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영광의 신학 VS 십자가의 신학
영광의 신학 VS 십자가의 신학
... 1518년 4월 5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독일 아우구스투스 수도회 참사회를 열어 그에게 경고하도록 했습니다.
루터는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40개 항목'으로 제시하면서 '십자가 신학'을 발표했습니다. ...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12:11). 이 구절은 '십자가 신학'의 핵심사상입니다. 구원은 십자가 뒤에 숨겨진 것입니다. 연단을 받을 때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처럼 지치고 힘이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요 5:17)
이 신학은 로마 가톨릭이 주장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알 수 있고 우리가 능동적으로 살면 번영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신학입니다. 요즘에 와서 많은 사람들이 '번영신학'을 좇습니다. 병이 낫고, 출세하고, 돈을 잘 벌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고 하는 신학입니다. 매우 위험한 신앙이며 로마 가톨릭주의에서 말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기도하고 나서 하나님과 전화 통화라도 한 듯이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영광의 신학을 따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중세 시대에 로마 가톨릭들이 십자군 운동을 일으키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deus vult)라고 했던 것과 흡사합니다. 당시에도 하나님의 뜻을 너무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예수를 믿으면 기쁘고 행복하고 복을 받고 병이 낫고 출세한다고 확신하는 영광의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신학은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는 인간의 결심에서 비롯된 통회가 아니라 믿음의 통회입니다. 회개는 죄를 통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도록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신학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늘 인내해야 하고 시편의 기자들처럼 날마다 고통스러울 거라 합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3) 라는 시인의 고백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번영신학이나 영광의 신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다고 강하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멋있어 보이고 카리스마가 있어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하는 것은 이단자들의 모습과 흡사합니다.