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학

[스크랩]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수호천사1 2017. 3. 26. 08:35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3:24; 1:21; 10:45)

 

 

인류의 조상인 아담부부의 범죄로 말미암아 초래된 인간의 전인적인 타락과 부패와 무능은 자력구원의 길이 근원적으로 차단돼 버린 나머지(3:10-12, 23, 5:12), 외부의 절대타자(하나님)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는 구원이 사실상 불가능하다(3:21). 이런 사실은 하나님 편에서 베푸시는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구속의 은혜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와 교제를 회복시킬 수 있는 재창조의 유일한 방식임을 확인하게 된다(3:21-22). 구속의 은혜의 성격은 보편적이지 않다. 차별적이다. 우리는 이런 차별적 구속의 은혜를 일컬어 창세전 하나님의 선택예정이라 부른다(1:4-5).

 

여기서 은혜로 말미암는 창세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예정)사상은 성격상 구원 자체라기보다 구원의 근거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 구원은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반면 창세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이란 창세후에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의지적 표명이며 동시에 저들의 구원을 위한 전제조건의 성격을 띤다. 따라서 창세전 하나님의 선택은 피조세계에서의 구원을 위한 사전조치일 뿐 아니라, 구원의 정체성이 일차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에 속죄교리의 필연성을 제시한다. 이는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방식으로 제시된 하나님의 구속의 도리를 가리킨다(3:15; 3:21-22).

 

이때 주권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 특정인들에게만 차별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이 속죄교리를 제시하면서 특별히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라고 표현한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이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사상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모든 사람들 중 일부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속죄교리는 누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담당 하셨느냐의 문제와 직결된다. 속죄의 대상이 인류 전체인가 아니면 일부인가의 문제와 연관된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상과 관련해 알미니안파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보편적 속죄교리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인간 편에서 원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인간 타락의 정체성을 전적타락이 아니라 부분적 타락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반면 칼빈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을 일축한다. 만일 주님께서 전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으셨다면 모두가 구원의 은혜를 받아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구원의 복음이 증거 될 때 크게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한 부류는 믿음으로 반응하는데 비해 다른 한편은 복음을 거부함으로 정죄에 빠진다는 사실이다(16:15-16). 이런 결과를 볼 때, 비록 예수님의 구속의 공효는 본질상 온 인류의 죄를 구속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그것이 적용되는 범위는 제한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이 소위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제한속죄의 실상이다. 역사적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구속사역과 관련해 제한속죄 교리를 성경의 바른 증언으로 신앙고백 해왔다(1:21, 6:37).

 

제한속죄 교리는 알미니안 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보편적 속죄교리의 반동으로 나왔다. 그럼에도 그 근거는 철저히 성경의 증언에 기초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제한속죄 교리는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해주신 선택(예정)교리와 스토리의 전개상 결코 무관하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는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이다(13:48, 18:10). 그런 의미에서 제한속죄 교리는 선택(예정)교리의 연속선상에서 해명되어야 한다.

 

1. 속죄의 필요성

 

하나님의 선택은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들 중 일부에게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구속의 은혜를 동반한다. 이는 하나님의 창세전 선택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속죄의 범주에서도 제외될 수밖에 없음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죄는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해 시행되는 연속적인 구원사역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 택정(예정) - () 구속의 맥락에서 진행된다.

 

그렇다면 왜 속죄(atonement)가 필요한 것일까. 속죄의 사전적 의미는 금품이나 공로로 지은 죄를 씻음 받는 것이라고 기술한다. 다분히 현실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인류의 죄를 사면(赦免)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일컫는다. 인간은 아담의 원죄사상에 기인한 죄성의 유입으로 본성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해서 자력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전무하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이다(3:23; 5:12).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은혜로 베푸시는 구속의 도리만이 사죄의 유일한 방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문제해결이 선행돼야 한다. 이상의 논증을 통해 창세전 선택사상은 필연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속죄의 문제를 제기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1:4; 딤후 1:9)란 전제가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준다. 본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 사상을 내포한다. 즉 구속 곧 죄사함을 통한 구원의 문제와 하나님의 선택사상은 상호 밀접하게 의존돼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택은 구속을 요구하고, 구속은 선택에 종속된다. 칼빈주의 5대 교리에서 두 번째 주제인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교리 후에 세 번째 주제인 속죄(limited atonement)교리가 뒤따르는 당위성이 이런 논리의 귀결이다. 결국 성부 하나님의 선택사상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속죄)사역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실현된다는 관점이다.

 

2. 속죄의 성격과 방식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의 죄를 속죄 받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통해 속죄의 성격이 요구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타락한 존재로서 자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전무함을 이미 살펴봤다. 이는 어떤 형태의 인위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죄를 탕감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있지 않음을 시사한다. 이런 사실 때문에 절대 타자(하나님)에 의해서 선택이 가능했듯이 동일한 원리로 절대자(하나님)로 말미암지 않고는 인간의 속죄를 실현시키기 위한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다. 이런 상황을 신학적으로 대속’(代贖)이라고 일컫는다. 말 그대로 절대 타자(하나님)가 죄의 값을 대신 지불해 주는 방식으로 인간의 속죄는 비로소 실현 가능성의 길이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전적타락으로 인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비참한 존재다. 영적 파산자다. 영원히 죄인으로 정죄 될 뿐이다.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자력구원은 요원하다. 아니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사실로 인해 인간의 죄를 사면하시는 방식은 절대 타자(하나님)에 의한 대속의 원리가 요구된다. 그런 의미에서 절대타자는 죄와 허물과 불의와는 근본적으로 무관한 자이다. 여기서 속죄의 성격 또한 대속적일 수밖에 없는 당위성이 대두된다.

 

이런 식으로 범죄 한 인간의 속죄는 절대 타자가 자신의 몸을 대속물(ransom)로 드리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죄 값은 사망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6:23). 그런 의미에서 어린양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구약의 속죄제사는 대속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10:45)의 구속사역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계시사건이다(1-7; 9:13). 이는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9:22; 17:11)는 하나님의 속죄의 원리의 구체적 적용이다. 그렇다면 누가 구약제사의 실체(9:14)로서 절대타자의 필요충분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3. 절대 타자이신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의 죄 값을 속량(보상, atonement)하기 위해 오신 대속물로 기술한다(10:15). 이는 인류의 죄를 대속적으로 담당하기 위해 한 마리 어린양의 모습으로 오신 분임을 의미한다(1:29, 53:5-6).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이야말로 인류의 구속을 위한 절대 타자의 당사자로 오신 분임을 가리킨다.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 오신 분이다(3:15). 이런 사실로 인해 예수님의 정체성은 절대타자로서 하나님의 본체가 되시는 분임을 시사한다(2:5).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시다(1:14, 18). 비록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incarnation)하셨지만 그 분의 본체는 하나님과 동등 된 분으로 죄가 없으시고(4:15), 죄를 모르시며(고후 5:21), 죄를 짓지도 않으신 분(벧전 2:22)이라고 성경은 증언한다. 이처럼 예수님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임마누엘의 성취자이시다(1:21-23). 이를 신학적으로 신인(神人/ God-Man/theanthropism)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요,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을 또한 알고 믿게 된다고 성경은 증언한다(14:9).

 

성경은 예수님의 인격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 분의 출생이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기술한다(1:26-35). 하나님의 신묘막측 하신 구속의 경륜 속에서 세상 가운데 성육신 하신 분이라는 의미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의 전() 생애가 창세전 삼위하나님께서 수립하신 구원협약을 신실히 성취하시는데 집중될 것을 예고해 준다(17:4). 실제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으며,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귀신을 쫓아내셨을 뿐 아니라 죄를 친히 사해주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와 자신이 메시아로서의 왕적 권세를 발휘하고 계심을 친히 보여 주셨다(2:1-12).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그 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절정에 이른다. 이 사실에 근거해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성경은 선언한다(8:1).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범죄를 위한 대속적인 죽음이었으며, 그 분의 부활은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우리 또한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동인으로 작용한다(4:25). 이런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한 죽음인 사실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죄 없다고 선언하시고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3:24). 그 결과 주님을 왕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편입된다. 성경은 이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인은 성도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따라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담긴 구속의 의미와 부활사건을 증거하는 것이다(고전 15:1-4). 예수님은 누구시며(인격)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사역)이 나/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본의를 깨닫고 이를 전인적인 믿음으로 수납하는 자들을 값없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를 증거하는 것이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받을 만한 이름을 주시지 않았다’(4:12)고 선언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신인(神人)의 신분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구속하실 수 있는 대속물로서의 필요충분 요건을 구비하신 유일한 분이다(10:45).

 

4. 속죄의 효력과 적용의 범위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을 위한 속죄사역을 베푸셨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과연 누구를 위한 속죄사역이란 말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누구를 위해 대속적으로 자신의 몸을 속전(ransom)으로 내어주셨단 말인가. 이 주제에 대해 알미니안주의 자들은 보편속죄(universal atonement)를 주장한다. 이는 모든 인류를 위한 속죄를 전제로 하며 따라서 자신이 믿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다. 반면에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을 견지해 오는 칼빈주의 자들은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를 성경적인 바른 교리로 수납해 왔다(1:21). 이는 속죄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가 창세전 택자들에게만 유효하게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볼 때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택은 모든 일을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전체 중 일부에게만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6:37, 65).

 

물론 속죄의 효력이나 능력의 측면에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는 염소나 송아지의 희생과 같은 저급한 피조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짐승들은 가치 면에서 피조물의 영장인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기에 효력 또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2:20). 따라서 매년 같은 제사를 반복적으로 드리는 것을 통해서 한시적으로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영속적이지는 못했다. 게다가 완전하지도 않았다. 성경은 이런 경우를 실체를 지향하는 모형론적 계시의 관점으로 설명한다. 더 나은 제사, 더 나은 제물로서 어린양의 실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속죄와 관련해 모형과 실체의 관계를 이렇게 해명한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9:13-14).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이신 바 그 가치의 우월성과 속성상 단번에 드리심으로 영원히 온전한 제사를 드린 셈이라고 설명한다(10:12-14).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추가적으로나 반복적으로 더 이상의 죄를 위한 다른 속죄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영단번/once for all).

 

이상의 논증은 () 단번’(once for all)으로 드려진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효력이 전 인류의 죄를 일시에 담당하시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무한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본체로서 예수님의 무한하신 가치와 능력이 온 인류의 죄를 구속하시기에 필요충분하다는 관점이다.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19:30)는 십자가상의 주님의 마지막 선언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켜 드리셨다는 구속의 절정을 의미한다. 비록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시기 위해 잠시 죽음에 처해지지만,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린 후에 받으실 부활의 영광을 내다보시고 말씀하신 언약적 발언이기도 하다(12:2). 이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 안에서 죄인 된 인류는 당당히 구원에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새롭고 산영생에로의 길이 열려진 셈이다(10:20). 온 인류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영원히 도말되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가 멀리 옮겨졌다(103:12). 하나님의 본체로서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성과 무한한 능력이 이를 가능케 했다.

 

예수님의 속죄사역과 관련해 속죄의 적용과 범위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속죄의 대상에 관한 문제제기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그토록 두렵고 고통스런 십자가의 죽음을 담당해야만 했는가의 문제다. 성경은 이 문제와 관련해 결코 전 인류의 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증언한다(1:21, 19:10, 10:45). 물론 속죄의 공효는 온 인류의 죄를 속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나님께서 만일 원하셨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의 능력이 온 인류를 구원하기에 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속죄의 적용이란 측면에서 볼 때 결코 전 인류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일정한 범주 내에 들어온 자들에 한해서만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효력은 유효하게 미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정체가 누구란 말인가. 바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1:4).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성경은 이 외에도 다양한 내용을 통해 제한속죄의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마태복음 1:21이다. 본문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을 천사의 고지(告知)를 통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 하니라고 기술한다. 예수님의 출생은 그 분의 인격과 사역의 특성상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기에 나시기 전에 이미 이름이 알려졌다. 본문을 통해 예수라는 이름에 함의된 그 분의 구속사적 사역의 성격을 확인하게 된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일에 집중된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신 분이다. 인류의 죄를 대속적으로 담당하시기 위해 구약제사의 제물인 어린양의 실체로 오신 분이다(1:29). 마태는 상기 본문을 통해 인류의 죄가 아니라 자기 백성들의 죄만을 담당하시기 위해 예수의 이름으로 오신 분임을 제한적으로 지적한다. 자기 백성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온 인류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의 백성 곧 예수님께 속한 자들을 제한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이다. 세상에 피조 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유독 예수님께 속한 당신의 특별한 백성들이 따로 있다는 지적이다(6:37, 65).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의 구속을 위해 오셨다는 의미가 성립된다. 이들 하나님의 택자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대속물로 오셨다는 설명이다. ‘인류의 대속물이 아닌 많은’(자기백성) 사람들의 대속물로 오신 것이다(10:45).

 

누가복음 19:10에서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 이유를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라고 제한적으로 기술한다. 본문의 말씀은 세리장 삭개오를 구원에로 부르신 후에 직접 하신 의미심장한 말씀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자는 누구일까. 온 세상 만민을 가리킬까. 결코 그렇지 않다. 세상 만민 중에 일부를 가리킨다. 요한복음 6:37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가 아니면 예수님께 나올 수 없음을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해 기록한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란 제한적인 의미로 당신의 백성 곧 세상 가운데 하나님께 속한 특별한 백성이 따로 존재하고 있음을 차별적으로 언급한다. 그들만이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분 앞으로 나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양과 목자의 비유가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거하기 위해 제시되고 있다(10:1-6). 양무리 모두가 예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일부만이 나온다.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일단의 양무리가 따로 있다는 얘기다(8:47). 요한복음 5:40은 예수님께 나오기를 원치 않는 일단의 무리 또한 있음을 기술하고 있다. 이들은 본질상 처음부터 주님의 양무리가 아닌 연고다(10:26). 사도 요한은 이들의 정체성을 마귀에게 속한 자로 정죄한다(8:44). 결국 사도 요한은 인류의 정체성과 소속을 말씀의 반응여부에 따라 하나님께 속한 자와 마귀에게 속한 자로 이분화 시켜 기술하고 있는 셈이다(10:26-27).

마가의 경우도 요한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마가복음 16:15-16에서 마가는 복음증거와 이에 따른 결과를 기술하면서 복음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있음을 동일하게 지적한다. 동시에 한 자리에서 같은 복음의 내용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받는 자와 거부하는 자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고 기술한다. 이런 일련의 사실들을 통해 십자가의 복음이 현장에서 제한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는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공효가 그들 중 일부에게만 선별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주신 자들을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구원에로 이끄신다(6:39). 본문에서 내게 주신 자가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의 속죄사역이 결국 잃어버린 자들에게 제한적으로 적용될 것을 시사해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효력은 무한함으로 온 인류의 죄를 속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럼에도 속죄사역의 적용의 범위와 대상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택자(擇者)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될 것임을 분명히 증거한다(1:4, 딤후 1:9). 이런 사실은 사도행전을 통해서도 재차 확인된다.

 

사도행전 13:48에서 누가는 이방인들 중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만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되고 있는 사실을 바울의 전도내용을 통해 기록한다. 본문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이 따로 있음을 분명히 시사한다. 이들의 정체성이야말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과 사랑과 예정에 의해 미리 선택된 자들임에 틀림없다. ‘선택과 구원약속과 성취의 구조와 동일한 맥락에서 진행된다. 다시 말해 약속이 전제되지 않으면 성취가 있을 수 없듯이, 창세전 선택이 선행되기에 피조세계에서 구원의 역사가 가능하다는 논리다. 사도행전 18:10에서 바울은 고린도 시에서 복음을 전할 때 핍박으로 심히 두려워했으나 주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바울을 위로하시면서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는 말로 고린도 전도에 열심을 낼 것을 촉구하시는 내용을 읽게 된다. 여기서도 내 백성곧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따로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이상의 일련의 논증을 고려할 때,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따른 공효의 범주와 대상은 온 인류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제한속죄라는 신학적 명제가 이런 사실에 근거해 제기된다. 따라서 제한속죄란 주제는 성경의 여러 말씀을 종합해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규명해 본 결과로 얻어진 당연한 귀결이다. 단지 반대자의 주장을 애써 거부하고 성토하기 위해 취해진 억지춘향식의 무리한 사변적 이론체계가 결코 아니다.

 

복음의 내용과 관련된 성경의 일부 구절들을 통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고후 5:14),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고후 5:15),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3:16),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등의 내용은 본문만을 파편적으로 상고할 때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 죽으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부분적으로 본 절에만 제한시켜 지엽적으로만 해석한다면 얼마든지 보편속죄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의 특정 본문이나 사건을 해석할 때 잊지 말아야 될 전제는 항상 주어진 본문을 문맥과, 본문을 포함한 그 장 전체와, 나아가 성경의 총체적 계시관 곧 구속사적 경륜에 입각해 해석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마치 분수식에 대입하는 형식으로 말이다. 그렇지 못할 때 마치 소경이 코끼리를 만지는 식으로 부분을 전체로 확대해석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할 수가 있다. 동일한 원리 속에서 비록 예수님의 죽으심이 모든 인류를 대신해 죽으신 대속적 죽음이라고 언급한 부분이 있을지라도, 보다 확실하고 분명한 다른 본문과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관점을 통해 총체적이고 통시적인 시각으로 본문이 말하는 의도를 명확히 해명해야 할 것이다.

 

본 주제를 정리하면서 하나님의 선택이 제한적이고 차별적이라면 택자들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속죄사역 또한 제한적이고 차별적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음이 당연한 논리의 귀결이다.

 

사실 예수님의 속죄의 공효는 능력 면에서 온 인류의 죄를 구속하고도 남음이 있다.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2:6; 9:14). 그러나 적용의 대상과 범위라는 측면에서 볼 때, 결코 온 인류를 포함하고 있지 않음을 간파하게 된다(1:21; 6:37; 13:48; 18:10).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셨다. 자기백성을 저희 죄로부터 구원할 자로 오셨다(1:21). 이는 대속적인 죽음의 방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죄로 인한 자기 백성들의 죽음을 대속적으로 담당하기 위해 구약의 속죄양의 실체로 오셨다(1:29).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공효가 미치는 대상을 볼 때, 당신의 잃어버린 백성들 곧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셔서 예수님께 주신 택자들에게만 선별적이고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본다. 성경은 결코 모든 사람이 최종적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증거하지 않는다(16:15-16; 살후 1:7-9). 많은 사람들이 사단에 매여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심판과 지옥의 형벌을 면치 못할 것임을 확실히 증거한다(25:41).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무수한 사람들이 무론대소하고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고 최종적으로 유황 불못에 처해지는 광경을 보게 된다(20:11-15). 이들은 결국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유기(reprobation)된 자들인 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가 이들에게 미치지 않음으로 자신들의 죄 값으로 심판과 영벌에 처해지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주님의 속죄의 공효는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제한적이며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영원무궁토록 송축해야 하는 당위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기독교 신앙의 알파요 오메가로 작용한다(1:6).

 

성도의 영적 정체성은 만민 중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예수님의 속죄의 공효를 덧입은 하나님의 친()백성 된 자들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에 연합돼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새 생명의 소유자들이다(고후 5:17). 새로운 신분의 소유자가 되었다(2:19; 3:20). 이 뿐만이 아니다. 보다 본질적으로 주님의 생명에 함께 지체로 연합돼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공동체로 존재하게 되었다(2:15). 교회는 다른 어떤 일컬음 보다 영광스런 표현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의 피로 친히 값 주고 사신 바 된 예수님의 생명공동체란 의미가 성립되기 때문이다(20:28). 이런 의미에서 교회를 가리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존재)방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에 연합돼 그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천상적 유기체의 특성을 갖는다(2:20). 이런 이유로 교회공동체는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조직체와는 본질에서 차별성을 띤다. 교회가 주님의 몸으로서 생명공동체의 유기체적 성격을 잃게 되면 교회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우리의 구원은 어디에서도 보장받을 수 없게 된다. 교회는 지상에서 성도의 구원을 보증해 주는 유일한 천상적 기관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하시고”(16:19). 본문을 통해 성경은 복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보증의 권한을 오직 교회(바른 교회 : 말씀의 순수한 전파/성례의 신실한 실행/권징의 엄격한 집행)에게만 위임해 주셨음을 천국 열쇠의 매고 푸는 기능이라는 비유적 설명을 통해 증거한다. 따라서 참된 복음과 바르게 해석된 지식의 체계를 통해 상호 지체의식을 가지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천상지향적인 가치관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야말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바르게 이루는 첩경으로 기능한다고 하겠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들을 찾기 위해 오셨고(19:10), 그들의 구속을 위해 당신의 몸을 내어 주셨다(1:21; 4:25). 따라서 성도들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의 최대의 수혜자다. 구원의 은혜를 감심으로 깨닫는 데서 비롯된 동기유발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의 동인으로 기능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4-15).

 

이런 마음가짐이 소위 무익한 종의 심정(17:10)으로 대변된다. 창세전 성부 하나님의 선택사상과 이의 구체적 실행으로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곧 죄사함의 은혜는 이 사실을 전인적인 믿음으로 수납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앙하고 믿음의 정절을 지켜 행할 신앙적 명제와 당위와 동인으로 기능한다(14:4-5).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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