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종교개혁의 신학적 원리와 성경의 권위
종교개혁의 신학적 원리와 성경의 권위
종교개혁은 한 두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유럽을 바꾸려는 신앙인들의 순교적 운동이었다.
지난 오백 여년이 흐르는 동안에, 서구 유럽에서 시작된 운동으로 "개신교회"가 탄생했고, 전 세계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2010년을 기준으로 볼 때에, 전 세계적으로 4백만 개의 교회가 있고, 3만 8천개의 교단들이 있어서 다양한 사역과 임무를 추진하고 있다.
때로는 너무나 개신교들이 루터파, 칼빈파, 쯔빙글리파, 감리교, 침례교, 메노나이트파 등 나뉘어져 있어서 통제도 안되고 통일성도 없다고 비난하거나 불편해 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그만큼 개신교회에서 다양하게 주장하는 진리의 근거는 사실상 단순하게 성경의 최종 권위라는 공통분모에 근거하고 있다.
중세시대에서 인문주의 학문의 시대를 거쳐서 종교개혁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로마 가톨릭의 스콜라주의가 뒤섞여서 핵심 논쟁으로 등장하였다. 종교개혁은 스콜라주의와 서로 기독교 진리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의 핵심 교리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함께, 칭의 교리와 대속의 교리, 구원론과 교회론을 "오직 성경으로만" (sola scriptura), "오직 은총으로만"(sola gratia), "오직 믿음으로만" (sola fide)만에 집약해서 다시 세워나갔다. 그리고 차츰 종교개혁의 신학사상이 확실하게 정착되면서, "오직 그리스도로만"(solus Christus)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soli Deo gloria)라는 조항들이 더욱 강조되어졌다.
초기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도 이들 두가지 강조가 들어있는 것은 분명하다.
1. 종교개혁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정치투쟁이나 사회적 혁명이 아니라 성경적인 신학사상을 펴낸 것이다. 루터가 처음에 논쟁을 했던 면죄부와 칭의 교리에 관한 것들은 성경 원문을 연구하여 대학과 교회 곳곳에서 강의하면서 기독교 진리체계로 제기한 것들이다. 중세말기에는 스콜라주의와 기독교 인문주의가 겹쳐져서 교회와 대학에서 지성사회를 이끌고 있었는데, 여기에 종교개혁자들의 성경적인 신학사상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기독교 진리의 최종 근거로 성경의 최고 권위(sola scriptura)를 강조하였다. 16세기는 여러 사상들과 운동들이 복합적으로 중첩되던 시기였는데, 중세 말기 스콜라주의와 르네상스 인문주의, 수도원 중심의 금욕주의, 대학의 발전으로 인한 지성적 학문운동, 교황의 권위에 대립하는 민족적인 정치의식 등이 긴장 속에서 상호관련을 맺고 있었다. 혼돈의 시대에 돌파구를 열었던 종교개혁자들이 새롭게 제기한 기독교 신학사상의 변화는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적 신학사상이 사회 전체를 바꾸는데 크게 기여한 것이 바로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이다. 개혁주의자들에 제시한 성경적 신학사상이 유럽 사회를 전체적으로 바꾸어 놓게 되었다.
지금도 세계 기독교 교회에서 열심히 증거하고, 신학을 연구하고 배우는 것들은 모두 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에 연계되어져 있다. 현대 기독교 신자들에게 중요한 진리로 각인되어지고, 가슴에 되새기는 것들은 모두 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에서 터득한 것을 계승한 것이다.
인류 역사를 바꾸어 놓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나 운동이라 하더라도, 결코 진공상태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교회가 기반으로 삼고 있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유산과 교훈들은 모두 다 성경을 터득하고 배운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가졌던 신학사상, 교리적 가르침들, 중심적인 교훈들은 모두 다 성경에 근거한 토론과 탐구에 근거한 것임에 주목해야만 한다.
종교개혁의 심장에 있었던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 이라는 교훈을 다시금 되새겨야만 할 때이다.
먼저는 인문주의 언어학자들이 성경의 바른 해석을 위해서 스콜라주의와 논쟁을 시작하였고, 이것을 계승한 종교개혁자들이 기독교 신학을 새롭게 제시했다.
인문주의자들은 "근본으로 돌아가라"(ad fontes)라는 핵심적인 가르침을 가지고 헬라어 성경본문의 정확한 번역에 집중하였다가, 점차 그 의미와 해석으로 확산하였다. 스위스 연방에 속한 자치주에서는 츠빙글리와 불링거가 인문주의 사상을 계승하여, 성경적인 제도와 윤리적인 사회개혁을 추진하였다. 스위스 동맹이 강화되면서, 쮜리히에서 베른을 거쳐서 마침내 제네바에서 칼빈이 성취했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도시전체를 체계적으로 조직화하고, 교회제도와 예배를 크게 변화시켰다.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은 근본적으로 성경에서 복음을 재발견하여, 당시 로마 가톨릭의 스콜라주의 신학의 오류를 시정하고, 기독교 교리들의 회복을 위한 노력들이었다.
루터는 1529년에 「대교리 문답서」에 십계명 강해, 주기도문 해설, 사도신경에 대한 설명을 담아서 출간하였다. 성경에 무지한 자들이 너무나 많다는 현실을 개선하려고 작심한 결과였다.
개혁자들은 기본적으로 가장 중심적인 교리의 본질에 대해 왜곡된 것을 바로잡으려 했고, 신학적인 주제들을 상세히 밝히고자 노력하면서 성경의 최고 권위에 의한 것임을 확고하게 내세웠고, 로마 교황의 선언이나 종교회의를 통해서 발표한 것들에 대해서는 심각한 오류들을 지적하였다.
정치적 혁명이나 사회개혁 운동이 아니라, 신학사상을 근간으로 기독교 신앙을 갱신하려던 운동이었다.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회복하면서, 사회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에서도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인정한다고 말하였지만, 정작 그들은 교황과 종교회의에 더 의존하였다. 인간의 권위를 더 높이고 있었기에, 루터와 칼빈은 교황이야말로 거짓 교사라고 정면에서 비판하였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딤전 6:3,4)라고 바울 사도는 경고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이 신학적인 교리문제에 집중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던가를 파악해야만 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신앙과 구원에 관한 교훈들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은총과 협력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고,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해야만 하고, 선행으로 표현되야만 칭의를 얻게 된다고 덧붙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다가 각 성도 자신들의 선행을 더해야만 하는데, 마리아와 성자들이 그러했다는 것이다. 마땅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도, 결국 로마 가톨릭에서는 구원이란 행위를 통해서 자격을 갖춘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선행과 공로를 쌓은 인간의 영광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신학사상은 모두 다 성경에서 나온 것들이다. 루터는 성경의 권위와 명료성과 충분성을 확신하였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의 전통이나 스콜라주의 신학에서 벗어나서 성경으로 성경을 풀이하려 시도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인문주의에서 토대를 닦은 후에, 라틴어 번역성경이 아니라, 헬라어와 히브리어 원어성경을 파고 들어가서 새로운 신학사상을 제시할 수 있었다.
2. 인문주의자들의 공헌과 한계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하던 신학적인 사상들은 추상적인 개념을 개발한 것이 아니라, 당시 일반 시민들의 문제와 고통을 해결하려는 대안이자 위로였다. 종교개혁의 신학사상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고민하던 문제들을 다룬 것이고, 일상생활의 고뇌와 아픔을 해결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해답들이다. 믿음에 의한 칭의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강조, 섭리와 예정, 예배와 설교를 중요시하는 것들은 모두 다 생활의 현장에서 일반 성도들이 해답을 찾지 못하고 혼란을 겪던 것들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이 그 시대의 문제를 파악하였다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 중세말기에 확산되었던 인문주의 운동, 폭발적인 예술의 발전과 고전적인 로마 문화에의 자각을 점검해 보고자 한다.
1) 위대한 근원의 재발견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고대 로마 문화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통해서 지나간 로마 제국의 영광을 다시 회복시키려는 움직임에서 나왔다. 오랫동안 무시되어오던 로마 제국의 문명에서 위대한 자각과 존중심을 갖게 되었다. 르네상스 운동은 무너져 버린 고대 로마 도시들의 폐허 속에서 영광스러운 이상과 문명의 자존심을 재건하는 꿈을 가졌다.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시인 페르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는 「시와 승리」에서 고대 로마의 역사와 문화에서 특히 베르길리우스와 리비우스를 음미하면서 놀라움과 두려움과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고전 연구를 중요시하는 기독교 인문주의(Christian humanism)자들로 확산되어지면서, "근원으로 돌아가라"(ad fontes)는 구호에 시인, 문필가, 화가, 건축가, 어학자, 고고학자, 철학자들이 공감했다. 지성적인 기독교 철학, 윤리와 도덕적 갱신운동에서 영향을 받아서 성장한 후에, 중세 로마 스콜라주의를 거부하고 새로운 기독교 신학사상을 정착시켰다. 16세기 북구 유럽의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에 근거한 신학사상을 체계화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배경적인 사상으로는 15세기에 이탈리아로부터 확산되어나간 기독교 인문주의가 있었다.
2) 인문주의자들의 고전연구 확산
인문주의자들은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된 원서들을 읽고서 수사학을 발전시키는 탁월한 어학자들이었다. 그들은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정신을 가지고, 유럽인들에게 익숙했던 라틴어를 넘어서서, 칠백 년 동안 잊혀져 있었던 고전 언어들,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중세말기에는 스콜라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주로 인문주의 철학자, 언어학자들이 대립하였다.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터득한 인문주의 학자들은 성경 원본을 살펴보면서, 라틴어 역본 "불가타" 성경에 근거하는 스콜라주의자들과 성경의 의미와 바른 해석을 놓고서 논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등장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스콜라주의와 논쟁하게 되면서, 고전어와 지성을 추구하던 인문주의 학자들이 영향력이 점차 대학의 중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3) 낙관적 인문주의 철학의 문제점
인문주의자들의 기본철학은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를 근본으로 삼고 확산되었다. 안타깝게도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으로 인한 징벌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사람의 행동윤리를 고치려 했던 인문주의자들과 성경적 신학사상에 집중하던 종교개혁자들의 큰 차이가 드러난다.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운동들에 대한 명칭은 15세기나 16세기 당대 살았던 학자들이 사용된 개념들은 아니고, 훨씬 후대의 사람들이 규정한 용어들이다. 이들 두 운동들은 대학과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중세후기 스콜라주의를 비판하는 입장과 헬라어와 히브리어 원어 성경을 깊이 연구하였다는 면에서는 동일한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인문주의 철학의 확산에 크게 기여를 한 플로렌스의 피코 델라 미란돌라(Giovarni Pico della Mirandola)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연설」 (Oration on the Dignity of Man, 1486)에서 진보를 향한 인간의 자유의지와 가능성에 대한 찬사를 외쳤다. 모든 것에 대해서 인간이 중심이요, 인간의 지적인 성취와 그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찬사였다. 이것은 인간의 실패와 타락한 본성에 대한 성찰을 뒤로 한 채, 긍정적인 인본주의 사상의 확산을 가져왔다.
북유럽 대학에서는 이탈리아로부터 올라오는 인간의 창조적 낙관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르네상스의 영향을 다양하게 경험하였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인간의 개인적인 아름다움과 주체의식을 강조하는 표현을 대담하게 제시하였다. 이탈리에서 유럽 각 지역으로 번져나간 새로운 운동은 각 지역에서 신설된 대학의 확산에서 놀라운 결실을 맺게 되었는데, 기독교 인문주의라는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인재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독일 인문주의는 16세기 초반에 로이힐린(Johannes Reuchlin, 1455-1522), 에라스무스 (Erasmus, 1469-1536)이 개인적으로 혹은 대학교에서 지성적 독일국가주의 이념을 확산시켰다. 그 배경에는 고전어학자 아그리콜라(Rudolf Agricola, 1443/4-85)와 시인 셀티스(Conrad Celtis, 145901508) 등이 큰 영향을 끼쳤다.
스위스 동부지역에서는 비엔나 대학과 바젤 대학교를 중심으로 교회의 윤리와 신자들의 개인 윤리를 갱신하는 방향으로 받아들였다. 오직 성경을 가르치면서도, 츠빙글리는 기독교 철학과 인문주의에 관심을 두었고, 하나님의 약속과 주권적 사역과 루터의 칭의론을 중심으로 하는 구원론 등에 대해서는 관심이 현저히 적었다.
프랑스에서는 법률적 인문주의가 확산되었고, 오를레앙 대학교와 부르쥬 등에서 기룜 부데의 실용적인 법률 연구가 적절한 필요를 충족시켰다. 법률 개혁을 통해서 프랑스 제국의 군주제를 확산하려는 과정에 있었고, 법률체계의 근대화와 보편적 유효성을 제고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르페브르와 베다가 파리 대학교에서 인문주의를 보급하였고, 에라스무스가 이들과 교류하면서 영향을 끼쳤다. 칼빈과 베자, 올레비아누스 등 스위스로 넘어간 프랑스 출신 종교개혁자들은 거의 다 법학을 공부한 후에, 성경을 해석하는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영국 인문주의는 다소 늦게 전개되었는데,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로버트 반즈를 중심으로 루터의 저술이 확산되었고, 영국학자들이 이탈리아에 직접 찾아가서 르네상스의 사상을 계승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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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주기도문을 성도들에게 강의하는 모습. 루카스 크라낙의 그림 |
4) 에라스무스의 도덕철학과 루터의 은총론
라틴어를 사용하면서 유럽 세계 전체에 공통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은 에라스무스가 자신을 세계시민으로 자부하면서 민족주의 사상과 가치를 제거하는 일에 앞장을 섰기 때문이다. 유럽 각지역에서 모국어로 성경이 번역되어지고, 국경선의 개념이 정착되어가면서 민족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가 서서히 등장해 가고 있었다. 에라스무스의 「그리스도인 병사의 핸드북」(Enchiridium militis Christiani, 1503년) 에서 교부들의 저술들과 성경읽기를 제안하였는데, 평신도들의 경건과 새로운 갱신을 주장한 내용이 큰 영향을 끼쳤다.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이 중세 후기 스콜라주의 신학을 거부하는데 있어서 기독교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에라스무스와 루터,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은 결코 합의하지 않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자들 사이에 담겨있는 차이점은 복음, 칭의, 성만찬에서도 확연히 드러났지만,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대한 이해를 놓고서 결국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결별을 통해서 드러났다. 인문주의는 교회의 개혁에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교회의 생활과 윤리에 관한 것이라고 보았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교리가 핵심사상으로 개혁되어야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에라스무스는 처음에는 헬라어 편집성경을 1516년에 출판하였고, 필립 멜랑히톤이 1518년에 비텐베르크에서 교수가 되면서 수사학과 논리학을 강의하였다. 하지만, 처음에는 에라스무스가 루터에게 동정적이었다가, 나중에는 루터를 비판하는 쪽으로 기울어졌고, 결국 갈라서고 말았다. 에라스무스는 교황권을 지지하고 인정할 것이냐 종교개혁자들을 택할 것이냐의 갈림길에서 루터를 비판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루터가 주장한 것들의 거의 대부분에 대해서 에라스무스는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1516년 10월 19일, 스팔라틴에게 보낸 편지에서, 에라스무스가 행위와 공로주의를 지지하고 있어서 사도 바울을 따르지 않는 입장이라고 비판하였다.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죄에 대해서 설명한 것들도 어거스틴의 입장과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에라스무스가 루터를 비판하면서 가장 먼저 거론한 것이 의지의 자유에 관한 것이었다. 루터가 주장하고 있던 칭의교리, 교회 공의회의 권위문제, 믿음, 성례론 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결국 에라스무스는 중세 로마 가톨릭에서 주장하던 인간 의지의 자유함을 옹호하면서 루터를 공격하였다. 루터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거부하는 것은 결국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책임감을 지지 않고 있다고 에라스무스는 비판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책임성을 절감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사람에게 교육이 필요하냐고 공격하였다.
츠빙글리는 비엔나와 바슬레에서 인문주의를 수학하는 동안에, 에라스무스와 만났고, 큰 영향을 받았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기독교철학을 발전시켰는데, 도덕적 윤리적 중생과 개혁에 희망을 가졌다. 에라스무스와 츠빙글리는 제롬과 오리겐에게 큰 영향을 받았고, 어거스틴의 영향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인문주의자들에게는 철학적 신조체계로서 생활과 도덕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다. 에라스무스가 펼쳤던 "그리스도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교회에서의 생활, 삶의 과정에 관한 것들이었다.
같은 종교개혁자들이라 하더라도,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였다는 점에서는 루터와 츠빙글리가 기본적인 공통점이 많지만, 엄밀하게 들여다보면 서로 지향하는 것들에 있어서 차이점도 많았다.
루터는 인문주의 확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교회의 교훈과 교리적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점에 중점을 두었다. 루터가 스콜라주의 신학을 비판할 수 있었던 확신들은 어거스틴의 저술들을 꼼꼼히 읽음으로서 나온 것이다. 루터는 어거스틴의 은혜 교리를 파악하게 되면서, 중세교회의 신학사상이 왜곡되어져 있음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이 헬라어 원어 성경 연구에 공감하였음에도, 왜 서로 지향하는 목표는 달랐을까? 그 이유는 그들이 뿌리를 내린 사상의 근저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나 츠빙글리에게는 어거스틴의 영향력이 발견되지 않는다. 도리어 제롬과 오리겐이 특별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계속)
김재성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