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일천 번제의 진실과 오해
특강: 일천 번제의 진실과 오해
1. 시작하면서
한국교회는 일천 번제도 1등으로 잘 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한국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일천 번제를 안 하거나 못해서 안달이지 진정으로 하길 바라는 속내는 마찬 가지일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목회자나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하는 일천 번제는 성경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까? 아니면 다른 의도는 없을까? 아니면 솔로몬이 드린 일천 번제의 의미나 그 방법에 대해 제대로 알고 일천 번제를 하고 있을까? 라는 의문들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일천 번제의 진실과 오해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성경에 단 한 번만 나온 솔로몬의 일천 번제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하고 있는 일천 번제 헌금은 진실과 오해 두 가지 모두 담겨져 있다. 그 진실을 제대로 알고 개인적으로 일천 번제를 드린 교회가 있는가 하면 역으로 제대로 그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도 솔로몬의 일천 번제를 마치 유치원생이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듯이 일천 번제를 따라 하는 교회도 있다. 여기에서 필자는 후자에 초점을 맞추어 「일천 번제의 진실과 오해」라는 주제로 논하게 된다.
2. 일천 번제의 성경의 근거
일천번제는 열왕기상 3장과 역대하 1장 두 번 나오나 실제적으로는 한 번이다. 왜냐하면 역대하 1장은 열왕기상 3장을 근거로 한편의 역사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천 번제는 솔로몬이 유일하게 드린 헌물이었다.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왕상3:4)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단에 이르러 그 위에 일천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 (대하1:6)
이처럼 일천 번제는 성경적인 근거를 가진 번제이다. 두 구절은 다른 내용이 아니라 같은 내용이다. 그리고 이외에 일천 번제는 성경에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어 이 두 곳이 성경의 근거이다. 혹자는 성경에 한 번 나온 번제라고 해서 일천 번제는 마치 구약 시대에나 했던 헌금이라고 평가 절하하고 있으나 이것 또한 바른 평가는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구약에 나오는 단 한 번의 사례는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에녹과 엘리야처럼 죽지 않고 승천한 사례는 각각 두 번 나오는데 구약에만 나오며, 일천 번제는 단 한 번 나온다. 그래서 성경에 단 한 번 나온다고 해서 섣불리 판단하거나 적용의 범위를 함부로 평가절하 해서도 안 된다. 일천 번제도 이런 유에 속한 사례이다.
3. 일천 번제를 드리게 된 배경
일천 번제에 대해 알려면 먼저 그 배경을 알아야 한다. 솔로몬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듯이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아 낳은 아들이다. 다윗이 밧세바를 강간하여 낳은 아들(하나님께서 이 아들은 죄 값으로 생명을 앗아감) 대신에 솔로몬을 주셨다. 그래서 솔로몬은 다윗에게 특별한 총애(宠爱)를 받았다. 이러한 다윗의 총애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의 이복형인 아도니야가(헤브론에서 난 다윗의 넷째 아들, 학깃의 소생, 삼하3:4)다윗을 이어 왕권을 이양받으려고 계략을 진행하고 있었다.
솔로몬 왕이 일천 번제를 드리게 된 주된 배경은 실상은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는다. 솔로몬은 아도니야에게 왕권을 빼앗길 뻔 했으나 어머니 밧세바가 아도니야가 곧 왕위에 오른다는 소식을 듣고, 죽음을 앞둔 다윗 왕을 직접 찾아가 강청하여 비로소 솔로몬이 이스라엘 3대 왕권을 이어 받게 되었다(왕상 1-2장). 솔로몬은 순식간에 아버지 다윗에 이어 통일 이스라엘의 3대 왕권을 잡게 되었다(왕상 1-2장).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게 된 배경은 자연스런 상황이 아니라 이런 정치적인 특수한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더욱이 솔로몬 왕이 일천 번제를 드릴 때는 성전 건축은 물론이거니와 내각도 구성하기 전이다.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 다음 가장 먼저 했던 것이 일천 번제를 드린 일이였다. 솔로몬은 정상적인 상황에서 일천 번제를 드린 것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 드린 것이 일천 번제의 진짜 배경이다.
4. 일천 번제의 특징
‘일천 번제의 진실과 오해’에서 가장 심도 있게 다룰 주제는 아무래도 일천 번제의 특징일 것이다. 왜냐하면 특징을 알아야 진실과 오해를 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일천 번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솔로몬은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즉위한 직후 스스로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린 것이며(왕상1장-3장), 둘째는 성전을 짓기 전에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으며(왕상3:2), 셋째는 일천 번제는 일천일 동안 드린 것이 아니라 전무후무하게 솔로몬만이 단회적으로 드린 번제이며(왕상3:4; 대하1:6), 넷째는 일천 번제는 일종의 감사 번제이며, 다섯째는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다음에 그 결과(열매)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의 선물(은사를)을 받았다(왕상3:5-12).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왕상3:4)
여기 ‘왕’은 솔로몬을 말하며, ‘산당’은 성전이 없던 시대를 말하며, ‘기브온 산당’은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왕상3:1-2). 반면에 산당은 광야의 성막이나 가나안에 입성해서는 임시(일시)적인 성전과 같다. 보편적으로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천 번제를 드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 또한 오해이다. 그래서 초창기 산당은 부정적으로 보아서도 안 된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기 전에 감사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일회적으로 드렸다는 것이 가장 특징이다. 그래서 일천 번제는 솔로몬만이 짐승 1천 마리를 한꺼번에 드린 아주 독특한 제사이다. 이러한 특징을 무시하고 막무가내 식으로 일천 번제를 드리기 때문에 멀쩡한 성경적인 일천 번제가 진실과 오해라는 이상야릇한 논제가 되고 있다.
솔로몬이 드린 번제는 당시 가장 흔한 제사였다. 그런데 하루에 두 번 드리는 상번제도 아닌 일천 번제였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제사이다. 이것은 솔로몬에게서만 나온 발상(發想)이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발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일천 번제는 레위기 제사법에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독자적으로 고안하여 드렸기 때문이다. 물론 제사 방법은 짐승 1천 마리를 한꺼번에 드릴 수 없어서 상번제를 활용할 수는 있었겠지만 이것은 솔로몬의 소관이 아니라 제사장의 몫이었기 때문에 제사 방법에 대해서는 솔로몬하고는 무관하다. 물론 역대하 기자는 “놋단에 이르러 그 위에 일천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고 기술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천 번제는 배경, 방법, 의미 등 모든 것이 특별하고 특별한 번제인 것은 틀림없다.
5. 오늘날 교회가 하는 일천 번제의 문제점
솔로몬 왕이 드렸던 일천 번제는 이처럼 다섯 가지 큰 특징을 지닌 신앙적 요소이다. 특히 헌금에 관해 그리스도인들이 본 받아야할 신앙의 단면이기도 하다. 일천 번제는 구약시대뿐만 아니라 신약시대를 넘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도 비성경적인 헌물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초월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솔로몬처럼 일천 번제를 드려야 하는 신앙적 요소는 또한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솔로몬처럼 흉내된 일천 번제는 본 받아야할 신앙적인 요소나 헌물(헌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천 번제에 관한 두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일천 번제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오해한 나머지 솔로몬을 흉내 내며 드리고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일천 번제를 교회 헌금의 수익을 올리기 위한 수단으로 충분히 악용할 소지가 있다는 점이다.
본 논제는 제기된 두 가지 문제점을 중심으로 한편으로는 ‘진정한 일천 번제’를 제시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천 번제에 대한 오해’를 푸는 것이다. 이리하여 성경적으로 진정한 일천 번제를 오늘날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논제가 일천 번제를 거부하거나 부정한 것으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6. 일천 번제의 진실과 오해
일천 번제의 특징에서 살펴보았듯이 일천 번제는 전무후무하게 솔로몬 왕만이 유일하게 일회적으로 드린 제사로서 제물이 무려 천마리였다. 솔로몬 왕 이후에 이스라엘과 유다의 수많은 왕과 선지자들이 등장했지만 이들 중에 그 누구도 일천 번제를 드린 왕이나 선지자가 없으며, 강요는 물론이거니와 권면한 사실도 없다. 구약의 왕정 시대와 선지자들의 시대를 넘어 신약의 사도들에게도 해당된다.
신약에서 그나마 헌금에 대해 여러 번 언급했던 사도 바울마저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롬16:25-26)이나 자신에게 보낸 준 빌립보 교회의 선교헌금(빌4:16), 갈라디아 교회와 고린도 교회가 복음을 위해 보내준 헌금(고전16:1), 특히 헌금을 할 때는 인색하지 말고 풍성하며 너그럽게 후한 헌금(고후8:2, 9:11-13)할 것을 권면한 바 있지만 일천 번제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심지어는 예수님도 몇 번의 헌금(연보)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일천 번제는 언급하지 않으셨다(막12:41, 43; 눅21:1, 4; 요8:20). 이러한 사례들은 일천 번제는 솔로몬의 개인적인 헌물이며, 일회적인 헌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솔로몬 왕은 하나님이 요구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일천 번제를 드렸을까? 솔로몬 왕이 일천 번제를 드리게 된 배경, 그 의미와 방법 등을 알게 되면 일천 번제의 진실을 알게 될 것이며, 반면에 일천 번제에 대한 오해 역시 풀릴 것이다.
솔로몬은 다윗 왕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아 낳은 아들이다. 다윗왕은 여러 명의 왕비와 후궁이 있었지만 특별히 밧세바를 가장 사랑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밧세바의 큰 아들격인 솔로몬은 다윗에게 아주 특별한 총애를 받으며 성장했다. 이러한 다윗의 총애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이복형인 아도니야에게 왕권을 빼앗길 뻔 했다가 어머니 밧세바의 강청으로 솔로몬은 드디어 이스라엘 3대 왕이 되었다(왕상 1장).
이런 정치적 배경(상황)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솔로몬 왕은 왕위에 즉위하고(왕상 1장) 내각(왕상 4장)도 구성하기 전에, 성전을 건축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 누구도 구상(構想)은 물론이거니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천 번제를 스스로 드리게 됨으로 소위 일천 번제는 신앙적 요소로 등장하게 된다(왕상3:4).
솔로몬 왕이 일천 번제를 드리게 되는 배경과 그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솔로몬 왕이 평범한 상황에서 일천 번제를 드린 것이 아니라 특별한 상황에서 감격과 감사의 표현으로 일천 번제를 드린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교회 건축을 위해서나 자녀의 입학과 같은 축하할 일이나 개인적인 사업 곧 물질의 복을 받기 위해 마치 소원예물처럼 드린 일천 번제와는 사뭇 다르다.
솔로몬 왕이 드린 일천 번제의 배경은 이처럼 소원 예물처럼 드린 것이 아니라 이미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격하여 드렸던 것이다. 솔로몬이 소원 예물이나 서원예물처럼 일천 번제를 드린 첫 번째 사람(왕)이 된 것이 아니라 왕이 되어 일천 번제를 드린 것이다. 이것이 특별한 상황이며, 감격과 감사의 배경을 전제로 하고 있다. 반면에 오늘날 교회에서 성도들이 드린 일천 번제의 배경은 서원(書院)도 아닌 소원(所願)예물처럼 드린 경우가 다반사다. 반면에 솔로몬 왕이 드린 일천 번제의 의미는 현재 느끼고 있는 감사에 초점이 맞추어 있다면 오늘날 교회에서 성도들이 드린 일천 번제의 의미는 미래에 불확실한 복, 즉 세상적이며 물질의 복에 초점이 맞추어 있기 때문에 양자의 일천 번제를 드린 배경이나 의미는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확실하게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서 성도들이 드린 일천 번제는 솔로몬이 드린 것과는 완전히 다른 흉내 내는 일천 번제와 다를 바 없다. 이것이 일천 번제의 대한 첫 번째 진실과 오해이다.
번제는 제물을 태워 화제로 드리는 제사법이다(레 1장). 그래서 솔로몬 왕이 드린 일천 번제는 불로 태워 소멸(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됨)된 것이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드린 일천 번제(교회 건축을 위해 아예 작정하여 드림)는 교회의 재정의 수익을 위해 저축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이 역시 양자는 서로 다르다. 엄밀한 의미에서 번제는 제사의 형태이지 헌금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일천 번제의 대한 두 번째 진실과 오해이다.
일천 번제의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아무래도 일천 번제를 드린 방법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솔로몬이 드린 일천 번제의 핵심은 일자나 회수(1000일)가 아니라 단번에 드린 숫자(1000마리)에 있다. 솔로몬 왕이 일천 번제물을 일천일 동안 매일 한 마리 혹은 상번제로 조석으로 한 마리씩 오백일 동안 드린 것이 아니라 일천 번제물인 짐승 천 마리를 한꺼번에 드렸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성도들이 드린 일천 번제는 숫자에 알파까지 더해져 드리는 실정이다. 여기 알파는 새벽 예배와 수요일 예배 때는 하루에 두 번 드린 것을 말하며, 주일에는 세 번 드릴 수 있다. 그러면 일자는 천일이 안 된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들의 일천 번제는 솔로몬의 숫자와도 다르다.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왕상3:4, 개역개정)
“당시에 가장 유명한 산당은 기브온에 있었으므로 솔로몬왕은 기브온으로 가서 1,000마리의 짐승을 잡아 번제를 드렸다” (왕상3:4, 현대인의 성경)
“솔로몬은 거기 주님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제단으로 올라가, 번제물 천 마리를 바쳤다” (왕상3:4, 표준새번역)
솔로몬 왕은 단번에 1천 마리의 번제물을 드렸다. 솔로몬 왕이 드린 제물은 단회적인 일천 번제라면 성도들은 일천 번제를 일천 번 나누어 드리는 분납 형태를 띠고 있는 일천 번제이다. 필자는 이것을 일명 ‘분납 일천 번제’라고 하고 싶다. 성도들은 하루에 단번에 드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자도 계산할 수 없어 제각각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 성도들이 드린 일천 번제는 솔로몬 왕이 드린 일천 번제라기보다는 ‘분납 형태의 일천 번제’라고 하는 것이 더 성경적인 표현이며 신학적인 견해일 것이다. 이것이 일천 번제의 대한 세 번째 진실과 오해이지만, 특히 일천 번제의 대한 가장 큰 오점이기도 하다.
솔로몬 왕은 스스로 자원하여 드린 일천 번제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성도들이 드린 일천 번제는 노골적인 강제성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반강제성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목회자가 설교하면서 솔로몬 왕이 드린 일천 번제의 대한 진실성은 별로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을 가지고 마치 진실인 것처럼 호도(糊塗)하여 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면에는 교회 헌금의 수익을 올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강제성을 띠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교회의 공적인 광고 시간에 교회건축 등 목적을 두고 일천 번제를 요구한 것 역시 강제성이나 다름없다. 자녀를 위한 일천 번제를 권면하는 것도 헌금을 유도하기 위한 강제성이 다분하다. 이것은 일천 번제의 대한 네 번째 진실과 오해이다.
이처럼 일천 번제의 진실은 누군가에 의해 오해를 받게 되어 지금의 현상까지 오게 되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일천 번제의 성격이다. 일천 번제의 성격을 알게 되면 일천 번제의 진실성은 더 드러날 것이다.
7. 일천 번제의 성격
지금까지 살펴 본 것을 종합해 볼 때 일천 번제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1)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릴 때는 사울(1대)과 다윗(2대)에 이어 이스라엘 3대 왕으로 즉위는 하였지만 성전 건축은 물론이거니와 내각도 구성하기 전이다. 솔로몬이 이복형에게 왕권을 빼앗길 뻔한 정치적 상황에서 극적으로 왕권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일천 번제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대한 보답을 아주 특별하고 특별하게 드린 것이 일천 번제의 첫 번째 성격이다.
(2)번제는 헌금의 유형이 아니라 제사의 유형이다(레 1장)이다. 번제란 “히브리어로 ‘전부’와 ‘태움’의 합성어로서 희생제물로서의 동물을 제단 위에서 제단의 거룩한 불로 태워, 희생제물 전부가 연기로서 하늘에 올라감으로써, 예배자의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짐을 상징하는 제사방법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번제는 실상은 헌금이 아니라 제사(예배)라는 것이 일천 번제의 두 번째 성격이다.
(3)일천 번제의 형식은 분납이 아니라 한꺼번에 일시불로 드리는 것이 일천 번제의 세 번째 성격이다. 만 원권을 일천 번제로 드린다면 천만 원을 일시불로 드리는 것이며, 오만 권을 드린다면 오천만원을 일시불로 드리는 것이며, 금 한 돈을 일천 번제로 드린다면 금 천돈 값을 환산하여 일시불로 드리면 신약 시대 곧 오늘날 교회 시대에 걸 맞는 일천 번제 헌금이 된다. 일천 번제의 성격은 분납이 아니라 일시불로 드리는 것이다.
(4)일천 번제는 헌금의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이 일천 번제의 네 번째 성격이다. 구약의 그림자적인 제사는 소멸되어 신약의 교회시대 와서는 그 의미가 희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일천 번제가 헌금의 유형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신앙적 관점에서 감사는 헌금적인 요소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5)현대 교회시대에도 일천 번제를 드릴 수 있는 상황이 일천 번제의 다섯 번째 성격이다. 솔로몬 왕의 당시 정치적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여(중국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어 정치인은 종교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어서 적절한 사례를 찾기 어려워 한국의 정치적 상황으로 설명함)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대조해 볼 때 일천 번제를 드릴 수 있는 상황(배경)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한국에는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왕(대통령)이 된 사람이 여러 명이 있다. 이승만, 김영삼, 이명박 대통령은 장로들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천주교식 일천 번제를 고려해 볼 수 있다.
이분들은 솔로몬 왕처럼 일천 번제를 충분히 드리고도 남음이 있다. 이분들은 솔로몬의 정치적 상황(아버지 다윗의 결심으로 결정)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국민들이 표로 결정)에서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각자의 신앙에 따라 일천 번제가 아닌 이천 번제, 삼천 번제를 드려도 된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분들이 일천 번제를 드리지 못했거나 안 드렸다면 당시 출석한 교회(천주교 포함)가 일천 번제에 대해 제대로 안 가르쳤든지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런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 누구도 이천 번제는 고사하고 일천 번제를 드렸다는 신앙고백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분들 중에는 표를 얻기 위해 자기 신앙을 알리는 간증 집회는 했어도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 일천 번제는 드리지 않았다. 이것은 이분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누차 밝히고 있듯이 한국교회가 일천 번제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 탓이지 이분들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
(6)오늘날 일천 번제는 대통령에게만 적용할 요소만이 아니라는 것이 일천 번제의 여섯 번째 성격이다. 국무총리나 장관(급)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천 번제를 드릴만 하다. 나아가 일천 번제는 반드시 정치적 상황에만 적용할 것도 아니다. 주식회사 오너(owner)가 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회사의 대표, 특히 회장(사장)급이 되면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릴 상황(사항)이 된다.
더 나아가 테너 조수미 집사는 세계음악콩크르대회에서 대상을 탔다. 이정도면 솔로몬과 같은 일천번제를 하나님께 드리고 남음이 있다. 일천 번제물은 자기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일천 번제는 상금(賞金)의 십일조가 아니다. 늘 이야기 했듯이 일천 번제는 특별하고 특별한 감사예물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기 생애 최고의 영예(榮譽)가 있을 때 얼마든지 일천 번제를 드릴 수 있다. 특히 서원이나 소원예물은 열매를 얻기 전에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지만, 일천번제는 자기도 모르게 이미 열매를 얻은 다음에 감사의 표현으로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신약 시대를 넘어 오늘날에도 드릴 수 있다.
8. 마치면서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일천 번제는 진실과 오해 두 가지가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일천 번제는 솔로몬 왕이 유일하게 단 한 번만 드린 헌금(헌물)으로 치부해 버릴 수 없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린 감사의 헌물(獻物)이다. 더욱이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하기 전에 일천 번제를 기꺼이 드렸지만 성전 건축을 위한 목적 있는 헌물도 아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먼저 강요나 주위 참모들이 권면해서 드린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한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너그러운 마음을 담아 감사 제물로 스스로 자원하여 풍성하게 드렸다. 마치 신약 시대에 와서 바울이 말하는 가장 아름답고 모범적인 헌금처럼 헌물 곧 번제물을 드렸다(고후8:2, 9:11-13). 어쩌면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성경적인 헌금관은 솔로몬 왕이 드린 일천 번제까지 포함한 헌금관 일지 모른다. 바울은 율법에 대해 흠이 없을 정도로 구약 성경을 너무나 잘 아는 박사이기에 이런 다양성을 헌금관에 포함하고 있다.
그동안 솔로몬이 드린 일천 번제의 진실은 강단에서도차 가려진채, 오해가 난무한 가운데 드려지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도 그런 방식으로 드려질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일천 번제는 단번에 드린 일천 번제가 아닌 분납(기약 없는 일자) 형식(1회가 아닌 미지수)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의 일천 번제가 목적이 있는 일천 번제로, 자원해서 드려야 할 일천 번제는 반강제성을 띤 일천 번제로 변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신앙의 척도처럼 여겨져 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러한 현상이야 말로 일천 번제의 헌물에 대한 가장 큰 오해이다.
일천 번제는 솔로몬 왕이 유일하게 단 한 번만 드린 헌물이다. 그렇다고 일천 번제는 솔로몬 왕만이 드릴 수 있는 ‘고유헌물’ 곧 ‘고유권한’이라는 이상한 등식이 나온 것은 크나큰 오해이다. 솔로몬왕은 성전 봉헌 때는 일천 번제보다 통이 크게 소가 2만 2천 마리, 양은 12만 마리를 헌물을 드렸다(대하7:5). 이것은 솔로몬의 신앙의 발로에서 나온 것으로서 자신의 왕위나 왕궁보다 하나님의 성전 건축에 더 비중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훨씬 중요시 했다는 것이 헌물에서도 나타난다.
성경에 여러 번 나오면 객관적인 헌금이며, 한 번 나오면 주관적인 헌금이기 때문에 보편화 할 수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성경에 단 한 번만 나온 일천 번제라도 보편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천 번제의 성격 곧 그 진실을 알면 시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천 번제는 구약의 헌금이기 때문에 신약에서는 무용이 된다면 십일조헌금도 구약의 헌금이기 때문에 신약의 헌금으로는 부적절하다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초대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하며 교회시대가 도래했음에는 불구하고 사도행전 이후에는 단 한 번도 언급된 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일천 번제는 특별하고 특별한 헌물(헌금)이기 때문에 오늘날 현대교회처럼 남발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일천 번제의 진실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이다.
또한 그럴 것이 이런 상황에서 일천 번제를 구상했다는 것은 솔로몬 왕의 머리가 아닌 그의 지혜에서 나온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일천 번제를 받으신 하나님은 매우 흡족해 하시고 솔로몬 왕에게 한 가지 간청할 것을 요구하셨다. 이때 솔로몬 왕이 지혜를 구함으로서 당시 세상에서 전무후무한 최고의 지혜자가 되었지만, 실상은 일천 번제를 구상하여 드린 것이나 세상에 그 좋고 많은 것 중에 지혜를 구했다는 것만으로도 솔로몬 왕에게는 이미 지혜성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지혜 없는 솔로몬 왕에게 지혜를 준 것이 아니라 지혜 위에 지혜를 더 충만케 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없는 상태에서 복으로 주시기도 하시지만 이처럼 더하는 복도 주신다. 실상은 솔로몬 왕에게 주신 지혜는 복이 아니라 은사이다. 어떻든 간에 솔로몬 왕이 받은 지혜는 일천 번제를 드린 후에 얻은 결과요 열매이다.
일천 번제 헌금은 구약시대에 유일하게 솔로몬만이 드렸다고 해서 오늘날 교회에 적용할 수 없는 비성경적인 헌금으로서 부적절하거나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 오히려 비성경적이다. 그러나 누차 이야기 했듯이 일천 번제 감사헌금은 일반 감사헌금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에 혼동해서는 안 되며, 또한 십일조하고도 다르다. 이뿐이 아니다. 자녀의 입학이나 졸업을 축하기 위한 일천 번제는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일천 번제의 성격과 다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감사할 조건을 일천 번제로 남발해서도 안 된다다는 것이며, 더욱이 열악한 교회 재정이나 거대한 교회 건축으로 인한 과다한 지출을 보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천 번제를 강요한 것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변질된 일천 번제이기 때문에 진정한 일천 번제의 성격이 아니다.
구약의 일천 번제는 짐승을 한꺼번에 드린 것이어서 실상은 무게 있는 헌물이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일천 번제도 그런 헌금이 되어야 한다. 백만 원이나 오백 만원을 천 번으로 분할하여 드리는 것은 일천 번제의 성격하고는 맞지 않다. 실상은 한꺼번에 드려도 무게 때문에 일천 번제라고 할 수 없다. 물론 돈의 액수가 일천 번제의 기준이나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드린 것은 일천 번제보다 귀중하며 더 많은 헌금이다. 그것은 자기 재산 전부를 드렸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것처럼 일천 번제는 일천 번제의 성격을 제대로 알아야 성경적인 일천 번제를 제대로 할 수 있다.
여기서 간과에서는 안 되는 것은 솔로몬 왕이 드린 일천 번제는 허사(虚事)가 아니었기 때문에 신구약 모든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헌물(헌금)이다. 일천 번제는 구약성경에 나오니 구약적인 헌금은 될 수 있지만, 신약적인 헌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기 억측에 불과한 논리이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림자적인 제사로 번제물 곧 태워 사라질 헌물(동물 제사가 가능)을 드렸지만,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도래하여 십자가에서 보혈의 피를 흘려 죄사함이 온전히 이루어 졌기 때문에 사라져 없어질 그림자적인 제물은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신약은 사라질 제물 대신에 자기 아마에 땀을 흘리며 버는 돈, 즉 사라지지 않은 돈으로 헌금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일천 번제는 현금으로도 가능하다.
제물은 드리는 것이며 헌금은 하는 것이다. 제물은 자기 대신에 드리는 것이지만 헌금은 자기가 직접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사나 제물은 드리는 것이라면 예배나 헌금은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요4장). (참고로 한국어는 존칭어 때문에 예배나 헌금을 드린다고 표현하지만 실상은 하는 것이 맞다) 이처럼 드리는 것과 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초대교회시대 이후로는 대신드리는 예배나 헌금이 아닌 ‘직접하는 것’이다.
일천 번제의 가장 큰 의미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서의 특별하고 특별한 감사헌금이다. 일천 번제의 진실은 알리고, 반면에 오해가 제거된다면 일천 번제는 구약 시대나 솔로몬 개인에게만 특별히 적용할 헌금이 아니라 신약 시대 곧 오늘날 교회시대에서도 보편화 할 수 있는 성경적인 헌금이다. 그래서 일천 번제 헌금을 남발하는 것도 문제지만 적용하지 않는 것도 동시에 문제가 된다.
중국교회는 일천 번제의 헌금이 아직 보편화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성도 중에 누군가가 일천 번제에 관한 질문을 한다면, 본 특강은 성경적으로 답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아울러 중국에도 지식인, 경제인 중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에 그들이 성경적인 일천 번제를 할 수 있도록 가르치며 지도하는데 좋은 가이드 역할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특강을 경청해 준 제자 여러분에게 감사하며, 다음은 학생들의 질문에 답을 하고 모든 강의를 마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