역의 성격은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펴서 다음의 구절을 읽으셨을 때 명백하게 나타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3. 우리의 모델이신 예수님의 사역이 곳곳에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와 눈먼 자와 눌린 자를 섬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선교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된다.
이 독특한 선교 패러다임에는 몇 가지 면에서 의문스러운 점이 있는데 그 중에도 ‘가난’이 근본적으로 아주 궁핍하고, 권리도 없고, 사회의 하층계급을 구성하는 고난 받고, 무력한 사람을 말한다는 가정보다 더 문제시 되는 것은 없다. 한편 만일 그 가정이 옳다면, 이는 가난한 자들은 기독교 선교가 최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할 사람들이며, 가난한 자들은 먼저 기독교 메세지를 복음으로 깨달을 수 있어야 할 사람들이고, 선교 사역이 정당하고 가치 있게 되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 형편을 개선해야 한다는 이론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만일 이 가정이 진실이 아니라면, 이 결론들도 진실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이 가정의 정당성을 알 수 있는가? 오직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없다. 우리는 관련된 성경 본문을 검토(혹은 재검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관심사를 다루는 것을 선호하고 신학적인 토론을 피하려는 일부 복음주의 선교의 오랜 성향과 맞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아마, 이 점에서 신학적이고 주해학적인 연구가 매우 필요하고 실질적이라는 것이 곧 드러날 것이다.
구약에서의 가난한자-이사야 61:1에 대한 특별한 참고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a).
대부분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이사야가 메시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이 누가복음 4:17-19에서 이 메세지를 예수님 자신에게 적용하신 것으로 그들의 견해를 확증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는 이 메시야적 선포에서 이사야가 언급한 가난한 자의 정체성을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이 가난한 자의 정체성을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세 가지 자료를 연구해야 한다: 어휘, 본문/ 문맥, 학자들의 견해.
어휘자료: 히브리 단어 ‘아나윔’ 의 뜻 성령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감동하여 이사야 6:1에서 사용하게 하신 6번 정도 나오는 히브리 단어 중에서 선택한 단어는 아나윔이었다. 이 단어는 정확하게 “가난”으로 번역되나 문자적으로 또는 비유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문자적인 의미로는 현실적으로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비유적인 의미에서는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며 마음이 열린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면 어떤 종류의 사람을 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가?
NIV 번역자들이 아나윔을 그저 “가난”으로 번역하므로 우리가 이 문제를 다루는데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권위있는 번역본의 역자들은 비유적인 의미를 택하여 아나윔을 “온유”로 번역하였고, NASB 번역가들은 애매모호한 영어 단어 “괴로움을 받는 자”로 번역하고 “겸손”이란 단어를 각주에 달았다. 이는 그 중에 하나가 맞든지 아니면 둘 다 가능하다는 뜻이다. 어느 것이 더 낫겠는가?
본문/문맥상의 자료: 이사야 61:1-2에 본문과 문맥이 가리키는 아나윔의 의미 이사야 61장의 문장에서 나오는 어휘들과 사상은 레위기 25장에서 묘사한 옛 희년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한 것 같다. 이스라엘의 가난한 자들의 어려움을 희년 기간 동안 해결하는 확실한 방법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경제적 빈곤을 막고 장래에 소망이 없는 하층 계급의 출현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이럴 경우 아나윔은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 중에 괴로움 당하는 자, 겸손한 자, 의로운 가난한 자를 의미하기 때문에 레위기 25장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문맥과 주제, 본문에서의 사용 언어는 분명히 경제적이고 환경적인 빈곤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사야 시대의 상황은 아주 달랐다. 신정시대는 오래 전에 군주제로 바뀌었다; 앗수르인들은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바벨론은 남 유다를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도구가 되었다. 짧은 시간에 개선될 희망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은 국토와 자유를 잃게 하였다.
이사야의 메세지는 빈곤의 두 가지 면 즉 문자적 그리고 비유적 혹은 영적인 면을 다뤄야만 했다. 책의 통일성에 관한 논쟁에 휘말려들지 않고, 40장에서 66장까지의 본문을 실제 상황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선지자가 이사야서를 기록할 당시는 야훼의 모든 선택한 백성들에게 경제적으로 상황적으로 불우한 시대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해 있던 비참한 상황이 신실한 순종의 필요성을 감하지는 않았다.
잠시 생각해 보자. 포로시절 이스라엘 사람들은 할례, 안식일 성수, 금식 등과 같은 정복자들이 허락한 몇몇 외형적인 종교 의식을 준수 하는 것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교의식을 이행하는 것을 상당히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할례자이건 아니건 간에 안식일을 지키려고 하는 동시에 안식일을 욕되게 하며, 금식을 하면서 동시에 공의와 자비를 저버리는 그와 같은 태도는 야훼를 결코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적 빈곤 상태를 인정하는 것과 회개였다. 그러나 그 분은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것이 이사야 60장과 61장 이전에 보여지는 이사야서의 흐름이다. (사 41:17; 49:13; 51:21; 54:11; 58:1-8) 지금 60장과 61장에서 이사야는 미래를 바라본다. 이 두 장에서 오실 메시야와 그의 왕국이 묘사되고 있다. 메시야는 그의 인성과, 섭리와 선포에서 그 어느 해방자 보다 무한히 위대하실 것이다. 사실상 메시야가 그의 왕국을 세우실 때 현재 상태(이사야 시대)는 바뀔 것이다. 야훼는 그의 백성에게 약속한 언약을 이룰 것이며, 이스라엘은 그의 대적에게 버린바 되지 않을 것이다. 야훼의 기름 부음 받은 자가 그들을 구하러 올 것이며 그의 의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다. 이와 같은 이사야의 메세지를 여기 반항적이고 불신앙적이며 조급한 영혼은 복음으로 듣지 못한다. 그러나 아나윔 즉 현재의 고난과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야훼와 그의 훈계에 마음을 여는 자들에게는 최고의 좋은 소식이 된다. 이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현실에서 아나윔은 자신들에게 정말 필요한 분은 항상 야훼 그 분임을 인식할 수 있는 겸손하고 온유한 자들일 것이다. 그들은 겸손히 그 분의 임재와 약속을 믿을 것이다.
뒷받침하는 자료 : 신임할 만한 몇몇 학자들의 견해 앞에서 진술한 것이 주해학적인 바른 의미를 이루고 있는가? 신약성경으로 돌아가기 전에 저명한 학자들 중 이전에 있었던 한 명의 학자와 현 시대의 몇몇 저명한 학자들의 결론을 고찰해보자. 적어도 그들의 증거는 왜 대다수의 번역자들이 이사야 61:1에 언급한 가난이 성격상 단순한 재정적 빈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온유한 마음인지를 우리가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19세기의 독일의 명석한 히브리어 학자 프랜츠 델리츠에게 가보자. 그는 이사야 61:1에 있는 아나윔을 “고통받는자” (Delitzsch 1954. 424) 로 번역하고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희년의 문자적인 축복들이 이사야서 61장에서 영적인 축복이 된다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복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착고에 채고 압박하는 자들에게 임하고, 비록 징계로 인한 고통이 오래 계속됨으로 힘들어 하지만 이로 인해 내적으로 겸손해진 자들에게 은혜는 임한다. (57:17) (Delitzsch 1954. 427 )
그리고 이 겸손한 “고난당하는 자”와 그들에게 약속된 축복에 관해 말하기를,
‘비록 외형적인 모습에서 보여지지만, 하나님의 선물은 참으로 영적이고 인간의 내면을 생동감 있게 하고 성화시킨다. 이 하나님의 선물은 새 생명의 생기와 힘과 골수와 자극이다.' (Delitzsch 1954. 427)
현대 신학자에게로 돌아가 보면, 데럴 보크(Darrell Bock)은 첫째 구약 성경의 단어 아나윔의 중요성을 우리가 누가복음 4:16-18을 이해하는데 있다고 지적하면서 기록하기를,
구약의 배경은 아나윔을 “경건한 가난”, “고통 받는 자”로 말한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이 높이실 겸손한 자(눅 1:51-53)들과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어놓은 자들이다.(6:20-23)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분이신지 자주 깨달으므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마음을 연 사람들이다. (Bock 1996,136)
이것이 신약에 전수된 본래의 영적 의미다. 사실, 틴데일 성경사전 저작자들은 지적하기를 신약시대 훨씬 이전의 ‘가난’은 구약에서 거의 전문어가 되었다. 그들의 결론은 “가난한 자”들은 겸손하고 겸손한 자들은 경건한 자들이다. (시 10:17; 14:5-6; 슥 3:12-13) (Elwell and Comfort 2001, 1062)
누가복음 4:18에서 특별히 언급된 신약의 가난한 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눅 4:18).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목수 이웃인 예수님이 이사야서 61:1-2 을 자신과 자신의 사역에 적용시키는 것에 분노하였다. 물론 그들도 처음에는 기이히 여겼고, 아마 조금은 받아들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곧 그들은 분노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왜 그런 일이 생겼는가? 그건,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야에게 기대했던 대로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시지 않았다는 단순한 사실에 있는 것 같다. 사실 예수님은 교만한 고향사람들을 가버나움 사람들, 시돈의 과부, 수리아 문둥병자에게 달갑지 않은 비교를 하셨다. 그날 회당에는 상황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별로 없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자는 경건한 가난한 사람들이고, 그분의 설교와 사역은 그러한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다.
좀더 연구해 보자. 첫째,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우리의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눅 4:23). 다른 말로 하면, “네가 말한 것이 이사야 선자자의 말을 이루는 것이면 우리가 들은 대로 네가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여기서도 하라.” 그들의 문제는 무엇인가? 의심과 냉소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 이상인 것을 인정하기에는 너무나 교만하였다.
둘째로, 예수님은 엘리야와 가난한 과부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 고향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잘 알고 또 엘리야를 존경하는 것을 알고 계셨다. 왜 엘리야는 그 많은 이스라엘의 과부들을 놔두고 사렙다에 사는 과부를 찾았는가? 분명히 야훼는 당신의 능력과 긍휼을 보여주시는 기회로서 종교적인 조상과 육체적인 필요 이상의 어떤 것을 찾고 계셨다. 즉, 야훼와 그 분의 자비를 구하는 절박한 사람의 겸손함이다. 야훼는 시돈의 과부에게서 그분이 찾으시는 것을 발견하셨다.
셋째, 예수님은 엘리사와 나아만의 문둥병자를 언급하셨다. 예수님은 또한 고향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고, 엘리사를 존경하는 것도 아셨다. 그런데 왜 엘리사는 수리아의 문둥병자, 특별히 이 사람에게 보내심을 받았는가? 하필이면 둘도 아닌 한 명, 아니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문둥병자에게 보내심을 받지 않았나? 왜냐하면 사실상 이 수리아의 고위 관직자는 선지자가 지시한 대로 더러운 요단강 물에 자신을 씻을 수 있을 만큼 순종적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야훼는 나아만의 가슴으로부터 이스라엘에 있는 문둥병자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그 무엇을 보신 것이고, 바로 그것이 이 수리아인의 지위나 국적이 그의 치료를 막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시지 않으셨다. 즉 하나님은 나아만에게서 자비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찾는 겸손함을 보신 것이다.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왜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으로 듣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난은 이전에 모든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예수님이 보내심을 받은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이것을 좀더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한 번 더 어휘와 본문, 문맥 자료를 간단하게 조사하며 몇몇 관련된 학자들의 결론도 검토할 것이다.
어휘 자료: 헬라어 프토코스(가난)의 의미
신약성경에는 ‘가난’에 관계된 나름대로 각자 의미와 뉘앙스를 가진 단어가 많이 나온다. (Vine 1981; Bauer와 그 외 1979). 누가복음 4:18에서 사용된 단어는 프토코스 (ptochos)다. 고전 헬라어에서 호머부터 그 이후 이 단어는 자선을 구걸할 만큼 소유물이 줄어드는 상태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어떤 것의 결핍을 말하는 데까지 그 의미를 더 확대한다. 문자적으로는 가난해진다는 뜻이고 부자의 반대 개념으로 부족함을 나타낸다. 비유적으로는 영적 가난을 말하며 기독교인의 덕과 영원한 부요에 대한 빈곤을 의미한다.
한편 헬라어 펜티크로스와 페네스는 문자적이며 대부분 환경적인 가난으로 한계가 그어졌다.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신약의 영어 번역 ‘가난’은 헬라어 프토코스 (복수: 프토코이)가 사용된다. 이럴 경우 이 단어의 사용과 관계된 문맥들은 그 의미가 문자적으로 환경적인 가난인가 아니면 비유적인 영적인 가난과 같은 것인가를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연구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대부분 그 의미는 아주 명백할 것이다.
몇몇 본문들은 이 부분에 대해 예증적이고 통찰적이다.
1. 예수님은 그의 사역 초기에 우리가 어떻게 팔복을 이해할 수 있는지 가르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기본적인 성격을 말씀하셨다. 팔복 중 첫 번째 복에서 주님은 포티코이의 가난을 선포하셨다. 이로 보건대 주님께서는 이 단어를 ‘심령의 가난’으로 말씀하신 것이 틀림없다.(마 5:3). 팔복에 관해 누가의 표현(눅 6:20)이 깊이를 나타낸 반면 마태의 표현은 넓이를 나타냈다고 말할 수 있다. (Elwell 과 Comfort 2001, 1062). 그러나 그것이 누가의 요약된 표현에서 추론할 수 있는 환경적인 가난을 넘어선다는 것이 견해이다.
2. 이 비교에 특별히 관련된 흥미로운 구절은 성전 입구에 놓여진 궤에 두 렙돈을 넣은 과부의 사건이다. (눅 21:1-3) 누가가 그 여자를 “가난한 과부”라고 2절에서 말할 때 사용한 단어는 펜티크로스이며 이것은 그 여자의 현실적인 가난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3절에서 그 여자를 칭찬하실 때는 펜티크로스를 사용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프토코스를 사용하심으로써 그 여자의 경제적 상황이 또한 그 여자의 마음과 심령의 상황임을 가리키시는 것 같다.
3. 예수님이 죽으시기 직전에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쉬셨다. 그때 한 여인이 값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마 26:6-13) 제자들은 그 향수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프토코이)에게 줄 수 있었겠다고 불평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한자 (프토코이)는 항상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현존과 죽음, 장사는 일생에 단 한 번 뿐임을 말씀하시면서 그 여자는 향료를 적절한 시기에 사용하였고, 그 불평자들(혹은 우리!)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것을 팔아서 없애는 것 보다 훨씬 귀하게 사용했다고 하셨다. 분명히 이 경우에는 “가난”이 문자적이고 현실적인 빈곤이다.
4.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 요한에게 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쓰라고 지시하셨다. (계 1:17-19) 라오디게아 교회에 쓴 편지는 우리가 토의한 것과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형편을 설명하실 때 프토코스를 사용하셨다.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자신들이 부자이며 부요하여 (우리는 더러운 부요라고 말할 수 있다)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셨다. 영적으로 근시안적인 그들은 자신들이 실제적으로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프토코스)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계 3:17)을 깨닫지 못하였다. 여기서 명백한 것은 비록 그들의 자아 인식(자아 기만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음)이 실제로 잘못된 것만큼 문자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인식은 매우 다르며 그들의 영적 상태를 포함하고 있다. 포티코스는 비유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누가복음 4:18을 보자. 가난한 자에게 들려지는 좋은 소식에 대한 예수님의 선포에서 누가 프토코이 인가? 누가복음과 그 외 다른 복음서에서 나오는 문자적인 가난과 마음과 심령의 가난 상태를 언급하는데 쓰여 지는 단어 프토코스는 어휘적인 증거 하나만으로 결론짓기는 어렵다. 로버트 스테인(Robert Stein)은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누가복음의 ‘가난’의 단어는 경제적인 상태를 말하나 단순히 경제적인 것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가난하고 겸손한 소망이다." (Stein 1992,156) 따라서 본문과 문맥은 누가복음 4:18에 나오는 프토코이를 이해하는데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어휘적인 자료와 반드시 결부되어야 한다.
본문/문맥적 자료 : 본문과 문맥이 가르키는 눅 4:18의 프토코이의 의미 혹자는 생각하기를 만약 정말로 이시야 본문이 여기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히브리어 단어 아나윔을 경건한 가난한 사람, 겸손하고 온유하고 신실한 사람을 가르킨다면 예수님은 아마도 헬라어 프토코이를 같은 방법으로 사용하셨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근접한 본문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가? 다음의 것들을 주의해 보라.
1. 예수님은 그가 이사야서를 읽으시는 중 중요한 지점에서 멈추셨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를 읽으시고 나머지 문장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읽으시지 않은 채 두루마리를 덮으셨다.(눅 4:19; 레 25:10; 사 61:2) 분명히 메시야의 전 사역의 모든 중요한 국면이 여기에서 다 비춰진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언급이 안 되었다. 심판이 언급되지 않은 것에 대해 다양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공의는 올바른 심판이 없이는 예고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며 예수님은 한 남자와 그 이웃을 재판하러 오신 것은 아니었다. (눅 12:14)
2. 청중들이 예수님에게 메시야로서 기대할 수 있는 표적과 가버나움에서 이미 행하셨던 기적을 나타낼 것을 구하였을 때 주님은 그들에게 표적은 아무에게나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보여질 수 있다고 대답하셨다. (눅 4:23-31) 가버나움과 나사렛을 지역상으로 볼 때 나사렛은 가버나움 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낙후되었고,( 확실히 사회적으로 낙후되었다는 뜻임) 따라서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셔야 할 곳은 나사렛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상고한 바와 같이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본문은 말하기를, 나사렛 사람들은 겸손함으로부터 거리가 멀고, 하나님을 의지해야겠다고 깨닫는 경건한 사람들이 아니며 자부심 많고 심지어 거만하기까지 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가버나움에서 이적을 베푸신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는 별로 베푸시지 않으신 것은 당연하다. 사실 예수님의 나사렛 친구들은 예수님이 이미 아시고 계신 명백한 증거가 되는 이적을 요구하였다. 즉 그들은 예수님 자신이나 그의 말씀, 그의 나라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3. 누가복음 4:18에 나오는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를 비유적으로 해석하면서 프토코이를 문자적으로 주석해야 할 어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모두 같은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눈먼 자”는 대체적으로 쉽게 문자적으로나 비유적으로 해석 될 수 있고, “포로된 자”와 “ 눌린 자”는 원칙적으로 비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단어들을 문자적으로만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이 단순히 어떤 혁명적인 이적행위 그 이상의 것이 아닌 것으로 심각하게 제한하게 된다. 비록 열심당원들은 예수님께서 정치범들을 해방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고 기뻐하였지만 말이다.
4. 마지막으로, 이 본문은 프토코이가 어쨌든 사회적인 계급을 포함한다는 견해를 거의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에 있어서 원문에는 번역된 성경에서처럼 정관사가 없다. 자유주의자들은 가끔 여기에 나오는 가난을 마치 사회적인 계급에서 드러나는 빈곤계층으로 주장한다. 이러한 사상은 본문이나 그 문맥상에서 별로 지지를 받을 수 없다.
뒷받침하는 자료: 탁월한 성경 신학자들의 결론. 무엇으로 우리는 누가복음 4;18에 나오는 프토코이의 의미를 결론 내릴 것인가? 우리는 몇 사람의 박식하고 신뢰할 만한 주석학자들의 결론에 주의를 기울임으로 우리의 짐을 내려놓을 것이다.
보크(Bock) p156에 있는 인용문을 보라. 그는 이사야 61:1과 누가복음 4:18에 나오는 가난은 같거나 아주 비슷한 의미를 가졌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경건한 가난”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는 지적하기를 이 사람들은 겸손한 고난자들이며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필요를 인식하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에 마음을 여는 자들이라고 규정짓는다.
하워드 마샬 (Howard Marshall)은 비록 보크가 말한 “경건한 가난”이란 말에 동의하는 것을 주저하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보크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 그는 이 독특한 말이 자신의 겸손과 온유를 강조할 때에 하나님의 칭찬을 얻기 위해 계산된 경건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포함시킬까봐 염려하고 있다.
동시에 먀샬(Marshall)은, 누가복음 7:18-23(Sider 1990,45)에 나오는 이적이 물리적 현상이기 때문에(소경이 눈을 뜨고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았고 귀머거리가 고쳐졌고 죽은 자가 살아남) 누가복음 4:18-19도 같은 것임에 틀림없다고 말하는 로날드 시더와 그 외 다른 사람들의 해석에 더 심각한 이의를 게기한다. 마샬은 그러한 추론이 두 가지 면에서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첫째,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물리적인 이적에 관련해서 그것은 예수님의 메시야적인 설명이지 단순한 예수님의 인간의 필요에 대한 긍휼의 반응이 아니라고 말한다. 두 번째,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여러 이적들과 함께 누가가 “복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전파된다”를 덧붙였다고 언급한다. 이 구절에서 마샬은 누가복음 4:18로 돌아가서 복음이 여기서 언급된 것은 영적인 감각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구원을 선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한다(Marshall 1971,121-123). 그의 결론은 누가복음 4:18에 나오는 단어 프티코이이다.
... 오직 하나님만 치료하실 수 있는 고난 받는 자의 열악한 상태에 주의를 기울인다. 가난한 자들은 이와 같이 그들의 필요를 이 땅의 사람들로부터 채움을 얻을 수 없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이다. 마태가 명확하게 표현했듯이 가난이란 단어의 뜻은 문자적인 빈곤에 한정지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신 사람들은 “영적으로 곤핍한 자”들이다. (Marshall 1971, 123)
한 번 더 틴데일 성경사전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이렇게 읽는다:
그(누가, 편집자 주)가 단순히“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눅 6:20)라고 말할 때 그는 어떤 종류의 궁핍이건 궁핍한 상태에서 주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의미하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주시러 오신 것이다. (마 115; 눅 4:18). (Elwell and Comfort 2001, 1062)
마지막으로, 우리는 저명한 18세기 침례교 신학자인 죤 길(John Gill)의 해석으로 돌아간다. 신약 헬라어의 회상에서 그는 서술하기를,
....이사야서에서 그것은 “온유한 자에게”이다; 이러한 자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고 그들의 영적 빈곤에 민감하고; 그 자신들과 그들의 의로움을 낮고 겸손하게 생각하고 그들과 자신들이 소유한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된 것임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이 세상에서는 가난한 자들이고 지식이 부족한 자들이다. 그들의 타고난 지혜와 지식의 수준은 낮다. 바로 이러한 자들에게 복음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좋은 소식, 은혜, 평안, 용서, 의, 생명과 그리스도의 구원이 전파된다; 이전에 전혀 없었던 권능과 능력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또 이 목적을 위해 주님은 기쁨의 기름으로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기름 부으셨다. (Gill 1999,136)
함축과 결론 우리는 이사야와 예수님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선포하신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영적 빈곤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을 원래 언급하신 것이라고 매우 확신하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증거는 위에서 언급된 짧게 요약한 증거보다 훨씬 그 이상이 되며, 매우 실제적인 어떤 암시가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 선교사들은 육체적인 필요와, 경제적으로 곤핍하고 사회적으로 혜택을 못 받는 사람들을 돌봐야 된다는 책임감에 젖어들 필요가 없게 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위대하신 계명, “모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되 특별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는 바울의 명령(갈 6:10); 미가 6:6-8과 야고보서1:26-27, 2:14-17과 같은 구약과 신약의 추가적인 본문들은 꼭 반대적으로 말한다. 더 나아가, 문자적인 빈곤과 영적인 빈곤은 가끔 우리가 지적했듯이 함께 간다. 종종 환경적으로 가난한 자들은 먼저 그들의 영적인 빈곤을 인식한 후 진리와 은혜의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비록 우리는 남을 도와주는 어떤 구체적인 방식이나 방법을 여기서 말할 수 없지만 모든 유형의 현세적인 필요를 도와주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의무 중 일부라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둘째,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본래의 관심을 따라야 하며 성경적인 선교의 중심은 영적인 필요들을 위하여 하는 것이지 육체적이나 물질적 혹은 사회적 필요들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만약 가난한 자들을 우선적으로, 마음과 심령이 곤핍하고 하나님과 그 분의 은혜를 구하기 위한 겸손한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정의한다면 어떤 다른 종류의 궁핍함도 이것과 동일시 할 필요가 없다. 세속적인 사람과 심지어 동료 신자들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개종시키고 믿음에 대해 신자들을 가르치고 이들을 돌볼 수 있는 교회를 세우는 것을 원래의 목표로 하는 선교사의 노력을 비방하고 판단하더라도 이에 상관없이 이 선교의 목표는 우리의 주재이시며 사명을 주신 주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선교의 중심이 되고, 또 될 것이다.
셋째, 선교사들은 어떤 방법이던 간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이해하고,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찾는데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이다. 선교 역사학자들은 하나님이 일하시기 기뻐하셨던 괄목할 만한 사례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준비가 되어 있고, 심지어 복음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으며,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다. 앞서간 세대의 교회 성장 지도자들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룹의 사람들을 찾아야 하는 중요성에 대해 자주 강조하였다. 이 시대와 모든 시대의 선교사들과 선교 후원자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 마음과 중심에 복음을 감사함으로 기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을 찾기 위해 기도하고 준비하고 계획하며 진행해야 한다.
다비드 헤젤그레이브(David J. Hesselgrave) 번역-유광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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